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존경하고
감동이며
아끼고
사랑하는
내 지인님들
이웃 블로거님들
형제들
가족들

올해 내내 관심을 쏟아 주셔서 무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옵소서.
엎드려 절 올립니다.


         맹하린드림




2012년 12월 29일 토요일

나만의 시위(示威)




      맹하린


영주권 혜택(惠澤)이라거나 사면(四面)령이라는 매혹적인 카드가 재선을 앞둔 대통령 크리스티나 정부로부터 제시되었던 몇 년 전, 아르헨티나 땅에는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가 발생하였다.
인접국 이민자들이 꾸역꾸역 날이면 날마다 몰려들었던 것이다.
지독히 보수적이고 개인주의에 철저하고 오만가지 깔끔을 다 끌어다 떨던 아르헨티노들은 현저하게 줄어든 것처럼 보일정도로 느닷없는 일이 느닷없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줄어 들기도 했을 것이다.
나라에 무슨 일만 생기면,  달러 파동이라거나 경제파동만 닥쳐도 쓸만한 인재들과 석학들이 속속 스페인이나 미국 등으로 전격적인 이주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만 갔을까.
난다 달린다 하는 한국인들도 부지런히 재이민을 떠났다.
그렇게나 약삭바르고 탁월한 선택의 달인들인 그들이  과연  빈손으로 떠났을까...
웅얼웅얼 억양  없는 말투로 음험함을 감추고 여기저기 나대는 볼리비아노 세상이 그때 비로소 도래했었다.
손이 거칠다고 오랫동안  회자(膾炙)되어 왔던 페루아노들도 한몫 하는 세상 역시 여러 몫을 시작했다.
한인 타운 주변에서 주로 주말에만 설치던 날치기들이 작금(昨今)에는 우리 교민경제의 메카인 아베쟈네다 지역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밤낮으로 신출귀몰(神出鬼沒) 활동을 펼친다.
5인조 권총강도로 승격한 텃수다.
경찰이 가담했다는 설도 있고, 어떤 이는 비닐로 된 까만 쓰레기 봉투에 하루매상을 들고 가던 중  강도들을 만났는데, 그런데 그들과 실갱이 하는 과정에서 고액권의 현찰들이 길에 좌르르 쏟아지는 놀라운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퇴근길의 한국인들에게서 하루의 매상액인 몇 만 페소에서 몇 십만 페소가 자동차와 함께 강도에 털리는 일이 시작된 지는 거의 일 년이 다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교민들이 대부분 좋은 차를 지녀서인지  보험회사의  위치추적에 의해 자동차는 신속하게 되찾는 추세이긴 하다.
경찰에 신고해도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건 다반사(茶飯事)고, 날이 갈수록 그 빈도가 심해지자, 일부 교민들이 자경단이라는 임시 보안위원회를 결성했다.
어제 그분들을 주축으로한 시위가 아베쟈네다 3800대에 위치한 공원에서 3백여 명의 교민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아르헨티나 사회에선 가진 자들의 시위는 이렇다 할 집중을 못 받는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려는 의도에선지 언제나 없는 자들을 우선으로 하는  편향만을 엿볼 수 있다.
아베쟈네다는 우선적으로 해결을 봐야할 현안들이 서로 옷깃을 붙잡고 함께 몰려 서 있는 모양새다.
치안문제, 좌판쟁이들문제, 주차장문제.
저녁 7시경부터는 도둑들이 기습작전처럼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만 어스름으로  감싸오는 암흑과 같이 음산한 가로등도 없는 아베쟈네다 지역의 거리, 거리들.

부에노스아이레스시장인 마끄리의 부인은 유명브랜드의 옷을 창조하는 여류명사다.
그녀가 거래하는 제품공장엔 볼리비아노를 위시한 인접국 사람들이 골고루 고용되고 있다.
광범위한 시야로 조명하자면 마끄리는 인접국 사람들을 사열(査閱)은 하되, 외면하고 싶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어딘지 모르게 그러한 기미가 자주 드러난다,
아르헨티나 전역에 행해지는 11월 2일이던 위령의 날…….
마끄리 부에노스아이레스시장은 볼리비아노들의 묘지에 초대되어 위령행사에 적극성을 띠고 참석하는 열의를 보였을 정도로 그들 이민자들을 대내외적으로 두둔하는 추세를 보여줘  왔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마끄리를 우리의 한인묘지에 초대해올 능력이 안 된다면 인접국 사람들과의 티격태격을 제압하는 일은 영원히 요원(遙遠)한 희망이 될 것이다.
혹자는 산타페 거리의 만떼로(좌판 쟁이) 문제는 해결이 된 상태인데 왜 우리는 그거 하나 결판을 못 내고 있는가에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충분히 절감하게 되는 얘기다.
3년에 한 번씩 유태인 주인에게 기십만달러의 쟈베(전세금과는 다르게 되돌려 받지 못하는 권리금)에, 매달 기천 달러의 월세까지 지불하는 현실의 그들에겐 복장이 터질만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인 기반을 너무나 승승장구 이룩하던 그들 산타페 거리의 상인들도 아베쟈네다 지역의 한국인들처럼 오랜 세월 고민하고 울분을 식히고 그래 왔었다.
하지만 그들은 좌판쟁이들을 물리치는 가장 첫째 계획으로 일단  매스컴을 먼저 끌어 들였다.
그들은 돈을 제대로 쓸 줄 알았던 것이다.
시위를 계획할 때마다 기사화시키기를 첫째 이슈로 삼았던 산타페 거리의 상인들.
나날이 발전하는 좌판기사에 저절로 시달리고 지쳐 은근슬쩍 사라져 간 산타페 거리의 좌판 쟁이들…….
현재 산타페 거리의 좌판 쟁이 문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말끔히 청산 된 상태다.

우리 인생사는 매사(每事)에 그래왔다.
당장 근절시키기 힘든 일도 결정적인 계기(契機)가 주어지면 단박에는 어렵더라도 어느 날 홀연 해결점을 되찾게 된다.
고육지책(苦肉之策)에만 힘과 지혜를 기울일 게 아니라, 진정한 국면을 꿰뚫어 내야할 시기다.

우리 가게의 간판은 몇 달 동안 상이용사(傷痍勇士) 신세다.
우박에 찢기고 할퀴어 그림과 글씨가 사라진,  불구자와 다름 아니다.
연방세입청과 세상과 나의 신(神)에게 보내는 내 나름의, 나만의 시위다.
잔생이 보배가 되는 세상이 아닌 것 같으면서 못나 보이는 게 자유로운 세상에 나는 살고 있는 중이다.
내 맘이 흔들리면 어느 날 간판을 고치게 될 것이다.
나는 간판 정도 고칠 여유는 된다.


아베쟈네다에서 두 개의 옷 가게를 경영하는 내 지인이 현지인 가정부를 믿고 매상마다 항상 넣는 장농 속에 허술하게 간직하듯 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놓고  점심이나 저녁을 외식으로 채우는 사이, 현지인 가정부가 솔솔 훔쳐간 금액이 무려 6십만 페소가 넘었다고 . 우연히 그 일이 들통나게 되었고 추궁하여 판자촌에 찾아갔더니, 17만 페소는 남아 있고, 그동안 집도 구입했으며,  이웃과 친구에게 이자놀이까지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니 우리 교민이 쉽사리 표적이 안 될 도리라고는 없으리~
(60만 페소...암시세로 10만 달러 상당.)


-초여름-
우와~ 동영상의 말미에 우리 가게  고객이고 상연회고문변호사인 토니님이 나온다. 나는 우리네 1. 5세들의 활약이 너무나 든든해져  ㅎㅎㅎ 웃었다.  이리도 단순하고 장난기 넘쳐서  나는 내 악플러들에게 자주 터진다~~~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폭죽놀이



   맹하린


크리스마스나 제야(除夜)를 더욱 극적이고 특별하게 즐기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마귀를 쫓는 의미에서도  시작된 역사와 전통이 함께 하는 의식(儀式)인 폭죽놀이.
밤 12시면 전국적으로 일제히 폭죽과 폭탄이 터뜨려지기 시작하여 새벽까지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아르헨티나.
이민 30여년 만인 올해의 크리스마스이브엔 처음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보냈다.
정부의 수입품규제정책과 연휴가 그 일에  한 몫 했을 테지만, 불경기의 여파(餘波)라거나 물가상승 역시 여러 몫을 담당했으리라.
그토록 장관이면서 스펙터클한 소음 속에서도 새 나라의 착한 어린이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가족에게서 다른 행성의 별종 취급을 받던 내가 어젯밤엔 여러 번 잠을 뒤척였다.
폭탄소리라는 자장가가 없는 크리스마스이브는 너무나 허전하고 맨송맨송 서먹서먹 허무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을 감은 채 여러 생각 속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새벽을 맞게 된, 주룩주룩 비 내리는 일로 시작되던 2012년 크리스마스…….
아르헨티나여!
내 자장가 돌려 줘요~~~

-초여름-
전주문협 일에 열정을 다하고, 수필집과 시집을 여럿이나 출간한 김용옥 시인에게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나야 잡문이나 쓰면서 세월아 네월아 살고자 작정을 굳힌 지 이미 오래여서 감회가 새롭다면 새롭겠습니다.
너무 아낀다는 일이  너무 크거나 작은  상처로 안긴 모양새가 된  이들에게 치유를 전하는 글이나 가끔 써내고 싶은  접니다.
이 세상 최고의 명의(名醫)는 자기 몸 안에 모시고 산다는 명언처럼, 가족의 상처 역시 가정(家庭)안에 안주해  있겠고, 내 지인들과의 치유 비법 또한  이민공동체 안에 살아 숨쉬고 있음이 정석(定石)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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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옥이어요‏
 2012-12-24

 김 용옥
받는 사람: 맹하린언니
시간이 낯설게 만들어선지
내가 사람을 두려워해선지, 언니 생각을 이따금 하면서도
얼른 편지를 쓰게 되지 않습니다.

우린 대부분 '사는게 바빠서'라며
점점 한 개의 외딴 섬이 되어갑니다.
이게 현대인의, 잘 배우고 잘 산다는 현대인의 특징 같아요.
난, 이 동네에서는 잘 지내는 편입니다.
대부분 문인관계로 이삼십년씩 쌓아온 우정 덕분이지요만.
그리고 요즘엔 오직 글을 쓰고 책을 발간하며
인생을 정리하고 있어요.
언니에겐 아랫사람이 별소릴 한다 싶겠지만요 ㅎㅎㅎ.

사람도 자꾸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어야
잔정이 들고 인연이 질겨진대요.
형제도 멀리 살고 거의 만나는 일 없고 보면 멀어지더라고요.
세상을 이해하는 사상, 사는 방법, 매기는 가치가 다르니까요.
나이들수록 '독립된 인간'이란 걸 깨닫는 거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절대고독을 깊이 생각합니다.
이제야 철이 난 거지요 인생에!

언니.
연말도 그냥 한 마디의 흘러가는 시간으로 보입니다 이젠.
그래도 새해는 좋습니다. '새'가 붙은 여러 단어를 끌고 오니까요.
새 마음 새 다짐, 새 목적 새 관계 새 일을 찾아 나가렵니다.
올해엔 수필집 2권을 냈습니다.
내 일을 미루고 있다가 이제야 묶은 거지요.
내년엔 더 많은 열매를 맺어놓으려 합니다.
여기저기 연재하던 수필들과 제구실 못한 시들을 엮으려고요.
언니, 나, 늙어 죽을 준비를 한답니다. ㅎㅎㅎ

언니 언니 하린 언니.
언니에게, 새해2013년이, 특별한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간격(間隔)과 차이(差異)




       맹하린


나를 언니라며 따르는 외숙 씨가 일요일 오후에 가게로 찾아왔다.
외갓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여인이다.
아베쟈네다 지역에서 의류도매상을 하는 그녀는 자기 소유의 가게에서 세 아들과 함께 장사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다른 직장에서 일한다.
외숙 씨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겪은 사건을 내게 자상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오후 대여섯 시쯤, 길에서 사케오! 그런 외침이  순간적이다 싶게 들리자, 가게마다 일사천리로 셔터를 내리는 소음과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컷과  같았다고 한다.
1천 개를 웃도는 크고 작은 상점들로 조성된 의류도매시장인 것이다.
직접 겪어 낸 건 아니지만, 나로선 상상만 해도 극적(劇的)인 장면이 저절로 떠올랐다.
한국인을 위시한 유태인 볼리비아인 등의 인접국 사람들까지   마구 뒤섞여 길마다 가득 메운 인파…….
마야 달력의 종말은 그렇게 역지개연 되어 흘렀나 보다.

외숙 씨는 세 아들과 하루 종일 함께 장사하는 일이 생각처럼 든든하고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많고 잦은  견해차이와 세대 차이에서 오는 부대낌이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길 쪽에서 사케오! 그런 부르짖음이 터지자, 현지인 고객이 몇 장인가 골라 놓은 옷들에 대해서  외숙 씨 판단으로는 속히 지불 받으면 간단한 것을 아들들은 단체로 결정 짓더라는 거였다.
지금은 옷을 팔 계제가 아니므로 빨리 나가고 다음에 다시 오라고.
고객이 나가기도 전에 외숙 씨는 한국말로 왜 장사를 그런 식으로 하는가고 물었고, 세 아들은 고객이 나간 걸 확인하자마자 합창을 해내는데 미리 짜고 하는 말처럼 거의 앵무새와 같았고 매우 똑 같은 말이었나 보았다.
“엄마는 지금, 이 위급사태 속에서 꼭 그러셔야겠어요?”

나는 문우 K선생과 나눈 얘기를 꺼냈다.
내 오른 발의 발등에 붙여진 찜파스를 발견하고 K선생은 놀라 물었었다.
지난 목요일 정오에, 현지인 식당 Viccico에 가던 길이었다.
“저녁마다 셔터를 내리고 열쇠를 잠글 때, 쇠줄로 매단 자물통도 두 개를 더 달아요. 꽃집에 가져갈 게 뭐 있겠을까 싶겠지만, 일단 문을 부수면 손해고, 그  일을 방지하려면 그래줘야 안심이거든요. 그런데 셔터 문을 닫을 때, 가족은 약간의 틈이 보여도 상관을 안 하는 성격이죠. 잔소리를 하지 않는 나와,  잔소리를 전혀 안 좋아 하는 가족을 위해서 나 스스로 셔터를 내리는 방법이 차라리 편하다고 단정하게 되었고, 셔터 문이 꽉 잠기도록 나는 내 오른 발로 쇠문을 두어 번 밀거나 차고 그러죠. 그 과정에서 생긴 아픔이랍니다. 거의 다 나았어요. 요즘은 왼발로 밀고 차요.”
하하하 웃던 K선생은 본인의 고충을 답으로 제시했다.
T de Alvear 거리에 위치한 그녀의 아파트에서 그녀의 아들 관우는 쓰레기를 버리는 부엌문을, 이 어수선한 시국에 열쇠로 안 잠그는 습관만을 고수하고 있단다.
K선생이 문만 닫는 일로는 약하니까 열쇠까지 잠그라고 해도 밖에서는 손잡이가 없는 문인데 구태여 필요 없는 염려는 피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고 들은 척도 안 한다고 했다.
결국,  K선생이 일일이 잠그는 수고를 실행할 수밖에 없다고.

외숙 씨는 세대차이와 견해 차이에 만족치 못하고 나라차이에 대한 설명까지 아끼지 않고 돌아갔다.
사케오!
그 외침으로 세상이 온통 아득해지도록 소란스러울 때, 외숙 씨의 옆 가게에서 장사하는 볼리비아인은 셔터를 다 내리지 않고 반만 내리더니, 덜 겁내고 느릿하게 다급한 고객들을 끌어 모아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더라는...
원래 대목이란 끝 무렵이 압권인데, 그 볼리비아인 가게는 고객이란 고객은 모두 도맡아 대목을 잔뜩 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종(某種)의 시나리오에 의한 약탈사고의 뒤끝이라선지 일 년에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를 눈앞에 둔 어제와  오늘,  사케오 문제만은  거의 잠잠해진 국면(局面)에 접어들었다고 보인다.
문명이 고도의 발전을 거듭했고, 인구밀도 역시 치밀해질 대로 치밀해졌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곡진(曲盡)함 또한 극명(克明)한 간격과 차이를 보이는 현대사회에 우리는 실리듯 흐르고 있다.
마야달력의 종말 일을 아르헨티나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나는 그럭저럭 잘 견뎌냈다.
지진과 쓰나미와 전쟁 보다는 가벼운 부대낌이었다.
게으르고 단순명료 하며 휴식을 휴식답게 휴식할 줄도 아는 나지만, 글과 일과 사건을 만나기만 하면 전광석화처럼 머리가 회전하는 사람이 나다.
나는 이토록 드라마처럼  살고 있고, 사는 게 더할나위 없이 북새통 같을 때가 많지만 감사할 몫은 결코 잊지 않는 편이다.
마치 감사할 순간을 잊으면 다시는 감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새삼 놀라 버리는 사람처럼.

마음이 평화롭고 기쁨 가득한 성탄~~~
새해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는 날들 많으시기를 내가 아는 모든 이를 위해 기원 하옵나니!!!





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약탈자들




         맹하린


일부 지방에 홍수가 났고
모쟈노노총위원장의 지시에 의한 소요사태라고도 하고
정부나 크리스티나 대통령에 대한 반발심이 원인이라고도 하는 약탈사태...
이번 사태의 발화점이라고 볼 수 있는 도시 바릴로체에선 크리스마스 이전에 큰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소문이 지난 일주일 간에 걸쳐 알게 모르게 무성했었다고 한다.
연방정부는 사회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의도에서 국경수비대 400명을 급파했다.
파견된 경찰들에겐 "사태는 진정시키고, 진압은 피하라"는 지도층의 지시가 내려진 가운데 출동한 경찰들이 지켜보는 2시간 가까운  와중에도 약탈은 계속 되었다고  일간지 클라린은 보도했다.

