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1일 목요일
가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있는 이의 앞모습
맹하린
1992년
토요일인데 친구가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전화를 해왔다.
가족도 외출 중이고 해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겨자채를 준비하려고 한국식품점에 들어서니, 70대로 보이는 한국인 어르신이 과일을 고르고 계신다.
50대 종반의 여주인이 나를 반기며, 아줌마는 뭐 드릴까 라고 묻는다.
“맛살과 오이, 그리고 콩나물과 굴비가 필요해요.”
콩나물 잡채를 만들려면 미리 다듬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말한다.
굴비는 양파와 무를 깔고, 위에는 풋고추와 파와 마늘 등을 섞은 양념장을 얹어 조림을 해낼 생각이었다.
“아줌마!”
현지인 종업원이 내가 주문한 재료들을 챙기는 사이에 여주인이 나를 새삼스럽달 정도로 크게 부른다.
어조가 좀 강하다 싶으면서 약간의 어리광 비슷한 비음이 섞여 있다.
목이 쇤 음성이라 일부러 힘들여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네.”
나는 놀라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답하게 된다.
“내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싫지요?”
나는 어떤 뜻으로 묻는지를 몰라서 잠시 어리둥절과 얼떨떨 사이를 헤맨다.
하지만 금세 자연스런 대답을 건넨다.
“아니요. 왜 싫겠어요. 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줌마인 걸요.”
“근데 나는 왜 젊었을 때 아줌마라는 소리가 그렇게 싫었지? 요새도 가끔 꼬마들이 부모를 따라와서는 나보고 할머니라고 부르면 그게 그렇게 싫습디다. 우리 딸들도 내가 할머니 소리 들으면 몹시 싫은가 봐. 우리 엄마가 왜 할머니냐고 꼬마 애들한테 야단치듯 달래면서 주의를 주는 거예요...... 할머니!”
여주인은 과일을 다 고르고 난 한국인 어르신을 향하여 여전히 강하게 부른다.
“예?”
그 어르신 역시 쉰 목소리가 너무 강했다고 여겨졌는지 나보다 더 놀라듯 대답한다.
“할머니는 할머니라고 불리면 싫지 않으세요?
“싫긴요. 늙은이 보고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뭐가 싫겠우? 나는 벌써 증손자를 보게 됐다오.”
“그래도 옛날부터 그래 왔잖아요. 여자는 나이를 먹어도 평생 여자라는 말.”
어느 노인 신부(神父)는 주일날 미사 시작 전의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과 악수를 나눌 때의 인사가 일주일도 즐겁게 하고 한 달도 괴롭게 한다는 소감을 경향잡지라는 책에 발표해서 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신부님! 어디 편찮으세요? 오늘 혈색이 영 안 좋으세요.”
바로 그런 인사를 듣게 되면 주일 날 내내 기분이 지금거리는 데다 정말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일주일 정도 기운까지 없어진다고 했다.
“신부님, 요즘 좋은 일 있으시군요? 굉장히 젊어지셨어요. 신수가 훤하시네요.”
그런 인사를 받게 된 주일날에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날듯이 가뿐해짐은 물론이고 한 달 내내 기쁘다는 얘기였다.
수도자이자 사제라는 소명(召命)을 부름으로 받은 신부가 설마 그 정도까지 인사에 좌지우지 될까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수도자도 인간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신자들의 덕목(德目)을 깨우치기 위한 계도(啓導)를 그런 식으로 펼쳤으리라 여겨진다.
성당의 안나회(70세 이상의 여성신자 모임)분들을 뵙고 가장 바라는 게 무엇인가를 조심스레 질문하게 되면 이구동성으로 선종(善終)하는 일을 꼽는다.
(선종= 임종할 때 성사를 받아 대죄(大罪)없이 잠자듯 죽는 일.)
나이 든 소가 가장 곧은 고랑을 판다고 했던가.
노인들 모두 젊은이들 보다 더 많은 세월을 헤쳐 나와 세상이치에 훨씬 깊은 터득을 깨우쳐 왔으리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시 낙화에서-
그렇다.
하지만 가야할 때를 분명히 알고 있는 앞모습은 그 어떤 참담한 이해가 얼룩지듯 스며 있어 보일 것 같은 느낌 또한 서리게 된다.
아무리 저승길이 대문 밖이라고는 해도, 자석에 이끌리듯 밖에 저승이 있다는 대문을 향하여 발길이 저절로 다가가는 심정이란 것은 굳이 따지지 않아도 허무(虛無)의 극치이리라.
구태여 나이든 분들에게 그점을 지적해 주는 게 친절한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늙으면 아해(兒孩)된다는 말…….
늙기도 설어라커든 짐조차 지실까라는 시조…….
그런 옛말들이 공연히 만들어진 건 아닐 것이다.
친구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노후에 대한 얘기를 당면(當面)한 과제(課題)나 되는 것처럼 진지하게 주고받게 되었다.
