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6일 목요일

장모(丈母)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중앙일보


1999년 4월 20일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9백 30세까지 살았고, 이브는 8백세 이상을 살았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아담은 그렇게 장수(長壽)할 수 있었을까? 그야 당연하다. 바로 장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유머다.

나는 딸이 없다.
그런데 요즘 내 가까운 이웃들이 사위나 딸 얘기를 부쩍 내게 자주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디즈니랜드의 '시골 곰 잔치'라는 인기쇼의 주인공인 곰이,  짝사랑하는 문어 돌로레스에게 바치는 노래가 떠오른다.
"다른 세상, 우리는 딴 세상에서 살아가네!"
글쓰기란 때로 약간이나마 유별 날 필요가 있다.
독특하고 개성 있게 나의 주위를 새삼 조명(照明)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오늘은 장모인 그들의 입장이 한 번 되어 본다.
친정엄마, 또는 장모인 그들의 심기(心氣)가 몹시 불편해져 보여서다.
아무리 고달프고 바쁜 이민생활이었을지라도 나름대로 애지중지 길렀다고 자부(自負)해 왔던 딸이 어느 날 시집이라고 갔다.
그런데 친정엄마가 함께 있는 장소임을 망각한 채 시어머니만을, 마치 친정엄마는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어머님, 이것 좀 드세요. 필요하신 거 더 없으세요? 어머님의 입맛에 맞으시면 더 가져오라 할게요. 어머님, 어머님!"
결혼하기 전,  친정엄마에게는  한 번도 나타내지 않던 친절과 애교를 그렇게나 십분 발휘하고 있는 딸.
의당 그래야 하고, 알뜰살뜰 새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시부모까지 깍듯이 모시는 본때 있는 집안의 딸이 되기를 기도처럼 바랐었고 등을 토닥이며 격려까지 해주고 싶던 예전의 희망사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물며 느닷없이 웬 뒤틀리는 심사(心思)인 것일까.
딸의 하는 짓이 얄미워 밤에 잠이 다 안 온다.
그렇게 예의 바르게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딸이 볼상사나워,  모처럼 걸어오는 딸의 안부전화조차 선뜻 받아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까닭 없이 서글프다.
더불어 터져 나오는 한숨.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사정이 그렇다고 한 번 보낸 딸을 다시 빼앗아 올 수도 없는 문제다.
공연스레 백년지객(百年之客)의 손님인 사위까지 원망스럽다.
문득, 신혼여행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펑펑 울던 생각까지 휘몰아친다.
당연히 보내야 했고 좋은 사위를 얻었다고 감사의 기도까지 드린 마당에 왜 그렇게 빼앗겼다는 생각만 집중적으로 들던지.

한때 미국에서는 '결혼한 미국인의 반수가 이혼을 하고, 그 이혼한 사람의 반수가 여자 편에서 이혼을 제기하고, 이혼을 제기한 여자의 반수를 장모가 뒤에서 조종한다고 하는 말이 유행했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말만 읽어도 마음은 더욱 부글거린다.
그리고 횅댕그렁하게 텅 빈 느낌까지 회오리친다.
혼수비용으로 기만달러씩을 들여 이고지고 실어 보낸 자신이 갈수록 미련스럽고 후회된다.
그런 식으로 쩔쩔 매며 지내는 딸의 변모(變貌)는 불쾌지수의 극치다.
어깨에서 가슴께로 통증 비슷한 게 옮겨 다니는 느낌이다.
춥고 시리다.

이러다 병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 하는 가운데, 어느 연구소의 현명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결이 새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락은 신체적으로 커다란 즐거움을 가져다주며 일상생활의 고뇌에서 탈피하게 한다.
*매일 산책하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남을 이해하며 다툼을 피하고 될 수 있는 한 많이 웃어라.

결국 웃어야 하는 모양이다.
딸은 시집이라는 새 터전에 믿고 맡긴 채 그야말로 여유와 평온을 갖추고 더불어 사는 삶을 이룩해야 할 것만 같아진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큰 매력은 터질 듯 무너질 듯 아슬아슬 위태롭다가도 몇 년에 한 번 씩은 호경기가 불어 닥친다는 데에 있고,  장모라면 어렵고 두려운 존재로 여기면서도 장모를 가장 많이 모시고 사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라는 점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는 사실인 것이다.

누군가 결혼을 하고 있고 앞으로 수도 없이 결혼들을 할 것이다.
지구는 변함없이 궤도를 향한다.
우리의 딸들은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가슴 찡하게 친정엄마를 의식(意識)하면서도 ,  속은 물론이고 겉으로도 시어머니만을 떠받들며 살아 갈  것이다.
분가(分家)는 기본이다.
어쩌다 만나는 사이도 기본이 되어 버렸다.
이왕 빼앗겼으니 잘 살아 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대체 자식이란 무엇일까?
장모는 또 무슨 못난, 왜 이다지도 뒷전만 같은 역할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노래나 부르게 된다.
하필이면 그 노래다.
미국에 여행 가서 박장대소 하며,  그러나 절반은 눈물 찔끔대며 들었던 곰의 짝사랑 노래.

"다른 세상, 우리 모두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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