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30일 토요일

인생 껴안기



        맹하린


여행 중이던 A라는 사람이 호텔에  찾아가 방을 얻었다.
호텔의 보이는 열쇠를 내주면서 남아 있는 객실이 모두 예약된 상태라서 이 방을 내 줄 수 밖에  없다며 한 가지 부탁을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이 객실의 바로 아래 층에 머물고 있는 투숙객은 저명(著名)한 심리학 박사인데 신경이 몹시 예민한 편이니까 손님께서 객실을 사용하시는 도중에 신발을 끄는 소리나 무엇을 떨어뜨리는 소음(騷音)등을  특별히 삼가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럽시다, 그런 일이 뭐 어렵겠습니까?"
선선한 약속을 하고 객실로 들어서자마자 여장을 풀던 그 A라는 사람은 발소리까지 줄이며 조심에 조심을 다했다.
그러나 지나친 조심이었나 보았다.
침대 위에 눕기 위해 신발을 벗다가 그만 실수하여 한 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제 풀에 놀란 그  A라는 사람은 다른  신발까지는 안 놓치려고 한층 조심하며 ,  침대 아래에 가지런히 놓은 후 비로소 침대에 누웠다.

가까스로 잠이 들었을 때, 도어를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A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문을 향해 걸었다.
누구일 것인가를 의아해 하면서 도어를 열고 보니 학자 타입의 노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 드디어 항의를 하러 왔구나.)
구두 한 짝을 떨어뜨린 일을 기억하고 있던 A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움추러드는 기분이 들었고, 가능한 한도(限度)내에서의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노인의 항의는 좀 엉뚱하고 별났다.
"당신이 객실 바닥에 떨어뜨린 구두는 한 짝이었습니다. 그 다음 한 짝은 대체 언제 떨어뜨릴 작정입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니까 계속 신경이 쓰여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이왕 떨어뜨릴 거라면 빨리 떨어뜨리시오.  제발 잠 좀 잡시다,  아시겠소?"

위와 같은 예화(例話)처럼 쓸데 없는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소비하게 되는 주위 사람들을 나는 종종 보아왔다.
걱정이라는 소굴에서 일찍이 해방되어  빠져 나온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나라고 본다면 알맞을 일이 될 것이다.
아무리 가던 길을 헛 짚어 발목이 빠질지라도 빠진 발목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고 망가져 버린 신발은 더군다나 걱정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나다.
물질적 사회적으로는 탄탄한데 정신적으로 피폐(疲弊)한 사람을 간혹 봐왔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되도록 쓸데없는 일에까지 내 소중한 정신을 팔고 살아내기를 가장 꺼리는 정서라서 더 그래왔을 것이다.

그처럼 편리한 정신상태를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어서인지 나는 머리가 어디에 닿기만 해도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
가족이 TV를 통해 밤늦도록 축구시합을 보면서 큰 목소리로 골인을 외쳐댈지라도 나는 바로 옆방에서 둔감하게 잠자는 스타일인 것이다.
더불어 아무리 좋은 영화나 괜찮은 수준의 드라마를 보다가도 나는 곧장 잠들고 말아서 좋은 영화,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결과적으로는 좋은 자장가와 쾌적한 태평가(太平歌)가 되어 주는 일로까지 전환됨을 저절로 감각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잠만 자는 건 아니다.
나의 기상(起床)은 이른 새벽이 된다.
새벽은 내게 있어 잠결에 다가오는 게 아니라 언제나 생각으로 이어지듯 고요하게 다가온다.
종적을 알 수없는 꿈속을 헤매다가 갑자기 눈이 떠지는 상태가 아니라, 잠이 깨어나면 현실의 첫 자락을 붙잡는 동시에 비로소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밖은 그때껏 어둠 속에 잠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른 새벽을 마주하고
나는 우선 세수나 샤워를 하고
기도를 바치고
음악을 들으면서
원탁을 마주하고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의 하루는 언제나 그렇게 자연적인 흐름에 실린다.

낮시간에는 빈틈을 이용하여 드라마를 한 두편쯤 보아낸다.
일종의 휴식이다.
유령과 신사의 품격 등을 본다.
복잡다단한 내용보다 산뜻하고 경쾌한 소재를 한층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
소간지(소지섭)가 나오는 드라마는 내용이 재미 없어도 재미 있다.
나는  오락 프로는 못 본다.
유령을  본다고 해도 웃는 사람이  있는데,  개콘이나 짝을 본다면 뒤로 넘어지는 친구라도   생길까봐 은근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를 잊고 살 때의 나를 사랑하고 아낀다.
인생이란 그렇다.
무엇인가에 부딪치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잊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자주 그러한 인생을 껴안아 주기도 하고 토닥여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을 지긋이 바라보게도 된다.
현재의 있는 그대로인 나를 아끼고 다만 아끼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인생을 사랑하고 있고 계속 사랑할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인생을 놓치는 방식이 바로 인생이다.
그렇게 때로 인생을 놓쳐 왔지만 이제야말로 인생과 함께 걸어 갈 생각이다.
절대로 시무룩해지거나 비현실적인 기운에 빠지지는 않을 생각 같을 걸 하면서...






2012년 6월 28일 목요일

각본(脚本)의 각본(脚本)되어




        맹하린


어제  정오 12시경에는  문협회장의 사업장에서 점심을 들었다.
얼마 전 민주평통 남미서부협의회가 개최했던 통일기원 글짓기대회에 제출된 글들을 어제야 따로 심사한 후 심사 위원들 네 분과 삼겹살 구이와 쌈밥으로 된 식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 회장은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나의 음식 솜씨를 잊지 않고 추겨 세워준다.
내가 차리지 않은 식탁에서 나를 칭찬 받는 일은 좀 설컹하다.
그래도  칭찬은  칭찬이다.
하여간에  미나리 전과 배추 국이 곁들여진 어제 점심은 진정 모처럼 맘에 드는 소탈한 식사였다고  되레 내 쪽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고 도로 갚았다.

오후 3시에는 성당 교우들의 반 모임이 같은 장소에서 있었다.
대낮에 가게를 비우기도 그렇고,  나는 일요일에 미사나 드리면 대 만족이라면서 몇 년이고 반 모임을 소홀히 대해 왔었다.
그런데 새로 뽑힌 반장이 오랜 지인이라  돕자는 뜻으로 모처럼 참석하게 되었다.
반장이 S어묵 공장의 주인이라  어묵을 반원마다 선물로 세 묶음 씩 안겨 고맙게 받았다.

반 모임에 가려고 가게를 나설 무렵, 현지인의 전화가 연신,  끊임없이,  줄기차게 걸려 왔다.
모르면 몰라도 일곱 번 쯤?
장난 전화도 같았지만 흡사 스토커 수준과 맞먹는 짓궂음이었다.
현지인  TV의 저녁 프로에 나오는 수법과 비슷했다고 생각된다.
그 프로의 사회자 목소리와 너무나 똑 같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거리 이름을 여럿이나 따다다다 말하면서 곧장 따라서 하라고  지시하거나 슬슬 놀리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저절로 욕설이 폭발하듯 터지게 만들고는 상금을 보내주는, 헤로인이나 조연 배우나 엑스트라가 한통속으로 바보가 되는 각본(脚本)이었다.
나와 가족이 교대로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무난히 잘 견뎌 냈다고 본다.
하지만 두어 번으로 그치지 않고 끊으면 또 걸어오고 끊으면 또 말 시키고 거의 욕설이 튀어나올 지경으로  이끌어 내는 일에의  탁월한 역할을 상대는 참으로 잘도  요리해 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서 욕설을 끄집어내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는 일이라서 그 사람은 결국 낭패 비슷한 기분을 맛보았을 것만 같다.
맨 나중에 가족이 해낸 협박성 발언으로 하여금 겨우 일단락되었던 일이었다.
계속 귀찮게 굴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경고 정도로 그 불분명한 소란은  그치게 되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스토커로 추측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나는 매사를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으로  비약시키는 절망론자는 결단코  못된다.
욕을 할 줄 알았더라면 잔뜩 퍼부어주고 상금을 거머쥘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을려나.
욕을 할 줄 모르는 공간 속에 머무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가족이라서 참 안됐다.
욕을 바라던 이여!!!
분명한 것은 욕을 상금과 바꾸는 일을  우리에게서 노렸다면 안됐지만 실수한 겁니다.
우리 가족은 그럴 경우에만 양반이랍니다.

사람들은 진정성에 근접(近接)하는 문학을 도모(圖謀)한다는 게 얼마나 고달프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한참이나 모자란 걸로 보이는 모양이다.
문학이라는 장르에서 어떤 강렬한 의미를 파악하고 여러 숙고(熟考)를 거친 후 안락과 평온이 보장된 생(生)을 가차 없이 팽개치려면 더할나위없이 힘에 겨운 인성(人性)을 필요로 하는 게 바로 진솔한 문학의 고난이 함께 하는 길이 된다.
결과적으로는 참다운 인격을 위해 자질구레한 선량함을 분산(分散)시킨다고 보면 간결한 설명이 좀 되려나…….

엊그제는 바로 그런 날이었다.
말 그대로 뒷전에서 침묵하며 주위 사람들의 개성 강한 목소리에 오롯이 귀를 기울이게 되던 하루였었다.
나는 때로 져주는 걸로 이기는 사람이 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교통사고로 어깨 쪽에 타박상을 입어본 적이 있다.
원상태로 치유되고 복구 될 때까지 거의 3년이 소요됐었다.
초기에는 두 팔을 넝쿨처럼 늘어뜨린 채,  아끼고 아껴야 할 것처럼 규칙적으로 고르게 내쉬어야 할 숨을 한 숨에 몰아쉬고는 했다.
아무리 의아한 마음을 품어도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전부 알 수 없듯이  아무리 모르는 척 해도 자연히 알게 되는 일도 세상엔 많다.
세상일은 때로 그렇다.
한 사람의 우문(愚問)을 백 명의 현자(賢者)가 집중하고 고심(苦心)해도 답변이 되지 못한다는 격언과 같은 상황을 초래할 경우가 때로 우리에게 닥치기도 하는 것이다.

각본에 의한, 각본의 각본 되어 휩쓸리며 기꺼이 떠내려가 주려던…….
엊그제는 바로 그러한 날이었다.