전투경찰이 투입된 후에야 사태의 국면이 진정됬다고 전하며 오후 1시경에는 투석전을 벌이는 주민과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는 경찰 사이에 극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는 기사도 또 다른 긴장감에 한몫을 했다.
오랜 가뭄 끝의 들불처럼 번진 이번 소동으로 아르헨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 져 있다.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슈퍼마켓을 위시한 58개의 대소형 식료품상이 도시의 여기저기서 털리는 불상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쇠뭉치에 머리를 맞은 경찰 1인이 중상(경상 4명)을 입었으며, 2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중경상자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이번 사태로 인하여  털린 상점은  292이며,   500여 영업장이 파손되었고, 약탈자들 5백여명이 연행된 상태라고도  뉴스는 전한다.
이번 약탈사태는 빈곤, 마약, 실업 등이 빚어낸 극도의 경제악화가 주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측들도  있다.
교회지도자나 현지 언론은 "사회불만이 고조되는 중이다"고  정부당국에 누차 경고한 바 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연말이고 졸업시즌이라서 대목인지 소목인지를 맞고 있어, 이미 써 놓은 글도 포스팅을 못하고 있는 처지지만 우선 짧게나마 해당되는 동영상을  올린다.
그 어떤 일에도 부화뇌동(附和雷同)을  안 하는 성격이고,  무더위에도  선풍기나 켠 채 일하는 체질과  주관을 지녔지만 마음은 몹시도 시리고 추운 여름이다.

-초여름-
링크 된 동영상의수입품회사는 1백만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값비싼 향수등을 약탈해 갔다는 해설입니다.
먹을 게 없어서 훔친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telefe링크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우리는 어떤 노인이 될까

[삶과 문화/12월 11일]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지난 주 지식사회의 최고 화제의 인물은 한 늙은 시인이었다. 그는 상당히 비논리적인 이유로 여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직후, 자신의 옛 동지이며 존경 받는 '원로' 한 사람을 마구 공격하였다. 이 공격 또한 논리의 범위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어 사람들을 매우 민망하게 만들었다.

혹자들은 그 시인의 변모를 변절이나 전향 같은 개념으로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변절은 지극히 봉건적인 개념이고, 전향은 존재의 실존적 위기국면에서 행해지는 정치적ㆍ사상적 선택이니, 해당 사항 없는 듯하다. 전두엽 뇌세포의 경화와 호르몬 기능의 변화와 불균형으로 인해, 판단력이 전반적으로 약해지고 언어가 빈곤해진다. 반복된 외로움은 높은 경지의 수양과 고고(孤高) 대신, 오히려 존재를 독단과 무성찰의 상태로 내몬다. 이는 일반적인 노화의 과정일지 모른다. 그런데 타인들을 모두 몽매자로 몰고, 시적인 언어는커녕 극우들이나 쓰는 거친 비유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시인의 경우는 평균을 넘는 수준인 것으로 사료된다. 세월은, 한때 범접할 수 없이 뛰어난 언어와 불굴의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조차, 무지하고 평범한 노인네의 그것과 방불하게 만든 것이다. 어제 또다른 자리에서도 시인이 화제에 올랐다. 처음의 충격과는 달리 며칠 사이에 시인은 웃음거리나 농담의 소재가 되어 있었다. 시인 개인과 그가 속한 세대 전체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어느 나이쯤 가장 현명하고 균형감 있는 존재로 되는가. 나이 들고도 윤리적이면서 지혜로운 존재일 수 있는 건 언제까진가. 독일의 인지학자 우르술라 스타우딩거는, 인간의 지혜는 20대 중반 이후에는 절로 증가하지 않으며, 끝없이 새로운 것과 접촉하는 소통력과 개방적 학습능력을 갖고 있어야 늙어도 '지혜'가 증대될 수 있다고 했다. 즉 늙음과 지혜는 어느 시점 이상이 되면 서로 역함수관계에 놓인다는 뜻이겠다. 노화와 우경화의 사회문화적 관계에 대해서도 실로 다대한 논의와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의학ㆍ정치학ㆍ문화학ㆍ심리학자가 참여하는 학제간 탐구가 필요하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퇴락하는 것은 육신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숙명이다. 대개의 인간은 지적ㆍ정신적으로도 쇠퇴를 거듭하다 결국 사망한다. 늙어 몰락하다 죽게 인간을 설계한 신을 원망하고 싶다. 시인처럼 한때 아름다웠던 존재의 슬픈 노쇠와 전락은 '잘 늙기'야말로 노령화사회의 최대ㆍ최고의 개인적ㆍ사회적 과제임을 역설해준다. 노추는 실로 남의 일이 아니다.

잘 늙기 위해 우선 개인적 차원의 과제가 있다. 사실 노추라는 단어는 너무나 두렵고 선명한 개념이지 않은가. 이 개념에 비춰 '자기'라는 모호한 현상을 쉼 없이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노추의 전단계에는 반드시 '꼰대' 단계가 놓여 있을 것이다. 노추와 치명적 소외 이전에, 예방적 차원에서 '꼰대됨'에 대해 성찰해야겠다. 그런데 어느 수준 이상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언행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업데이트할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조력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친구가 아닌, 다른 젠더와 세대의 인간들에게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에게 의존하다간 극우 노인단체 회원들처럼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사회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부친의 말년을 보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공상 비슷한 것을 했다. 특히 남자 노인들을 위한 재사회화 및 생존 능력 강화를 위한 상설 교육 기관과 정신적 복지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 1년에 2~3개월씩 입소해서 정치ㆍ사회ㆍ문화ㆍ경제 뿐 아니라 요리ㆍ빨래 등의 가사, 그리고 의사소통 및 감정표현 능력 등을 다시 교육받고 훈련하는 것이다. 물론 젠더와 가족관계에 관한 내용과 정기적으로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것도 프로그램에 필수이다. 그래야 거의 10%가 넘는 노인 자살도 줄이고 한국 민주주의도 공고해질듯 하다. 뭐든 집단으로 뭉치길 잘하는 386세대가 노인이 되면 이 공상은 현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글쟁이라는 사실만으로




        맹하린


지난 목요일 정오.
아베 지역의 산 니콜라스 거리에 있는 초밥왕에서 문협고문들과 점심을 먹었다.
모듬초밥과 튀김과 우동이었는데 적당한 양이라서 산뜻하면서도  좋았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식사마다 가볍고 상쾌하게 끝마치는 경향이 있다.
배부르게 먹는 일을 멀리한다는 얘기다.

갈 때는 주룩주룩 내렸지만, 돌아 올 때는 억수로 쏟아지던 비의 질주가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비 내리는 일도 유행이 따르는 것일까.
최근 들어 한  달 동안에 내릴  강우량이 하루에 다 채워졌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된다.
얼마나 웃고 떠들었는지 길게 붙여 놓은 원목식탁들은 묵묵부답 점잔을 피우는데, 어찌하여 그릇들마다  끼리끼리 부딪치고 들썩이는 느낌 쾌청만발이었다.

지방도시 뚜꾸만으로 이사간지 4개월된 H선생은 의류소매상을 하면서 틈틈이  수영과 서반아어공부도  새로 시작했노라고  한다.

같이 레미스를 타고 갈 때,  손수 그린 수묵화 부채를  우아하게 부치며 L회장이 말을 꺼냈다.
나 역시 해마다 여름이면 그녀에게서  부채를 선물로 받았다고 보는데,  막상 들고 나가면 누구에게 주기를 선호하고 그런다.
더위를 잘 안 타는 데다, 중노동자인 나와 부채는 어딘지 모르게 잘 안 어울리는 느낌이라서다.
그런데 L회장이 그만,  그 우아함을 레미스에 놓고 내렸다.
인생 참 흥미롭다.
어떤 사람은 그처럼 아끼는 우아함을 본인도 모르는 사이 말없이 놓고 다닌다.
놓고 내린 후에라야 아차 싶은지 저만큼 가는 차를 정작 쫒아갈 기세이기도 하다.
그 우아함은 운 좋으면 돌아 올 것이고, 혹은 운이 닿지 못해 안 돌아 올 수도 있을 것이다.

L회장의 아들이 그러더라고 했다.
부모세대는 저 사람이 나 없으면 어찌 살아갈까, 그런 책임감으로 건강에 더욱 유의하며 살아가지만, 자식세대는 상대가 없으면 못산다는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다.
기성세대의 배려가 일종의 열등감에서 생긴 소산(所産)이라면,  젊은 세대의 가치관은 어쩌면 우월감의 소산(所産)이 아닐까 하는 의미로 내겐 거의 유머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K선생이 한국으로 돌아 가게 되는 3개월 안에 우리는 목요일 정오면  가끔씩  만나서 점심을 나누기로 중지(衆志)를 모았다.
K선생을 핑계로 우리가 우리를 돌아가며 대접하게  될 것이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연상시키는 C선생의 장남께서 식사 중간쯤  중후하게 생긴 문처럼 느닷없이  문쪽에 나타났는데,  점심 값을 살며시 치르고 갔다하여 우리는 그점도 즐겨 웃어댔다.
지난 목요일 정오에 C선생이 Clapton에서 이미 한 턱을  냈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식사 하러 들렀다가, 용케도 아버지의 탕탕한 웃음을 옆 홀에서 음악의 리듬을 선별하듯 캐냈지 않나 싶다.

해 묵은 정.
모두 20년 이상 문협의 밥을 다달이 함께 나눴던 분들이다.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자주 스미듯 들었을 것이다.

나는 본국이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선 장난스레 예견(豫見)정도는 논한다.  하지만 선거인 등록을 해본 적도 없고, 투표조차  결단코 안하는 주의(主義)다.
나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열정을 다바쳐 줄까지 서가며 해낼 것이고, 내 관심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당선이 되는 일인 것이다.
헷갈린다.
며칠 전만 해도 근엄한 분이 유리한 듯 보이더니, 공동 어쩌고가 변수로 부각되는 판국이다.
자고로 말이 청산유수라서,  말이라는 칼날  덕택에  당선 되는 통령님은 전례에 없었지 싶다.
아무리 그래도 나로선 어떤 격식이나 모종(某種)의 제도나 틀에 박힌 정책이 한참이나  오래 전부터 거북스럽고 성가시다.
글쟁이는 다른 사람이 꼭 하는 일을 주관을 같은 걸 지키거나 부리며 안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일이 다가오면 일을 하고
글이 손에 잡히면 글을 쓰고
기쁨이 안겨 오면 기쁨과 지내고
그리고 질타가 내게 흙탕물처럼 튕겨 오면 나는 의연히 옷자락 좀 서너 번 털어 내거나 빗물에 흘러 보내기에 초연해 왔을 것이다.
내가 아직 살아 있고
내가 여전히 자유를 추구(追求)하면서
나 항상 첨예로운 존재들과의 대립이나 갈등 속에서 지낼 경우 또한  아주 드물게 있어 왔고...

그런 가운데 더욱 오롯하고 느긋할 수 있는 경지를 조금이나마 쟁취하고 여유로울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내가 언제라도 지향하게 되는 세상을 향한 겸애(兼愛)이며 선(善)인 것.
사람은 누가 비난하고 비판해도 본질을 향한 소중함을 놓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순리(順理)의 도(道)를 터득하는 길이다.
약간만 생각을 바꿔도 답은  금방 나오게 된다.
누가 나를 폄훼 한다고 해서  내 특유의 손톱만큼 정도인  미미한 고귀함이라거나,  너무나 잔물결 닮은 내  고요로움의  그 어디가 그토록 훼손된다는 얘기인가  말이다.

매사에 하하 웃고
비 오면 비를 받아 들이고
언제 어디서나 자문자답(自問自答)을 잊고 싶지는 않다.
내가 지금 잘 흐르고 있는가.
도도히 흐르는 내 앞의 강이 시나브로 맑고 유장(悠長)히 흐르지만, 더러는 굴곡으로 뒤채며 흐를지라도 나는 글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는 게 거의 축복이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최상의 섭리이며 무한대의 문학이라는 걸 새록새록 깨닫게도 된다.
살아감의 유열(愉悅)은 절대로 거창한 것만은 아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 보며
나 오늘도 근심걱정을 가까이 두며 살아오지 않았을  지금까지의 일상을  절로 감사하게 된다.
고즈넉함이 폭우(暴雨)처럼 흐르고 쏟아지는 날이다.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결론은 하나, 행복하게 살자

 ‘행복 디자이너’ -최윤희-




가장 비싼 강사, 가장 바쁜 강사, 가장 독특한 강사….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지만 결국은 한 가지다. 행복을 전하는 강사, 행복 디자이너.
‘식식’거리는 압력밥솥 소리에 놀라 도망갈 만큼 연약한 전업주부, 남편의 사업 실패로 도망치듯 지방으로 내려가 살면서 우울증세까지 엄습해오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가족 동반 자살 대신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최윤희 씨(61)는 압력밥솥의 시끄러운 소음도 식사시간을 알려주는 고마운 노랫소리로 바꿔 파악할 만큼 딴 사람이 됐다. 청와대 비서관, 흉악범, 룸살롱 여 종업원, 재벌 총수, 장애인 등 그를 찾는 사람은 대한민국 각지에 길게 늘어서 있다. 그들이 최씨를 찾는 이유도 한 가지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옛날에 애꾸눈 임금님이 살았어요. 임금님은 죽기 전에 멋있는 초상화를 남기고 싶었죠. 전국에 있는 유명한 화가를 다 불러서 그렸는데 아부를 잘 하는 화가는 눈을 성하게 그리고 정직한 화가는 애꾸눈 그대로 그렸어요. 임금은 눈이 성한 그림은 보기 좋았지만 가짜라서 던져 버렸고, 정직한 화가가 그린 그림은 보기가 싫어 던지면서 불같이 화를 냈죠. 그 때 한 사람이 자기가 그려보겠다고 했답니다. 임금님은 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보고 ‘바로 이거야’라고 소리쳤어요. 그 그림은 성한 눈이 있는 방향의 옆모습을 그린 것이었어요. 인생도 이와 똑같아요. 어느 순간에나 희망과 절망, 불행과 행복,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어요. 나도 이 사람처럼 최대한 좋은 쪽을 보고 싶어요. 그래서 저를 뽑아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고 설령 저를 떨어뜨린다 해도 귀사의 번영을 빌겠습니다.”
이 자기소개서로 그는 서른여덟 살 나이에 대기업 신입사원이자 카피라이터가 됐다. ‘특기-멍하니 하늘 쳐다보기, 취미-인상 쓰는 사람 간지럼 태우기, 희망 급여-물질은 완전 초월, 맘대로 주세요.’ 고용주가 보기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어째 요즘 이런 이력서를 썼다가는 ‘장난하나’란 생각에 똑 떨어질 것도 같다만, 당시 그의 소개서는(더군다나 창의력을 요하는 카피라이터였기에) 사장님이 무릎을 ‘탁’ 칠만큼 파격적이었다.
행운은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 못한 데서 찾아오는 것이라지만 꿈같은 일이었다. 물론 한 편의 드라마처럼 자기소개서가 우연히 빛을 발했다고, 그가 회사에 입성하기까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장님의 선택에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38살, 경력 전무한 주부 신입사원이라니. 밥줄 걸고 사장에게 삿대질하며 최씨의 입사에 항의하는 직원도 있었단다.
그의 신입사원 생활은 굳이 듣지 않아도 ‘비디오’다. ‘제 발로 나가게 해 주겠다’는 각오로 그를 대하는 상사들의 집단 따돌림과 무시는 종종 눈물이라는 결정체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했다면 오늘의 영화 같은 인생극장은 만들어지지 않았으리라.
견뎠다. 죽어도 평범한 건 싫다던 천성 덕분에 ‘히히 낙락’ 상사들의 괴롭힘을 잘도 받아쳤다. 그의 얘기에 한참 빠져들다 보면 ‘더 약이 오른 상사들도 결국엔 미운 신입사원에게 녹아내리는 것 말고 방법이 없었겠네’라는 생각이 절로 엄습할 만큼 묘한 매력을 풍긴다.
화초 대신 약초임을 증명하다
카피라이터의 ‘ㅋ’도 모르는데 업무를 배우기는커녕 매번 해야 하는 일이라곤 상사의 각종 공과금 대신 납부하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람 전화 받기, 커피 뽑기가 전부였다. 하지만 특유의 재치와 장난끼로 먼 길까지 공과금을 납부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덕분에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그였다. 다짜고짜 반말로 ‘당장 부장을 바꾸라’는 전화 속 고객의 호통엔 “고객님, 제가 하늘처럼 존경하는 부장님께 그런 타락한 말을 어찌 전할 수 있겠사옵니까”라고 유머러스하게 받아치며 무너뜨렸다.
험난한 인적 네트워킹은 타고난 성격으로 극복했다지만 실력은? 별 도리가 없었다. 위궤양을 감수하며 밤새 공부하는 수밖에.
“처음 회의에 참석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었어요. ‘PT’라는 둥, ‘티저’라는 둥 광고 전문용어가 난무하는데 정말 외계인이 된 것 같더라고요. 할 수 없이 광고 책을 ‘이~만큼’ 쌓아두고 이면지에 무작정 베껴 쓰면서 공부했죠.”
‘예쁘지 않은 나이 많은 아줌마.’ 화초가 아니라는 이유로 설움을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결국 사내에는 화초가 아닌 약초가 필요함을 직접 증명해 보이며 그는 인생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생 한번 안 해보고, 모든 것이 맘먹은 대로 된다면 뺀질뺀질 인간미가 없다. 고통도 이겨내고 역경도 뛰어넘어야 향기가 나는 법. 아름다운 향수는 샤워 한 번에 사라지지만 발효된 인간의 향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때 거지가 되지 않고 늘 순탄대로기만 했다면 지금처럼 책을 쓰고, 사람들 앞에 나서 강의를 하는 일은 상상조차 못했을 터. 그는 스스로 ‘오늘’의 뿌리를 절망에서 찾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역전시킬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안 예쁘고, 나이 많은 아줌마의 희망 스위치
라디오 생방송 중 개그맨 김영철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요즘처럼 어려운 때에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야겠죠?” 최씨는 툭 내던지며 답했다. “요즘은 너무 힘들어서 긍정 가지곤 안 돼. 초를 한 방울 떨어뜨려서 ‘초’ 긍정으로 살아야해.”
김씨가 우울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물었다. “선생님, 저는 입이 튀어나와서 잘 안 다물어져요. 늘 먼지가 입으로 들어와서 불편해 죽겠어요.” 역시 핀잔 섞인 최씨의 대답에 결국 대화는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냥 마셔. 뭐가 약이 될지 몰라.”
이게 바로 ‘초’ 긍정의 힘일까? 하루하루 지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그는 이렇게 참아낸다고 했다.
“누군가가 묻더군요. 나는 24시간 행복해 보인다고. 아니, 내가 무슨 정신병자도 아니고 어떻게 늘 행복하겠어요. 정말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밤 12시까지 방송 녹화하고, 강연하고 몸과 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이제 파출부로도 안 써주는 나 같은 아줌마를 여기저기서 찾아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그가 전국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때론 마음속의 불이 꺼져버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재빨리 희망의 스위치를 올려라. 인생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긴다면 분명 숨겨진 힘이 솟아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 같지만 유독 사람들이 그를 찾는 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경험담이기 때문이다. 본인을 보며 ‘그래, 저 사람도 이렇게 긍정적으로 잘 사는데, 저기에 비하면 난 얼마든지 할 수 있지’라는 자신감이 절로 생기길 바란다고.

