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0일 월요일

맹고모


          맹하린


내가 저 정도로 대단하지도 않고, 그 정도로 훌륭하지도 못하고, 이 정도로나마 유명무실한 글쟁이가 되었다는  건 순전히 고모의 영향이 컸다.
물론 선천적인 약간의 끼도 작용을 했을 테지만…... .
한 면(面)에 하나만 허가된 양조장을 운영했던 우리 집.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합(統合)시키는 걸로는 맘에 안 찼던지. 쌀로 만들던 막걸리를 잡곡으로 대체(代替)하도록 법을 바꿨던 격동기(激動期) 이전까지,  우리 소유의 전답(田畓)은 해마다 이웃마을까지 늘어났다.
고모는 전주사범을 나왔고 J대학 국문학과를 중퇴했다.
내동생 맹미숙은 고모의 미모(美貌)를 빼닮았다.
나는 외가(外家) 쪽을 닮았는데 고모나 맹미숙은 친가(親家) 쪽을 도습(蹈襲)했다고 본다.
나와 맹미숙은 고모의 심부름을 자주 다녔다.
특히 햇과일 심부름이었다.
나는 중학생이었고 동생은 초등학생이었다.
주로 일요일에 해낸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입덧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이유로 일꾼들을 보내기는 부끄러웠을 것도 같다.
고모의 자녀들이 넷이나 됐으니 나와 맹미숙의 수고가 얼마나 컸을지는 말해 무엇 할까.
십리(十里)가 아닌. 오리(五里). 그러니까 2Km 반경(半徑)의 근동(近洞)들이었다.
창산 리의 복숭아와 매실.
마전 리의 도마도, 그리고 참외.
득잣의 오디.
돌산 리의 청포도와 흑포도.
과일장사하는 집들은 아니고 한갓 농가(農家)였을 따름이다.
직접 따 줬으므로 싱싱했고 푸짐했다.
오가는 길마다 야산(野山)과 도깨비 방죽과 크고 작은 강과 수리조합의 수로(水路)와 호남평야의 들판과 나무와 꽃과 새와 물고기들이 시야 가득이었다.
언제나 고분고분 했던 나는,  포르르 의견을 내세운 적이 있다.
고모가 우리를 키우기는커녕 우리가 고모를 키운다는 느낌 같은 게 불쑥 치밀었던 날이었다고 여겨진다.
-나무를 심으면 3년이면 열매가 열리는데 왜 그렇게 안 해?
-우리는 우리 일만 잘 해내면 돼. 더불어 살아야잖아. 그 사람들도 현찰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골고루 사 먹는 맛이 최고야.  몰랐구나?

일 년에 두서너 번의  홍수로 인하여 논밭은 물론이고 강이나 수리조합의 수로(水路)들이 온통 물에 잠겨 거대한 하나의 강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야산에 올라 어린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어른들이 전부인 틈새에 서서 물 구경을 즐겼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는 지대가 약간 높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새터 마을의 미장원에 가서 화기(火氣) 지닌 숯덩이가  담긴  쇠집게를 머리에 얹고 뽀글파마도 했다.
오로지 고모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뜨겁고 지루하고 억지춘향이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때의 영합(迎合)이 어떻게 지대(至大)한 작용을 했고, 어떤 효과를 가져 왔고. 얼마만큼의 후유증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오랜 세월,  일 년에 미용실을 한 번 가던지, 한 번도 안가는 결단을  획득(獲得)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모가 보던 책들은 모두 내 차례였다.
중학교 때부터는 새 책을 구입하거나 대여점을 이용하게 되어 나는 거의 책의 세상 속에서 살았다. 그 무렵 나는 용돈을 삼중으로 받았다.
엄마, 할머니, 고모.
나는 그 시절 제법 호강을 했었다고 자인(自認)해 왔으므로,  어른이 되고 부터는 웬만한 고생 정도야  눈도 깜짝 안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일평생을 호강만 하며  살 수 있을까.
되와 말로 달고, 자로 재서 복을 받는다질 않던가.
나는 이러는 나를 자주  맘에 들어 한다.
비록 과일 사러 이 동네 저 동네 동생 손잡고 묻고 물으며 휘돌아 다녔지만 나름으로는 호강하며 살았는데, 그런 내가 난데없이 고생이라니, 그렇게 절망 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간다면 그건 진짜 비극(悲劇)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책을 안 읽으면 머리에 곰팡이가 피어나는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처럼 나는 날이면 날마다 책을 읽어 왔다.
지금은 쓰지 않으면 온몸에 바이러스가 번지는 신탁(神託)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에 이르렀다.
매일 써내지 않으면 바이러스의 침범(侵犯)을 걷잡을 수없이 당할지도 몰라서 나는 이리도 한결 같이 써내고 써낸다.
하지만 써야겠다고 쓰는 건 아니다.
새벽이 되면 자연히 책상에 앉거나 방바닥에 엎디면  그냥 써진다.
잘 써야겠다, 문학적으로 써야겠다 , 하는 등의 부담감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그점이 특히 좋다.

