2012년 4월 19일 목요일
이 아침을 얹어
맹하린
“투둑 투둑.”
식물의 싹이 트이는 소리가 들린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귀에 대고 있는 무선전화기 속에서 투둑거림이 한동안 이어진다.
국제전화가 걸려오는 중일 때는 사람의 목소리 이전에 꼭 이와 같이 투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한다.
이럴 때 나는 누구일 것인가를 추측해 보는 게 아니라, 그 누구인가의 목소리가 어서 트이기만을 기다린다.
“얘!”
“아, 너구나.”
친구 K.
아들과 딸은 영국의 왕립대학에 유학 보내고, 포항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그 친구의 남편은 어쩌다 서울에 상경하니까 공백의 시간을 그림과 외국어 익히는 데 바치면서 정원이 딸린 주택에서 아름다운 영화의 주인공처럼 잔걱정 없이 살아가는 친구와 전화를 통해서나마 오랜만의 회포를 나누고 다른 동창들의 근황까지 듣게 되었다.
몇 년 전 귀국했을 때, 내게 문운(文運)이 터지라며, 그리고 앞으로 글 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예뫼골, 양수리, 전주의 송학사와 덕진연못, 진주의 남강과 청학동까지 골고루 구경시켜 주면서 배려 가득한 우애를 아끼지 않고 발휘해 주던 친구였다.
나는 누구에게 신세 지는 게 싫어서 비행기 값 등등을 필히 각자 부담으로 해냈다.
안내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었다.
꽤 오랫동안 통화를 했기 때문인지 나중엔 목에 모래가 걸린 것처럼 깔깔해져서 아쉽게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종일토록 일하는 구메구메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이민 와서 애환을 같이 나누며 지내온 친구들을 산뜻하게 견주어 보게 되었다.
지금은 미국으로 재이민을 갔지만, 이곳에서 의류도매상을 경영할 때는 무척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까, 아이들의 교복단추가 떨어지면 자동차 안에서 꿰맸을 정도로 빈틈없는 시간들을 보냈다고 하는 지현엄마.
그녀 뿐 아니라, 내 주위의 그 누구도 한국의 친구들처럼 귀부인과 같은 품위와 겨를의 여유 속에서 지내는 사람은 없다,
기반을 잡았건 못 잡았건 아직껏 바쁜 틀 속에 살고 있고, 어쩌다 가게가 좀 뜸한 날은 그나마 바쁠 때가 차라리 아프지 않고 맘까지 편하더라고 일 자체를 필요충분조건처럼 말하는 형편을 즐기며 살게 되는 이민 살이라는 행동반경(行動半徑).
굳이 이민친구나 한국친구 그 어느 편이 더 행복할 것인가 하는 우매(愚昧)한 숙고(熟考)는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가 않다.
이민생활이라는 것은 어려운 난관을 여러 차례에 걸쳐 헤쳐 나가야 하는 장애물 경기와 같고, 확실히 이민 친구들에게서 더 진한, 미운 정 고운정이 들어버린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現想)으로 굳혀졌을 것이다.
개인주의에 익숙지 못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자나 깨나 가족과의 생활 이외에 특히 모임이나 신앙생활에 더욱 마음을 쏟고 있음을 자주 접하고 보게 된다.
타산지석(他山之石).
다른 산에서 나는 돌이라도 자신의 옥(玉)을 갈고 닦는 데에 유익하다는 이 말의 비유가 유난하고 절실하게 마음에 당기어지던 하루였다.
이민자의 틈바구니에서 모나지 않은 품성과 지(知)와 덕(德)을 쌓는 일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어 주는 여러 괜찮은 친구들.
만나고 싶은 친구는 여럿인데 서로의 시간이 너무 엇나가고 있다.
산책 삼아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은 날이다.
산책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일이 내게는 바로 휴식이 되는 것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밖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데도 소나기가 퍼붓는 느낌을 받을 때 많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있는 듯 한 포근함 또한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즈넉함으로도 유도(誘導)해 준다.
퇴근길의 투명한 어둠.
그 시간의 어스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빛깔을 지니고 있다.
푸르고 차갑다.
하늘이 어찌나 청명한지 마치 다른 세계에 닿은 느낌이기까지 하다.
차들이 미등(尾燈)을 켜고 서서히 달리는 모습도 정겹기만 하다.
친구와 친구 사이의 간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정석(定石)이다.
친구들은 항상 있을 곳에 있다.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통하는 장소.
표현 바로 그 속에 말이다.
가을은 하도 맑아서 작은 북에서나 울릴 듯한 둔중한 음(音)들이 길섶에서 살아 숨 쉬듯 둥둥둥 구른다.
나는 요즘, 기도 또한 소신껏 바치게 된다.
우정은 사랑 그 자체에서도 오는 것 못지않게 우정의 바깥에서도 오고 있음을 점차 깨닫고 또 깨닫는다.
엊그제, 아침을 온통 내게 바친다는 편지를 보내 온 그대.
그리고 좋은 글과 음악을 보내준 그대들에게도
청량한 이 아침을 얹어 시 한 편 바친다.
우리는 언제 만난 적이 있다
-고증식
(지난 밤 꿈을 깨어 이 글의 제목을 얻다)
바라만 보아도 따뜻해지는
사람이 있다
변함없는 사람이 있다
전자우편 한 줄로도 근황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믿고 싶은, 나이와 관계없이
친구 같은 사람이 있다
불현듯 그리워지는 사람
생각만으로 가슴이 훅 뜨거워지는
사람,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런 사람, 이런 장소
이런 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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