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하린
어젯밤 친구 수산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소풍 갔던 날 다녀갔었다고 아들이 말해 줬기 때문이다.
성당의 친구들 얘기라거나 장사 얘기 등을 나누다가 같은 교우시고 교민봉사단체의 단장을 여러 해 맡고 계시는 L회장이 오늘 내일 하신다는 어두운 소식을 들었다.
금시초문(今始初聞)이었다.
간암이신데 링거도 거부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급속히 상태가 나빠지셨다고 한다.
간암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 같았다.
병을 발견하자마자 신속하게 번진다는 것.
교민청소년들의 봉사활동을 현재에 이르도록 활성화 시킨 분 중의 첫째가는 분이시다.
결혼기념일이나 청소년팀원들을 위한 꽃 주문을 할 때나 뵈었을 뿐이지만 참 안타깝다는 마음 가득했다.
이틀 정도 묵상과 기도를 해냈다.
살면서 내가 알던 사람들에게 아픈 소식을 안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하찮은 걱정조차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든지 작고 큰 병과 대항하다가 결국은 병에 의해 떠난다.
루가복음에는 의학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루가는 의사였기 때문이다.
태초에 신(神)은 진흙을 빚어 아담을 만드시고 모든 동물을 암수 섞어서 만드셨지만 사람은 하나만 만드셨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건 남녀를 평등하게 하려고 그러신 모양이다.
"너 어디 있느냐?"
그건 장소가 아니라 존재를 물으신 것.
아담은 한 몸에서 나온 일체를 핑계로 댄다.
하와는 세상에게 핑계를 댄다.
성서를 보면 여자는 사람취급을 못 받았다.
기적의 빵을 나눠줄 때도 여자를 빼고 남자만 5천명이었다.
그 많은 숫자마다 여자를 뺀 숫자인 것이다.
그래서 짐승도 수놈을 바치게 했다.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먹는 열 명의 형제들…….
나는 몇 번이고 그 대목을 되짚어 읽어 낼 때가 있다.
한국 사람은 언제나 먹는 이야기다.
귀한 음식과 좋은 음식일수록 귀하고 좋은 분에게 대접할 줄도 안다.
한 지붕 밑에 사는 사람이 한 밥상에 있는 음식을 같이 먹으면 그게 바로 일치(一致)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두 달 동안 성체만 모시고 산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순례(巡禮)는 자기를 향해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나 혼자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
여러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어야 한다.
하늘의 향기, 치유의 은사, 이 모든 것이 봉사로 이어져야 진정한 은총이 될 것 같다.
각자가 어떤 삶에 중심을 두느냐가 행복을 가름하는 것도 같다.
어느 현인에게 여인이 찾아왔다.
찻잔에 차를 따르는 현인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계속 차를 따르고만 있다.
넘치도록 따른다.
현인은 설명 또한 따른다.
"지금 이 찻잔에 차가 넘치는 것처럼 당신의 마음에 생각이 가득 차 있다면 내가 어떻게 지혜를 설파하겠습니까? 비우십시오. 마음을 따라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질문도 따라 버릴 때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질문에 앞서 답부터 제시하는 서두름을 자주 표출한다.
하루하루를 어린아이처럼도 살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루 표현할 필요도 없는 평화를 익히게 된다.
어떤 삶에 중심을 두고 어떤 지향에 조화를 맞추는가에 따라 행복의 각도가 달라진다.
나는.
나에게는 물론이고 자식한테도 그릇을 깨거나 무엇을 잃어 버렸을 경우
조금도 야단치거나 아까워하지 않아 왔다.
그 작거나 큰일 모두 운명이 다했다고 생각해 왔고, 그렇게 받아들이기를 본보기로 보여줘 왔다.
결단코 가르침은 아니었다.
보고 배우라고 묵묵히 실행했을 따름이다.
나를 위한 자식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내가 될 때 하느님 보기에 좋은 가정이 되고 가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란.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자기 숨 속에 들이 마시는 일.
곧 숨 쉬는 행위다.
소통(疏通)은 들이 마신 소중한 산소를 세상에 내 뿜는 것.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가장 근본적 욕구는, 함께 하는 일.
한 남자가 여인의 집 문을 두들긴다.
"누구세요?"
"나요."
문은 열릴 기척이 안 보인다.
두 번째 문을 두들긴다.
"누구세요?"
"당신입니다."
나는 곧 당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떠날 날을 예비해 두고 있다.
도대체 순서라고는 없는 무질서의 떠남 같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순서가 있어 보이는 떠남이다.
사는 동안 서로 아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이기심(利己心)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이타심(利他心)이 점차 늘어나게 된다.
관심이라거나 배려라거나 사랑은 상대방의 소리를 듣는 일에 있지 않고 보아 내는 것에 있다는 걸 뒤늦게라도 내 이웃들이 터득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사랑은 결코 표현이 아니다.
오로지 다독임이다.
사랑은 용서다.
자식은 우리 생애 최고의 칙사(勅使)다.
나의 대접이 어떠했을지라도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기억하는 칙사다.
영원히 있을 존재가 아니다.
칙사도 아주 귀찮으면서도 매우 귀한 칙사다.
내가, 혹은 우리가 사회를 적시는 소나기 사랑의 한 축(軸)을 이룰지라도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세상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우리가 가르치고 용서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아니다.
우리 자신부터 가르치고 용서해야 한다.
우리여!
사람들이 걸어 잠근 감성을 열고
세상을 사랑하자.
떠남을 앞둔 지인 한 분을 위한 묵상을 하며
예전에 피정(避靜) 가서 깨우친 진리를 많이 보태게 되었다.
화살기도라도 자주 하게 되는 며칠이다.
-문협야유회에서 찍은 사진을 오늘 아침 노현정님이 보내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