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8일 수요일
새로운 숙제
맹하린
이민 오니까 하루 이틀이라는 날들의 개념(槪念)이 자주 사라졌다.
일주일 단위가 하루라도 되는 것처럼 잠자고 나면 토요일.
오늘이 무슨 요일일까를 떠올려 보면 벌써 토요일이고는 했다.
너무도 쉽고 아쉽게 흐르고 흘러 오로지 기억 속에서나 남아 있을까 말까한 나날들.
이민 생활을 하는 대다수의 여인들이 살림만 하는 게 아니라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고충(苦衷)까지 안고 있어 토요일이라고 해봐야 반공일이 아니라 완벽하게 노동을 더 많이 하는 날이 되기도 한다.
일주일 동안 밀린 집안일 하랴 , 대청소 하랴, 김치 담그랴, 운동 하랴.
일을 하지 않고 가사(家事)만 돌볼 때는 남아 있는 생애를 하릴없이 갉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 때문에 거의 죄책감에 젖으며 살았었다.
그런데 막상 생업에 종사하게 되니까 시간이 모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치웠다는 만족감 같은 게 뿌듯하게 채워지는 장점도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종의 깨달음이 생겼다.
구태여 스스로 숙제를 만들지 말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주어지는 숙제나마 제대로 풀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길일지라도 뜻대로 찾아가지 못하는 형편이니 마련된 길이나마 제대로 가리라고 작정하게 된 것.
돌을 끌고 갈 때, 미개인들은 죽을힘까지 다하는 데다 끙끙거리기까지 마다않으며 끌고 간다고 한다.
수레에 올려서 끌고 가라고 문명인들이 제안(提案)해 주면 미개인들은 문명인들을 바보 취급하며 웃어 준다고.
"너희는 참 멍청하고 바보 같기도 하다. 돌멩이도 무거워 죽을 지경인데 수레까지 끌고 가라고 하다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적당히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지라도, 둘을 알려주면 하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평화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에 잠길 때, 간혹 있다.
발자크는 날마다 열여섯 시간을 바치며 수십 년에 걸쳐 생업에 종사했지만, 하루에 30~40매의 원고를 쓰는 창작 일정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 냈다고 한다.
모파상은 서른 살에 시작한 습작활동의 원고뭉치가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였다고도 한다.
적당히 책을 읽고 적당히 친구를 두고 적당히 인터넷을 서핑하고, 특히 음악을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써내는 내 생활의 중요한 특징들은 글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적 의지와 염원에 근거(根據)하며 생성(生成)되는 듯싶다.
나 비록 세상일에 게을러도, 글 쓰는 일에만은 부지런하기를 언제나 실천하고 힘써 왔다.
아베쟈네다에서 옷가게 하는 친구 J는 말한다.
고객이 가게에 들어서면 절대로 허탕 치고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장사를 해내다보니까, 직원들 역시 그렇게 따르더라고 자랑이 넘치고 넘친다.
나는 고객들에게 친절한 편이지만 꼭 장사를 위해서 그러지는 못한다.
나는 글에게나 그런다.
글이 나한테서 뭔가를 발견하고 내게 정도껏 삶에 관한 일종의 태도나 해석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됐다고 해서 사회나 개인이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사회의 흐름을 가늠하고 중대한 척도(尺度)로 삼는 문화라는 도도한 흐름은 이미 오래전에 도래(到來)되었을 것이다.
보편적 정신과 문화와 삶은 일종의 규정(規定)이 될 수도 있다.
규정(規定).
그건 지키라고 만들어졌지만, 지키지 못해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말 그대로의 규정(規定)인 것이다.
우리, 그리고 나는 휴식이 보장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하늘을 나르고 많은 구경에 시간을 투자하고 수많은 경치를 사진으로 남기고 바듯한 일정에 정신을 빼앗기며 해내는 여행만 진정한 휴식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언제 어디에 있어도 즐겁고 느긋한 시간을 마음에 초대(招待)해야 할 것 같다.
오드리 햅번이 아들에게 말한 아름다운 손.
"너의 손이 두 개인 이유는, 한 손은 너 자신을 스스로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타인을 위한 손이라는 것."
아름답다는 건 분명하지만, 가시나 줄기가 더 많은 꽃들.
그 꽃들을 다루느라 나 이미 노동자의 손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확실하고 분명해졌다.
글이라도 바치고 나누며 아름다운 손으로 살아가겠다는 것.
오늘 나는 새로운 가치관을 숙제로 지시 받은 것처럼
새삼 환한 새벽을 맞게 된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