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기차는 나를
맹하린
꽃시장에 도착해서 자동차가 왼쪽의 광장으로 들어설 때면, 간혹 오른 쪽 역사 옆에 멈춰 있는 기차를 발견할 때가 있다.
아마 종착역(終着驛)인지도 모르겠다.
그 기차역은 꽤 그럴 듯 하다.
종점(終點)도 되고 출발점(出發點)도 되는 것이다.
새벽시간에, 사람은 얼마 안 보이고 칸마다 불이 켜져 있는 기차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하루가 환하고 복될 것만 같은 예감을 껴안는다.
기차는 인류의 문명이 시작될 즈음에 만들어진 속도의 쾌거(快擧)이며 속박(束縛)에서의 자유다.
이편과 저 편은 확실하게 구분되고 모든 경계(境界)가 확고하다.
울퉁불퉁 흔들리지 않고 평탄한 길 다짐하며 수많은 풍경을 보여주기에 충실한 달리는 마술사.
평소의 나는 목적의식이 강하고 뚜렷하지만, 매사에 신중한 면모도 없지는 않다.
약점 중의 약점이라면 생각이 곧 행동이 되는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성품.
많은 날들을 지나오는 동안 읽을 만한 책들이 가까이 있어 뿌듯했지만, 수없이 많은 풍경이 다가 서듯 전개(展開)되거나 멀어지 듯 사라져 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대장촌 기차역 철로 옆 대기실에 친구들과 가방을 나란히 붙이듯 세워뒀었다.
항상 일찍 닿기를 선호하던 우리는 코스모스 꽃밭에서 한참이나 희희낙락 놀았다.
그런데 대기실에 되돌아 가보니 내 가방이 열려 있었다.
내가 후원회비를 준비했다는 걸 아는 사람의 소행(所行)같았다.
(내가 다니던 I여고는 사립학교였다.)
그럴 때 나는 소란을 피우는 게 뭔지도 모르는 바보다.
이사람 저사람 의심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자란 사람이다.
하학 후 집에 가서 조모(祖母)와 작은 음성으로 주고 받으며 사태(事態)를 알렸다.
당연지사처럼, 조심하지 그랬느냐, 아까워라, 등의 추궁이 한 마디도 없다.
다시 학비를 받을 수 있었다.
조모(祖母)가, 서울의 우리 형제들에게 불편한 몸으로 찾아 오셔서 열흘을 잘 지내다가 극적(劇的)으로 임종을 마치던 얘기는 훗날 기회 닿는 대로 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중편을 써 둔지 오래 되었지만 일단 숙성(熟成)시키는 중이고, 당장은 발표하고 싶지가 않은 심정이다.
떠나시기 며칠 전, 고모네 애들 없는 틈을 타서 나와 맹미숙에게만 말해 주던 조모의 유언과 다름없던 말들.
감묵이네, 철자네, 영님이네 등등, 그렇게 여럿이나 되는 촌부(村婦)들에게 가족 몰래 돈을 빌려준 얘기가 먼저였다.
-시침 떼는 사람은 물론이고, 양심상 너희에게 돈을 갚으려고 할 경우, 탕감해 주고 떠났다고 전하거라.
그랬다. 영원히 모른 척 해왔다.
그때의 각성과 숙연함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껏 새롭다.
조모(祖母)는 잡곡을 담아 두는 광, 항상 열쇠를 채워두는 그 작은 광속의 항아리 안에 우리 형제를 위한 몫 돈을 여러 다발이나 은밀히 남기고 떠나셨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의 고모나 고모부의 처세가 미덥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조모(祖母)의 그러한 배려 때문에 우리, 특히 나와 맹미숙은 비밀리에 잘 살았다가 아니고 잘 지냈다는 더욱 아니고 잘 비밀스러웠다.
기차는 언제라도 조모(祖母)를 추억하게 만든다.
새벽에 바라보는 기차는 문득 조모를 그립게 한다.
나는 어쩌면 조모(祖母)를 지켜보기 위해 세상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조모(祖母)를 대할 때마다 삶을 관통(貫通)하는 철학적 명제(命題)를 앞에 둔 느낌이 강하고 강했었다.
기차는 비록 나를 태우지 않을 때조차 아름다운 회상(回想)속으로 나를 태우고 달린다.
나는 어쩌면 새벽기차를 만나고 조모(祖母)를 떠올릴 수 있기에 꽃시장에 오고감을 한번도 힘겨워하지 않고 거뜬히 실행해 왔는지도 모른다.
기차는 나를 신세계(新世界)가 아니라, 추억이라는 옛 세상에 도달하도록 유도(誘導)한다.
겨울은, 특히 겨울하늘은 수채화처럼 담백하다.
밝고 환한 빛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내 마음대로 밝고 환하게 칠하도록 만드는 하늘이다.
겨울하늘은.
이, 가슴 저리는 아름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리도 바삐 살아간다.
세상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들의 미등(尾燈)이 머리를 휘감는 듯한 혼란을 안긴다.
유난히 가슴 아릿하다.
나는 오늘 기차에 실렸던 느낌 유난히 강하다.
기차는 나를 오늘이라는 역(驛)에 이미 내려 주었다.
2012년 8월 28일 화요일
충성입니다!
맹하린
나는 어제도 출근하면서 잊지 않고 남편의 사진 앞에 섰다.
이윽고 군인(軍人)처럼 경례(敬禮)를 올려 부쳤다.
“충성, 충성!”
어제는 그의 기일(忌日)이었다.
5년을 빠짐없이 출근할 때마다 그에게 경례를 바쳐 왔다.
함께 여행할 사람도 없고 해서 외박을 전혀 안 했기에 그러한 개근(皆勤)스러움을 지켜 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레미스 비용이 100페소였고 작년엔 180페소였는데, 올해는 330페소 (70달러 상당)라고 한다.
한인묘원에 다녀 오는 비용이 그렇다.
얼마 전 반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레미세리아에 직접 가서 문의(問議)했었다.
후안, 뚜르꼬, 빤쵸, 오스칼, 다리오 등의 기사들이 주욱 몰려 앉아서 한담(閑談)을 나누다가 너도 나도 교대로 대답을 해냈다.
고참(古參)격인 후안과 뚜르꼬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주로 말했다.
“마르가리따, 당신은 우리 사무실의 단골고객이니까 좋은 해결을 드려야죠.”
“가장 낮은 가격을 말하겠습니다. 250페소 아래로는 곤란해요.”
나는 그럴 경우 그 자리에서 당장 답을 남기는 사람은 못된다.
메니저 격인 현지인 안나에게 애매한 언질만 건네고 그곳을 나왔다.
“일단 가족과 상의해야겠어요. 내가 다시 이 일로 전화하면 누구라도 보내줘요. 되도록 순서에 어긋나지 않게요. 만약 전화가 없으면 내 아는 분이 돌아 가셨구나, 그 버스로 대신 다녀왔겠구나, 그렇게 추측해도 돼요.”
그랬다.
나는 며칠 전 돌아가신 분의 장의사에 조의금(弔意金)을 접수했고, 그 다음날 장례버스에 합류하여 다녀온 것이다.
갈 때마다 챙겨 가는 꽃과 음로수와 그리고 담배. 젖은 헝겊조각(비석을 닦기 위해서).
타계(他界)하신 분의 하관예절이 끝나고 조문객들이 화장실에 다녀오고 그러는 사이 나는 서둘러 남편의 묘에 갔다.
담배 한 대는 불 피웠다가 끄고, 나머지는 묘지의 인부들이 잔디를 깍으며 피우던지 말던지 그렇게 단정하며 그 자리에 둔다.
그리고 네 번의 큰 절.
그런데 묘하게도 마음이 쉼없이 서걱인다.
하물며 어딘지 모르게 편치가 않다.
며칠 안으로 가족과 함께 다시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아낄 걸 아껴야 내가 제대로 된 사람이지 싶다.
물론 친구들에게 신세를 질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이민자들은 하나 같이 1인 8역이다.
아베쟈네다의 도매상들은 본국의 웬만한 중소기업과 맞먹는 규모와 경영이지만 손수 운전하는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신세는 원래 신세로 갚아야 하는 게 세상 이치인지라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럽다.
검은 색은 잘 안 입지만, 검은 정장을 하고 다시 담배와 소주 한 병, 박커스도 한 병 준비하고, 그리고 절도 네 번 다시 해내고, 천천히 얘기도 좀 하고 오리라.
"여보야, 나 참 잘 있어요."
경례도 올려 부치고, 충성도 말하게 될 것이다.
내 특유의 장난기가 넘쳐서 이렇게 외칠 지도 모른다.
"축하, 5주년 기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그는 좋은 곳에서 잘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가 이리도 평화로이 싱싱 신나서 잘 살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이 절감된다.
그는 누구보다 나를 신뢰해 왔다.
현재 역시 믿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댓글 짓이나 좀 해냈고, 가끔 뭐랄까, 편지질 정도 즐긴 거 빼고는 이렇다하게 죄진 일은 없었다고 본다.
어제는 혼자 있고 싶었던 날이었다.
밤에 H회관에서 있었던 동문회에 다녀오면서 일부러 회원의 자동차를 안 타고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약간 절룩이며 걸어오는데...... .
(그런데 어쩐지 눈물은 나더라요. 그래도 나 씩씩했죠? 5년을 아무 사고 없이 잘 지내왔잖은가요? 함께 있어줬던 날들 너무나 고마웠어요. 같이 있었던 날들일 때도 고마웠지만, 같이 없으니까 그 고마움, 때로 사무쳐요.)
"충성! 충성입니다!"
2012년 8월 27일 월요일
크리스티나
맹하린
한인 타운에 위치한 우리 가게의 건물은 현지인 크리스티나가 주인이다.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남편이 물려준 부동산이라고 한다.
핫도그와 떡꼬치를 취급하는 분식센터와 편의점, 그리고 곡물상회와 한국수입상품을 전문으로 하는 M미니 백화점, 거기다 우리 꽃집이 아래층에 소재해 있고, 이층은 재활용품을 사고파는 바다장터가 전체를 장악(掌握)하고 있다.
