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1일 토요일
부산 동서
맹하린
아르헨티나 한국일보
1997년 7월 19일 토요일
20여 년 동안 써 모았던 수필들을 엮어 출간(出刊)이라는 걸 해 보려고 고국에 다녀왔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토록 많은 난관과 함정 역시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정작 책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는 ‘책’이라는 소리조차 꺼내기가 싫어질 정도로 만만치 않은 고군분투(孤軍奮鬪)였고 외로운 강행군(强行軍)이었다.
우선 그 일을 C선배에게 일임(一任)하고 시어머님이 계신 부산으로 향했다.
연세가 80이신 어머니께서는 목포의 친척집으로 나들이 겸 출타중이셨고, 두 아들을 서울의 대학에 유학 보낸 동서만 3층집을 덜렁 지키고 있었다.
한의사인 시동생은 요지(要地)에 위치한 한의원에 출퇴근하는 편이라 동서 혼자 지키고 사는 커다란 집은 적막하면서도 아늑한가 하면 썰렁한 구석 또한 없잖아 있었다.
대한민국 제 2의 도시인 부산의 거리와 시장은 서울과 다름없이 많은 인파로 복닥거렸지만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으면 언제 그렇더냐 싶게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산에 머무는 동안 나는 식사 중에는 물론이고 식사 후에도 동서와 여러 가지 살아온 얘기들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시동생과 절친한 동기이거나 동창들인, 부산의 내로라하는 한의사들이 모두 자가용을 지니고 있는데도, 좁은 국토에 구태여 자가용이 왜 그리들 필요한가고 의아해 하며 버스와 전철과 택시만을 이용하는 시동생의 고집에 가까운 신념(信念)에 조심스럽게 합세해온 동서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동의 시선으로 바라다 볼 수밖에 달리 도리라고는 없었다.
감동되는 부분은 또 있었다.
25년 전에 동서가 결혼하면서 준비했던 문 두 짝 모델의 호마이카 장롱과 화장대였다.
그 가구들은 서너 번 서울과 부산으로 한의원을 옮기며 이사 다니는 통에 긁히고 할퀸 자태로 큼직한 보물 상자처럼 안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이민 오며 물려준 자개문갑도 대청마루의 홀 가운데에 의연하게 버티고 앉아 나와 자꾸만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모르겠는데 시동생의 친구 P씨에게서 결혼선물로 받았었다는 무쇠다리미까지 마치 상이군인이나 되는 것처럼 손잡이와 몸통이 성치 않으면서도 제법 뜨거운 열까지 발산(發散)하면서 옷가지들을 잘도 다려주었다.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 살던 굴로 향한다는 말에서 연유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컬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사(心事)가, 매사에 꼼바지런하고 검소의 표본처럼 살아온 동서, 그리고 해묵어 분신과 같이 잘 어울리는 옛 가구(家具)들까지 다시금 바라다보게 되면서 차츰 감개(感慨)되어 새록새록 피어났다.
환경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을 얼마나 많이 쥐락펴락 하는가.
얼마나 많이 단련시키는 것일까.
알뜰살뜰한 시어머님의 생활방침에 알게 모르게 물들어 버린 우리 세 며느리들은 누가 더 절약에 절약을 고집하는가를 시합하는 것처럼 각자 열심히 아끼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셋 중 그나마 내가 좀 옷을 즐겨 입는 편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사치(奢侈)와는 담 쌓는 즐김이었다고 자부(自負)한다.
가장 가슴 아렸던 얘기는 그렇게나 사이좋은 그들 내외가 시어머니의 참견 많은 시집살이로 인해 이혼까지 결정됐었다는 대목에 있었다.
이혼수속을 하기 위해, 고향인 전주의 면사무소를 향해 기차를 타고 가다가 기차 안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고 돌아 왔었다는 동서내외.
그 부분에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후르르르 내쉬었던 것도 같다.
그래도 상황은 더 하면 더 했지 전혀 나아지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러다 내가 병들어 죽으면 어쩌나 생각하니 남편도 가족도 다 소용없더라는 단념에 새롭게 교사자격증을 되살리는 관문을 통과해냈고, 급기야 대전의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기도 했었다는 동서.
혼자 자취하면서 시동생이 주말에만 다녀가는 생활을 하다가 그도 편치 않아 다시 부산으로 들어 온지 한 달 밖에 안 되었노라고 울먹이며 실토하던 동서.
나는 그런 처지의 동서를 위해 결국 시어머니도 못 만나 뵙고 돌아오게 되었다.
