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9일 일요일
노 빠사 나다(No pasa nada=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맹하린의 생활단상(生活斷想)
아르헨티나중앙일보
1996년 12월 6일
오늘은 유난히 무더운 날이라고 모두들 오며가며 말했다.
건조한 기온은 피부까지 바삭바삭 말리고 있는 느낌으로 유도했다.
오후 7시에 가게 문을 닫고 교민 C씨의 공장으로 상품이 될 옷을 구입하러 가는 자동차 안에서였다.
남편은 무슨 말인지를 할까 말까 연신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왜요,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네요?
-새벽에 꿈을 꿨거든. 내가 생각하기엔 별로 좋은 꿈이 못되는 것 같아. 그래서 당신한테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태 참았던 거고.
남편은 꿈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바퀴를 두 개나 잃어버려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얼마나 애를 태우며 찾아 헤맸던지 그 꿈을 떠올리면 아직도 진땀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당신 꿈이 언제는 맞았었나요? 내 꿈이라면 또 모를까.
나는 그렇게 반문하며 웃었지만, 그때부터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차량들의 거치적거림에 바짝 신경을 세우며 팽팽하게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러나 금세 꿈 얘기도 긴장감도 잊고 말았다.
C씨 집에서 여름 원피스 종류를 구입하고 한인회관 앞길을 지나오는데, 갑작스레 어떤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남편이 운전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넘어지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우는 남편보다 더 잽싸게 차에서 내려 황망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체구는 작지만 노숙한 얼굴을 지닌 현지인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우리 차에 부딪친 것이었다.
그런데 자전거의 바퀴가 활처럼 휘어져 못쓰게 돼버렸고, 망가지면서 튀어나온 자전거 바퀴의 살인지 뼈인지가 우리 차의 바퀴를 찔러 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펑크를 내며 스르륵 스르륵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듣기에 몹시 거북했고 보기에도 가히 가관이었다.
중요한 문제는 바퀴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청년을 일으켜 세웠고, 다친 데는 없는 가고 조심스레 묻게 되었다.
불볕더위인 데다 마침 초저녁이라서, 집밖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신선한 바람을 쐬고 있었나 보았다. 청년의 가족들과 그 이웃들은...... .
하지만 그 사건을 고스란히 목격하게된 그들은 우르르 몰려 왔고, 청년의 머리와 온 몸을 꼼꼼하게 만져보며 상처의 유무(有無)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깨달은 점은 청년이 다운증후군을 겸한 지체장애자라는 사실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희극적이며 약간은 애수에 젖은 얼굴을 갖춘 청년은 그제야 커다랗게 부르짖었다.
거의 무의식적이다 싶게 절규처럼 .
그것도 두 손을 약간 올리며 어깨를 잔뜩 움츠리더니 여러 번이나.
-노 빠사 나다! 노 빠사 나다! 노 빠사 나다!
그들은 천만다행이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전거를 수선 소에 맡기기 위해, 청년과 자전거를 감싸 듯 보호하며 그 자리를 떠나갔다.
우리 내외도 그럭저럭 다행한 일이었다고 마음을 놓으며 자동차에 올랐으나 바람이 완전히 빠져 버린 펑크 난 바퀴가 왜 그때 비로소 깨달아지던지.
남편은 트렁크에서 공구와 스페어타이어를 꺼내고 있었는데, 이미 떠나갔던 청년과 가족들이 우르르르 몰려오는 모습이 또 다시 눈에 들어 왔다.
불구자와 충돌했기 때문에 바퀴 값이라도 물어내야 마땅하리라는 항의 섞인 제안이었다.
변상을 거절하면 경찰서에서 복잡한 수속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협박만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인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텐데.
그럴 경우에 평소보다 더 차분해지고야마는 내 비장의 침착함은 그들을 이내 타이르고 설득하게 되었다.
-양쪽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 정도의 보상은 기꺼이 하겠어요. 하지만 협박이 섞인 언성은 좀 섭섭하군요. 얘기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이 시간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아닌 차도를 마음대로 활주(滑走)하도록 가족인 당신들이 이 청년을 방관할 일은 아니지 않았나요?
때마침, 한인회관의 상주경찰이 다가왔다.
처음부터 목격을 했었다고 한다.
청년이 한 눈을 팔며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별로 속력도 내지 않으며 지나가던 우리 차에 부딪치는 광경을 똑똑히 봤었다고 차근차근 자세한 설명까지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두말조차 못 꺼내고 곧장 물러갔다.
물론 나는 그 청년에게 바퀴를 바꾸는데 사용하도록 적정선의 금액을 건네주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느닷없는 난리를 겪는 통에 바퀴를 교체하는 일에 의욕을 상실해 버린 남편은 몇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는 타이어 수선 소에 가서 정비사를 불러오게 되었다.
펑크 난 바퀴는 더 이상 손 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새로운 바퀴를 구입해야 하리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내 기억의 한 모퉁이에 접혀져 있던 남편의 꿈 얘기가 파르르르 펼쳐짐을 감지하게 되었다.
결국 자전거 바퀴와 자동차 바퀴, 그렇게 두 개의 바퀴를 못 쓰게 되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바퀴 두 개를 잃었다고 애쓰며 헤매고 다녔었다는 남편의 꿈은 아주 근사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 되었다.
남편도 나와 다름없이 꿈을 떠올리는 중이었을까.
-에이, 참. 밤에 차고에 집어넣은 후에나 말할 생각이었는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편을 보면서 나도 잊지 않고 말을 보탰다.
-여하튼, 뭐를 잃어버리는 꿈은 하나도 건질 게 없긴 하죠.
그렇게 단정하는 자체가 샤머니즘적인 미신행위가 아닐까를 자조(自照)해 보면서 나는 이윽고 생각났다는 듯 오싹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청년이 다쳤을 경우란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던 것.
나는 마치 현지인이 된 것처럼 머리를 여러 번 흔들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꼭 꿈을 실제상황으로 연결시켜야만 시원해요? 너무도 놀랐잖아요. 오늘...
-그야 당연하지. 그럼 꿈을 심심해서 꾸는 걸로 알았어?
나도 남편도 항상 서로를 그런 식으로 대응(對應)해 왔다.
-당신!
나는 난감한 일을 만날 때마다 습관처럼 장난스럽게 불러보는 호칭으로 남편을 부르며 옆을 돌아보았다.
-꿈이 안 맞아도 괜찮아요. 다시는 나와 세상에게 꿈 팔기 없어요. 알았죠?
순간적으로 운전대를 놓았다. 남편은.
그리고 어딘가 희극적이면서 약간은 애수까지 엿보였었고, 한껏 어깨를 움츠리며 해내던 쳥년의 제스처를 고스란히 본보이며 여러 번 소리쳤다.
-노 빠사 나다, 노 빠사 나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게 아니었다.
싱싱 신나게 잘 타던 자전거였다.
그때부터 나는 자전거를 타면, 자꾸만 넘어지게 된 것이다.
2012년 4월 28일 토요일
이별 연습
맹하린의 생활단상(生活斷想)
남미크리스챤신문
2001년 9월 1일
공항의 진입로(進入路) 근처는 대낮처럼 밝았다.
쉴 새 없이 멈추고 떠나는 차량들과, 바삐 움직이는 인파를 에워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생동감 까지 넘쳐나 일종의 설렘과 같은 기분을 안겨줬다.
로우터리 한편엔 선인장들이 붉은 꽃줄기를 꼿꼿이 펴들고 있었으며, 철늦게 피어난 화초들은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겨울은 언제나 가을이라는 계절을 시샘하듯 젖히며 다급하고 성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기후인데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깊은 추위는 유별나다는 느낌까지 껴안게 한다.
아무리 여름이 얼마 전에 지나갔을지라도 겨울날에 고운 자태로 피어있는 짙은 홍색의 꽃떨기를 보게 되면 어떤 면으로는 변절스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날씨가 비교적 온화하고 악천후의 기온을 강퍅하게 버텨낸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나무의 재목들이 거의 쓸 만한 게 없다는 얘기를 언젠가 유태인 목재상에서 들은 일이 있다.
잘 부서지고 쉽게 꺾어져 버리는 습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대지는 어떤가.
평소에는 딱딱하게 굳어서 옹고집스런 성질이 있다가도 비만 내리면 푸욱 푹 발이 빠지는 찰흙이지 않던가.
그런 연유로 나무들이 쉽게 성장하는 반면에 뿌리가 깊숙이 뻗어나질 못하고, 그 뻗어남이 의외로 얄팍해서 웬만한 비에도 덩치 큰 나무들이 쉽사리 넘어지고는 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을 아르헨티나의 경제와 비교해 보면서 나는 흠칫 놀라고 만다.
심심풀이 삼아 여러 번 흔들리고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는 형편이라고는 해도, 내가 얹혀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지나친 결례(缺禮)가 아닌가 싶어서다.
활주로 쪽에서는 낮은 폭파음처럼 비행기 뜨는 소리가 울려왔다.
공항에 닿을 때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만날 것을 믿는다'는 한용운의 싯귀가 생각난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질 운명에 있다'는 , 지나치게 쓸쓸한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까지도.
출입문 근처는 물건을 싣거나 내리는 일에 함빡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로 어수선 하게 붐비고 있었다.
나는 열려진 문이 있는 데도 자동문 앞에 섰다.
스륵스륵 저절로 열려지고 있는 자동문 앞에서 어린애처럼 기분이 좋아져 문명의 혜택을 잠시나마 실감해 보는 것이다.
이 어린아이와 같은 천성(天性)을 언제나 버릴 것인가.
쓸쓸하게 웃으며 면세품을 팔고 있는 가게들을 스쳐 지나자, 팬암 항공사의 수속 창구 근처에 몇몇의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감싸이듯 서 있는 정민 엄마의 희망에 찬 모습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정민엄마는 당장에 떠날 사람이고, 주위의 그들조차 미국으로의 재이민을 떠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수속을 밟고 있다고 알았던 사람들이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으므로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소탈하고 간편한 블루진 차림의 본토여인이 남편인 듯 한 남자와 석별의 포옹을 나누고 있는데, 그 포즈에 애틋함이 담뿍 깃들어 보여 나는 그만 눈물이 글썽여지고 말았다.
나는 그랬다.
아름다운 일과 만나면 눈물이 글썽여졌다.
묵시적이면서 감성에 찬 장면과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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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92년도 7월 7일에, '친구를 떠나보내고'라는 제목으로 J일보에 게재했던 것이다.
82년도 부터 본국의 카토릭 경향잡지 등에 몇 번인가 투고를 한 적이 있었고, 나는 그 무렵 이미 여러 단편들을 써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교민사회에는 처음으로 발표하게 된 글이었으므로 의미있게 간직하느라, 단편 '우라깐'의 도입부분에 접목 시키기도 했었다.
속담에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현대는 3년에 한 번, 또는 1년에 한 번씩도 강산과 도시가 변하는 추세에 있다.
그렇게 강산이 여러 번 변했을 만큼의 세월이 9년이나 흐르고 난 후인 지금, 공항 근처의 자연경관은 날이 갈수록 수려해지고 있는 반면, 더욱 넓혀지고 최신식이면서 초현대적이랄 수 있게 꾸며진 발전을 보이고 있지만, 예전과 달리 문명의 동굴 내지는 미로(迷路)같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도록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곳으로 변모되었다.
불경기의 여파를 자주 앵무새처럼 반복할 때는 언제고, 웬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서거나 앉거나 걸으면서 하드 케이스를 가까이 하거나 끌며 술렁여대는 것일까.
이민 생활 20여 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이들을 떠나보낸 것 같다.
누구나 떠날 때는 평소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의 몇 배나 되는 넓은 자리를 휑하게 남기고 떠나는 법이라던가.
떠나고 난 기차는 아름답다는 시(詩)가 아니더라도 떠나려는 이들, 그리고 떠난 뒤의 그들은 어쩌면 그리도 살뜰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느닷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이별의 특징은 아무 것도, 그야말로 아무 것도 준비조차 안하면서 기꺼이 그들을 위해 떠나보내려 했다는 데에 있다.
섭섭했던 기억이란 전혀 없고 본의 아니게 소홀했던 점, 그리고 아쉬웠던 일들만 날이면 날마다 새록새록 풀잎의 싹처럼 자라날 것이다.
매우 차분하거나 조금 들떠 보이거나 의외로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과 상관없이, 속으로 갈무리하듯 이별연습을 하면서, 마지막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의 심정이 아마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석별(惜別).
국어사전에는 서로 헤어지기를 애틋하게 여김이라고 적혀 있다.
능력이 있다면 국어사전의 그 뜻을 바꾸고 싶어진다.
사람이 헤어질 때 남아 있는 사람들만이 애틋하게 여긴다는 뜻이라고.
이 겨울에.
나는 예감한다.
아끼던 이들 몇을 더 선선히, 그리고 더욱 의연하게 떠나보내야 하리라고.
그러나 그들에 대한 기억을 더 이상 지우지 않겠다.
영원히 간직하며 아끼도록 하겠다.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장모(丈母)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중앙일보
1999년 4월 20일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9백 30세까지 살았고, 이브는 8백세 이상을 살았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아담은 그렇게 장수(長壽)할 수 있었을까? 그야 당연하다. 바로 장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유머다.
나는 딸이 없다.
그런데 요즘 내 가까운 이웃들이 사위나 딸 얘기를 부쩍 내게 자주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디즈니랜드의 '시골 곰 잔치'라는 인기쇼의 주인공인 곰이, 짝사랑하는 문어 돌로레스에게 바치는 노래가 떠오른다.
"다른 세상, 우리는 딴 세상에서 살아가네!"
글쓰기란 때로 약간이나마 유별 날 필요가 있다.
독특하고 개성 있게 나의 주위를 새삼 조명(照明)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오늘은 장모인 그들의 입장이 한 번 되어 본다.
친정엄마, 또는 장모인 그들의 심기(心氣)가 몹시 불편해져 보여서다.
아무리 고달프고 바쁜 이민생활이었을지라도 나름대로 애지중지 길렀다고 자부(自負)해 왔던 딸이 어느 날 시집이라고 갔다.
그런데 친정엄마가 함께 있는 장소임을 망각한 채 시어머니만을, 마치 친정엄마는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어머님, 이것 좀 드세요. 필요하신 거 더 없으세요? 어머님의 입맛에 맞으시면 더 가져오라 할게요. 어머님, 어머님!"