고통을 무서워 않으면 숨겨진 힘들이 솟아날 거야
그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영화관에서 산다. 이른바 ‘망한’ 영화까지 빼놓지 않고 챙겨 본단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타인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니까. 책도 밥보다 맛있단다. 꿀꺽꿀꺽 글을 삼키다 보면 때론 문학소녀도 됐다가, 악역과 싸우는 정의사도도 됐다가, 훌쩍훌쩍 눈물 콧물 닦느라 하던 일을 잊기도 한다.





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축복은...




         맹하린


목요일 밤에 누군가 서너 번 가게로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똑 같은 전화번호가 여럿이나 입력되어 있었다.
가게의 셔터를 올리는 시간에야 진위를 파악(把握)하게 되었다.
본국에 환국(還國)했던 문우 k여사가 여행 삼아 아르헨티나를  재방문 했다는 사실을 알려 온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쯤 여행겸 다니러  오는 문우다.
아들 둘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게 가장 첫째가는 이유이며 동기(動機)가 되었을  것이다.
심성이 곱다랗고,  무슨 일에건 가장 먼저 앞장 서는  S여사가 한 턱 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일사천리로 고문님들과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토요일엔 시간을 못 내는 나지만, 한국에서 왔다는 점에 약해져서 모처럼 짬을 냈다.
이미 예약된 주문들은 아침부터 미리 해낸 뒤 그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K여사는 아르헨티나를 방문 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꼭 선물을 마련해 온다.
작년엔 어깨에 두르는 숄이었고, 올해는 조립식 우산이다.
S여사는 청색 체크무늬.
나는 날씬한 아가씨가 네쌍둥이처럼 그려진 화사하면서도 고급스런 연분홍빛 우산이다.

K여사가 현지인 음식을 선호해서 해마다 우린 Vicco나 Clapton을 주로 이용한다.
아르헨티나에 제대로 맛을 내는 한국음식점이 없다는 연유에서도 더 그러하다.
서로 다투듯 이쪽저쪽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식당과 날짜를 정한다.
치안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 누구나 정오 무렵을 주장하고 있었다.
우아하게 음식을 나누며 두서너 시간, 본국의 대선이라거나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이슈를 안 보이는 페치카에 독설처럼 툭툭 내던져 우리는 화제의 불꽃을 사르고 살랐다.
모두들 어느 정도의 경제적 궤도에 이르렀고,  나름대로의 사회적 성공 역시 거뒀다고 여겨진다.
덜 소유하는 쪽으로의 성공을 거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 보이지만, 그점  전혀 괘념치 않는다.
그들의 성공 사이를 비집고 나의 무소유의 씨앗이 싹터 오른 셈이니까.
성공 사이에서도 그들은 일종의 문제에 부딪치듯 존립했을 것이고,  나의 고달픔 사이에서도 기쁨은 샘솟았을 터이므로,
분명한 사실은,  나중에 이 세상 소풍을 끝낼 즈음...
많이 두고 가서,  하나도 못 가져가서 억울할 일은 없을 테니 나로선 그 점에서  특별히 거뜬하고 홀가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뒤늦게 맞은 중노동에 아낌없는 열정을 쏟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우리 모두 겪을 만큼 겪은 사람들이라서, 성공한 사람들 속에 껴 있는 나 역시 일종의 성공한 사람이라고 내가 나에게 토닥임과 같은 격려를 베풀게 된다.
문우들, 특히 고문들 한 분 한 분을 더욱 존중하고 싶다.

해마다 한 달 정도 머물었지만, 이번엔 3개월을 계획했다는 K여사를 위해,  가까운 곳으로 소풍이라도 다녀오자고 문협회장에게 제안할 생각이다.
나는 최근의 단순 소박한 내 생의 편린들을 자주 감사하게 여기는 중이다.

어제 오후엔 산책을 두어 번 더했다.
그럴 때의 나는 찬찬히 주변을 구경하며 관광객과 같은 상념을 품고 거닌다.
나무마다 잎새들마다 푸르름이 출렁였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원로 문우들과 세론(世論)을 펼칠 수 있고, 자연(自然)을 지켜보는 순간이 있어 축복(祝福)이라는 감명을 새록새록  깨닫고 있다.
축복(祝福)은 그렇다.
어느 정도 버리고 단순(單純)해져야 진정성을 되찾는다.
나 이미 축복(祝福) 속에 머물고 있다.




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담쟁이처럼




      맹하린


지난 주말의 사흘을 무척 분주하게 보내고,  오늘은 아르헨티나 주요 노총들이 주도하는 총체적 파업이  실행되는 날이라서 그럭저럭  한가하게  보내고 있다.

토요일 오후 7시 30분에 치러질 결혼식 꽃장식이 하나만 잡혀 있어도 빠듯한 편인데, 신성교회와 시온교회 두 군데나 담당하게 됐었다.
그날 우리 교민사회에는 세 곳이나 결혼식이 있었다.
천주교 영세식도 같은 시간대에 겹쳐 있어 준비와 장식과 정리과정으로 잠자는 시간 빼고 3일 동안 1분도 쉴 새 없이 일했다.
친구들에 대해선 주말이 더 바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최대한으로 존중해주며 가족과 둘이서만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웨딩 샵에서 치장 중이던 신부에게 전달되어야 할 부케를  J교회의 신부에게 전하게 되는 배달사고가 발생했다.
그럴 경우 나는 배달을 해준 레미스기사에게 전혀 내색을 안 한다.
모든 걸 내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신부의 이름만 적었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걸 예상하고 다른 신랑신부처럼 친구나 누구를 보내 달라고,  나는 바쁠 때면 넋이 나갈 지경이라며 누누히 부탁했건만 참 알뜰하고 편안하고 느긋하게  나를 부려 먹는 우리의 2세들.
5시에 보낸다는 부케가 어찌하여 아직도 도착되지 않았다고,  결혼식이 임박한 시간인 7시 전쯤에야 연락을 받게 된 나는 레미스를 타고,  차안에서 다른 부케를 만들며 식장을 향해 찾아가는 일까지 단행하게 되었다.
가게의 매장엔 영세를 축하 하려고, 주문도 없이 줄을 선 대여섯 분의 어르신 교우들...
나는 단지 시간을 단축하면서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부케를  전달하기 위해 가족에게만 맡기고  레미스를 불러야 했었다.

아리엘이라는 30대이고  머리까지  긴 현지인 기사는 바쁘고 정신이 없는 내게 가는 도중 내내 말을 시켰다.
현지인 신혼차가 리본을 단채 두 대나 지나갈 때마다 내게 소리치며 감탄 역시 아끼지 않았다.
“리본을 단 결혼  차 또 지나가요!”
그럴 때 나는 조용히 좀 하라고 잔소리 하는 성격은 아니다.
어떤 면으로는 내게 숨통을 좀 트이게 하려는 작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매사에 이런 식이다.
뭐든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는 긍정쟁이임을 자인한다.
거기까진 봐주겠는데, 내게 라몬 팔콘 3200대를 가자면 어느 길을 이용해야 제대로 가느냐는 질문까지 빗발쳤다.
(아이고 , 세상에나! 누가 운전기사인지 나도 나를 모르겠네!)
“우선 후안 베  알베르디 거리로 접어드세요.  라몬 팔콘 거리는  일방통행으로 오는 길이고. 후안 베  알베르디는 역시 일방통행이면서 가는 길이지만 번호가 일괄된 편이니까요.”
“아뇨, 내 얘기는 그러니까 후안 베 알베르디에서 어느 길로 돌아야 라몬 팔콘 3200대에 접어들 수 있느냐는 거죠.”
“한 두 블록 더 간들 어때서요? 그 정도의 격차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미리 겁내는 건가요?”
그는 그제야 내비게이션을 튼다.
대다수의 레미스 기사들은 내비게이션을 어쩌다 사용하는 경향이 많다.
음악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일까.

신성교회에 닿아 3층에 위치한 예배 실에 서둘러 오르려고 나는 어땠는가.
길고 커다랗던  엘리베이터를 나보다 느릴 거라고  순간적으로 불신하며,  새하얗게 반짝이던 대리석 계단마다 조리신발로 탕탕대며 뛰어 오르던 나의 슬리퍼 소리가 교회전체를 강압적으로 울려대던  느낌이 유난히 강했었다.
내려올 땐 죄인처럼 살금살금 고개 숙인 채 내려오던 내 모습이 새삼 그림으로 뒤늦게 떠올라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다. 지금의 나는...
하물며 양복들을 좍 빼입고 1층의 현관에 서서, 합창으로 나의 그런 모습을 웃어 주던 청첩인들의 약간 높던 웃음소리가 이제서야 놀림과 같이 들리고 있음에랴.

하객들이 도착하기 전에 가족들과 사진을 찍는 중이던 신랑신부에게 부토니아와 부케를 전하며 환하게 불이 켜진 예배당 안의 꽃길과 강대상 주위에 장식된 꽃들을 새삼 둘러보던 나의 내면에도 환하게 불이 켜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도 같다.

다행이다.
그토록 열정을 바쳐 일하고도 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마다, 몰라보게 거뜬한가 하면 멀쩡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셈이다.
타고난 노동자의 신세에 매우 걸맞는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지친 넝쿨이 아니라 강한 생명력으로 의지를 펼치는 담쟁이처럼...... .

최근 아르헨티나 인터넷 미디어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膾炙)되던 Paro General(총체적 파업), 오늘은 바로 그날이다.
지난 1년간 소비와 투자가 최악인 사회현상 속에서 나는 지독하게 바쁘거나 마냥 한가한 날들을 마치 하루처럼 몰아서 겪어내고 있었다.
내게 일주일은 하루와 같은 개념(槪念)으로 흐르게 된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이다.

기본적인 개선을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생활조건을 지금이라도 보상해 달라는 기치를  내 걸며, 아르헨티나노총이나 지식인들은  한 달이 멀다며 시위를 벌이고 파업을  단행하고 있다.
흡사 전염병의 만연처럼 강도들의 활약 또한 극성이 지나치며 이미 도를 넘은 수준이다.
생활조건의 개선은 극단주의자들과 시위단체를 근절시키기에는 너무 벅찬 과제처럼 보이는 현실이다.
민주주의 질서가 추구하는 바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그러한 염원이 폭력이나 시위를 지원하는 노조단체들의 논리적 토대(土臺)를 축소(縮小)시키는 사회로 전환되기를 바란다.
또한 그러한 모티브들이 결집되어  선량한 사회를  구축하는 계기(契機)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오늘을 맞고 보내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여러 면을 포착하면서 시대의 격변에 빈틈없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다지 북새통을 만들며 살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현 시대의 우리 인간은!







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도도하기는 커녕



    맹하린


두어 달 전의 어느 새벽녘.
아베쟈네다 지역으로  일찍어니  꽃배달을 보내야 해서 6시 30분경에 집을 나섰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어떤 상점 앞에 경찰 차 3대가 경고등을 번쩍이며 주차해 있었고,  경찰들은 거적이 덮인 피해자의 현장 주위를 꼼꼼하게 조사 중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된 건지 태연자약 그 건너편을 잘도 지나오게 된다.
액션영화를 너무 많이 보아낸 결과지 싶다.

한국식당 앞 근처에 상주하는 노숙자 중의 한 청년이 쪼르르 달려 왔다.
보호 차원에서 나를 가게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얘기다.
무슨 작전이 있었다고 한다.
잠바의 주머니에서 동전보따리를 꺼내 자랑처럼 보여 주었다.
"나보다 동전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있군요."
나는 그렇게 감탄을 나타내 주었다.
가게 앞에서 그에게 약간의 적선을 건넸다.
웹서핑하며 알았다.
마약을 판매하는 현지인 청년 하나가 Flores 지역에서 총격을 받았으며, 보복살인을 당했다는 기사였다.

사는 게 팍팍한 것 같은 기분이 몰려오면 서재를 헤매며 읽을 만한 책이나 시집을 고른다.
그리고 쓰기도 한다.
사는 일은 자박자박이지만, 글만은 도도하게 걷고 싶었었다.
그러나 도도하긴 커녕 적나라해졌을라나.

전면이 유리로 된 서재에서
글이나 쓰다가
음악이나 듣다가
화초나 가꾸면서
나 그처럼 근사하게 살고자 했는데
이리도 현장감 넘치는 시대를 걷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유고 시집에서 마음 절절한 시 하나를  읽고
하물며 나는 아침 내내 기분이 땅속으로 스며 드는 느낌이다.


일 잘하는 사내

-박경리-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초여름-

키르츠네르 크리스티나 대통령의 개인 자산이 몇 년 전에 7백만 페소였는데
현재는  8천 9백만 페소로 불어 났다는 현지 경제학자들의 논평입니다.
3선이 있기까지의 정치변동을 염려하는 국민들의 우려는,  생활비조차 최대한으로 안쓰기 작전을 펼치는 와중입니다.
장사는 그럭저럭 안 되진 않지만, 그동안 인플레이션의 뛰어오름이   너무 급격했었나 봅니다.
지폐의 가치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 없어졌음을  날로 실감하게 됩니다.


2012년 11월 10일 토요일

성찰목록




    맹하린


지난 일요일 오후엔 친구 수산나가 다녀갔다.
나는 미사를 드린 지 몇 달이나 지난 처지라서 주로 성당 얘기에 대화의 초점을 맞췄다.
바람직하고 좋은 얘기들만 주고받았었다고 본다.
마음에 가라 앉아 있던 세월의 앙금도 각각 따로따로 휘저어 어딘가로 함께 흘러 보내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날의 도움이 너무도 고마웠다는 표시의, 조촐한 선물은  살몃 그녀의 가방에 넣어줬다.
내가 전도사 가방이라고 놀리는 검고 칙칙하며 결코 사치스럽지 않은 가방이다.

그녀는 귀가할 때마다 우리 가게 앞에서 버스를 탄다.
수산나의 집은 자가용이 세 대지만 그녀는 병원에 검사하러 다닐 때조차 버스로 다닌다.
나는 가끔 그녀의 요청에 의해 동전을 바꿔주는데,  그날은 그녀가 부담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거의 모자란 듯 얼굴을 잔뜩 허물어뜨려 웃으며 그녀의 손에 동전 몇 개인가를 덥석 쥐어주게 되었다.
형편으로 치자면 그녀가 나와 비교도 안될 만큼 잘 살지만,  동전만은 내가 더 많이 소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택시나 레미스를 주로 이용하므로 동전이 좀 넘치는 편이다.
"오늘은 감사하며 받을 게요. 성당에서 꽃집을 향해 오는 중에   거지가 쫒아 왔어요. 그런데 배고프다는 말에 맘이 아팠고, 그래서 헌금 내고 남았던 10페소를 선뜻 내줬어요."
그녀는 성당에 다닐 때 몇 십 페소만 지니고 다닌다.
몇 번에 걸쳐 어깨에 메었던 가방을 잊을만 하면  날치기 당했기 때문이다.

