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3일 월요일
검정 린넬 오우버 코우트 파이팅!
맹하린의 생활산책
아르헨티나한국일보
1997년 7월 23일
지난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성수대 앞에서 예수의 십자고난상을 향해 조배(朝拜)하다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5년 전에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났던 이세실리아가 몇몇 교우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서였다.
"세실리아!"
발가운 마음에서는 어린애처럼 소리치며 달려가고 싶었지만, 엄숙한 장소인 성당안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서나 알아 들을 수 있을까 싶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다가갔다.
처음에는 내 목소리를 못 알아 들은 모양이었지만 여러 사람과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던 그녀도 어느덧 나를 발견하고는 5년전하고 똑 같은 형태의 웃음, 어깨를 잔뜩 움추렸다 펴면서 후후후, 그렇게 싱겁게 웃어 버리는 웃음부터 보내왔다.
서로 껴안고 등을 두들겨 주며 반기다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약간 떨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보게 되었다.
5년 전 떠날 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에다, 예전에는 없어보이던 발랄함까지 넘쳐나 있었다.
놀라운 일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줄기차게 입어냈던 검정색 린넬 오우버 코우트를 여전히 걸치고 있는 모습이라니...... .
성가대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날 때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아크처럼 언제나 잘 어울리게 입어내던 그 코우트는 전혀 낡지도 않았고, 5년 동안 미국 물 먹고 몰라보게 날씬해진 세실리아보다 더 튼실하고 훨씬 더 건재(健在)해 보일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교직(중학교 국어교사)에 종사했다던 세실리아는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교육자적 기품(氣品)과 적당한 겸손과 기분에 따라 마음을 허물어 수다까지 떨줄도 알아서, 그녀를 만나는 횟수가 잦을수록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맑은 맘씨의 소유자라는 인식(認識)을 새록새록 다져온 터였다.
그런데 그 코우트만 바라보아도 그녀에게 배가(倍加)된 경외심이 점차 솟구치고 있었다.
이민 온 햇수가 오래된 교우들이라면 하나같이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 전화번호와 가게의 주소를 적어주고 그 자리를 금세 벗어났다.
그렇던 그녀가 화요일 아침나절에 우리 가게에 나타났다.
그녀는 아주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검정 린넬 코우트를 걸치고 있었고, 목에는 파스텔 색조의 머플러로 변화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가까운 까페떼리아에 갔다.
계속 웃어대고 있어서일까.
그녀는 사실 제트레그(배행기 여행의 시차로 인한 피로)에 시달리는 것 같은 기운이 한 톨도 엿보이지 않았다.
5년동안 크리스머스 카드를 몇 번 주고 받았을 뿐, 다시는 못 만날 관계처럼 적조했었는데도 우리는 결코 서먹하지 않게 스스럼 없는 얘기를 서로 한참이나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이나 남미나 내 나라 떠나와 고생스럽기는 매일반이 아니겠느냐는 공감대가 저절로 형성돼서였을까.
그녀와는 언제나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저절로 통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핏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혹시 그 코우트 미국으로 가기 전에 입던 옷, 맞아요?"
세실리아는 막 피어오르는 풀꽃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그녀는 오래된 코우트를 입고 다닌다고 해서 절대로 창피하지 않은 데다. 도리어 의젓하고 덧떳한 표정을 자신감 넘치게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단해요, 대단! 내가 알기로는 이 나라에서도 5년 정도 입었던 것 같은데."
"후후후."
그녀는 그렇게 후후거리는 웃음을 새삼스럽다싶을 정도로 웃더니 내 말에 대한 답을 조심스레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교사생활 할때 장만해서 5년을 입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입어왔으니까 아마 15년쯤 됐을 거에요. 오래된 옷이지만 해가 묵을수록 아껴 입게 돼요. 요즘엔 옷이 떨어져서 못 입는 시대는 아니잖아요. 엄마에게서 일제시대에 고생하시던 얘기를 자주 들었어요. 그 당시엔 잔소리처럼 들렸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귀감(龜鑑)으로 간직하게 됐나 봐요."