결혼하기 전, 친정엄마에게는 한 번도 나타내지 않던 친절과 애교를 그렇게나 십분 발휘하고 있는 딸.
의당 그래야 하고, 알뜰살뜰 새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시부모까지 깍듯이 모시는 본때 있는 집안의 딸이 되기를 기도처럼 바랐었고 등을 토닥이며 격려까지 해주고 싶던 예전의 희망사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물며 느닷없이 웬 뒤틀리는 심사(心思)인 것일까.
딸의 하는 짓이 얄미워 밤에 잠이 다 안 온다.
그렇게 예의 바르게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딸이 볼상사나워, 모처럼 걸어오는 딸의 안부전화조차 선뜻 받아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까닭 없이 서글프다.
더불어 터져 나오는 한숨.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사정이 그렇다고 한 번 보낸 딸을 다시 빼앗아 올 수도 없는 문제다.
공연스레 백년지객(百年之客)의 손님인 사위까지 원망스럽다.
문득, 신혼여행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펑펑 울던 생각까지 휘몰아친다.
당연히 보내야 했고 좋은 사위를 얻었다고 감사의 기도까지 드린 마당에 왜 그렇게 빼앗겼다는 생각만 집중적으로 들던지.
한때 미국에서는 '결혼한 미국인의 반수가 이혼을 하고, 그 이혼한 사람의 반수가 여자 편에서 이혼을 제기하고, 이혼을 제기한 여자의 반수를 장모가 뒤에서 조종한다고 하는 말이 유행했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말만 읽어도 마음은 더욱 부글거린다.
그리고 횅댕그렁하게 텅 빈 느낌까지 회오리친다.
혼수비용으로 기만달러씩을 들여 이고지고 실어 보낸 자신이 갈수록 미련스럽고 후회된다.
그런 식으로 쩔쩔 매며 지내는 딸의 변모(變貌)는 불쾌지수의 극치다.
어깨에서 가슴께로 통증 비슷한 게 옮겨 다니는 느낌이다.
춥고 시리다.
이러다 병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 하는 가운데, 어느 연구소의 현명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결이 새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락은 신체적으로 커다란 즐거움을 가져다주며 일상생활의 고뇌에서 탈피하게 한다.
*매일 산책하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남을 이해하며 다툼을 피하고 될 수 있는 한 많이 웃어라.
결국 웃어야 하는 모양이다.
딸은 시집이라는 새 터전에 믿고 맡긴 채 그야말로 여유와 평온을 갖추고 더불어 사는 삶을 이룩해야 할 것만 같아진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큰 매력은 터질 듯 무너질 듯 아슬아슬 위태롭다가도 몇 년에 한 번 씩은 호경기가 불어 닥친다는 데에 있고, 장모라면 어렵고 두려운 존재로 여기면서도 장모를 가장 많이 모시고 사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라는 점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는 사실인 것이다.
누군가 결혼을 하고 있고 앞으로 수도 없이 결혼들을 할 것이다.
지구는 변함없이 궤도를 향한다.
우리의 딸들은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가슴 찡하게 친정엄마를 의식(意識)하면서도 , 속은 물론이고 겉으로도 시어머니만을 떠받들며 살아 갈 것이다.
분가(分家)는 기본이다.
어쩌다 만나는 사이도 기본이 되어 버렸다.
이왕 빼앗겼으니 잘 살아 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대체 자식이란 무엇일까?
장모는 또 무슨 못난, 왜 이다지도 뒷전만 같은 역할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노래나 부르게 된다.
하필이면 그 노래다.
미국에 여행 가서 박장대소 하며, 그러나 절반은 눈물 찔끔대며 들었던 곰의 짝사랑 노래.
"다른 세상, 우리 모두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네!"
2012년 4월 25일 수요일
한 아들이 세상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아노니모=작자미상(스페인어권)
내가 바라는 것들 모두를 들어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내가 요구하는 것을 얼마만큼 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럴 때도 있습니다.
내게 아무 때나 야단치지 마십시오.
그럴 때마다 당신에 대한 존경심이 감소되는 걸
순식간에 깨닫게 됩니다.
또한 나에게 소리 지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나는 그러기를 결코 원치 않습니다.
내게 명령하지 마십시오.
어떤 때, 명령을 피하고 부탁처럼 말해도
나는 더욱 더 잘 들을 수가 있습니다.
약속은 꼭 지켜 주십시오.
좋은 약속도 중요하지만
나쁜 약속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보상(補償)을 약속하면 꼭 지켜 주세요.
비록 그 약속이 벌을 내린다는 것이었을지라도.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내 형제와의 비교는 내게 일말(一抹)의 고뇌이며
일종(一種)의 패배인 것을.
당신이 딴 사람과 나를 비교할 경우
제가 좋은 쪽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나로 인해 고통 받습니다.
나쁘게 비교하는 자리에 나를 올려놓으시면
내가 나 스스로에게 커다란 부담을 쌓게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당신의 생각을
너무 자주 바꾸지 마십시오.
먼저 정당하고 적절한 선택을 하십시오.
당신의 생각과 긍지에 대해서
내가 혼자서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자립심을 안겨 주십시오.
당신이 내 대신 모든 일을 해내면
나는 절대로 아무 일도 배워낼 수 없게 됩니다.
내 앞에서 거짓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한테 거짓말을 시키는 일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비상수단이 되고 타당한 이유가 있을지라도
그럴 때는 우선 기분이 안 좋게 되며
당신이 내게 말하는 다른 것에 대해서도 신뢰가 사라지고 맙니다.
언제든지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왜 잘못을 한 거냐고 따지지 마십시오.
때로는 나도 모르게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틀리거나 잘못 했을 경우
당신의 실수를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에 대한 판단을 더 높은 곳에 둘 것입니다.
더불어 나는 잘못을 인정하는 법까지 배우게 됩니다.
당신의 친구에 대한 친절을 나에게도 베푸십시오.
가족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닐 테니까요.
당신이 꺼리는 일에 대해서
내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이 하는 일만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무리 거기에 대한 별다른 단서가 붙을지라도
나는 당신이 모든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 말라면 안하고 하라면 해야 할 때에
혼란이 생길까 그점 몹시도 두렵습니다.
내게 신(神)에 대한 믿음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본 받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믿음이나 사랑 없이 살아가는 걸 보는 일은
학교에서 아무리 많은 공부를 익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별다르지 않다는 걸 깨우치게 됩니다.
내가 내 문제, 내 고민을 꺼낼 때
제발 시간이 없다는 대답을 하지 마십시오.
내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거나
또는 중요하지 않을지라도
시간이 없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대답하는 당신을 앞에 두고
나는 세상에 대한 가치관이 자꾸만 흔들리게 됩니다.
내가 남을 이해하는 자리에
돕는 자리에
사랑하는 자리를 가까이 하고
자연을 바라보는 자리에 남을 수 있도록
당신은 우선 나를 제대로 바라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그런 위치에 있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존경하게 됩니다.
아무리 당신이 그런 일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라도.
.........................................................
-초여름
아들과 사이 좋게 의논하며 번역 했습니다.
...........................................................
<
2012년 4월 24일 화요일
납덩어리와 금덩어리의 변신(變身)
맹하린
옛날에.
부지런하고 규모 있게 생활하기를 모범으로 삼는 농부가 시골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알뜰한 성격이라서 한 푼 두 푼 기회 닿을 때마다 모은 3천 냥을 은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농부의 집에는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와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나그네는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샛노란 금덩이 하나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별안간 부탁드려 죄송한 일이지만 이 금덩어리를 맡으시고 돈 3천 냥만 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며칠 안으로 삼부 이자를 포함해서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 금덩어리는 농부의 눈에 몇 만 냥도 더 나가는 값어치로 가늠되었다.
하물며 며칠도 안 지나 3부 이자까지 주겠다는 언질이었다.
당장에 현혹된 나머지 농부는 서슴없이 돈을 내 주었다.
그런데 밤중이 되어서야 석연찮은 의심에 휩싸이게 된 농부는 나그네가 맡겨 둔 금덩어리를 꺼내 세심하게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었다.
이윽고 그 금덩어리가 단지 도금을 했을 뿐, 하찮은 납덩어리에 불과 하다는 걸 알아챈 농부는 혼비백산 놀라고 말았다.
"당했구나, 그 인간이 도둑놈이었다니!"
농부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돈을 되찾을 수 있을까를 순간적으로 모색(摸索)하기 시작했다.
농부는 궁리에 궁리를 다 쏟게 되었다.
(도둑놈은 금덩어리도 아닌 납덩어리를 맡겼으므로 돈을 돌려주러 올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도둑이 돈을 돌려주러 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 납덩어리를 다시 금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
날이 밝자마자, 농부는 장터로 나갔다.
그 장터에서 가장 입이 빠르고 말 많기로 소문난 주모(酒母)가 꾸려 나가는 주막(酒幕)으로 들어가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이미 전작(前酌)이 있었던 것처럼 둘러대는 일도 잊지 않고 해냈다.
이윽고 술에 취한 척 엉엉 울며 주정(酒酊)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주모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농부에게 다가간 주모는 도대체 웬 소란인지를 캐묻게 되었다.
"세상에, 무슨 이런 고약한 일이 다 있답니까? 내 하도 기가 막혀 당장 죽고 만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어젯밤 어떤 선비께서 우리 집에 묵었는데 아. 글쎄 몇 만 냥은 족히 나갈 금덩어리를 하나 맡기면서 3천 냥을 빌려 갔지 않겠소. 그런데 그만 간밤에 도둑이 들어왔지 뭡니까? 값나갈만한 물건이라고는 그 금덩어리 밖에 없었는데 그만 그걸 훔쳐가 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러니 내 이 신세를 어찌하면 좋겠소? 며칠 있으면 그 선비 어른께서 금덩어리를 돌려달라고 찾아오실 텐데, 그런데 과연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나는 죽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별다른 도리는 없을 듯싶소이다. 이 일은 주모(酒母)만 알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절대 비밀이오. 금덩어리를 잃어버린 걸 그 선비님이 아시기 전에 어떻게든 그 도둑을 잡아야지 않겠냐는 말입니다요."
한 바탕 굿을 치룬 후 농부는 집으로 돌아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나절도 되기 전에 농부의 목적은 달성(達成)되었다.
말 많은 주모는 농부의 말에 살과 피를 붙이고 발라서, 온 장터에 소문을 퍼드렸다.
그 소문은 그 지방 전체에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당연지사 그 도둑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흐흐흐. 호박이 넝쿨 채 들어왔다 했더니 금상첨화(錦上添花)구나. 좋다! 당장 그 얼빠진 농부놈 집으로 가야겠다. 어서 금덩이를 되돌려달라고 다그친다면, 놈은 꼼짝없이 있는 재산 모두 처분해 내게 넘겨주지 않고는 못 배길 테지. "
이렇게 중얼대던 도둑은 돈 3천 냥에 3부 이자까지 합친 보따리를 들고 농부의 집으로 찾아 들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금(淘金)한 납덩어리와 농부의 회초리였다.
위의 예화는 탈무드에서 읽었던 것도 같고,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봤던 것도 같으며, 한국의 예화집에서도 접했던 걸 약간 손을 보았다.
반향사고(反響思考)는 결코 우연히 이룩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생각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침착함은 선천적으로 형성되는 것만도 아니다.
사회와 가정과 교육 환경의 영향과 후천적 형성으로 성립된다.
어떤 일에 당면(當面)해도 우선 침착성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올바로 주시하고 반향사고로 끌어내도록 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과 대면한다고 해도 좋은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2012년 4월 23일 월요일
검정 린넬 오우버 코우트 파이팅!
맹하린의 생활산책
아르헨티나한국일보
1997년 7월 23일
지난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성수대 앞에서 예수의 십자고난상을 향해 조배(朝拜)하다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5년 전에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났던 이세실리아가 몇몇 교우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서였다.
"세실리아!"
발가운 마음에서는 어린애처럼 소리치며 달려가고 싶었지만, 엄숙한 장소인 성당안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서나 알아 들을 수 있을까 싶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다가갔다.
처음에는 내 목소리를 못 알아 들은 모양이었지만 여러 사람과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던 그녀도 어느덧 나를 발견하고는 5년전하고 똑 같은 형태의 웃음, 어깨를 잔뜩 움추렸다 펴면서 후후후, 그렇게 싱겁게 웃어 버리는 웃음부터 보내왔다.
서로 껴안고 등을 두들겨 주며 반기다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약간 떨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보게 되었다.
5년 전 떠날 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에다, 예전에는 없어보이던 발랄함까지 넘쳐나 있었다.
놀라운 일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줄기차게 입어냈던 검정색 린넬 오우버 코우트를 여전히 걸치고 있는 모습이라니...... .
성가대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날 때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아크처럼 언제나 잘 어울리게 입어내던 그 코우트는 전혀 낡지도 않았고, 5년 동안 미국 물 먹고 몰라보게 날씬해진 세실리아보다 더 튼실하고 훨씬 더 건재(健在)해 보일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교직(중학교 국어교사)에 종사했다던 세실리아는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교육자적 기품(氣品)과 적당한 겸손과 기분에 따라 마음을 허물어 수다까지 떨줄도 알아서, 그녀를 만나는 횟수가 잦을수록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맑은 맘씨의 소유자라는 인식(認識)을 새록새록 다져온 터였다.
그런데 그 코우트만 바라보아도 그녀에게 배가(倍加)된 경외심이 점차 솟구치고 있었다.
이민 온 햇수가 오래된 교우들이라면 하나같이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 전화번호와 가게의 주소를 적어주고 그 자리를 금세 벗어났다.
그렇던 그녀가 화요일 아침나절에 우리 가게에 나타났다.
그녀는 아주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검정 린넬 코우트를 걸치고 있었고, 목에는 파스텔 색조의 머플러로 변화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가까운 까페떼리아에 갔다.
계속 웃어대고 있어서일까.
그녀는 사실 제트레그(배행기 여행의 시차로 인한 피로)에 시달리는 것 같은 기운이 한 톨도 엿보이지 않았다.
5년동안 크리스머스 카드를 몇 번 주고 받았을 뿐, 다시는 못 만날 관계처럼 적조했었는데도 우리는 결코 서먹하지 않게 스스럼 없는 얘기를 서로 한참이나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이나 남미나 내 나라 떠나와 고생스럽기는 매일반이 아니겠느냐는 공감대가 저절로 형성돼서였을까.
