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1일 목요일
2012년 5월 30일 수요일
정말 소중한 것은
-펌-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다.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 행복 찾기 중에서 -
2012년 5월 29일 화요일
나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
맹하린
매달 마지막 월요일 7시. H회관.
동문회 모임이 있는 일시와 장소다.
내가 소속된 단체인 문 협이나 부인회나 동문회에 가보면 분위기의 전체적인 흐름이 짧은 순간에 포착된다. 모두들 이민 햇수 25년 이상 되었고, 집이나 가게를 몇 개 소유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통상적으로 살만큼 사는 경지에 너도나도 이르러 있다.
어제 동문회에서는 체육대학을 나온 L선배의 짧으면서도 초점이 강한 시국강연(時局講演)이 있었다.
매우 긍정적이면서도 명쾌함이 가득한 연설이었다.
그분은 평소에도 아르헨티나가 처한 정세(政勢)를 손금 보듯 좌르르 정확하게 파악해 왔던 편이었다.
왜냐하면 정계나 제계나 경찰계통의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도움이 될 만한 현지인들을 여럿이나 포석처럼 심어 두었기 때문이다.
동문 중에서 시민권이나 여권의 해결이 지리멸렬 시일을 끌 경우, L선배에게 부탁하면 하루 이틀이면 해결되는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분이라고 보면 된다.
나야 워낙 직행을 거부하고 가까운 길도 돌아서 가는 성격이라 그런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겠지만...... .
L선배의 관점에 의하면 현 정책은 필히 지나쳐야 할 필요충분조건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었다.
세계 어떤 나라를 가도 아르헨티나처럼 살기 좋은 복지국가(福祉國家)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지론(至論)이기도 했다.
“병원 공짜며 학교 공짜지, 보상금 공짜지, 빨갱이 싫어하지, 자유주의도 배제하지, 잘난 체도 못 봐주지”
브라질까지 예로 든다.
“국민의 80퍼센트가 달러를 모르고 사니까 가는 곳마다 물자가 흥청망청 넘치면서 부동산 구입이나 모든 거래가 달러가 아닌 헤알화라서 자유경제체제가 눈에 훤히 보였습니다. 이 나라도 머잖아 그런 세상이 올 것입니다. 특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거지와 도둑은 아르헨티나보다 더 심각하고 훨씬 첨예하다고 보면 될 겁니다.”
L선배의 이론(理論)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 그리고 내가 살아 보니까 아르헨티나는 한 시절도 과도기(過渡期) 아닌 때가 없었다.
언제나 과도기였다고 본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없는 사람들과 이웃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까지 잘 사는 나라로 변모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도 되었다.
이동 도매시장 ‘라 살라다’에서 하루 8백여만 달러가 인접국 사람들에 의해 대다수 이웃나라로 빠져나가는 심각한 추세에 도달한 작금(昨今)의 아르헨티나.
다시 L선배의 얘기가 이어진다.
“우리 한국 교민들은 여러 면으로 호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호구로 알고, 유태인들도 한국 사람을 호구로 알며, 인접국 사람들한테도 한국 사람은 호구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자체적으로 유도(誘導)하면서 살아 가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 호구입니까? 그만큼 잘 번다는 얘기죠.”
이 부분에서 L선배의 음성이 약간 잦아든다.
“요즘 아베쟈네다의 큰손인 한국인 2세들이 우루과이를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드는 문제가 꽤 심각한 일이긴 하죠. 간도 커요. 전세비행기를 움직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달러를 밀반출하기 위해 드나들던 그들이 요즘은 카지노에 가기 위해 그런 경로를 이용하는 겁니다. 대단한 젊은이들이죠. 하루저녁 1~2만 달러를 기본으로 날립니다. 물론 따러 가는 건 아닙니다. 잃었던 걸 만회하러 간다고 봐야겠죠.”.
이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의 행동반경(行動半徑)이 추적될 확률도 있다는 얘기다.
한때 브로커였고 뒷전의 지휘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L선배는 친(親) 아르헨티나인사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서서히 부상(浮上)하는 존재로 떠오르게 된지 꽤 되었다.
L선배는 어느 날인가 교민사회를 뒤흔들 충격적인 프로젝트가 ‘라 살라다’의 앞쪽에 세워지리라고 장담했다.
나는 장담하는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우리 교민들의 전체 경제기반이라고 여겨지는 의류도매상인들이 지닌 입지가 점차 좁혀지고 있다.
그점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는 일종의 우려가 서서히 각인하듯 밀려오던 순간이었다.
달러라거나 크리스티나 정국에 관한 논평이 한동안 계속적으로 이어졌지만 나는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갔다.
이 나라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미국이나 한국에 재테크 해 놓고 이 나라가 갈수록 왜 이리 살기가 어려워지는 가고 날이면 날마다 투덜대는 교민들의 용감성과 저돌성에 대해서.
또한 나처럼 연금신청을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양보한 사람을 또라이 바보취급까지 하는 사회성에 대하여.
어제 정오 무렵, 고객이 내게 물었다.
“주인이 바뀌었어요?”
“아뇨, 제가 저에요.”
그는 내가 달라졌다고 놀랍다는 표정을 했다.
좋은 쪽으로의 놀람이었다.
나는 속으로도 대답했었다.
(당신들이 내가 지나 온 20년이라는 터널을 알아요?)
아르헨티나에 사는 일은 날마다 흥미진진이고 화려만발이고 선후도착이다.
아르헨티나 정계에 몸담고 있는 Partido Liberal Librtario (자유진보당)의 당원들이 어제 아침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데모를 해서 화제(話題)다.
자유진보당 대표는 "우리가 달러로 저축하는 것을 크리스티나 대통령 자신이 걱정스럽다면 화폐를 그만 찍고 본인들이 소유한 달러를 팔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날마다 이슈화 되고 있는 달러 꼬랄리또(족쇄)현상을 꼬집고 비난하려는 의도라고 본다.
300달러를 판매하겠다는 광고와 함께 1인당 1 달러씩만 팔겠고 정부시세로 베풀겠다고 선심까지 엿보이며 나선 것이다.
광고가 나가자마자 이미 1백 5십 달러가 매도되는 쾌거를 달성했다는 속보 역시 잇따랐다.
나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
2012년 5월 28일 월요일
조회 수, 그리고 검색수
맹하린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전화의 벨소리를 줄이는 일이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할 때에야 배로소 벨을 원상복귀 시킨다.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신형 자동차에 당첨 됐다는 느닷없는 통보는 과연 느닷없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말 그대로 자다가 봉창 뜯을 일인데 아르헨티나의 집들은 봉창으로 된 창문이 아니라서 속담을 참으로 뜬금없어 하다가 다시 잠들던 날들을 몇 번 겪고 난 후에 결정한 일이다.
그리고 잠들기 전과 잠을 깨고 난 후에 주로 글을 써왔기에 더욱 그렇다.
타박타박 세상사는 얘기 쪽을 걸어 다니다가, 아주 가끔씩 시사성 짙은 칼럼위주의 글밭을 가꾸면 검색수와 조회 수가 놀랄 만큼 부쩍 오른다.
공휴일인 어제 피그말리온 효과가 단시간에 150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본국의 블로거님들이 훨씬 많다.
어제의 검색수는 219였고 아침나절 140이다.
피그말리온 효과의 조회 수는 6월 13일 현재 1.061이 되었다.
내 조국.
내가 사는 도시.
나의 삶.
그 모든 것에 자꾸만 의미부여를 쏟으며 쓰고 써낼 생각이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게 관심을 쏟으면 써지는 일이 저절로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내가 글을 멀리하려고 할 때가 훨씬 편했던 것도 같다.
가을을 타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몇 쯤 된다.
가을을 탄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사람도 몇 쯤 있다.
나는 내가 계절들을 아파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계절마다 아끼고 있었음을 새록새록 깨닫는다.
내가 조회 수나 검색수의 상승을 즐기기 위해 글을 써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칼럼위주의 글은 아주 가끔씩 써낼 것이다.
하여간에 글을 써낼 수 있어 나의 신과 세상에게 고맙고 고맙다.
2012년 5월 26일 토요일
30번의 포옹(抱擁)
맹하린
25 de Mayo(5월 25일)라는 명칭 아래 혁명기념의 국경일이 되는 어제.
까뉴엘라 지역의 46 de Ombu라는 별장에서 내가 소속되어 있는 부인회의 가을맞이 단합대회가 있었다.
10명의 소유주로 구성된 교민들의 의기투합이 불 붙게 되어 구입한, 6헥타르의 면적을 차지한 휴양 시설이었다.
몇 년 동안이나 부인회의 일을 함께 담당했었고. 감사 역할 역시 같이 맡게 된 친구 N의 남편도 그 10명의 주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대여(貸與)였고 혜택이었다.
머잖아 교민을 위한 골프연습장과 테니스장, 그리고 야외행사장이나 실내행사장이 신설되며 컨트리 클럽 타입의 설비가 속속 들어 찰 전망과 단계에 있다고 한다.
어떤 단체를 막론하고 도착하는 대로 아사도(갈비구이)와 김치나 야채샐러드 등이 주된 메뉴인 점심을 마치고 나면 곧장 게임이나 노래자랑이나 춤추기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뿐따 라라 강으로 장소를 정했었어도 그들은 강에게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고 오로지 게임이었다.
어제는 회원 중의 한 사람이 노래방 기계와 전자 오르간을 준비해서 하루 종일 노래하고 춤추느라 몹시도 흥겨운 분위기로 들끓었다.
그녀들의 노래와 춤이 흥겨워 보이기는 했지만 내게까지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나는 바깥의 원탁에 앉아 몇몇 회원들과 담소(談笑)하거나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 연못주위를 혼자서 산책하거나 4백년이나 됐다는 Ombu나무를 앞에 하고 한참이나 우러러 보기도 했다.
가히 400살이 짐작되어지는, 대단히 어르신답던 자태의 우람하고 웅장한 나무였다.
별장의 입구까지 되짚어 걷다가 토끼를 키우는 방목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 차고 습기 찬 바람이 별장의 이곳저곳을 휩쓸 듯 지나갔다.
식당 쪽에서 들려오는 생철(生鐵)이 찢어지는 듯 한 노래 소리가 때때로 나를 쫒아 다녔다.
그렇게 맘껏 소리를 지르면 한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해소되나 보았다.
특별히 예닐곱 사람쯤 앉을 수 있는 널빤지 그네를 단감을 베어 먹으며 탈 때의 기분이란 누가 뭐래도 과연 유치원생 맛이었다.
국경일마다 가게를 닫고 나돌아 다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었던 시간이었다.
남편과 나를 반반씩 닮아 남편처럼 수학이나 화학에 소질이 있는가 하면, 인문계통에도 도를 튼 아들은 성격 면으로는 남편과 나를 골고루 답습하지 않았나 싶다.
국경일마다 가게 문을 닫자고 제안해도 고객 한 사람에게라도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고집스레 열고 있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공휴일이나 국경일이면 묘지에 다녀오는 분들과 선물용 꽃을 구입하기 위해 찾아오는 분들이 몇몇은 있기 마련이라 서다.
그런데 혼자서 충분히 해낼 수 있으니까 나는 예외로 치겠다는 얘기다.
참가상품으로 한국산 미역과 당면, 그리고 N이 보물찾기에서 탄 순창고추장을 살짝 건네 줘 그것들을 들고 가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쯤이었다.
