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3일 목요일
어제 겪은 일
맹하린
나는 작업실 끝 쪽에 위치한 싱크대에서 세탁 중이었다. 폴라 몇 개를 헹구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에 아들이 나갔는데, 내가 틀어 놓은 물소리 쪽으로 매장에서 들려온 현지인의 짧고 간결한 발언이 위협적으로 휩쓸리는 느낌이 몹시도 강했다.
"데헤이(DGI=국세청)!"
그게 바로 그들 특유의 권위적 자세의 음성이고, 그들만의 유세(有勢)깃든 외침이다.
조사 나왔다, 서류 좀 보자, 가 절대로 아니다.
DGI라고만 해도 그 짧은 표현 속에 온갖 두려움이라거나 경고 같은 게 다 포함되어 있다.
나는 손의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자박자박 매장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어제, 그리고 아침나절이었다.
작업실로 들어 온 아들이 재삼 확인 시키듯 내게 속삭이며 알려 준다.
"오마니! 데헤이가 왔네요?"
오마니...
아들은 위급상황일 때 주로 나를 그렇게 부른다.
침착하라는 뜻의 암시(暗示)다.
매장에는 과연 DGI다워 보이는 30 중반의 현지인 남자가 서 있었고, 문밖엔 서류철을 든 비슷한 또래의 DGI같지도 않아 보이는 현지인 여자가, 우리 가게의 유리문에 붙어 있는 세금 영수증의 세부사항을 일일이 확인하며 적고 있었다.
언젠가 소화기의 벤시미엔또(Vencimiento=기한 만료)가 살짝 지나 있을 때, 중년의 그들에게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더니 순순히 눈 감아 주던, 그 이름도 두려운 또 다른 DGI였다.
"영수증 제시!"
"계리사 가져감!"
내가 그를 흉내 내듯 단답형으로 대답하자 그는 싱긋, Inspector(조사원)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현재 사용하는 영수증은 지나치게 아껴 쓴 느낌이 두드러진다는 지적이 있었다.
가게의 월세수준과 적정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설명 역시 곁들여진다.
나는 인정한다.
"고객들 쪽에서 사양해요, 특히 당신네 동족들이 더 그러는 편이죠. 내가 돈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이 더 잘 아는 모양이던데요?"
나는 Inspector(조사원)을 출입문 쪽으로 인도(引導)하여 하늘보다 아래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다.
몇 달 전의 극심했던 우박에 크고 작은 중상(重傷)을 입은 상처투성이의 우리 간판이 해답을 펼치듯 아래 켠에 서 있는, 일행은 아니지만 잠시동안은 우리라고도 볼 수 있는 우리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간판을 고치려고 몇 번인가 작정했을 때, 아들의 고집에 가까운 만류와 반대에 여러 번이나 부딪쳤었다.
일부러 올려다보는 일은 없으나 비가 내리려는 날씨인가를 파악하려 할 때면, 내 마음 속 안에까지 찢기고 할퀸 모습으로 자꾸만 걸려 있게 되는 간판이었다.
초인종은 어떤가. 까짓 초인종이 몇 냥이나 한다고.
당장 바꾸라고 해도 왼쪽을 누르면 아무 이상(異狀)이 없다면서 왼쪽으로 작은 화살표를 작게 그려 놓은 상태다.
그리하여 우리 가게 출입문에는 '벨 누르세요!'와 '문 두드리세요.'가 나란히 붙어 있다.
(퇴근시간에 열쇠가 말썽을 부려도 열쇠쟁이를 따로 안 부르고 본인이 직접 고쳐낸다. 그럴 때마다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며 기다리는 내내 생각한다. 핏줄은 어쩔 수없구나. 저럴 때 보면 딱, 지 할머니다! 기다림에 지치고 지치는 나.)
할머니의 절약성, 아버지의 박고집, 그 두 부분 중 나로선 하나만도 힘든데, 그런데 아들은 그 둘을 모두 답습했다.
다행인지 내 성격도 닮았다는 점으로 웬만한 일, 간단히 통과를 시켜 주는 편이지만...... .
매번 비슷한 일을 만날 때마다, 나는 우격다짐으로 강하게 나가지 않고 고객들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살며시 아들을 눈 감아 준다.
자주 하는 걱정은 아닌데 가끔은 걱정이 몰릴 때가 있다.
돈이란 아끼기만 해줘도 가까이 있어주기는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크게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持論)이라서다.
하지만 나처럼 사는 사람도 세상엔 있고, 아들처럼 사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다.
그리고 어쩌겠는가.
욕심이 적은 부모를 공동주인공으로 관람하며 성장한 것을.
"장사가 부진(不振)한 이유는 나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아시겠죠? 간판도 못 고치고 있어요."
대형 유리창의 위쪽에 붙어 있는 영수증과 서류철을 번갈아 확인하며 여자가 나를 향해 캐묻듯 말을 보탰다.
"그런데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었네요?"
"안 그럴 경우, 당신들한테 혼나거든요."
그녀가 하하 웃는다.
(웃었다, DGI가 웃고 말았다!)
여자가 먼저 목소리를 줄이는 걸로는 미비하다고 여겨지는지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우린 이 지역에 오늘 쫙 깔렸어요. 우리가 봐 줘도 다른 팀에게 지적을 받게 될 확률이 좀 있겠는데... 어떻게, 오늘 하루만 문 닫고 있을래요?"
남자가 그녀의 말을 정중히 도왔다.
"문만 닫는 것보다는 , 셔터까지 내려야 합니다. 늦은 오후에나 올리도록 하세요."
나는 어제 친절하고 배려 넘치는 DGI 두 사람을 만나 오후 4시까지 작업실 안에서 휴일처럼 잘 지냈다.
전화 주문하는 고객들을 위해서도 틈틈이 일했고, 눈치껏 셔터의 작은 문을 통해 상품을 내주고 그랬다.
마치 세상과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숨어서 지낸 어제.
이웃의 어느 가게가, 종업원을 고용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는지 서류철을 든 정장 차림의 DGI직원들이 수시로 떠들 썩 지나다녔다.
자동차를 몇 대씩 우리 가게 건너편에 주차해 놓은 그들은 점심시간엔 에바 페론 거리 쪽으로 다시 왁자그르르 소란을 피우며 몰려갔다.
나는 오늘 역시 숨어 지내는 기분을 떨칠 수 없는, 약간의 웅크린 기분에 잠겨 있다.
며칠 전부터 가게 앞 오디나무에 새순이 돋고 있다.
두 나무 중의 한 나무는 연초록 새싹을 날마다 몰라보리만큼 재빠르게 키워내는 중이다.
하지만 다른 나무는 해마다 싹터 오름의 진도(進度)가 상상외로 느리다.
죽고 있는지도 몰라서 가지를 부러뜨려 볼 때가 있다.
톡톡 소리가 나면서 꺾이면 희망이 전혀 안 보인다는 뜻이다.
휘면서 잘 안 부러지면 아직은 살아 있고 머잖아 새싹을 밀어 올리겠다는 의지(意志)와 자세가 역력한 셈이다.
나는 뚝뚝 꺾이지 않고 가지가 휘는 나를 발견한 느낌이다.
나는 아직 건재해 있는 것이다.
어제의 DGI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람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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