그녀와는 언제나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저절로 통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핏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혹시 그 코우트 미국으로 가기 전에 입던 옷, 맞아요?"
세실리아는 막 피어오르는 풀꽃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그녀는 오래된 코우트를 입고 다닌다고 해서 절대로 창피하지 않은 데다. 도리어 의젓하고 덧떳한 표정을 자신감 넘치게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단해요, 대단! 내가 알기로는 이 나라에서도 5년 정도 입었던 것 같은데."
"후후후."
그녀는 그렇게 후후거리는 웃음을 새삼스럽다싶을 정도로 웃더니 내 말에 대한 답을 조심스레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교사생활 할때 장만해서 5년을 입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입어왔으니까 아마 15년쯤 됐을 거에요. 오래된 옷이지만 해가 묵을수록 아껴 입게 돼요. 요즘엔 옷이 떨어져서 못 입는 시대는 아니잖아요. 엄마에게서 일제시대에 고생하시던 얘기를 자주 들었어요. 그 당시엔 잔소리처럼 들렸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귀감(龜鑑)으로 간직하게 됐나 봐요."
무척 쑥스러워 하면서 또박또박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도 정금(正金)하게 비쳐졌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려서일까.
잠시 숙연한 표정이 된 세실리아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지닌 품성과 어떤 격조(格調)같은 게 곱다랗게 풍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의 가진 사람들은 지난 날의 어려움을 일부러라도 잊으려 한다.
어떤 면으로는 고의적으로 묵과(黙過)하면서 사실은 가장 소중했던 순간들이었음을 밀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어려웠던 시절이야말로 가장 순수했고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말이다.
나는 불현듯 진정한 교육자 한 사람과 알고 지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겨우 깨우친 사람처럼 든든함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시차문제는 어때요?"
"내가 워낙 커피광이잖아요. 그걸로 땜질하고 있어요."
"땜질?"
나도 그에 맞먹는 말로 대응했다.
"비행기, 그 콩나물 시루인지 사람시루인지는 언제 또 타죠?"
"내일."
"그렇게나 빨리요?"
"우리를 밥먹여 주는 직장 때문에."
"미국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말하죠. 직장, 직장!" 그렇다면 우린 밥도 못 먹고 헤어져요?"
"그럼요, 미국에 와도 우린 밥을 못 나눠 먹죠."
우리는 까페떼리아가 떠나가라 크게 웃다가 금세 어깨를 움추렸다.
그녀가 아르헨티나에 살 때의 에피소드가 마치 텔레파시처럼 함께 떠올라 커다랗게 웃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소리를 죽이며 자꾸만 함께 웃어댔다.
호세 마리아 모레노 거리에 있는 대형 통유리로 된 까페떼리아에서 그녀와 약속했던 날이었다.
그녀는 나와 얘기하면서 한 무릎을 의자 위로 올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었다.
그녀는 디스크를 좀 심하게 앓는 편이라 자가용 안에서도 그런 자세를 자주 취해왔다.
모소(보이)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때 알았다.
놀라운 얼굴로 달려오는 것보다 신랄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 오는 게 더 험악한 상황을 연출한다는 사실을.
그런 자세가 보기에 아름답지 못하니까 당장 나가 달라는 지적이었다.
그때 내가 세실리아를 두둔했었다. 디스크 때문에 그러니 봐 주라고.
그랬더니 모소가 단박 받아치는 대꾸를 했다.
자세를 바르게 할 때까지는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더불어 모소는 두어 번 자신의 험악한 표정에서 꺼내 쓰는 듯한 날카로운 표현을 칼처럼 휘둘렀다.
-인 모랄, 인 모랄(비도덕적, 비도덕적)!
세실리아와 나는 그때의 난처했던 장면을 동시에 추억하며 낮은 소리로 합창했다.
"인 모랄, 인 모랄!"
새삼 단정하건대, 내 주위사람 어느 누구도 15년 동안 한 벌의 코우트로 추위를 감싸는 여인을 한 사람도 못 봐왔던 것 같다.
다음날 저녁 8시.
세실리아 내외를 배웅하기 위해 에세이사 공항에 나갔을 때, 혹시나 하고 세실리아의 그 검정 린넬 오우버코우트부터 찾아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있었다.
이번엔 모조진주의 악세서리가 왼쪽 깃에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뒤늦은 깨달음을 안을 수 있었다.
화려하고 값비싼 옷치장이 멋이 아니라 세실리아와 같은 그러한 소탈함과 알뜰함이 진정한 멋이라는 것을.
석별(惜別)의 인사를 나누고 그녀 내외가 환송대의 트랩에 오르자, 나는 잘 가라고, 또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연신 손을 흔들어 대며 마음 속으로는 열망껏 소리치고 있었다.
"파이팅! 세실리아, 그리고 검정 린넬 오우버 코우트 파이팅!"
2012년 4월 22일 일요일
한국인으로 다른 나라에 살아가는 날의 삽화(揷畵)
맹하린
토요일 오후 7시에 있었던 C교회의 Total웨딩 꽃을 도맡았던 나는 사흘 동안 쉴 새 없이 바빴다.
금요일은 많은 꽃을 구입했었고, 장식과 납품과정까지 한 치라도 손색없이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인생사(人生事)가 항상 그렇듯, 큰 행사를 맡은 날은 주문이 더 많이 겹치고 한두 가지의 크고 작은 차질(差跌)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엔 오후 2시에 도착되기로한 트럭이 말썽이었다.
모든 결혼식 꽃을 우리는 가게에서 장식한 뒤 트럭으로 납품해 왔다. 해당 교회에서 일하게 되면 일의 능률도 떨어지는 데다, 시간이 서너 배쯤 더 걸리게 되고 밤까지 세워야 되는 불편함이 따라서였다.
항상 5분 정도는 늦어 왔지만, 15분이나 늦는 경우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15분 뒤에 막상 도착한 트럭은 시동이 잘 안 걸리는 문제가 있었나 보았다.
아들은 밥보(바보)는 아닌지라 아치라거나 꽃길에 사용할 소품들을 무조건 싣지 않고, 우선 차를 버스정거장인 우리 가게보다 약간 뒤쪽으로 대라고 지시한다.
시동에 문제가 있을 경우 실었다가 다시 내리는 수고와, 시간을 길에서 허비하는 낭패를 맛보고 싶지는 않은 포석(布石)같았다.
20미터도 못 움직이도록 다시 시동이 안 걸리는 트럭.
나는 다가가 현지인 기사에게 친절을 다해 부탁하게 된다.
“당신 회사에 전화해서 다른 차로 교대할 수 있나요? 똑 같은 크기거나 더 크다고 해도 상관은 없어요.”
늦게 왔어도 한 마디도 짚고 넘어가지 않지
시동이 안 걸려도 전혀 당황하지 않지
다른 차로 교체해 달라고 명령도 안 하지
시동이 안 걸리는 트럭을 오히려 가엾어 하는 내게 감동한 그 기사는 단박에 회사에 전화했고, 대신 오게 될 동료에게 까지 전화해서 15분 후 더 큰 트럭이 도착되도록 최대한의 선처를 다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불붙기 직전인 그의 속통에 성냥을 그어대는 인간은 못된다.)
그 기사에게 애석한 일이었다면서 팁도 건네고,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고 악수까지 나누기를 나는 솔선수범 해냈다.
교회에 도착해서 하얗게 칠해진 쇠로된 소품들과 꽃장식들을 교회 마당에 일단 옮길 경우 기사들이 약간이라도 도와주면 나는 팁을 더 얹어준다.
허리가 아파서, 팔을 다쳐서라고 적절한 이유를 다는 기사들한테도 나는 꼭 팁을 내주어 왔다.
그리고 팁보다 더 중요한 건 가식(假飾)없는 친절이다.
쓰잘데기 없는 얘기 안하면서 마치 내 오랜 동료처럼 대해주는 편안함 말이다.
국위선양(國威宣揚).
한국인으로 태어나 외국에 얹혀살면서 아플 때 무료로 치료해주고, 아들이 초등학교부터 대학 다닐 동안 무료로 다닐 수 있었고, 부에노스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몇 년 동안 학비라고는 낸 적도 없었고, 책은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카피했었기 때문에 책값 하나 안 들었고, 버스나 전철비 밖에 안 들었던 고마운 나라에 대해 내가 감사하면서 내 나라를 손톱만큼이라도 알릴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언제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내 편에서가 아니라 그들 입장이 되어주는 게 내 사고방식이고 방침(方針)이랄 수 있었다.
이 작은 일들조차 누구한테 배우고 익혀서라기보다 나는 위대한 우리나라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一員)이라서 더 그래왔을 것이다.
체널 2 아메리카 방송의 어느 코미디 프로에서 활약(活躍)하는 유태인 Korol을 주축(主軸)으로 한 남녀 코미디언들이 중국슈퍼에서 동전 대신 캐러멜을 거스름 삼아 내주는 현실(現實)을 풍자하여 우리 교민사회, 특히 교민인터넷 게시판이 며칠 동안 와글와글 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슈퍼마켓은 중국인들이 생업으로 삼고 있는 판국인데, 한국인이라고
지칭(指稱)한 데서 문제가 야기(惹起)된 것이다.
작금의 아르헨티나는 지폐를 가까운 이웃나라에서 발행해 오고 있고, 동전도 품귀상태다.
새로 나온 2페소의 동전을 나는 겨우 하나만 기념주화로 모시게 되었을 정도다.
정말 시중에 더 돌고 있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귀한 2페소 가치의 동전들...
어떤 면으로는 동전의 품귀상태를 회자(膾炙)시켰을 확률을 배제할 수는 없겠다.
또한 아베쟈네다 의류도매상가가 유태인으로 조성되었던 역사를 점차적으로 변환시켜 한인들이 거의 확보한데서 오는 원한이 개입되었을 확률 역시 유념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물론 유태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아베쟈네다를 점령당하긴 했어도, 그들은 이미 건물주로 격상하여, 3년에 한 번씩 되돌려 주지 않아도 법적으로 아무 조치를 당하지도 않는 권리금을 기만 달러에서 기십만 달러까지 챙긴다.
하물며 다달에 월세까지 오천달러에서 1만 달러까지도 챙기는 잇점까지 따르고 있다.
하지만 건물을 소유하지 못했던 유태인들도 많아서 상권을 빼앗겼다는 라이벌 의식에서 일이 그런 방향으로 흘렀으리라는 관점도 없잖아 있으리라고 사료(思料)된다.
이번 기회에 따끔히 혼을 내줘야 한다는 측과 코미디는 코미디일 뿐이므로 조용히 지켜보자는 사람들로 양분(兩分)되어 그 귀추(歸趨)가 주목되는 형세다.
물론 나는 조용히 지나가자는 온건파라고 볼 수 있다.
페이스 북에 오른 해당 관련의 글에 대한 조회 수가 이미 7만을 넘었다고 한다.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잘못 입을 열면 코미디가 되고
잘못 입을 달싹이면 비난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사안이다.
조용히 관망할 생각이다.
2012년 4월 19일 목요일
이 아침을 얹어
맹하린
“투둑 투둑.”
식물의 싹이 트이는 소리가 들린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귀에 대고 있는 무선전화기 속에서 투둑거림이 한동안 이어진다.
국제전화가 걸려오는 중일 때는 사람의 목소리 이전에 꼭 이와 같이 투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한다.
이럴 때 나는 누구일 것인가를 추측해 보는 게 아니라, 그 누구인가의 목소리가 어서 트이기만을 기다린다.
“얘!”
“아, 너구나.”
친구 K.
아들과 딸은 영국의 왕립대학에 유학 보내고, 포항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그 친구의 남편은 어쩌다 서울에 상경하니까 공백의 시간을 그림과 외국어 익히는 데 바치면서 정원이 딸린 주택에서 아름다운 영화의 주인공처럼 잔걱정 없이 살아가는 친구와 전화를 통해서나마 오랜만의 회포를 나누고 다른 동창들의 근황까지 듣게 되었다.
몇 년 전 귀국했을 때, 내게 문운(文運)이 터지라며, 그리고 앞으로 글 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예뫼골, 양수리, 전주의 송학사와 덕진연못, 진주의 남강과 청학동까지 골고루 구경시켜 주면서 배려 가득한 우애를 아끼지 않고 발휘해 주던 친구였다.
나는 누구에게 신세 지는 게 싫어서 비행기 값 등등을 필히 각자 부담으로 해냈다.
안내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었다.
꽤 오랫동안 통화를 했기 때문인지 나중엔 목에 모래가 걸린 것처럼 깔깔해져서 아쉽게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종일토록 일하는 구메구메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이민 와서 애환을 같이 나누며 지내온 친구들을 산뜻하게 견주어 보게 되었다.
지금은 미국으로 재이민을 갔지만, 이곳에서 의류도매상을 경영할 때는 무척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까, 아이들의 교복단추가 떨어지면 자동차 안에서 꿰맸을 정도로 빈틈없는 시간들을 보냈다고 하는 지현엄마.
그녀 뿐 아니라, 내 주위의 그 누구도 한국의 친구들처럼 귀부인과 같은 품위와 겨를의 여유 속에서 지내는 사람은 없다,
기반을 잡았건 못 잡았건 아직껏 바쁜 틀 속에 살고 있고, 어쩌다 가게가 좀 뜸한 날은 그나마 바쁠 때가 차라리 아프지 않고 맘까지 편하더라고 일 자체를 필요충분조건처럼 말하는 형편을 즐기며 살게 되는 이민 살이라는 행동반경(行動半徑).
굳이 이민친구나 한국친구 그 어느 편이 더 행복할 것인가 하는 우매(愚昧)한 숙고(熟考)는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가 않다.
이민생활이라는 것은 어려운 난관을 여러 차례에 걸쳐 헤쳐 나가야 하는 장애물 경기와 같고, 확실히 이민 친구들에게서 더 진한, 미운 정 고운정이 들어버린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現想)으로 굳혀졌을 것이다.
개인주의에 익숙지 못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자나 깨나 가족과의 생활 이외에 특히 모임이나 신앙생활에 더욱 마음을 쏟고 있음을 자주 접하고 보게 된다.