전부 한국인들이고, 대부분의 가게가 3.5m x12m의 면적을 지녔다.
우리 가게를 위시한 몇 가게는 하나씩만 사용하지만, 곡물상회는 두 개를 터서 하나로 사용하고 있고, M미니 백화점은 세 개만 터서 매장으로, 네 개는 트지 않고 창고로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가게 주인 크리스티나는 월세를 제멋대로 올리는 데다, 가게마다 들쑥날쑥 차이를 두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문제가 돌출되고 만다.
계약서도 기한(期限)도 있긴 엄연히 존재 하지만, 거의 무용지물(無用之物)일 뿐이다.
몇 달도 안가 지병(持病)이 도지는지 인플레이션에 의해서 어쩌고를 찾으면서 월세를 올려야겠다는 강압적인 주장을 전달하기 위해 몸소 행차하듯 나타나는 크리스티나.
안 올려 줄 거면 당장 비우라고 강하게 나올 때가 대부분이다.
초장에 강하게 말해야 성공적이라고 믿는 주의다.
M미니 백화점과 바다가게는 여러 개씩 사용한다는 이유로 월세의 급등을 여러 차례 눈 감아 준 상태지만, 그런 입에 발린 혜택이란 것도 사실은 다 소용 없는 선심(善心)이고, 혜택(惠澤)같지만 한 톨도 혜택이 아닌 셈이다.
전기세와 수도세와 가게 보험금에서, 그동안 못 받은 걸 모두 챙겨가는 매우 교활한 수법을 요리조리 실행하기 때문이다.
가게 보험금.
편의점 여인은 그 문제만 불거지면 부화가 치솟는 기운이 얼굴에 역력하게 나타난다.
가게 보험금을 세입자가 내는 경우는 첨 봤다고 따지며, 만약 가게에 불이 나면 누가 보상금을 타느냐고 물었나 보았다.
당연히 주인이 탄다는 뻔한 답이었다고 한다.
그런 보험은 난생 듣도보도 못했다는 얘기다.
공과금들의 고지서들도 크리스티나가 자기의 살림집으로 보내지도록 오래 전에 조치를 해둔 터다.
기가 막힌 건 계량기도 따로 설치를 금하며, 공동으로 한 장만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얼마가 정확히 나왔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상태가 되도록 만든 것.
몇 번인가 반모임 같은 걸 열어 대표로 M미니 백화점 사장을 앞세워 봤으나 도대체 먹혀들지가 않는다.
누가 히틀러를 독재자라고 이름 지었는가.
우리의 가게 주인 크리스티나가 바로 독재자인 것을.
하물며 반모임을 하면 무얼 하겠는가.
두어 가게가 미리 겁을 먹고 당장 만나, 우리 만나! 그런 노래를 당장 나가 어서 나가로 바꿔 부르는 크리스티나에게 초장에 참패를 당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크리스티나의 요구대로 월세가 올려지는 일로 사건의 마무리가 이룩되는 것이다.
그나마 우리 가게는 내가 살살 어르고 버텨서 다른 가게보다 몇 달 뒤에 올려 주기에 이르고는 있지만, 이점만 봐도 문제가 아니려는지…….
달래고 버티면 몇 달은 봐주다니?
그 모든 가게에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돌출 될 때마다 아들이 통역을 맡아서 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하여간에 재계약 때마다 보증인이 없어도 되고 예치금 두 달 금액도 생략하고 공증비만 지불하는 방식을 누리고 있는 셈이긴 하다.
그런데 전기세와 수도세 등을 터무니없이 올리려 들며 여러 배려에서 파생되는 손해 같은 걸 만회(挽回)하려는 느낌을 못 버리게 되자, 아들이 강한 주장을 짧게나마 펼치기에 이르렀다.
결국 우리 가게의 공과금은 다른 가게에 비해 가장 낮은 가격으로 책정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가장 전기세를 많이 내는 가게들은 물론 가게를 여러 개 사용하는 바다와 M 미니 백화점이다.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없다.
바다가게와 M미니 백화점은 다달이 5천 페소를 전기세로 지불하는 것이다.
가장 억울한 건 우리 가게라는 걸 다른 가게들은 뻔히 알고 그점을 많이 애석해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고객이 와야 켜는 사람들이라서다.
겨울엔 난로도 안 켠다.
그 대신 바다가게와 M미니 백화점에서 왕창 사용하는 편이다.
편의점과 분식센터는 우리 가게보다 절반 정도 작은 면적인데도 우리가 매달 내는 전기세 3백 6십 페소 보다 곱절이나 많은 가격 8백 페소 이상을 지불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유는 근사하다.
에스끼나(모퉁이)는 원래 몫이 좋아 월세도 전기세도 더 비싸게 내야 된다는 얘기다.
아들이 또박또박 해냈던 대답은 이랬다.
“대통령 크리스티나가 복지(福祉)국가의 건설 등을 내세워 이 지역을 극빈자들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점, 또한 모든 전기세와 수도세를 최하위의 기본요금 선으로 묶어 둔 특정지역임을 당신은 우리 이민자들보다 더, 아예 깡그리 모르고 계신가 봅니다?”
대통령 크리스티나 덕택에 우리는 살림집도 기본요금을 조금 웃도는 가격으로 지불하고 있다. 하물며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절약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인 것을.
대통령도 가게 주인도 크리스티나들은 어찌됐던 대단한 인물들이라는 인식(認識)이 날로 새롭게 피어 오르는 요즈음이다.
크리스티나가 대통령으로 권좌를 누리고, 크리스티나가 가게 주인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떵떵 대는 세상.
하지만 양날의 칼 같아도 두루 뭉실 담 넘어가는 부분도 없지 않아 분명 있다.
어젠 U교회의 장로 임직식이 있었다.
작은 교회이고 장로 직에 오르는 분도 한 분이시라, 느긋하게 쉬엄쉬엄 일할 생각 같은 걸 하고 있었는데 상상 외로 주문이 많았다.
그리고 운동모임의 시상식 꽃 여럿, 돌잔치, 묘지방문 등등
대통령 크리스티나 덕택에 100페소(공정 환율 가격 20달러 상당)의 지폐가 참 흔하게 유통되는 추세다.
더군다나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전혀 기분 나쁘지가 않다.
새로 찍어 낸 지폐들이 주류를 이루는 판국이다.
가게 주인 크리스티나에게 나긋나긋 말해줄 생각이다.
“올려 주긴 할게요. 지금은 안돼요. 바케이션 시절이 지난 내년 3월부터나 가능해요.”
편의점과 분식센터는 이미 올려준 상태다.
그렇게 매번 올려 봤자, 달러로 치면 언제나 400달러라는 답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꽃 가게를 인수 받았을 때 400페소였던 월세가 지금은 2000페소이고 내년 3월부터는 2500페소를 지불해야할 입장이다.
가게 주인 크리스티나는 언젠가 내게 그랬었다.
“건물 하나 갖고 있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골치만 깨지도록 아파요.”
골치가 안 깨지고 있는지 확인하듯 자신의 머리까지 살살 두드리며 해낸 하소연이었다.
자고새면 오르는 물가(物價)에 , 눈만 뜨면 떨어지는 화폐가치(貨幣價値).
그건 가진 자들에게도 헤어나기 어려운, 넘치거나 겹치는 부담감의 극치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죽어라 일해도 밥만 겨우 먹고 사는 내게 고작 할 말이라는 게 골치만 아프다니!그렇게 허구헌날 긁어 가면 뭐하나?
만날 다이어트 하느라 밥도 나보다 덜 먹는 정도가 아니라 허구헌 날 굶으면서 말이다.
나는 대통령도 가게 주인도 아니고 크리스티나가 아니어서 특히 다행이라는 느낌을 최근에 유난히 자주 껴안는다.
대통령도 가게 주인도 딱히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닐 것이다.
운명이 그렇게 정해 주고 안배(按排)했을 확률(確率)이특별히 많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어차피 운명이라면 마르가리따의 역할(役割)에나 계속 충실하고 더욱 밝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비슷한 게 새록새록 다져지고 있다.
2012년 8월 26일 일요일
여행 중(中)
맹하린
먼 곳으로 가고 싶을 때가 있다.
혼자 혹은 이웃과 함께.
여행은 어디로 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지만
사실은 어디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된다.
여행은 나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무수한 삶을 찾아 헤매는 절실함으로 내 안으로 들어가면서
사색하는 행위일 터이다.
여행의 목적지가 다르다고 해도 되돌아오는 곳은 같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안치운의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중에서-
작은 규모의 결혼 꽃으로 적당히 분주했던 어제.
아침 나절엔 절친이 전화주문했던 꽃을 배달한 일 빼고는 바쁠 게 없었는데, 오후엔 몇 개인가의 꽃 바구니가 겹쳐 있어 쉴 새 없이 바빴다.
산책 시간엔 중국인이 경영하는 슈퍼에 갔다.
중국 슈퍼의 여 주인 루이사는 오른 손의 검지를 피암브레(치즈와 햄, 또는 차가운 요리)를
얇게 썰어 내는 기계에 다쳐 네모난 하얀 기둥과 같은 깁스를 한 채 자랑처럼(?) 오른 손을 약간 쳐 들며 카운터 일을 해내고 있었다.
"오늘은 덜 아파요?"
"진통제를 먹고 있는데 여전히 아파요."
종업원 하나가 결근 하여, 직접 나서서 일하다가 그런 일이 생겼다고 했었다.
기계 일이 익숙지 않았던 데다, 낳은 지 6개월 된 딸 쟈니나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다급했었다는 설명을 며칠 전 들었었다.
"아팅(아우스팅)은 요즘 통 안 보이네요?"
"저의 친정에서 당분간 돌봐 주기로 했어요."
아팅은 나만 가면 반가워 까르르 웃고 물품을 고르는 나를 쫓아다니면서까지 돕는, 루이사의 세 살 된 아들이다.