때로는 한국산 유리그릇이나 반찬그릇일 때도 많지만 나는 그릇이고 뭐고 가진 것도 줄이는 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의 상품들이 항상 늘 푸르게 실용적인 것들이어서 그 점이 참 귀엽게 여겨지고 웃음 퐁퐁 솟는 기쁨이 된다.
우리는 그리도 알뜰살뜰 살아온 이민자들인 것이다.
여러모로 나를 쭈그려 뜨려야 하고 적성에도 안 맞아 그동안 남모르게 잦은 갈등을 겪었던 단체 활동이지만 어느 날부터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더불어 사는 것을 추구할 뿐 아니라 무구(無垢)와 평범 속에서 평화를 얻으리라는 내 나름의 각오와 의향이 비온 뒤의 죽순처럼 삐죽삐죽 싹을 틔운 것.
만나서 기쁘다고.
삐딱하게 머리에 얹은 내 모자나 보라색 톤으로 매치해낸 옷차림을 칭찬해줘서 고맙다고.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어 너무나 즐거웠다고.
어제 내가 30여 회원들 중 특히나 가까운 10여명의 여인들과 서로 포옹하며 주고받은
Beso de Paz(사랑의 입맞춤=뺨맞춤)는 무려 서른 번은 되었을 것이다.
신앙과 가족과 재물이 있으면 어디라도 천국이라고 단정 짓는 그녀들 사이에서 나 어제 30번이나 행복했어라.

항상 나를 배려해 주는 친구 두 사람이 나를 다시 배려한다는 게 아주 베개로 여기네욤~~~

막내야, 포도주를 겁도 없이 들이켰다지?

주먹만한 단감의 남은 조각을 희극적으로 먹으며 타던 널판지 그네입니당!!!

미 아모르! 한 잔 했넹?ㅎㅎ

막내 때문에 모두들 ㅋㅋㅋ
2012년 5월 24일 목요일
피그말리온(Pygmalion) 효과
맹하린
1983부터 시작하여 1989년에 임기를 마친 알폰신 대통령 시절이었을 것이다.
오스발도 그라나도스(Osvaldo Granados)라는 TV방송국 기자가 있었다.
그 당시의 아르헨티나 사회를 압박하며 휘젖던 인플레시온은 4.000프로까지 치솟았다.
그야말로 자고 새면이 아니라 아침에 오르고 저녁에도 올랐었다.
백만페소 단위의 지폐가 한동안 나돌던 시절이었고, 우리 교민들은 해가 떠도 오르고 해가 지고 나서도 오르는 물가를 따라 잡기 위해 날마다 생필품이라도 사들여 화폐의 잔여가치를 붙들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오스발도 그라나도스는 특별히 경제학을 전공한 일도 없었고, 일개 기자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가 매스컴을 통하여 한 마디만 하면 환율이 훌쩍 뛰는 일이 반복됐다.
많은 아르헨티노들은 그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추종자 역시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주식시장을 차치하고 나선 환율시장의 개미들이었다.
온국민이 달러 사재기와 달러 끌어 안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지적에 힘입어 재산상의 이익을 꾀했던 사람들의 성공도 점차 늘어났다.
속설(俗說)에 의하면 그는 환율을 쥐락펴락하는 정계인사와 은밀히 내통하는 사이였다는 설, 그리고 그 설이 지금까지 잔존해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브가 된 피그말리온 효과가 발생했던 것.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사이프러스(Cyprus)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예술에 깊이 심취해서 본인의 조각상들 세계에서만 최상의 행복에 잠길 수가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 무렵의 그곳 처녀들은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를 겁 없이 시샘하고 헐뜯다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서 벌을 받게 되었고 수치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바위로 화했다.
그런 연유로 피그말리온은 여자를 한층 싫어했고 단지 아프로디테만을 열렬히 숭배했다.
그러던 그는 상아(象牙)로 만든 여자상을 하나 만들기 시작했는데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작품으로 완성시키게 되었다.
스스로 만든 조각상에 크게 도취된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여신에게 살아있는 여자의 혼을 넣어달라고 소원을 간청하게 되었다.
피그말리온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한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 조각상에게 영혼을 불어 넣어 주게 되었다.
갈데이아(Galatea)라는 이름을 받은 그 여자와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의 축복 속에서 결혼하게 된다.
많은 학자들이 피그말리온 효과를 예로 들면서 인간은 기대하는 대로 혹은 믿는 대로 이룩된다는 현상을 속속 증명하고 있다.
작금(昨今) 의 아르헨티나 사회는 환율매입절제령과 고환율정책시행으로 심한 독감을 앓는 과정을 겪고 있다.
사회적 취약계층을 포용하고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공정한 게임을 앞세우면서 선정(善政)
을 펼쳐 나가겠다는 모토를 세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상상 외로 병의 진전이 빠르고 깊어 보이는 데다 합병증까지 앓는 형국에 이르렀다.
인플레이션.
유럽사회에서 양에게 억지로 물을 먹여 잡는 형식에서 어원이 된 참으로 역설적인 이 언어가 이렇게나 거대한 부풀림을 가져올 줄이야.
하기야 1923년의 독일물가는 1913년 대비 13740배나 뛴 일도 있었다니 현재의 실태 가지고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닌지 모른다.
그 인플레이션은 중산 계층의 몰락과 노동자의 궁핍을 휘몰고 왔지만 렌텐마르크의 등장으로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남아 있다.
원래는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그 외의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시킨다는 제도가 1944년 국제통화제도협정에 따라 구축되었지만 현대에 이르러 본래의 의도나 계획 같은 건 물거품이 된 지 오랜 역사로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세계적으로 달러를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동양의 3대 국가, 즉 한국, 중국, 일본이 되겠지만 , 그 외 여러 나라들까지 달러 확보에 연일 치중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많이 파는 만큼 많이 찍어내서 문제가 생기는 달러.
아르헨티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육지책(苦肉之策)의 한 방편으로 페소를 많이 찍어내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엊그제 뉴스에 따르면 백 페소의 고액권이 시중에 많이 유통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잔돈이 부족한 현상을 겪고 있다고 한다.
결국 요즘의 달러화 고액환율현상은 외채상환이 코앞이라는 긴박감과 함께, 미국보다 더 많은 화폐를 아르헨티나가 남발하고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스페인 외교부는 렙솔의 자소유였던 석유회사 YPF의 강제수용 관계에 의거하여 돌출되었던 마찰을 반추하며, 아르헨티나를 위한 개발지원금 지급을 중단한다고 단호하게 표방하고 나섰다.
메르코수르 상호협력관계와 무역협상을 일부 깨버린 아르헨티나당국을 향해 브라질 역시 보복작전을 과감하게 경고한 상태다.
냉동감자에 이어 사과 수입 또한 금지한다는 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르른 것.
몇 년에 걸쳐 우려하던 일이 하루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수입품제한, 서민층 보상금 지급으로 인한 재정지출 팽창, 생산활동위축 등 굵직하면서도 중요한 사안들이 서로 좌충우돌을 일삼고 있는 매우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극처방전의 수습책을 내놓던 대통령 크리스티나가 앞으로 어떻게 빠르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게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일종의 우려와 함께 지대한 관심까지 쏟게 되는 바이다.
우리 교민들 또한 여러모로 적잖은 혼란을 겪겠고, 크고 작은 자금의 병목현상까지도 자연스레 불거지리라 예상된다.
한인교민들의 현명한 대처를 기원하게 된다.
2012년 5월 22일 화요일
저녁빛에 마음 베인다
이기철
저 하루살이 떼들의 반란으로 하루는 저문다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강물이 잃어버린 만큼의 추억의 책장 속으로
내가 그 저녁을 데리고 지날 때마다
낮은 음색의 고동을 불며 청춘의 몇 악장이 넘겨졌다
누가 맨 처음 고독의 이름을 불렀을까
적막 한 겹으로도 달빛은 화사하고
건강한 소와 말들을 놓쳐버린 언덕으로
불만의 구름 떼들이 몰려갔다
위기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없다
깨어진 약속의 길들이 향수병을 터뜨리고
넘어진 빈 술병에는 싸구려 달빛이 담겼다
저 집들에는 몇 개의 일락과 몇 개의 고뇌와
몇 겹의 희망과 몇 겹의 비탄이 섞여 있다
거실에서는 덧없는 연속극들이 주부들의 시간을 빼앗고
이제 어디에도 고민하며 살았던 시인의 생애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시간은 언제나 뭉텅뭉텅 가슴속의 추억을 베어낸다
그것마저 이제는 아무도 슬픔이라 말하지 않는다
어린 새가 공포로 잠드는 도시의 나뭇가지 위로
놀은 어제의 옷을 입고 몰려오고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어둠 속에서도 끝없이 고개 드는 사금파리들
그 빛 한 움큼만이로도 언덕의 길들은 빛나고
그런 헐값의 밤 속에서 호주머니 속 수첩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결코 길들일 수 없었던 통증의 저녁도 순한 아이처럼 길든다
아픈 시대처럼, 말을 담고도 침묵하는 책장처럼
2012년 5월 21일 월요일
나의 부두(埠頭)
맹하린의 생활 포커스
아르헨티나중앙일보
2008년 11월 5일
한양 공대 화공학과를 졸업 하자, 남편은 미 극동공병단의 실험실에 취직이 되었다.
곧 이어 베트남 전쟁이 터졌고, 미국 용역 회사인 PE&E 회사의 화공기술자로 발탁된 그는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들의 수돗물을 감정하는 엔지니어로 5년 가까이 근무했다.
196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때 남편의 한 달 봉급은 1천 5백 달러였고 보너스 역시 두둑 했다.
논 밭이 많지 않던 시댁은 그러한 남편의 수입에 힘입어 연거푸 논 밭을 사들였다.
나와 결혼하게 되어 베트남에서의 근무를 접고 한국에 나갔던 남편은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자고 새면 돈 빌려 달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 왔던 것.
그렇게 빌려준 자금마다 떼는 일을 반복하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남편은 이민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하대명년(何待明年)이라서 가장 수속이 빠르다는 파라과이를 선택했다.
파라과이에 도착한 보름 후엔 운명처럼 아르헨티나로의 입성(入城)을 단행(斷行)했다.
이민 오기 전, 남편은 큰 동생을 경희 대학 한의학과를 졸업하도록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으며 결혼까지 시켰고 장승백이에 집 한 채 값을 들여 한의원까지 차려 주었다.
개업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다 할 수입이 없었던 그들을 위해 우리 내외는 그 동서가 제왕 절개수술을 해야 하는 출산 때마다 30만원의 수술비를 대신 치렀다.
그 시절의 작은 셋집 전세금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내가 알게 모르게 남편은 그들의 생활비 역시 수시로 도왔으리라 여겨진다.
그 동서 역시 상도동의 우리집 마당에 묻어둔 겨울김치를 맨날 얻으러 왔다.
우리 김치 생각 때문에 밥이 안 넘어간다나 뭐라나...
작은 동생에게는 시골에 사둔 논 밭의 명의(名義)를 모두 이전(移轉)해 주고 떠나왔다.
나는 진정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당연지사 그래야 하는 걸로 여겼으므로.
이런 얘기 꼭 짚고 싶지는 않지만 남편이 떠나자, 두 동서는 내게 1천 달러씩 보내왔다.
아무리 그렇단 들 이민 와서 크게 고생한 일은 없다.