금방 50이 되고 금방 60이 되리라는 걸 예감처럼 깨달으면서.
-초여름-
*어제 오후의 산책 시간엔 산책을 미루고 편의점에서 시간을 때우게 되었다.
아는 여인이 눈에 띄어서였다.
나중에 N까지 합류해서 한참이나 재미 있게 웃고 떠들고 그랬다.
많은 얘기 중간에 N이 나를 향해 말했다.
"형님은 복이다, 염색도 안하고 머리숱도 많고. 염색하면 얼마나 눈이 나빠지는데!"
"눈은 이미 나쁜 걸? 다른 복이 더 좋아 보이고 커 보여, 난……."
"왠지 모르겠는데 난 항상 그런 생각을 해, 다 죽어도 형님은 안 죽을 것만 같아."
무슨 의미인지는 묻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좋은 뜻처럼도 느껴지고 격려 같기도 했던 말이었다.
*지인 중에 나림이 엄마가 있다.
나림이가 한국학교 유치원에 들어 간지 얼마 안 지났을 때 우리 가게에 함께 왔었다.
그런데 자기 엄마가 나를 호칭할 때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니까 굉장히 의아스러운 표정을 한 채 불쑥 질문해서 나림엄마와 나를 한바탕 커다란 웃음폭탄을 터뜨리게 만들었었다.
- 엄마, 내가 보기에는 선생님 안 같아, 아줌마 같아.
현재 한국학교 3학년인 나림이는 길에서 나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면서 꼭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런데 나는 나림이에게 선생 노릇을 삼가고 항상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준다.
나는 누구를 가르치는 몫을 즐기지 않는데 어찌 선생이겠는가!
.
(나림아, 오늘 왜 새삼 네 그 말이 굉장히 고마워지는 거니? 제발 부탁인데 너만은 저 돈 엄청 벌었다고 노인네 어쩌고 큰 소리 탕탕 치는 이들처럼 예의 없는 사람 되기 없기다!)
속으로는 어떠 했는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수 없이 겉으로까지 부르짖은 날이었다.
오늘은...... .
*아르헨티나 정부와 모쟈노 노동총연맹 서기장의 협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른 상태라는 속보다.
정부가 모쟈노 노조위원장을 고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
노동총연맹에서는 27일 수요일을 시위날로 잡았다고 더욱 으름장이다.
주유소마다 휘발유를 판매하지 않는 사태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와중이다.
노총의 선거일이 다가오자 라이벌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모쟈노의 아들이 키르츠네르 측근이라서 선거의 귀추가 집중적으로 쏠리고 있는 판국이다. 포괄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 모든 소요는 정객들의 장난감 총싸움이다.
이미 정해진 각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도 때 늦은 평화를 얻게 되었다.
흐름대로 흐르겠지만 나를 더욱 아끼고 보호하며 살겠다는...
뼈 시린 각오 다음에 생긴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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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예전엔 욕심과,아집과,교만으로 똘똘 뭉쳐 있던 제가 이제서야 세월이 지나면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 나누는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습니다.개인적인 일이지만 손에 꽉지고 놓지 않으려는 것을 놓으니 이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것이 나이 먹어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 보는 일은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잇고 한 순간에 알아 챌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어느 누구도 누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요즘 비로소 깨닫게 돼요.
매사에 편안해 지셨다니 제가 다 편안해집니다.
님처럼 뭉침을 놓는 일도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죠~~~~~~추카추카!!!
저는 오늘까지는 고통이 좀 있었으나 지금은 더없는 평화를 얻은 상태입니다.
매우 자유로운 느낌이죠~~~
저의 개구진 마음, 오늘 비로소 버렸습니다.
가슴에 잔잔하게 와닿는 글들이 너무 좋습니다. 제가 처한 나이에 맞게 만족하고 감사해 하며 사는 게 소원인데 쉽지는 않네요.
자식들이나 주위사람들에게 선하고 곱게 늙었다는 평을 받고 사는 선배들을 뵈면 참 부럽구요. ^^
Oldman님도 어딘지 모르게 저처럼 잔잔함을 선호하시는 느낌 자주 들어요.
저는 책을 접할 때도 누구를 계도하는 글은 피하고 거의 문학적이거나 잔잔함을 즐기죠.
에효입니다~
글이나 실생활은 잔잔함을 선택하지만, 게시판에서는 엄청 깨집니다.
나잇값을 못 한다네요.
저로선 격을 없애려고 그랬는데 제 아뒤 보다 제 실제모습이 더 많이 부각되나 봅니다.
반장님은 곱게 나이 드실 분이라기 보다 실수 없고 부드러우면서도 보람 있는 삶으로 이어 가시리라 믿게 되어요.
지금껏 아무도 부러운 적 없었는데 요즘 제가 젤 엉터리로 산 듯한 기분~~~
그래도 님과 다른 님이 제 블로그 방문해주셔서 많은 격려가 된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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