나는 어떤 면으로는 반가운 사람도 되는 모양이다.
꽃 시장에 가면 젊은 현지인들이 내 이름을 노래로 부르며 잠시 춤까지 춰 대서 매번 나를 박장대소 하도록 만든다.
내가 엄마처럼 느껴지나?
아무 때나 내 앞에서 학예회를 하려고들 난리다.
"급하게 일하다가 다치지 말아요. 아무리 애 보는 사람 따로 있어도 오히려 쟈니나에게 사랑을 덜 베풀게 됐잖아요."
그런 다독임과 함께 계산을 치르고 길을 건너다가, 나는 반 블록 저쪽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에게 순간적인 위협을 느꼈다. 그런 나머지 다급하게 뛰며 건너게 되었다.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이 기절초풍을 안했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일 것이다.
왼쪽의 장딴지가 경직(硬直)되어 당장 걸음이 불편할 일이 발생했다.
갈 때는 멀쩡했던 걸음이 올 때는 절룩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크게 아프진 않은데 쥐가 떼로 몰려든 나의 장딴지.
급성 담이 담벼락을 쌓거나 바리케이트까지 친 셈인지, 긴장감이 감도는 무장지대가 되었다.
나는 평소엔 호들갑스러울 수도 있지만 아프면 되레 점잖아지는 별종(別種)중의 별종이다.
가족은 예외 없이 병원이라는 언어를 피켓처럼 높이 들며 읊는다.
"X레이 찍으러 갑시다!"
"됐어! 내 아픔은 내가 가장 잘 알걸?"
퇴근 시간엔 두 블록 반인 집까지 레미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욕조(浴槽)에 뜨거운 물을 받아 무릎까지 담그고 앉아, 내가 나에게 여러 번 덕담(德談)을 건네게 되었다.
"겁 없이 뛰다가 다치지 말아요. 딴 때는 상관없으나 , 뛸 때 만은 나이를 기억해요. 아무리 돕는 사람 있어도 고객들 보기에 민망스틱(?)하지 않겠어요?"
나는 오늘 역시 순례객(巡禮客)되어 절룩이며 걷고 있다.
어제보다는 한결 가벼워져서, 날아 볼 수도 있을 듯 한 절룩임이다.
90프로 정도 낫고 말았다.
절친이 꽃값을 가져다 줄 때, 엄살 잔뜩 섞으며 걸어 낼 작정이었는데…….
오늘도 나는 나로 돌아오기 위해 여행 중이다.
마치 너무 오래 걸어 낸 사람처럼 절룩이는 걸음이다.
등에 진 짐은 전혀 무겁지가 않은 것을.
2012년 8월 24일 금요일
구월이 오면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2012년 8월 23일 목요일
어제 겪은 일
맹하린
나는 작업실 끝 쪽에 위치한 싱크대에서 세탁 중이었다. 폴라 몇 개를 헹구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에 아들이 나갔는데, 내가 틀어 놓은 물소리 쪽으로 매장에서 들려온 현지인의 짧고 간결한 발언이 위협적으로 휩쓸리는 느낌이 몹시도 강했다.
"데헤이(DGI=국세청)!"
그게 바로 그들 특유의 권위적 자세의 음성이고, 그들만의 유세(有勢)깃든 외침이다.
조사 나왔다, 서류 좀 보자, 가 절대로 아니다.
DGI라고만 해도 그 짧은 표현 속에 온갖 두려움이라거나 경고 같은 게 다 포함되어 있다.
나는 손의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자박자박 매장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어제, 그리고 아침나절이었다.
작업실로 들어 온 아들이 재삼 확인 시키듯 내게 속삭이며 알려 준다.
"오마니! 데헤이가 왔네요?"
오마니...
아들은 위급상황일 때 주로 나를 그렇게 부른다.
침착하라는 뜻의 암시(暗示)다.
매장에는 과연 DGI다워 보이는 30 중반의 현지인 남자가 서 있었고, 문밖엔 서류철을 든 비슷한 또래의 DGI같지도 않아 보이는 현지인 여자가, 우리 가게의 유리문에 붙어 있는 세금 영수증의 세부사항을 일일이 확인하며 적고 있었다.
언젠가 소화기의 벤시미엔또(Vencimiento=기한 만료)가 살짝 지나 있을 때, 중년의 그들에게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더니 순순히 눈 감아 주던, 그 이름도 두려운 또 다른 DGI였다.
"영수증 제시!"
"계리사 가져감!"
내가 그를 흉내 내듯 단답형으로 대답하자 그는 싱긋, Inspector(조사원)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현재 사용하는 영수증은 지나치게 아껴 쓴 느낌이 두드러진다는 지적이 있었다.
가게의 월세수준과 적정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설명 역시 곁들여진다.
나는 인정한다.
"고객들 쪽에서 사양해요, 특히 당신네 동족들이 더 그러는 편이죠. 내가 돈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이 더 잘 아는 모양이던데요?"
나는 Inspector(조사원)을 출입문 쪽으로 인도(引導)하여 하늘보다 아래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다.
몇 달 전의 극심했던 우박에 크고 작은 중상(重傷)을 입은 상처투성이의 우리 간판이 해답을 펼치듯 아래 켠에 서 있는, 일행은 아니지만 잠시동안은 우리라고도 볼 수 있는 우리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간판을 고치려고 몇 번인가 작정했을 때, 아들의 고집에 가까운 만류와 반대에 여러 번이나 부딪쳤었다.
일부러 올려다보는 일은 없으나 비가 내리려는 날씨인가를 파악하려 할 때면, 내 마음 속 안에까지 찢기고 할퀸 모습으로 자꾸만 걸려 있게 되는 간판이었다.
초인종은 어떤가. 까짓 초인종이 몇 냥이나 한다고.
당장 바꾸라고 해도 왼쪽을 누르면 아무 이상(異狀)이 없다면서 왼쪽으로 작은 화살표를 작게 그려 놓은 상태다.
그리하여 우리 가게 출입문에는 '벨 누르세요!'와 '문 두드리세요.'가 나란히 붙어 있다.
(퇴근시간에 열쇠가 말썽을 부려도 열쇠쟁이를 따로 안 부르고 본인이 직접 고쳐낸다. 그럴 때마다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며 기다리는 내내 생각한다. 핏줄은 어쩔 수없구나. 저럴 때 보면 딱, 지 할머니다! 기다림에 지치고 지치는 나.)
할머니의 절약성, 아버지의 박고집, 그 두 부분 중 나로선 하나만도 힘든데, 그런데 아들은 그 둘을 모두 답습했다.
다행인지 내 성격도 닮았다는 점으로 웬만한 일, 간단히 통과를 시켜 주는 편이지만...... .
매번 비슷한 일을 만날 때마다, 나는 우격다짐으로 강하게 나가지 않고 고객들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살며시 아들을 눈 감아 준다.
자주 하는 걱정은 아닌데 가끔은 걱정이 몰릴 때가 있다.
돈이란 아끼기만 해줘도 가까이 있어주기는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크게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持論)이라서다.
하지만 나처럼 사는 사람도 세상엔 있고, 아들처럼 사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다.
그리고 어쩌겠는가.
욕심이 적은 부모를 공동주인공으로 관람하며 성장한 것을.
"장사가 부진(不振)한 이유는 나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아시겠죠? 간판도 못 고치고 있어요."
대형 유리창의 위쪽에 붙어 있는 영수증과 서류철을 번갈아 확인하며 여자가 나를 향해 캐묻듯 말을 보탰다.
"그런데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었네요?"
"안 그럴 경우, 당신들한테 혼나거든요."
그녀가 하하 웃는다.
(웃었다, DGI가 웃고 말았다!)
여자가 먼저 목소리를 줄이는 걸로는 미비하다고 여겨지는지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우린 이 지역에 오늘 쫙 깔렸어요. 우리가 봐 줘도 다른 팀에게 지적을 받게 될 확률이 좀 있겠는데... 어떻게, 오늘 하루만 문 닫고 있을래요?"
남자가 그녀의 말을 정중히 도왔다.
"문만 닫는 것보다는 , 셔터까지 내려야 합니다. 늦은 오후에나 올리도록 하세요."
나는 어제 친절하고 배려 넘치는 DGI 두 사람을 만나 오후 4시까지 작업실 안에서 휴일처럼 잘 지냈다.
전화 주문하는 고객들을 위해서도 틈틈이 일했고, 눈치껏 셔터의 작은 문을 통해 상품을 내주고 그랬다.
마치 세상과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숨어서 지낸 어제.
이웃의 어느 가게가, 종업원을 고용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는지 서류철을 든 정장 차림의 DGI직원들이 수시로 떠들 썩 지나다녔다.
자동차를 몇 대씩 우리 가게 건너편에 주차해 놓은 그들은 점심시간엔 에바 페론 거리 쪽으로 다시 왁자그르르 소란을 피우며 몰려갔다.
나는 오늘 역시 숨어 지내는 기분을 떨칠 수 없는, 약간의 웅크린 기분에 잠겨 있다.
며칠 전부터 가게 앞 오디나무에 새순이 돋고 있다.
두 나무 중의 한 나무는 연초록 새싹을 날마다 몰라보리만큼 재빠르게 키워내는 중이다.
하지만 다른 나무는 해마다 싹터 오름의 진도(進度)가 상상외로 느리다.
죽고 있는지도 몰라서 가지를 부러뜨려 볼 때가 있다.
톡톡 소리가 나면서 꺾이면 희망이 전혀 안 보인다는 뜻이다.
휘면서 잘 안 부러지면 아직은 살아 있고 머잖아 새싹을 밀어 올리겠다는 의지(意志)와 자세가 역력한 셈이다.
나는 뚝뚝 꺾이지 않고 가지가 휘는 나를 발견한 느낌이다.
나는 아직 건재해 있는 것이다.
어제의 DGI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람들 같았다.