8년 전 남편이 덜컥 중풍이라는 병을 얻었을 때, 나는 그 누구에게도 엄살을 안 피우며 튼튼 씩씩 명쾌하게 잘 살아냈다.
하지만 남편이 화장실 정도는 다니던 8년과 거동(擧動)이 불편하던 40일과 잘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던 나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매사에 나는 그런 식이다. 다른 사람이 당장 잊고 싶어 하는 걸 영원히 잊지는 말아야겠다고 작정을 굳히는 형(形).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떤 이들은 의외로 놀라고 있었다.
평소에 남편 얘기를 전혀 안 해서 이혼녀로 알았었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밝히건대 내 사전(辭典)에 이혼이란 없었다.
남편은 지인들과 동생들 뒷바라지 한 걸 빼고는 가족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는 사람인데 그를 어디다, 어떻게, 어찌 내 칠 수 있었겠는가.
남들은 남편을 바보처럼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참으로 잘 살아낸 사람이라는 인식이 점차적으로 내게 밀려 들고 있음을 수시로 느끼고 깨닫는다.
가족과 이웃과 지인들과 세상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정신(精神)에 크게 위배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선량함이란 악랄함과 다름없이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아무 하고나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무 하고나 친했다.
나는 유년(幼年)이나 생가(生家)등에 대한 추억들이 우리의 성격에 어떤 기여를 해 왔는지를 매우 자주 깨닫기 시작했다.
서양의 속담이 말해주듯 천성(天性)이란 그런 것 같다.
현관으로 쫒아 내면 창문으로 날아들어 오는 법 말이다.
생(生)의 여러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는 장기의 포(包)는 못되고 상(象)처럼 앞으로 세 칸, 두 칸 옆으로, 그렇게 생활이라는 밭을 지그 재그 뛰어 넘으며 이뤄야 할 경우 매우 허다(許多)했던 것 같다.
글 쓰는 작업은 내게 있어 평화로이 닻을 내려야 할 내 특유의 부두(埠頭)다.
내게 하루에도 여러 차례 마셔야 하는 물과 다름 아닌 것.
글 쓰는 일에 몰입하려는 자세에 익숙한 게 때로 너무 이상해서 그 점이 가장 서걱 댔던 적 여러 번 있었을려나.
글쓰기는 나를 이전에도 가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곳으로 데려가 줄 때가 많다.
무언가를 위해 ,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사람은 진솔하게 마음을 쏟고 싶은 ,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나한테는 그게 문학이다.
-초여름- |
어젯밤엔 친구의 생일이어서 K 식당에 가게 되었다. 20여명이 모여서 즐겁게 식사하고 나중엔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고 노래들을 했고 춤까지 추기도 했다. 나는 대부분 밥만 뚝딱 먹고 빠져 나오는 편인데 어젯밤엔 그래도 거의 나중까지 남아서 노래하고 춤까지 추는 그녀들의 모습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무척 웃어 댔다. 내게 어떤 변화가 온 것인가. 왜 그녀들 모두가 사랑스럽고 귀엽게 보였는가. 왜 그녀들의 적나라한 행동들 하나하나가 모조리 아름답게 비쳤는가. 노래방을 전혀 안 좋아 하는 내가 아니었나. 주인공 친구 역시 너무 기분이 좋은지 25일에 떠나는 야유회의 대여 버스를 쏘겠다고 발표하고 있었다. 누군가 지금부터 우기(雨氣) 라고 말했다. 글쎄, 요즈음 날씨 하나는 끝내주게 흐릿하다. |
2012년 5월 19일 토요일
화나도 웃으면 명약(名藥)
‘하하 호호’도 적자생존(適者生存)
화나도 웃으면 명약
-펌-
인간은 왜 웃는가.
웃음에도 이유가 필요하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다면 웃음이 유독 인간과 유인원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행동양식임에 주목해야 한다,
웃음이 고등생물에게만 나타난다는 사실은 웃음이 결코 우연(偶然)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생존에 있어 긴요한 조건이 됨을 암시한다.
진화론적으론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인류가 처음 지구상에 등장했을 때 웃는 유전자와 웃지 않는 유전자가 공존했으리라는 것.
그러나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과정에서 웃지 않는 유전자는 도태하고 웃는 유전자만 번성해 오늘날 인간이면 누구나 웃음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웃음이 적자(適者)의 조건이 되었을까.
중요한 점은 웃음이 생물학적 필요보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아기들이 짓는 미소다.
언뜻 보기엔 평온해 보이는 웃음이지만 혼자 힘으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아기의 입장에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절박한 호소에 다름 아니다.
태어나기도 전인 임신 12주째부터 안면근육을 수축해 눈웃음 짓는 ‘연습’을 시작할 정도다.
이름하여 ‘사회적 웃음’(Social Smile).
웃음은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에게 유익하다
웃음이 탁월한 긴장완화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웃는 동안 호흡은 깊어지고 근육과 혈관 벽이 이완되며 위장운동이 촉진됨은 물론 소화액 분비도 왕성하게 일어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많이 나와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코티졸 호르몬의 분비도 억제해 인체를 평온하게 유지시킨다.
위장병. 요통. 불면증은 현대인이 앓고 있는 많은 질환도 따지고 보면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병이 대부분임을 감안할 때 많이 웃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섭생을 위한 지름길인 셈이다.
문제가 있다면 웃고 싶은데 별로 웃을 일이 없다는 하소연.
그러나 인체는 그냥 웃는 것만으로도 실제 유쾌한 상황이 일어날 때와 똑같은 반응을 나타낸다. 웃음이 주는 건강효과는 모두 외부상황을 인식하는 대뇌피질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자율신경의 지휘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화가 나더라도 일단 너털웃음부터 지어보이면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2012년 5월 18일 금요일
비
-김수영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카페(cafe)
-펌-
"악마처럼 검고
지옥같이 뜨겁고
천사같이 순수하고
첫 키스처럼 감미롭다."
이 말은 프랑스 작가가 커피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적인 음료가 된 커피.
표현이 좀 고풍스럽기는 하지만, 상당히 맞는 말인 것 같다.
이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인 음료가 오늘날에는 왜 이렇게 사람을 사로잡을까.
최초로 발견된 것은 약 600-700년경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에티오피아 고원에 있는 아생종 커피를 오늘날 커피의 기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열매를 원주민들이 먹는 것을 보고 이곳을 정복한 아랍인들이 여기저기 퍼뜨렸다고 한다. 문헌상에는 900년경 아라비아의 내과의사가 기록한 의학서적에서 최초로 볼 수 있고. 음료로 사용된 것은 1,100년경이다.
퍼뜨린 것은 아랍 사람들이었지만, 이를 열렬하게 마신 것은 터키인들이었다.
커피라는 말도 터키어 '카페’에서 유래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벌써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믿어지는가? 1896년, 지금도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그 유명한 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커피를 처음 마신 것이 한국 커피 음용의 효시다.
이후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종로,충무로.소공동.명동 등에 커피 전문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지만 그 당시에는 주로 예술인,지식인,관료 등 소수 사람만이 다방을 이용했다. 일반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시인 이상이 다방 ‘제비’를 열었던 1920년경부터라고 알려져 있다.한국전쟁 직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퍼지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 커피 수입으로 인한 외화유출이 연간 7백80만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수입이 점점 늘게 되자 국내 회사의 설립을 인가해 주었는데, 이때 설립된 회사가 지금 미원의 전신인 미주산업(MJC)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흔히 쓰는 원두커피라는 말은 실제로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외국에서 사용 하던 레귤러커피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했으나,1976년 미주산업이 레귤러커피를 ‘원두커피’라는 상표를 붙여 팔면서 일반에도 원두커피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레귤러란, 말 그대로 표준, 또는 진짜 커피라는 뜻일 것이고, 원두커피라는 말은 인스턴트가 아니라는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원두커피를 구입할 때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의하도록 한다.
첫째, 제조일자나 유통기한을 확인한다. 원두커피는 신선함이 생명이다. 갓 볶아낸 커피라야 풍부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가능한 한 유통기한이 많이 남은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둘째, 자신의 맛에 대한 취향을 알고 그에 맞는 커피를 구입해야 한다. 원두커피는 원료 및 블렌딩.볶는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맛이 나므로 판매원과 의논한 뒤 자신의 기호에 따라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셋째, 보관을 잘해야 좋은 맛을 즐길 수 있다.개봉한 커피는 밀봉하여 냉장고에 넣어서 조금씩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한 달 이상이 지나면 맛이 떨어지므로 되도록 금방 먹는 것이 좋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같이 뜨겁고
천사같이 순수하고
첫 키스처럼 감미롭다."
이 말은 프랑스 작가가 커피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적인 음료가 된 커피.
표현이 좀 고풍스럽기는 하지만, 상당히 맞는 말인 것 같다.
이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인 음료가 오늘날에는 왜 이렇게 사람을 사로잡을까.
최초로 발견된 것은 약 600-700년경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에티오피아 고원에 있는 아생종 커피를 오늘날 커피의 기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열매를 원주민들이 먹는 것을 보고 이곳을 정복한 아랍인들이 여기저기 퍼뜨렸다고 한다. 문헌상에는 900년경 아라비아의 내과의사가 기록한 의학서적에서 최초로 볼 수 있고. 음료로 사용된 것은 1,100년경이다.
퍼뜨린 것은 아랍 사람들이었지만, 이를 열렬하게 마신 것은 터키인들이었다.
커피라는 말도 터키어 '카페’에서 유래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벌써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믿어지는가? 1896년, 지금도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그 유명한 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커피를 처음 마신 것이 한국 커피 음용의 효시다.
이후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종로,충무로.소공동.명동 등에 커피 전문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지만 그 당시에는 주로 예술인,지식인,관료 등 소수 사람만이 다방을 이용했다. 일반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시인 이상이 다방 ‘제비’를 열었던 1920년경부터라고 알려져 있다.한국전쟁 직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퍼지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 커피 수입으로 인한 외화유출이 연간 7백80만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수입이 점점 늘게 되자 국내 회사의 설립을 인가해 주었는데, 이때 설립된 회사가 지금 미원의 전신인 미주산업(MJC)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흔히 쓰는 원두커피라는 말은 실제로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외국에서 사용 하던 레귤러커피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했으나,1976년 미주산업이 레귤러커피를 ‘원두커피’라는 상표를 붙여 팔면서 일반에도 원두커피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레귤러란, 말 그대로 표준, 또는 진짜 커피라는 뜻일 것이고, 원두커피라는 말은 인스턴트가 아니라는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원두커피를 구입할 때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의하도록 한다.
첫째, 제조일자나 유통기한을 확인한다. 원두커피는 신선함이 생명이다. 갓 볶아낸 커피라야 풍부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가능한 한 유통기한이 많이 남은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둘째, 자신의 맛에 대한 취향을 알고 그에 맞는 커피를 구입해야 한다. 원두커피는 원료 및 블렌딩.볶는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맛이 나므로 판매원과 의논한 뒤 자신의 기호에 따라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셋째, 보관을 잘해야 좋은 맛을 즐길 수 있다.개봉한 커피는 밀봉하여 냉장고에 넣어서 조금씩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한 달 이상이 지나면 맛이 떨어지므로 되도록 금방 먹는 것이 좋다.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당신입니다
맹하린
어젯밤 친구 수산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소풍 갔던 날 다녀갔었다고 아들이 말해 줬기 때문이다.
성당의 친구들 얘기라거나 장사 얘기 등을 나누다가 같은 교우시고 교민봉사단체의 단장을 여러 해 맡고 계시는 L회장이 오늘 내일 하신다는 어두운 소식을 들었다.
