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6일 월요일
잠투정
맹하린
점심나절에 첨성대 아주머니께서 찾아오셨다.
(고향이 경주여서 그런 명칭이 따르고 있다.)
우리와 가까운 이웃인 A씨의 천정어머니다.
일요일 오후였다.
"아기가 자는 중이오니 초인종을 누르지 마세요. 꼭 필요한 용건이 있는 분은 아주 작게 노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딸네 집 대문에는 서반아어로 어쩌고저쩌고 써놓은 밑에 한국어로 그렇게 쓰여 있었는데, 쪽지의 부탁대로 아주 작게 노크했는 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고 한다.
조금 크게 두드리게 되면 그야말로 자는 아기가 깰까 싶어 하는 수 없이 우리 가게에서라도 기다리다 가려고 찾아오셨다고 했다.
그럴 때의 첨성대 아주머니 이마에는 푸른 실핏줄이 한층 두드러져 보인다.
"쯧쯧쯧, 자식을 그리 예민하게 키우면 이 험한 세상 우째 살아가겠노! 아를 재운다고 지가 먼저 잠든 기나 아닌가 몰라."
몹시 걱정스레 말하고는 있었지만, 표정은 의외로 자애롭고 편안하게 보였다.
이민 올 무렵에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던 첨성대 아주머니의 자녀들은 5남매인데, 이미 장성하여 결혼들을 했고, 아이들을 둘이나 셋씩 두었다.
결과적으로는 손자 손녀가 열둘이나 된다.
한국과 달리 머리를 싸매고 파고들어야 제대로 된 학점을 이수(履修)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의 대학제도에 단체로 넌덜머리들을 내더니,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지방도시에 흩어져 의류도매상과 소매상들을 차례로 개업하더라는 첨성대 아주머니의 자녀들.
이민생활이란 게 남편보다 아내 되는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생업에 전념(專念)해야 하는 고충(苦衷)이 따르기 마련이라지만, 자식들 집에 골고루 찾아가 보면 아이들 키우는 일이 너무나 복잡해 보여 속마음이 미어지는 기분일 때가 무척이나 많더라는 말씀이셨다.
대부분 파라과이나 지방에서 올라 온 현지인 도우미들의 손에 크니까, 저녁에 퇴근해서 아이를 좀 안아보려면 부모를 의외로 낯설어 하고 오히려 가사도우미를 더 따르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습관이나 성격조차 가사도우미들에 의해서 조성(造成)되어지는 기분이 들더라고 첨성대 아주머니는 이쯤에서 혀를 끌 끌끌 차신다.
대부분의 가사도우미들이 남미인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과 선한 인간성의 소유자들이어서, 그리고 어린이와 아기들에게는 제 형제와 같은 애정과 열성을 쏟아줘 이렇다 할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잠투정하는 손자 손녀들을 속절없이 지켜볼 때라고 하셨다.
열 두 아이들의 잠드는 방법이 열두 가지라고 할 정도로 모두 제 각각이라는 것이다.
베개를 꼭 끼고 다니며 잠들어야 하는 습관을 못 버려, 여행을 갈 때도 필수적으로 그 베개를 꼭 챙겨 가야 잠드는 아이.
잠재우는 사람의 턱을 만지면서 잠자는 아이.
고무젖꼭지를 입에 물어야 하는 아이는 기본이고, 아기 침대의 모서리를 잡고 잠들던 습관 때문에 그 어떤 모서리라도 잡아야만 잠들 수 있는 아이.
그런 저런 잠투정으로도 모자라 재우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듯 꼬면서 잠들어, 일찌거니 서리가 내려 얼마 남지 않은 세어터진 머리를 몇 번 쥐어뜯기고는 그 아이를 재우는 일에 대해선 다시는 거들고 싶지도 않더라고 까지 하셨다.
"둘째네 아이들이 그나마 수월하다면 수월하달까, 옛날 얘기나 노래를 틀어주면 되니까 억수로 간단한기라. 제일 속 태우는 아는 첫째 딸의 막내 아닝교. 다섯 살이나 묵은 기 잠잘 때 뿐 아니라 유치원에 갈때꺼정 밴드를 손가락에 붙여야 하는기라예. 사시장철 붙이고 있을락케서 멀쩡한 손가락이 허옇게 짓물렀심더. 그 아 때문에 병원에도 숱하게 들락거렸다캅디더.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부지런히 안아주라카더랍니더."
최근에는 엎드려 재우는 아이들의 질식사가 많다는 통계를 접하고, 집집마다 뉘어 재우느라 그 소란이 말도 못하게 북새통이라고 마치 북새통을 가라앉히듯 다급히 말을 맺으셨다.
동물의 보호본능은 만약의 위험에 처했을 경우, 누워있는 상태보다 엎드려 있는 자세가 가장 원활한 대처를 해낼 수 있고, 잠재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논리는 이제 완전히 한 물 간 사고방식이 되고 만 모양이다.
모성(母性)의 포근함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어 외부(外部)의 충격을 축소화시킨다는 육아관(育兒觀)은 도리 아니게 무시되어지고, 예전에 농사를 짓거나 물자부족의 시절에 살던 때보다 더 커다란 공허를 껴안고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현대인은.
더불어 우리 이민자의 2세나 3세들은.
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쉽게 잠들 수없는 우리 이민자녀들의 잠버릇에 관한 통계를 제대로 파악했고, 집중적인 조명(照明) 을 진지하게 지켜보느라 퍽도 힘들었다는 듯 나는 새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떤 면으로는 약간의 눈물도 글썽이지 않았나 싶어진다.
비가 내려도 잘 자고, 바람이 불어도 잘 자며, 주위가 시끄러우면 그게 또 자장가로 여겨져 이래저래 잘 자는 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밤마다 숙면을 취하게 돼 나의 아침은 날이면 날마다 거뜬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누구나 무병(無病)한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내가 글을 쓰는 일은 누구하고라도 뺨을 맞대고 치루는 인사와 다름 아니다.
그 누구에 상관치 않고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는 일은 내게 바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신(神)의 뜻에 위배(違背)됨 없이 열심히 살아 내겠다.
특히나 덕을 좀 쌓고 싶은데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구태여 대접해 달라고도 안하는데 온통 너무 멀찍하다.
멀찍이를 일삼는 건 어쩌면 나 스스로가 아닌가 싶어진다.
내 이웃이나 친구들과 세상에게 항상 아무 조건 없이 대하는 것, 바로 그러한 일이 곧 신(神)의
내게 대한 지침(指針)이고 뜻인 것 같다.
더 낮아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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