2012년 8월 22일 수요일
커피, 그 매혹적인 존재
맹하린
1992년도의 8월에 내렸던 아르헨티나 최고의 강우량이 277mm였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엔 8월 21일까지만 해도 223mm의 비가 내린 탓에 아르헨티나 8월의 역사상 새로운 기록 달성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으로 기상청은 예상하고 있다.
오지랖이 넓은 편은 아니지만, 한 오지랖은 한다고 보는 나는 은연 중 교민 경제가 우려되기 시작한다.
아베쟈네다 의류 도매상의 판매가 원활해야 고리처럼 연결된 타 업종들이, 정체(停滯)되거나 삐걱대지 않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내 지인들이 하나같이 아베쟈네다에 구축(構築)된 하나하나의 기둥이거나 주춧돌이거나 지붕, 그리고 벽이나 현관문의 역할을 이어 가고 있음에랴.
소규모의 자영업자인 나지만 항상 나 개인의 영달(榮達)에 앞서, 비만 많이 내려도 교민 경제에 대한 염려를 우선으로 삼게 된다.
그러니 내가 오지랖이 아닌 것 같지만 한 오지랖 한다는 이실직고(以實直告)같은 걸 하게도 되는 것이다.
2001년에 내가 꽃가게를 맡을 무렵에는 아르헨티나 사회 전반(全般)에 걸쳐 제 4의 달러파동이 발생했던 시기(時期)였다.
제 1은 군정(軍政)이 끝나던 무렵이었을 테고, 제 2는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을 치루고 난 뒤였을 것이며, 제 3은 IMF가 터졌던 1985년도의 전 후반에 걸친 시기(時期)가 아니었나 싶다.
그 다음이 2001년도였다.
더불어 지금은 제 5의 달러 파동이나 마찬가지의 현황(現況)에 처해 있다.
관심이 많아 항상 눈독을 들이던 한국인이 운영하던 꽃 가게가 2000년도에는 1만 5천 달러에 매물(賣物)로 나왔었는데, 2001년의 달러 파동이 닥치자, 2천 달러로 파격적인 하락(下落)을 했다.
때마침 C신문사를 그만두었던 나는 서둘러 계약을 하게 됐었다.
그때만 해도 꽃 집이 두 개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꽃시장에서 결혼식 꽃을 트럭으로 구입해 오는 모습을 여럿이나 되는 이들에게 들킨 모양이었다.
개신 교회의 헌화 회에서 꽃 봉사 일을 해내던 몇 분이 유행처럼 꽃 집을 차리기 시작했다.
저축 좀 해야지 싶으면 꽃 집이 생겨났다.
하물며 내게 꽃 집을 인계(引繼)했던 새댁 들까지 서너 번은 자리를 옮기며 다시 차렸다가 몇 달도 못 견디고 다시 문 닫거나 그래 왔다.
차후에 꽃 집은 절대로 차리지 않겠다고 했던 새댁 들이었다.
분명한 것은 나는 그때 2천 달러에 차린 꽃 집으로 밥은 먹고 살지만, 그녀들은 매번 몇 만불씩을 투자해도 얼마 못 가 그만 둔다는 점이다.
밥만 먹기가 괴롭고 힘겨운 모양이다.
(칫! 밥만 먹어도 고마워 하기가 아무 한테나 쉬운 줄 아는 모양이지?)
이 몸은 그럴 때마다 교민 경제부터 걱정하기 시작하는 아이러니의 만발(滿發)이다.
소규모인 꽃 가게가 이 정도니,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추세인 아베쟈네다 의류 도매 상인 들은 어떤 현상(現狀)에 처할 지가 눈에 훤히 보이게 되는 것이다.
4만이라던 교민 인구가 2001년 급격히 줄어 2만 정도 밖에 안 남아 있다고 들 말한다,
호주나 미국, 또는 캐나다로 빠지던 교민들이 이웃 나라나 멕시코로 특히 많이 들 떠났다는 얘기다.
나는 편하게 장사한다.
화분도 준비를 많이 하면 매상(賣上)이 훨씬 웃도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주로 생화(生花)를 취급한다.
나는 부자(富者)가 되는 일을 경계(警戒) 한다기 보다,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를 표방하며 살기를 선호하기에 더 그렇다.
사람은 가게를 가꾸고, 가게는 사람을 가꾼다고 말하면 지나친 역설(逆說)일까.
세분화(細分化), 차별화(差別化), 가치창출(價値創出).
내게 몹시 낯선 언어(言語) 들이 가끔은 윤택한 삶으로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겠다고 유혹의 눈길을 보낼 때 또한 없지 않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나에 어울리게 살아내고 싶다.
극키르츠네르파인 에드가르도 데뻬뜨리 하원의원은 “키르츠네르파 내부나 다른 당을 아무리 훑어 봐도 대통령 크리스티나를 대체할 인물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3선을 부추기고 있다고 매스컴은 전한다.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는 목소리까지 드높은 국면(局面)에 이르렀다.
대통령 크리스티나로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태연한 자세로 침묵을 고수(固守)하고 있는 가운데, 호르헤 사빠그 네우껜 주 주지사 역시 질 세라 “3선은 허용해야 하며 전체적인 헌법 개정 없이, 일부 조항의 수정 만을 통해서도 3선은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현실이다.
연극 ‘상복(喪服)이 어울리는 일렉트라’가 아니라 상복(喪服)이 어울리는 대통령 크리스티나와 그의 정책과 행정력을 몇 년쯤 더 지켜봐야 하는 시대(時代)를 그려 보게 되는 실정(實情)의 작금이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물론이고 우리 이민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너무 오랜 집권(執權).
크게 명예(名譽)롭지는 않아 보인다.
많이 개었다고는 해도 다시 흐려지는 날씨도 그렇고,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다.
굳이 핸드드립으로 내려 마시진 않더라도 커피도 일종의 생(生)을 향한 전략(戰略)이다.
내가 지향하는 일 중에 가장 나를 편하고 가깝게 하는 존재가 바로 커피다.
마치 숨겨진 애인과 같으며, 든든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쓴맛을 안기는 친구와 다름 아니다.
커피, 그 매혹적인 존재가 있어 언제나 크고 작게 감사 하게 된다.
2012년 8월 20일 월요일
맹고모
맹하린
내가 저 정도로 대단하지도 않고, 그 정도로 훌륭하지도 못하고, 이 정도로나마 유명무실한 글쟁이가 되었다는 건 순전히 고모의 영향이 컸다.
물론 선천적인 약간의 끼도 작용을 했을 테지만…... .
한 면(面)에 하나만 허가된 양조장을 운영했던 우리 집.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합(統合)시키는 걸로는 맘에 안 찼던지. 쌀로 만들던 막걸리를 잡곡으로 대체(代替)하도록 법을 바꿨던 격동기(激動期) 이전까지, 우리 소유의 전답(田畓)은 해마다 이웃마을까지 늘어났다.
고모는 전주사범을 나왔고 J대학 국문학과를 중퇴했다.
내동생 맹미숙은 고모의 미모(美貌)를 빼닮았다.
나는 외가(外家) 쪽을 닮았는데 고모나 맹미숙은 친가(親家) 쪽을 도습(蹈襲)했다고 본다.
나와 맹미숙은 고모의 심부름을 자주 다녔다.
특히 햇과일 심부름이었다.
나는 중학생이었고 동생은 초등학생이었다.
주로 일요일에 해낸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입덧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이유로 일꾼들을 보내기는 부끄러웠을 것도 같다.
고모의 자녀들이 넷이나 됐으니 나와 맹미숙의 수고가 얼마나 컸을지는 말해 무엇 할까.
십리(十里)가 아닌. 오리(五里). 그러니까 2Km 반경(半徑)의 근동(近洞)들이었다.
창산 리의 복숭아와 매실.
마전 리의 도마도, 그리고 참외.
득잣의 오디.
돌산 리의 청포도와 흑포도.
과일장사하는 집들은 아니고 한갓 농가(農家)였을 따름이다.
직접 따 줬으므로 싱싱했고 푸짐했다.
오가는 길마다 야산(野山)과 도깨비 방죽과 크고 작은 강과 수리조합의 수로(水路)와 호남평야의 들판과 나무와 꽃과 새와 물고기들이 시야 가득이었다.
언제나 고분고분 했던 나는, 포르르 의견을 내세운 적이 있다.
고모가 우리를 키우기는커녕 우리가 고모를 키운다는 느낌 같은 게 불쑥 치밀었던 날이었다고 여겨진다.
-나무를 심으면 3년이면 열매가 열리는데 왜 그렇게 안 해?
-우리는 우리 일만 잘 해내면 돼. 더불어 살아야잖아. 그 사람들도 현찰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골고루 사 먹는 맛이 최고야. 몰랐구나?
일 년에 두서너 번의 홍수로 인하여 논밭은 물론이고 강이나 수리조합의 수로(水路)들이 온통 물에 잠겨 거대한 하나의 강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야산에 올라 어린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어른들이 전부인 틈새에 서서 물 구경을 즐겼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는 지대가 약간 높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새터 마을의 미장원에 가서 화기(火氣) 지닌 숯덩이가 담긴 쇠집게를 머리에 얹고 뽀글파마도 했다.
오로지 고모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뜨겁고 지루하고 억지춘향이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때의 영합(迎合)이 어떻게 지대(至大)한 작용을 했고, 어떤 효과를 가져 왔고. 얼마만큼의 후유증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오랜 세월, 일 년에 미용실을 한 번 가던지, 한 번도 안가는 결단을 획득(獲得)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모가 보던 책들은 모두 내 차례였다.
중학교 때부터는 새 책을 구입하거나 대여점을 이용하게 되어 나는 거의 책의 세상 속에서 살았다. 그 무렵 나는 용돈을 삼중으로 받았다.
엄마, 할머니, 고모.
나는 그 시절 제법 호강을 했었다고 자인(自認)해 왔으므로, 어른이 되고 부터는 웬만한 고생 정도야 눈도 깜짝 안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일평생을 호강만 하며 살 수 있을까.
되와 말로 달고, 자로 재서 복을 받는다질 않던가.
