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6일 금요일

수산나



    맹하린


어제 늦은 오후.
수산나가 예수수난미사에 가기 1시간 전에 찾아왔다.
수산나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내가 첫 번 째로 꼽는 친구다.
마른 몸매지만 외유내강한  성격이고,  내가 바쁜 날엔  몇몇 친구들과 내 넘치는 일을 돕기도 하는 매우 착하고 야무진 친구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게, 나는 또래보다는 나이가 적어도 한참이나 적은 이들과 더 친한 편이다.
그렇게 만나게 되면 수산나와 나는 서로의 속내도 약간씩 보이며 하하 호호 웃음도 잃지 않으면서 얘기를 많이 주고 받는다.
수산나는 온세지역에 반듯하고 커다란 가게를 소유하고 있는데, 한국인에게 대여해주고 자녀들이 아베쟈네다지역에서 의류도매상을 하고 있다.
수산나 내외는 집에서 공장을 운영하여 제품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도 수산나는 항상 버스를 이용하는 철저한 절약정신이 생활화 되었고, 피부처럼 몸에 밴 친구다. 그녀는 봉사도 많이 하는데 주로 안 보이는 손으로 하는 봉사를 한다.
수산나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내가 웃사람이고 수산나가 더 밑에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못해낸다.
그만큼 서로가 지닌 격의(隔意)를 허물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의 격을 맞추고 낮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몫에 언제나 조심을 다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관계는 상식이 아니다.
관성(慣性)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內面)이다.
바람직한 관계는 개념(槪念)과 유형(類型)을 넘어서야 그 사이가 참다워진다.
내가 수산나에게 한 번도 서운하거나 토라진 일이 없는 것처럼 아마 수산나도 내게 그렇지 않을까 싶어진다.
말은 안하지만 수산나의 표정이나 행동이 그걸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이다.
수산나는 내게 있는 체를 안 하고 나는 수산나에게 없는 체를 안 한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사실을 구태여 짚고 넘어갈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도 행복한 사람이다.
수산나라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사는 일 매우 뿌듯하다.
어딘가에 수산나라는 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게 자주 안위로움을 안기기에 더 그렇다.
분명한 것은 수산나는 나보다 나은 친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 중심을 잡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닮은 점이 딱 하나 있다.
최후의 순간에도 낙관적 자세를 취하는 불사조와 같은 면모.
수산나와 내가 다른 점은 두 개 정도 된다.
그녀는 자기 자랑을 전혀 못하는 성격이고, 나는 자기 자랑을 가끔씩 하는 사람이며, 그녀는 자주 아프지만, 나는 뛰어 다니며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잘 안 아픈 사람의 축에 든다는 점이다.
나는 어제 아침에도 또 넘어졌다.
그런데 넘어져서 하하 웃었다.
다친 데가 없어서 웃었고, 잘 넘어진다는 데에 생각이 닿아서도 웃었고, 그리고 넘어져서 웃는 나의 행동이 미친 것도 같아서 웃었고, 그리고, 그리고 그러는 내가 우스워 더 웃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사람은 가끔씩 자기자랑을 해야 안 아프다는 의미?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껏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해왔다.
욕하고도 담을 쌓고 살아 왔다.
왜냐면 공부나 생활이나 누구의 간섭이 있기 전에 내가 다 알아서 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간섭이나 욕을 만나면 더 엉뚱한 쪽으로의 발전을 거듭한다.
당연하게도 나이가 들대로 든 지금까지 변함없이 나는 맹꽁이니까.
그런데 현재의 나는 웬만한 일들 모두 수용(受容)하려고 노력하는 기운 또한  느껴진다.

나는 책을 읽다가 좋은 말을 만나면 수산나에게 프린트해서 건네기를 즐긴다.
항상 그러진 않고 몇 달에 한 번쯤 그런다.
집에 가서 읽으라고 해도 그녀는 우선 한 두 번 읽고 나서야 핸드백에 간직한다.
아, 틀린 점이 또 있구나!
그녀는 꼭 전도사처럼 제법 커다란 핸드백을 매고 다니는데 나는 거의 핸드백도 없이 다닌다는 것. 꼼꼼한 성격의 그녀가 왜 핸드백을 꼭 갖고 다녀야 하는지,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가끔 이해가 안되는 심정이다.
그녀는 그동안 길에서 핸드백을 날치기 당한 일이 서너 번은 되기 때문이다.
어제 수산나에게 적어 준 꽤 괜찮은 말은 이렇다.
불경기의 여파는 수산나에게까지  때아닌 근심걱정을 안기고 있어서였다. 

‘나는 근심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는다. 근심은 알고 보면 허수아비다.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으로 가서 허기를 채우려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복병들이다. 하지만 어떤 참새라도 그 복병들에 대해 근심할 필요는 없다. 허수아비는 무기력의 표본이다. 망원렌즈가 장착된 최신식 장총을 소지하고 있어도 방아쇠를 당길 능력이 없다. 자기 딴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눈을 부릅뜬 채 들판을 사수하고 있지만, 유사 이래 허수아비에게 붙잡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린 참새는 한 마리도 없다. 다만 소심한 참새만이 제풀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의 심장을 위축시켜 우환을 초래할 뿐이다. 나는 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서른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마흔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근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근심에 집착할수록 포박은 강력해지고 근심에 무심할수록 포박은 허술해진다. 하지만 어떤  포박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1백 퍼센트 소멸해진다.

이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에서






댓글 2개:

Oldman :

참 좋은 친구를 두신 것 같아 부럽습니다. 그 정도 친구 하나 있으면 저도 평생 남부럽지 않을 것 같네요. ^^

maeng ha lyn :

제가 보기에 올드맨님은 아내 되시는 분을 위시해서 많은 좋은 친구를 두신 듯 해요.
내가 더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게 더 좋은 친구를 간직하는 지름길 같아요.
항상 부러운 한 분이신 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