내 친구들은 참 검소요란휘황사치찬란이 각양각색이다.
L은 우리 가게에 들르게 되면, 갈 때는 절대로 그냥 못 간다.
남편이나 아들이 자가용으로 기필코 데리러 오도록 일을 언제나 그런 방향으로 꾸미는 것이다.
최신형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야단법석이 너무나도  지배적이다.
그래야만 만사가 든든해지는 모양이다.
(레미스나 택시 타면 두루두루 편한 것을...)
마음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 나는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과 나 스스로에게조차  충고, 또는 잔소리나 후회 따위를 삼가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에게 최대한으로 인격적 대우를 해주고,  작게나마 배려를 안기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라서다.
성당에 자주 못 갈 뿐 아니라 고해성사도 거의 못해내서 가끔은 '성찰목록'을  꼼꼼히 읽어내는 순간이 때로 내게 있어 왔다.
50여개 중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개만 제외하면 전부 성찰하게 되는 목록이다.

*자녀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이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배우자와 다퉜습니다.
*이웃의 아픔이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세상에나!
이것도 죄, 저것도 죄였다.
"사는 게 다 죄지요"라고 했다는 어느 촌부가 바로 내가 아니기를 기도하게 될 정도였다.

조지 칼린의 명언이 저절로 떠오르는 토요일 오후다.

* 우리들의 재산은 예전에 비해서 몇 갑절이 되었지만 그 진실한 가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 우리는 말은 많이 하지만, 거의 사랑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증오한다.
* 우리는 어떻게 먹고사는 것은 배웠지만, 삶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 우리는 우리의 삶에 많은 시간을 보탰지만, 우리들의 시간에 진정한 삶을 부여하지는  못하고    있다.
* 우리는 달까지 다녀오는 쾌거는 이루었어도, 새로운 이웃을 만나기 위해 길을 건너는 데에는     힘들어  한다.
* 우리는 바깥세상을 정복해 나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들의 내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 우리는 큰일들을 해냈지만, 더 나은 일들을 한 것만은 아니다.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냄비시위


 





-초여름-

시위에 동원된 통계인원 추산의 간격이 너무 큽니다,
정부의 녹을 먹는 경찰청 발표=10만 명.
언론 발표=25만 명.
마끄리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정부경찰당국 발표=50만 명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11월 8일...


         맹하린


아베쟈네다 지역에 둥지를 틀었던 10여 년 전, 우리 가족은 옥상에서 어스름이 내려 앉기 시작하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커피와 간식을 들고 있었다.
한 여름인데도 검정색의 긴 모직코트에 역시 검정인 약간 긴 모자를 쓰고 수시로 지나다니던 유태인 랍비들을 보며 나는 아들에게 툭 질문을 던졌다.
"저 사람들은 신앙심 때문에 이 땡볕에 저런 차림으로 나다니는 거니?"
"신앙심 때문이라기보다 믿기 때문이죠."
그 무렵 신앙생활에 자주 갈등을 겪던 남편이 옆에서 실토하듯 말했다.
"하느님이 한 번이라도 보인다면 나는 의심 없이 더 확실하게 믿을 수도 있을 텐데……."
매사에 우리 내외의 사부역할에 충실하던 아들은 그리도 명쾌하며 적절한 답을 ,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산뜻하게 풀어냈다.
사실, 우린 아무 것에도 문외한이고 뭐든 잘 모르는 것처럼 간접적인 논술교육을 그런 식으로 유도하는 시간을 즐겨 가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빠! 바람에 흔들리는 마당의 저 나무들을 좀 보세요. 저 나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바람의 모습이 아빠 눈에는 안 보이시죠? 사람은 나무이고 바람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을 기필코 확인하려고 주장하는 건 그분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돼요.  바람이 누구에게나 보인다면 이 세상사람 그 누구도 교회신자가 아닌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안 보이는 신을 보아내고 믿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믿음 아닐까 싶어요."

11월 8일에.
아르헨티나 중도좌파정부에게서 극우파이며 쿠테타의 진원지가 될 수도 있는 우두머리들이라고 불리는 세력들, 그들이 주요도시에 운집하여 대대적인 냄비시위를 벌이겠다고 단단히 벼르면서 경고하듯 포문을 열고 있는 와중이다.
어떤 변수와 파장을 몰고 올지 현지사회전체가 사태의 추이를 각자의 조리개를 맞추며 관심껏 지켜보는 시점이다.
그렇잖아도 침체된 경기 역시 바짝 움츠린 가운데, 가장 예민한 촉각을 세워 집중적으로 주시하고 있는 양상이다.
우리 모두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사회분위기다.
나 역시 대다수의 아르헨티노들처럼 제발 무슨 일이 안 벌어지기를 바라고 바란다.

우리 가족이 이민이라고 도착했던  30여 년 전에는 아르헨티나의 차도나 인도들은   종이라던가 작은 부피의  쓰레기들  천지였었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흐르니까 나까지도  자가용을 탈 때마다 차창으로 휴지나 과일껍질 정도 버리는 일은 다반사로 실행했었다.
어떤 면으로는 재미까지 느꼈고 즐기는 느낌조차 깨닫게 될 정도였다.
그만큼 투명하지 못한 사회의 어수선하거나 어지럽혀진 분위기가 사회 곳곳에 걸쳐 기류처럼 감돌았지만 지금보다는 순박하며 때 묻지 않았던 세상이기도 했다고 추억된다.
현재의 아르헨티나 거리는 하루에도 서너 차례 청소부들이 형광색 유니폼 차림으로 키보다 커다란 빗자루를 사용하며 잦은 청소를 해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청소부들은 비질도 한국과 반대로 한다.
옆이나 앞으로 쓸어내는 자세가 아니라 오로지 밀고 밀어낸다.

나는 하여간에 활자중독자다.
쓰지 않으면 읽고, 읽지 않을 땐 쓴다.
읽을 때는 모르겠는데, 쓰는 동안에는 세월이나 시간관념을 완전히 잊는 편이다.
결국 나는 가는 세월을 좀 멈추려고, 내가 나를 격려하려고 쓰고 읽어 왔는지도 모른다.
나를 보호 하고  위로하려고  그 누군가를 용서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신은 오늘 또한 재산의 많고 적음을 상관치 않고, 소외계층이 된 이들의 마음을 크고 작게 움직이고 있다.
보이거나 안 보이는 존재가 되어 우리와 한 세상을 살며 이해와 용서와 은총의 나눔을 수도 없이 베푸는 것이다.

11월 8일에.
나 역시 대다수의 아르헨티노들처럼 제발 더 이상의 태풍과 맞먹는 정치변동이 결코 안 벌어지기를 바라며 약도를 들여다 보 듯 거리를 지켜보게 된다.
형광색 청소복의 청년이 기다란 빗자루를 밀고 밀면서 청소부 고유의 카트 있는 쪽을 향해,  역동적이며  활기찬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다.



2012년 11월 4일 일요일

햄버거 할아버지

한국일보

    -장명수 칼럼 -


'햄버거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있었다. 그는 큰 부자였지만 근검절약을 한평생 생활 신조로 삼았다. 자녀들과 손주들이 오면 할아버지는 함께 외식하러 나가는 것을 즐겼다. 가는 곳은 항상 햄버거 집이었다. 집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차를 타고 좀 멀리 교외로 나가야 하는 곳까지, 늘 같은 체인의 햄버거 집을 찾아 가셨다.

처음에 가족들은 "손주들이 햄버거를 좋아하니까" 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할아버지도 햄버거를 좋아하시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다른 외식보다 가격이 합리적이다"라는 것이 할아버지가 햄버거 집을 선호하는 이유였다.

"갈비란 본래 한 두대 먹는 것"

몇 년 전 장남이 갈비 집에 가자고 제안했는데, 계산서를 받은 할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셨다. "가족 외식으로 이런 큰 돈을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음식에 비해 값이 터무니 없는데 왜 이런 바가지를 쓰느냐. 또 갈비란 본래 한 두 대, 많아야 두 세대 먹는 것이지 배가 부르도록 먹는 음식이 아니다. 식당이 떠나가게 떠들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아귀아귀 먹어대는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느냐."고 할아버지는 꾸중하셨다.

자녀들이 안내하는 식당에서 몇 번 외식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정한 곳이 햄버거 집이었다. 생선 채소 고기 등 여러 종류의 햄버거가 있으니 식성대로 고를 수 있고 맛도 괜찮다는 게 할아버지의 설명이었다. "패스트 푸드는 몸에 안 좋다"고 며느리가 반대했지만 "한 달에 두 세 번 먹는 다고 나쁠 것 없다. 또 우리 같은 노인에겐 햄버거가 별식이다. 모든 물건은 가격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라고 할아버지는 주장하셨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막론하고 오늘의 노인 세대는 물자와 돈에 대한 생각이 젊은 세대와 많이 다르다. 물자가 귀한 시대에 성장했고, 전쟁을 겪으며 굶주림을 체험한 세대여서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화장지 한 장도 반으로 잘라 쓰는 할머니는 손주들이 화장지를 마구 뽑아 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할머니는 메모지가 있는데도 이면지를 사용하고 종이 봉투, 나일론 보자기, 몽당연필, 리본, 포장지, 단추 등을 버리지 못해 온갖 잡동사니에 묻혀 산다.

요즘 나는 노인들의 이런 생활 태도가 더 없이 아름다운 미덕임을 발견하고 있다. 물자를 아끼고 자신을 위한 소비를 삼가는 마음은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겸손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무를 잘라야 만들 수 있는 화장지를 반으로 나눠 쓰는 할머니는 궁상을 떠는 게 아니라 나무들의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종이를 아끼는 것이다. 물건 가격은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햄버거를 선택했던 할아버지는 구두쇠가 아니라 생활경제 학자였다.

"갈비란 본래 많아야 두 세 대 먹는 것이지 배가 부르도록 먹는 음식이 아니다."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절제와 점잖음이 배어있다. "실컷 먹고 실컷 마시고 실컷 즐기겠다."는 요즘 풍조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대를 이어 전해내려 온 굶주림의 기억이 세계 경제 10대국을 넘보는 이제는 사라질 때도 되었건만 무엇이든 '실컷' 하겠다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글지글, 부글부글, 와글와글 식당

이런 욕구에 편승한 바가지 상혼이 음식 값을 터무니 없이 올리고, 실컷 먹고 마시는 문화가 식당을 시끄러운 장터로 만들고 있다. 전국 어디를 가나 맛있다는 식당은 지글지글 굽고, 부글부글 끓이고, 와글와글 시끄럽고, 연기와 김이 자욱하다. 이런 식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실컷 먹어야 "먹은 것 같다"고 만족하는 고객들이 이런 식당을 번창하게 한다.

나도 전에는 구두쇠와 궁상이 미덕임을 몰랐다. 자신을 위해 물자를 풍풍 쓰는 것이 천한 것임을 몰랐다. 절제와 절약이 반듯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조금씩 알 것 같다. 그리고 젊은 세대에게 절제의 미덕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걱정이 된다. 화장지를 반으로 잘라 쓰는 할머니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손주들에게 물려줘야 할지 안타깝다.



새로운 희망




       맹하린


10월 셋째 일요일이던 올해의 어머니날엔 사흘 동안 무척 바빴다.
금요일과 토요일 밤엔 1시간 정도만 눈을 부쳤을 정도로 주문예약이 넘쳐 있었다.
당일 오후엔 예년과 다름없이 친구들이 일을 도왔다.

이틀을 밤샘한 셈이라선지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긴 머리를 과감하게 잘랐다.
미용실에 다녀오고 기다리고 그러는 과정이 성가셔서 내가 잘랐다.
빗장뼈에 닿을 정도의 단발머리가 되었다.
꼼꼼하게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런하지는 못해도 크게 괘념치 않는다.
도리어 거울을 볼 때마다 약간 층이지는 끝부분이, 내가 나를 웃음 짖게 만들고 있다.
내년 5월까지 결혼꽃 장식도 몇몇 주문을 맡아둔 터라 때로는 바쁘게 지낼 것 같다.

며칠 전 악플러들에게 연거푸 타격을 입었다.
그로 인해 외로웠다면 다행이었겠는데, 그런데 울적함의 극치를 맛보고 맛봤다.
실명공개, 내 글에 대한 폄훼 등등.
기분전환을 위해 옷 하나  구입해 보려고 수입옷집에 갔다.
본국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에서 구입해 왔을 게 분명한 울긋불긋한 한국 신상들이 하나같이 500페소(1백 달러 상당)가 넘었다.
대부분의 옷들이 거의  골프를 위한 상품들이었다.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옷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아 금세 그곳을 나왔다.

몇 년이 걸릴 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환국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아기자기한 내 나라에서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최근 들어 퍽도 사무치다.
엄마와 형제들을 지켜보고 친구들과 여행 다니기를 즐기며 나는 어쩌면 글도 안 쓰게 될 것 같다.
외롭지 않으면 글도 써지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그동안 외로웠을까.
그렇다. 밝음이라는 이름의 외로움 속을 타박타박 여일하게 지나 왔을 것이다,
엇갈리는 상념들이 자주 나를 흔들어 놓고는 했었다.
우기의 빗소리에 실린 생의 편린들이 투명한 아우성으로 들리기도 했었다.
어떤 면으로는 가장 평화로운 심리상태를 회복하려고 느닷없이 나는 새롭게 희망 하나를 구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악플러들…….
그들은 위대하다.
아르헨티나를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나를 몰아내는 일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단지 관심이라는 미명하에…….
익명의 바다에서 현장성을 담보하고 감상성 역시 극복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었는데...
그런데 익명에 혼겁하여 최근의 나는 실명에도 거부감이 생기는 현상을 겪는 중이다.
언제라도 상투성을 탈피하고 싶었던 것을.

환국.
요즘의 내게 절대군주의 존재처럼 유일한, 새로운 희망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오래전부터 나는 잠재적인 직관력으로 환국을 희망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어린 시절이 없었어!”





수원대 교수 이주향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생사를 넘나들며 던진 말이 공개됐다. 나를 그토록 ‘찡’하게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린아이를 사랑합니다.”

생각보다 어린 시절은 소중하고 중요하다.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 “아빠”라 부르게 되는 존재가 나를 든든히 지켜주어야 하는 시절, 선악보다는 호불호가 중요하고 책임감보다는 호기심을 인정받고 격려받아야 하는 시절, 그 시절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는 인생의 밑그림이다.

그 시절이 없이 일찍 철이 나야 하는 아이들은 평생 ‘쓸모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할까 조급하게 동동거린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코가 꿰거나, 세상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주류사회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아니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존재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를 그린 그림 중에 미소를 짓게 되는 그림이 있다. 영국 화가 오처드슨이 그린 ‘아기도련님’이다. 엄마가 부쳐주는 부채에 반응하며 천사처럼 노는 아기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이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런 아기의 공간에 걸맞게 주변이 온통 따뜻하다. 따뜻한 노란 빛을 완성하는 것은 엄마의 따스한 눈빛이다.

아이는 엄마의 따스한 품이나 아빠의 훈훈한 표정 같은 것 없이 세상을 믿게 되지 못한다. 엄마가 조급하면 아이는 불안이 많은 인간이 되기 쉽고, 아빠가 공감에 인색하면 아이는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쓰다가 스스로 함정을 파는 인간이 되기 쉽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지켜주는 일은 어른들의 의무라 생각한다. 일곱 살 된 아이가 영어 배우고, 태권도 배우고, 그림 배우고, 피아노 배우고, 심지어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바둑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일곱 군데나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김지하 선생의 ‘무화과’는 내게는 꽃 시절이 없었다는데, 요즘 아이들은 아예 싹 시절이 없는 것 같다.

왜 어른들은 아이에게서 어린 시절을 거두어들일까. 혹 그들이 자기 어린 시절과 화해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린 시절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나’의 어린 시절과 화해해 보자. 당신의 엄마, 아빠는 어땠는가? 엄마, 아빠라 불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당신이 기억하는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마음에 맞는 친구와 도란도란 어린 시절의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기억하며 불러내며 우리 속의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느껴보는 일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아빠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리고 사춘기 때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은 어떤 모습인지, 그러다 보면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원형이 보인다.

기억이란 묘하다. 끊임없이 되돌아와 현재와 함께한다. 그래서 나의 과거와 노는 일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과 잘 놀다보면 지금의 나의 그늘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고 자기 자신과 잘 놀 수 있는 때가 오지만, 내가 나의 그늘을 알아채지 못하는 한 나는 나의 그늘 아래서도 쉴 수가 없다.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28년 동안의 침묵(沈黙)




     맹하린


1985년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방문을 선포하자, 전노렌죠신부님을 위시한 53명의 방문단에 합류한 우리 내외는 모국에 다녀오게 되었다.
에사이사 공항의 2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남편은 성당의 교우이자, 교민브로커로 명성을 날리던 Y씨에게 찰나적으로 팔을 이끌렸었나 보았다.
나는 남편의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이층에 닿은 상황이었다.

Y씨는 남편에게 두툼한 서류봉투와 함께, 보답이랍시고 2Kg용량의 꿀 병까지 불쑥 안기더니 금세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에 도착하면 김포공항에 사람이 나와 있다가 받아갈 거라는 언질을 속삭이듯 은밀하게 곁들이고 나서…….