타산지석(他山之石).
다른 산에서 나는 돌이라도 자신의 옥(玉)을 갈고 닦는 데에 유익하다는 이 말의 비유가 유난하고 절실하게 마음에 당기어지던 하루였다.
이민자의 틈바구니에서 모나지 않은 품성과 지(知)와 덕(德)을 쌓는 일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어 주는 여러 괜찮은 친구들.
만나고 싶은 친구는 여럿인데 서로의 시간이 너무 엇나가고 있다.
산책 삼아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은 날이다.
산책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일이 내게는 바로 휴식이 되는 것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밖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데도 소나기가 퍼붓는 느낌을 받을 때 많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있는 듯 한 포근함 또한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즈넉함으로도 유도(誘導)해 준다.
퇴근길의 투명한 어둠.
그 시간의 어스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빛깔을 지니고 있다.
푸르고 차갑다.
하늘이 어찌나 청명한지 마치 다른 세계에 닿은 느낌이기까지 하다.
차들이 미등(尾燈)을 켜고 서서히 달리는 모습도 정겹기만 하다.
친구와 친구 사이의 간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정석(定石)이다.
친구들은 항상 있을 곳에 있다.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통하는 장소.
표현 바로 그 속에 말이다.
가을은 하도 맑아서 작은 북에서나 울릴 듯한 둔중한 음(音)들이 길섶에서 살아 숨 쉬듯 둥둥둥 구른다.
나는 요즘, 기도 또한 소신껏 바치게 된다.
우정은 사랑 그 자체에서도 오는 것 못지않게 우정의 바깥에서도 오고 있음을 점차 깨닫고 또 깨닫는다.
엊그제, 아침을 온통 내게 바친다는 편지를 보내 온 그대.
그리고 좋은 글과 음악을 보내준 그대들에게도
청량한 이 아침을 얹어 시 한 편 바친다.
우리는 언제 만난 적이 있다
-고증식
(지난 밤 꿈을 깨어 이 글의 제목을 얻다)
바라만 보아도 따뜻해지는
사람이 있다
변함없는 사람이 있다
전자우편 한 줄로도 근황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믿고 싶은, 나이와 관계없이
친구 같은 사람이 있다
불현듯 그리워지는 사람
생각만으로 가슴이 훅 뜨거워지는
사람,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런 사람, 이런 장소
이런 나라가 있다
2012년 4월 18일 수요일
새로운 숙제
맹하린
이민 오니까 하루 이틀이라는 날들의 개념(槪念)이 자주 사라졌다.
일주일 단위가 하루라도 되는 것처럼 잠자고 나면 토요일.
오늘이 무슨 요일일까를 떠올려 보면 벌써 토요일이고는 했다.
너무도 쉽고 아쉽게 흐르고 흘러 오로지 기억 속에서나 남아 있을까 말까한 나날들.
이민 생활을 하는 대다수의 여인들이 살림만 하는 게 아니라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고충(苦衷)까지 안고 있어 토요일이라고 해봐야 반공일이 아니라 완벽하게 노동을 더 많이 하는 날이 되기도 한다.
일주일 동안 밀린 집안일 하랴 , 대청소 하랴, 김치 담그랴, 운동 하랴.
일을 하지 않고 가사(家事)만 돌볼 때는 남아 있는 생애를 하릴없이 갉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 때문에 거의 죄책감에 젖으며 살았었다.
그런데 막상 생업에 종사하게 되니까 시간이 모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치웠다는 만족감 같은 게 뿌듯하게 채워지는 장점도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종의 깨달음이 생겼다.
구태여 스스로 숙제를 만들지 말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주어지는 숙제나마 제대로 풀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길일지라도 뜻대로 찾아가지 못하는 형편이니 마련된 길이나마 제대로 가리라고 작정하게 된 것.
돌을 끌고 갈 때, 미개인들은 죽을힘까지 다하는 데다 끙끙거리기까지 마다않으며 끌고 간다고 한다.
수레에 올려서 끌고 가라고 문명인들이 제안(提案)해 주면 미개인들은 문명인들을 바보 취급하며 웃어 준다고.
"너희는 참 멍청하고 바보 같기도 하다. 돌멩이도 무거워 죽을 지경인데 수레까지 끌고 가라고 하다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적당히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지라도, 둘을 알려주면 하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평화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에 잠길 때, 간혹 있다.
발자크는 날마다 열여섯 시간을 바치며 수십 년에 걸쳐 생업에 종사했지만, 하루에 30~40매의 원고를 쓰는 창작 일정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 냈다고 한다.
모파상은 서른 살에 시작한 습작활동의 원고뭉치가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였다고도 한다.
적당히 책을 읽고 적당히 친구를 두고 적당히 인터넷을 서핑하고, 특히 음악을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써내는 내 생활의 중요한 특징들은 글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적 의지와 염원에 근거(根據)하며 생성(生成)되는 듯싶다.
나 비록 세상일에 게을러도, 글 쓰는 일에만은 부지런하기를 언제나 실천하고 힘써 왔다.
아베쟈네다에서 옷가게 하는 친구 J는 말한다.
고객이 가게에 들어서면 절대로 허탕 치고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장사를 해내다보니까, 직원들 역시 그렇게 따르더라고 자랑이 넘치고 넘친다.
나는 고객들에게 친절한 편이지만 꼭 장사를 위해서 그러지는 못한다.
나는 글에게나 그런다.
글이 나한테서 뭔가를 발견하고 내게 정도껏 삶에 관한 일종의 태도나 해석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됐다고 해서 사회나 개인이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사회의 흐름을 가늠하고 중대한 척도(尺度)로 삼는 문화라는 도도한 흐름은 이미 오래전에 도래(到來)되었을 것이다.
보편적 정신과 문화와 삶은 일종의 규정(規定)이 될 수도 있다.
규정(規定).
그건 지키라고 만들어졌지만, 지키지 못해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말 그대로의 규정(規定)인 것이다.
우리, 그리고 나는 휴식이 보장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하늘을 나르고 많은 구경에 시간을 투자하고 수많은 경치를 사진으로 남기고 바듯한 일정에 정신을 빼앗기며 해내는 여행만 진정한 휴식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언제 어디에 있어도 즐겁고 느긋한 시간을 마음에 초대(招待)해야 할 것 같다.
오드리 햅번이 아들에게 말한 아름다운 손.
"너의 손이 두 개인 이유는, 한 손은 너 자신을 스스로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타인을 위한 손이라는 것."
아름답다는 건 분명하지만, 가시나 줄기가 더 많은 꽃들.
그 꽃들을 다루느라 나 이미 노동자의 손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확실하고 분명해졌다.
글이라도 바치고 나누며 아름다운 손으로 살아가겠다는 것.
오늘 나는 새로운 가치관을 숙제로 지시 받은 것처럼
새삼 환한 새벽을 맞게 된다.
2012년 4월 17일 화요일
덴마크의 방풍림(防風林)
맹하린
아르헨티나뉴스
"대대적인 국유화 없다"
YPF 국유화는 대대적인 국유화 바람의 시작이 아니라고 여당 고위관계자가 밝혔다. 여당 하원의원 로베르또 펠레띠는 "YPF를 국유화하기로 한 건 핵심적인 자원인 석유의 개발과 공급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라디오10과의 인터뷰에서 "스페인 정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 자성하길 바란다"면서 "스페인의 이해관계는 렙솔을 넘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펠레띠 의원은 또 "대대적인 국유화 정책이 시작된 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펠레띠 의원은 "경제위기가 있을 때 모든 외국인기업이 그렇듯 YPF도 그간 아르헨티나에서 벌어들인 돈을 스페인으로 보내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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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내가 아침마다 일과처럼 들르는 교민상조회게시판에서, 최근 이슈화 되고 있는 이 뉴스를 보면서 문득 채근담에서 읽은 예화가 떠올라 옮긴다.
시대가 격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날이 느끼는 게 아니라 시시각각 느낄 때 매우 많다.
한 나라의 부흥은 정치로만 이룩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묵상하게 된 예화였다.
국유화.
제휴기간 동안 70퍼센트를 재투자하리라는 약속도 전혀 안 지켜졌고, 그렇게 재투자해야 할 자산을 다른 부유한 나라에만 쏟았다는 여러 요인(要因)이 걸림돌이 되어 이런 사태가 닥쳐왔다고 보여진다.
모두 압수한 건 아니고, 우선 50퍼센트 정도를 관할하리라고 한다.
옳고 그름, 그리고 정책의 바름과 그르침은 역사가 말해 주리라 여겨진다.
위의 뉴스를 옮겨 올 수 있어서 교민상조회게시판을 관리하시는 담당자분들께 무한감사 했고
그리고 펌이라서 엄청 미안했음.
큰 이해 있으시길~~~
모두, 우리의 조국과
우리가 얹혀 지내는 나라와
우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살아 나가야 할
세상을 사랑하는 맘에서였다고 여겨주시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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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덴마크는 지금부터 120여 년 전에는 쇠나 석탄 등의 지하자원이라고는 전혀 없는 패전국(敗戰國)이었고 가난에 찌든 볼품없는 나라였다.
물론 남쪽의 기름진 땅이 있었지만, 적국(敵國)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넓지도 못했던 나라가 더욱 작아진 것이다.
유틀란트 반도를 거의 차지하고 있는 덴마크였지만, 서쪽 지역은 바다에서 불어 닥치는 바닷바람으로 나무도 풀도 돋아날 수 없는 사막과 같은 모래땅으로 점차 초토화 되는 추세에 있었다.
엔리코 달가스.
이미 노년에 접어든 그는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그 땅을 옥토로 만든다면 덴마크는 부유한 나라로 전환되는 일도 전혀 어렵지 않으리라는 각오 같은 걸 굳히고 있었다.
바다와 땅 사이에 방풍림을 조성하는 숲을 만드는 일을 계획한 것이다.
군대에서 공병으로 근무했던 그는 지질(地質)이나 식물에 관한 지식에 어느 정도는 도통한 인물이었다.
덴마크보다 더 추운 나라인 노르웨이에서, 성장에 이렇다 할 문제가 없다고 정평이 난 큰 전나무를 수입해다 심는다면, 가히 희망적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굳힌 그는 일을 서둘렀다.
가진 돈 모두를 투자하여 노르웨이산 전나무의 묘목을 사들인 것이다.
유틀란트 반도의 거친 모래땅에 심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도움을 주지도 않았고, 미친 짓이라는 욕만 먹기 일쑤였다.
처음엔 잘 자랄 것처럼 보이던 큰 전나무는 억센 북풍에 견디지 못하고 이내 시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프레드릭 만큼은 언제나 아버지를 도우며 두둔했다.
"염려 마세요, 아버지. 제가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이게 다 , 우리의 일만 되는 건 아니고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윽고 알프스의 산에 자라는 전나무가 바닷가에서 자라기엔 더할나위 없이 알맞은 품종이라는 것 또한 짧은 기간동안에 알아낼 수 있었다.
그 나무는 키가 낮아 바람이나 모래에 잘 견딘다는 것을 실험으로도 깨우쳤다.
그들 부자는 큰 전나무와 작은 전나무를 섞어서 심어 보게 되었다.
서로 보호자가 되고, 바람이나 모래에도 강한 작은 전나무가 큰 전나무를 지켜 주기까지 하며 함께 공생공존하리라고 전망(展望)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염원은 맞아 떨어지는 것도 같았다.
두 종류의 나무들이 함께 튼튼히 뿌리를 내려 싱싱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키가 많이 자라야 방풍이 될 텐데 키가 잘 크지 않았고, 오히려 작은 전나무보다도 못 자라나는 이변(異變)이 키 큰 전나무에게 생겨나고 있었다.
달가스의 낙심은 매우 컸다.
그러던 중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프레드릭은 혼자서 아버지가 하던 일의 뒤를 이어 언제나 바닷가로 삽을 들고 나갔다.
아버지 달가스가 걷던 수십 년의 길을 그 역시 걷게 된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프레드릭은 큰 전나무 한 그루가 높게 자라나고 있음 을 순간적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나무에 바짝 다가가 자세히 살펴 본 프레드릭은 그 한 그루의 전나무가 키를 높이게 된 까닭을 금세 캐낼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는 통로(通路)였기 때문에, 전나무 둘레의 작은 전나무들을 다 베어 버렸다는 결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 그랬구나!"
프레드릭은 그제야 큰 전나무가 못 자라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큰 전나무의 묘목은 바람에 약하기 때문에 강한 작은 전나무와 함께 섞어 심어야 뿌리를 내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뿌리가 내린 다음에 키가 못 자라나는 이유는 작은 전나무가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뿌리가 일단 자라기 시작하면 작은 전나무를 잘라 주면 큰 전나무는 제대로 된 성장을 촉구하는 이치(理致)가 성립(成立)되는 것이었다.
프레드릭은 아직 시들지 않은 큰 전나무와 섞여 있던 작은 전나무를 과감히 베어 냈다.
그러자, 2, 3년도 안 되어 큰 전나무는 몰라보게 쑥쑥 자라 거대한 방풍림이 유틀란트 반도의 바닷가와 모래땅 사이에 기다란 숲을 이루게 된 것이다.
덴마크는 비로소 그 땅에서 농사는 물론이고 목축업을 일으켜 살기 좋은 농업국으로 거듭 나게 되었다.
달가스 부자는 그 후부터 덴마크의 영원한 아버지로 존경받기에 이르렀다.
달가스 부자가 본인들의 이익만 생각했었다면, 그리고 애초에 포기했다면 지금의 덴마크는 여전히 가난한 나라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2012년 4월 16일 월요일
잠투정
맹하린
점심나절에 첨성대 아주머니께서 찾아오셨다.
(고향이 경주여서 그런 명칭이 따르고 있다.)
우리와 가까운 이웃인 A씨의 천정어머니다.
일요일 오후였다.
"아기가 자는 중이오니 초인종을 누르지 마세요. 꼭 필요한 용건이 있는 분은 아주 작게 노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딸네 집 대문에는 서반아어로 어쩌고저쩌고 써놓은 밑에 한국어로 그렇게 쓰여 있었는데, 쪽지의 부탁대로 아주 작게 노크했는 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고 한다.
조금 크게 두드리게 되면 그야말로 자는 아기가 깰까 싶어 하는 수 없이 우리 가게에서라도 기다리다 가려고 찾아오셨다고 했다.
