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하린의 생활 포커스
아르헨티나중앙일보
2008년 11월 5일
한양 공대 화공학과를 졸업 하자, 남편은 미 극동공병단의 실험실에 취직이 되었다.
곧 이어 베트남 전쟁이 터졌고, 미국 용역 회사인 PE&E 회사의 화공기술자로 발탁된 그는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들의 수돗물을 감정하는 엔지니어로 5년 가까이 근무했다.
196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때 남편의 한 달 봉급은 1천 5백 달러였고 보너스 역시 두둑 했다.
논 밭이 많지 않던 시댁은 그러한 남편의 수입에 힘입어 연거푸 논 밭을 사들였다.
나와 결혼하게 되어 베트남에서의 근무를 접고 한국에 나갔던 남편은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자고 새면 돈 빌려 달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 왔던 것.
그렇게 빌려준 자금마다 떼는 일을 반복하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남편은 이민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하대명년(何待明年)이라서 가장 수속이 빠르다는 파라과이를 선택했다.
파라과이에 도착한 보름 후엔 운명처럼 아르헨티나로의 입성(入城)을 단행(斷行)했다.
이민 오기 전, 남편은 큰 동생을 경희 대학 한의학과를 졸업하도록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으며 결혼까지 시켰고 장승백이에 집 한 채 값을 들여 한의원까지 차려 주었다.
개업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다 할 수입이 없었던 그들을 위해 우리 내외는 그 동서가 제왕 절개수술을 해야 하는 출산 때마다 30만원의 수술비를 대신 치렀다.
그 시절의 작은 셋집 전세금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내가 알게 모르게 남편은 그들의 생활비 역시 수시로 도왔으리라 여겨진다.
그 동서 역시 상도동의 우리집 마당에 묻어둔 겨울김치를 맨날 얻으러 왔다.
우리 김치 생각 때문에 밥이 안 넘어간다나 뭐라나...
작은 동생에게는 시골에 사둔 논 밭의 명의(名義)를 모두 이전(移轉)해 주고 떠나왔다.
나는 진정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당연지사 그래야 하는 걸로 여겼으므로.
이런 얘기 꼭 짚고 싶지는 않지만 남편이 떠나자, 두 동서는 내게 1천 달러씩 보내왔다.
아무리 그렇단 들 이민 와서 크게 고생한 일은 없다.
8년 전 남편이 덜컥 중풍이라는 병을 얻었을 때, 나는 그 누구에게도 엄살을 안 피우며 튼튼 씩씩 명쾌하게 잘 살아냈다.
하지만 남편이 화장실 정도는 다니던 8년과 거동(擧動)이 불편하던 40일과 잘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던 나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매사에 나는 그런 식이다. 다른 사람이 당장 잊고 싶어 하는 걸 영원히 잊지는 말아야겠다고 작정을 굳히는 형(形).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떤 이들은 의외로 놀라고 있었다.
평소에 남편 얘기를 전혀 안 해서 이혼녀로 알았었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밝히건대 내 사전(辭典)에 이혼이란 없었다.
남편은 지인들과 동생들 뒷바라지 한 걸 빼고는 가족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는 사람인데 그를 어디다, 어떻게, 어찌 내 칠 수 있었겠는가.
남들은 남편을 바보처럼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참으로 잘 살아낸 사람이라는 인식이 점차적으로 내게 밀려 들고 있음을 수시로 느끼고 깨닫는다.
가족과 이웃과 지인들과 세상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정신(精神)에 크게 위배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선량함이란 악랄함과 다름없이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아무 하고나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무 하고나 친했다.
나는 유년(幼年)이나 생가(生家)등에 대한 추억들이 우리의 성격에 어떤 기여를 해 왔는지를 매우 자주 깨닫기 시작했다.
서양의 속담이 말해주듯 천성(天性)이란 그런 것 같다.
현관으로 쫒아 내면 창문으로 날아들어 오는 법 말이다.
생(生)의 여러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는 장기의 포(包)는 못되고 상(象)처럼 앞으로 세 칸, 두 칸 옆으로, 그렇게 생활이라는 밭을 지그 재그 뛰어 넘으며 이뤄야 할 경우 매우 허다(許多)했던 것 같다.
글 쓰는 작업은 내게 있어 평화로이 닻을 내려야 할 내 특유의 부두(埠頭)다.
내게 하루에도 여러 차례 마셔야 하는 물과 다름 아닌 것.
글 쓰는 일에 몰입하려는 자세에 익숙한 게 때로 너무 이상해서 그 점이 가장 서걱 댔던 적 여러 번 있었을려나.
글쓰기는 나를 이전에도 가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곳으로 데려가 줄 때가 많다.
무언가를 위해 ,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사람은 진솔하게 마음을 쏟고 싶은 ,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나한테는 그게 문학이다.
-초여름- |
어젯밤엔 친구의 생일이어서 K 식당에 가게 되었다. 20여명이 모여서 즐겁게 식사하고 나중엔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고 노래들을 했고 춤까지 추기도 했다. 나는 대부분 밥만 뚝딱 먹고 빠져 나오는 편인데 어젯밤엔 그래도 거의 나중까지 남아서 노래하고 춤까지 추는 그녀들의 모습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무척 웃어 댔다. 내게 어떤 변화가 온 것인가. 왜 그녀들 모두가 사랑스럽고 귀엽게 보였는가. 왜 그녀들의 적나라한 행동들 하나하나가 모조리 아름답게 비쳤는가. 노래방을 전혀 안 좋아 하는 내가 아니었나. 주인공 친구 역시 너무 기분이 좋은지 25일에 떠나는 야유회의 대여 버스를 쏘겠다고 발표하고 있었다. 누군가 지금부터 우기(雨氣) 라고 말했다. 글쎄, 요즈음 날씨 하나는 끝내주게 흐릿하다. |
댓글 2개:
고인의 가족에 대한 깊었던 사랑을 엿보게 해주는 글 입니다.
그리고 시댁으로만 향했던 고인의 관심과 희생을 뭐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들이며, 더 나아가 '참으로 잘 살아낸 사람'이라고 까지 느끼시는 주인장을 보며 고인에 대한 부러움과 존경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
언젠가 어느 신부님께서 제 남편을 강론 시간에 말씀 하셨어요.
남편은 팔이나 가슴에조차 털이 많았거든요.
진화가 덜 돼서 사람이 좋을 수 밖에 없다,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 ㅎㅎ
그런데 나와 남이 있을 경우 남한테 먼저 친절을 베푸는 못된 남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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