금시초문(今始初聞)이었다.
간암이신데 링거도 거부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급속히 상태가 나빠지셨다고 한다.
간암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 같았다.
병을 발견하자마자 신속하게 번진다는 것.
교민청소년들의 봉사활동을 현재에 이르도록 활성화 시킨 분 중의 첫째가는 분이시다.
결혼기념일이나 청소년팀원들을 위한 꽃 주문을 할 때나 뵈었을 뿐이지만 참 안타깝다는 마음 가득했다.
이틀 정도 묵상과 기도를 해냈다.
살면서 내가 알던 사람들에게 아픈 소식을 안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하찮은 걱정조차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든지 작고 큰 병과 대항하다가 결국은 병에 의해 떠난다.
루가복음에는 의학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루가는 의사였기 때문이다.
태초에 신(神)은 진흙을 빚어 아담을 만드시고 모든 동물을 암수 섞어서 만드셨지만 사람은 하나만 만드셨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건 남녀를 평등하게 하려고 그러신 모양이다.
"너 어디 있느냐?"
그건 장소가 아니라 존재를 물으신 것.
아담은 한 몸에서 나온 일체를 핑계로 댄다.
하와는 세상에게 핑계를 댄다.
성서를 보면 여자는 사람취급을 못 받았다.
기적의 빵을 나눠줄 때도 여자를 빼고 남자만 5천명이었다.
그 많은 숫자마다 여자를 뺀 숫자인 것이다.
그래서 짐승도 수놈을 바치게 했다.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먹는 열 명의 형제들…….
나는 몇 번이고 그 대목을 되짚어 읽어 낼 때가 있다.
한국 사람은 언제나 먹는 이야기다.
귀한 음식과 좋은 음식일수록 귀하고 좋은 분에게 대접할 줄도 안다.
한 지붕 밑에 사는 사람이 한 밥상에 있는 음식을 같이 먹으면 그게 바로 일치(一致)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두 달 동안 성체만 모시고 산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순례(巡禮)는 자기를 향해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나 혼자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
여러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어야 한다.
하늘의 향기, 치유의 은사, 이 모든 것이 봉사로 이어져야 진정한 은총이 될 것 같다.
각자가 어떤 삶에 중심을 두느냐가 행복을 가름하는 것도 같다.
어느 현인에게 여인이 찾아왔다.
찻잔에 차를 따르는 현인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계속 차를 따르고만 있다.
넘치도록 따른다.
현인은 설명 또한 따른다.
"지금 이 찻잔에 차가 넘치는 것처럼 당신의 마음에 생각이 가득 차 있다면 내가 어떻게 지혜를 설파하겠습니까? 비우십시오. 마음을 따라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질문도 따라 버릴 때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질문에 앞서 답부터 제시하는 서두름을 자주 표출한다.
하루하루를 어린아이처럼도 살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루 표현할 필요도 없는 평화를 익히게 된다.
어떤 삶에 중심을 두고 어떤 지향에 조화를 맞추는가에 따라 행복의 각도가 달라진다.
나는.
나에게는 물론이고 자식한테도 그릇을 깨거나 무엇을 잃어 버렸을 경우
조금도 야단치거나 아까워하지 않아 왔다.
그 작거나 큰일 모두 운명이 다했다고 생각해 왔고, 그렇게 받아들이기를 본보기로 보여줘 왔다.
결단코 가르침은 아니었다.
보고 배우라고 묵묵히 실행했을 따름이다.
나를 위한 자식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내가 될 때 하느님 보기에 좋은 가정이 되고 가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란.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자기 숨 속에 들이 마시는 일.
곧 숨 쉬는 행위다.
소통(疏通)은 들이 마신 소중한 산소를 세상에 내 뿜는 것.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가장 근본적 욕구는, 함께 하는 일.
한 남자가 여인의 집 문을 두들긴다.
"누구세요?"
"나요."
문은 열릴 기척이 안 보인다.
두 번째 문을 두들긴다.
"누구세요?"
"당신입니다."
나는 곧 당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떠날 날을 예비해 두고 있다.
도대체 순서라고는 없는 무질서의 떠남 같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순서가 있어 보이는 떠남이다.
사는 동안 서로 아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이기심(利己心)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이타심(利他心)이 점차 늘어나게 된다.
관심이라거나 배려라거나 사랑은 상대방의 소리를 듣는 일에 있지 않고 보아 내는 것에 있다는 걸 뒤늦게라도 내 이웃들이 터득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사랑은 결코 표현이 아니다.
오로지 다독임이다.
사랑은 용서다.
자식은 우리 생애 최고의 칙사(勅使)다.
나의 대접이 어떠했을지라도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기억하는 칙사다.
영원히 있을 존재가 아니다.
칙사도 아주 귀찮으면서도 매우 귀한 칙사다.
내가, 혹은 우리가 사회를 적시는 소나기 사랑의 한 축(軸)을 이룰지라도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세상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우리가 가르치고 용서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아니다.
우리 자신부터 가르치고 용서해야 한다.
우리여!
사람들이 걸어 잠근 감성을 열고
세상을 사랑하자.
떠남을 앞둔 지인 한 분을 위한 묵상을 하며
예전에 피정(避靜) 가서 깨우친 진리를 많이 보태게 되었다.
화살기도라도 자주 하게 되는 며칠이다.
-문협야유회에서 찍은 사진을 오늘 아침 노현정님이 보내옴-



2012년 5월 15일 화요일
힐링 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E43 양현석 1부.2부
........................................................................................
나뭇잎을 닦다
-정호승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앉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E43..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E43...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E44...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E44...
2012년 5월 14일 월요일
패배 길들이기
맹하린
야유회 장소를 의논하던 지난 달의 문협월례회에서 나는 기다렸다는 듯 제안했었다.
"몇 년 전에 다녀 온 낄메스 지역의 강가에 인접해 있는 Jockey클럽으로 갔으면 해요. 가깝고, 오후 서너 시엔 강물이 썰물 되는 광경도 장관이거든요."
어제 문협회원들과 그곳에 다녀왔다.
그 클럽의 공원 안은 5년 전 보다 더 깨끗해져 있었고, 특히 날씨가 기막히게 화창했다.
지난 번 회장이던 P선생이 툴툴대면서 구워낸 아사도(갈비구이)와 Chorizo(돼지생소시지)와 Morcilla(순대)는 완전 예술이었다.
강이 매우 가까워서 공기가 습하고 숯불이 자연스레 타지 않는다는 불평이 한 몫 해낸 숯불구이였다.
내가 예쁘다며 아끼는 여류들이 마련해 온 김치와 사라다와 피클 역시 특별히 웰빙스러웠고 가장 새콤달콤했다.
나는 그런 장소에서 뒷전에 있어도 될 만큼 맛있게 먹어주면 되는 역할이다.
부탄가스로 커피를 끓이던 S여인이 내게 춥디 추운 표정을 한 채 가스통을 보여주었다.
강가인 데다, 기온이 다습해서인지 가스통의 온몸에 서리빛 모양의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전 회장 P선생이 준비해온 포도주 Lutini도 향이 환상적이었다.
새회장인 L선생이 준비해온 어묵국과 누룽지탕 역시 일품이었다고 여겨진다.
중간에 낱말게임이나 사자성어 같은 게임도 있었지만, 윷놀이 시간에는 P선생과 L선생의 티격태격 때문에 분위기가 사뭇 야단법석 소란스러웠다.
강한 자기 주장을 펼치는 함성과 같은 실갱이가 결코 만만찮게 들려왔다.
그 여러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강을 바라보는 일에만 넋이 빠져 있던 나는 그때껏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되어 내 앞에 앉는 L선생과 마주 보며 약간의 소론(所論)을 펼쳤다.
한때 이혼 했었고. 곧장 재결합 했지만 몇 년도 못 되어 다시 삐걱 이고 있다는 실토를 들은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나는 그를 좀 두둔한다기 보다 위로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이미 C선생과 P고문도 합류한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앉으며 진지하게 경청했다.
어디 찾아보면 나올 수도 있는 글이 있지만 내 남편의 박고집에 대한 얘기였다.
나는 신혼 초부터 남편의 치약 짜기 버릇을 기필코 한 번 고쳐보고 싶었었다.
허리나 목 부분을 주로 눌러온 그의 반평생을 바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달래고, 부탁해보고. 싸워도 보고, 삐치기도 했지만 그의 고집은 완고하고 견고한 울타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내게 터득(攄得) 비슷한 게 안겨 왔다.
(그의 고집을 고치려 들지 말고 나를 고치자. 나를 져주자.)
그날 이후 나는 치약을 사용할 때마다 남편이 매번 허리나 목을 눌러 놓은 자국을 내 손으로 그럴 듯하게 고쳐 놓기에 이르렀다.
허밍으로 노래까지 곁들이면서.
"싱깅 트랄랄 랄랄 랄랄 랄랄라 싱깅 트랄랄 랄랄 랄랄 랄랄라 싱깅 트랄랄 랄랄라……."
그처럼 수월하고 간단한 해결책이 따로 없었다.
내가졌지만 내가 이긴 거나 하나도 차이 없는 게임이었다.
얘기를 듣던 P고문께서 박 씨들을 대변(代辯)하듯 정리하며 내 말을 매우 간결하게 도왔다.
"안. 강. 최를 순위로 정하는 고집대회에서 고집이라면 둘째라고 해도 서러울 박 씨 고집이 왜 빠졌는지 아십니까? 그 세 성씨를 모두 합해도 박 씨의 생뚱맞은 고집을 못 꺾기 때문에 빠진 거라고 합니다."
가느다란 철사 울타리를 사이에 둔 강 옆의 시멘트로 만들어진 식탁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던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당사자 P선생이 다시 윷놀이 얘기를 꺼냈다.
"이 말이 서울에 도착했고, 저 말도 서울에 합류해서……."
손으로 시멘트 식탁을 두들기며 윷놀이를 되짚기 시작했다.
눈앞의 문우 두 사람이 서로를 방어(防禦)하는 게 아니라 자꾸만 상대방을 긁고 있었다.
나는 L선생에게 뭔가 누르는 시늉을 했고, 치약이라는 메시지를 전송(電送)했을 것이다.
고뇌에 찬 표정으로 L선생은 몇 마디만 건네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
" 이쪽 모가 서울에 닿으면 저쪽 걸도 서울에 닿게 되고……. "
고집게임 끝이었다.
다시 한 차례의 아사도 잔치가 있었다.
어느 새 화기애애한 가운데 낱말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매년 소풍 때마다, 게임에 동참하는 일이 참으로 성가시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
사실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다른 사람이 낑낑대면서 하나의 사행시를 고심할 때, 여럿이나 뽑아지는 내 사행시는 그들이나 나 스스로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을까.
나는 게임에 임했을 때 승부를 즐기는 인간이기 이전에초연한 몫에 충실하고 싶기도 한 것을.
이래저래 져주고 싶은 맘만 지대한 것을.
강물이나 흠뻑 닮아 두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홀로 강을 앞에 두고 앉게 되었다.
강물은 참 이상했다.
겉으로는 밀려오는 물결을 이루면서 속으로는 밀려가는 것이다.
조금씩 강물이 바다 쪽으로 다가 가고 다가 갔다.
나는 그때 비로소 다시 글을 써낼 수 있는 실마리를 썰물 한 자락에서 건져 내게 되었다.