나는 이러는 나를 자주 맘에 들어 한다.
비록 과일 사러 이 동네 저 동네 동생 손잡고 묻고 물으며 휘돌아 다녔지만 나름으로는 호강하며 살았는데, 그런 내가 난데없이 고생이라니, 그렇게 절망 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간다면 그건 진짜 비극(悲劇)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책을 안 읽으면 머리에 곰팡이가 피어나는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처럼 나는 날이면 날마다 책을 읽어 왔다.
지금은 쓰지 않으면 온몸에 바이러스가 번지는 신탁(神託)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에 이르렀다.
매일 써내지 않으면 바이러스의 침범(侵犯)을 걷잡을 수없이 당할지도 몰라서 나는 이리도 한결 같이 써내고 써낸다.
하지만 써야겠다고 쓰는 건 아니다.
새벽이 되면 자연히 책상에 앉거나 방바닥에 엎디면 그냥 써진다.
잘 써야겠다, 문학적으로 써야겠다 , 하는 등의 부담감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그점이 특히 좋다.
내가 해낸 여섯 번의 고국 여행 중에 두 번은 뵈었고, 세 번째에는 고모를 못 뵈었다.
1995년쯤에 타계(他界)하신 탓이다.
그래서일까.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도 없는 것만 같은 현재의 심정이다.
다시 간다면 환국(還國)이나 해볼까.
나는 지금도 고모의 심부름을 해내듯 산책 후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꼭 과일을 사들고 돌아오는 나를 발견 하게 된다.
청주에 계시고, 전화를 하면 낭랑한 음성으로 엄마는 항상 그러신다.
"아이고. 내 새끼야!"
엄마는 고모의 그늘에 가려 언제나 조용조용, 항상 고요고요 있는 듯 없는 것처럼 살았기 때문인지 나는 아무리 그래도 엄마 이전에 고모가 더 보고 싶은 것이다.
우물물은 센물이라서 머리를 감으면 뻣세다고 단물인 강물을 찾아갈 때 역시 나와 맹미숙을 양옆에 데리고 다니던 고모.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국제전화 속에서 그런 얘기들을 꺼내면 맹미숙은 그런저런 기억을 하나도 못해 낸다.
나를 따라 다닌 건 아는데 왜 갔었는지를 모르겠다는 얘기다.
이 또한 인생이다.
어떤 핏줄한테는 소중한 기억이, 어떤 핏줄에게는 전혀 소중하지가 않은 것이다.
내게 그나마 조용조용 고요침착한 면이 손톱만큼이나마 있다면 그건 엄마의 나긋함이 스며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하여간에 나를 글쟁이로 키운 건 고모.
바라 볼 때마다 조카의 입장에서도 아름답게 비쳐서 차마 거절하거나 반항할 수조차 없었던 맹고모였다.
실제로 나와 동생은 고모를 놀릴 때마다 그렇게 불렀다.
-맹고모!
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송별사를.
졸업반일 때는 답사를 읽게 되었던 일도 내 발표력에 적절한 영양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아직은 고모를 더 이상 보고 싶어 해선 안 될 것이다.
나의 신(神)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고모의 심부름을 해내듯 산책하고 그리고 과일도 사고 꾸준히 쓰고 싶은 글도 써내고, 그래야하겠기 때문이다.
맹고모…….
아셨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아름다워 정말 닮고 싶은 사람이라고 속으로 매번 감탄하고 희망했던 날들의 나를.
시골에 몸담고 살면서도 자고 새면 욕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욕 한 마디 안 하는 생을 이룩하고 언제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고모...
맹고모!
사랑 했어요.
사랑 합니다.
영원히요!!!
맹하린
내가 저 정도로 대단하지도 않고, 그 정도로 훌륭하지도 못하고, 이 정도로나마 유명무실한 글쟁이가 되었다는 건 순전히 고모의 영향이 컸다.
물론 선천적인 약간의 끼도 작용을 했을 테지만…... .
한 면(面)에 하나만 허가된 양조장을 운영했던 우리 집.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합(統合)시키는 걸로는 맘에 안 찼던지. 쌀로 만들던 막걸리를 잡곡으로 대체(代替)하도록 법을 바꿨던 격동기(激動期) 이전까지, 우리 소유의 전답(田畓)은 해마다 이웃마을까지 늘어났다.
고모는 전주사범을 나왔고 J대학 국문학과를 중퇴했다.
내동생 맹미숙은 고모의 미모(美貌)를 빼닮았다.
나는 외가(外家) 쪽을 닮았는데 고모나 맹미숙은 친가(親家) 쪽을 도습(蹈襲)했다고 본다.
나와 맹미숙은 고모의 심부름을 자주 다녔다.
특히 햇과일 심부름이었다.
나는 중학생이었고 동생은 초등학생이었다.
주로 일요일에 해낸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입덧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이유로 일꾼들을 보내기는 부끄러웠을 것도 같다.
고모의 자녀들이 넷이나 됐으니 나와 맹미숙의 수고가 얼마나 컸을지는 말해 무엇 할까.
십리(十里)가 아닌. 오리(五里). 그러니까 2Km 반경(半徑)의 근동(近洞)들이었다.
창산 리의 복숭아와 매실.
마전 리의 도마도, 그리고 참외.
득잣의 오디.
돌산 리의 청포도와 흑포도.
과일장사하는 집들은 아니고 한갓 농가(農家)였을 따름이다.
직접 따 줬으므로 싱싱했고 푸짐했다.
오가는 길마다 야산(野山)과 도깨비 방죽과 크고 작은 강과 수리조합의 수로(水路)와 호남평야의 들판과 나무와 꽃과 새와 물고기들이 시야 가득이었다.
언제나 고분고분 했던 나는, 포르르 의견을 내세운 적이 있다.
고모가 우리를 키우기는커녕 우리가 고모를 키운다는 느낌 같은 게 불쑥 치밀었던 날이었다고 여겨진다.
-나무를 심으면 3년이면 열매가 열리는데 왜 그렇게 안 해?
-우리는 우리 일만 잘 해내면 돼. 더불어 살아야잖아. 그 사람들도 현찰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골고루 사 먹는 맛이 최고야. 몰랐구나?
일 년에 두서너 번의 홍수로 인하여 논밭은 물론이고 강이나 수리조합의 수로(水路)들이 온통 물에 잠겨 거대한 하나의 강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야산에 올라 어린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어른들이 전부인 틈새에 서서 물 구경을 즐겼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는 지대가 약간 높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새터 마을의 미장원에 가서 화기(火氣) 지닌 숯덩이가 담긴 쇠집게를 머리에 얹고 뽀글파마도 했다.
오로지 고모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뜨겁고 지루하고 억지춘향이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때의 영합(迎合)이 어떻게 지대(至大)한 작용을 했고, 어떤 효과를 가져 왔고. 얼마만큼의 후유증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오랜 세월, 일 년에 미용실을 한 번 가던지, 한 번도 안가는 결단을 획득(獲得)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모가 보던 책들은 모두 내 차례였다.
중학교 때부터는 새 책을 구입하거나 대여점을 이용하게 되어 나는 거의 책의 세상 속에서 살았다. 그 무렵 나는 용돈을 삼중으로 받았다.
엄마, 할머니, 고모.
나는 그 시절 제법 호강을 했었다고 자인(自認)해 왔으므로, 어른이 되고 부터는 웬만한 고생 정도야 눈도 깜짝 안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일평생을 호강만 하며 살 수 있을까.
되와 말로 달고, 자로 재서 복을 받는다질 않던가.
나는 이러는 나를 자주 맘에 들어 한다.
비록 과일 사러 이 동네 저 동네 동생 손잡고 묻고 물으며 휘돌아 다녔지만 나름으로는 호강하며 살았는데, 그런 내가 난데없이 고생이라니, 그렇게 절망 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간다면 그건 진짜 비극(悲劇)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책을 안 읽으면 머리에 곰팡이가 피어나는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처럼 나는 날이면 날마다 책을 읽어 왔다.
지금은 쓰지 않으면 온몸에 바이러스가 번지는 신탁(神託)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에 이르렀다.
매일 써내지 않으면 바이러스의 침범(侵犯)을 걷잡을 수없이 당할지도 몰라서 나는 이리도 한결 같이 써내고 써낸다.
하지만 써야겠다고 쓰는 건 아니다.
새벽이 되면 자연히 책상에 앉거나 방바닥에 엎디면 그냥 써진다.
잘 써야겠다, 문학적으로 써야겠다 , 하는 등의 부담감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그점이 특히 좋다.
내가 해낸 여섯 번의 고국 여행 중에 두 번은 뵈었고, 세 번째에는 고모를 못 뵈었다.
1995년쯤에 타계(他界)하신 탓이다.
그래서일까.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도 없는 것만 같은 현재의 심정이다.
다시 간다면 환국(還國)이나 해볼까.
나는 지금도 고모의 심부름을 해내듯 산책 후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꼭 과일을 사들고 돌아오는 나를 발견 하게 된다.
청주에 계시고, 전화를 하면 낭랑한 음성으로 엄마는 항상 그러신다.
"아이고. 내 새끼야!"
엄마는 고모의 그늘에 가려 언제나 조용조용, 항상 고요고요 있는 듯 없는 것처럼 살았기 때문인지 나는 아무리 그래도 엄마 이전에 고모가 더 보고 싶은 것이다.
우물물은 센물이라서 머리를 감으면 뻣세다고 단물인 강물을 찾아갈 때 역시 나와 맹미숙을 양옆에 데리고 다니던 고모.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국제전화 속에서 그런 얘기들을 꺼내면 맹미숙은 그런저런 기억을 하나도 못해 낸다.
나를 따라 다닌 건 아는데 왜 갔었는지를 모르겠다는 얘기다.
이 또한 인생이다.
어떤 핏줄한테는 소중한 기억이, 어떤 핏줄에게는 전혀 소중하지가 않은 것이다.