홀연,  비온 뒤와 다름없이 오늘은 시야(視野)마다 세상이 온통 산뜻하게 다가오고 있다.
사는 일 자체가 신비로운 날이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제7강 열정의 장



-혜민 스님-


나이드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삶의 열정이 식은 것은 두렵다

가끔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옳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같이 행복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머리가 똑똑해 옳은 소리 하면서 비판을 자주하는 사람보다
가슴이 따뜻해 무언가를 나누어주려고 궁리하는 사람,
친구의 허물을 품어줄 줄 아는 사람,
타인의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 되세요

옳고 그른것을 시비하다가
먼저 화를 내면
그 사람이 진 것입니다.

열 받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문자나 이메일 답장을 하지 말아요
지혜로운 사람은 일단 잠을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답신을 보내요
말을 듣자마자 바로 하는 반응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큰 어른의 주변에는 예스맨들만 있어서
주로 그 어른이 자화자찬을 하도록 돕는 일을 합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내가 자화자찬하는 것을 돕는다면,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주변에 간신만 있고 충신은 없다는 사실을

무엇을 물어봤을 때
대답이 없으면
침묵도 사실 대답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아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잘나가고 있습니까?
지금 하시는 일이 잘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남을 제치고 잘나가고 있는지,
아니면, 남과 함께 잘나가고 있는지를 살피십시오
남을 제치고 나만 잘나가면
상황이 변했을 때 평소에 당신을 시기하던 사람들에 의해
다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일을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이 잘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때문에
당신만의 색깔과 열정을 숨기고 아파하지 마세요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 자신의 고유함이야말로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당신 색깔과 열정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차도록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해요
문제는 그 친절함이 얼마나 오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처음에 잘해준다고, 마냥 좋아라 속지 마세요



2012년 6월 25일 월요일

조사(弔詞) (6월 25일 한인묘지에서 있었던 이향희 선생의 하관예절에서)



삶이 향기롭던 향희 선생!
              
                 맹하린
 

상상치도 못했던 당신의 부음(訃音)을 접하고
우리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울음조차 막히고 말았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목이 꽉 잠기는 이 혼란은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당신이 가시다니요.
이렇게 떠나다니요.
문학을 사랑하고
가족을 아끼고
교회와 신앙을 꽃처럼 가꾸던 당신이
그리도 서둘러 떠나시다니요.
최근 들어 지치고 힘든 투병생활을 하는 중에도
언제나 직선적이면서
늘 다른 이를 배려하던 당신이 아니셨습니까?
아픔의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가족을 위로하고 미소로 다독이던 당신은
이제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남기고 그리도 바삐 떠나고 말았더이다.

갑자기 그렇게 떠나셔서 작별인사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지만
우리 이제 슬픔을 잊고 기도 안에서 그리움을 나누며
화평의 꽃만을 피우도록 해요.
당신이 떠나신 그곳은 의심 없이 좋은 곳인 것만은 확실한 사실일 테니까요.
참으로 강하던 당신이 그렇게 선선히 떠난 뜻은 따로 예비(豫備)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픔 속에서도 아름답게 사랑하고 애착을 보이셨던 이 세상은 속히 잊고
주님의 나라에서 행복하시기를 간곡히 바라게 됩니다.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우리 이제 오로지 선한 모습으로만 살아가기로 해요.

향희선생!
이제 당신은 그곳에서
우리는 이곳에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보아요.
언제나 밝고 환하게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였다가
새로운 별이 된 향희 선생…….
우리 모두 모처럼 한마음 되어
슬프고 아쉬우나 더없이 순명(順命)하는 자세로 인사합니다.
안녕히, 부디 안녕히 가시옵소서!

    당신의 문우 올림.

   
-초여름-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한 시각 한 시각이
얼마나 소중하면서 첨예로운지
새삼 깨우친 어제와 오늘이었다.
나는 천주학쟁이지만
향희선생을 땅에,  또는  하늘에 보내며
그녀의 교우들이 슬픔의 빛으로 부르던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그 찬송이 첨 듣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싸한 기운으로 마음 속을 헤집고 있었다.



2012년 6월 24일 일요일

거기서 잘 지내쥬?



    맹하린


보름 쯤 되었을까.
Cartero(우편배달부)가 본국에서 보내온 전보를 가져왔다.
집도 가게도 이렇다할 이상이라고는  없었는데 ,그쪽에서 전화 연결이 잘 안되어
따로 연락할 길이 없었나 보았다.
시댁 가족 중의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보였다.
나는 집배원한테 팁을 주려고 잠깐 기다리라고 했는데, 가족이 의외의 반대를 했다.
나쁜 소식인데 어찌 팁을 주려고 하느냐는 타박이었다.

그동안 나는 현지인 배달부나 청소부등에게 어김없이 팁을 건네 왔었다.
구약시대엔 안 좋은 소식(消息)을 가져 오는 자(者)를 죽이기까지 했다는 질책이 잇따랐다.
"지금이 구약시대니?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뭘 나빠?"
(때로는 나도 떠나고 싶단다.)
나는 그렇게 겉과 속으로까지 반문하면서 집배원에게 다음에나 팁을 주겠다는 뜻의 제스처를 전달했다.

어제 낮.
본국에서 달마다 보내오는 문예지를 집배원이 가져왔기에 밀렸던 팁까지 적절히 건넸다.
가족은 ,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있었다.
나쁜 소식이 아니라서 그러나 보았다.
동전 한 닢도 소중히 여기는 가족이지만,  나의 그런 면에 대해서는  평소 한 치도 간섭하지 않아 왔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만나도 나를 에셉시온(예외적)한 존재로 대접해 왔기 때문이다.
가족과 나는 어떤 면으로는 상부상조(相扶相助)를 즐기는지도 모른다.
같이 사는 동안까지는 서로가 서로를 돕기로 암묵적 약속을 해낸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처럼 그렇게 언제나 각자의 배려를 아끼지 않으며 살아간다.
따로 약속은 안 했어도 함께 살 날 까지는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될 것 같다.

나는 항상 그래 왔지만 최근에 더욱 많은 변화를 갖춘 나를 발견하고 새삼 놀란다.
이틀 전.
어느 모임이 끝난 후 가게에 돌아온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나는 가게로 총총 돌아오고 모두들 우르르르 N의 집으로 몰려가는 게 언제나의 정해진 코스라고 볼 수 있다.
가게에서 대강 일을 끝내고 나는 결국 N의 집으로 자연스레 이끌리듯 가본다.
가봐야 뻔한 일이지만 나는 항상 그래도 가보고는 했다.
언제나처럼 정원 옆 홀에서 네 명씩 두 팀으로 나눠 고스톱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동안의 나는 사실,  우리 교민들에게 고스톱이나 골프 등이 꼭 필요한 오락이며 운동이라고 매우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아 오던 터였다.
나는 그녀들이 고스톱을 치는 장면을 맞닥뜨릴 때마다 세 번쯤 박장대소(拍掌大笑)에 가깝게 웃기는 역할을 언제나 충실히 실행해 온  편이다.
첫째는 고스톱도 칠 줄 모르면서 배우고 싶어 하지도 않고 한 번 쳐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게 그녀들에겐 너무나 웃기나 보았다.
그 다음엔 칠 줄을 모르니까 금세 지루해져서 10분도 못 견디고 폴짝 날듯이 일어나는 모습도 무척 웃긴다고 한다.
마지막엔 내가 남기고 오는 인사말 때문에 가장 많이들 웃는다.
"그럼 고스톱도 못 치는 이 빙신(병신)은 이만 물러가도 되겠죠?  용서들 하세요!"
때로 나는 그녀들에게 한국산 아이스크림까지  사다 안긴다.
웬 아이스크림이냐고 그녀들이 의아해 하면 나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원래 이런 건 왕따 당하는 사람이 사 와야 하는 정도는 모자란 나도 벌써 알아채고 있었거든요."

오랜 방황과 화해하고 얼마 전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최근의 내 하루하루는 유난히 신선하고 새롭게 느껴진다.
얼굴도 모르는 몇 분과 교류하면서 갖는 초심으로 돌아 간 것만 같은 동지의식(同志意識) 의 기분도 나름대로 근사하게 여겨진다.

순서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불현듯 세상을 떠나고 있다.
참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사소하지 않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에 나는 마음이 아려 죽을 것 같다가도
그 아릿함을 대위법으로  각성(覺醒)과 같은 이치를  되찾는 경우 매우 흔했다.
나는 누구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바짝 정신을 차려야 살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로 남편을 그립게 저절로 추억한다.
그가 투병 중에 있을 때 손톱발톱을 깎아주며 해내던 치기(稚氣)어린 장난들.
-당신은 엄지발톱이 유난히 가스락져요. 한 성질 했을 것만 같은 발톱이십니다.
-하하 하하하.
다 깎은 손톱발톱을 왼 손에 쓸어 담은 후 그의 입 가까이 대며 아이 다루 듯 아! 하면 새끼 새처럼 아! 해 주던 그.
그때 비로소 왼손에 담았던 손톱발톱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바닥을 과장스레 털어내는 나를 보며 다시 하하하 웃던 그.

"께 딸(어떻게 지내요)?  거기서 잘 지내쥬?  거기서,  거기서..."




2012년 6월 23일 토요일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박정대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桶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히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동안에도 나는
오로지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서만 너를 사랑했으니
산초나무여, 네 몸에 돋아난 아득한 신열의 잎사귀들이여.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열렬한 고독의 음악인가


......................................................................................................