마침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영원히 놓칠 수도 있었던 실마리였다.
강의 초입은 부서졌으나 멀고 깊숙한 곳부터는 살아 있는 무에제(Muelle=잔교)의 모습이 낮고 긴 탑처럼 부상되어 떠올라 있었다.
새들이 떼 지어 매달린 풍경이었다.
시대를 상실(喪失)한 내가 패배를 길들였던 날들 역시 부리를 가슴에 묻고 매달려 있었다.
정말 얼마나 처절하면서도 절실하도록 아름다운 강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가장 옷을 잘 입은 사람으로 어제 내내 자주 문우들의 칭찬과 화제에 오르기도 했고, 포상까지 말이 마무리 되려고도 했지만 당연지사처럼 사양하고 있었다.
인정한다.
나는 날개와 깃을 잘 다듬는 일을 어려서부터 즐겨온 것이다.
그게 바로 패배를 길들이는 자가 해야 할 의무(義務)였을 것이다.
Asado en Mendiolaza (Marcos Lopez)
2012년 5월 12일 토요일
명마(名馬)를 만든다는 백락(伯樂)
-펌-
말은 발굽의 덕으로 서릿발이든 눈이든 밟을 수 있고 온 몸에 털이 있어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들판에는 풀이 있고 물이 있으니 뜯고 마시며 마음대로 뛰고 논다. 야생마는 이처럼 살다가 명이 다 되면 죽는다. 이것은 곧 말의 행복이다. 장자는 말의 이러한 행복을 말의 본성으로 본다.
말이 산하에서 마음대로 살았을 때는 명마가 따로 없었다. 말을 잡아다가 사람이 길을 들여 부려먹기 시작하면서 못난 말과 잘난 말이 분별되었다. 물론 이러한 분별은 말이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짓이다. 이러한 분별 탓으로 말을 명마로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하는 인간이 등장하게 된다.
맨처음 이러한 자랑을 판 사람이 백락이다.
본래 백락은 천마를 다스린다는 별의 이름이다. 춘추시대 진나라에 살았던 손양이란 사람이 그에게 백락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락은 손양의 명성인 셈이다.
산하에서 행복하게 사는 말을 잡아다가 백락은 말의 털을 지지고 깎았다. 말발굽을 깎아내고 인두로 지져댔다. 말의 굴레와 다리를 밧줄로 묶어 놓고 멀직히 구유와 마판을 나란히 차려 놓는다. 백락은 왜 이렇게 묶인 말 앞에다가 구유와 마판을 차려 놓았을까? 묶인 말에게 시키는 대로 한다면 끌어다가 구유의 속의 풀을 먹게 하겠다는 백락의 잔꾀가 그렇게 한 셈이다.
백락에게 걸려들어 묶인 말이 목숨을 부지하려면 백락이 시키고 하자는 대로 하여 멀리 있는 구유 속의 풀을 먹어야 한다. 그러면 백락은 말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 말이 잘 길들여졌다고 자랑을 했을 것이고, 속으로 비참한 눈물을 흘리는 말을 몰라본 사람들은 과연 백락이라고 찬사를 보냈을 게다. 재주를 팔아 명성을 얻어내려고 말의 본성을 짓밟아버린 인간의 짓을 무어라 할 것인가? 인위의 재앙인 셈이다. 백락의 재주 탓으로 그에게 걸려든 말들이 재주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 산하에서 마음대로 살아야 할 말의 본성을 유린해버린 재앙이 아닌가.
말의 본성을 꺾어버린 백락은 마을 길들여 잘 달리는 말로 바꾸는 재주를 부린다. 먹이를 주지 않은 채로 달리게 하고 목이 말라도 물을 주지 않은 채로 달음박질을 시키면서 백락이 하자는 대로 하면 먹이를 주고 물을 주니 붙들린 말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다리고 달려야 한다. 채찍과 말고삐를 쥔 백락은 이렇게 명마를 만들지 않느냐고 의기양양하게 뽐냈을 게다.
그러면 사람들은 과연 백락의 천마라고 환호성을 질렀을 게다. 이 또한 재주를 팔아 명성을 산 인위의 재앙이 아닌가. 이러한 재앙에 걸려든 말은 재갈을 물고 가슴받이를 걸고 엉덩이에 채찍을 맞으면서 숨질이 막혀도 달려야 한다. 그러니 그에게 걸려든 말은 반수 이상 죽어버리게 된다.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자랑하는 백락의 재주에 걸려든 말이 끝까지 목숨을 부지하여 명마라든지 준마라든지 천마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 때, 그 명성이란 것은 말이 원한 것인가 아니면 백락이 노린 것인가? 그 따위 명성은 말에게는 한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본성을 빼앗기고 유린당하고 말았으니, 말이지만 이미 말이 아닌 셈이다.
사람을 말처럼 조련하는 백락은 없을까? 역사상 이름을 남긴 군왕들은 거의 백락의 재주를 간직했었다. 백락은 말의 본성을 유린하여 명성을 얻었고 그 재주를 감추질 않았지만, 군왕은 수더분한 사람들의 본성을 유린하여 권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재주를 감추었을 뿐이다.
몽고인들은 징기스칸을 으뜸가는 군왕으로 모신다. 그는 기마병을 거느려 천하를 정복하였다는 명성을 얻었다. 징기스칸의 병사들이 말의 본성을 짓밟았고 징기스칸은 병사의 본성을 짓밟은 재주 탓으로 무수한 말과 병사들이 싸움터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 진나라에 살았던 손양은 말을 잡는 백락이었지만 징기스칸은 사람을 잡는 백락인 셈이 아닌가. 그러므로 백락은 인위의 재앙을 팔아 명성을 사는 재주꾼일 뿐이다.
장자는 이러한 재주를 고발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장자의 고발이 오늘날에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없을 게다. 재주가 비상하다고 자랑하는 난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더 많은 까닭이다.
<출처 : 호접몽>
2012년 5월 11일 금요일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펌-
우리는 일상에서 늘 손을 움직이고, 많은 사람들의 손을 보면서 살아간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가끔은 아름다운 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식을 안은 손, 병자를 돌보는 손, 상대방을 잡아 이끄는 손, 창작에 몰두하는 손에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보람, 가치를 느낀다. 이런 많은 아름다운 손 가운데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손이 있으니, 뒤러가 그린 <기도하는 손>이다.
알브레이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독일 르네상스 시기의 위대한 예술가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눈으로 본 세계를 감동적으로 표현하는데 열중하였고, 특히 성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독창적인 수법으로 재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위대한 예술가가 남긴 걸작이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그림이 <기도하는 손>이다. 그런데 단지 거친 모습의 모아 쥔 두 손만이 있는 이 그림에는 위대한 사랑과 믿음이 깃든 아름다운 친구의 우정이 숨어있다.
1490년대 젊은 화가 뒤러와 프란츠 나이스타인은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이 둘은 너무 가난했기에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둘은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친구는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을 돌보아주기로 작정했다. 그 결과 프란츠가 일하게 되었고, 그의 뒷바라지로 뒤러는 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뒤러는 유명한 화가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프란츠는 친구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뒤러는 학교를 졸업하여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다.
이제 역할을 바꾸어 자기가 친구를 미술학교에 보내기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프란츠는 친구를 위해 너무 오랫동안 희생하며 험한 육체노동을 했기에 손이 굳어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수가 없었다. 프란츠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화가가 되는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츠를 찾아간 뒤러는 창을 통해 프란츠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뒤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 저의 손은 이미 일하다 굳어서 그림을 그리는 데는 못 쓰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몫을 뒤러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참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소서!'
이 광경을 본 뒤러는 어떠했을까? 마디마디 상처투성이의 손이지만, 아마도 자기를 위해서 희생하고 기도하고 있는 친구의 손을 바라보면서 이 손이 자신을 위해 온갖 희생을 치룬 사랑과 우정으로 뭉친 진정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순간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복받치는 감정을 참으며 그 자리에서 즉시 연필과 그림도구를 펼치고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정성스럽게 스케치했다. '프란츠! 자네의 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네. 세계의 제일 아름다운 작품이 바로 내 눈앞에 있네.' 이렇게 해서 뒤러의 유명한 작품 <기도하는 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그림 속 손의 주인공은 바로 뒤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친구 프란츠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손이기도 하다. 이 그림을 그리고는 뒤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다.' 그렇기에 뒤러가 그린 손은 아름답게 가공하려는 어떤 의도도 없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록 거칠게 굳어진 손이지만 마주 잡은 손의 모습이 한 인간이 다른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이타행(利他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기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하라.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할 수 없다고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이미 당신은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챨스 스펄젼)
2012년 5월 10일 목요일
빗소리를 들으며
맹하린
.............................................................................
내가 그대에게 하는 젖은 말들이
그대 영혼을 조금이라도 흔들지 못한다면
시는 있어서 무엇 하리
내가 그대를 앉은 자리에서 편찮게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작은 증거
오늘은 이미 날도 어둡고
이 어둠의 그리움조차 길을 잃었지만
아아, 나는 거듭거듭 이 말을 하고 싶네
기다려야 하네
먼 길을 가야 하네
바람 부는데 몸 상한 갈대처럼
누워서는 안 되네
-윤성근 '당신을 위하여'중
.........................................................................................
-초여름-
새벽 4시 10분 전인데
소나기다.
버릴 거 다 버리고
무덤덤 살자 해놓고
왜 이리 할 말도 많고
왜 이리 남은 얘기도 수 없으며
왜 이토록 해 냈던 이야기가 넘치며
왜 또 해야 할 말들이
자꾸만 풀려 나오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기다렸다는 듯 악플러들에게 퉁박을 먹었다.
너무 많이 써낸다는 얘기다.
수 백개의 노래 속에는
한 두 멜로디와 흡사한 약간의 복병이 숨겨져 있다.
하물며 쉼표와 되돌이표, 그리고 여리고 강하게...
그 수백의 노래가 하나 둘의 음표에게 항복하는 걸 지켜 볼 때의
아리고 여린 마음이라니!
혹은 반음 올림표와 반음 낮음표의 일사불란!
야성(野性)이 지닌 강한 할큄에
나 그만
할 말도
해야 할 말도
했던 말도
실 풀리듯 풀어 내는 일도
모두 다 여몄다.
그동안 일상(日常)의 울퉁불퉁하던 언저리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글 쓰고 음악 올리는 과정이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현재 몹시 편한 거 보면 힘도 들었을 것 같다.
강행군(强行軍)은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편하다.
얼마간의 시일이 걸릴지 모르겠다.
당분간 펌만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쓰는 것으로 살아 가지만
때로 쓰는 걸 감추면서도 살아낼 능력 정도는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내 친애하는 악플러들이
쾌재(快哉)를 부르짖을지
약간이라도 쓸쓸해 할지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중요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아끼던 지혜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침묵만으로 내 열정(熱情)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나누겠다.
흔적(痕迹)으로 남은 고통을 결코 지우지는 않을 생각이다.
천둥으로 갈등을 겪는 내 고통이
촘촘 쌓여가는 관념(觀念)과 섬세함의 솔기를 들들들 박음질하게 된다.
내 맘에 어느 새 단풍이 들고 있다.
2012년 5월 9일 수요일
제사(祭祀)
-펌-
중국의 현자에게 제자가 찾아 와서 물었다.
그 나라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그날은 제사를 못 지내게 되어 있었다.