비행기에 탑승 했을 때,  우리 자리로 다가오신 김마리아 어르신께서는,  남편에게 염려의 말씀을 잔뜩 쏟아냈다.
"내게 부탁하는 걸 겨우 거절 했었는데 결국 형제님이 떠맡으셨네요!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브로커가 맡기는 서류가 신상(身上)에 이로울 리는 절대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남편에게서 서류봉투를 가로채 듯 잡아당겨 우선 손으로 만져 보았다.
촉감만으로도 여권이 확실했다.
여권은,  하나라면 모를까 10개도 더 되는 듯 싶었다.
김마리아 어르신은 애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탁(神託)과 같은 말씀까지  기필코  보탰다.
"갖다 주지 말고 비행기 안의 화장실 쓰레기통에 당장 버리세요!  한국공항에서 무슨 덤터기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나는 남편이 재삼  확인해 보려고 만지작거리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가방 안에 깊숙이 넣으며 비장감 넘치게 말했었다.
"걸려도 내가 걸리는 게 낫겠어요. 당신은 남자라서 여러모로 불리할 확률도 많고."
열 댓 사람에게는 그 여권들이 특별하고  소중했으며 가장 간절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토록 귀중한 물품들을 그런 식으로 폐기처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포공항의 검색대에서 나는 보란 듯이 걸리고 말았다.
걸리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서류봉투라니. 의심을 받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지 않은가.
“이건 뭡니까?”
“아르헨티나 공항에서 남편이 얼떨결에 부탁 받았던, 아는 분의 서류인가 봅니다.”
그는 손으로 서류봉투를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가위부터 집어 들었다.
“우선 뭔가를 보고 나서 얘기합시다.”
가위로 자른 뒤,  손으로 꺼내지 않고 봉투를 위로 쳐들며 내용물 전체를 가차 없이 쏟아 내던 세관원.
인지가 붙은 서류들과 더불어 와르르 쏟아지던 열대여섯 개의 한국여권들.
한국에서 인편을 통하여 일단 아르헨티나로 보내지고, 그리고 비자를 받아 낸 다음 새로 이민을 떠나려던 한국의 신청자들에게 브로커를 통해 안겨진다던 여권들.
큰 짐들은 남편에게 건네도 된다는 혜택이 주어졌지만, 나는 혼자서 김포공항 5층에 있는 수사 실에 들어가 장장 5시간을 머물러야 했다.
공교롭게도 일요일이라, 외무부(외교부) 여권과의  직원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담당자가 여기저기 문의하는 전화를  빗발치듯 해내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나는  군인 몇 사람이 여담(餘談)으로 질문해 오는 아르헨티나의  실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군인 중 하나가 느닷없이 내게 질문했다.
“두렵지 않으세요?”
“죄 지은 일이 없는데 왜 두렵겠어요?”
나는 지금껏 의아심을 품게 된다.
(왜 경찰이 아니고 군인들이었지?)

이쪽에서만 해내던 전화가 저쪽에서도 올 수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전화벨이 지나치게 크고 길게 울렸다.
뒤늦은 여권 과에서의 해답과 결과에 대한 연락이었다.
통화를 끝낸 담당군인은 서류봉투 안에 여권들을 차곡차곡 넣어주며 다짐처럼 충고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만약 이 여권들이 가짜일 경우,  아주머니는 당장 법에 저촉 되며 처벌까지 받습니다. 큰일 날 뻔 하신 겁니다. 차후엔 아무 부탁이나 떠맡으시면 안됩니다. 우린 여태 가짜인지를 조사했던 겁니다.  좁은 땅에서 한 사람이라도 떠나면 애국이  되기도 하겠고...”
나는 그럴 때, 내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다니까요! 그렇게  쓸모 없는 변명 따위를 늘어 놓지 않는, 매우  단순한 성질머리를 지녔다.
동생 같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나는 총총 그곳을 나왔다.

어두워진 공항 밖에는 신부님과 남편의 대부이신 C인솔단장과 몇몇 교우와 남편과 내 형제들 이 그때껏 기다리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특별히 Y씨의 한 패거리로 보이는 멀쩡하고 말쑥한 신사가, 남편이 내 손에서 가져간 봉투를 받아 들고 쏜살 같이 사라지는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너무나  면목이 없다는 바보스러운 생각과 표정 같은 걸  했었다.
남편이라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무실 비슷한 곳에서 군인들이 대접해 주는 커피도 마시며  이약이약 이야기까지 주고 받으며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로 기다렸지만, 그들은 의자도 없는 공항의 바깥에서 무려 5시간이나 부족한 소생인 이 나를 기다려 준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런 시시한 일을 가지고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성격은 아니다.
하물며 나와 남편은 말하자면 그런 사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트집 삼으며  뒤늦게 싸우거나 네 탓, 내 탓을 따지지는 않는 사이 말이다.
그러니 우린 이혼 같은 걸  못해봤을 것이다.
그냥 일어 날 일이 일어났다고 여긴다.
저 높으신 분에게 새로운 시험을 당하고 있으므로 되도록 산뜻하게 넘겨야 한다는 의무감만 키우고 키우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다 할 사과를 제대로 받은 적도  없었고, 잔치나 행사 같은 데서 Y씨를 맞닥뜨리기는 했지만 남편과 나는 묵묵부답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Y씨 내외는 현재 아베쟈네다 의류도매상가 지역에 일수를 놓는 일수쟁이가 되어 일약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예쁘장한 부인은 자녀들 결혼 시킬 때마다 꼭 우리여야 한다는 강한 주관을 펼치며 우리 가게에 웨딩 꽃을 오롯이 믿고 맡겨 왔었다.
나는 계속 침묵을 고수(固守)했었다.
28년 동안의 침묵이다.
내가 배달해 준 여권의 주인공들 열댓 분은 시절이 하수상한 지금껏 아르헨티나에서 잘 살고 있을까.
안 보이는 좋은 인연으로 나와 자주 만나기도 하며 지인(知人)으로까지 남은 건 아닐까.
때때로 돌출(突出)되는 크고 작은 일에 대처하는 나의 의연함은 약간이나마 전설적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겠다.
서양 속담이 이미 내게 가르쳐 줬었다.
<부드러움은 뼈를 부순다.>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범죄의 가공할 양면성


한국일보

 토ㅣ요ㅣ에ㅣ세ㅣ이


    -김승웅 언론인·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아우슈비츠수용소는 2차 대전 당시 650만 유대인을 한줌의 연기로 날린 상징적 건물이다. 폴란드 오스비에침 마을소재의 관광지로 아우슈비츠는 그 마을의 영어식 발음. 집채더미처럼 쌓인 안경테, 곳간마다 그득한 유대여인들의 머리다발, 검디검은 독가스실의 콘크리트 벽은 수용소 '관광'을 마친지 20수년이 넘는 이 시점까지도 악몽으로 되살아나는 장면들이다.

그림에 그토록 소질을 보여, 비엔나 숲 속을 곧잘 스케치하던 눈 큰 소년 아돌프 히틀러를 무엇이 그토록 바꿔 놓았단 말인가. 히틀러의 생모가 남편과 사별 후 유대인 간부(姦夫)를 갖게 됐고, 따라서 매일 밤낮으로 어머니와 뒹구는 유대인 사내한테 히틀러가 독을 품던 시기를 바로 이때부터로 기산(起算)하는 분석도 있다. 히틀러의 생모 클라라가 남편 알로이스 히틀러와 일찍 사별한 것은 틀림없다. 아들 히틀러의 나이 열네 살 때다.

클라라는 남편과 22세나 나이 차가 있는데다, 실은 남편의 사촌여동생이었다. 그녀가 사촌 오빠와 남녀관계를 맺은 것은 오빠의 둘째 처가 병이 들어 죽기 직전으로, 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불륜관계였다. 아돌프는 그런 범죄가운데 잉태한 아이였다. 아돌프의 청소년기는 이런 반유대정서 속에서 자아를 굳혀간다. 히틀러는 나중에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수 천 수만의 순수 독일 피를 이어 받은 소녀들이 이 역겨운 안짱다리 유대사생아들의 배 밑에 깔려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런 표현은 당시 유행하던 반 유대정서와 히틀러 개인의 성적강박관념의 합작으로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를 돌아보고 10여년 지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관람하면서 나는 거듭 봤다. 저벅대던 나치대원들의 군화소리, 군견들의 울부짖음 속에 섬뜩하게 다가서는 미래의 재앙과 그 그림자를 분명히 본 것이다. 신통력이나 영험(靈驗)없이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작품, 그런 의미에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아우슈비츠를 먼저 '관광'후 관람해야 진가를 느낄 영화였다고 영화평을 쓰고 싶다.

그리고 가장 경악했던 일은, 그런 목불인견의 만행이 자행되는 와중에도 수용소 한켠의 별채에서 나치장교들은(영화에서처럼) 관현악을 즐겼다는 점이다. 죄악과 문명의 공존…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것이다.

죄악은 평범이나 정상과도 공존한다. 그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에힐 다이누라는 생존자의 이야기다. 1961년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했던 부총통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다이누도 증인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재판장에서 다이누가 흐느껴 울다가 실신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가 수용소에서 체험한 죽음의 공포 때문이려니 짐작했으나 며칠 후 다이누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유는 너무 놀라운 것이었다.

"저는 아이히만이 악마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그가 너무 평범한 한 남자로 음악 좋아하고, 손자 손녀의 재롱을 즐기고, 저처럼 황혼의 강가 산책을 좋아하고…. 이런 평범한 인간 속에 650만 명의 생명을 죽이는 악마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겁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을 생각할 때 너무 두렵고 절망적인 마음이 들어 쓰러진 것입니다."

범죄는 의술과도 공존한다. "나는 온화하고 자비롭다." 지난 1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유고전범재판정에 선 피고 라도반 카라지치 전 스르프스카 공화국 대통령(67)의 자기변호다. 그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8,000명의 무슬림 주민을 죽인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주범이다.

"전쟁을 피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다"는 이 전직 정신과 의사의 시술(施術)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범죄의 이 가공(可恐)할 양면성이여…. 나는 그게 두려운 것이다.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마음 다스리기



 - 한스컨설팅 대표 한근태





지인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한 적이 있다. 한라산도 오르고 올레길도 걷고 맛난 것도 먹었다.
정말 환상적인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분은 여행을 전혀 즐기지 못했다.
며칠 전 큰 비로 물에 잠긴 외제차 걱정 때문이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그 분은 서울에 있는 자식들과 계속 통화를 했다.
"얼마나 돈이 든다니, 보험에서 얼마까지 커버가 된다니,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니, 다른 수리소도 알아봐라, 사기칠 지 모르니 일일이 지켜봐라…"
자식 셋과 돌아가면서 전화를 하고 때론 보험회사 직원과도 전화를 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그 분은 멋진 제주 바다를 하나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몸은 천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옥에 있는 것 같았다.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있어야 한다.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을까?

첫째,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
바둑에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말이 있다. 승리를 탐하면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태국 출신 고승 아잔 차 스님은 이런 말을 한다.
“조금 내려놓으면 조금 평화로워질 것이다. 많이 내려놓으면 많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완전히 내려놓으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세상과의 싸움은 끝난다.”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욕심 때문이다. 욕심 부린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 세상에 우리 것은 없다. 모두 잠시 빌린 것뿐이다.
내 육체도 돈도 자식도 권력도 내 것이 아니다. 가능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 고정관념과 망상이다.
남들은 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데 혼자 미워하고 끌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강의 중 동양 남자로 인해 몹시 불쾌했다.
자기 강의를 듣지 않고 옆에 있는 젊은 여자와 계속 수다를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이 쓰여 강의도 제대로 못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동시통역사였고 그는 통역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 사건에 대한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느냐 때문에 괴롭다.
우리가 보고 해석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일 때문에 신경이 쓰여 행복하지 않다면 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아침부터 인상을 쓰고 있는 상사는 당신 때문이 아니라 집안 일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셋째, 천천히 살아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급하다. 정신 없이 빨리 달린다. 늘 마감시간에 쫓긴다.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제한속도 100킬로로 달려야 할 구간을 140킬로로 달리면 연료 소모도 많고 정서도 불안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들뜨게 되고 피로가 가중된다. 본의 아니게 사고 날 확률도 높아진다.
꽉 찬 스케줄을 가진 사람은 유능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이다.
바쁘다는 의미의 한자는 망(忙)이다. 마음 심(心)자에 망할 망(亡)이다. 마음이 망했다는 의미다.
정신 줄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급한 일에 쫓겨 정말 소중한 일에 시간을 쓸 수 없다.
좋은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 천천히 가는 것이 빨리 가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달리다가 주기적으로 쉰다.
그들의 영혼이 쫓아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넷째,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번잡하고 정신 없이 살고 있다. 복잡한 관계 때문이다.
그 관계 확인을 위해 12월은 저녁마다 몇 탕씩 송년회를 하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홀로 있어 봐야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다.
늘 얽혀 있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도 안 되고,

이웃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게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명상의 문이 열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권력을 가질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머리가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행복해질 수는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깨달음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잔뜩 때가 낀 거울과 같다.
사물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하지만 물로 씻어내고 수건으로 닦아내면 거울은 다시 사물을 비춘다.

마음의 먼지도 이같이 털어낼 일이다.

표면이 흐려지면 거울은 사물 비추기를 거부하고 제 자신을 고집하게 된다.
제 자신을 고집할 때 거울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거울은 금세 더러워진다.
마음 밭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차분히 가라앉혀 침묵을 깃들여야 한다.

생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 끝에 깨달음이 있다.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행주강


                                                    
-  박철




  내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은 외로움 탓이다

  시가 길어지는 일처럼 요즘 그리움이란 지금은 부재하는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누군가 나의 별빛을 본다면 희망에 대해 노래해다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안개 짙은 야적, 강의 하류에선 그들 나름대로 시대를 앓고

  둑으로 쌓아 올리는 바람이 외면을 받으며 갈대 곁에 섰다

  언덕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나련만

  강폭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일 거다

  사랑이든 역사든 배고픔을 달래는 무엇이든 말로서 될 일이 아니건만

  물살이 거듭 손마디를 꺾으며 행주강이 흐른다

  400년 전 임진란의 함성이 되살아나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대는 강

  치마폭에 돌덩이를 주워 담던 아낙도 가끔은 허리를 펴 강 건너 친정아비의

  안부가 그립기도 했을 저녁 바람처럼 날이 진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5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50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오늘은 내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재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운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인중을 긁적이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연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

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

라는

사실을 ,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이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

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이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

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2012년 10월 15일 월요일

작은 화재(火災) 앞에서




         맹하린


일요일이 닥치면 오늘은 성당에 좀 가야지, 그러면서 9시 미사에 닿으려고 준비를 하지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꼭 무슨 일이 생기고 만다.
성묘(省墓)용 꽃다발이라거나 여럿이나 겹치는 주문일 경우 이미 갈아입은 외출복을 미련없이 평상복으로 바꾸게 된다.
어제도 유리문에 붙이려고 "일요일은 10시 15분에 엽니다" 라는 안내문을 쓰는데, 이웃가게에서 한국수입상품을 취급하는 C사장께서 초인종을 누른다.
“아드님, 있어요?”
“일요일엔 바쁠 때나 나오지만, 무슨 일이시죠?”
“건너편에 불이 났어요. 거지 놈들이 뭘 어떻게 잘못 한 건지, 내 원 참!”
우리 가게 이웃에서 한인 타운을 조성하고 있는 자영업자들은 대다수가 아니고, 거의도 아니고 모두 한인 1세대들이 점령하고 있다.
2세들은 중심상가인 온세나 아베쟈네다에 입성(入城)하여 한국으로 치면 중소기업 정도 되는 의류도매상들을 경영하기 때문이다.
C사장이나 나 역시 신고(申告)정도는 해낼 수 있으나 주소록 찾고 그러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신속한 대응(對應)을 아들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주지(周知)하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집으로 전화를 하자, 아들이 부탁하기를 정확한 주소와 화재의 크고 작음을 설명하라고 해서 나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사고현장으로 갔다.
무선인 가게 전화는 150M까지는 수신이 가능하다.

서너 명의 젊은 노숙인(老宿人)들이 둥지를 틀고 살던 한인철공소 옆의 빈 가게 앞이었다.
불길은 점차 번지는 과정에 있었고, 매우 위협적인 속도로 타고 있었다.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도 그렇지만, 작은 폭파 음까지 파생되고 있었다.
매사에 상상력이 지나친 나는 바로 옆가게인 철공소의 가스통이 터지는 연상(聯想)을 나도 모르게 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5분도 안 되어 세 대의 경찰차가 요란하게 도착했다.
화재상황의 크고 작음을 경찰이 먼저 파악한 후에 소방차를 부르는 법이라는 아들의 설명이 나중에 있었다.
신고할 때도 장난 전화를 방지(防止)하기 위해 일단 확인전화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집으로 전화를 해서 불길이 어느 정도인지를 캐물었다는 얘기다.
“난 모르죠. 모친(母親)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아들이 웃으며 말하자 경찰도 웃더라고 했다.

이윽고 5분도 안되어 다시 소방차 한 대가 왔다.
한 대로도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금세 옆 가게로 번질 것만 같았고, 한인 타운 전체를 폭파시킬 듯 했던 화재는 싱거울 정도로 단박에 잠재워졌다.
번질 불은 번지게 되어 있고, 꺼져야 할 불은 꺼지게 되어 있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인 모양이다.

일 년에 가장 큰 대목이 되는 어머니날이 일주일 뒤로 임박(臨迫)하여 정신적으로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교회에 나온 김에 주문하고 가는 고객도 이미 여럿이나 있었다.
큰 대목이 닥칠 때마다 어떻게 하면 대박이 날까를 염두에 두기보다, 어찌해야 고객들에게 친절히 대하면서 소담스럽고 깔끔한 꽃장식을 안길까를 고심(苦心)하게 된다.
내 지표가 그렇기 때문에, 상인연합회의  벼룩시장이 무료인 줄 잘 알면서도 애초부터 이용을 삼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내 나름의 긍지란 게 그렇다.
너무  수입이나 이익만 따지며 살기는 싫은 편이다.

작다면 작은 화재(火災)사건을 지켜보면서 내 안에 내재(內在)된 세상에 대한 몰이해(沒理解)의 불씨를 내 스스로 투덕거리며 끄기 시작한다.
하여간에 해내야 할 숙제 몇 개가 성큼 다가오는 아침이다.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그래, 이 맛이야!