내게 그나마 조용조용 고요침착한 면이 손톱만큼이나마 있다면 그건 엄마의 나긋함이 스며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하여간에 나를 글쟁이로 키운 건 고모.
바라 볼 때마다 조카의 입장에서도 아름답게 비쳐서 차마 거절하거나 반항할 수조차 없었던 맹고모였다.
실제로 나와 동생은 고모를 놀릴 때마다 그렇게 불렀다.
-맹고모!
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송별사를.
졸업반일 때는 답사를 읽게 되었던 일도 내 발표력에 적절한 영양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아직은 고모를 더 이상 보고 싶어 해선 안 될 것이다.
나의 신(神)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고모의 심부름을 해내듯 산책하고 그리고 과일도 사고 꾸준히 쓰고 싶은 글도 써내고, 그래야하겠기 때문이다.
맹고모…….
아셨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아름다워 정말 닮고 싶은 사람이라고 속으로 매번 감탄하고 희망했던 날들의 나를.
시골에 몸담고 살면서도 자고 새면 욕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욕 한 마디 안 하는 생을 이룩하고 언제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고모...
맹고모!
사랑 했어요.
사랑 합니다.
영원히요!!!
2012년 8월 18일 토요일
우기(雨期)의 세찬 빗소리를 들으며
맹하린
아르헨티나 한국일보
2012년 8월 28일
어쩌자는 심사(心思)인지 비님이 일주일도 넘게 쏟아지고 있다.
그쳤는가 하면 또 쏟아지고 내린다 하면 다시 그친다.
어제 3시쯤 문협의 P고문이 예고도 없이 나타나셨다.
어쩌면 비님 탓인지도 모르겠다.
시댁 쪽 항렬로 아들의 아저씨뻘이라선지 오실 때마다 조카 주라며 과자를 사다 주신다.
차를 대접하려는 눈치가 보이자, 문협의 L회장 가게에서 마시자며 휑, 먼저 가신다.
L회장이 운영하는 가게에 간 지 열흘도 더 됐다.
헌옷은 그만 사 입고 이제부터는 한국수입옷의 오페르타(세일)로 구입방식을 바꿀 작정 같은 걸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안 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안한다면서 할 때도 있다.
'개인의 취향과 개인주의, 그룹에 속하고 싶은 열망과 그 그룹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이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짐멜의 패션에 대한 위와 같은 지적은 사실 내 패션에 대한 자세와는 연관성이 전무(全無)한 개념일 뿐아니라 생뚱 맞은 지론(至論)이기도 하다.
L회장이 녹차를 준비하는 동안 P고문은 L회장이 키우는 반려견 방울이의 애꾸눈을 의아해 하시며 내게 그 이유를 물으신다.
"10년쯤 되었을 것 같아요.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엄마(L회장) 찾아 길 건너 가다가……. 방울이는 엄마 찾아 삼 만 리의 주인공이 아르헨티나로 엄마를 찾아 왔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던 모양입니다."
P고문의 빗소리를 밀쳐낼 것만 같은 파안대소(破顔大笑)...... .
(나는 대체적으로 문협식구들과 지인들 앞에서 좀 웃기는 편이며 공주병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내 생각으론 여성회원들 앞에서 몇 번 밖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야한 얘기도 잘한다나 뭐라나. )
마침 녹차를 내어 온 L회장이 부연설명을 시작한다.
"그때 방울이는 눈만 다친 게 아니었어요. 오른 편 장기(臟器)하나까지도 성하지 못하다고 했었거든요. 의사가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저의 기도로 치유가 가능했답니다."
(때로 L회장은 전도회장처럼 발언한다.)
따지고 보면 셋 다 카톨릭 교우다.
P고문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10여 년 간 키우던 강아지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시며 눈에 안보이는 바통을 L회장에게서 이어 받는다.
그분의 처제가 미국으로 떠날 때 물려 준 강아지였다.
이틀 동안 앓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더라고 이미 이야기 보따리의 네 귀퉁이를 풀어 놓은 상태시다.
어떻게 처리할까를 온세 지역의 친구에게 전화로 물으시자, 까짓 똘똘 포장하여 쓰레기통에 버리면 간단하지 참 걱정도 팔자라는 답을 얻으셨나 보았다.
가족으로 키우던, 자식 같던 존재를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싶어 깨끗한 천으로 싸고 또 싸서 맞춤한 종이 상자에 일단 담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근교인 merlo 행 기차표를 끊었고, 한 시간 후 도착하여 한참을 걷고 걸어 어느 광야에 묻으셨다는 설명이셨다.
나는 그때 순간적으로 강아지의 운구가 실린 장의차를 무릎에 올리고 차창을 바라보며 이별여행을 하고 계신 P선생의 고즈넉한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미국의 처제가 우연처럼 전화를 했더라는 대목으로 이야기보따리를 다시 묶으시기 시작했다.
P고문은 처제를 동생처럼 아끼고 있고, 처제는 P고문의 셋이나 되는 따님들 유학 뒷바라지를 해내는 처지의, 간호사를 직업으로 가진 50이 가까운 독신주의자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에 살 때도 현지인 병원의 간호사였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칭을 생략하는 사이다.
나와 P선생은 아주 가끔씩 시시콜콜한 얘기를 전화로 주고 받는 사이고.
그래서 그분의 처제와 따님들이 맨날 전화 해서는 사람에 대한 안부는 제쳐 두고 강아지만 찾는다는 정도는 이미 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라고 전화에 귀를 대어 주면 강아지는 그야말로 너무나 슬픈 표정으로 변해서 함게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얘기도 기억하고 있는 나다.
아니나 다를까 강아지의 안위부터 챙기고 말았나 보았다
"형부, 내 강아지 잘 크고 있어?"
"그럼, 잘 크고 있지."
"잘 키워야 돼? 어젯밤 꿈을 꿨잖아. 그런데 아르헨티나에 있는 강아지가 미국의 내 집에는 왜 들렀을까?"
P고문은 내색이라는 내색을 온통 삼가고 딴청만 피우셨다는 실토를 이야기 보따리 안에 뒤늦게 꼭꼭 여미고 더욱 여몄다.
나도 질세라 강아지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그런데 나는 애석하게도 강아지를 안 키우는지 못 키우는지 그럭저럭 흐르고 흐르며 사는 것만 즐기는 주의다.
내 한 몸 건사하며 살기도 버거운 나는 남의 강아지는 예쁜데, 키워 봐야겠다는 맘 같은 건 전혀 안 하고, 하물며 못 한다.
누가 나를 키운다고 팔 걷어 부치기 전에 내가 나를 잘 거두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만 날이면 날마다 하늘하늘 흩날리거나 차곡차곡 쌓이는 탓이다.
내 지인들과 내 그대들에게 상처나 주지 말아야겠다는 상념만 강아지의 털처럼 보들보들 보드랍게 살아 있기도 하고 누어 있기도 한, 그렇고 그러한 상태다.
그렇찮아도 얼마전 J교회에 다니시는 문우님께서 설파하셨다.
장교단으로 구성된 남전도회 어르신들이 저 꽃집에 있는 꽃을 왜들 못꺾느냐고 그랬었다는 우스개였다.
(아이고... 남편의 병치레를 8년이나 해낸 내가 또 누구 뒷바라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말쌈?)
인생에 있어 상처란 꼭 싸움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다.
너무 자상해도 너무 관심을 쏟아도 그게 결국은 상처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자면 인생 참 슬프고, 생각하노라면 인생 참 행복하다.
다행이다.
맨날 슬프거나 허구헌날 행복한 게 아니라서 말이다.
그러나 행복하다.
맨날 슬픈 것 같고 맨날 기쁜 것 같은 내 변덕 때문에 말이다.
나는 산책시간이 다가오기도 했고, 시간을 지켜야할 예약도 있었으므로 4시경 L회장의 가게를 나왔다. 물론 정중한 인사를 잊지 않고 남겼다.
두 분을 찰나처럼 웃겨 주려고 해낸 인사가 배꼽인사다.
밖은 여전히 비와 땅과의 속삭임이 소근소근 은밀한 비밀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겨울장마는 참으로 대단한 저력이 있었다.
신비로운 장마였다.
해도 보여 주고, 초생달도 보여 주고, 특히 구름, 그리고 바람과 추위와 온화함 역시 보여 줄 건 다 보여 주는, 파노라마에 버금가는 스펙터클한 장마였다.
밤중에 세찬 빗소리에 취한 채 나는 이 글을 적고 있다.
내 서재의 벽에 걸린 뭉크의 '절규'가 나 대신 비의 후련함을 부르짖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한국일보
2012년 8월 28일
어쩌자는 심사(心思)인지 비님이 일주일도 넘게 쏟아지고 있다.
그쳤는가 하면 또 쏟아지고 내린다 하면 다시 그친다.
어제 3시쯤 문협의 P고문이 예고도 없이 나타나셨다.
어쩌면 비님 탓인지도 모르겠다.
시댁 쪽 항렬로 아들의 아저씨뻘이라선지 오실 때마다 조카 주라며 과자를 사다 주신다.
차를 대접하려는 눈치가 보이자, 문협의 L회장 가게에서 마시자며 휑, 먼저 가신다.
L회장이 운영하는 가게에 간 지 열흘도 더 됐다.
헌옷은 그만 사 입고 이제부터는 한국수입옷의 오페르타(세일)로 구입방식을 바꿀 작정 같은 걸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안 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안한다면서 할 때도 있다.
'개인의 취향과 개인주의, 그룹에 속하고 싶은 열망과 그 그룹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이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짐멜의 패션에 대한 위와 같은 지적은 사실 내 패션에 대한 자세와는 연관성이 전무(全無)한 개념일 뿐아니라 생뚱 맞은 지론(至論)이기도 하다.
L회장이 녹차를 준비하는 동안 P고문은 L회장이 키우는 반려견 방울이의 애꾸눈을 의아해 하시며 내게 그 이유를 물으신다.