그럴 때의 첨성대 아주머니 이마에는 푸른 실핏줄이 한층 두드러져 보인다.
"쯧쯧쯧, 자식을 그리 예민하게 키우면 이 험한 세상 우째 살아가겠노! 아를 재운다고 지가 먼저 잠든 기나 아닌가 몰라."
몹시 걱정스레 말하고는 있었지만, 표정은 의외로 자애롭고 편안하게 보였다.
이민 올 무렵에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던 첨성대 아주머니의 자녀들은 5남매인데, 이미 장성하여 결혼들을 했고, 아이들을 둘이나 셋씩 두었다.
결과적으로는 손자 손녀가 열둘이나 된다.
한국과 달리 머리를 싸매고 파고들어야 제대로 된 학점을 이수(履修)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의 대학제도에 단체로 넌덜머리들을 내더니,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지방도시에 흩어져 의류도매상과 소매상들을 차례로 개업하더라는 첨성대 아주머니의 자녀들.
이민생활이란 게 남편보다 아내 되는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생업에 전념(專念)해야 하는 고충(苦衷)이 따르기 마련이라지만, 자식들 집에 골고루 찾아가 보면 아이들 키우는 일이 너무나 복잡해 보여 속마음이 미어지는 기분일 때가 무척이나 많더라는 말씀이셨다.
대부분 파라과이나 지방에서 올라 온 현지인 도우미들의 손에 크니까, 저녁에 퇴근해서 아이를 좀 안아보려면 부모를 의외로 낯설어 하고 오히려 가사도우미를 더 따르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습관이나 성격조차 가사도우미들에 의해서 조성(造成)되어지는 기분이 들더라고 첨성대 아주머니는 이쯤에서 혀를 끌 끌끌 차신다.
대부분의 가사도우미들이 남미인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과 선한 인간성의 소유자들이어서, 그리고 어린이와 아기들에게는 제 형제와 같은 애정과 열성을 쏟아줘 이렇다 할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잠투정하는 손자 손녀들을 속절없이 지켜볼 때라고 하셨다.
열 두 아이들의 잠드는 방법이 열두 가지라고 할 정도로 모두 제 각각이라는 것이다.
베개를 꼭 끼고 다니며 잠들어야 하는 습관을 못 버려, 여행을 갈 때도 필수적으로 그 베개를 꼭 챙겨 가야 잠드는 아이.
잠재우는 사람의 턱을 만지면서 잠자는 아이.
고무젖꼭지를 입에 물어야 하는 아이는 기본이고, 아기 침대의 모서리를 잡고 잠들던 습관 때문에 그 어떤 모서리라도 잡아야만 잠들 수 있는 아이.
그런 저런 잠투정으로도 모자라 재우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듯 꼬면서 잠들어, 일찌거니 서리가 내려 얼마 남지 않은 세어터진 머리를 몇 번 쥐어뜯기고는 그 아이를 재우는 일에 대해선 다시는 거들고 싶지도 않더라고 까지 하셨다.
"둘째네 아이들이 그나마 수월하다면 수월하달까, 옛날 얘기나 노래를 틀어주면 되니까 억수로 간단한기라. 제일 속 태우는 아는 첫째 딸의 막내 아닝교. 다섯 살이나 묵은 기 잠잘 때 뿐 아니라 유치원에 갈때꺼정 밴드를 손가락에 붙여야 하는기라예. 사시장철 붙이고 있을락케서 멀쩡한 손가락이 허옇게 짓물렀심더. 그 아 때문에 병원에도 숱하게 들락거렸다캅디더.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부지런히 안아주라카더랍니더."
최근에는 엎드려 재우는 아이들의 질식사가 많다는 통계를 접하고, 집집마다 뉘어 재우느라 그 소란이 말도 못하게 북새통이라고 마치 북새통을 가라앉히듯 다급히 말을 맺으셨다.
동물의 보호본능은 만약의 위험에 처했을 경우, 누워있는 상태보다 엎드려 있는 자세가 가장 원활한 대처를 해낼 수 있고, 잠재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논리는 이제 완전히 한 물 간 사고방식이 되고 만 모양이다.
모성(母性)의 포근함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어 외부(外部)의 충격을 축소화시킨다는 육아관(育兒觀)은 도리 아니게 무시되어지고, 예전에 농사를 짓거나 물자부족의 시절에 살던 때보다 더 커다란 공허를 껴안고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현대인은.
더불어 우리 이민자의 2세나 3세들은.
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쉽게 잠들 수없는 우리 이민자녀들의 잠버릇에 관한 통계를 제대로 파악했고, 집중적인 조명(照明) 을 진지하게 지켜보느라 퍽도 힘들었다는 듯 나는 새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떤 면으로는 약간의 눈물도 글썽이지 않았나 싶어진다.
비가 내려도 잘 자고, 바람이 불어도 잘 자며, 주위가 시끄러우면 그게 또 자장가로 여겨져 이래저래 잘 자는 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밤마다 숙면을 취하게 돼 나의 아침은 날이면 날마다 거뜬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누구나 무병(無病)한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내가 글을 쓰는 일은 누구하고라도 뺨을 맞대고 치루는 인사와 다름 아니다.
그 누구에 상관치 않고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는 일은 내게 바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신(神)의 뜻에 위배(違背)됨 없이 열심히 살아 내겠다.
특히나 덕을 좀 쌓고 싶은데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구태여 대접해 달라고도 안하는데 온통 너무 멀찍하다.
멀찍이를 일삼는 건 어쩌면 나 스스로가 아닌가 싶어진다.
내 이웃이나 친구들과 세상에게 항상 아무 조건 없이 대하는 것, 바로 그러한 일이 곧 신(神)의
내게 대한 지침(指針)이고 뜻인 것 같다.
더 낮아질 생각이다.
2012년 4월 14일 토요일
대한독립만세!!!
맹하린
(대한독립만세!
나는 가끔 이 말을 사용합니다.
혼자서라도 만세를 부르고 싶을 때 특히 그럽니다.
예전에 한국에 살 때였습니다.
홍수환이라는 권투선수가 외국에 나가 상대선수를 이겨 금메달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국인 중계아나운서가 건네준 마이크에 대고 엄마를 향해 부르짖던 감격의 말이 바로 그랬습니다.
대한독립만세!!!
아마 대한민국만세를 그렇게 외쳤을 겁니다.)
엊그제였다.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아들의 친구인 아드리안과 너무도 흡사(恰似)하게 닮은 한국인이 유리문 밖에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
웃음은 몹시도 환했으나 역광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약간 흐릿한 모습이다.
키가 크던 아드리안 보다는 약간 작아 보였고, 훨씬 마른 얼굴이었다.
(미국에 사는 아드리안이 이런 시간에 문 앞에 서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 토록이나 환하게 웃으며 서 있던 사람이 또 누구였더라? 분명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
나는 쉽고도 분명한 답을 어렵게 푸느라 순간적인 혼란을 겪으며, 바람에 문이 닫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문 밑에 고여 둔 작으면서 단단한 상자를 젖히고 조심스레 빗장을 열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의 해바라기 닮은 미소가 피고 또 피는 모습을 무심히 올려다보던 나는 그가 바로 아드리안 이라는 걸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거침없이 작업실을 향해 낮고 기쁜 음성으로 소리쳤던 나.
“다니! 누가 왔네? 반가운 사람 같아.”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가 있었다는 듯 아들은 기대에 찬 웃음을 띤 채 쫑긋 매장을 내다보더니 잽싸고 빠른 걸음으로 튀듯이 다가섰다.
역시 친구는 친구엄마보다 친구가 더 잘 알아 보는 법인가 보았다.
“우와!”
그들의 함성에 가까우며, 환호까지 함께 얽히던 포옹이라니!
나는 그런 장면들을 만나려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감동과 감사를 눈물 글썽이도록 절감했다.
고객들이 기다리는 동안을 위해 마련해 둔 기다란 의자에 나란히 앉은 둘은 장장(長長) 두 시간 이상 쉴 새 없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는 더욱 아니었고 오로지 까스떼쟈노(서반아어)였다.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나 있던 나는 커피도 대접하고 안녕슈퍼에서 감도 사다 깎아 내 주고, 그리고 편의점에 가서 한국아이스크림도 사다 건넸다.
붕어아이스크림.
누가 붕어아이스크림 속에는 붕어가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속에는 없다던 바로 그 붕어가 겉에는 있었다.
그런 대접을 나는 한꺼번에 하지 않고 거의 몇 십분 간격으로 해냈다.
에바 페론 거리에 가면 까페떼리아(찻집)가 몇이나 있으니 다녀오라는 권유를 내가 안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둘 다 지독한 절약쟁이들이라선지 그대로가 좋다는 응수만 산뜻하게 보내오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아르헨티나의 사립대학에서 전산학(電算學)을 전공한 뒤 아르헨티나의 대형마켓인 Disco에서 전산업무(電算業務)를 담당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 아드리안 이었지만,컴퓨터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도 있어서, 오히려 아들에게 질문해 올 때가 많았다.
아들은 컴퓨터를 독자적으로 책보며 익혔지만 컴퓨터의 고수라는 명칭을 그의 친구들에게서 부여 받았을 정도의 컴퓨터 도사다.
아들과 한 치도 다름없이 아르헨티나를 아끼고 사랑하던 아드리안이 미국으로의 재 이민을 떠나게 된 건, 순전히 아르헨티노 상사(上司)가 지르는 고함소리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이나 다른 동료들이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경우에도 그 상급자는 툭하면 고함부터 질러 댔다고 한다.
아드리안은 더 이상 참을 수는 없다는 듯, 부랴부랴 한국인이며 간호대학을 다니던 애인 가비와 결혼을 서둘렀다.
그리고 2년 전에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아드리안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은 큰일을 당했기 때문에 모종(某種)의 전환점을 찾는다기보다는 작은 일에서 더 큰 결정을 포착하게 될 확률이 매우 잦다.
아드리안의 재이민을 기억할 때마다 그러한 묵상 비슷한 터득이 싹터 오르게 됨을 나는 때때로 느끼고 깨닫는다.
부부싸움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다툼 또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항상 하찮은 일과, 똑 같거나 비슷한 레퍼토리가 쌓이고 쌓이다가, 거대한 결정을 단박에 회전시키는 요인으로 굳혀지는 것이다.
컴퓨터의 주변을 정리하고 물걸레로 닦아내던 내게 커튼을 사이에 둔 그들의 말소리가 미풍(微風)처럼 살랑살랑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리고 작은 북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듯 한 나직하고 정겨운 음성의 연이은 웃음소리.
확실히 그들 사이에서는 코드가 잘 맞는 사람들만의 기분 좋은 유대(紐帶)의 공기가 끊임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며칠이고 밤 세워 얘기를 나누라고 해도 그럴 수가 있으리라.
그들의 대화는 절제력을 지녔으면서도 탄력이 넘쳤다.
그리고 신선하면서도 서늘한 감동 역시 스며 있었다.
경제나 정치의 암울함을 돌아보는 시선(視線)을 객관적으로 극복해낸 각자의 맑은 성숙도가 감상성을 배제하면서도 투명했고. 무엇보다 예리했다.
나는 이미 워드를 두들기던 중이라서 그들의 얘기를 거의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간혹 그들이 미국과 아르헨티나에 대한 지식을 비빔밥처럼 뒤섞고 있다는 정도는 저절로 전달되어 왔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2년여를 서로의 간격이나 분주함을 위해 각자의 생활 역시 존중하며 이렇다하게 소식도 없이 지내왔는지 자주 의문이 들었던 현상들이 문득 떠오르고 있기도 했다.
아들은 그동안 페이스 북을 뒤져 아드리안의 딸에 대한 출산소식이라거나 사진을 내게 보여줘 왔기 때문이다.
아들과 아드리안은 서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친구임을 그동안 허다하게 증명해 왔고 그 점 명쾌하고 확실한 사실이었는 데도 말이다.
나는 아들과 친구와의 시간을 거의 침해하지 않으려는 방침이고 철칙이라서 딱 두어 마디만 짧게 말했었다.
"미국에서는 만지는 지폐마다 모두 달러지? 생필품마다 미제를 쓰던데?"
미국도 한국처럼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까지, 많이 가진 자들의 횡포(橫暴)와 아집(我執)에 수없이 도산(倒産)하는 실태에 있고, 직장생활이나 가능한 세상이라는 얘기를 아드리안은 재확인처럼 답으로 제시해 주고 있었다.
얼마나 타이트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면 10년 전에 미국으로 미리 떠났던 10여명의 친구들조차 두 명 밖에, 그것도 고작 한 번 씩만 만나 봤다는 얘기가 나오게 됐을까.
아들의 나중 설명에 의하면 아드리안 가족은 2년에 한 번씩 수속을 마쳐야 하는 비자 때문에 부득불 다니러 왔다고 했다.
며칠 뒤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그들은 헤어졌다.
아드리안과 같은 나라에 살면 좋지만, 미국에 살아도 아들에게는 영원토록 좋은 우정(友情)으로 유지되리라 여겨져 나는 그점을 이렇다하게 아쉬어 하진 않는다.
아들에게 아드리안 이라는 친구가 있어 고마웠던 날이었다.
우리 교민들이 불경기의 여파(餘波)에 기우뚱, 자주 출렁이고 있다고 해도 각자의 사업에 자유를 표방하며 올인 할 수 있어서 그 사실 또한 고맙던 날이었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내 동족, 내 이웃, 내 친구들과 아들의 친구들, 그리고 내 이웃, 우리 모두 자부심 강한 나라의 국민임이 확연할 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 몸담고 있을지라도 영원한 대한민국의 소우주(小宇宙)이고 개성 강한 하나하나의 한국인으로 반짝이는 별, 바로 그런 존재라는 사실이다.
파이팅이 저절로 외쳐지는 날이었다.
엊그제, 그 날은.
나는 혼자서 다시 외친다.
대한독립만세!
만만세!!!
2012년 4월 12일 목요일
선물
맹하린의 수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5월 22일
아들이 과외를 맡고 있는 아베쟈네다 지역의 학부형이 밤을 한 보따리 보내왔다.
나는 평소에 밤이나 감, 배 등등의 한국종자로 된 과일에 거의 부식비를 사용하지 않아 왔다.