       맹하린


내가 라면을 가장 처음 맛본 건 중학교 때였다.
한국은 그때 인스턴트식품은 물론이고 라면이라는 품목이 전혀 생산되지 않을 때였다.
중학교 음악교사로 있던 형님을 만나려고  일본에 다녀온 고모부가 짐 속에 라면을 두 박스나 가져 오셨다. 순전히 우리 형제에게 그 희한한 맛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러셨을 것이다.
그때 나는 뚜껑을 열면 발레리나가 춤을 추면서 소녀의 기도라는  음악이 나오는 분홍색 뮤직 박스 오르골까지 내 몫의 선물로 받았다.
고모내외는 일제시대(日帝時代)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끔은 우리 형제들 앞에서 일본 말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가 알면 안 되는 비밀이거나 우리형제들을 칭찬, 또는 웃어주는 말들을 주로 주고받았었다고 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 백단은 못되고, 99단은 되었던 탓에, 가끔씩  장난기가 발동 되면 두 분이 주고받는 얘기를 콕 집어내고는 했다.
두 분은 그리도 커다랗게, 통쾌히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렸었다.
(그 웃음이 새삼 그립다.)

그리고 1963년도쯤 삼양식품에서 라면이 나왔다.
그럭저럭 즐기던 라면을 결혼하고 뚝 끊어야 했다.
시어머니께선 수제비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 종류를 무척이나 좋아하셨지만, 라면은 비싼 음식으로 단정하셨기 때문이다.
습관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시어머니 덕택에 라면을 멀리 하자,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음식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날마다 듣던 말도 아니었다.
단지 일 년이면 한 달 정도 함께 했던 날들 속에서 들었던 지적이었던 것을…….

현재의 나는 라면을 바쁠 때나 먹는다.
가장 간단하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식사로 부각되는 이유에서다.
얼마 전, 절약이 생활화 되어 있는 가족이 Coto라는 현지인 마켓에서 미국 산(産)라면을 사왔다.  한국라면보다  부피는 작았지만 절반 정도 낮은 가격이었고, 우선 유통기한을 믿을 만 할 정도로 신선함을 전달 받았다.
특히 그 맛에서 예전에 고모부가 일본에서 가져오신 라면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아마 미국에 있는 라면공장을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모양이지 싶다.

나는 찌개나 국 종류를 먹을 때, 국물을 전혀 먹지 않는 습성을 지녔다.
왜 그러는지 나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어려운 이상한 성격이다.
그런 이유로 물김치 등을 담그지 않을 뿐 아니라, 외식에서도  건더기만 약간 정도 섭취한다.
그러는 나를 가끔씩 놀리는 친구들 앞에서 나는 내 특유의 유머를 날리기 마련이다.
"맞아, 나는 국물을 전혀 안 좋아하는 게 확실해. 아! 그래서 내 인생 국물도 없나 보네?"

살아오면서 더 이상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연이 하나 있었다.
나를 동등하게 존중해 주지 않고, 어떻게든 일을 돕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경청해 주는 역할만을  요구하던 여친 이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이렇다 할 다툼도 없이 내 쪽에서 절교(絶交)를 실행(實行)했다.
더 이상 친구하기가 숨막혔었다.
이 얘기 정말 죽기 전엔 건드리기가 괴로운 부분이지만, 나는 그 무렵 교통사고로 열 네 살의 큰 애를 잃었었다.
그런데, 세상이 온통 슬픈 보라색으로 흐릿할 뿐인데,  그리고 누군가 나를 약간만 밀쳐도 세차게 넘어질 것만 같은 심정인데, 그런데 참척(慘傶)이 어느 정도의 슬픔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아 하는 그 친구는 내 입장은 손톱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고 있었다.
나를, 내 고통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친구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지나치게 치부하고 축재한 사람들과는 친구 안 하기!!!
그러니 그 누구도 나의 그 인연을 들먹이면 곤란한 일을 내게 떠안기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악플러이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내 인생에 중심을 잡도록 해주는 존재,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어제와 오늘, 몇 분의 절친께서  띄어준 메시지가 함초롬히 대신해 주었다.
때로는  미국 산(産) 라면이 그걸 대신해 줄 것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 미국 산(産) 라면을 때때로 먹게 될 것이기에 말이다.
이상하게도 먹을 때마다 그 라면은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다.
그리고 가족에게 소리치도록 유도한다.
"그래, 딱 이 맛이야!"



2012년 10월 13일 토요일

오오까의 밀감



 오오까의 밀감                   

-펌-

  옛날 日本의 에도에 오오까라는 판관이 있었다.

이른바 쇼군(將軍)이 할거하던 時代였다. 내란이 빈번했고 민중들의 삶은 어려웠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게 일상사였다. 재판관의 판결은 뇌물을 얼마나 바치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罪가 없어도 가난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갔고 심지어는 처형되기도 했던 反面에 돈만 있으면 아무리 몰염치하고 뻔뻔스런 罪를 짓고도 풀려났던 그런 時代였다.

  오오까는 판관이 되어 에도에 부임하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큰 만찬을 베풀었다. 에도의 귀족 명사들과 관리와 그리고 다른 판관들을 합쳐 모두 3백 명을 초대하였다. 食事가 끝난 뒤 그들은 정종을 마시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 중에 판관들은 재판을 심리할 때 그 진실을 알기 위한 제일 빠른 길이 고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판관들은 아무리 거짓말을 잘하고 뻔뻔스러운 자들도 고문만 하면 다 불게 되어 있다는 意見에 입을 모았다. 오오까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表情은 침울했다. 그들이 술 마시기를 거의 끝마쳤을 즈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모든 食事의 마지막에 과일이 빠질 수 없고 또 지금은 밀감이 아주 잘 익는 계절인데 내가 그것을 소홀히 했으니 제빈들은 이 나의 불찰을 용서하시기 바라오. 즉시 조처하겠소."

  그리곤 그의 충복인 나오수까에게 3백 개의 밀감을 급히 가져오라고 지시하였고 나오수까가 급히 달려가 밀감이 든 부대를 오오까에게 갖다 대령하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나오수까에게 그 밀감을 헤아려 보라고 指示하였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 밀감의 숫자를 헤아린 나오수까의 表情이 어두워졌다.

  "나으리, 3백 개에서 한 개가 不足하옵니다."

  "너에게 3백 개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빈객 중에 한 분이 못 잡숫게 되었단 말이냐!"

  "나으리, 틀림없이 3백 개였사옵니다. 小人이 직접 세면서 집어넣었사옵니다. 정말이옵니………"

  울상이 된 나오수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오까의 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네놈이 한 개를 먹었구나 그렇지 않느냐?"

  "아니옵니다. 아니에요. 감히 어찌 小人이 그런 일을………"

  "그렇지 않다면 네놈은 지금 밀감한테 날개가 있어 날아갔다는 말을 하려느냐, 아니면 발이 있어서 도망쳤다고 말하려는 게냐, 이 발칙한 놈!"

  "아니옵니다. 감히 小人이 어찌……… 하오나 小人이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은 事實이옵니다."

  나오수까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목을 조아렸으나 主人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眞實은 밝혀지게 마련인즉……… 게다가 名色이 판관인 내가 바로 家內에서 벌어진 일의 眞實을 밝혀내지 못한다고 해서야 어디 판관 자격이 있겠느냐!"

  오오까는 형리에게 화로와 끓는 물 등 고문할 채비를 차리라고 명령하였다. 형리가 곧 화로와 끓는 물 그리고 인두 등을 준비하여 대령하자 오오까가 형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以實直告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저 못된 놈에게 하나하나 說明해주렷다!"

  오오까의 지시를 받은 형리가 말을 붙일 사이도 없이 새파랗게 질린 나오수까는 오오까를 향해 꿇어 엎드려 목을 조아리고 이렇게 울부짖었다.

  "제발, 나으리! 小人이, 小人이 自白하겠나이다. 그러하오니 제발, 제발………"

  "좋다. 그럼 어서 以實直告하여라. 네놈이 어떻게 밀감 한 개를 훔쳤는지 자세히 自白하렷다!"

"小人이 처음에는 그 밀감에 손댈 생각이 秋毫도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밀감이 하도 잘 익었고 때깔도 좋고 먹음직스럽고 또 향내도 그윽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사와 한 개를, 딱 한 개를 꺼내 먹었사옵니다. 어떻게 맛이 있었사옵던지 지금까지도 입안에 군침이 돌고 있나이다. 이렇게 自白하오니 제발 나으리! 제발, 나으리!"

自白을 마친 나오수까는 계속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초대객들은 眞實이 곧 밝혀진 것에 입을 모아 탄복했다. 그 중에는 "역시 고문이야말로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첩경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고 또 충복에 의해 도둑질 당한 오오까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이 말들을 조용히 다 듣고 난 오오까가 다시 나오수까에게 이렇게 다짐하듯이 하였다.

  "그러니까 네놈이 眞情 이 모든 빈객들 앞에서 밀감 한 개를 훔쳐먹었다는 것을 自白한다는 것이렷다!"

"예, 예. 自白하옵니다. 小人이 도둑질을 했사오니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하오나 나으리, 처음 저지른 일이었사오니 나으리의 넓은 아량으로……… 한번만 그저 단 한번만………"

  나오수까는 울면서 대답했고 또 그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오오까는 침울한 표정으로 나오수까를 그리고 빈객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오까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수까에게 다가가 그 앞에 함께 엎드려 그를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부디 나를 용서하라. 너에게 참으로 못된 짓을 했구나. 이 모든 빈객들 앞에서 이렇게 謝罪하오니. 그리고 이 불행한 일을 잊을 수 있도록 내 眞情 갑절로 너를 돌볼 것을 약속하겠노라."

  그리고 그는 그의 넓은 소맷자락에서 밀감 한 개를 꺼내 빈객들을 향해 던지고 이렇게 외쳤다.

“밀감을 훔친 자는 바로 나였소. 내 下人은 훔치지도 않았으면서도 훔쳤다고 自白했소. 그것도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이오. 먹지도 않은 밀감의 맛으로 입안에 아직도 군침이 돌고 있다고 한 말을 잊지 마시라! 고문이 있기도 전에 고문의 공포가 그렇게 했던 것이었소! 그리하여 제빈들은 돌이켜보시라. 당신들의 감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억울하게 썩어가고 있는가를! 그리고 제발 이 밀감을 잊지 마시라. 眞實을 밝힌다는 美名 아래 고문을 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 이 밀감을 생각하시라!”



-  홍세화『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친구와 개새끼

-펌-


[삶과 문화]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한 전문계고교에 근무하던 교사의 일이다. 어느 날 수업을 하러 교실에 들어갔더니 교실에 먼지가 자욱했다. 평소에 둘이 친하게 지내던 학생 둘이 싸움이 난 거였다. 평소에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싸움이 아니었다. 학생 하나는 코피를 흘리고 있고 다른 한 학생은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피를 보고 난 다음이라 학생들은 보건실 가서 응급처치를 받고 교실로 돌아온 터였다. 학생들에게 이런 일이 있는데 수업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오늘 이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가 같이 알아보고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싸운 학생들에게 누가 먼저 때렸는지, 그리고 왜 때렸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소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저 새끼가 나보고 개새끼라고 하잖아요."평소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학생들이었다. 조사를 빼고는 다 쌍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 그 중에서 '개새끼'는 욕 같지도 않은 그런 일상용어였다. 그러자 맞은 학생이 항변하듯이 말했다. "쌤, 그거 평소에 늘 하던 말이잖아요!" 그래서 교사가 그 학생의 말에 수긍하면서 때린 학생에게 그건 늘 쓰던 말인데 왜 오늘은 다르게 반응했냐고 물었더니 학생은 아침에 엄마와 크게 '한판'했다면서, 그래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았는데 친구라는 녀석이 옆에서 자꾸 "개새끼, 개새끼"하니까 그만 열 받아서 주먹이 나갔다고 말했다.

교사는 "아, 평소에는 괜찮았는데 오늘따라 화가 많이 났겠네. 그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번 말해보지 그랬냐?"고 했더니 그 학생은 울컥하며 "쌤, 쌤이 시키는 대로 말로 했는데도 자꾸만 계속하잖아요."라며 말했다. 그러자 맞은 학생이 "쌤, 전 하지마라는데 그게 그냥 장난인 줄 알았어요!"라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말이란 그런 것'이라고 운을 뗐다. 평소대로 늘 쓰던 뜻 없는 말이라도 상대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 말이다. 하던 대로 하다가 주먹을 맞은 친구도 억울한 면이 있지만 때린 학생도 동무라는 녀석이 자기 기분을 헤아리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개새끼"라는 말보다 기분 더 나빴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들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말'에 대한 최고의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진지하게 듣고 뭔가를 깨달은 것은 이 이야기에 그들이 듣고 배울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실제적 삶의 재료로 짜여진 조언', 삶에 대한 살아있는 조언, 즉 지혜가 담긴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조언인가. 친구의 의미다. 철학자 김영민은 친구를 '듣지 않는 관계'라고 말한다. 친구란 '구태여 공들여 듣지 않아도 아는' 관계이다. '개새끼'가 보여주는 게 바로 이런 친구의 말이다. 평소에 늘 쓰던 말이었고 서로의 친분을 과시하는 말이었다. 바로 그런 언어였기 때문에 상대방을 헤아리고 듣는 것을 놓쳤다. 다 아는데 뭘 듣고 말고 할 것이 있는가. 프랑스 속담대로 한다면 우리는 아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듣지 않고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에 졸지에 친구는 '개새끼'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듣지 않았으면서도 다 아는, 그래서 관계를 망치는 대화를 종종 본다. 당장 부모와 자식의 말다툼을 보라. 부모가 자식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면 자식은 곧 "엄마가 무슨 말 하는지를 잘 알거든. 그러니 내 말 들어봐"라며 자기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그러면 곧 엄마도 자식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나도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거든. 그러니 엄마 말을 들어봐." 아무도 듣지 않고 서로 다 안다고 주장한다. 신기하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우린 어떻게 다 알고 있을까?

다 안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가 듣지 않고 생각하기를 멈출 때 우리는 친구에서 '개새끼'가 된다. 친구와 개새끼는 한 끗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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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어제 교민판 한국일보를 보다가  이 칼럼에 필이 꽂혔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을 뒤져 포스팅을 했다.
내 그대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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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9일 화요일

오빠


         맹하린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오빠는 이리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어대학 일본어과를 마쳤다.
중학교 때부터 사진에 심취한 오빠는 오로지 사진 때문에 일본어과를 선택했다고 본다.
그 당시의 사진이나 인쇄기술은 일본을 따라잡을만한 국가(國家)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월간지의 사진기자로 취직했고, 선배와 종로 2가에 DP&E점을 차렸다.
컬러사진이 막 시작된 즈음이라 오빠의 가게는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
나는 생일선물로 오빠에게서 일제 자동카메라를 선물로 받아 친구들과 사진을 엄청 많이 찍었다.
산악회(山岳會)에 가입하여 주말마다 등산을 즐겼기 때문에. 
그리고 사진현상은 오빠 덕에 항상 공짜였기 때문에.

오빠는 머리도 나쁘지 않은 데다, 특히 음악을 좋아해서 남성중학교 때부터 밴드부의 작은 북 담당이었다.
국경일이 되면 이리에 있는 모든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역전광장에 운집(雲集)하여 단체행사를 치렀는데 오빠가 소속된 남성고등학교의 밴드부원들이 개선가(凱旋歌)를 울리며 중앙에 짜잔, 나타나곤 했다.
작은 북의 오빠는 항상 중심부에 있었다.
나는 얼마나 비밀스런 애였는지 친구들에게 오빠를 말하지 않았고, 동네 애들한테도 입막음을 단단히 해뒀기 때문에 그 사실은 동네 친구들 외엔 아무도 몰랐다.
오빠는 장래희망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내가 대학 다니며 팝송을 즐기게 되자, 귀 버린다고 클래식만을 권유하며 오빠는 자면서도 클래식을 들으며 잤고 깨면서도 클래식을 들으며 깨어났다.
하학 후면 동생들 다 제쳐 두고 오빠는 내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캐묻거나 영어 책을 소리 내어 읽히기도 했다.
자상한 성격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서려 있어 매사에 조심스럽던 오빠.
오빠는 친구가 열 명도 더 되었고, 특히 동수오빠하고는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그런데 집으로 친구들이 찾아 오면 내 방의 방문부터 닫았다.
오빠친구들은 나를 참 예뻐 했지만 오로지 친구의 동생으로만 그래야 한다는 철칙을 잘 고수했고,  나 역시 오빠 친구 중 그 누구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이 나마의 글쟁이가 된 건 호남평야의 자연도 자연이었고,  할머니나  맹고모의 영향이 컸겠지만 오빠의 보살핌 역시 지대했으리라 여겨진다.
여름방학이면 옆 마당에 작고 앙증맞은 천막을 치고 내 숙제를 돕거나 음악공부까지 시켰었고 실기연습까지 시키던 오빠.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서글퍼진 어둔 때
.....................................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니
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로
..........................................

오빠는 현재,  IT계통에 종사하는 아들 맹한경 덕택에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지금껏 술을 끊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도 안 끊겠다고 큰 소리 탕탕치는 오빠지만 몇 개인가의 병을 끼고 사는 눈치다.
고혈압, 골다공증 등등.