내가 해낸 여섯 번의 고국 여행 중에 두 번은 뵈었고, 세 번째에는 고모를 못 뵈었다.
1995년쯤에 타계(他界)하신 탓이다.
그래서일까.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도 없는 것만 같은 현재의 심정이다.
다시 간다면 환국(還國)이나 해볼까.
나는 지금도 고모의 심부름을 해내듯 산책 후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꼭 과일을 사들고 돌아오는 나를 발견 하게 된다.
청주에 계시고, 전화를 하면 낭랑한 음성으로 엄마는 항상 그러신다.
"아이고. 내 새끼야!"
엄마는 고모의 그늘에 가려 언제나 조용조용, 항상 고요고요 있는 듯 없는 것처럼 살았기 때문인지 나는 아무리 그래도 엄마 이전에 고모가 더 보고 싶은 것이다.

우물물은 센물이라서 머리를 감으면 뻣세다고 단물인 강물을 찾아갈 때 역시 나와 맹미숙을 양옆에  데리고 다니던 고모.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국제전화 속에서 그런 얘기들을 꺼내면 맹미숙은 그런저런 기억을 하나도 못해 낸다.
나를 따라 다닌 건 아는데 왜 갔었는지를 모르겠다는 얘기다.
이 또한 인생이다.
어떤 핏줄한테는 소중한 기억이,  어떤 핏줄에게는 전혀 소중하지가  않은 것이다.
내게 그나마 조용조용 고요침착한 면이 손톱만큼이나마 있다면 그건 엄마의 나긋함이 스며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하여간에 나를 글쟁이로 키운 건 고모.
바라 볼 때마다 조카의 입장에서도 아름답게 비쳐서 차마 거절하거나 반항할 수조차 없었던 맹고모였다.
실제로 나와 동생은 고모를 놀릴 때마다 그렇게 불렀다.
-맹고모!

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송별사를.
졸업반일 때는 답사를 읽게 되었던 일도 내 발표력에 적절한 영양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아직은 고모를 더 이상 보고 싶어 해선  안 될 것이다.
나의 신(神)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고모의 심부름을 해내듯 산책하고 그리고 과일도 사고 꾸준히 쓰고 싶은 글도 써내고, 그래야하겠기 때문이다.
맹고모…….
아셨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아름다워 정말 닮고 싶은 사람이라고 속으로 매번 감탄하고 희망했던 날들의 나를.
시골에 몸담고 살면서도 자고 새면 욕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욕 한 마디 안 하는  생을 이룩하고 언제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고모...
맹고모!
사랑 했어요.
사랑 합니다.
영원히요!!!





댓글 4개:

lovemate :

님의 그리움이 묻어있는 글 잘 앍었습니다.
사람이든, 고향이든, 아니면 어린시절이든, 그것을 그리워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고 생각해요.
님의 마음의 보물창고를 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Oldman :

참으로 많은 영향을 주신 어르신이셨군요. 글을 통해 말투가 곱고 조용한 그 분의 모습을 뵙는 듯 합니다. ^^

maeng ha lyn :

살면서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정겨움은 왜 이리도 많을까요?
보물창고 잘 지니고 있을게요.
님의 부탁이니까요.ㅎㅎ
매번 짚는 얘기지만 저는 저를 아끼거든요.
내 그대들도 아끼다염~ㅎㅎ

maeng ha lyn :

ㅎㅎㅎ
칸이 바뀌어 님과 님에게 드리는 댓글의 순서가 바뀌지나 않나 싶습니다.
방금 애인에게 첨으로 꽃을 선물한다는 분에게 꽃을 해드리느라 혼을 약간 뺐었거든요.

제게 맹고모가 있었기 때문에 님들도 만나지 않았나 싶어요.
잘 살아야겠어요.
정신적인 잘 살아냄 말이죠.
산뜻한 날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