문우 이향희 선생의 영전에 바칩니다.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초여름-
몇 년 전에 문협의 부회장을 맡았던 이향희 선생이 향년 60세로 타계했다.
임파선에  작은 암덩이를 발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데  예고도 없이
그렇게 빨리 떠났다.
문협의 모임에 한동안 안 나타나서 안부전화만 몇 번 했었는데...
부군이신 김목사님께 전화도 드릴 수가 없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아 낼 것처럼 아집을 부리며 서로 기고만장한 이 들에게 전하려던 시였었나?
결코 아니다.
나는 지금 오로지  묵상 중이다.
하물며 나의 문우 하나가 세상을 떠난  마당이 아닌가.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가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있는 이의 앞모습




     맹하린


   1992년

 
토요일인데 친구가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전화를 해왔다.
가족도 외출 중이고 해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겨자채를 준비하려고 한국식품점에 들어서니, 70대로 보이는 한국인 어르신이 과일을 고르고 계신다.
50대 종반의 여주인이 나를 반기며, 아줌마는 뭐 드릴까 라고 묻는다.
“맛살과 오이, 그리고 콩나물과 굴비가 필요해요.”
콩나물 잡채를 만들려면 미리 다듬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말한다.
굴비는 양파와 무를 깔고, 위에는 풋고추와 파와 마늘 등을 섞은  양념장을 얹어 조림을 해낼 생각이었다.
“아줌마!”
현지인 종업원이 내가 주문한 재료들을 챙기는 사이에 여주인이 나를 새삼스럽달 정도로 크게 부른다.
어조가 좀 강하다 싶으면서 약간의 어리광 비슷한 비음이 섞여 있다.
목이 쇤 음성이라 일부러 힘들여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네.”
나는 놀라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답하게 된다.
“내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싫지요?”
나는 어떤 뜻으로 묻는지를 몰라서 잠시 어리둥절과 얼떨떨 사이를 헤맨다.
하지만 금세 자연스런  대답을 건넨다.
“아니요. 왜 싫겠어요. 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줌마인 걸요.”
“근데 나는  왜 젊었을 때 아줌마라는 소리가 그렇게 싫었지? 요새도 가끔 꼬마들이 부모를 따라와서는 나보고 할머니라고 부르면 그게 그렇게 싫습디다. 우리 딸들도 내가 할머니 소리 들으면 몹시 싫은가 봐. 우리 엄마가 왜 할머니냐고 꼬마 애들한테 야단치듯 달래면서 주의를 주는 거예요...... 할머니!”
여주인은 과일을 다 고르고 난 한국인 어르신을 향하여 여전히 강하게 부른다.
“예?”
그 어르신 역시 쉰 목소리가 너무 강했다고 여겨졌는지 나보다 더 놀라듯 대답한다.
“할머니는 할머니라고 불리면 싫지 않으세요?
“싫긴요. 늙은이 보고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뭐가 싫겠우? 나는 벌써 증손자를 보게 됐다오.”
“그래도 옛날부터 그래 왔잖아요. 여자는 나이를 먹어도 평생 여자라는 말.”

어느 노인 신부(神父)는 주일날 미사 시작 전의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과 악수를 나눌 때의 인사가 일주일도 즐겁게 하고 한 달도 괴롭게 한다는 소감을 경향잡지라는 책에 발표해서 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신부님! 어디 편찮으세요? 오늘 혈색이 영 안 좋으세요.”
바로 그런 인사를 듣게 되면 주일 날 내내 기분이 지금거리는 데다 정말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일주일 정도 기운까지 없어진다고 했다.
“신부님, 요즘 좋은 일 있으시군요? 굉장히 젊어지셨어요. 신수가 훤하시네요.”
그런 인사를 받게 된 주일날에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날듯이 가뿐해짐은 물론이고 한 달 내내 기쁘다는 얘기였다.
수도자이자 사제라는  소명(召命)을 부름으로  받은 신부가 설마 그 정도까지 인사에 좌지우지 될까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수도자도 인간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신자들의 덕목(德目)을 깨우치기 위한 계도(啓導)를 그런 식으로 펼쳤으리라 여겨진다.

성당의 안나회(70세 이상의 여성신자 모임)분들을 뵙고 가장 바라는 게 무엇인가를 조심스레 질문하게 되면 이구동성으로 선종(善終)하는 일을 꼽는다.
(선종= 임종할 때 성사를 받아 대죄(大罪)없이 잠자듯 죽는 일.)
나이 든 소가 가장 곧은 고랑을 판다고 했던가.
노인들 모두 젊은이들 보다 더 많은 세월을 헤쳐 나와 세상이치에 훨씬 깊은 터득을 깨우쳐 왔으리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시 낙화에서-

그렇다.
 하지만 가야할 때를 분명히 알고 있는 앞모습은 그 어떤 참담한 이해가 얼룩지듯 스며 있어 보일 것 같은 느낌 또한 서리게 된다.
아무리 저승길이 대문 밖이라고는 해도,  자석에 이끌리듯 밖에 저승이 있다는 대문을 향하여 발길이 저절로 다가가는 심정이란  것은 굳이 따지지 않아도  허무(虛無)의 극치이리라.

구태여 나이든 분들에게 그점을 지적해 주는 게 친절한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늙으면 아해(兒孩)된다는 말…….
늙기도 설어라커든 짐조차 지실까라는 시조…….
그런 옛말들이 공연히 만들어진 건 아닐 것이다.

친구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노후에 대한 얘기를  당면(當面)한 과제(課題)나 되는 것처럼 진지하게 주고받게 되었다.
금방 50이 되고 금방 60이 되리라는 걸 예감처럼 깨달으면서.


-초여름-

*어제 오후의 산책 시간엔 산책을 미루고 편의점에서 시간을 때우게 되었다.
아는 여인이 눈에 띄어서였다.
나중에 N까지 합류해서 한참이나 재미 있게 웃고 떠들고 그랬다.
많은 얘기 중간에 N이 나를 향해 말했다.
"형님은 복이다, 염색도 안하고 머리숱도 많고. 염색하면 얼마나 눈이 나빠지는데!"
"눈은 이미 나쁜 걸? 다른 복이 더 좋아 보이고 커 보여, 난……."
"왠지 모르겠는데 난 항상 그런 생각을 해, 다 죽어도 형님은 안 죽을 것만 같아."
무슨 의미인지는 묻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좋은 뜻처럼도 느껴지고 격려  같기도 했던  말이었다.

*지인 중에 나림이 엄마가 있다.
나림이가 한국학교 유치원에 들어 간지 얼마 안 지났을 때 우리 가게에 함께 왔었다.
그런데 자기 엄마가 나를 호칭할 때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니까 굉장히 의아스러운 표정을 한 채 불쑥 질문해서 나림엄마와 나를 한바탕 커다란 웃음폭탄을 터뜨리게 만들었었다.
- 엄마, 내가 보기에는 선생님 안 같아, 아줌마 같아.

현재 한국학교 3학년인 나림이는 길에서 나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면서 꼭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런데 나는 나림이에게 선생 노릇을 삼가고 항상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준다.
나는 누구를 가르치는 몫을 즐기지 않는데 어찌 선생이겠는가!
.
 (나림아, 오늘 왜 새삼 네 그 말이 굉장히 고마워지는 거니? 제발 부탁인데 너만은 저 돈 엄청 벌었다고 노인네 어쩌고 큰 소리 탕탕 치는 이들처럼 예의 없는 사람 되기 없기다!)
속으로는  어떠 했는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수 없이 겉으로까지  부르짖은 날이었다.
오늘은...... .


*아르헨티나 정부와 모쟈노 노동총연맹 서기장의 협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른 상태라는 속보다.
정부가 모쟈노  노조위원장을 고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
노동총연맹에서는 27일 수요일을 시위날로 잡았다고  더욱 으름장이다.
주유소마다 휘발유를  판매하지 않는 사태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와중이다.
노총의 선거일이 다가오자 라이벌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모쟈노의 아들이 키르츠네르 측근이라서 선거의 귀추가 집중적으로 쏠리고 있는 판국이다.  포괄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 모든 소요는 정객들의 장난감 총싸움이다.
이미 정해진 각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도  때 늦은 평화를 얻게 되었다.
흐름대로 흐르겠지만  나를 더욱 아끼고 보호하며 살겠다는...
뼈 시린 각오 다음에 생긴 평화다.







2012년 6월 20일 수요일

좋은말 좋은글




 -이외수




1. 그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없고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없는 처지라면

     그대의 인생 길은 당연히 비포장 도로처럼 울퉁불퉁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수많은 장애물을 만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두려워 하지 말라

     하나의 장애물은 하나의 경험이며

     하나의 경험은 하나의 지혜다


      명심하라

     모든 성공은 장애물 뒤에서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2.  행복은 반드시 타워펠리스 48층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BMW7 시리즈 뒷자리에만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행복은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이름모를 카페에서

      마시는 한잔의 모카커피에 녹아 있을지도 모르고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운좋게 당신 차지가 된

      빈자리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고

      밤새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싸한 새벽공기에 스며 있을지도 모릅니다.

      행복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3. 에이브리햄 링컨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 먹은만큼 행복하다"

                                     

4. 토끼와 거북이를 육지에서 한 번만 경주를 시키고
   토끼를 자만과 태만을 상징하는 동물로 간주하거나
   거북이를 근면과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로 간주하면 안된다.
   바다에서 경주를 시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어떤 대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은 거의가 이런 모순을 간직하고 있다.
   세상이 그대를 과소평가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
   그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주 유일의 존재다.



2012년 6월 19일 화요일

디지털 시대의 길목에서



          맹하린


중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가려면 새벽 5시 30분쯤에는 일어나야 했다.
입맛이 없어 아침식사를 건성으로 하고, 도시락과 책가방을 챙겨 4Km를 걸어서야 도착할 수 있는 대장 촌이라는  기차역으로 간다.
공순이, 순자, 은자, 경자, 복례, 영님이,  수경이, 사촌 동생 정인과 양인, 그리고  내 동생 미숙.
그렇게 떼 지어 종알종알 얘기하면서 걷다보면 저만큼 앞에 사촌이면서 ,  정인과 양인의 친 오빠인 덕준 오빠가 보이고는 했다.
고려대학교를 나와 지금은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덕준 오빠는 늘 혼자였다.
등하교 길에 손바닥만 한 종이에 적어 놓은 영어 단어를 설 미친 사람처럼 웅얼거리며 외우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저만큼에는 꺽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종표 삼촌이 보였다.
장대처럼 커다랗던 종표 삼촌은 외가 쪽으로 친척이었는데, 내 초등학교 동창인 정표를 데리고 다녔다.
나의 가족들은 내가 정표에게도 삼촌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여러 번 언질을 줘왔지만, 나는 끝내 정표를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굳이 삼촌이라고 부르기를 꺼렸던 것은 허구한 날 다른 동창 애들 이름을 내 이름과 엮으면서 반장이던 김현중과 연애한다, 전기표와 좋아하는 사이다,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놀리고 있어서, 뭐 저런 친척이 다 있나 날이 갈수록 질리는 기분이었다.
정표는 한 번 놀리기 시작하면 기차가 도착해야 제동이 걸리고는 했다.
쥐어 패고 싶었지만 나는 참았다.
삼촌이라는 이유 하나로.