"스승님. 오늘 제 자식이 태어 났는데도 아버님의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지내거라."
다른 제자가 찾아와서 물었다.
"스승님, 오늘 저희 집에 강아지가 태어났는데 조상님의 제사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렇다면 지내지 말거라."
옆에 있던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왜 한 사람에게는 지내라고 하시고, 한 사람에게는 지내지 말라고 하십니까?"
"첫 번째 사람은 제사를 꼭 지내고 싶어서 물었으니 지내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 사람은 제사를 지내기 싫어서 하찮은 강아지의 출생을 핑계로 대었으니 지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2012년 5월 8일 화요일
나의 현실(現實)이자 당위성
맹하린
여자 아기의 돌잔치가 있어 D정의 이층을 향해 계단을 올라 갔다.
분홍 톤의 사방화(四方花)를 납품하기 위해서였다.
가족으로 보이는 몇 분과 D정의 여주인이 유모차에 탄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손님들이 일찍 도착하는 데다 사진을 찍으려면 오후 4시 반쯤이 적당해서였다.
사방화를 돌떡, 그리고 과일들이 괴어 있는 잔칫상의 가운데에 올려놓고, 아기와 가족들에게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기에게 직접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었었다.
"이 아기가 주인공인가요?"
나는 튼튼한 우량아의 남자아기에게 깍꿍을 하면서, 속으로는 약간 놀라게 된다.
그 전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D정의 따님이 자신있게 주문했었다.
"여자아이 꽃색갈로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가다듬으며 계단을 매우 천천히 내려왔다.
주인아저씨가 언제나 처럼 그런다.
"이 아줌마가 돈을 다 가져갔네?"
현지인종업원을 시켜 이층에 있는 부인을 불러 오라 지시한다.
내가 4시 이전에 도착되면 나중에 수금하러 또 가야하고, 4시 반쯤이면 직접 수금을 받게 된다.
이 아줌마가, 언제나 돈을 다 가져가서다.
나는 꽃값을 받으며 말하게 된다.
"따님에게서 여자애라고 들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실수했어요. 곧장 다시 해올까 봐요."
"글쎄 말이에요. 나도 내색은 못했지만 깜짝 놀랐어요. 그래도 힘드셔서 어떻게 해요?"
"힘들기는요. 이게 다 우리 일인 걸요."
나는 식당의 여주인보고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 있으라고 부탁한다.
자연스럽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내 뜻을 알아듣고 그녀가 먼저, 그리고 나는 약간 나중에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돌 꽃이 다른 식당에도 있거든요. 지금 생각났어요. 그 식당과 꽃이 바뀌었어요."
아기의 아빠와 할머니 되는 분이 합창한다.
"글쎄요, 꽃이 여자애 색으로 보였지만 그래도 뭐 지장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기들은 울긋불긋 아무 색이나 좋아할 것 같아서요."
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한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지나치게 활짝 웃으며 말한다.
금세 바꿔 올 거다, 염려를 끼쳐 죄송하다, 연신 변명처럼 그러며 다시 사방화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면서 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안도감 같은 게 들어서 기분이 괜찮았다.
세 불록이고, 일요일이라 레미스를 부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산책길을 선택해서 걸으며 가게에 닿았다.
분홍장미를 모두 뽑고 서둘러 빨강장미로 대체했다.
송이가 큰 수입 장미였다.
세상이치가 그런 것 같다.
항상 먼저 것보다는 좋아야 한다는 것.
나는 다시 산책길을 택하여 걷고 걸어 D정에 갔다.
"빨리도 가져오셨네?"
"아, 예쁘다!"
그때껏 이층에 남아 있던 여주인과 아기의 할머니에게서 산뜻한 칭찬을 들으며 다시 계단을 내려오게 되었다.
엊그제인 5월 5일 토요일에는 S교회의 결혼꽃장식을 맡아 3일 동안 동분서주(東奔西走) 바쁘게 지냈다.
금요일은 새벽에 구입했던 꽃들 모두 냉장고에 물 채워 넣고.
토요일은 꽃장식하고.
일요일은 뒷처리와 청소하고.
원래는 한인여성음악회 행사와 중복되어 맘적으로 몹시 부담이 컸었다.
그런데 그 여성합창단이 교민 언론지와 인터넷 신문에 광고와 기사를 대대적으로 두어 번 미리 내주어 뜻밖에도 나를 도와 준 셈이다.
과다한 설명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로 도배했던 맨 처음 광고와는 수준이 달랐다.
“한울림여성합창단의 다섯 번째 정기연주회가 연기됐다. 연주회는 이번 주 토요일(5일)로 예정돼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반주자 건강상의 문제로 두 달 미뤄졌다. 연주회는 7월 14일(토)로 연기됐고, 장소는 신성교회로 기존과 같다. -꼬르넷 뉴스-
어찌됐던 내게는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걱정을 많이 했었다.
왜냐하면, 광고가 나가도 꽃을 선호하는 사람은 꽃을 꼭 준비해 달라며 떼쓰고 우기고 그러기 때문이다.
“꽃다발을 사양한다는 광고 못 보셨어요? 이렇게 되면 같은 성당에 다니는 J단장에게 면목이 없어지고 내 입장이 많이 난처하거든요.”
그러면 고객은 퉁명스럽게 쏜다.
“내 맘이에요. 무조건 해주세요.”
꽃을 좋아 해서 꽃으로 하는 사람.
꽃이 그나마 인사로 떼우기는 만만한 가격이라서 그러는 사람.
그리고 단체들은 소속단체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더욱 꽃으로 인사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는 또 어떤가.
어떤 화가는 꽃을 배달하면 내 앞에서 직접 계단에 감추느라 바쁘다.
꽃 때문에 작품이 빛을 못 보면 안 된다는 매우 타당한 말씀이시다.
그럴 때 나는 그분에게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모두 동원하며 말하기도 한다.
"선생님, 행사에 꽃도 있어야 빛이 나죠? 하하."
그랬더니 입구나 뒷쪽으로 몰아 놓도록 하는 배려가 매우 조금씩 보이기도 한다.
그러저러한고객들의 강한 주관을 만날 때마다 나는 왜 하필 꽃집을 하고 있는가, 그 비슷한 자괴감에 빠질 경우 매우 잦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천 가게의 판매원으로 일하는 K씨를 생각한다.
아침에 출근할 때 장롱에 간과 쓸개를 빼놓고 나선다는 K씨.
미국에 유학 보낸 자식들의 학비를 벌려면 웬만한 타격 쯤이야 모조리 참을 수있다는 K씨를.
하여간에 나중에 나온 광고는 나를 도와도 크게 도운 셈이다.
왜냐하면 결혼식 꽃과 다른 행사가 겹치면 노동의 고달픔도 배가(倍加) 되고, H음악회와 비슷한 정신적 부담 또한 적잖은 압박감으로 안겨 오기 때문이다.
두 달 후로 미뤄진 음악회.
나는 음악회가 다시 치러질 거라는 광고와 기사를 무덤덤 지켜보게 될 것이다.
맨 처음 나온 광고나 기사와 비슷한 문맥이 될 게 분명하다.
“H여성합창단은 이번 공연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했는데, 바로 ‘자선음악회’이다.
지금까지는 발표회 형식의 음악회였다면. 이번에는 자선의 의미를 부여했는데, 자폐아등 정신지체아들을 돌보는 칼로스 재단을 후원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합창단은 연주회를 마친 후 전달되는 꽃다발을 사절하기로 했고, 꽃다발 값을 입구에 마련하는 후원함에 넣어 주기를 바랐다.”
-꼬르넷 뉴스-
어제 내가 교민게시판에서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면서 드디어는 한동안 잠재웠던 내 정체성을 일깨웠음을 얘기하려던 핵심에서 한층 벗어나고 말았다.
엉뚱하게도 생업에서 생기는 앙금만 앞세운 셈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글과의 소통에만 한층 침잠할 것이다.
이게 바로 나의 현실이자 당위성(當爲性)이 되었다.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특성(特性)과 풍자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회에 발 담그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내 커다란 잘못이었다.
이미 지워졌던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나는 컴퓨터의 시프트 제트를 신중히 누르게 된다.
내게 남은 기억들 모두를 제거해 버리기 위해 컨트롤 엑스를 과감히 누른다.
나여!
패잔병(敗殘兵)처럼 지친 맘으로
하물며 글을 붙잡는 나여!
아래의 글을 오늘 여러 번 읽도록!!!
“작가란 글 쓰는 보람과 생활의 부담을 여러 번이나 함께 겪는 데서 즐거움을 찾을 뿐,
다른 것들에게는 동요(動搖)하지 말아야 한다. 성공도 실패도 칭찬도 비난도 물을 바라보듯 그저 무던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펌-
2012년 5월 7일 월요일
머위와 씀바귀
맹하린의 수요칼럼
아르헨티나조선일보
2000년 5월 25일
한국의 야채들이 모두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에 없는 야채들도 많아서 적당히 상쇄(相殺)하며 살게 된다.
내 나라에서 즐겨 먹던 두릅이나 머위, 여러 가지 산나물들은 눈을 씻고 찾아 다녀도 없는 건 없기 때문에 그 점 참 아쉽다.
채식주의인 우리 가족의 식성에 맞추기 위해 흔하고 값싼 셀러리나 상치 근대 감자 양파들만 계속 식탁에 올릴 수도 없는 일이고, 한국식품점에 가면 깻잎이나 쑥갓, 또는 미나리 등을 손 쉽게 구할 수도 있는데 값이 좀 비싼 편이라 거의 현지인 경영의 마켓을 이용하게 된다.
마켓의 야채부에 들러, 정성스레 진열된 여러 가지 채소들을 바라 볼 때마다 고향의 채마밭에 닿은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진다.
오이. 당근. 도마도. 가지. 호박. 시금치 등등 종류가 많기도 많지만 싱싱한 가지각색의 채소들은 한국 것에 비하면 대체적으로 크고 투박해서 좀 싱겁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땅이 비옥해서 그렇겠지만, 크고 투박한 채소들은 비료도 농약도 필요하지 않은,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천혜(天惠)의 땅에서 자라서 그런지 야무지고 단단해 뵈지를 않는 것이다.
마켓에서 내가 제일 자주 고르게 되는 채소는 작고 여린 씀바귀다발이다.
서너 단의 씀바귀를 잘 씻어서 사라다로 만들거나, 날김치처럼 여러 가지 양념으로 무치거나 살짝 데쳐서 나물로 내놓기도 하고 상추에 얹어 쌈으로 먹기도 한다.
쌉싸래하면서 야들야들한 씀바귀의 그 특이한 맛은 너무 그럴 듯 해서 자주 먹는 편인데도 전혀 질리는 일이 없다.
씀바귀 다음으로 즐기는 채소는 아치코리아(고들빼기)다.
신선하고 튼튼하게 잘 생긴 고들빼기를 몇 단 사다가 일주일 정도 소금물에 삭혀서 젓갈을 포함한 서너 가지 양념으로 알뜰하게 버무린 뒤 작은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아 둔다.
그렇게 익힌 맛이 제대로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꺼내 먹는 톡 쏘는 듯한 진하고도 깊은 맛이란 기막힌 감칠 맛을 지녔기 마련이다.
단정하건대 나라는 사람은 생활도 생활이지만 음식에서조차 쓴맛을 즐겨 선택하는 듯 싶다.