한국보다 비싼 값은 아니겠으나 최근 몇 년 동안 한 두냥의 소중함을 고개 끄덕이며 실감해 냈기 때문이다.
밤을 알맞게 삶아 가족과 둘러 앉아 먹는데, 얄궂게도 밤 한 보따리에 웬 감회가 그리도 좔좔 시냇물 되어 흐르던지...... .
하여간에 그 밤은 내가 세상 태어나 가장 절묘한 맛이라고 느꼈던 것이어서 나는 그 밤들을 오래도록 음미하며 천천히 목안으로 넘겼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간단히 먹어치울 게 아니라, 잘 말려서 두고두고 기념을 삼고 싶을 정도로 내 속된 감개는 그칠 줄 모르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난 며칠 전.
아들은 과외 수업료를 받았다면서 봉투 두 개와 함께 선물을 하나 건네 줬다.
봉투 하나는 제법 두둑했다.
과외학생이 몇 달 전 부에노스중학교에 합격을 했었는데, 가르침에 열성을 다해줘 고마웠고, 사정이 있어 인사가 늦었다고 미안해 하는 편지가 곁들여져 있었다.
3천 페소(1천 500달러)였다.
선물은 빨간내의라고 했다.
학부형이 그랬다고 한다.
첫 수입을 얻게 되면 어머니한테 내의를 선물하는 거라고.
몰라서 못했을테니까 이제라도 그렇게 하라고.
빨강으로 골라야 한다고.
와다닥 뜯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치밀어 투명한 비닐 테잎을 손톱으로 살살 긁어 포장을 뜯는 순간, 아하하하하, 내 통쾌한 웃음이 내의보다 더 먼저 쏟아져 나왔다.
너무 기뻐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자제(自制)할 마음이었지만 미소에 앞서 탕탕한 웃음이 저절로 솟은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선물을 거창하게 준비할 수도 있고, 선물을 산뜻하게 마련할 수도 있다.
나 겨우 조금씩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완전히 소탈한 생활만을 지향(志向)하는 길을 향할 수 있는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나 진정한 무소유에 자박자박 닿을 심산(心算)이었는데.
그동안 참 별 것도 아닌 것들을 오랜 세월 꾸리고 살아 왔다.
나는 최근에야 가까스로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자주 긴 숨을 몰아쉬는 나를 발견한다.
때때로 척추 끝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혼돈(混沌)의 파장(波長)과 떨림을 감지할 때도 있다.
나만 들을 수 있는 싸이렌 소리처럼 특이한 진동(振動)이다.
포기할 것 포기하고 버릴 것 버릴 수 있는 현재의 내가 나는 참 좋다.
가끔씩 막막해져 오는 마음, 그 막막함까지도 나는 그저 새롭게만 받아들인다.
선물이라면 오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주 당연한 일처럼 떠올리게 된다.
‘남편은 소중하게 아끼던 시계를 팔아 부인 델라가 브로드웨이의 상점에 진열된 것을 보고 오랫동안 동경하던 머리빗을 사고, 부인은 많은 세월동안 아름답게 가꿔왔고, 남편이 그토록 감격하며 바라보던 긴 머리를 잘라서 판 돈으로 남편 짐을 위해 플래티나로 만든 시계줄을 선물로 골랐다. 좋은 물건이란 으레 그렇듯이 장식이 간단하면서도 점잖았다. 그것은 남편 짐하고도 비슷했다. 품위와 가치, 그것은 짐과 그 시계줄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오헨리는 작품의 말미(末尾)를 이렇게 장식(裝飾)한다.
“동방박사는 놀라울 만큼 현명한 사람들이다. 구유에 든 아기에게 귀한 선물을 가지고 왔다. 그들 최대의 가보(家寶)를 희생한 어리석고 가난한 부부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지만 진실한 선물을 주고받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고 진짜 동방박사인 셈이다.”
오헨리의 표현 그대로라면 내게 있어 아들은 동방박사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싯귀처럼 ‘깃털 침대 위헤서 자는 이들의 꿈이 차가운 땅바닥에서 자는 이들의 꿈만큼 상쾌하지 못한 이때.’
수도권 시민의 9만명이 하루 약간의 지폐를 지불하며 하류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한다고 메스콤은 전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市民) 숫자가 날로 증가하는 데다, 중산층의 경제력이 날로 악화되어 집을 잃는 사람들이 여관이나 모텔에 둥지를 트는 현상(現狀)까지 점차 늘고 있다는 얘기다.
문득, 아침 이슬 한 방울에도 어깨 휘청이는 풀들의 아우성이 들려 오는 듯 싶어져 숙연한 느낌을 어쩌지 못하겠다.
때로 주위사람들은 말한다.
슬픔을 나눌 친구는 많아도 기쁨을 나눌 친구는 흔치 않더라고.
그건 어떤 면으로는 즐거운 탄성에 다름 아닌 것이라는 의미일까.
우리 모든 인생은 결국 길 위에 있다.
너나없이 부단하게 노력하며 걷는 셈이다.
각자의 삶대로 걷다보면 어느 날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섬광처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결국 신(神)의 선물이다.
더불어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이 선물을 준비하는 날들이기도 하다,
나 이제 아들에게서 ‘선물’이라는 걸 받기 시작한 모양이다.
-초여름
2001년도의 경제파동에 아르헨티나를 떠났던 수많은 아르헨티노들.
특히 스페인으로 이민을 떠났었던 많은 아르헨티노들이 다시 아르헨티나로의 역이민을
단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나마 아르헨티나가 살기 좋은 나라로 추억되는가 보다.
날이 새면 오르는 물가와 인플레는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치명적이라고 비명을 지르기 일보 직전인 데도 이런 기이한 상황도 생기고 있나 보다.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인생무상(人生無常)
맹하린
우리 가게에서 반 블록만 가면 한국유치원이 병설(倂設)되어 있는 한국학교가 있다.
아침에는 그런 기류(氣流)가 거의 약간만 흐르지만, 오후 4시부터는 학생들을 데리러 오는 한국인의 자동차들로 우리 가게 앞과 건너편은 물론이고 다음 블록까지 시끌벅적 야단법석 북적북적이 다목적으로 실행된다.
학군(學群)으로만 조성된 학교와 학생들이 아니라서 더 그러한 모양이다.
하필 나는 그 시간대에 산책을 나간다.
그 어떤 뚜렷한 이유는 없고 오랜 세월 익혀온 습관일 따름이다.
어제도 산책을 나서는데, 저만치 왼켠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동원 심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민동창이라서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외치듯 불러댔다.
우리 가족은 심동원을 그렇게 별명처럼 불러 오고 있었다.
한국학교에 다니는 딸의 손을 잡고 수레로 된 가방을 끌면서 자동차로 다가가던 중이던 동원 심.
공교롭게도 딸의 나이가 딱히 동원 심이 이민 올 때의 바로 그 또래여서 나는 심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휘몰아침을 순간적으로 감지했다.
그동안 동원 심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의 부모에 대한 안부를 감격처럼 물어왔었다.
그런데 어제는 왠지 다른 얘기부터 나누게 되었다.
초창기라고 표현하게 될 시기에, 아베쟈네다 앞길에 위치했던 의류도매상에서 재력을 튼튼하게 굳혀냈던 동원 심의 형 동준 심 가족은 십여 년 전, 미국으로의 재이민을 떠났다.
마치 한 건 제대로 했다는 듯 너무도 과감한 결단력으로 부각되었었다.
아쉬움이라거나 미련 같은 게 한 톨도 안 보이던 결심이었고...
우리보다는 한참 연상(年上)이었던 그들의 부모는 한국에 영구귀국(永久歸國)을 한지 이미 수삼년(數三年)도 더 지났을 것이다.
동원 심이 이혼이라는 험준한 산을 넘게 되었을 때, 그의 부모들은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와 절박한 하소연을 자주 털어 놓았다.
동원 심의 파경(破鏡)에 대한 논의였는데, 뼈와 살이 함께 아파 보이던 토로(吐露)였다.
올 때마다 하소연이 뒤바뀌고 있었다.
얼마나 험난한 산이면 오르락 내리락을 그토록 거듭했을 것인가.
손의 앞면과 뒷면처럼 표연히 두 가지로만 치러지는 제목이었다.
-그냥 참고 살라고 했어.
그럴 때마다 우리가족은 합창을 했다.
-참 잘하셨어요. 자식을 위해서도 그래야지요. 레오가 엄마와 헤어지면 가여울 것 같아요,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면 다시 진로(進路) 가 뒤바뀌었다.
-아무래도 이혼은 피할 수 없는 일 같아.
- 너무도 잘 하신 선택이세요. 예전에야 이혼이 죄악시 되었다고도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참고 사는 게 바로 죄악이라고들 하나 봅니다.
결국 동원 심은 이혼을 했고, 어제 함께 가던 딸은 재혼해서 낳은 딸이었다.
헤어지기 직전, 동원 심은 불쑥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비장감(悲壯感)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우리 형에 대해서... 아세요?
그의 눈에서 레이저 같은 빛이 순간적으로 스치듯 지나갔다.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빛이었다.
예전의 동준 심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었겠으나, 최근의 근황(近況)에 대해서 나로선 전혀 알 리가 없었다.
“떠났어요. 이 세상에서... 한 달, 됐어요.”
나는 느닷없는 충격으로 당장 할 말부터 잃었다.
어떻게... 아팠었어? 그런 말들도 내 입은 입을 다물기를 서슴치 않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은 커녕 계속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예감(豫感)이 어스레 어두워지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차마 묻지도 못했다.
왜? 무슨 일이야? 그런 말들을 겉으로 쏟아내지 못해 나는 단지 눈빛으로만 물었을 것이다.
“아무 일도. 갑자기... 떠났어요. 그냥...”
동원 심은 왼 손을 약간 올려 엄지를 접은 채 손가락 네 개를 힘겹게 펴냈다.
“마흔 아홉에…….”
마흔을 나타내던 손가락은 더 이상 아홉까지는 나타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고작 말문이 트였고, 조심스레 그들 부모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부모님은?”
“미국에, 한국에 계시다가. 형 때문에도... 미국에, 지금. 나도... 다녀왔는데.”
그의 말은 방향을 잃었는지 앞과 뒤를 맞추어 내지 못하고 자꾸만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주워 담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두 팔을 오롯이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왼손으로만 그의 오른 팔을 짧게 붙들었고, 이윽고 두어 번 토닥였다.
두 손 모두 토닥인다면 그를 울릴 수도 있겠다 싶었었다.
어쩌면 그러는 게 동원 심이나 나를 위하는 길일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무슨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는데 말이라는 말마다 내 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던 옛 모습 고스란히 지닌 동원 심의 얼굴을 뚜렷이 지켜보며, 나는 동원 심이 어린 시절 그 토록이나 자주 흥얼대던 ‘인생무상’이라던 말을 슬픔 앞에서는 서로 내색조차 하지 말아야한다는 걸 순간적으로 터득했다.
그건 차라리 적당히 견딜 수 있을 때나 터뜨리는 언어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우리의 교민게시판을 홀연히 떠올렸다.
이곳에서 살다 미국으로 떠난 어느 선플러를 접할 때마다 나는 그가 동준 심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왜냐면 우리와 동원 심네는 꼬리엔떼스 거리에 있던 Y교회에 함께 다녔었다.
교회가 양분(兩分)되어 두 갈래가 될 때까지였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S라는 아이디는 이곳 교민인터넷게시판에 가끔 나타나 꼬리엔떼스 거리의 그 Y교회를 너무도 그립게 추억하고는 했었다.
그런 연유로 더 그 S라는 아이디의 글에 나는 리플을 열심으로 달았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미국의 S라는 그분이 꿈에라도 동준 심이 아니기를 염원하게 된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거나 만난 일도 없는 교민게시판의 익명성을 한층 아끼고 다독여 주기로 결심을 굳히게도 된다.
나는 여전히 모자란 어린애처럼 걱정에 넋 잃지 않고 하루하루 잘 살아 낼 것이다.
한동안 동준 심의 영원한 안식(安息)을 위해 기도를 바치게 될 것이다.
그의 가족을 위한 기도 또한 빠뜨리지 않겠다.
어제, 나는 길섶의 가로수들이 왈칵왈칵 떨어뜨린 갈색의 잎사귀들에게서까지 일종(一種)의 아픔 같은 게 느껴져 선뜻 밟지를 못했다.
그것들조차 밟지 않기 위해
나는 어제 오후 내내 비틀거렸다.
2012년 4월 10일 화요일
이민 2세대 빛나
맹하린
빛나는 이민 2세대다.
빛나가 두 살이던 1978년에 부모를 따라 두 동생과 함께 파라과이 땅에 도착했다.
파라과이 이민 케이스였다.
빛나의 부모가 브로커를 통해 파라과이에 미리 구입해 뒀던 농경지(農耕地)는 수도와 국도에서 400Km 떨어진 오지(奧地)였다.
모기가 손가락 굵기만 하고 길이는 손가락 마디의 하나처럼 컸는데, 벌보다 더 큰 몸집으로 웽웽거리다가 물면, 며칠도 안 되어 물렸던 자리의 살 속에서 모기의 유충(幼蟲)이 기어 나왔다.
몹시 가려운 나머지 마구 긁어댈 때에야 가능한 출생(出生)이었다.
빛나의 부모는 인디오(인디언)들을 일꾼으로 고용했다.
4헥타르(1만 2천 평)의 땅에 사람의 키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는 잡풀들을 없애려고, 불을 지르거나 흙을 뒤엎고 한국에서 가져온 옥수수와 여러 종류의 채소 씨앗을 뿌렸다.
비만 내리면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는 붉은 황토(黃土)의 부드러우면서도 찰진 땅.
싹을 틔우라는 의미로 심어준 씨앗들은 찰흙과 한통속이 되어 숨바꼭질을 일삼더니 머잖아 자취까지 감췄다.
부드러움이란 건 어쩌면 인간사회에서도 그런 것인가 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획득, 그리고 어떤 구속.
그처럼 특이한 토질(土質) 탓에 집을 지을 때는 주춧돌을 땅위까지 쌓고 나서 지어야만 했다.
고구마와 만디오까(커사어바) 농사만 가능한 땅이었다.
수도(首都) 아순시온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수확성도 생산성도 전무(全無)하달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운송료가 곡물 값보다 비싸서 타산이 전혀 안 맞는다는 답까지 불거졌다.