김현중이 나를 좋아 하긴 했었나 보았다.
어느 날 훈육주임이신 체육선생님한테 수업시간에 불려가서 치도곤이 야단을 맞았다.
김현중이 학교로 연애편지를 보내온 거였다.
멍청한 녀석이었다.  나는 편지를 좋아 하지만 몰래 보내는 편지를 좋아 하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행동이지 않은가!
연애가 아니라 혼자서 그러는 짝사랑이라는 설명도 못했다.
그 시절엔 그랬다.
지금은 선생한테  혼나면 되레 선생을 때리는 학생도 있다지만, 그 시절엔 내가 편지를 보냈다고 뒤집어 써도 꼼짝없이 당해야 일의 해결이 간단해지는 시절이었다.
그날 훈육선생님한테 들었던 훈계와 치도곤은  다 잊었지만 이 부분만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못 생긴 게 꼬리나 치고. 어린 게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맞는 말씀이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나중에 성장해서 동국대학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그 대학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친구들과 함께 서 있던 김현중을 10여년 만에 만났다.
나는 못 알아 봤는데 김현중은  나를 알아 보고  아는 체를 해 온 것이다.
(짝사랑 맞구나!  나는 자기가 김현중이라고 말해도 긴가민가인데...)
웃으며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중학교 때 훈육선생님에게 혼 난 생각이 떠오르는 깜냥으로는 쥐어 패주고 싶었지만 이미 잊었었고 지나간 사실일 뿐이었다.
쥐어 팬다...
나는 이 언어를 말로만 써 먹을 뿐, 자식조차 한 번도 야단치거나 때리지 않고 키웠다.
나처럼 뭐든  혼자  다 알아서 해내는 성격이라서다.

나한테는 장점이라고 해야 할지 단점이라고 해야 할지, 그 어떤 하나의 연관성만 있으면 이해하고 용서하는 면이 넘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위기(危機)의 껍질을 한 겹 벗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인생을 선택할 때보다 그냥 흐름대로 따르기를 즐겨 해석(解釋)해 왔다.

아침에 출근하는데 거리의 모든 사물(事物)이 소프트 포커스로 눈에 비치고 있었다.
아마 이틀 동안의 미열(微熱) 때문일 것이다.
현실을 직시(直視)할 필요를 걸음마다 깨우치게 되었다.
진눈깨비라도 흩날릴 것 같은 날씨다.
옷을 여러 벌 껴입고 코트와 머플러까지 둘렀는데 바람은 폐부(肺腑) 가득 X선처럼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이 며칠 나는 코즈모폴리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가장 외로운 시간들을 맞고 보냈었다.
아이덴티티가 확고한 몇몇 사람들은 항상 분명한 자기주장을 구축(構築) 하는 면모가 뚜렷하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바짝 긴장하게 된다.
긴장은 내게 산소이며 사태이며 일련(一連)의 과정이다.

일생의 반 이상을 아날로그에 몸담았다가, 고작 몇 년 전부터 디지털 시대에 발 디딘 이 긴장의 시대.
한층 시대감각을 공유하며 내가 나를 검토할 시점(時點)이라는 사실을 인식(認識)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나는 어떤 면으로는 건방졌었나 보았다.
스트레스에 찌든 세상을 약간이라도 다독여 보겠다고 나섰지만 , 결국은 내가 먼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처할 때가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정보전환(情報轉換)의 직면(直面)앞에서 잠시 반성하게 된다.
머잖아 나 본연의 나로 환원되고 싶어진다.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숟가락



-박영인


다섯 살 아들녀석 밥 먹지 않겠다며

숟가락을 집어 던진다

어느 때보다 심하게 아이를 혼낸다



나는 겯숟가락이었던 적 있다

열네살,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큰아버지댁 군식구가 되었다

큰아버진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된다 하셨다

큰어머닌 숟가락 하나를 더 놓아야 된다 하셨다



양푼 가득 밥을 비비면 밥과 나물이 잘도 섞었다

네 명의 사촌이 부딪는 숟가락은 리듬을 타며 정겨웠는데

내 숟가락만 엇박자로 치달아 박자를 놓치고 했다

그렇게 어눌한 숟가락질이 부산해도, 너무 느려도

눈치가 보였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숟가락질이었다



대기발령 받은 남편

며철째 말이 없다

숟가락은 쉬 부러지지 않는다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숟가락을 주워 들었다


.............................................................................................................




외할머니의 숟가락


-손택수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2012년 6월 16일 토요일

머피의 법칙


           맹하린


친구 옥윤 씨가 내리 사흘 동안 매일 다녀갔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예전에 성당에서 ME교육을 받은 선배들이 이번에 받을 부부들에게 쓴 편지를 보여 주려고.
그리고 달러파동이나 다름없는 이 난국(難局)을 어째야 옳은가의 얘기를 나누기 위해.
소화가 안 되는 병은 신경성이 주범인 듯 싶어 잘 달래 주었다.
편지는 그녀가 써온 짤막함에 약간 보태줬을 뿐인데도 그녀의 얼굴을 금세 활짝 어니 펴지게
만들었던 것도 같다.

가게도 소유했고 공장을 겸한 커다란 주택도 있고, 아들도 장성했고 딸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다시 아르헨티나에 돌아와 계속 미술공부에 전념하고 있고.
남편의 술담배야 의사의 경고조치를 노란딱지로 받았으니 막나가지는 않을 텐데 무에 그리 걱정을 벽돌처럼 쌓는 중인가, 히고  새삼 토닥임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언제나 감탄을 빠뜨리지 않는다.
도대체 걱정이라고는 없는 나를 보면 부럽고 신비스럽다는 얘기다.
걱정…….
뭐든 나를 나한테 맞춰서 사는데 걱정할 일이 뭐라는 말인가.
어떤 일을 만나도 절대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는 게 바로 나의 유일한 생활철학이다.
나는 사는 게 그냥 좋다.
돈 버는 일에는 낮은 점수를 받지만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게 잘 지내라면 시간이 부족해서 아까울 정도로 싱싱 신나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최고라고 쾌재를 불러대는 좀 모자란 인간의 전형(典型)쯤 된다.

어쩌면 나는 픽션(허구)이나 팩트(사실)를 마구 뒤섞으며 살기보다 인생을 무조건 즐기고 감사하게 여기는 스타일 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기분이 많이 다운될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집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좀 울어야지. 이불을 뒤집어써야지.)
그런데 거짓말을 좀 보태자면 눕긴 누웠는데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전에 잠에 빠지는 나의 잠복이여!
아침이면 기분 근사하게 거뜬해 있는 나의 단순함이여!
그럴 때면 나는 일련의 의문 같은걸 떠올리게 된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나빴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적게?)
나는 잠들 때와 잠 깰 때, 기분 좋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받는 상이 있다기에 오랫동안 그걸 지켜온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낼 것이다.

옥윤 씨가 돌아갈 때, 우리 가게 앞의 버스정거장에서 거의 30분 정도 함께 기다려줬다.
나는 가게의 영업시간에는 꼭 가야할 일이 아니면 어디도 가지 않고 만약 가야 할 경우 주로 레미스나 택시를 이용한다.
시간절약이 차비절약인 것이다.
그렇지만 옥윤 씨는 집에 자가용이 두 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나 아들을 절대로 성가시게 안하는 상이 있다고 여겨온 사람이 있다면 그 상을 타야할 사람처럼 군다.
평일이니까 버스가 자주 오기는 했는데 현지인 여자와 옥윤 씨가 함께 손을 들어도 웬일인지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한 대만 지나간 게 아니라 세 대가 그랬다.
흡사  시간에 쫒기는 버스들만  같았다.
마침내 현지인 여자는 한 정거장 전으로 떠나고 있었고, 옥윤 씨는 한 정거장 다음으로 떠나게 되었다.
두 사람 다 나를 한 번씩 유심히 지켜본 후에 결정한 일이었다.
나만 결정을 안 해도 될 일이었다.
버스 정거장은 어디나 두 블록을 사이에 두고  구간이 정해진다.
그녀들이 반 블록 쯤  나를  사이에 두고 점차적인 간격을 둘 무렵,   드디어 버스가 왔다.
이미 탈 사람은 남아 있지 않은데도 버스는  섰다.
나는 손도 안 들었지 않은가.
순간적으로 나는 양편을 모두 돌아보게 되었다.
현지인 여자는  되돌아서서 내게 어깨를 으쓱 움츠리는 제스처를 보내왔고, 옥윤 씨는 타박타박 뒤도 안보고 걷는 중이었다.
모르긴 해도 버스가 옥윤 씨를 지나칠 즈음에야 비로소 발견하고 아차 그렇게 짧은 탄식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버스를 탄 일이 몇 년도 넘었고 버스를 탈일도 없는 내 앞에서 손도 안 들었는데 우뚝 서준 버스.
언제였을까.
하릴없이 버스를 타고 바깥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며  종점(終點)까지 다녀오던,  내내 상념(想念)
에 젖어 있던  날들을 기억한다.
비가 와서 길에 고인 물웅덩이를 자가용으로 달리며 물길이 좍 옆으로 갈라지는 현상을 환희롭게 즐기던 날들도 추억(追憶)한다.

말 그대로 머피의 법칙(法則)을 실감한 날이다.
피할 수도 피해지지도 않는 상황.
법칙은 법칙이다.




2012년 6월 14일 목요일

Villa Ocampo (Casa de Cultura=문화의 집)









            맹하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근교인 산 이시드로 지역에 자리 잡은 오캄포 별장은 20세기를 주름잡던 세계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천재작가로 알려진 아돌포 까사레스가 자주 회합을 갖고 교류를 나누면서 지성인(知性人)들을 위한 문예지 수르(Sur)를 창간한 곳이다.
아르헨티나 문인들과 유럽문학의 대들보였던 버지니아 울프(Virgenia Woolf)와 호세 오르떼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Casset) 등 당대 최고였던 문인들과 라벨을 위시한 작곡가나 예술인등의 사무실 역할도 했다.
이 별장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보르헤스는 무명인사에서 유명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 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모임을 가질 때마다 유럽과 남미의 문학이 가져야할 진로(進路)와 방향(方向)을 서로 고민하며 거론(擧論)했고 자주 담합(談合)을 가졌다.
문제는 그들이 문학을 논하면서 사회문제까지 논평의 주제(主題)로 삼았다는 점과. 날이 갈수록 반페론주의 성향의 기치(旗幟)를 높이 내세웠다는 데서 발생 되었다.
특히 보르헤스는 페론 당을 공산주의 세력이라고 가차 없이 몰아 세웠고, 프롤레타리아 투쟁이자 반민주적 정부이며 불온세력의 온상(溫床)이라는 평가를 남발했고 여론(輿論)으로   삼았다.
보르헤스와 그 외의 문인과 예술인들의 비난 실린 봇물이 페론당원들을 제대로 휩쓸어 내기에는 모든 면에서 역부족 현상이 돌출 되고 있었다.
페론당원들은 오캄포 별장을 반체제 인사들의 은신처이자 활동영역이라고 몰아세우기 시작했고,  전반적인 감시 아래  사법기관의 조사를 받게 하는 방파제(防波堤)까지 쌓기에 이르렀다.
페론당원들의 비난은 짧은 기간에 극에 달했다.
'오캄포 별장에 안주(安住)한 채 호의호식(好衣好食)만을 일삼는 귀족주의 문인들, 서민들의 애환(哀歡)을 외면하는 전형적 부르주아들.'
결국 오캄포는 체포되었고 한 달 가까운 영어(囹圄)생활을 마감하면서 곧장 유럽으로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오캄포 별장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문인들 역시 은둔자로 변신을 꾀하거나 해외로 망명생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68년.
15년 동안의 유럽생활을 청산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별장에 돌아온 오캄포는 하나에서 열까지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수도 없이 겪고 껴안고 먹고 마시고 체감(體感)해야 했다.
장기숙식처(長期宿食處)라도 된다는 듯 허구한 날 머물던 문인들도 
오캄포를 여왕으로 떠받들던 요리사들과 하인들과 집사(執事)들도
언제나 군림(君臨)하던 부귀영화와 권위조차도
페론의 재집권도
오캄포를 크게 고립 시켰고 자괴감에 잠기도록 유도(誘導)했던 것이다.