"10년쯤 되었을 것 같아요.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엄마(L회장) 찾아 길 건너 가다가……. 방울이는 엄마 찾아 삼 만 리의 주인공이 아르헨티나로 엄마를 찾아 왔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던 모양입니다."
P고문의 빗소리를 밀쳐낼 것만 같은 파안대소(破顔大笑)...... .
(나는 대체적으로 문협식구들과 지인들 앞에서 좀 웃기는 편이며 공주병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내 생각으론 여성회원들 앞에서 몇 번 밖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야한 얘기도 잘한다나 뭐라나. )
마침 녹차를 내어 온 L회장이 부연설명을 시작한다.
"그때 방울이는 눈만 다친 게 아니었어요. 오른 편 장기(臟器)하나까지도 성하지 못하다고 했었거든요. 의사가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저의 기도로 치유가 가능했답니다."
(때로 L회장은 전도회장처럼 발언한다.)
따지고 보면 셋 다 카톨릭 교우다.
P고문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10여 년 간 키우던 강아지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시며 눈에 안보이는 바통을 L회장에게서 이어 받는다.
그분의 처제가 미국으로 떠날 때 물려 준 강아지였다.
이틀 동안 앓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더라고 이미 이야기 보따리의 네 귀퉁이를 풀어 놓은 상태시다.
어떻게 처리할까를 온세 지역의 친구에게 전화로 물으시자, 까짓 똘똘 포장하여 쓰레기통에 버리면 간단하지 참 걱정도 팔자라는 답을 얻으셨나 보았다.
가족으로 키우던, 자식 같던 존재를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싶어 깨끗한 천으로 싸고 또 싸서 맞춤한 종이 상자에 일단 담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근교인 merlo 행 기차표를 끊었고, 한 시간 후 도착하여 한참을 걷고 걸어 어느 광야에 묻으셨다는 설명이셨다.
나는 그때 순간적으로 강아지의 운구가 실린 장의차를 무릎에 올리고 차창을 바라보며 이별여행을 하고 계신 P선생의 고즈넉한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미국의 처제가 우연처럼 전화를 했더라는 대목으로 이야기보따리를 다시 묶으시기 시작했다.
P고문은 처제를 동생처럼 아끼고 있고, 처제는 P고문의 셋이나 되는 따님들 유학 뒷바라지를 해내는 처지의, 간호사를 직업으로 가진 50이 가까운 독신주의자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에 살 때도 현지인 병원의 간호사였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칭을 생략하는 사이다.
나와 P선생은 아주 가끔씩 시시콜콜한 얘기를 전화로 주고 받는 사이고.
그래서 그분의 처제와 따님들이 맨날 전화 해서는 사람에 대한 안부는 제쳐 두고 강아지만 찾는다는 정도는 이미 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라고 전화에 귀를 대어 주면 강아지는 그야말로 너무나 슬픈 표정으로 변해서 함게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얘기도 기억하고 있는 나다.
아니나 다를까 강아지의 안위부터 챙기고 말았나 보았다
"형부, 내 강아지 잘 크고 있어?"
"그럼, 잘 크고 있지."
"잘 키워야 돼? 어젯밤 꿈을 꿨잖아. 그런데 아르헨티나에 있는 강아지가 미국의 내 집에는 왜 들렀을까?"
P고문은 내색이라는 내색을 온통 삼가고 딴청만 피우셨다는 실토를 이야기 보따리 안에 뒤늦게 꼭꼭 여미고 더욱 여몄다.
나도 질세라 강아지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그런데 나는 애석하게도 강아지를 안 키우는지 못 키우는지 그럭저럭 흐르고 흐르며 사는 것만 즐기는 주의다.
내 한 몸 건사하며 살기도 버거운 나는 남의 강아지는 예쁜데, 키워 봐야겠다는 맘 같은 건 전혀 안 하고, 하물며 못 한다.
누가 나를 키운다고 팔 걷어 부치기 전에 내가 나를 잘 거두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만 날이면 날마다 하늘하늘 흩날리거나 차곡차곡 쌓이는 탓이다.
내 지인들과 내 그대들에게 상처나 주지 말아야겠다는 상념만 강아지의 털처럼 보들보들 보드랍게 살아 있기도 하고 누어 있기도 한, 그렇고 그러한 상태다.
그렇찮아도 얼마전 J교회에 다니시는 문우님께서 설파하셨다.
장교단으로 구성된 남전도회 어르신들이 저 꽃집에 있는 꽃을 왜들 못꺾느냐고 그랬었다는 우스개였다.
(아이고... 남편의 병치레를 8년이나 해낸 내가 또 누구 뒷바라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말쌈?)
인생에 있어 상처란 꼭 싸움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다.
너무 자상해도 너무 관심을 쏟아도 그게 결국은 상처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자면 인생 참 슬프고, 생각하노라면 인생 참 행복하다.
다행이다.
맨날 슬프거나 허구헌날 행복한 게 아니라서 말이다.
그러나 행복하다.
맨날 슬픈 것 같고 맨날 기쁜 것 같은 내 변덕 때문에 말이다.
나는 산책시간이 다가오기도 했고, 시간을 지켜야할 예약도 있었으므로 4시경 L회장의 가게를 나왔다. 물론 정중한 인사를 잊지 않고 남겼다.
두 분을 찰나처럼 웃겨 주려고 해낸 인사가 배꼽인사다.
밖은 여전히 비와 땅과의 속삭임이 소근소근 은밀한 비밀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겨울장마는 참으로 대단한 저력이 있었다.
신비로운 장마였다.
해도 보여 주고, 초생달도 보여 주고, 특히 구름, 그리고 바람과 추위와 온화함 역시 보여 줄 건 다 보여 주는, 파노라마에 버금가는 스펙터클한 장마였다.
밤중에 세찬 빗소리에 취한 채 나는 이 글을 적고 있다.
내 서재의 벽에 걸린 뭉크의 '절규'가 나 대신 비의 후련함을 부르짖고 있었다.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선(善)하고 선(善)하게
맹하린
요즘 영화 관람에 푹 빠져 해야 할 일도 미루며 나는 신나게 잘 지내고 있다.
9월과 10월에, 일 년 중 가장 바쁜 대목이 둘이나 겹쳐 있다.
봄의 날과 어머니날이다.
잠재적으로는 그 무렵을 위한 휴식을 미리 당겨쓰고 있지 않나 싶어진다.
어떤 일에 반하면 끝을 보는 성격.
이 점은 내게 작은 장점이자 커다란 단점이 되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나를 한 번도 후회하거나 안타까워 하지 않는 주관에 꽤나 익숙했고 긍지까지 간직했던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나에 맞춰서 나답게 산다는 것.
내가 나를 알고 있다는 건 어떤 면으로는 절반의 행복 아닐까.
어제는 브린가레야의 [클린스킨]이라는 영화를 매우 스릴 있게 감상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질문해 왔다.
(누가 나와 친구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신나?)
세상엔 , 아니 내겐 좋은 친구가 여럿이어서 그 점 너무나 축복이고 감사로운 일이다.
저 사람들과 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과 친해서 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도 나는 앞으로 훨씬 선(善)하게 살아내야 할 것 같다.
차카게, 차카게.
명언이 절로 떠오르는 하루의 시작이다.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고통과 대화할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
-알랭 드 보통-
2012년 8월 13일 월요일
The Departed(디파티드)
맹하린
홍콩영화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작품 [디파티드]를 감상했다.
[무간도]처럼 대사가 간결하면서도 사색적이거나 철학적이진 않았으나, 스릴과 긴장도가 매 장면마다 넘쳤고, 점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함도 흥미진진 했다.
특히 주연배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잭 니콜슨의 연기가 뛰어났다.
맷 데이먼도 잘 해냈고.
주연여배우...
여배우 공모에 친구 따라 갔다가 친구는 떨어지고 그녀만 발탁되어 화제를 일으켰던...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나중에 검색해서 보충할 생각임.)
그 여배우의 때 묻지 않은 표정도 신예답고 신선했다.
검색 해보니 Vera Farmiga였다.
마무리가 너무 허무함으로 장식 됐다.
[무간도]를 다시 감상할 작정 같은 걸 굳히게 된다.
[무간도]는 동양을, [디파티드]는 서양을 적절히 드러낸 작품이었다고 본다.
영화의 마무리 역시 [무간도]는 동양식으로, [디파티드]는 서양식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동양은 서양을, 서양은 동양을 선호하며 상대적인 도덕이나 율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의 마무리 역시 그렇게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잔인한 면으로는 [무간도]가 훨씬 강렬하고 높게 느껴진다.
무간도는 몇 년 전 가족이 CD로 구워줘 3편까지 내내 손에 땀을 쥐고 관람했는데, 몇 개 구워서 절친들에게 선물할 생각!!!
나.
나이를 자꾸만 떠 먹어 버린 사람 맞나 모르겠다.
냄편이 저 세상에서 그럴 것이다.
"여자가 무슨 저렇게 무서운 영화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여태껏 잼 있어 하냐?"
그는 스릴러나 공포 영화를 즐겨 보는 나를 참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었고,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고 질색하며 자리를 피해줬었기 때문이다.
더욱 건강에 신경을 쓰리라.
음악, 영화, 문학...
아름다운 작품들이 이 세상엔 너무 많다.
그래도 가끔은 한 눈도 팔면서
서민의 역할에 감사도 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유유히 흐르겠다.
소탈한 생(生)을 향해 계속 걸어 가고 싶다.
-초여름-
[모간도를 본 지 몇 년 후에 접하게 된 [티파티드]는 [모간도]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모간도]를 다시 보고 난 후의 [모간도]는 [디파티드]를 되새겨 보게했다.
[모간도]가 간결한 게 아니라 [디파티드]가 압축미 지닌 예술이었다.
훨씬 첨예롭고 군더더기라고는 없고...
[모간도]의 1편 만을 리메이크 시켰기 때문에 제 2와 제 3의 [디파티드]가 나오기 전엔 [모간도]의 2편과 3편이라도 다시 보려고 한다.