내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시어머니는 당장 달려오실 테고. 그러면 동서의 시집살이는 다시 시작되리라는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양보하고 참고 또 다른 불효를 저지르는 것.
그게 바로 조국과 혈육을 떠나온 사람의 변증법(辨證法) 아닐까.
멀리 있으나 가까웠고. 가까이 있으나 멀어야 하는 이민자의 혈육에 대한 애로점.
하루도 불편한 날은 아니었으나 하루도 그리움을 밀칠 수도 없었던 날들의 순례(巡禮)…….
바쁜 일에서 틈 내어 나를 전송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려는 시동생과, 못내 섭섭한 표정을 얹어 용돈까지 챙겨주던 동서를 뒤로하고 새마을 기차에 오르는데 그제야 시야가 뽀얗게 흐려오고 있었다.
새로운 각오로 도착한 내 제 2의 조국 아르헨티나는 지독한 인플레가 일종의 권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권위(權威) 가득 점령하고 있었다.
-초여름-
고부(姑夫)간의 갈등이 팽배(澎湃)를 거듭하면서 상실을 가져올 가정의 가치(價値)나 아우라, 혹은 고난은 전통이나 혈연에 대한 존재의 지독한 변화를 요구한다.
내가 자주 내 개인 신상(身上)과 가족사(家族史)를 들추는 근본적 원인은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 부족한 글에서나마 한 줌의 동기부여를 얻어, 현재 처해 있는 고난에서 하루 속히 깨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우려했으며 간과(看過)할 수 없었던 일들이란, 세상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는 큰 봉사나 친절이나 명예나 소유욕을 획득하기에만 급급할 뿐. 가족과 혈육에게 특히 친절하고 가장 나긋하고 최고로 평화로운 산소(酸素)를 공급하지는 못하는 양상이더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나는 철저히 외롭기 위해 이민을 떠나왔겠지만, 어쩌면 나는 몹시도 외롭고, 그 외로움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 여전히 내 나라에 환국(還國)하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시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가 벌써 십여 년도 넘었다.
부산 동서는 시어머님이 돌아 가셨는데, 드디어 해방인데, 그런데도 동서는 뇌졸중으로 바깥출입을 못한 지 이미 십 년이 가까워 온다.
최근에는 서울 땅에 살고 있는 동서.
나는 가끔씩 국제전화를 넣는다.
시동생은 경동시장에 위치한 한의원에 출퇴근을 한다고 하는데 예외없이 버스나 전철을 이용한다는 소식이다.
동서는 어둔한 음성에 비해 내 목소리만은 금세 알아챈다.
그런데 성격이 단순해지기만 했어도 견디겠는데, 어딘지 모르게 교사라는 직업의식이 운명처럼 배어 있고, 그리고 매번 헤매거나 무구(無垢)해 있어 내 맘은 한동안 아프고 아프다.
“아! 이름이 맹……. 그분이세요. 내게는 형님 되세요. 아직도 잘 웃네요? 목소리가 계속 애들 같아요. 벽마다 쇠줄 달았어요. 그걸 붙잡고 날마다 돌고 돌아요. 나는 잘 먹고 잘 살아요.”
지금껏 나는 절약하고 싶을 경우에만 절약해 왔지만
진정 쓰면서도 살아야지 않겠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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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이민온지 어~언 22년째입니다. 그동안 단 한번도 고국에 방문하지 않았지만 요센 자꾸 돌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가봐야 반겨줄 사람도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아들녀석에게 한국의 발전한 모습이나 주체성을 알려주고 싶은데 이제 겨우 7살이니 아직은 모르겠죠? ^^;;
어쩔때 미치도록 고국이 그리운데 막상 한국에 사는 친구들의 어려운 삶을 듣고 있으면 또 "제가 여기 있는것이 다행이구나" 하고 제 마음이 간사해집니다.ㅎㅎ
어느곳에 있던지 내가 머무르는 곳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살면서 자주 느끼는 건 어느 나라나 장단점이 있고, 어쩌면 우리 이민자들은 운명적인 떠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국은 뭐랄까요.
소비문화가 지나치다는 생각~~~
어디에 머물던 내가 주체이고 내가 하나의 세상이라고 봐요.
그리고 님이 이민을 안 오셨으면 제가 어찌 님을 이렇게나마 뵈올 수 있었으리오?ㅎㅎ
어려운 시절 속에서도 환하게 꽃 피는 희망은 분명 있더이다.
파이팅!!!입니다. 아르헨 20년에서 몇년 지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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