1973년도.
심기일전(心機一轉)을 꾀하던 오캄포는 "세계 문화 창달을 위해서"라는 기치(旗幟)를
자구책(自救策)으로  삼으며 오캄포 별장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활용하기 바란다는 제안과 함께 유네스코에 기증을 결심했다.
페론당 정부와 일부 기업들과 뜻 있는 시민들의 후원으로 운영을 지속하고 있는 오캄포 별장은 현재 특유의 궁궐과 같은 자태를 뽐내며 많은 수목으로 가꿔진 장원(莊園) 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탁월한 주위 경관(景觀)을 지닌 채
관심 있거나
관심 멀어진
가깝고 먼
오캄포 문화의 집으로 거듭난 별장.

두어 해 전.
지인 몇 분과 오캄포 박물관을 다녀오면서 태평성대(太平聖代), 인생무상(人生無常),귀족주의, 문화창달(文化暢達)등의 수식어(修飾語)들에게 며칠이고 갇히는 기분이 들었었다.
중세유럽의 고성(古城)을 연상케 하는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은 문인 오캄포의 일생을 내 나름의 각도로 조명(照明)하며 이 며칠, 모처럼 휴일을 맞은 고즈넉함을 즐겼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으면 마음도 편해지는 법!
산책을 나선다.
길은 여태 나를 기다렸다는 듯 매우 상쾌하게 전개 되어 있었으며 고요, 그 자체였다.
나는 천천히 관찰하면서 계속 산책을 즐기게 될 것이다.
때로는 딜레마의 극복과 추구의 경계(境界)를 넘나들며.
문학(文學)도 생(生)도 간혹 딜레마의 한 장르임을 절감하며...

2012년 6월 13일 수요일

젊은 베르테르처럼은 아니라서




       맹하린


격동(激動)과 급변(急變)이라는 무장(武裝)을 갖춘 채 연병장(練兵場)을 돌고 돌며  강한 언어들이 날마다 강행군을 치르는 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팽개쳐지고 있는 정세 속의 나날들이다.
해처럼 떠오르거나 달처럼 떠오르고
해처럼 지다가 달처럼도 지고 있는 현실이다.

입에 올리기도 손으로 쳐들고 보기도 두려워 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기며 지켜보게 되는, 각종 매스컴을 굵직굵직한 메인뉴스로 장식하는 표제(標題)들.
'암달러, 거침없는 상승세 지속'
'환전규제 강화로 예금인출 사태'
'정부가 돈으로 노조원들 매수'
'채무 페소화'
'정부 모든 공직자의 금융자산 페소화'
' 민법 개정안 연방 상원에 제출'
'정기예금보다 자동차 투자가 낫다'

트위터 계정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 크리스티나는 매우 역설적인 민법개정안을 과감하게 표출했다.
"법이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세로 21세기의 문제를 19세기의 법으로 해결하는 일은
지난(至難)한 일"이라는 제시였다.

본국의 뉴스 역시 강한 결정타를 날리며 절대적으로  만만치가 않다.
특히 이 제목이  나의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리트윗, 조심!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발 빠른 전파성, 그리고 이용자들의 동정심을 악용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는 경고다.
수백만 명이 삽시간에 운집을 보일 수 있는 트위터 이용자들.
그들의 선량한 마음이 범죄행각 은폐를 노리고 올리는 글에 이용 되어 노도(怒濤)와 같은 트위터리안들이 앞 다투어 퍼 날라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를 장식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태를 발생시킨다는 지적이다.
"자신의 리트윗이 본인이나 남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경찰청 사이버기획수사팀 관계자가 밝혔을 정도로까지  일의 심각함이 절정에  이른 것이다.

트윗하느라 좋은 말 올린 기억이 한 두 번 밖에 안 되고,  리트윗 역시 격언이나 속담이 되는 좋은 말에만 했었기 때문에 그나마 나 스스로에게 안도하게 된다.

세상이 이리저리 회오리 칠 때는 조용히 책이나 읽으며 지내는 게
상책(上策)이라는  결심이 불현듯 치밀고 있다.
예전에 읽어냈던 책이 될 경우 또한 배제하지는 않는다.
어제오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가까이 하고 있다.
아래의 부분을 웃음으로  접했다.

"오늘 나는 로테네 집에 가지 못했네.
피치 못할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하인에게 로테네 집에 다녀오라고 시켰지.
로테 곁에 가 있다가 온 인간을 내 몸 가까이
있도록 하고 싶었던 걸세.
얼마나 마음을 죄며 그 하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네. 이윽고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설레도록 반가웠다네.
체면 대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만 그의 목을
껴안고 키스를 해주고 싶었네.
형광석(螢光石)은 햇빛을 흡수해서, 밤이 되어도 얼마 동안은
빛을 발한다고 하더군.
그 젊은 하인이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과  같은 존재였네.
그녀의 눈길이 그의 얼굴, 그의 뺨, 그의 홑저고리 단추.
그리고 그 하인의  외투 깃에 닿았었다고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신성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네."

나 지금 또 다시 습관처럼  인터넷 서핑을 떠나는 중이다.
젊은 베르테르처럼 살 수 있는 세대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 되는 탓에
세상 어디나 널려 있는 자극적이며 충격적인 메인뉴스마다 새롭게 접수하며
나와 내 가족과 내 이웃과 내 교민과 내 조국과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휘휘 둘러보기 위한 신념을 산뜻함으로  간직한  채…….




2012년 6월 12일 화요일

보너스~


-초여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지금 눈이 내릴 듯한 날씨입니다.
오후 6시와 7시경부터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온화한 날씨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집시음악을 찾다가 같은 가수가 부르는 탱고음악이
오늘의  날씨와 어울리는 것 같아서
모셔온 시와 함께 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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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와


-정윤천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뒤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히따나(Gitana=집시족. 보헤미안)

맹하린의 수요칼럼


 아르헨티나중앙일보

 1996년 6월 16일



 어느 날.
우리 가게 앞으로 대여섯 명의 히따나들이 왁자지껄 떼를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히따나들은 360도나 되는 호화찬란한 원피스를 치렁치렁 땅에 끌며 허리만 잘록하게 조여 입는 전통을 고수(固守)하는데, 머리는 하나같이 어깨를 덮게 기르고 원피스와 같은 천으로된 머플러를 리본처럼 머리에 묶은 채 몰려다닌다.

 집시의 원래 출신지는 인도라고 한다.
그들은 보헤미안의 혈통을 이어 받아 세계 여러 나라에 흘러 들어가 언제나 집시답게 가장 집시다운 생활을 영위해 왔다고 전해진다.
아르헨티나에선 천막생활이 아닌 떳떳하게 집을 소유해서 살고 있는 실태(實態)다.
현지인들조차 그들을  전혀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대하는데, 대부분의 집시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며, 하나같이 손금을 봐주거나 점(占)을 봐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더 그런 대우를 받는 것 같다.
곱게 손금을 봐주거나 점만 친다면 괜찮겠지만, 그러는 과정의 중간에는 야바위 짓까지 해낸다고 한다.

우리 가게 옆에서 까미사(블라우스)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패션 신띠아의 현지 엄마는 실제로 그들에게 결혼패물을 몽땅 빼앗긴 좋지 못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런 연유로 히따나들이 상가(商街)에 나타나기만 하면 현지 엄마는 훠이훠이 손짓을 하며 쫒아내느라 주위가 시끌시끌해질 정도로 야단법석을 떨고는 한다.
 신혼 때의 현지엄마가  Flores 공원을 지나가는데,  히따나 몇 명이 가까이 오더니 친절에 친절을 다하면서 족집게처럼 지적을 했나 보았다.
-당신은 얼마 전에 결혼을 했죠? 그런데 일정한 직업을 못 정해서 고민 중인 것 같네요.
그렇게 정곡(正鵠)을 찌르며 이 일 저 일을 또 다시 꼭꼭  짚어 내더라고 했다.
그러던 히따나들은, 좋은 직업이 정해질 수 있도록 주술(呪術)을 외어 줄 테니까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보석마다 신통력(新通力)을 걸자고 제안했고,  현지 엄마는 결혼예물로 받은 귀걸이와 반지, 그리고 팔찌까지 다 빼어 손수건에 감싸는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었다는 얘기다.
한참 주술을 외던 그녀들은 집에 가서 펴봐야 된다면서 손수건에 싼 패물(佩物)을 핸드백에 넣어 줄 때  기필코 보석의 건재함을 재확인까지 시켜 줬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가서 펴보니 분명 있어야 할 보석들 대신에 차돌멩이 몇 개가 손수건 안에 덜렁 들어 있었나 보았다.
기이한 일은 왜 그렇게까지 당하면서 손톱만큼도 그녀들을 의심하지 않았었냐는 일이었다고.