아니면 미리 쓴맛으로 입맛을 단련시킨 후라서 웬만큼 쓰디쓴 세상살이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강심장을 갖추게 되는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고국의 청주에 계신 엄마에게서 머위의 어린 포기를 뿌리 채 얻어왔었다.
우리집 마당 한 쪽에 심어 놓고. 어렸을 때 소꿉장난하면서 우산이라고 쓰고 다니던 머위의 잎을 그립고 소중하게 보아내다가 가을이면 거두어 껍질을 벗겨내고 머위 줄기를 숭숭 썰어 들깨와 멥쌀을 갈아 머위탕을 만들 결심을 했었다.
그런데 이사하는 과정에 그만 분실하고 말았다.
사람은 아플 때면 저를 낳아 기른 어머니 생각으로도 모자라 고향 생각, 그리고 어머니가 늘 해주던 음식을 애타게 그린다고 한다.
내가 그리워 하는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 바로 머위탕이었던 것.
다시 모국여행을 하는 날이 오면 머위의 씨나 포기를 꼭 얻어 오리라.
외국에 살면서 우리나라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음을 그나마 감사하게 된다.
두어 가지 반찬으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내 식탁이 있어
나는 그것 역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사는 것.
그게 바로 행복이지 싶다.
분명한 것은 음식을 만드는 일이 음식을 먹는 일처럼 쉽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2012년 5월 6일 일요일
사라(Sara)의 선물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한국일보
1996년 10월 16일
나와 가까운 사이인 사라는 아베쟈네다 지역의 아르헤리치 거리에서 레갈레리아(선물점)를 운영하는 유태인이다.
인정, 심성 모두 고와서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못 느낄 때가 많다.
엠빠나다(파이. 만두)나 피자를 만들면 잊지 않고 한 접시씩 챙겨다 주면서 시식(試食)해 보기를 권하는데 요리솜씨 또한 수준급에 이르러 있다.
UBA대학 경영학과 4학년이고 장래 계리사를 꿈꾸는 사라의 큰 아들 마르셀로가 시험 치러 가는 날.
사라는 그 커다란 덩치로 마르셀로를 포옹하면서 샬롬!하고 속삭였는데 푸른 그녀의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보일 정도로 눈물방울이 눈 안 가득 고여 있었다.
유태인 학살 때, 남녀노소 구분되어 가스실에 들어가면서 유태인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잊지 않고 해냈다는 인사 샬롬을…….
사라는 그렇게 심성이 곱고 부지런하며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사라의 모든 장점(長點) 중에서 특히 괄목(刮目) 할 만 한 점은 다른 사람과 대화 할 때 듣는 것을 잘 들어주고 자기 목소리를 거의 내세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도 모든 좋은 점을 다 갖추고 있는 사라지만, 유태인 대다수가 그렇듯 사라 역시 지독한 구두쇠 쟁이라고 볼 수 있다.
심성이 곱디곱고 감정이 풍부할 대로 풍부한 사라가 돈을 쓸 때는 어떻게 저리도 강인하게 아낄 수가 있다는 얘기인지 내심(內心) 놀라게 되고 , 도대체 저 여인이 그 인정 많고 친절한 사라일까 하는 의아심까지 솟구치면서 고개가 저절로 흔들어질 지경이고는 한다.
굳이 속담을 인용하자면 근면이 사라의 오른 손이라면 절약은 사라의 왼손이다.
사라는 그녀의 남편 루이스보다 세 살이 많은 데도, 남편 대하기를 마치 상전 떠받들듯 높여주며 쩔쩔매는 자세는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하물며 몇 블록 떨어진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시어머니 베티에게도 각별한 정성으로 섬기는 현명하면서도 깍듯한 며느리이기까지 하다.
어머니날이 가까워진 며칠 전이었다.
우리 가게로 찾아온 사라는 볼이 발그레 붉어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열이 받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사라는 자기 가게 맞은편인 한국인 도매가게에서 블라우스를 하나 샀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어머니 베티가 한 사이즈만 더 큰 걸로 원해서 일의 발단이 생긴 거였다.
바꾸러 갔는데 도대체 들은 척도 안하므로, 같은 동족인 내가 좀 나서 달라는 얘기였다.
패션 ‘비올레타’는 마침 우리와 잘 아는 처지였고, 나보다는 남편끼리 더 친근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나는 남편에게 그 일을 부탁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언제나 성심성의를 다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남편은 두 말도 필요 없다는 듯 사라를 앞장세우며 패션 ‘비올레타’로 갔다.
패션 ‘비올레따’의 아저씨는 일부러 어깃장을 놓느라 한국말, 그것도 충청도 사투리를 느릿느릿구사하면서 길다랗게 투덜대더라는 것이었다.
“하여간에 내가 저 유태인 놈들 꼴 보기 싫어서 결사적으로 안 바꿔줄 작정 같은 걸 했었던겨. 그런데 박형을 봐서 바꿔주는 거 아닌감? 저 옷걸이와 상자 앞에 분명히 오페르타(재고)는 바꿀 수 없다고 써놨는데 어찌 생떼남? 저 여자가 길 건너에서 장사하는 걸 내 모르는 바 아녀. 우리 차를 즈네 가게 앞에 세운다고 저 여자의 남편이 그동안 얼매나 우리 내외에게 텃새를 했는지 모를겨. 만약 차를 세우고 싶으면 자기네 가게 앞을 날마다 청소하라나. 뭐라나! 아주 웃지도 않고 나를 아침마다 놀리더라니까.”
남편은 루이스를 너무나 잘 파악해 왔기 때문에 하하 웃어 대면서 부득이 해명을 아끼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만 참고 진정해, 그래. 루이스는 유태인 맞아. 농담이 생활화된 사람이야. 이형이 자칫 오해했던 모양인데 루이스는 말이지, 농담할 때는 절대 웃지 않는 친구야. 생각해 봐, 코미디언이 웃으면서 코미디 하는 거 봤어?”
남편은 그렇게 다독여주며 사라가 원하는 사이즈로 바꾸고 차액까지 지불하도록 끝까지 돕고 주선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중요한 말은 지금부터라는 듯 남편은 토를 더 달았다.
“사라가 베티에게 선물하려던 블라우스의 가격이 얼마였는지 알아? 자그마치 9페소(9달러 상당)였어. 이 지역 도매상가에 몇 십만 달러의 가게가 세 개나 있고, 띠그레에 별장을 갖고 있으며 뚜꾸만에 농장까지 소유한 사라가 말이야.”
나는 순간적으로 남편이 그들의 별장인 띠그레 지역에 다녀오면서 겪은 일화(逸話)를 저절로 떠올렸고 나도 모르는 사이 풀풀 웃기 시작하고 있었다.
얼마 전, 남편은 사라 내외에게서 그들의 별장에 초대되어 다녀온 적이 있었다.
자가용을 둘 다 가져갈 필요는 없다고 해서 그들의 차로 움직였지만, 루이스는 휘발유 값을 삼등분하여 받았다고 한다.
루이스와 베티와 남편이라는 삼등분.
내가 안 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사등분 될 뻔 했던 비용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소유한 보트를 탔을 때, 보트의 기름 값도 부담하라고 해서 남편은 선선히 다시 3분의 1을 지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삼등분.
내가 안 가길 잘 했지, 내가 갔으면...... ,
남편은 항의도 할 수 없었던 게 그곳에서 구운 아사도(갈비구이)값도 삼등분을 해낸 직후였었기 때문에 어느덧 말문이라는 게 절로 막히고 말았었나 보았다.
속으로만 중얼거리다가 다녀와서야 내게 하소연을 터뜨리던 남편.
“그건 초대가 아니잖아? 당신이 준비해준 한국산 선물까지 일껏 준비해 갔었는데.”
나는 그들 내외와 어울리는 일은 가게 근처에서나 대만족이라면서 매번 적당한 이유를 붙여 합류하지 않아 왔다.
유태인들의 구두쇠 노릇을 한두 번 봐왔던 게 아니었고, 사라나 루이스가 그런 식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일도 한두 해 겪은 게 아니다.
하지만, 사라가 어머니날에 선택한 선물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닿자, 곰곰 진지한 쪽으로 묵상에 잠기게도 되었다.
더불어 사라를 위시한 유태인들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작은 분석까지 펼치게 되었다.
막연하게나마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노라면 사라와 루이스 뿐 아니라 대다수의 유태인들은 매일매일을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구약시대와 거의 다름없는 깊은 신앙심으로 하루하루를 신앙적인 사고방식을 가장 중요시하며 근면을 영위하듯 꾸려 나가고 있었다.
박학다문(博學多聞)의 지식을 지닌 대부분의 유태인들에게서는 익살과 유머를 빼면 절약심과 끈질김만 남을 뿐이라는 단정이 생길 정도로 그들은 매사에 웃음 섞인 절약정신을 아끼듯 껴안으며 살아가기를 서슴치 않는다.
사라의 철학에 가까운 습관과 더 이상 무너질 수없이 단단하게 굳혀진 경제적 기틀은 오랜 세월동안 갈 길을 다져온 유태인들의 전통적인 궤적(軌跡)을 발견해낸 듯 한 감상에 젖게도 한다.
분명한 것은 유태인들은 감성도 감성이지만, 이성(理性)이 더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돈은 아무리 많아도 너무 많지는 않다는 속담은 아마 유태인들 때문에 만들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유태인을 친구로 두었으면 그 정도로 되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면서 지내고 싶은 것이다.
유태인처럼 살라면 나는 도저히 못 살 것이다.
나는 내가 한국인임을 새삼 감사하게 된다.
2012년 5월 3일 목요일
후고 데 아로스(쌀 주스)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중앙일보
1999년 6월 8일
찹쌀과 검정콩, 그리고 팥을 사기 위해 '리니에르스' 지역의 곡물시장에 갔다.
가까운 한국 식품점에서도 살 수 있지만 곡물시장이 값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그곳에 가면 정실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웬만하면 '리니에르스 쪽으로 나서게 된다.
정실엄마는 '리니에르스' 곡물시장 근처에서 소매 옷가게를 운영하는데 제시카라는 현지인 종업원을 두고 일한다.
정실아빠는 도매상이나 옷공장으로 물건을 구입하러 다니기 때문에 가게에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딸들이 가게를 봐 줄 때도 있지만 정실엄마가 주로 지킬 때가 많으므로 만약에 정실엄마가 없으면 어쩌나,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왕 나간 김에 많이 살까 하다가 그 핑계를 대고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지 싶은 잠재의식이 앞서 10Kg만 구입했다.
곡물시장에서 두 블록 더 안쪽의 쇼핑센터 근처에 위치한 그 옷가게를 찾아가니 친정동생을 맞듯 반가워하는 정실엄마.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이 위라서 언니와도 같은 처지인데 서로 허물없이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커피를 마시며 밀린 얘기를 나누는데 그녀의 작은 딸 예실이가 배낭을 메고 들어온다.
제 엄마를 축소판처럼 빼다 닮은 예실이는 나에게 반가움을 나타낼 때에도 꼭 제 엄마와 똑 같은 음성과 행동으로 반가워해서 나의 웃음보가 퐁퐁 비눗방울처럼 떠다니게 만든다.
예실이를 보자마자, 겨우 생각이 났다는 듯 정실엄마는 냉장고 안에서 ‘후고 데 아로스(쌀 주스)를 내오라고 제시카에게 말한다.
(쌀 주스? 미수가루인가, 하지만 겨울에 미수가루를?)
나는 혼자 반문하며 순간적인 의아함을 품게 된다.
