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일 목요일

후고 데 아로스(쌀 주스)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중앙일보


1999년 6월 8일


찹쌀과 검정콩, 그리고 팥을 사기 위해 '리니에르스' 지역의 곡물시장에 갔다.
가까운 한국 식품점에서도 살 수 있지만 곡물시장이 값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그곳에 가면 정실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웬만하면 '리니에르스 쪽으로 나서게 된다.
정실엄마는 '리니에르스' 곡물시장 근처에서 소매 옷가게를 운영하는데 제시카라는 현지인 종업원을 두고 일한다.
정실아빠는 도매상이나 옷공장으로 물건을 구입하러 다니기 때문에 가게에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딸들이 가게를 봐 줄 때도  있지만 정실엄마가 주로 지킬 때가 많으므로 만약에 정실엄마가 없으면 어쩌나,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왕 나간 김에 많이 살까 하다가 그 핑계를 대고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지 싶은 잠재의식이 앞서 10Kg만 구입했다.

곡물시장에서 두 블록 더 안쪽의 쇼핑센터 근처에 위치한 그 옷가게를 찾아가니 친정동생을 맞듯 반가워하는 정실엄마.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이 위라서 언니와도 같은 처지인데 서로 허물없이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커피를 마시며 밀린 얘기를 나누는데 그녀의 작은 딸 예실이가 배낭을 메고 들어온다.
제 엄마를 축소판처럼 빼다 닮은 예실이는 나에게 반가움을 나타낼 때에도 꼭 제 엄마와 똑 같은 음성과 행동으로 반가워해서 나의 웃음보가  퐁퐁 비눗방울처럼 떠다니게 만든다.
예실이를 보자마자, 겨우  생각이 났다는 듯 정실엄마는 냉장고 안에서 ‘후고 데 아로스(쌀 주스)를 내오라고 제시카에게 말한다.
(쌀 주스? 미수가루인가, 하지만 겨울에 미수가루를?)
나는 혼자  반문하며 순간적인 의아함을 품게 된다.
제시카가 유리그릇에 담아 내온 건 식혜였다.
“예실이 때문에 우린 이제 식혜 좀 자주 해먹기로 했어.”
“엄마, 나 지금 미술학원에 가야 하니까 나 없을 때 말해. 창피하잖아.”
예실이는 가져가야 할 그림도구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내게 인사를 남긴 후  잽싸게 나간다.
“쟤가 김상혁씨 딸하고 친구잖아. 며칠 전에 그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집에서 식혜를 줬나봐.
우린 바쁘니까 도통 한국음식을 잘 안 해 먹거든. 김치와 밥이야 기본으로 해먹지만 이 나라 음식과 함께 먹을 때가 많고. 그날 집에 돌아온 예실이가 글쎄 이러더라니까.”
“엄마, 나 오늘 세연이네 갔는데, 마침 세연이가 리브레리아(문방구)에 뭐 사러 갔다고 해서 한 십분쯤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세연이 엄마가 나한테 뭘 줬는지 알아? 설탕물에 썩은 밥을 타주면서 맛있다고 먹으라는 거야. 색깔부터 밥이 썩었구나 싶으니까 어쩐지 토 나올 것 같았어. 그런데 엄마 생각나서 할 수없이 다 먹었지. 누가 뭐 주면 고맙다고 하고 잘 받고 다음에 기회 있을 때 갚아야 한다고 엄마가 항상 그랬었지?  엄마의 그 말이 생각나서 억지로 다 먹긴 했지만. 세연네 엄마도 참 이상해. 어떻게 딸의 친구한테 썩은 밥을 주냐구.  거기다 설탕물까지 타서 주니까 더 이상했어.  있잖아, 밥이 완전히 바람이 빠져서 대따 가벼워. 아주 둥둥 떠 다녀. 나도 나중에 설탕물에다 썩힌 밥을 넣어서 세연이 에게 갚을 거야. 에이 드러워 혼났어,  정말!   세연이한텐  아무 말도 못했어. 나한테 부끄러울 것 같아서.”

예실이의 얘기를 듣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던 건 어딘지 모르게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식혜는 한국고유의 전통음료이고 발효를 이용한 가공음식이라고 설명하자 놀라며 신기해해서 모녀는 한동안 눈물이 글썽여질 정도로  웃었댔나  보았다.
식혜를 설탕물에 탄 썩힌 밥이라고 했던 무지함을 더 이상 자식들에게 심겨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바쁘고 힘든 이민생활 중에도 한국음식을 자주 해 먹기로 결정하게 됐다는 정실엄마는 잊었다는 듯 탄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있지,  예실이가 어젯밤에 식혜를 먹다가 뭐랬는줄 알아?"
“엄마! 밥이 썩었는데도 한참 먹다 보면 감칠맛이 있고 시원해. 그리고 다시 먹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  내일 세연이를 부를까 봐.  기회 있을 때 썩힌 밥 갚아야잖아.”

더 이상 말을 이어내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정실엄마, 그리고  나는 모자란 사람들처럼 자꾸만 웃고 또 웃었다.
잊고 있었다는 듯 가끔씩 식혜를 한 번씩 떠먹으면서.
내가 정실엄마를 좋아하는 건 그녀와 만나면 마치 밀린 웃음이 많다는 듯 맘껏 웃어낼 수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이나 웃고 나면 눈앞에 문이 몇 개인가 열린 것 같은 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웃고 웃어도 속 깊이 꿰뚫고 들어오는 웃음.
이 세상은 역시 맞바람이 순풍보다 더 시원하고 상쾌하다.

나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집에 돌아오면 집이 최고라는 생각에 잠기는 나의 관념을 물 주듯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간은 나가면 나가서 좋고 집에 돌아오면 집이라서 좋으니 내가 봐도 무척 곤란한 인간이 아닐까 싶다.
한 마디로 줏대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내가 나를 모르겠다.
나도 내 가족에게 쌀 주스를 만들어 주려고 엿기름가루를 미지근한 물에 담그고 있다.



댓글 2개:

Oldman :

너무 재미있네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설탕물에 썩은 밥 띄운 것 한 번 먹여봐야 겠습니다. ^^

maeng ha lyn :

우리가 살면서 소소한 일상에서 일어 나는 작은 일들이 잔잔하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듯 해요.
ㅎㅎ.
가볍고 둥둥 뜨는 썩힌 밥~
님의 가족도 좋아 하실 듯.
찹쌀로 하면 더 희고 깨끗한데 맵쌀이 더 잘 썩고 맛있어요.
썩힘도 잘 썩힘이 중요한 일이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