집시.
한국에 살 때는 집시라는 말만 떠올려도 낭만의 상징처럼 여겼었는데  내가 직접 바라보게 된 대부분의 집시들은 손금을 보거나 점을 치지 않으면 야바위 짓으로 생계를 유지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열심히 지켜나가는 집시의 내력이나  자부심은  결단코 없어지지 않을 것처럼 굳세고 튼튼해 보인다.
집시로 태어난 게 부끄럽거나 싫다면 옷이나 치장부터 진즉 바꿨을 테고, 사기나 점을 치거나 손금을 봐주는 일도 집어 치우면 그만일 텐데 그들은 그 호화로운 무늬와 색깔의 차림을 고수하면서까지 일종의 긍지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 겨레붙이를 관찰하듯 좀 더 유심히 바라보노라면 아무리 급진적으로 물질문명이 발달을 거듭하는 세상이고,  옛것은 소멸(消滅)되어가는 풍습이 만연(蔓延)하는 사회현상이 닥쳐올지라도 집시족 만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신념에 잠기게 된다.
현지 엄마의 자조(自嘲)섞인 탄식(歎息)이 공감되듯 떠올려진다.
-다 이민 온 죄지요. 한국에 있었어 봐요. 우리가 어떻게 집시의 실물(實物)을 제대로 볼 수나 있었겠어요?
맞다.
저토록 화려 만발함을 저렇게나 영원불멸처럼 확실한 모습을 한국에 있었다면 단지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나  볼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나는 신(神)께서 우리 인간 중의 그 어느 민족이나 개인에게는 특별히 뛰어난 독특함을 제시 했다고  여기고 있다.
신(神)은 우리의 행동을 기억하고 또한 우리의 언어까지 파악하고 있다시지 않은가.
하물며 우리 인간을 서서히 항복시키면서 제압해 들어가는 병법(兵法)에 특히 노련하다고까지 일컫는다.
 신(神)의 칭찬, 그리고 다독임은 언제든지 우리 인간을 도취 시키거나 중독 시키는 면까지 강하거나 약하게 잦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할 때가 허다(許多)하다.
그대, 그리고 그대!
그대들은 아는가?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내 잘못이다




         맹하린


이른 아침 시간인 7시경에 출근해서 인터넷을 점검할 때면,  맨 먼저 Google뉴스를 보고  hot메일과 g메일을 체크한다.
hot메일의 경우 트위터에 팔로우 해달라는 요청이 500이 넘게 도배되어 있다.
숫자라는 숫자마다에 지극히 약할 뿐 아니라 중노동자인 나는 일일이 응답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 담엔 내게 평화를 안기는 이웃 블로거 몇 분에게 다녀온 후 트위터에 들른다.
공감 가는 좋은 말에 리트윗 정도나 하고 정치적인 얘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흥미조차 안두는 편이다.
드디어  Kornet에 들러 교민뉴스를 접하고 가장 나중에 이윽고 도착하는 곳이 상조회의 자유게시판이다.
회원이 된 지 벌써 4~5년 되었을 것이다,
한동안은 일주일 간격으로 좋은 시와 음악을 펌으로 올렸고 아침마다 의무처럼 댓글을 여럿씩 달았었다.
너무 나대는 인상을 안길까 염려한 나머지  몇 개의 중복 아이디를 사용할 때도 많았다.
그곳의 몇몇 누리꾼들은 나에게서 얘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매우 특이한 재주들을 지녔다.
그것도 내가 자진해서 말하지 않을, 그리고 그런 식으로 결코 마음을 열지 않을 일에 관해 짧거나 길게 얘기를 시키는 재능꾼들이다.
언젠가부터 포스팅도 리플 달기도  삼가고 있다.
나로서는 밀당(밀고 당기기)을 잘했던 걸로 아는데,  밀당을 제대로 못해낸 게 아닌가 싶어지는 일이 자주 반복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운명론자다.
닥치는 일마다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어떤 인연조차도 오면 운명이고 가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찰랑찰랑, 거의 쏟아질 듯  넘치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가끔은 악플러에게 할큄을 받고 며칠 쯤 안 들어 갈 때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표적도 크지 않은데 화살을 자주 얻어맞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꽤나 얼떨떨해지는 기분 같은 게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환경과 나의 모든 습관을 사랑하고 아끼듯이 타인(他人) 역시 그래왔었다.

여러 해 동안 자유게시판은 내게 하나의 습관이었다.
그들과 함께 지냈던 일 자체가 하나하나의 일과(日課)였으며 새로운 취미로 부상(浮上)하듯 떠오르기도 했다.
가장 확실한 건 나는 그들에게 나에 어울리는  역할을 두리뭉실 이행하지 못했다는 부분에 커다란 오류가 발생했을 것이다.

마치 병살타(倂殺打)를 맞은 것처럼 어리둥절한 느낌이 하염없이 밀어 닥칠 때면 아예 그 사이트를 차단시켜 놓은 기간도 몇 번인가 있었다고 자인하게 된다.
그럴 때는 며칠도 지나지 않아 눈치 백단인 가족이 내 대신 다시 설치해 놓고는 했다.
내가 어딘지 모르게 심심해 보인다는 게 이유이고 결정이고 배려가 되었다.
못 이기는 척 다시 눈팅이라도 시작해야 했다.
나를 위해선지 가족을 위해선지 그 적절한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새삼 가족에게 고맙다.

또 다시 며칠은  되었다.
눈팅도 안 하다가 눈팅만 하게 된 지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오다.
그 어떤 새로운 아이디로도 게시 글이나 댓글을 안 올릴 뿐 아니라 눈팅 정도만 해낼 생각이다.
그렇지만 장담은 나를 위해서도 가능하다면 금물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머잖아 다가갈 확률을 과감히 배제하지는 못할 일인  것이다.
나의 감성이나 나약함을 폭로함으로서 스스로 나를 소개(紹介)하고 나설 필요는 없다는 단정이 뒤늦게 생긴 뒤인 데도 말이다.
나는 익명(匿名)의 남용(濫用)과 악용(惡用)에서 이제라도 벗어났음을 안도하고 있을까.
겉으로는 가벼워 보였으나 내게는 지독하고 극심했던 질타(叱咤)의 누적을 타파하기 위해서
특히나  이러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제 정신이다.
다만 고독했을 따름이다.
고독하지 않다는 것은 나의 관념에 위배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깨닫게 되었다.
자유게시판은 크게 참을성을 배울 수 있었던 너무도 유익했던 장소였다는 사실을.

귀뚜라미 몇 마리가 앞뜰의 이곳저곳에서 뜰뜰뜰 노래한다.
그동안 내 두뇌에 세심하게 찍혀 있었을 폐쇄회로 카메라를 세심하고 지긋하게  파악하는 심정이기만 하다.
나 어느덧 새로운 장르에 입성(入城)을 했을지도 모른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꿈꾸며.
글이나 가까이하며.

굳이 밝히고 싶은 건 내 악플러는 허구헌 날 나를 쫒아 다니며 내가 처한 환경이라거나  내가 머무는 세상을 지적하던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철학적이라거나 심리학적으로 바른 말만 하는 사람도 아니다.
내 나이를 들추고 내 실명을 거론하고 내 생업을 밝히던 이는 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지식인들이었다.
내가 가장 못견뎌하는 악플러는, 결국 선한 리플만을 달았었다고 건방 떨고 자부(自負)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살갑기만한 토닥임을 건넸었다고 여겼었던 내 스스로의 선풀에 내가 먼저 자주 얻어터진 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
내 잘못이다.
바로 나다.
나 자신이었다.





2012년 6월 9일 토요일

어떤 소믈리에


-강 혜 원

모든 라벨은 사심이 없지
한결같이 청렴하다네
나 또한 사심 따윈 없으나 무료한 나의 혀는 미지의 회오리를 원하네

이를테면 미 개봉 중고를 견디며
숙성과 산화와 변질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누설하지 않은 갸륵한 맛
누대에 걸쳐 고단한 오크통을 미워하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서
절치와 부심을 곱씹은 병속의 태풍
태풍 속 부릅뜬 외눈 같은 맛

제품명- 언젠가는
생산년도 - 잊힌 지 오래
원산지- 산비알 자드락 젖은 눈시울 밭
맛- 대대로 농축된 옹이 깊은 맛
특징- 어딘가에 스밀 수만 있다면 드라이하게 굴욕을 견딜 수 있음

맨 아랫간 먼지 쌓인 와인 병의 바디를 껴안듯 닦아 주었네
이윽고 마개가 열리고
아 적빈의 이토록 깊은 빛깔에 사로잡힌 사이
시큼을 벗고, 놓쳐버린 새콤과 상큼을 획복하려는 눈물겨운 심호흡

나는 가장 전문가다운 표정으로
펑펑 축포를 쏘듯 두서없이 웃는 17번 테이블의 브이아이피
오래 묵은 귀빈에게
함부로 묵혀진 이의 비밀을 청아하게 따르려하네

세상의 모든 단맛으로부터 격리된
빈 달빛 비탈진 귀가길
자꾸만 들러붙는 허기의 잔가지를 쳐내며
수도 없이 외치고 삼켰을 형언할 수 없는 이 맛을



*소믈리에: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와인 감별사



2012년 6월 8일 금요일

잉크라는 피가 흐르는 신선들?



           맹하린


10여년 전.
나는 교민신문사인  C일보 사에 취직을 했다.
그동안 여러 교민신문에 돌아가며 칼럼이나 수필을 게재해 오던 인지도 덕택인지 의외로 간단명료하게 이룩된 취직이었다.
칼럼만 쓸 때와 편집을  하는 일과의 차이는 생각보다 간격이 컸고 하늘과 땅을 비교하는 일과  다름 아니었다.
그 무렵 편집과 운영을 도맡아 담당했던 J국장은 원래는 H일보 기자였는데 C일보가 창설 되면서 스카우트된 분이었다.
일은 그다지 고된 줄 몰랐는데, 마음은 갈수록 고달팠다.
편집을 하던 중에도 인쇄소에 다녀오라면 다녀와야 했고, 이탈리아 병원에 가서 한국인 의사를 취재해 오라면 어김없이 일을 그렇게 이행해야만  했다.
모든 단체들의 모임 시간이 저녁인 아르헨티나의 특성상, 행사가 겹치는 경우에는 J국장과 S기자로는 부족했고 결과적으로는 나까지 취재를 분담해야 했다.
주로 남자들로만 구성된 단체가 대부분이라서 미리 취재를 끝내고 식사는 사양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기사는 새벽녘에 쓴 뒤 출근하자마자 제출했다.
그런데 편집부에  미스 들이 둘이나 상주하고 있었는데도,  J국장은  아침마다 열리는 편집회의 때마다  전날 신문에 난 오타 등을 일일이 지적해냈다.
하물며 편집부원, 기자,  번역부원,  컴퓨터위원들까지 골고루 싸잡으며 닦달했다.
분명한 사실은 교정은 내 담당이었기 때문에 나의 책임감은 무겁고 컸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후만 되면 교정 볼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다녀야 했고, J국장의 지시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는 데에 문제의 요인이 있었다.
메인기사는 주로 J국장이 썼는데, 일단 지시가 내리면 나는 메인기사도 써야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칼럼도 써냈다.