무척 쑥스러워 하면서 또박또박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도 정금(正金)하게 비쳐졌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려서일까.
잠시 숙연한 표정이 된 세실리아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지닌 품성과 어떤 격조(格調)같은 게 곱다랗게 풍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의 가진 사람들은 지난 날의 어려움을 일부러라도 잊으려 한다.
어떤 면으로는 고의적으로 묵과(黙過)하면서 사실은 가장 소중했던 순간들이었음을 밀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어려웠던 시절이야말로 가장 순수했고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말이다.
나는 불현듯 진정한 교육자 한 사람과 알고 지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겨우 깨우친 사람처럼 든든함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시차문제는 어때요?"
"내가 워낙 커피광이잖아요. 그걸로 땜질하고 있어요."
"땜질?"
나도 그에 맞먹는 말로 대응했다.
"비행기, 그 콩나물 시루인지 사람시루인지는 언제 또 타죠?"
"내일."
"그렇게나 빨리요?"
"우리를 밥먹여 주는 직장 때문에."
"미국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말하죠. 직장, 직장!" 그렇다면 우린 밥도 못 먹고 헤어져요?"
"그럼요, 미국에 와도 우린 밥을 못 나눠 먹죠."
우리는 까페떼리아가 떠나가라 크게 웃다가 금세 어깨를 움추렸다.
그녀가 아르헨티나에 살 때의 에피소드가 마치 텔레파시처럼 함께 떠올라 커다랗게 웃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소리를 죽이며 자꾸만 함께 웃어댔다.
호세 마리아 모레노 거리에 있는 대형 통유리로 된 까페떼리아에서 그녀와 약속했던 날이었다.
그녀는 나와 얘기하면서 한 무릎을 의자 위로 올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었다.
그녀는 디스크를 좀 심하게 앓는 편이라 자가용 안에서도 그런 자세를 자주 취해왔다.
모소(보이)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때 알았다.
놀라운 얼굴로 달려오는 것보다 신랄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 오는 게 더 험악한 상황을 연출한다는 사실을.
그런 자세가 보기에 아름답지 못하니까 당장 나가 달라는 지적이었다.
그때 내가 세실리아를 두둔했었다. 디스크 때문에 그러니 봐 주라고.
그랬더니 모소가 단박 받아치는 대꾸를 했다.
자세를 바르게 할 때까지는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더불어 모소는 두어 번 자신의 험악한 표정에서 꺼내 쓰는 듯한 날카로운 표현을 칼처럼 휘둘렀다.
-인 모랄, 인 모랄(비도덕적, 비도덕적)!
세실리아와 나는 그때의 난처했던 장면을 동시에 추억하며 낮은 소리로 합창했다.
"인 모랄, 인 모랄!"
새삼 단정하건대, 내 주위사람 어느 누구도 15년 동안 한 벌의 코우트로 추위를 감싸는 여인을 한 사람도 못 봐왔던 것 같다.
다음날 저녁 8시.
세실리아 내외를 배웅하기 위해 에세이사 공항에 나갔을 때, 혹시나 하고 세실리아의 그 검정 린넬 오우버코우트부터 찾아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있었다.
이번엔 모조진주의 악세서리가 왼쪽 깃에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뒤늦은 깨달음을 안을 수 있었다.
화려하고 값비싼 옷치장이 멋이 아니라 세실리아와 같은 그러한 소탈함과 알뜰함이 진정한 멋이라는 것을.
석별(惜別)의 인사를 나누고 그녀 내외가 환송대의 트랩에 오르자, 나는 잘 가라고, 또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연신 손을 흔들어 대며 마음 속으로는 열망껏 소리치고 있었다.
"파이팅! 세실리아, 그리고 검정 린넬 오우버 코우트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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