오라버니!
당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이 못난이 멀리서나마 경례(敬禮)를 바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핵심을 언제나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클래식 열심히 잘 듣고 있어요.
하루하루 사는 게 심심치는 않다는 지극히 단순한 당위성에 만족하면서요.
오빠가 등장하는 지난 세월에게 때때로 다가갈 수 있어 행복해요.
고마워요,
내게 오빠 노릇 제대로 해줬던 날들...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진정 커다란 격려(激勵)였다고 자주 감사하게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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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니와  오빠와 남동생 덕재,  그리고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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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가 오빠.  내 오른 쪽이 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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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맹미숙.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내 문우(文友)들




     맹하린


보름 전의 월요일은 국경일이라서 문협의 야유회에 다녀왔다.
해마다 한 번은 기본으로 가는 뿐따라라 강으로였다.
지독한 감기를 앓는 깜냥으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고, 안 가고 싶었는데 사람 노릇이라는 게 그리 단순한 일만은 아니어서 옷을 여러 겹씩 단단히 껴입고, 봄인데도 털옷까지 걸친 중무장 차림이었다.
몇몇 여류들이 내 털옷을 가장 부러워했을 정도로 날씨는 매섭게 추웠다.

P전 회장은 돌아오는 자동차에서 안 오려다 맹선생님 때문에 왔노라고 표현했다.
아사도를 잘 굽는 대가(大家)라서 안 올 수가 없었겠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싫진 않았다.
그리고 내 김치가 단연 인기였다.
김치를 잘 안 먹던 회원들도 김치를 맛 있게 먹었다고 칭찬했다.
나는 여러 문우들이 출발 전에 모인 바다가게의 책상 위에 김치 통을 약간 소리 나게 놓으며 투정처럼 말했었다.
"원래 왕따는 이런 것도 준비해와야 돼서 너무나 성가셔요."
문우들은 합창처럼 웃었다.
바리톤, 베이스, 소프라노, 알토 등이 적당히 뒤섞인 웃음이었다.

작가정신(作家精神)이 부족한 문우들에게서 잊을 만 하면 항명(抗命)도 받는다.
사실 작가정신(作家精神)이 모자라는 짓을 못마땅해 하는 자체가 작가정신(作家精神)에 위배(違背)되는 일이긴 하다.
가장 견딜 수 없는 농담은 나를 자꾸만 경로석으로 가라고 놀리는 일이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나 듣는 말이다.
한 번만 더 듣게 되면 문협을 안 나갈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 있는 중이다.
안 웃자니 그렇고 웃자니 그렇고 그런 농담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우를 다잡았나 하면 저 문우가 또 시작을 한다.
관심인지 비난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힐 때가 많다.
이래 저래 나는 점차 은둔자가 되어 가는 판국이다.
하지만 나는 대체적으로 대접을 받는 위치에 있는 편이기는 하다.

문협 뿐 아니라, 자유게시판의 은둔문인들 역시 나는 아끼고 사랑한다.
페북이나 트위터도 즐겨 들르지만, 자유게시판은 하루에 열 번도 더 찾아간다.
동생이나 조카 같은 은둔문인들을 음으로 양으로 두둔하고 싶기 때문이다.
페북이나 트위터는 항상 이웃 동네 같은데,  자유게시판은 내가 사는 동네인 게 분명하고 확실하다.

감기를 앓느라 강가에 몇 번쯤 혼자서 다녀왔을 뿐, 내내 잔디 위에 깔린 카펫 위에 엎뎌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통 사진도 못 찍었다.
강은 잔잔히 용솟음치는 밀물처럼 내 시야 가득 자꾸만 밀려 왔다.
찬바람을 쏘여 감기가 더 심해졌지만 잘 다녀온 소풍이었다.

이제 은둔하는 내 문우들을 만나러 쪼르르 자유게시판에 다녀와야겠다.
가끔은 그들을 우리 가게의 고객으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여긴다.
느낌이 그럴 경우엔 나는 시치미 뚝 떼는 선수 중의 선수다.
그들의 마음은 그 아름다운, 아름답다기 보다 빛나는 것 같은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고는 했다.
만일 자유게시판이 없었다면 그들은, 또는 우리는 아마도 돈에 치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매상을 많이 올리려고 매장을 상품으로 꽉 채우며 살기는 싫다.
수더분, 흐르며 우연히, 혹은 필연처럼 만나게 되는 문우들이 있어 그런 대로의 살맛이 난다.
그들이 있어 잡문이라도 끼적이게 되는 것이다.
내 뇌(腦)속에는 가족이 걸어둔 가훈(家訓)이 무사튼튼 언제나 걸려 있다.
"글 가지고 돈 벌 생각은 마세요.
오로지 글도 돈도 쓰고 싶어서 쓰는 분이 되세요.
돈 버는 일은 작은 꽃가게로 대만족이셔야 합니다."

안다. 재물을 모으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되지는 말라는 뜻이라는 거.
재바른 근심과 걱정을 지닌 과정 속에서도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진정한 행복이라는 정도는…….

때로 내가 만나는 문우들이 위트 넘치는 전사들일 때가 없잖아 있지만, 대부분 예민한 존재일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문우라는 설정은,   편하면서도  껄끄러운  존재가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새싹을 자라게 할 뿐 아니라, 온갖 아픔을 치료하는 의로움의 터전도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꾸만 비끌어 매고 걸어 잠그는 정서(情緖)를 우리가, 또는 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풀어내느냐가 우리 능력의 관건(關鍵)이랄 수 있다.
우리는 갈수록 첨예로워지는 게 아니라 차츰 너그러워져야 한다.



2012년 10월 6일 토요일

괜찮았어요!


           맹하린


잃어버린 밥맛을 찾으려고 요즘 부쩍 부식비를 과용(過用)하고 있는 실정이다.
며칠 전엔 갈비를 사다 토막 내어 차가운 물에 담가서 붉은 물을 일단 뺐다.
그리고 펄펄 끓는 물에 다이빙을 시켰다가 적당히 익혀 당면 좀 넣었고, 마늘과 파 송송을 얹어 소금과 후추로 간맞춰 들었다.
괜찮았다.

엊그제는 명태를 사다가 맨 밑에 양파와 무를 켜켜로 깔고, 맨 위엔 풋고추를 얹어 매콤한 양념 찜을 했다.
콩나물은 한 켠에 깐 뒤 익었을 때 수저나 주걱으로 숨을 좀 가라앉혀야 부드럽다.
괜찮았다.

어제는 만두였다.
그냥 만두가 아니라 감자를 찐 뒤 으깬 위에 삶은 계란도 몇 개 6등분으로 썰고 작고 네모나게 썬 양파와 갈아낸 고기를 볶아서 치즈와 살살 버무린 만두소를  현지인슈퍼에서 파는 오븐용 만두피에 넣고,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약간만 둘러 구워내는 우리집식 만두다.
경우에 따라 월계수 잎이나 현지인들이 쓰는 피망가루도 넣는다.
때로는  소고기 대신, 삶아 익힌  닭가슴살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서 며칠동안 간식시간마다 차게 먹는 맛 또한 근사하다.
옥수수 알갱이도 감자와 같이 삶아서 한 땀 한 땀 떼어 함께 넣었더니 더 고소한 만두가 되었다.
뜨거운 상태일 때 치즈의 녹아 있는 맛은 떠나던 감기도 다시 돌아와 욕심을 낼 지경으로 감동적인 맛이다.
괜찮았다.

밤새 비가 내렸고, 지금 새벽 5시쯤인데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은 각자 싸먹는 김밥이 될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야채를 볶고, 계란지단도 부치고, 생선맛살과 어묵까지 준비하여 커다란 접시에 예쁘게 담은 후, 각자가 취향대로 싸먹는 김밥이다.
와사비를 곁들인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환상이다.
괜찮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비 오는 날은 김치볶음밥이 낫지 않을까.
괜찮을 것 같다.

내 안에서 보름을 머물던 감기는 그동안의 극진한 대접(?)에 감사하다면서 어제부터 떠날 행장(行裝)을 꾸리는 모습이다.
1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감기.
올해는 오기는 왔는데 갈 생각을 안 하는 눈치여서 거의 날마다 칙사(勅使)대접을 했다.
드디어 가겠다고 가방을 꾸리고 있다.
지독했지만 덕택에 나 역시 대접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부디 안녕히 가시라고
자주 뵙고 싶지만
너무 자주는 권태를 몰고 올 게 확실하다고
제발 다음 해에나 뵙자고…….
나는 위대하신 감기님에게 작별인사를 올리고 있다.
가다가 다시 올까봐 우선 꿀 섞은 생강차를 한 잔 대접하고 있다.
내년에나 뵈어요.
괜찮았어요!


2012년 10월 1일 월요일

추석을 바쁘게 보내고






    맹하린


추석이 되면, 아르헨티나에 몸담고 사는 일부 교민들은 교회의 예배와 점심식사를 끝내고 우리 가게에 미리 맞춰둔 꽃다발을 찾은 후,  한인묘원에 가느라 바쁘다.
더러는 Memorial이나 Jardin de paz로 불리는 공원묘지에 가는 분들도 있다.
일요일에 문을 여는 한국인 꽃가게는 우리 뿐이므로, 아침 일찍부터 오후 네댓 시까지 빈틈없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필이면 마약에 절은 젊은 노숙인 들까지 나를 작전에 넣었나 보았다.
맨 처음 빈 생수병을 들고 얼굴을 잔뜩 찡그려 뜨려 울상을 한 20초반의 여자 노숙인이  나타났다.
물 좀 달라는 요청이었다.
물을 담아 주며 불쌍하다는 생각에 약간의 적선을 한 게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契機)로 삼은 노숙인 들은 바쁜 와중에 있는 내게 교대로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유리창을 닦아 주고 용돈을 얻으려는데 퐁퐁 비누 좀 나눠줘요.”
거기까지도 참았고, 물비누도 덜어줬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적선은 건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습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음 차례는 Balde(양동이)를 든 또 다른 노숙인 이었다.
나는 빗장으로 고정해 놓은 틈새로 야단 좀 제대로  쳤다.
너그러울 때는 너그럽지만, 볼상 사나운 일에는 가차 없는 나.
"너희의 연극에 오늘 내가 바보로 등장하니? 중앙분리대에 공동수도가 멀쩡하게 잘 나오고 있잖아! 그런데 왜 아파서 쩔쩔매며 일하는 중인 나까지 지나가는 자동차의  유리창 취급을 하는 거야?"
그래도 마지막처럼 찾아든 여자노숙자는 어디서 훔쳤는지 팬지꽃을 한 박스나 가져 왔다.
"나는 내가 골라서 사 오는 꽃나무만을  판매하거든?"

거지는 달리 거지가 되지는 않는다. 일하기 싫어하고 뭘 바라기 때문에 거지 신세를 못 면한다고 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거지근성이 살아있는 것이다.
내 생전 감기를 열흘이나 앓아 본 일은 처음이다.
입맛을 잃어 밥 굶기를 여러 날이나 밥 먹듯 했던 날들도 첨이다.
거지들이 교대로 찾아오던 날 역시 처음이었다.
어머니날이나 봄의 날이면 인터넷 신문이나 인터넷 게시판에 잊지 않고 광고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봄의 날엔 결혼식 꽃이 겹쳐, 남의 중요한 일생일대의 행사를 불성실하게 해낼까가 염려되어  일부러 광고도 사양했었다.
매상은 예년보다 줄지가 않았다고 본다.
일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당연히 건강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열흘 동안 되도록 글도 멀리하며 지냈다.
10월 세 번 째 주일인 어머니날 준비를 위해 나는 거의 포스팅도 덜하며 바쁨과 휴식 사이를 오갈 것이다.

한 계단씩이 아니고 큰일만을 도모(圖謀)하는 대통령 크리스티나의 정책다운 정책은 어찌 된 일인지 한인 타운 거리를 거지와 마약쟁이들의 천국이 되도록 만들었다.
일요일이나 수요일에 나타나는 한국인들에게서 생기는 적선이 수월찮기 때문이다.
아베쟈네다도 좌판쟁이들과 대낮까지 설치는 강도들의 활동무대가 되는 일에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만 안 당하고 나만 잘 살고 있으면 된다는 인식에 젖은 사람들이 따로 없어진 시점이다.
본래의 의도(意圖)가 어찌 되었던 간에 거지와 마약쟁이와 절도범이나 강도들까지 육성(育成)하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주 떠오르는 현실이다.
정부는 어디서 정책개발이 삐거덕대고 있는지 정치쇄신을 중점적으로 되짚어 볼 필요가 있어야겠다.
분명한 것은 복지국가건설은 거지나 강도 등의 활동영역에 보탬이 되고 더불어 사는 행태는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이라도 정치적 혁신과 개선에 포커스를 제대로 맞추는 나라가 되었으면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
세금만 걷어 들이는 게 능사(能事)는 아니라는 얘기다.







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엘로이




          맹하린


일 년 중 두 번째로 큰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봄의 날(9월 21일)에 대비(對備)하려고
수요일에 미리 꽃시장에 갔다.
금요일에 구입하는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트라픽으로 한 번에 들여 오면 정리 정돈하는 일에 시간을 다 허비하는 불편이 따른다.
막시는 하필이면 자동차가 고장이라고 며칠 전 통보해 왔었다.
미리 예약했더니 20대 중반의 현지인이 수요일 새벽 5시에 집 앞으로 왔다.
꽃시장은 6시에 열고 20분이면 닿는다.
그런데 대목이 끼면 5시에 출발해도 자동차를 세울 자리는 넓고 거대한 차고마다 겨우 몇 개 밖에 안 남는 형편이다.
비가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내가 막시와 함께 가면 가족은 안 가도 되지만, 다른 기사와 갈 경우 구입하는 꽃마다 나와 가족이 모두 옮겨야 한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은 마르가리따라고 먼저 관등성명(官等姓名)을 알리고 나서였다.
그는 싱긋 웃더니 윈도우 와이퍼가 부지런히 작동(作動)되고 있는 차창(車窓)의 김서린 부분, 그러니까 백미러 바로 옆에 한글로 '엘로이'라고 왼손의 검지를 사용하며 써냈다.
현지인들은 대다수가 왼손잡이들이다.
"한국어를 배웠어요?"
"아뇨. 이름만 쓸 줄 알아요."
"이름만이 아니고 이름도 쓸 줄 아는군요?"

그는 자동차가 꽃시장을 떠나올 때, 꽃이 너무 많다고 내 가족은 택시 타고 따로 가야한다고 주장(主張)하면서 사무실의 밤 당번 관리인인 다미안에게 쪼르르 전화해서 일일이 보고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일러바치기만 좋아했지, 다미안이 항상 내 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틈을 비집고 가족이 차에 탔음을 알자, 그는 지나치게 놀라고 있었다.
"당신에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내 가족은 말라깽이고,  그리고 우리 한국인은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떤 어려움이나 틈새도 비집고 들어가는 선수들이죠."
"하하 하하하하."
그에게서 경쾌한 웃음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 나는 불쑥 물었다.
"애인 있어요?"
그는 이번엔 언제 커다랗게 웃었더냐 싶도록  실실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없어요, 애인."
비는 그치는 일을 잊었다는 듯 연거푸 내렸고,  그는 히터를 아끼려는지 아니면 내가 히터 켜는 걸 싫어하는 정도는 미리 다미안에게 주워들은 사람처럼 유리창을 약간씩 열어 두고 운전했다.
그 열린 창 사이로 빗방울들이 자주 날아들어 내 얼굴을 골고루 적셨다.
"후안 데 가라이로 지나갈래요?
후안 데 가라이 대로(大路)는 일방통행이고 신호가 일사불란(一絲不亂) 잘 연결되어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는 길이다.
4Km 남짓의 거리를 막힘없이 달릴 수 있는 길.
나는 막시에게도 언제나 그 길을 이용하도록 이미 오래 전부터 미리 지시해 두었었다.
논스톱.
계속 파란불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 길을 즐겨 지나다닌다.
후안 데 가라이…….
모임의 S여인이 이민 왔던 맨 처음에 도무지 그 길의 이름이 외워지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후안 대가리라고 기억했었다는 거리.

나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한국어로 이름이라도 쓸 줄 아는 그에게 괜스레 고마웠다.
그 역시 더 이상의 말은 됐다 싶었는지 음악을  틀었다.
한국가요였다.
아마추어 수준의 아주 못 부르는 음색이었다.
나는 한국가요를 잘 안 듣는다.
특히 정오(正午)부터는 더 안 듣는다.
저 혼자 입력되어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흥얼대기 때문이다.
나는 새삼 희망하게 된다.
나도 안 듣는.
나도 못 들어 본.
나도 가까이 하지 않는.
그러한 한국가요를 단지 고객을 위해 준비하고 틀어주는 엘로이의 앞날에 밝고 환한 축복 있으라!!!

그가 어찌하여 레미세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꼭 성공적인 삶을 초대할 것만 같은 예감이 앞선다.
오가는 값.
기다린 값.
나는 그가 부르는 차비보다 훨씬 더 얹어 주면서 잊지 않고 내 특유의 농담을 건넸다.
"택시보다 엘로이의 차를 더 좋아 해서 가족이 끼어 탄 차비까지 더 얹은 값."

비는 여전히 퍼붓고 우리가 탄 엘로이의 자동차는 Chacabuco 공원 앞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옆 차의 조수석에서 현지인 청년이 내리더니 애인이 운전하는 차의 앞 범퍼 위에 하트모양을 역시나 왼손으로 그리고 떠나갔다.
 애인은 그제야 우산을 펴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미소 가득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내 나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싱그러운 장면들과 사실들에게 감동되고 매혹을 느낀 탓에 지금껏 남의 나라에서 잘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금요일이던 봄의 날.
그리고 토요일에 있었던 H교회의 결혼식꽃.
인생사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 큰일들은 항상 겹치고 겹친다.
일 년 중 가장 꽃값이 비싼 시기(時期)인데도 어디서 그렇게 나타나는지 많은 우리의 한국인 청년들과 어느 정도의  현지인들을 만나보는 날.
무척 고달프면서도 참으로 감격도 되는 날.
봄의 날.
몹시 힘겨워 그걸 만든 사람을 원망하면서도  그걸 만든 사람과 내 고객들에게 새록새록 감사하게 되는 날.
나어린 친구 수산나에게도 일을 도와줘  감사했다고 따로 짚고 싶은 날.
외갓집에서 출생하여 이름의 앞에 외자가 붙는 다른 친구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어머니 날에나 제대로 돕겠다고 했던 날.

