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일 화요일
때로 나는 섬이 된다
맹하린
지난 일요일엔 내가 다니는 한인성당의 축성미사에 갔다
나는 신자지만 나일론 신자까지도 못되고, 고무줄신자 정도는 된다.
시쳇말로 밀땅(밀고 당기기)을 잘하는 것이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며, 바쁘면 못 가고 안 바빠도 못 갈 때가 많다.
여하튼 성당에 가면 나쁠 건 없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도 볼 수 있고, 만년소녀라거나 나이를 거꾸로 먹느냐는 아부성 발언을 많이 듣기도 하고, 그리고 특히 어딘지 모르게 거룩한 느낌이 드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도 반갑다.
아르헨티나교구청의 페르난데스주교님이 성당 밖에 도착하실 때까지 모든 초대 손님들이나 신자들이 성당 앞거리에 나가서 기다리게 되었다.
축성식을 하는 과정의 교회법이 바로 그래야 하는 모양이었다.
페르난데스주교님은 번쩍번쩍하지도 않고 굉장히 낡지도 않은, 그냥 서민층이나 사용할 모델의 자가용을 손수 운전하고 도착하셔서 그점이 가장 신선한 감격이었다.
테이프코팅 시간엔, 그동안 아르헨티나 한인성당의 사목을 담당했다가 한국으로 귀임하셨던 세 분 신부님이 비행기 타고 축하 차 오셨으므로 그분들과, 손님 신부님과, 본당의 신부님 두 분, 그리고 아르헨티나 신학대학을 마치고 현지인 사목을 하는 중인 문유베날 신부님과 박라몬 신부님이 함께 해냈다.
한병길대사님과 몇 분의 단체장들은 합류하지 않고 신부님들로만 이행했다.
그게 바로 가톨릭의 법인가 보았다.
자리가 없을 걸 예상하고 일부러 일찍 도착했었지만, 내 첫 번째 친구인 수산나가 때마침 자리를 확보해 두고 있어서 나는 중간 위치의 자리를 이미 맡아 놓은 상태였다.
우연처럼 수산나는 왼편에, 오른편엔 나의 대녀 엘리사벳이 앉게 되어 그점이 제일 기뻤다.
축성식이 겸해진 미사라서 그랬을 테지만 상상외로 길면서도 장엄함 또한 없잖아 있었다.
신자들끼리만 있을 때 치러도 될 건축위원들 감사패 증정 같은 순서까지 지켜봐야 해서 몹시도 지루한 느낌 역시 뒤늦게 여러 차례 치밀었다.
한 두명도 아니었고 무려 열 명도 넘는 포상이었다.
아이러니는 식이 길다보니까 본당신자들은 거의 빠져나가 먼저 점심을 들었고, 열성신자와 초대손님들과 나처럼 어쩌다 나가는 신자들만 자리를 끝까지 채우고 있었다.
바람이 싸늘하게 불어 닥치던, 성당 광장에 차려진 식탁을 앞에 하고 수산나와 나란히 앉아 늦은 점심으로 곁절이김치에 시래깃국이 곁들여진 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맛있는 식사는 달리 맛있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저절로 맛있어진다.
가게로 돌아오니 아들은 혼자서 정신을 온통 빼앗기며 일 해낸 모습이 역력했다.
11시에 미사가 시작되는데, 11시도 넘어서 두 분의 한인단체장께서 축하꽃바구니를 주문했고, 그리고 성당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계속 전화로 독촉해서 엄청 바빴다고 한다.
성당 가기 전에 이미 내가 납품했던 모양으로 해달라고 했다던가.
아들은 한국어를 쓸 때 가끔은 철자법이 틀린다.
그걸 보완하느라 인터넷에서 그 단체들의 정확한 이름을 검색하기도 했다는 얘기다.
일요일이라서 레미세리아마다 레미스도 없어, 세 블록을 뛰다시피 다녀오느라 기침까지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들이 다시 쳐다보인다.
실제로 그래서 다시 쳐다보기도 한다.
손톱만큼의 원망이라거나 짜증이라고는 없고 당연한 일처럼 보고하는 모습이라 서다.
대부분의 내 고객들, 특히 교민단체의 집행진들은 3백에서 5백 페소(60에서 100달러 상당)의 축하 화환을 그냥 요술지팡이로 툭 피워대는 줄로만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어떤 문화행사나 미사에 자주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날의 미사 시간 도중 아주 괜찮은 은총 하나를 받았다.
10여 년 전, 이곳의 본당신부님이셨고 그날 제대 위의 의자에도 앉아 계셨던 J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봤었다.
그때 그 신부님에게 난데없는 호통을 들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고해 실을 당장 뛰쳐나올 뻔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잘 참아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새로 오신 그 신부님이 어떻게 내 음성을 알고 어떻게 내 아픔을 헤적일 수가 있다는 얘긴가.
그때부터 나는 고해성사를 어쩌다 보아왔다.
거의 안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 만든 것, 그러면서…….
미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참례했을 것이다.
나는 그럴 경우 딱 그만두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그만 두는 건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못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타입인 것이다.
나는...... .
그렇다. 매사에 어떤 갈등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그렇게 그만둘 수는 없다고 맘먹는 일에 익숙한 주의(主義)다.
그런데 어제 미사시간에 그분을 용서했다.
원래 고해성사를 자주 본 일은 없었지만, 남편의 뇌출혈로 사는 게 막막하다고 하는 신자를 그렇게 막무가내로 야단치는 신부님은 보다보다 첨이었다.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로도 내 아픔을 위로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사실 어떤 위로는 위로가 아니라 칼끝처럼 예리한 구석이 있다고 여겼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종교적 갈등을 겪어냈다.
그런데 불교나 개신교로 바꿀 생각은 전혀 안 해봤다.
가톨릭은 가톨릭인데 단지 갈등이 심한 정도였다.
나는 그럴 때 섬이 된 나를 바라보게 된다.
2년 전.
나는 본당의 전 안드레아 보좌신부님에게서 부탁 하나를 받았다.
성모의 날에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문을 직접 써서 제대 앞에 나가 낭송하라는 지시였다.
나는 마이크를 겁내는 성격은 아니어서 그 무렵 신자들에게 칭찬 좀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좋은 일로만 성당에 다니지 말고 기분 나쁠 때도 천주학을 버리지 않겠다고.
평소에 감기 한 번 앓지 않았던 멀쩡하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쓰러진 기분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그신부님을 이해하자.
왜냐면 신부님들은 결혼생활이라고는 못해봤으므로 충격과 아픔의 혼돈과 그 심층을 조금이라도 알아 챌 도리 같은 게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아마 앞으로도 성당에 자주는 못 다닐 것이다.
축성식이 있었던 그날 밤.
퇴근 길의 나는, 우리 집에 이르는 골목길에 접어들 듯, 한 파장의 강을 건너 온 것 같은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 다른 섬이 된 나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한인성당 축성미사에 참례하여 비로소 나까지 축성 받고 돌아온 것이다.
나의 눈길에는 모든 사물이 친근하고 나의 걸음은 한층 사뿐해지고 있었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나의 의견으로는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용서해 주고 싶다.”
언제 제대로된 고해성사 한 번 보아야겠다.
(제게 적절하지 못했던 사제의 보속을 매우 낯설어 하며 매번 고해성사를 꺼렸던 저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계속 침묵하지 못하고 기어이 글로서 풀어낸 저의 결점도 사(赦)하여 주십시오. 개성이 강해서라고 어여삐 여겨 주시고 부디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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