즈믄 년이 막 시작되었을 것이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대통령의 북한방문 때.
교민 각 단체들의 앞 다툼에 힘입어 A4용지 사이즈인 광고란에 축하광고를 실어 달라는 주문이 며칠 동안 쇄도 했었는데 그 광고문안까지 J국장은 모조리 내게 일임했다.
천편일률 한결 같으면 안 되고 광고마다 개성 있게 써내는 게 관건이었다.
너무나 간단히 써 내는 게 신나고 듬직했는지 오로지 속전속결로 내게만  떠안겼다.

그런 일 저런 일 모두 참겠는데 아침마다 치르는 편집회의에서의 오타에 대한 질타는 정말 말 그대로 아사(餓死)직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일을 너무 과중하게 시키면 곤란하다는 정도의 항의는 곧 군대로 치면 항명이 될 듯도  하여 나는 매번  참고 참았다.
그때,  다른 두 군데의 신문사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었던 S기자가 여러 차례,  J국장이 안 보는 데서 나를 격려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신문의 사주(社主)들에게 당했던  경우를 비교한다면 J국장 쪽이  너그럽고 질책도 훨씬 약한 편이죠. 그러니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도록 하세요.
그 순간 나는 마치 공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S기자에게서 동료의식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참을성 시험을 날마다 치르며 견디고 견디던 직장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주(社主)가 바뀌는 이변이 생기자, 나는 즉시 사표를 제출했다.
안보회장이 사주라선지 안보회원들이 들락거리는 사태를 지켜보며 분위기도 어수선했을 뿐아니라 신문사 자체가 길게 명맥을 유지하지는 못할 듯 한 예측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J국장은 본인이 너무 몰아붙여서 내가 그만 둘 걸로 알고 약간은 미안한 마음을 남겨 뒀을 것이다.
나는 J국장을 만나면 인사도 부지런히 잘 건네고 있다.
그 무렵 C신문에 써냈던 칼럼들을 볼 때면,  여지없이 그 당시의 작고 큰 편린(片鱗)들이 나의 생각마다 켜켜로 덮여 있음을 발견한다.
그 시기(時期)를  내 고난과 화해(和解)하고 돌아온 일종의 여행이었다고 자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알고는 지내는 K가 찾아왔다.
어떤 신문사의 편집부에 취직을 했는데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신문사의 집행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오타나 줄 바뀜은 소형사고지만 기사가 뒤죽박죽 섞이거나 중복게재 등은 대형사고로 치는데,  K가 바로 소형과 대형의 사고뭉치 장본인(張本人)으로 몰리는 사태가 너무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나는 예전에 S기자가 내게 했었던 충언(忠言)을 나도 모르는 순간  K에게 건네 주고 있었다.
"견디세요. 나도 한 때 어떤  신문사에 있어 봤지만, 다른 사주(社主)들은 더 심하다고 보면 돼요."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산뜻한  말도 아니었지만 틀린 말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신문을 만드는 일의 소명(召命)은  어쩌면 잉크라는 피가 따로 흐르는 신선들이나 하는 역할인지도 모른다.
나는 잘 안다.
세상의 어떤 진리를 갖다 잔뜩  나열(羅列)해도 K의 긴박감과 움츠림을 풀어 줄 도리는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는 걸.
오히려 더 긴장하게 만들 수도 있는 설정이라는 것을.
그의 피해의식에 불을 붙일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나는 그 무렵 마음고생을 진정 많이 했었던 건  아니지 않았나 싶어진다.
내 또래는 물론이고 내 주위 사람들이 몸도 마음도 전혀 편치가 않아 보이고 실제로 여러 아픔을 앓고 있는 작금(昨今)이다.
달러도 바꿀 수 없게 돼 있지.
수입이 자유롭던 천이나 여러 부속이나 산업 부자재들이 수입규제로 품귀현상을 겪고 있지.
도대체 지금 아르헨티나가 어떻게 돼 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고 웬 북새통 속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달러화 정기예금통장의 돈을 전부  페소화정기예금으로 변환시키겠노라고 표명했다,
305만 6천 632달러를  공식환율로 환전해 기필코  페소로  기재되는  정기예금통장에  저축할 것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스포츠 언론인인 빅토르 모랄레스가 정부 관리들은 왜 페소로 저축하지 않는가라고 일침을 가하자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모랄레스에게 그의 저축도 페소로 바꾸라고 공격하며 자신의 직속 관리들에게도 달러화 저축을 지시하는 부분에 특히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손자에게 선물할 10달러를 환전하지 못해 정부를 상대로 가처분신청을 제시한 노인에게 10달러 밖에 안 주는 구두쇠라고 비난을 보내는 대목도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를 부리는 일도 누구에게 부림을 당하는 일도 그 어느 시절보다 한층 첨예(尖銳)로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느낌이 유난히 매서워진 날씨처럼 피부 깊이 파고든다.

6월 7일 밤.
시내 중심가에서는 중산층들의 냄비시위가 예년보다 더 많은  운집을 보여  매우 소란스러웠다고 메스컴은 전한다.
불안정한 경제 소요(騷擾)가 하루 속히 잠재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2012년 6월 7일 목요일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 중에서




                맹하린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 동안 매우 타이트한 시간 속을 흘러 다녔다.
화요일 정오엔 한국학교의 동화구연대회와 나의 주장 발표의 심사를 맡느라 서너 시간을 우리의 3세들과 함께 호흡했다.
동화구연이 17명이었고 나의 주장이 10명이었다.
바로 이 어린이다!  하는 실력이 안 보이고 대부분 어금지금한 형세였다.
하지만 모두 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한국말이 뛰어났고 예쁜 모습들이었다.
정성껏 준비해 왔을 참가자들은  시작 무렵엔 또박또박 발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버릇이라도 되듯이 흐트러지는가 하면  중반부터는 속도 역시  빨라지는 경향이 전반적인 편이었다.
말의 이음 부분을 놓쳐서 말을 찾느라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과 심사위원들을 앞, 또는 옆에 하고 당황하는  모습과  쩔쩔매는  순간들을 지켜볼 때마다,  해당교사에게서 원고를 얻어 당장 그 어린이의 손에  쥐어주고 싶을 정도로 안타깝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절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내는 모습들마다에서  우리 이민자들의 진정성 있는 실루엣 또한  파악해 낼  수 있었던  소중한  장면이었음을  유념하듯 깨닫게 된다.

서반아어와 영어와 한국어의 3개국어를 터득해야 하는 그들의 유년기와 일상(日常)에 주어진 그다지 가벼울 수만은 없는 과제들.
그에 비하면 너무나 씩씩 당당 활발한 자세들이어서 내가 다 어깨가 시원스레 펴지는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발표를 평가 해 나가는 시간이었다기보다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고 보람된 시간을 보낸 듯 했던 느낌 같은 게 지금껏 잔존해  있다.
오!  벌집에서 꽃밭을 향해 우르르 몰려드는 벌 떼처럼  관중석에서 지칠 줄 모르고 조잘대던 우리의 3세들이여!
6월 9일이 되는 이번 토요일엔 전체 한국교회들이 뽑은 한글학교협의회 소속 학생들과 이번에 한국학교에서 상권에 든 어린이들의 대회가 다시 한국학교에서 치러진다.
해마다 한국학교의 교사를 통해 심사에 대한 부탁이 가장 먼저 내게 왔었지만, 그럴 때마다 언제나 문협회장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며  책임을 일임해 왔다.
토요일 대회는 문협회장단에서 잘 진행하리라 믿는다.

어려서 발표의 기회를 갖는다는 건 장래에 많은 도움이 되는 계기를 안기게 된다고 본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에 송사와 답사를 모두 맡았던 경험에 의해 지금의 내 발표력이 적절하면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었다고 나는 자인한다.
그날 저녁엔 궁전 식당에서 문협 월례회까지  있어 기분 좋고 산뜻하게 하루를  마무리 했었다.

수요일엔 민주평통남미서부협의회를 위시한 재아교민사회에  본국에서 방아한  높으신 분의 강의가 있었다.
D식당에서 있게 될 그 행사의  전반적인 꽃 장식을  맡았던 탓에 그 일에 온통 열정을 바쳤다.
틈틈이 찾아 오는 고객들의 주문에도 성의를 다했다고  자긍하게 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지쳐 있을 경우  오로지 휴식과 잠만을  그리워하는 스타일이다.
빨리 집에 돌아가  따뜻한 온돌바닥을 감사해 하고 만족스럽게 여기며 숙면을 취하고 싶었기 때문에 내가   뜻 했던 대로 그러한 행동반경을  즐겨 실행해 왔을 것이다.
(이쯤에서, 내게 그날 하루를 온전히 바친다는 절친이 순간적으로 떠오른다. 스타벅스의 커피를 즐긴다는 친구 역시도...그들과 오래토록 우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예감한다.)

여타의 그 어떤 문제조차  내겐 아무런  찌꺼기로도 남지 않아 왔다.
하지만 그동안 즐겨왔던 관습들을 과감히  축소할 필요 같은 걸
어제 오늘 심사숙고 헤아리게 된다.
이제 나의 치기 어린 성격도  절제할  생각이다.
할만큼 했고
견딜만큼 견뎠고
질만큼 졌다.

오늘도 저 바깥 세상의 그 모든 활기로 넘쳐나는 아침녘을 향해 새롭고 신선한 기분과  애정을 간직한  채  잘 흐르려고 한다.
아침마다 나 스스로에게 격려하 듯 묻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 중 오늘이 가장 기분 좋고 상쾌한 날 같지 않아?)
오늘도 나는 내부에서 샘솟는 긍정과 여유로움을 갖추고  이 새벽을 맞고 있다.



2012년 6월 4일 월요일

생(生)의 큐비즘




          맹하린


아들과 나는 가끔 선의(善意)의 논쟁을 한다.
내가 IMF라고 말하면 아들은 FMI라고 고쳐 주려고 하고, 내가 NATO라고 표현하면 아들은 OTAN이라고 우겨대기 때문이다.
물론 서반아어에서는 명사(名辭)를 잊으면 안 되는 존재라고 여겨서 앞쪽에 놓는다는 것과 영어에서는 명사(名辭)란 소중한 존재라서 아끼는 의미로 뒤에 말하는 차이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다.
하여간에 나는 아들과 그런 일을 만날 경우 언제나 겉으론 바득바득 우기면서 속으로는 쿡쿡 웃으면서 나의 주장을 강하게 고집하는 편이다.
토론이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하는 건가를 깨우쳐 주기 위해 일부러 그래 온 것.