전 재산(全 財産)이나 마찬가지인 그 땅을 헐값에 처분하고 빛나의 가족은, 아르헨티나로의 재이민을 떠나오게 되었다.
비제가스.
한국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백구나 시우다델라에 비해 비제가스 지역은 한국인이 적었으나 마당도 낀 주택단지여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는 형편이었다.
전기모터가 달린 재봉틀과 오버롴을 4대 구입하여 바느질이 그중 수월하다는 트레이닝복 바지의 삯일을 시작했다.
상의는 지퍼를 달아야했기 때문에 초보자들에겐 무리이므로 차츰 배우면 된다고들 했다.
엄마가 운동복 바지의 발 끈을 재봉틀에 연달아 박아낼 때, 다섯 살이던 빛나는 쪽가위를 들고 발 끈의 연결 부분을 잘라 일의 능률이 원활하도록 차곡차곡 쌓는 일을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흥미도 생겼고, 부모를 도우려는 의미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빛나의 부모 돕기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재봉틀이나 오버롴의 일까지 거뜬히 해내게 된 것이다.
기계에 발이 닿지 않아 엄마의 하이힐을 신은 채 해보니, 그 어려움은 간단히 해결되었다.
부모는 빛나의 그런 도움을 귀엽게 생각한 데다, 생활력을 길러주는 기틀이라고까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위안을 삼게 되었다.
빛나의 두 남동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른 한국인들은 볼리비아노들이나 페루아노들을 일꾼으로 고용했지만 빛나의 집은 가족 끼리만으로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부모의 열성 또한 대단해서 자녀들이 그렇게 집안 일을 돕는 내내 재봉틀이나 오버롴을 하는 벽면에 공부할 종이를 붙이고 예습복습을 하게 했다.
언젠가 빛나의 집에 초대되어 아사도(갈비구이)를 먹을 때, 앞에 앉아 있던 빛나는 내게 나직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항상 씩씩하셔서 보기 좋아요. 차갑고 예민하실 것 같은데 의외로 푸근하시고."
"그거 아니? 예민한 사람은 절대로 예민해서는 안 된다는 법! 더 이상 예민하면 숨 넘어 가거든."
이민 온 지 40년이 꽉 차오르는 현재.
빛나의 두 동생은 변호사와 계리사가 되었고, 빛나는 의상학과를 마친 후 아베쟈네다 지역에서 의류도매상을 경영한다.
지배인 역할을 도맡은 한인을 위시해서 직원이 꽤 많다.
몇 년 전까지는 유럽이나 미국이나 한국을 계절마다 다녀왔지만, 최근엔 한 달에 한 번일 때가 더 많다.
옷의 견본을 구하기 위해서다.
중국산 수입품도 취급을 시작한 지 오래다.
아베쟈네다 상가의 전체 의류 매장 2,800여개 중에 한인들의 점포는 대략 800여개에 육박했다고 한다.
각 개인이 중소기업 수준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중소기업이다.
일하면서 공부를 끝내느라 결혼 적령기를 놓친 빛나가 며칠 후에 약혼식을 치르게 되었다고 그 부모에게서 초대장이 보내져왔다.
신랑은 나와 친척처럼 가까운 이민동창의 아드님인 동욱이라고 한다.
약혼식에 가기도 전에 나는 빛나가 결혼생활 역시 잘 해 내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다섯 살 때부터 부모의 일을 도와 왔지만 한 번도 고된 줄도 몰랐었다는 빛나.
한국에서 중산층에 살았던 부모들이 낯선 나라에 대한 적응에 얼마나 힘들까를 염두에 두면서, 부모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거라고 여겼더니 오히려 없던 힘도 생겨나더라고 어른처럼 말해왔고 어른처럼 살아왔던 빛나.
사람들이 짜증내는 부분을 보살핌으로 바꿀 줄도 아는, 너무도 곱디고운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한 빛나.
빛나는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라기보다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빛나의 침착하고 차근차근한 태도 속에는 항상 설득력 같은 게 들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중심을 잘 잡아 왔고, 자신의 감정까지 통제할 줄 아는 존재.
빛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빛나로서는 닥치는 일마다 두려움을 배제(排除)하려고 더 그러지 않았나 싶다.
나는 빛나가 결혼생활은 물론이고, 사회생활 역시 산뜻하게 잘 병행(竝行)해 나가리라고 예측(豫測)하게 된다.
왜냐하면 빛나는 머리도 좋지만 판단력이 뛰어난 데다, 특히 빛나는 그 이름 그대로
어디에 내놔도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환하게 빛나는, 빛나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민경제의 발원지 아베쟈네다 거리의 어느 토요일
2012년 4월 8일 일요일
Chascomus 호수
맹하린
'뿐따 라라'라는 이름을 지닌 강 역시 그래왔지만, 차스코무스 호수는 내가 매년 한 두 번씩 소풍을 다녀오는 유원지의 하나로 꼽힌다.
그리고 낄메스 지역의 Jockey Club과 인접해 있는 어느 강은 오후 5시 무렵이면 밀물이 서서히 다가오는 장관을 연출한다.
그 장면에 매료된 나는 이번 노동절을 앞당긴 4월 30일(공휴일)의 문협야유회에, 다시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하게 되었다.
차스코무스 호수는 얼마나 넓고 기다란지, 미니관광버스로 45분을 드라이브해도 언제 끝날지 감(感)도 못 잡아 결국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오게 된다.
3,044헥타르의 면적에 길이 15Km와 넓이 5Km의 규모이며 1.50M에서 2.5M까지의 깊이를 간직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쯤 달려야 닿게 되는 강이다.
아르헨티나의 관광지는 인공미가 전혀 보태어지지 않은 자연미로만 이룩되어 그 점이 가장 매혹적이다.
누가 한국과 아르헨티나 중 어느 나라의 풍경(風景)이 더 아름다운가를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단연, 둘 다 아름답다가 될 것이다.
한국은 아기자기, 올망졸망, 알뜰살뜰.
아르헨티나는 광활하고, 꾸밈이 없고, 각양각색이고.
누가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더 좋은가를 질문한다면
나는 단연 두 나라 모두 좋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의 기득권(旣得權)이 권위만 고집하는 세태에 대해서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관점과 입장을 지니고 있다.
모든 분야에 알게 모르게 골고루 분포(分布)되어 있는 본국 기득권층의 횡포(橫暴)는 날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아 보인다.
나처럼 자유주의에 넋 빠져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비록 이민자의 삶이라는 게 때로 뼈시리게 외로울지라도 차라리 견딜 만 하다는 안도 같은 걸 하게도 된다.
문명과 권력에 중독되어 어쩌고저쩌고 떠들기만 좋아하는 기득권마니아들의 윤리와 비윤리.
그건 흡사 아르헨티나의 강과 바다만큼이나 넓고 큰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고 사료(思料)되기도 한다.
이해가 안되지만 이해를 넓히려고는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사는 곳엔 어디나 그런 현상과 병폐가 기득권이라는 이름의 기치 같은 걸 내세우기를 마다하지 않고 영낙없이 존재하고 있음에랴.
호수, 차스코무스.
언덕에 앉아 물끄러미 호수를 지켜보노라면
낮은 벼랑 아래에서 찰나처럼 포옹하는 파도와 수초들의 함성이
끊임없이 귀를 간질이고는 한다.
나는 그럴 때, 뜻밖의 사고(思考)에 잠기게 된다.
글에서 멀어진다면 그 무엇이 나를 자연과 자주 만나게 해줄 것인가.
자연을 만날 때마다 가장 절실하게 깨닫는 사실이 또 있다.
자연이야 당연지사 만나게 되어 있지만, 자연 앞에서는 세상살이에서 특별히 아끼는 이들을 일렁이듯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일부러 그러려고 해서도 심심해서도 아니다.
그냥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아마도 경계심이 사라져서인 것 같다.
마치 소나기를 지켜보는 날에 그러하듯이.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放置)하고 밀쳐 두었던 나.
내가 바라보기에도 때로 쓸쓸해 보이는
그 , 나와 긴실하게 만나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다가온다.
그러한 순간들이 하나하나 엮이어
내게 언제라도 생(生)의 배경(背景) 과 울타리가 되어주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나는 이미 소풍을 기다리고 있다.
자연도 자연이지만, 고즈넉이 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서정성(抒情性)의 복원이 될 나를.

2012년 4월 7일 토요일
향수(香水)
맹하린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체취를 지니지 못해서였을까.
냄새를 맡는 일에 매우 민감한 후각을 갖추고 태어난 '그루누이'는 세상에서 가장 월등한 향기를 만들려는 목적을 품고 비밀스러운 계획을 실행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향수>라는 책이 아니더라도, 서양사회는 이미 오랜 옛적부터 향수가 생활양식에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옷가게를 할 때, 아르헨티노를 위시한 여러 인종들과, 하루에도 수시로 드나들던 사람들에게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향수를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하나같이 독특하고 개성 있는 향수를 선호하는 것 같았다.
어떤 때, 중요한 고객이나 천공장 주인들과 사무실 안에서 지불과 수금을 끝내고 잠시 여담과 함께 커피를 마실 때가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돌아간 얼마 후, 사무실 안에 있는 서류를 찾을 일이 생기거나 좀 쉴까 싶어 들어가게 되면 그때껏 남아 있는 그들의 잔여향이 여운처럼 스며 있음을 여실히 깨닫고는 했다.
서류를 찾을 경우, 찾아서 나오면 그만이지만, 쉬기 위해 들어 갔을 때는 창문을 열어제쳐도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향기가 불편하여 그만 가게로 나가 다시 일을 붙들기 마련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쳔연향은 1천 5백여종을 넘고, 화학재료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합성향만 꼽아도 수천여종에 이른다는 통계를 어느 책에선가 접한 일이 있다.
내가 만난 여러 혈통을 이어 받은 각 분야의 직업에 종사하는 아르헨티노들에게서 제각기 다른 수십종의 독특한 향기를 저절로 자연스러이 스쳐 지나온 셈이다.
그들이 향수를 즐겨 사용하는 의도는 좋은 향기를 취미처럼 몸에 익히려는 뜻도 있겠지만, 되도록 다른 사람에게 향기로운 인상을 전달하려는 기본적인 예의범절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중세에는 향수를 퇴폐와 방탕의 상징으로 단정한 결과에 의해 법으로 금지됐었는데, 십자군 원정 때 다시 향수의 물결이 유럽으로 밀려 들었다고도 하고, 19세기 중엽부터 화학적 합성향이 등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저러한 향수의 역사를 떠나서 나도 아르헨티노들처럼 적절한 에티켓을 유지하고 싶어져, 조심조심 향수를 가까이 해보는 중이다.
한국에 살 때, 거리를 지나다가 샤넬5의 향수를 진하게 뿌린 여인에게서 산뜻하지 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은 뒤떨어진 사고방식이었다고 애써 접어 두면서.
자연적인 것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의 성격 탓인지 썩 환영할 만한 선택은 아니지만,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는 입장으로 향수라는 영역에 조심스레 접근을 시도해 보는 중이다.
법구경은 일컫는다.
"복숭아 향이나 향나무의 아름다운 향도 거슬러 부는 바람에는 제 향기를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이 덕(德)으로 쌓은 향기만은 거슬러 부는 폭풍에도 그 향을 잃지 않는다."
최근의 나는 내 자존(自尊)을 최대한으로 기쁨과 화평을 지향하는 방향으로만 질서를 맞추며 지내 왔다.
대단히 역설적이라는 느낌 배제할 수 없지만, 나는 나라는 가치관에서 해방된 순간 참다운 존재를 발견하게도 되었다.
감성을 표현하는 것은 감성을 감춘다는 그런 의미와 같아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감추기 위해 드러내고 있었음을 스스로 자인(自認)했던 것이다.
그럴 때의 나는 부서질 정도로 나약하다.
세상을 향한 나의 근본적 지향은 세상을 단순하게 소통하려는 데에 있다.
재산이든 무엇이든 내 몫 이외에는 탐내지 않고 온화하게 살아내고 싶을 뿐이겠고.
평소 하던대로 나는 여전히 가까운 곳에서 먼데로가 아닌, 먼데서 가까운 문제로 해결점을 찾으려 한다.
나는 여전히 물질과 티격태격 하지 않고, 언어와만 티격태격을 주고 받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사상(思想)이라는 식탁이 마련 될 것 같다.
나만의 주제가로 차려지는 나만의 양식이다.
우리 인생이 여러 기쁨과 여러 슬픔으로 엮어졌다고 해도, 그 모든 감정은 궁극적으로 평화라는 향수병에 담긴 일종의 향기가 아닐까 한다,
일교차(日較差)가 커다란 계절이다.
상념(想念)의 뜰 서성이듯 오가며 오늘의 빗장을 향기로운 향을 음미하듯 상쾌하게 열어 본다.
아르헨티나의 음악 경연대회에 나온 아마추어가수
2012년 4월 6일 금요일
수산나
맹하린
어제 늦은 오후.
수산나가 예수수난미사에 가기 1시간 전에 찾아왔다.
수산나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내가 첫 번 째로 꼽는 친구다.
마른 몸매지만 외유내강한 성격이고, 내가 바쁜 날엔 몇몇 친구들과 내 넘치는 일을 돕기도 하는 매우 착하고 야무진 친구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게, 나는 또래보다는 나이가 적어도 한참이나 적은 이들과 더 친한 편이다.
그렇게 만나게 되면 수산나와 나는 서로의 속내도 약간씩 보이며 하하 호호 웃음도 잃지 않으면서 얘기를 많이 주고 받는다.
수산나는 온세지역에 반듯하고 커다란 가게를 소유하고 있는데, 한국인에게 대여해주고 자녀들이 아베쟈네다지역에서 의류도매상을 하고 있다.
수산나 내외는 집에서 공장을 운영하여 제품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도 수산나는 항상 버스를 이용하는 철저한 절약정신이 생활화 되었고, 피부처럼 몸에 밴 친구다. 그녀는 봉사도 많이 하는데 주로 안 보이는 손으로 하는 봉사를 한다.
수산나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내가 웃사람이고 수산나가 더 밑에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못해낸다.
그만큼 서로가 지닌 격의(隔意)를 허물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의 격을 맞추고 낮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몫에 언제나 조심을 다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관계는 상식이 아니다.