나는 며칠동안 지독하게  춥고  열이 많고 그리고 음식마다 모두 쓰디쓴  맛의 감기를 앓는 중...





2012년 9월 18일 화요일

봄, 봄이다



          맹하린


폴더를 열거나 클릭 할 때마다 바이러스의 침투를 알리는 경고음이 사이렌처럼 잦게  울리고 있다.
바이러스의 침입이 있었지만 해결했다는 알림과는 또 다른 느낌의 경고다.
그런 와중에서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중국의 어선들이 센카쿠 열도로 몰려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5성홍기(五星紅旗)까지 매단 점으로 봐선 심상찮은 결집(結集)이다.
마치 고전을 최신식으로 편집한 현대판 삼국지를 접하는 기분이다.
세상의 모든 정치메니아들은 때로 결집을 시도하고 실행하는 일에 과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폭풍도 대단한데 4개의 폭풍이 겹친 한국의 태풍 역시 대단한 위세였다고 본다.
차분히 바이러스를 몰아내고 흔쾌히 다른 창들을 다시 깔고 지울 것 지우자, 더 빠른 속도로 새로워진 컴퓨터.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일주일 내내 비는 안 내린 찌푸린 날씨다.
이윽고 봄비의 속삭임...
이쯤해서는 까무룩 빠져드는 노동이 유일한 소통이다.
언제나 기다림을 깨우치던 산책로는 풍경이 풍경을 할퀴거나
풍경이 풍경을 토닥이고 있다.
봄날의 출산을 치마폭 가득 감싸 안고 쩔쩔대며 진통 중인 하늘.

등에 영원의 낙엽 한 장씩 키우며 입어냈을 사막거북이 두 마리 사기로 했다.
쇠와 금이 엇갈린 빛의 잎이며 등이고 망토다.
한 마리의 외로움 보다는
두 마리의 외로움이
나와 간격을 두고 지탱해 줄 것만 같다.
때로 나는 하얗고 사소한 상념의 음표를 쉬엄쉬엄 그려낸다.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에 연초록 잎들이 먼저 화답하는 계절이다.
봄은 이미 당도(當到)에 이르렀다.
고요를 품었으나 전진(前進)하는 봄!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사진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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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는 나를 장한나 닮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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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양옆에 송태일과 송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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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협 여류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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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우 S여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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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협 막내 정은님과 야유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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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때로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도 입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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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협 여류들과, 그리고 내가 아낌없이 꽂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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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문우 S여사와...


   

맹하린


내가 네 살일 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서울에 가셨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던 평소의 뜻을 그런 식으로 실행하신 셈이다.
나는 안 보이는 주머니 속에 넣어져 아버지를 따라 난생 처음 서울 나들이를 했다.
전주와 이리 사이에 있는 백구면 시골뜨기의 첫 서울 나들이였다.
아버지가 요절(夭折)과 같은 운명(殞命)을 하시자, 고무부가 아버지 이상으로 나를 예뻐 하셨다.
지금은 백석대의 음대학과장으로 있는 고모의 딸 송주은과 함께,  나는 서울 나들이를 고모부와 다시 해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할머니 역시 절에 갈 때나 이리와 전주로 제수(祭需)장을 보러 다니실 때 마다 꼭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오빠는 너무 컸고, 동생들은 너무 작아서였다는 게 첫 번 째 이유였지만,  내가 가장 데리고 다니기에  만만했던 것 같다.
나는 운명론자다.
그런 저런 일들 모두 각각 다른 부피의 에너지가 되어,  나는  어쩔 수없이  글쟁이나마  되었을 것이다.

며칠 전 , 내 고객인 Arquitecto(건축 기사) Kim이 부친의 팔순인 금요일에 필요한 사방화를 꽤 값비싼 가격으로 맞추고 갔었다.
어제 나는 꽃다발 7개까지 나의 선물로 준비하여 동시에 납품을 했다.
Arquitecto Kim이 누이가족은 물론이고 자녀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가서  부모님께 드리라는 의미에서였다.

새삼 고국의 가족들이 생각나 사진을 꺼내 보며 내 지난날들을 그립게 떠올렸다.
고모 내외는 물론이고 가운데 서 있는 오빠도 보고 싶었다.(내 중학교 졸업사진이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사색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에 지금은 거의 밝게 산다,)
오빠는 요즘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에 그토록 즐기는 등산도 접었다는 소식이다.
고모부의 조카인 내 친구 송경수도 그의 엄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모는 그 무렵, 맏동서인 송경수의 엄마에게 두루마기와 숄을 선물했었다.
이리고등학교 교장이던 송경수 아버지의 봉급으로는 네 자녀 뒷바라지가 빠듯하리라는 걸 고모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본다.

얼마 전 나보다는 연상이지만, 문우인 S여사와  까페떼리아 "셀레스테(파랑)"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피부가 뽀얗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그분은 사진을 정리하다 나오셨다고 말했다.
주위사람들이 자꾸만 예고도 없이 떠나므로 뭐든 정리하게 되더라고 했다.
옛 사진들을 그래서 더욱 다시 꺼내 보게 된 나지만, 나는 아직은 뭐든 정리하기가 싫어서 마구 어지럽히며 살고 있는 편이다.
정리 좀 해야지 그렇게 중얼대면 가족이 나를 은연중에 두둔해 준다.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사시면 돼요.  워낙 예외적인  존재시니까요."
그렇다.
아직은 사진을 정리하느니 사진만 바라보게 된다.
나의 나날은 하나하나의 독립된 나들이다.
현재의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와 고모부를 따라 나서지는 못하고 있지만,  내가 나를 데리고 다닌다고 보여진다.
최근의 나는 일주일 후에 떠나게 될 문협의 소풍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 안에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높다랗게  내 앞에 쌓여 있는 형편이다.
사진을 보며
사진이라도 보며
나는 나를 휴식시키고 있다.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Los manteros(좌판 상인들)




   맹하린


나의 행동반경(行動半徑)은 내가 생각해도 뻔하고 빈약한 편이다.
한인 타운에 위치한 집과 가게와 이웃과 산책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약간 멀리 떨어진 꽃시장과 어쩌다 안 바빠야 나가는 성당 정도가 내 활동영역의 전부가 아닐까 여겨지게도 된다.
더 있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나가는 세 개의 모임.
내가 만나는 사람 또한 뻔하고 뻔하다.
그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족이다.
그러니 내가 꽃 이야기나 가족이야기를 거의 안 해야겠다는 각오를 강하게 굳히다가도 자주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나의 취약점 중의  취약점일 것이다..

엊그제는  냉장고 속의 꽃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거의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가는 꽃시장을 세 번째로 갔다.
리시안뚜스와 재스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현지인이며 40중반인 마우리시오가 내게 질문도 아니고 불만도 아닌 얘기를 불쑥 토로(吐露)하고 있었다.
"마르가(마르가리타의 애칭), 그저께 퇴근길에 우리 동네 야채가게에 들렀어요. 미 에스뽀사(나의 아내)에게 과일을 좀 사다 줄 생각이었죠. 그런데 무슨 놈의 야채가게라는 게 꽃나무 몇 개와 꽃 몇 묶음까지 갖다 놓고 파는 거 있죠? 내가 미칩니다. 내 얘기는 무슨 볼리비아노(볼리비아인)들이 감자나 제대로 취급하지 않고 꽃까지 파느냐는 겁니다. 내가 듣기로는 아베쟈네다 거리에 가면 수스 바이사노스(당신 동족들)마다 걔들 때문에 아예 골머리를 싸매고 산다죠? 이러다 의류도매상이고 꽃시장이고 모두 볼리비아노들 차지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이 꽃시장만 해도 그래요. 걔네들 좌판(坐板)이 얼마나 날이 갈수록 많이 늘어나는 중입니까? 자고새면 늘어나지 않던가요?  아니죠, 이런 식이라면 아르헨티나, 이 나라가 머잖아 볼리비아노들  세상이 될 것만 같아요."
꽃시장에 가면 느긋하게 수다까지 나눌 만큼의 시간적 여유라고는  없는 나인지라 하하하 웃기부터 해내고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는 걸로 대답을 마친 후 속히 다음 코스인 라파엘의 가게로 성큼성큼 이동하게 되었다.
그냥 나오기 뭣해서 마우리시오의 가게를  나오며 남긴 내 대답은 너무나 간결했다.
"우리가 볼리비아에 가서 좌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참읍시다. 까이꺼! 아셨죠?"

라파엘은 일본인이다.
50초반쯤으로 보인다.
오사카 출신의 2세일 것이다.
매사가 농담 위주인 라파엘인지라 나로선 잽싸고 명쾌하게 잘 받아 넘겨야만  하는 게 관건 중의 관건이다.
꽃값의 거스름을 주려다가도 순식간에 나를 주시(注視)하며 화살을 쏘아대는 그.
"께 린다(예쁘네)!"
그럴 때 나는 멍청하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다음에 당신 부인이 나오면 일러 바쳐도  되죠?"
그의 부인 비비안나는 대목 때나 나와서 거들고는 한다.

글로벌 시대!
꽃시장에도 그런 기류(氣流)가 어딘지 모르게 점차 눈에 띄게 회오리 치고 있는 중이다.
마우리시오의 말처럼 요지(要地)를 벗어난 옆 켠으로 볼리비아노인들 소유의 좌판이 자꾸만 늘어나는 추세이고, 그 진전(進展)역시  상상외의 급격한 속도를 가하고 있다.
공생공존(共生共存)이라는 말이 피부 위에 들러붙는 느낌이고,  실감까지  되어지는 시절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크리스티나는 3선을 겨냥하고 투표연령을 16세부터 가능하도록 바꾸는 법안을 상정(上程) 중에 있다고 한다.
16세...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투표를 하기에는 어쩐지 부족한 나이가 아닐까.
왜냐하면 어른들조차 투표를 군중심리에 치우쳐 해낸 뒤,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이나 목격했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더 많은 인접국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지도 모른다.
느닷없는 사면령을 내려 인접국 사람들 너도나도 영주권을 낼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오나가나 인접국 이민자들이 판을 치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좌판을 깔아대고 있다.
모포를 깐다는 데서 유래(由來)한 좌판쟁이들인 것이다.
한국도 인접국 일꾼들이 몰려들기는 한다지만, 이 정도로 물불 안 가리고 시장경제를 잠식하려고 들지는 않는다고 본다.
언젠가도 짚고 넘어 갔지만, 우리 가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 하던 볼리비아나 그라시엘라는 30도 안 된 나이에 정식고용을 기피하는 술수에  대단한 기지와 능란함을 보이고는 했다.
여러 한국인들 가게나  집의  시간제 청소부로 일하면서 정부가  내어주는 보상금마다 알뜰살뜰 모조리  포식(飽食)하는 과정(過程)을  매우 과학적이다 싶게 탐닉하고 있는, 너무도  영악한  여인이었다.
어느 날은 내게도 신청을 왜 안하는지 이해가 안된다면서  간곡히 권유까지 했었다.
남편의 병환보상비, 아들의 학비보조금, 어쩌고 저쩌고...
나는 그때 난생 처음 사용하는 말을 속으로만 답했었다.
(누굴 뭘로 알고!)

볼리비아인 들을 제품공장의 일꾼으로 고용하는 친구 수산나가 얘기하던,  그들에 대한  명칭이 새록새록 부각(浮刻)되는 작금(昨今)이다.
"우리끼리 사용하는 걔네들에 대한 호칭을 자주 바꾸게 돼요. 볼씨라고 하면 벌써 알아듣는 눈치라, 지금은 산동네 애들이라고 바꿨어요. 그런데 산동네 애들이 점점 좋은 차들을 소유하며 부자가 되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한국인을 앞서는 면도 많아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일감을 그대로 카피해서 우리보다 싼값에 해치우는 그들이거든요. 우린 결국 유럽이다, 미국이다, 한국이다, 브라질이다를 휘돌고 다니며 최신식 모델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상납한 결과가 된 거죠"
나는 뜬금없다는 듯 불쑥 대답했다.
"머잖아 우리는 산동네 애들을 이 나라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일이 생기겠군요?"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다가오고 다가오던 등불들






         맹하린


36개의 벽에 거는 꽃다발.
52개의 식탁 꽃.
8개의 메인식탁에 올리게 될 사방화.
6개의 꽃길기둥.
위와 같은 내용(內容)의 완성된 꽃 장식들을 싣고  J교회 수양 관에 위치한 결혼식 Fiesta(파티)장소에 갔다.
현지인 기사가 운전하는 트래픽을 이용한 길이었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7Km 떨어진 지역이었다.
수도(首都) 9 de Julio 거리에서 0Km로 시작되는 기준이기도 했다.
스승의 날,  J교회에서 열리는 36인의 임직식 등의 큰 행사들이 금토일월 4일 동안에 걸쳐 여럿이나 겹쳐 있었다.
보름 간격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있으면 적당하고 고마웠을  행사들이어서 정신적으로 많은 압박감이 있었다.
주말이었는가 하면 주말의 시작이기도 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짐차를 이용하고 싶어서 전화로 장소와 날짜 등을 알리는 메시지도 남겼고, 전화를 여러 번 해도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다른 일이 예약된 상태인가보다, 그런 판단이 생겨 항상 이용하던 현지인 운송회사에 다시 연락을 취했다.

J교회 수양관은 천주교 피정의 집이나 다른 교회들의 수양 관에 비해 매우 현대적이며 가장 첨예로운 데다 특별하고 다양한 시설을 골고루 구비한 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축구장, 수영장, 교회, 각종 강의실과 기도실, 식당 , 정원등이 광활하면서도 깔끔함 그 자체처럼 돋보이고 있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꽃장식에 소비된 시간만 한 시간도 넘게 정신을 쏟은 셈이다.

돌아오는 ruta(고속도로)에서 피로감이 단박에 달아나던 , 나는 시야 가득 등불을 담아내기도 하고  닮게도  되는 광경을 꽤 오랫동안 주시했다.
라플라타(은빛)도시에서 열리는 축구대회를 향해 맞은편에서 1분도 쉬지 않고 멈춤 없이 달려오는 승용차들, 그리고 응원단들을 실은 버스들을 거의 한 시간 이상이나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괄목할 만한 사실은 현지인들은 10년된 차는 기본으로 알고 있고, 20년쯤 된 차까지도 너끈히 몰고 다니며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들과 기사,  두 사람은  초반부터 동시에 합창을 했다.
“우와, 오늘 라플라타 시에서 있는 벨레스와 에스뚜디안테스의 축구시합!”
각종 크고 작은 차들이 모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우리의 왼 켠으로 수없이 다가오고 다가왔고 그리고 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 기둥으로 화할까를 염려하는 사람처럼 뒤를 돌아 본 일은 없어서 그렇게 다가 온 차들이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선  잘 모른다.

응원단의 대표나 주역들은 마피아들의 손아귀와 악력(握力)에 개입되어 쥐락펴락 조정되고 있는 현실을 결코 외면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라선지,   응원단들이 탄 버스들의  선두(先頭)마다  필수적으로 경찰차들이 진두지휘하듯 앞장섰던  행군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지방 도시들은  대낮에도 헤드라이트를 켜야 된다는 교통법규 때문에 자동차들마다  두 눈에 등불을 켜는  의무와 책임을  철저히 실행하는 중이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 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된  법령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방도시들은 그러한 법제정 후, 교통사고를  눈에 띄게 극소화 했다는 칼럼을 언젠가 읽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나 많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자동차들의 행렬과
그처럼 많은 헤드라이트의 다가옴을 뒤늦게나마 접하고 보아낼 수 있어서 나는 내내 감동의 연속상태에 잠겼던 것 같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축구장을 가득 메워 백만이라는 관중의 숫자를 기록하는 거라고 아들과 현지인 기사는  서로 죽이 맞아 신나게 얘기의 꽃을 피워 냈다.
응원단끼리 싸움이 나서 인명피해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도 뒤따랐다.
아르헨티나 유명 사회자인 띠넬리의 별장이 맞은 편이라는 설명도 내게 전해졌다.
별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성채(城砦)였다.

아르헨티나가 진정 불경기의 여파에 시달리는 중인지 전혀 실감이 안 나던, 아르헨티나는 과연축구의 나라인 게 확연한 사실을 눈으로 재확인 하듯  1시간 정도 지켜보면서 나는 내 활동영역의 본거지인 가게에 5시쯤 돌아왔다.

인간은 6백만 정도의 어휘를 구사(驅使)할 수 있으며 그러한 언어구사 능력은 이렇다 할 노력이라거나  의식적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 자연적인 팔다리의 자람과 다름 없이 언어 능력 또한  자연발생한다는 연구를   설파한 언어학자가 있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많은 부분을 그 많은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등불에 쏘이고 돌아왔다고 자인하게 된다.
누가 뭐라 해도 길고 말 많고 가끔은 오타도 생길 수 있는 글들을 영원에 이르기까지 써낼 생각이다.
나는 마치 언어들마다 두 손 가득 받아서 마음 깊숙이 재워둔 사람처럼 새삼 든든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