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기차는 나를




       맹하린


꽃시장에 도착해서 자동차가 왼쪽의 광장으로 들어설 때면,  간혹 오른 쪽 역사 옆에 멈춰 있는 기차를 발견할 때가 있다.
아마 종착역(終着驛)인지도 모르겠다.
 그 기차역은 꽤 그럴 듯 하다.
종점(終點)도 되고 출발점(出發點)도 되는 것이다.
새벽시간에, 사람은 얼마 안 보이고 칸마다 불이 켜져 있는 기차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하루가 환하고  복될 것만 같은 예감을 껴안는다.

기차는 인류의 문명이 시작될 즈음에 만들어진 속도의 쾌거(快擧)이며 속박(束縛)에서의 자유다.
이편과 저 편은 확실하게 구분되고 모든 경계(境界)가 확고하다.
울퉁불퉁 흔들리지 않고 평탄한 길 다짐하며 수많은 풍경을 보여주기에 충실한  달리는 마술사.

평소의 나는 목적의식이 강하고 뚜렷하지만, 매사에 신중한 면모도 없지는 않다.
약점 중의 약점이라면 생각이 곧 행동이 되는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성품.
많은 날들을 지나오는 동안 읽을 만한 책들이 가까이 있어 뿌듯했지만, 수없이 많은 풍경이 다가 서듯 전개(展開)되거나 멀어지 듯 사라져 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대장촌 기차역 철로 옆 대기실에 친구들과 가방을 나란히 붙이듯 세워뒀었다.
항상 일찍 닿기를 선호하던 우리는 코스모스 꽃밭에서 한참이나 희희낙락 놀았다.
그런데 대기실에 되돌아 가보니 내 가방이 열려 있었다.
내가 후원회비를 준비했다는 걸 아는 사람의 소행(所行)같았다.
(내가 다니던 I여고는 사립학교였다.)
그럴 때 나는 소란을 피우는 게 뭔지도 모르는 바보다.
이사람 저사람 의심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자란 사람이다.
하학 후 집에 가서 조모(祖母)와 작은 음성으로 주고 받으며 사태(事態)를 알렸다.
당연지사처럼, 조심하지 그랬느냐, 아까워라, 등의 추궁이 한 마디도 없다.
다시 학비를 받을 수 있었다.

조모(祖母)가, 서울의 우리 형제들에게 불편한 몸으로 찾아 오셔서 열흘을 잘 지내다가 극적(劇的)으로 임종을 마치던 얘기는 훗날 기회 닿는 대로 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중편을 써 둔지 오래 되었지만 일단 숙성(熟成)시키는 중이고,  당장은 발표하고 싶지가 않은 심정이다.
떠나시기 며칠 전, 고모네 애들 없는 틈을 타서 나와 맹미숙에게만 말해 주던 조모의 유언과 다름없던 말들.
감묵이네, 철자네, 영님이네 등등, 그렇게 여럿이나 되는 촌부(村婦)들에게 가족 몰래 돈을 빌려준 얘기가 먼저였다.
-시침 떼는 사람은 물론이고, 양심상 너희에게 돈을 갚으려고 할 경우,  탕감해 주고 떠났다고 전하거라.
그랬다. 영원히 모른 척 해왔다.
그때의 각성과 숙연함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껏 새롭다.
조모(祖母)는 잡곡을 담아 두는 광, 항상 열쇠를 채워두는 그 작은 광속의 항아리 안에 우리 형제를 위한 몫 돈을 여러 다발이나 은밀히 남기고 떠나셨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의 고모나 고모부의 처세가 미덥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조모(祖母)의 그러한 배려 때문에 우리, 특히 나와 맹미숙은 비밀리에 잘 살았다가 아니고 잘 지냈다는 더욱 아니고 잘 비밀스러웠다.

기차는 언제라도 조모(祖母)를 추억하게 만든다.
새벽에 바라보는 기차는 문득 조모를 그립게  한다.
나는 어쩌면 조모(祖母)를 지켜보기 위해 세상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조모(祖母)를 대할 때마다 삶을 관통(貫通)하는 철학적 명제(命題)를 앞에 둔 느낌이 강하고 강했었다.
기차는 비록 나를 태우지 않을 때조차 아름다운 회상(回想)속으로 나를 태우고 달린다.
나는 어쩌면 새벽기차를 만나고 조모(祖母)를 떠올릴 수 있기에 꽃시장에 오고감을 한번도  힘겨워하지 않고 거뜬히 실행해 왔는지도 모른다.
기차는 나를 신세계(新世界)가 아니라, 추억이라는 옛 세상에 도달하도록 유도(誘導)한다.

겨울은, 특히 겨울하늘은 수채화처럼 담백하다.
밝고 환한 빛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내 마음대로 밝고 환하게 칠하도록  만드는 하늘이다.
겨울하늘은.
이,  가슴 저리는 아름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리도 바삐 살아간다.
세상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들의 미등(尾燈)이 머리를 휘감는 듯한 혼란을 안긴다.
유난히 가슴 아릿하다.

나는 오늘 기차에 실렸던 느낌 유난히 강하다.
기차는 나를 오늘이라는 역(驛)에 이미 내려 주었다.








댓글 2개:

lovemate :

님...저 왔어요.^^;;
저도 떠나고 싶네요. 기차가 아니라 비행기로 고국으로요.ㅎㅎ
그러고 보니 기차는 커녕 지하철도 안타본지 꽤 오래됬네요. 고국에선 기차타고 여행 하는것이 참 낭만 있어보였는데..
요즘따라 유난히 고국이 그립습니다.

maeng ha lyn :

방가여~
확실히 모처럼 뵈니까 더 그래욤.ㅎㅎ

이 세상에서 가끔 어디로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떠나기 싫으면 방콕이겠죠...

언제 큰 이모가 돌아왔다고 가정하고 기차로 근교 한 번 갈래요?쿡쿡
맘 잡고 열시미 대박 나세요.
님은 님 하나의 목심(목숨의 사투리)이 아니라서리~~~
니꼬의 생명도 되시는 분이라서리~~~
이 나라는 묘한 매력도 갖춘 나라 같아요.
강남 스타일이 현재 몇천만명 어쩌구라죠?
그걸 예상 했던 분이십니다.
님은...
버퍼링이 심하지만 저 위의 강의 꼭 보세요.
일단 키웠다 보심 그럭저럭 보실만 할겁니다.
저 강의가 그랬어요. 결핍에서 오는... 그 말이 참 실감났다능~~~
잔잔한 감동이 다가오는 오늘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