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8일 금요일
잉크라는 피가 흐르는 신선들?
맹하린
10여년 전.
나는 교민신문사인 C일보 사에 취직을 했다.
그동안 여러 교민신문에 돌아가며 칼럼이나 수필을 게재해 오던 인지도 덕택인지 의외로 간단명료하게 이룩된 취직이었다.
칼럼만 쓸 때와 편집을 하는 일과의 차이는 생각보다 간격이 컸고 하늘과 땅을 비교하는 일과 다름 아니었다.
그 무렵 편집과 운영을 도맡아 담당했던 J국장은 원래는 H일보 기자였는데 C일보가 창설 되면서 스카우트된 분이었다.
일은 그다지 고된 줄 몰랐는데, 마음은 갈수록 고달팠다.
편집을 하던 중에도 인쇄소에 다녀오라면 다녀와야 했고, 이탈리아 병원에 가서 한국인 의사를 취재해 오라면 어김없이 일을 그렇게 이행해야만 했다.
모든 단체들의 모임 시간이 저녁인 아르헨티나의 특성상, 행사가 겹치는 경우에는 J국장과 S기자로는 부족했고 결과적으로는 나까지 취재를 분담해야 했다.
주로 남자들로만 구성된 단체가 대부분이라서 미리 취재를 끝내고 식사는 사양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기사는 새벽녘에 쓴 뒤 출근하자마자 제출했다.
그런데 편집부에 미스 들이 둘이나 상주하고 있었는데도, J국장은 아침마다 열리는 편집회의 때마다 전날 신문에 난 오타 등을 일일이 지적해냈다.
하물며 편집부원, 기자, 번역부원, 컴퓨터위원들까지 골고루 싸잡으며 닦달했다.
분명한 사실은 교정은 내 담당이었기 때문에 나의 책임감은 무겁고 컸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후만 되면 교정 볼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다녀야 했고, J국장의 지시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는 데에 문제의 요인이 있었다.
메인기사는 주로 J국장이 썼는데, 일단 지시가 내리면 나는 메인기사도 써야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칼럼도 써냈다.
즈믄 년이 막 시작되었을 것이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대통령의 북한방문 때.
교민 각 단체들의 앞 다툼에 힘입어 A4용지 사이즈인 광고란에 축하광고를 실어 달라는 주문이 며칠 동안 쇄도 했었는데 그 광고문안까지 J국장은 모조리 내게 일임했다.
천편일률 한결 같으면 안 되고 광고마다 개성 있게 써내는 게 관건이었다.
너무나 간단히 써 내는 게 신나고 듬직했는지 오로지 속전속결로 내게만 떠안겼다.
그런 일 저런 일 모두 참겠는데 아침마다 치르는 편집회의에서의 오타에 대한 질타는 정말 말 그대로 아사(餓死)직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일을 너무 과중하게 시키면 곤란하다는 정도의 항의는 곧 군대로 치면 항명이 될 듯도 하여 나는 매번 참고 참았다.
그때, 다른 두 군데의 신문사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었던 S기자가 여러 차례, J국장이 안 보는 데서 나를 격려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신문의 사주(社主)들에게 당했던 경우를 비교한다면 J국장 쪽이 너그럽고 질책도 훨씬 약한 편이죠. 그러니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도록 하세요.
그 순간 나는 마치 공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S기자에게서 동료의식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참을성 시험을 날마다 치르며 견디고 견디던 직장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주(社主)가 바뀌는 이변이 생기자, 나는 즉시 사표를 제출했다.
안보회장이 사주라선지 안보회원들이 들락거리는 사태를 지켜보며 분위기도 어수선했을 뿐아니라 신문사 자체가 길게 명맥을 유지하지는 못할 듯 한 예측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J국장은 본인이 너무 몰아붙여서 내가 그만 둘 걸로 알고 약간은 미안한 마음을 남겨 뒀을 것이다.
나는 J국장을 만나면 인사도 부지런히 잘 건네고 있다.
그 무렵 C신문에 써냈던 칼럼들을 볼 때면, 여지없이 그 당시의 작고 큰 편린(片鱗)들이 나의 생각마다 켜켜로 덮여 있음을 발견한다.
그 시기(時期)를 내 고난과 화해(和解)하고 돌아온 일종의 여행이었다고 자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알고는 지내는 K가 찾아왔다.
어떤 신문사의 편집부에 취직을 했는데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신문사의 집행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오타나 줄 바뀜은 소형사고지만 기사가 뒤죽박죽 섞이거나 중복게재 등은 대형사고로 치는데, K가 바로 소형과 대형의 사고뭉치 장본인(張本人)으로 몰리는 사태가 너무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나는 예전에 S기자가 내게 했었던 충언(忠言)을 나도 모르는 순간 K에게 건네 주고 있었다.
"견디세요. 나도 한 때 어떤 신문사에 있어 봤지만, 다른 사주(社主)들은 더 심하다고 보면 돼요."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산뜻한 말도 아니었지만 틀린 말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신문을 만드는 일의 소명(召命)은 어쩌면 잉크라는 피가 따로 흐르는 신선들이나 하는 역할인지도 모른다.
나는 잘 안다.
세상의 어떤 진리를 갖다 잔뜩 나열(羅列)해도 K의 긴박감과 움츠림을 풀어 줄 도리는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는 걸.
오히려 더 긴장하게 만들 수도 있는 설정이라는 것을.
그의 피해의식에 불을 붙일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나는 그 무렵 마음고생을 진정 많이 했었던 건 아니지 않았나 싶어진다.
내 또래는 물론이고 내 주위 사람들이 몸도 마음도 전혀 편치가 않아 보이고 실제로 여러 아픔을 앓고 있는 작금(昨今)이다.
달러도 바꿀 수 없게 돼 있지.
수입이 자유롭던 천이나 여러 부속이나 산업 부자재들이 수입규제로 품귀현상을 겪고 있지.
도대체 지금 아르헨티나가 어떻게 돼 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고 웬 북새통 속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달러화 정기예금통장의 돈을 전부 페소화정기예금으로 변환시키겠노라고 표명했다,
305만 6천 632달러를 공식환율로 환전해 기필코 페소로 기재되는 정기예금통장에 저축할 것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스포츠 언론인인 빅토르 모랄레스가 정부 관리들은 왜 페소로 저축하지 않는가라고 일침을 가하자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모랄레스에게 그의 저축도 페소로 바꾸라고 공격하며 자신의 직속 관리들에게도 달러화 저축을 지시하는 부분에 특히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손자에게 선물할 10달러를 환전하지 못해 정부를 상대로 가처분신청을 제시한 노인에게 10달러 밖에 안 주는 구두쇠라고 비난을 보내는 대목도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를 부리는 일도 누구에게 부림을 당하는 일도 그 어느 시절보다 한층 첨예(尖銳)로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느낌이 유난히 매서워진 날씨처럼 피부 깊이 파고든다.
6월 7일 밤.
시내 중심가에서는 중산층들의 냄비시위가 예년보다 더 많은 운집을 보여 매우 소란스러웠다고 메스컴은 전한다.
불안정한 경제 소요(騷擾)가 하루 속히 잠재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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