제시카가 유리그릇에 담아 내온 건 식혜였다.
“예실이 때문에 우린 이제 식혜 좀 자주 해먹기로 했어.”
“엄마, 나 지금 미술학원에 가야 하니까 나 없을 때 말해. 창피하잖아.”
예실이는 가져가야 할 그림도구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내게 인사를 남긴 후 잽싸게 나간다.
“쟤가 김상혁씨 딸하고 친구잖아. 며칠 전에 그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집에서 식혜를 줬나봐.
우린 바쁘니까 도통 한국음식을 잘 안 해 먹거든. 김치와 밥이야 기본으로 해먹지만 이 나라 음식과 함께 먹을 때가 많고. 그날 집에 돌아온 예실이가 글쎄 이러더라니까.”
“엄마, 나 오늘 세연이네 갔는데, 마침 세연이가 리브레리아(문방구)에 뭐 사러 갔다고 해서 한 십분쯤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세연이 엄마가 나한테 뭘 줬는지 알아? 설탕물에 썩은 밥을 타주면서 맛있다고 먹으라는 거야. 색깔부터 밥이 썩었구나 싶으니까 어쩐지 토 나올 것 같았어. 그런데 엄마 생각나서 할 수없이 다 먹었지. 누가 뭐 주면 고맙다고 하고 잘 받고 다음에 기회 있을 때 갚아야 한다고 엄마가 항상 그랬었지? 엄마의 그 말이 생각나서 억지로 다 먹긴 했지만. 세연네 엄마도 참 이상해. 어떻게 딸의 친구한테 썩은 밥을 주냐구. 거기다 설탕물까지 타서 주니까 더 이상했어. 있잖아, 밥이 완전히 바람이 빠져서 대따 가벼워. 아주 둥둥 떠 다녀. 나도 나중에 설탕물에다 썩힌 밥을 넣어서 세연이 에게 갚을 거야. 에이 드러워 혼났어, 정말! 세연이한텐 아무 말도 못했어. 나한테 부끄러울 것 같아서.”
예실이의 얘기를 듣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던 건 어딘지 모르게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식혜는 한국고유의 전통음료이고 발효를 이용한 가공음식이라고 설명하자 놀라며 신기해해서 모녀는 한동안 눈물이 글썽여질 정도로 웃었댔나 보았다.
식혜를 설탕물에 탄 썩힌 밥이라고 했던 무지함을 더 이상 자식들에게 심겨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바쁘고 힘든 이민생활 중에도 한국음식을 자주 해 먹기로 결정하게 됐다는 정실엄마는 잊었다는 듯 탄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있지, 예실이가 어젯밤에 식혜를 먹다가 뭐랬는줄 알아?"
“엄마! 밥이 썩었는데도 한참 먹다 보면 감칠맛이 있고 시원해. 그리고 다시 먹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 내일 세연이를 부를까 봐. 기회 있을 때 썩힌 밥 갚아야잖아.”
더 이상 말을 이어내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정실엄마, 그리고 나는 모자란 사람들처럼 자꾸만 웃고 또 웃었다.
잊고 있었다는 듯 가끔씩 식혜를 한 번씩 떠먹으면서.
내가 정실엄마를 좋아하는 건 그녀와 만나면 마치 밀린 웃음이 많다는 듯 맘껏 웃어낼 수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이나 웃고 나면 눈앞에 문이 몇 개인가 열린 것 같은 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웃고 웃어도 속 깊이 꿰뚫고 들어오는 웃음.
이 세상은 역시 맞바람이 순풍보다 더 시원하고 상쾌하다.
나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집에 돌아오면 집이 최고라는 생각에 잠기는 나의 관념을 물 주듯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간은 나가면 나가서 좋고 집에 돌아오면 집이라서 좋으니 내가 봐도 무척 곤란한 인간이 아닐까 싶다.
한 마디로 줏대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내가 나를 모르겠다.
나도 내 가족에게 쌀 주스를 만들어 주려고 엿기름가루를 미지근한 물에 담그고 있다.
2012년 5월 2일 수요일
2012년 5월 1일 화요일
때로 나는 섬이 된다
맹하린
지난 일요일엔 내가 다니는 한인성당의 축성미사에 갔다
나는 신자지만 나일론 신자까지도 못되고, 고무줄신자 정도는 된다.
시쳇말로 밀땅(밀고 당기기)을 잘하는 것이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며, 바쁘면 못 가고 안 바빠도 못 갈 때가 많다.
여하튼 성당에 가면 나쁠 건 없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도 볼 수 있고, 만년소녀라거나 나이를 거꾸로 먹느냐는 아부성 발언을 많이 듣기도 하고, 그리고 특히 어딘지 모르게 거룩한 느낌이 드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도 반갑다.
아르헨티나교구청의 페르난데스주교님이 성당 밖에 도착하실 때까지 모든 초대 손님들이나 신자들이 성당 앞거리에 나가서 기다리게 되었다.
축성식을 하는 과정의 교회법이 바로 그래야 하는 모양이었다.
페르난데스주교님은 번쩍번쩍하지도 않고 굉장히 낡지도 않은, 그냥 서민층이나 사용할 모델의 자가용을 손수 운전하고 도착하셔서 그점이 가장 신선한 감격이었다.
테이프코팅 시간엔, 그동안 아르헨티나 한인성당의 사목을 담당했다가 한국으로 귀임하셨던 세 분 신부님이 비행기 타고 축하 차 오셨으므로 그분들과, 손님 신부님과, 본당의 신부님 두 분, 그리고 아르헨티나 신학대학을 마치고 현지인 사목을 하는 중인 문유베날 신부님과 박라몬 신부님이 함께 해냈다.
한병길대사님과 몇 분의 단체장들은 합류하지 않고 신부님들로만 이행했다.
그게 바로 가톨릭의 법인가 보았다.
자리가 없을 걸 예상하고 일부러 일찍 도착했었지만, 내 첫 번째 친구인 수산나가 때마침 자리를 확보해 두고 있어서 나는 중간 위치의 자리를 이미 맡아 놓은 상태였다.
우연처럼 수산나는 왼편에, 오른편엔 나의 대녀 엘리사벳이 앉게 되어 그점이 제일 기뻤다.
축성식이 겸해진 미사라서 그랬을 테지만 상상외로 길면서도 장엄함 또한 없잖아 있었다.
신자들끼리만 있을 때 치러도 될 건축위원들 감사패 증정 같은 순서까지 지켜봐야 해서 몹시도 지루한 느낌 역시 뒤늦게 여러 차례 치밀었다.
한 두명도 아니었고 무려 열 명도 넘는 포상이었다.
아이러니는 식이 길다보니까 본당신자들은 거의 빠져나가 먼저 점심을 들었고, 열성신자와 초대손님들과 나처럼 어쩌다 나가는 신자들만 자리를 끝까지 채우고 있었다.
바람이 싸늘하게 불어 닥치던, 성당 광장에 차려진 식탁을 앞에 하고 수산나와 나란히 앉아 늦은 점심으로 곁절이김치에 시래깃국이 곁들여진 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맛있는 식사는 달리 맛있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저절로 맛있어진다.
가게로 돌아오니 아들은 혼자서 정신을 온통 빼앗기며 일 해낸 모습이 역력했다.
11시에 미사가 시작되는데, 11시도 넘어서 두 분의 한인단체장께서 축하꽃바구니를 주문했고, 그리고 성당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계속 전화로 독촉해서 엄청 바빴다고 한다.
성당 가기 전에 이미 내가 납품했던 모양으로 해달라고 했다던가.
아들은 한국어를 쓸 때 가끔은 철자법이 틀린다.
그걸 보완하느라 인터넷에서 그 단체들의 정확한 이름을 검색하기도 했다는 얘기다.
일요일이라서 레미세리아마다 레미스도 없어, 세 블록을 뛰다시피 다녀오느라 기침까지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들이 다시 쳐다보인다.
실제로 그래서 다시 쳐다보기도 한다.
손톱만큼의 원망이라거나 짜증이라고는 없고 당연한 일처럼 보고하는 모습이라 서다.
대부분의 내 고객들, 특히 교민단체의 집행진들은 3백에서 5백 페소(60에서 100달러 상당)의 축하 화환을 그냥 요술지팡이로 툭 피워대는 줄로만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어떤 문화행사나 미사에 자주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날의 미사 시간 도중 아주 괜찮은 은총 하나를 받았다.
10여 년 전, 이곳의 본당신부님이셨고 그날 제대 위의 의자에도 앉아 계셨던 J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봤었다.
그때 그 신부님에게 난데없는 호통을 들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고해 실을 당장 뛰쳐나올 뻔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잘 참아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새로 오신 그 신부님이 어떻게 내 음성을 알고 어떻게 내 아픔을 헤적일 수가 있다는 얘긴가.
그때부터 나는 고해성사를 어쩌다 보아왔다.
거의 안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 만든 것, 그러면서…….
미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참례했을 것이다.
나는 그럴 경우 딱 그만두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그만 두는 건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못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타입인 것이다.
나는...... .
그렇다. 매사에 어떤 갈등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그렇게 그만둘 수는 없다고 맘먹는 일에 익숙한 주의(主義)다.
그런데 어제 미사시간에 그분을 용서했다.
원래 고해성사를 자주 본 일은 없었지만, 남편의 뇌출혈로 사는 게 막막하다고 하는 신자를 그렇게 막무가내로 야단치는 신부님은 보다보다 첨이었다.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로도 내 아픔을 위로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사실 어떤 위로는 위로가 아니라 칼끝처럼 예리한 구석이 있다고 여겼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종교적 갈등을 겪어냈다.
그런데 불교나 개신교로 바꿀 생각은 전혀 안 해봤다.
가톨릭은 가톨릭인데 단지 갈등이 심한 정도였다.
나는 그럴 때 섬이 된 나를 바라보게 된다.
2년 전.
나는 본당의 전 안드레아 보좌신부님에게서 부탁 하나를 받았다.
성모의 날에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문을 직접 써서 제대 앞에 나가 낭송하라는 지시였다.
나는 마이크를 겁내는 성격은 아니어서 그 무렵 신자들에게 칭찬 좀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좋은 일로만 성당에 다니지 말고 기분 나쁠 때도 천주학을 버리지 않겠다고.
평소에 감기 한 번 앓지 않았던 멀쩡하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쓰러진 기분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그신부님을 이해하자.
왜냐면 신부님들은 결혼생활이라고는 못해봤으므로 충격과 아픔의 혼돈과 그 심층을 조금이라도 알아 챌 도리 같은 게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아마 앞으로도 성당에 자주는 못 다닐 것이다.
축성식이 있었던 그날 밤.
퇴근 길의 나는, 우리 집에 이르는 골목길에 접어들 듯, 한 파장의 강을 건너 온 것 같은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 다른 섬이 된 나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한인성당 축성미사에 참례하여 비로소 나까지 축성 받고 돌아온 것이다.
나의 눈길에는 모든 사물이 친근하고 나의 걸음은 한층 사뿐해지고 있었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나의 의견으로는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용서해 주고 싶다.”
언제 제대로된 고해성사 한 번 보아야겠다.
(제게 적절하지 못했던 사제의 보속을 매우 낯설어 하며 매번 고해성사를 꺼렸던 저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계속 침묵하지 못하고 기어이 글로서 풀어낸 저의 결점도 사(赦)하여 주십시오. 개성이 강해서라고 어여삐 여겨 주시고 부디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