관성(慣性)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內面)이다.
바람직한 관계는 개념(槪念)과 유형(類型)을 넘어서야 그 사이가 참다워진다.
내가 수산나에게 한 번도 서운하거나 토라진 일이 없는 것처럼 아마 수산나도 내게 그렇지 않을까 싶어진다.
말은 안하지만 수산나의 표정이나 행동이 그걸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이다.
수산나는 내게 있는 체를 안 하고 나는 수산나에게 없는 체를 안 한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사실을 구태여 짚고 넘어갈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도 행복한 사람이다.
수산나라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사는 일 매우 뿌듯하다.
어딘가에 수산나라는 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게 자주 안위로움을 안기기에 더 그렇다.
분명한 것은 수산나는 나보다 나은 친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 중심을 잡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닮은 점이 딱 하나 있다.
최후의 순간에도 낙관적 자세를 취하는 불사조와 같은 면모.
수산나와 내가 다른 점은 두 개 정도 된다.
그녀는 자기 자랑을 전혀 못하는 성격이고, 나는 자기 자랑을 가끔씩 하는 사람이며, 그녀는 자주 아프지만, 나는 뛰어 다니며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잘 안 아픈 사람의 축에 든다는 점이다.
나는 어제 아침에도 또 넘어졌다.
그런데 넘어져서 하하 웃었다.
다친 데가 없어서 웃었고, 잘 넘어진다는 데에 생각이 닿아서도 웃었고, 그리고 넘어져서 웃는 나의 행동이 미친 것도 같아서 웃었고, 그리고, 그리고 그러는 내가 우스워 더 웃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사람은 가끔씩 자기자랑을 해야 안 아프다는 의미?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껏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해왔다.
욕하고도 담을 쌓고 살아 왔다.
왜냐면 공부나 생활이나 누구의 간섭이 있기 전에 내가 다 알아서 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간섭이나 욕을 만나면 더 엉뚱한 쪽으로의 발전을 거듭한다.
당연하게도 나이가 들대로 든 지금까지 변함없이 나는 맹꽁이니까.
그런데 현재의 나는 웬만한 일들 모두 수용(受容)하려고 노력하는 기운 또한 느껴진다.
나는 책을 읽다가 좋은 말을 만나면 수산나에게 프린트해서 건네기를 즐긴다.
항상 그러진 않고 몇 달에 한 번쯤 그런다.
집에 가서 읽으라고 해도 그녀는 우선 한 두 번 읽고 나서야 핸드백에 간직한다.
아, 틀린 점이 또 있구나!
그녀는 꼭 전도사처럼 제법 커다란 핸드백을 매고 다니는데 나는 거의 핸드백도 없이 다닌다는 것. 꼼꼼한 성격의 그녀가 왜 핸드백을 꼭 갖고 다녀야 하는지,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가끔 이해가 안되는 심정이다.
그녀는 그동안 길에서 핸드백을 날치기 당한 일이 서너 번은 되기 때문이다.
어제 수산나에게 적어 준 꽤 괜찮은 말은 이렇다.
불경기의 여파는 수산나에게까지 때아닌 근심걱정을 안기고 있어서였다.
‘나는 근심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는다. 근심은 알고 보면 허수아비다.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으로 가서 허기를 채우려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복병들이다. 하지만 어떤 참새라도 그 복병들에 대해 근심할 필요는 없다. 허수아비는 무기력의 표본이다. 망원렌즈가 장착된 최신식 장총을 소지하고 있어도 방아쇠를 당길 능력이 없다. 자기 딴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눈을 부릅뜬 채 들판을 사수하고 있지만, 유사 이래 허수아비에게 붙잡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린 참새는 한 마리도 없다. 다만 소심한 참새만이 제풀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의 심장을 위축시켜 우환을 초래할 뿐이다. 나는 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서른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마흔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근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근심에 집착할수록 포박은 강력해지고 근심에 무심할수록 포박은 허술해진다. 하지만 어떤 포박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1백 퍼센트 소멸해진다.
이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에서
2012년 4월 5일 목요일
그대, 그대!
맹하린
어젯밤 퇴근 후.
우박을 겸한 폭풍우가 한참이나 내렸습니다.
내게 내리는 푹풍우가 그대에게 이슬비일 수 없겠다는 생각을 순간처럼 했었어요.
일부러 현관으로 나가 비와 우박이 섞이듯 쏟아지는 마당을 한참이나 지켜봤답니다.
가락져 살라는데 가락져 사는 일이 의외로 버거운 느낌 잦고 잦습니다.
그럴 때마다 게을러 보이는 기다랗고 특이한 내 손가락들을 유심히 바라보게도 됩니다.
그리운 대상을 범람하는 강 양쪽에서 무심껏 서로 건너다보듯 대책 없을 때 참 많았습니다.
우리는.
저는 톨스토이의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인간이란 강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어느 강에서나 똑 같아서
어디를 가건 변함이 없지만
강 그 자체에 이르러서는 좁은 것도 있거니와
빠른 것도 있고. 넓은 것도 있거니와 고요한 것도 있고
맑은 것도 있거니와 흐린 것도 있고, 찬 것도 있거니와
따스한 것도 있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 속에 인간으로서의 온갖 성질의 싹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때는 하나의 성질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다른 성질이 나타나고 해서
똑 같은 사람이면서도 가끔 전혀 다른 성질이 나타날 때도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등에 진 짐 덜기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고 작정 같을 걸 굳혔는데
그런데 짐이 저절로 내려지고 있음을 섬광처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짐은 내리려고 하면 더 무거워질 뿐이라는 걸 한두 번 겪었던 게 아니라서
나는 현재 있는 그대로 잘 흐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상황이라는 것은 얼마나 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일탈을 부추겨 왔던 지요.
내가 살아가는 주위마다 언제나 거대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나지막이 또는 우뚝, 고즈넉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내가 이 도시에서 자나 깨나 터득한 유일한 진리는 인생을 관조하는 자조와 같은 자세였던 게 아니었나 싶어집니다.
나는 항상 어느 정도는 내 시야로 살아 냈지만, 또 어느 관점으로는 다른 이의 시선을 중요시하면서 살아 왔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관습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집착하면서 상념을 키우게 되면 우리는 한층 획기적인 창조의 가능성을 잃게 되는 우매함에 처하게도 되죠.
생각을 약간 바꾸고 배열만 달리해도 매우 혁신적인 결과를 얻게 되는 계기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작가들이 좋은 작품 하나를 위해서는 무조건, 써야지라는 각오만 가지고는 지난할 일이 될 것입니다.
자극도 필요하고 긴장도 주어져야 하고 해이나 휴식이나 산책도 필수적 여건이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오늘 역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튀지 않고 단지 고요를 아끼며 살아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이 시점에서 말입니다.
압니다.
갈등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많이 떠밀기도 했고, 그리고 데리고 다니기까지 했다는 거.
언젠가부터 겨우 깃을 펼치던 화평조차도 오래 전에 마련된 일이었다는 거.
때로 그 선택과 같은 예비에 대해서 뭐라 표현키 힘든 경이를 껴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미움이고 누군가의 그리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사실 기쁨이라기보다는 고통의 폭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단정 됩니다.
글을 써낼 때마다 무슨 생각으로 치열해지는 줄 아시는지요?
글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난다면 진심이 아닐 테죠.
걱정, 사람, 사건. 그런 것 싹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이고 싶은데 그런 것들과 함께 하기 위해,혹은 그것들을 애써 잊으려고 나는 글을 써내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지도 모릅니다.
운명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나서 나를 겁주다가 제멋대로 자취를 감추는 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가능했습니다.
겪을 만큼 겪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더니 어느 날부터 운명에게서 너무나 자유로워졌습니다.
부활주간입니다.
어쩐지 할말도 못하겠으며
회개하라 권유하는...... .
자고 났더니 세상이 온통 어수선 해져 있었습니다.
폭풍우라고 알고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downburst였더라는 얘기가 됩니다.
지난 밤의 재난으로 17명의 사망과 500여명이 대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지방도시에선 지붕이 날아간 집들이 많아서그 피해가 예상외로 컸다고 합니다.
여러 차례 지적해온바 있지만 아르헨티나의 토질은 약간의 비에도 물의 흡수가 재빠릅니다.
그런 반면, 거목의 나무들은 지나치게 뿌리가 얕게 뻗어 있습니다.
국민성이 그렇다기에는 어폐가 있겠고, 일종의 정책을 닮았다고나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상띨리 공공환경부장관의 발표에 의하면 복구작업에 6백만 페소(1백 2십만 달러 상당)의 경비가 소요되고 있고, 1,500명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쓰러진 나무가 무려 1만여 그루나 된다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장관은 , 이와 같은 재변에 대해서 61년만에 발생 했으며 ,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데서 빚어진 피해로 간주한다고 덧붙였습니다.
2012년 4월 3일 화요일
2012년 4월 2일 월요일
땅고(Tango)
맹하린
땅고(Tango).
아르헨티노들은 탱고를 그렇게 일컫는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흘러 들어온 유럽계 이민자들과, 보까(Boca)지역에 여장(旅裝)을 푼 뱃사람들이 저녁이면 속속 술집으로 찾아들었다.
이민자의 암울함과 선원(船員)들의 고달픔을 쾌락으로 지워내면서 춤과 술, 그리고 음악으로 밤을 지세우다 보니까 4분의 2박자와 8분의 4박자로 된 무곡(舞曲)과 무도(舞蹈)가 싹터서 생겨난 것.
땅고는 그렇게 탄생되었다는 전설과 같은 유래(由來)를 간직하고 있다.
'비에호 알마센' '까사 블랑카' '미켈란젤로' '라 벤따나'를 위시한 땅고 공연장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만 100여 군데가 넘는다.
유명하다는 곳으로 선택해서, 몇 번 가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곳은 가비오따(Gaviota=갈매기)라는 매우 조촐하면서도 앙증맞을 정도로 운치까지 갖춘 곳이었다.
밤 10시에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영업하는 가비오따는 피아노와 반도네온(손풍금)으로 된 반주(伴奏).
흑과 백으로 나눠진 땅고 가수들.
그밖에 젊고 아름다운 웨이트레스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무대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관람객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쪽 넓은 홀이 무대라는 점도 신선한 발상(發想)이다.
관객과 무용수들 사이에 격(格)을 두지 않기 위해 특별히 고안(考案)해 낸 기발한 건축양식(建築樣式)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무용수들의 격렬한 춤에 따라 다탁과 의자와 관람객들이 자주 부딪히게 되어, 춤추는 이나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효과 있는 일치감(一致感)을 지니게 한다.
바람에 강물이 찰랑이고 수초(水草)가 서로 닿으면서 서걱이는 소리.
얕은 물 바닥을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의 파닥임.
관능과 열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율동으로 예술의 극치를 완벽하게 창출(創出)해내는 듯 한 경지를 땅고에 심취하다보면 저절로 섭렵하게 된다.
더불어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가슴이 저며 드는 아픔을 수시로 겪는 애환까지도 당분간 잠재울 수가 있게 된다.
땅고라는 춤이 만들어져 추거나 부르거나 보기를 즐기던 초창기에는 땅고장에 가면 누구라도 상관없이 무대에 나가 땅고를 출 수 있는 자격이 부여 됐었다.
하지만 군정시대에 법이 강화되어 두 사람 이상의 관중이 어떤 공간에서도 접촉하거나 활동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금지 됐었다.
군정시대엔 수염을 기른 사람은 무조건 잡아 갔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지금껏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독재성격을 띤 정치란 바로 그런 면에서도 독재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군정이 물러나고 다시 민정이양으로 정권이 바뀌자, 군정이 확연하게 금지했던 살벌한 법령은 다시 활기로운 영역을 넓히며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땅고에는 눈에 안 보이는 질서 같은 게 느껴진다.
일단은 파아트너와의 동반관계가 적절하게 이룩돼야 하고 남녀 각자가 지니고 있는 특성전체를 십분 발휘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연출해 내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출해야 한다.
약진감과 긴실함이 사각사각 스치는 야회복을 통하여 한숨처럼 박자를 맞추며 터뜨려지기도 하고, 표표하게 나부끼는 발랄함이 엿보이는가 하면, 흡사 마녀처럼 괴기한 집념이 뚝, 뚝 흐르는 신명난 무용수들도 있다.
어떤 무용수들은 출아된 식물의 싹이 잎을 틔우고 가지가 생성되며 꽃과 열매까지 맺어 나가는 과정까지를 표징해내는 춤을 추어내는가 하면, 개척자 시대를 나타내기 위해 카우보이차림으로 춤추는 커풀도 있다.
그렇게 모든 무용 파트너에 따라 각자의 개성을 한껏 살려내는 각양각색의 춤을 추어내지만, 땅고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정열과 낭만이 곁들여진 야회의식이 철학과 같은 진정성과 조화로 재해석을 이룩한다는 사실에 있다.
어느 폭풍우 쏟아지던 밤.
문우 몇 분과 가비오따에 간 적이 있다.
갈 무렵에 비와 바람이 시작된 게 아니라,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폭풍을 동반한 억수비가 쏟아졌었다.
피아노, 기타, 반도네온의 연주자, 땅고의 무용수들, 땅고 가수들, 웨이트레스, 주인이 우리 일행몇 명을 위해 흥과 성의를 다해 몇 시간동안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에 열중하여, 그들의 격조 높은 예술정신에 만감이 교차하는 감동을 축복처럼 받았었다.
평소의 나는 선물 받은 시계조차 착용을 안 하는 성격이라 핸드폰의 폴더를 살며시 열었었다.
새벽 2시였다.
고백하건대 잠을 놓치며 시선을 고정시켜 즐겼던 공연은 그날 밖에 없었다.
마치 일탈을 꿈꾸기 위해 휴가를 떠나온 여행자처럼 열정이 담긴 느낌 같은 게 오래토록 남아 있음을 새삼 발견했던 매우 근사한 날이었다.
뜻이 맞는 이들 몇분과 다시 땅고장에 가봐야겠다.
왠가 하면 나는 요즘 마음을 좀 어디다 옮기고 싶기 때문이다.
마음은 가락져 살고 싶은데, 그런데 마음을 내 맘대로 못할 때다.
지금은.
장대비라도 내린다면 더욱 절절하게 보헤미안 정취에 잠길 수가 있지 않으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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