어떤 때,  인터넷 뉴스를 본다거나 교민게시판 등의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나는 눈앞에 알짱대는 모기를, 마우스에 얹고 있던 오른 손을 잽싸게 움직여 찰나처럼 잡아 챌 때가 있다.
물론 그러는 동시에 소리친다.
"잡았다!"
그러면 아들은 젓가락을 가져다 컴퓨터 근처에 놓으면서 말한다.
"이 빨리또(Palito=젓가락)로 한 번 잡아 보세요, 실력이 날로 날로 늘고 있어요."
박수 치면서 잡는 방법을 사용하는 아들에 비하면 나는 고단수의 모기사냥꾼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우리 가게엔 모기가 좀 있다.
수중재배로 키우는 화초들이  여럿이나 있어서다.
이상하다. 수초도 있지만 수초가 자라는 환경에는 곤충이 얼씬도 못한다.
아들과 나는 매사를 그런 식으로 산뜻하게 대응하며 살아내고 있다.

어제는 일요일이라서 9시 미사에 참례하려고 10분 전에 가게를 나섰다.
보통, 20분 정도 일찍 나서지만 어제는 미적미적 늑장을 부리다가 결국 늦어지고 말았다.
성당의 입구에서 보좌신부님과 반갑게 악수하는 순간, 미사시작을 알리는 입당성가가 나더러 어서 서둘러 들어 오라는 뜻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가 선호하는 앞쪽의 세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광고시간에, 자모회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호떡 판매가 있으리라는 공지를 들었다.
나는 미사가 끝나자마자 광장으로 다가 갔다.
친구들은 모두 레지오 회합이나 단체모임에 참석하는지라 미사가 끝나기가 바쁘게 핑핑 사라지고 있었다.

작은 식탁처럼 크고 잘생긴 데다, 검은  윤기가 자르르 반짝이면서  따사로운 느낌까지 주던 신품의 호떡기계 앞에 나 홀로처럼 외로이  섰다.
아들의 중학 선배이자 K소아과 원장인 교우가 맨 앞이었고 내가 두 번째였다.
둘이서만 내내 줄 서 있는 동안 보좌신부님이 두어 번 다녀가셨다.
도대체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반 농담과 반 진리를 보좌신부님은 잊지 않고 설파하셨다.
하필이면 본당신부님이 두어 달 전에 지적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나는 속으로 풀풀 웃었다.
-성당입구에서 까불까불 인사하던 보좌신부가 얼마 전부터 교우 여러분의 눈에 전혀 안 띄시죠? 지금 페루에 계신 한국 신부님들한테 다니러 갔어요. 일주일 후면 돌아올 거구 만요."
그날 우리 신자들은 폭소의 도가니였다.
아마 보좌신부님만 모르는 웃음 보따리였을 것이다.
나는 신부님들의 그런 소탈한 모습이 참 보기 좋고 존경스럽다.

자모회 임원 넷은,  틈틈이 찾아와 칭얼대는 아이들 거두며 밀가루 반죽 안에 흑설탕과 야채 고명을 따로따로 넣고 만들고 굽고 하는 일에 단체로 쩔쩔 매고 있어서인지 거의 20분도 더 기다려서야 호떡 몇 개를 살 수 있었다.
(편의점 강 여인 에게 주보를 건네면서 호떡 하나 맛보게 해야지.)
그런데 친구 N도 편의점에 앉아 있어,  결국 N의 식당에서 커피를 곁들여  먹기로 즉석 약속을 주고  받았다.
아들 몫은 따로 챙겨다 주었다.

계피와 흑설탕과 호두가 잘 어우러진 호떡은 한참이나 기다린 효과를 대접할  셈이었는지 한국에서 먹던 호떡보다  훨씬 맛이 괜찮았다.
자주 못 가지만 가끔은 다닐 수 있는 성당이 있고, 위트 넘치는 사제들을 접할 수도 있고, 특별히 나를 아껴주고,  내가 사랑을 쏟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날 수 있어 참으로  뿌듯하고 기쁘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는 더욱 반가워하리라.
세상이 딴 세상처럼 느껴질 때는
바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으며
누군가를 관심으로 지켜줄 때라는 인식(認識)이
최근 내 생의 한가운데에  입체감으로 부상(浮上)하는 느낌 가득어니 넘치고 있다 .
분명한 것은 살아가는 일은 넘칠 때도 있는가 하면 모자랄 때 역시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때때로  오늘처럼 잔잔한 얘기를 소재로 삼게도 되어라.




2012년 6월 3일 일요일

경주 최부자집 가훈

-펌



부자(富者)  3대( 3代)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慶州)   최부잣집의 만석(萬石)꾼 전통(傳統)은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무려 300년 동안 12代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1950년에는 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嶺南大) 전신( 前身)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다.

그동안 300년을 넘게 만석꾼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최부잣집 가문이 지켜 온 가훈(家訓)은 오늘날 우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1. 절대 진사(제일 낮은 벼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휘말려 집안의 화를 당할 수 있다.

2. 재산은 1년에 1만석(5천 가마니)이상을 모으지 말라 !!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 했다.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다.

4.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

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6. 사방 100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책" 중에서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입니다.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물(財物)은 분뇨(糞尿)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惡臭)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四方)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2012년 6월 2일 토요일

딸년을 안고


-김사인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 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2012년 6월 1일 금요일

나의 이민 동창들




       맹하린


지난 일요일 오후 5시쯤.
D정에 돌 꽃을 납품하고 산책길을 걸어오는데 133번 버스 정거장에 이민동창이자 어르신들이신 범선생 어머니와 J섭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길을 건너 가 서로 포옹하는 인사를 나누었고,  버스가 올 동안 한참이나 얘기를 주고 받았다.
주말에는 버스가 덜 다니는 탓에 거의 반시간은 족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버스노선은 매우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으며 차종은 모두 벤츠다.

성당에서 아치에스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1백여 명 정도가  한복차림을 했었다면서 손에는 한복보따리를 각자들 들고 있었다.
대화는  이미 정해진 것처럼 D준 심의 타계(他界)에 집중적으로 쏠리게 되었다.
미국으로 재이민 떠날 무렵,  1백만 달러 이상 챙겨 갔다는 D준 심은 이나라의 D원 심에게 맡기고 떠났던 아베쟈네다 지역의 Felipe Vallese 거리에 있던 공장겸 찰렛(별장식 주택) 역시  절대로 만만찮은 높은 가격으로 얼마 전 처분해 갔었나 보았다.
한국으로 재이주한 부모에게 사드렸던 주택까지도  급매해 거두어들인 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발생한 일이라고 했다.
두 주택 모두 D준 심의 명의로 되어 있던 상태였다는 얘기다.
부모를 미국으로 모시자는 문제로 한동안 가정불화를 겪다가 부인이 은행에 다녀 오는 사이를 틈타 스스로 떠났다는 설명이었다.
부모는 D준 심이 심장마비로 인하여 세상을 떠난 걸로만 알고 있다고 한다.
J섭 어머니는  두어 번 다짐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양반들 지금 미국의 딸네 집에 계시다나 봐. 며느리와 손자들한테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 같아."
대여섯의 이민동창 중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회자(膾炙)되었던 D준 심네 가정이었다.

네 자녀 중 셋은 아베쟈네다 지역에서 의류도매상을 운영하고 있고,  근교에서 의류소매상을 여럿이나 이끄는 셋째 M준은 BUENEWS라는 교민신문사의 2인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L씨 가정.
범선생 어머니의 자녀들 역시 빈선생치과와 범선생 치과기공사로 각각 일하고 있고 , 사위는 교민 1호 변호사다.
자녀들 중 큰 아들인 J섭도 BUENEWS의 요직에 있고 큰딸과 막내 역시 아베쟈네다 의류도매상을 경영 중인... J섭의 어머니.

이민 동창들 사이에서 나는 제일 어린사람 취급을 받았었고, 현재 역시 어리다는 인식을 못 버리겠는지  언제 어디서나 만나자마자 나를 아끼고 토닥이느라 여념이 없는 이민동창들.
나는 그 어르신들과 얘기를 나누며 연신 내 긴 머리를 묶는 시늉을 반복했다.
예전에 시우다델라에 살 때의 빈선생 어머니는  우리 자동차로 함께 성당에 다녀 올 때마다 길을 지나는 현지인 아가씨들의 긴 머리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고 강하게 비난하며 툴툴 댔었다.
-아이고, 저 머리 좀 가위로 싹둑 잘라 버린다면 소원이 없겠네.
나는 그날 일부러 두어 번 변명 삼아 묻지도 않는 말을 건넸었다.
" 아직은 염색을 안 해서……. 글 쓸 때는 생각과 연결되는 안테나라서……."
다행인지 가위로 싹둑 자르고 싶은 맘은 이미 오래전에 물 건너갔다는 눈길로 나를 곱게 바라봐 주던 빈선생 어머니, 그리고 J섭의 어머니... 그 어르신들.
아이고, 언제 어디서나 반가워 죽겠는 내 이민동창들.
D원 심에게 다니러 올 확률도 많은지라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D원 심의 부모와도 언젠가 만나리라 예상을 하니 벌써부터 슬퍼진다.
그분들을 슬퍼하자니 내가 온통 슬프게 된다.

우울한 소식을 듣는 일은 참으로 그렇다.
무슨 일이던 신(神)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쓸쓸한 기분을 안기고는 한다.
멀리서 버스가 오고 있었다.
그 어르신들과 헤어지는 인사로 다시 포옹을 나누고  자꾸만 되돌아 보기도 하면서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산책길로 천천히 접어들었다.
의외로 느리게 걷는 걸음이 꽤나 무겁다고 여기며 가게 근처에 닿았다.
어떤 변화로도 나를 제압할 힘이 부족할 것만 같은 기분이 순식간에 휘몰아 쳤다.
나는 나한테로 기어드는 슬픔에 대항하려고 무장을 하듯 경직된  걸음을 한 채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가까운 곳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 왔다.

언제부터인가 슬픔은 내게 오랜 세월 앓던 지병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현대인은 대부분 표준형 상실감을 앓고 지낸다.
모두들 자신에게 주어진 생(生)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보여 지는 생(生)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 
우리의 생(生)이 전혀 다른 접점(接點)에서 영위(營爲)되어서도 안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여 지는 삶을 지속하려고만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주 자신을 가두어 둔 자신만의 문을 열고 또 다시  열면서 그렇게 확인해 보아야 한다.

문제는 문제다.
내 주위에  동준 심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그 부인과도 너무나 흡사한 젊음들이 곳곳을 장악하고 있음을 발견함으로 인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