2편은 1편이 있기까지의 얘기를 그렸고, 3편은 2편의 뒷 이야기였다고 기억된다.
2012년 8월 12일 일요일
안부(安否)를 전하며
맹하린
토요일인 어제 오후.
고객인 끼모가 모처럼 찾아왔다.
한국인 2세인 끼모는 한국말이 서툴다.
언제나 현지인 애인과 함께 온다.
끼모라는 한국청년이 정계 진출을 앞두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여당에도 가입하게 됐다는 기사를 몇달 전 보았었다.
잔상처럼 남은 그 기억 때문에 완성된 꽃다발을 건네면서 안부(安否) 역시 건네게 되었다.
“세나도르(상원의원) 일은 재미 있어요?”
“아, 네. 뭐, 정치...그렇죠.”
끼모는 한국말에 익숙치 못하다는 걸 본인도 잘 알기 때문에 일단 토막 내고, 그 다음에야 이어 붙여 만들어 내는 편이다.
그는 내게 서반아어 보다는 한국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여일하게 보인다.
나는 그에게 서반아어로 말하기 위해 노력하고.
가만히 분석하자면 끼모는 어쩌면 나를 위해 토막 난 한국말을 열심히 이어 붙이는 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그는 완전 아르헨티노답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니 아르헨티나 시민권자이지만, 부모를 위시한 조상을 존승하는 한국인임에도 틀림없다.
머리 스타일은 항상 벤허를 연상시킨다.
양옆은 면도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을 정도고 가운데만 무성한 갈기머리이다.
아르헨티나가 자유로운 나라는 자유로운 나라다.
정치를 꿈꾸고 민심(民心)에 파묻혀 지내기를 희망하고 있는 끼모의 머리 스타일이 그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름하여 모히칸 스타일이다.
Mojicano-Punky라고도 하며 끄레스타라고도 일컫는 모양이다.
꽃을 찾아갈 때마다 칭찬을 여러 번 해내는 대단한 에치켓쟁이다.
그럴 때 나는 노비아(애인)하고 너무 잘 어울려 보기 좋다고 말해 준다.
끼모의 애인은 여느 탤런트 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여하 간에 나라는 사람은 칭잔 쟁이 에치켓 쟁이한테 나약한 면모를 나 스스로에게 금세 들킨다.
(자라면서, 내가 자랄 때도 있었던가 싶지만... 아무튼 자라면서 나는 잔소리가 싫어서 칭찬만 먹고 자랄려고 매사를 솔선수범하며 자랐다고 본다. )
어떤 면으로 나는 끼모의 교양 있고 반듯한 모습에서 우리 2세들의 밝고 쾌청한 미래를 발견하고 일종의 안도감을 만끽하는지도 모른다.
어제 두 번 째로 인상에 남았던 손님은 현지인 화비안이다.
그는 옆길에 있는 레미세리아의 레미세로(대절용자가용기사)이고 이름은 화비안이라고 우리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본인을 당당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금요일에 자기 동료 산드로가 해간 것과 같은 값의 꽃바구니를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밤당번이라서 내게는 낯설었다.
내가 밤에 어디를 잘 나다니지 않고 있고, 그런 이유로 밤에 레미스를 이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가 낯설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월요일은 엄마의 생일인데, 그런데, 그런데, 나의 엄마가 아파요."
그런데를 여러 번 겹치며 거기까지 얘기하던 그는, 눈물 정도 글썽였다면 모를까 느닷없이 눈물을 떨구며 꺼억 꺽 울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찰나를 피우는 미소(微笑)만이 입가에서 망설임의 피고 짐을 거듭했을 것이다.
(나이도 40초반인 사람, 처음 본 사람, 거기다 현지인 사람이가 내게 꽃을 주문하러 와서 말 몇 마디 꺼내더니 자기 설움에 꺽꺽 울고 있네?)
사람이가... 이 말은 우리 2세들이 전체적으로 잘 사용하는 말일 것이다.
눈물이가, 연필이가, 가방이가, 가,가,가...... .
하지만 나는 금세 잘못을 뉘우치고 일단 표정관리를 위해 약간의 슬픈 얼굴을 보여야 했다.
이윽고 안도 했다는 듯 그는 내게 기습적으로 뺨을 대는 인사까지 해내고 있었다.
(내가 어느덧 약간의 모성애라도 비쳤던 것일까. 에이 참, 계속 웃었어야 했는데...)
날짜와 시간을 적고 그를 보낸 뒤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이미 사태(事態)를 파악한 가족이 다시 미소를 띤 나를 향해,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대며 짧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쉿!"
엄마가 아프다는 사람에게 그런 표정이 뭐냐, 다시 되돌아 와 잊은 말을 보탤 경우 들키기 십상인 자세다, 등의 압축됐으면서도 매우 짧은 타박이었다.
나는 다시 웃으며 변명을 시작했다.
"매장에서 이미 그에게 웃고 말았는 걸? 처음 보는 40대의 현지인이, 하물며 남자가,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엄마가 아프다고 갑작스레 울어댄다면 나로선 다시 안 웃겠다는 보장 같은 걸 당장엔 못 해내지! 못해내지?"
나는 때로 가족 앞에서 이리도 허심탄회의 극치다.
오랜 습관이다.
"그게 바로 아르헨티노들의 효심(孝心)이죠."
그랬다.
나는 화비안의 어머니 사랑을 칭찬하려고, 격려하기 위해 그리도 짧게나마 반기며 웃었을 것이다.
화비안.
그를 백번이라도 이해한다. 나는…….
사람은 때로 아는 사람에게도 숨겨 온 슬픔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내 비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때로 웃어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결국은 울컥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은 나도 아는 여인이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했다하여 가까운 식당에서 축하잔치가 있었다.
값나가는 꽃들 여럿이나 배달했다.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고객들의 주문 시(時)에 짧거나 약간 긴 안부(安否)를 주고받는 일이 내겐 언제라도 다반사(茶飯事)다.
딱히 주문을 떠나서 그들과 평소에 못한 안부(安否)를 나눌 수 있어 기쁜 일이라고 본다.
바닥창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 걷는 걸음의 땅마다 그의 이름이 닿고 찍히기를 바랐다는 옛날 그리스 사람들의 샌들은 아니더라도 나는 나와 가족이 장식하는 꽃마다 나의 안부(安否)를 얹어 그들 모두에게 축복을 전하는 일을 즐겨 실행해 왔을 것이다.
-당신은 틈날 때마다 걷고 자주 여행을 즐기십시오. 키엘케골이 그랬을 겁니다. 걷는 사람에게 잊지 못할 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이죠. 당신은 사람들과 안부를 나눌 때 특히 웃으시오.
내가 난생 처음 신경성소화불량이라는 병을 얻어 병원을 찾았던 이민자 시절의 첫 자락일 때, 현지인 의사가 내게 처방해준 명언(名言)이다.
그날 그 현지인 내과의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설 때, 내 급성소화불량의 90프로를 치유 받았었다고 나는 확신을 거듭하는 바다.
그는 과연 명의(名醫)였다고 뒤늦은 칭찬 또한 새삼 아끼지 않게 된다.
나는 오늘도 내 고객들에게 안부를 보내고 , 내 지인들에게도 봄이라는 계절의 안부를 전하는 중이다.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부산 동서
맹하린
아르헨티나 한국일보
1997년 7월 19일 토요일
20여 년 동안 써 모았던 수필들을 엮어 출간(出刊)이라는 걸 해 보려고 고국에 다녀왔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토록 많은 난관과 함정 역시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정작 책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는 ‘책’이라는 소리조차 꺼내기가 싫어질 정도로 만만치 않은 고군분투(孤軍奮鬪)였고 외로운 강행군(强行軍)이었다.
우선 그 일을 C선배에게 일임(一任)하고 시어머님이 계신 부산으로 향했다.
연세가 80이신 어머니께서는 목포의 친척집으로 나들이 겸 출타중이셨고, 두 아들을 서울의 대학에 유학 보낸 동서만 3층집을 덜렁 지키고 있었다.
한의사인 시동생은 요지(要地)에 위치한 한의원에 출퇴근하는 편이라 동서 혼자 지키고 사는 커다란 집은 적막하면서도 아늑한가 하면 썰렁한 구석 또한 없잖아 있었다.
대한민국 제 2의 도시인 부산의 거리와 시장은 서울과 다름없이 많은 인파로 복닥거렸지만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으면 언제 그렇더냐 싶게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산에 머무는 동안 나는 식사 중에는 물론이고 식사 후에도 동서와 여러 가지 살아온 얘기들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시동생과 절친한 동기이거나 동창들인, 부산의 내로라하는 한의사들이 모두 자가용을 지니고 있는데도, 좁은 국토에 구태여 자가용이 왜 그리들 필요한가고 의아해 하며 버스와 전철과 택시만을 이용하는 시동생의 고집에 가까운 신념(信念)에 조심스럽게 합세해온 동서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동의 시선으로 바라다 볼 수밖에 달리 도리라고는 없었다.
감동되는 부분은 또 있었다.
25년 전에 동서가 결혼하면서 준비했던 문 두 짝 모델의 호마이카 장롱과 화장대였다.
그 가구들은 서너 번 서울과 부산으로 한의원을 옮기며 이사 다니는 통에 긁히고 할퀸 자태로 큼직한 보물 상자처럼 안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이민 오며 물려준 자개문갑도 대청마루의 홀 가운데에 의연하게 버티고 앉아 나와 자꾸만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모르겠는데 시동생의 친구 P씨에게서 결혼선물로 받았었다는 무쇠다리미까지 마치 상이군인이나 되는 것처럼 손잡이와 몸통이 성치 않으면서도 제법 뜨거운 열까지 발산(發散)하면서 옷가지들을 잘도 다려주었다.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 살던 굴로 향한다는 말에서 연유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컬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사(心事)가, 매사에 꼼바지런하고 검소의 표본처럼 살아온 동서, 그리고 해묵어 분신과 같이 잘 어울리는 옛 가구(家具)들까지 다시금 바라다보게 되면서 차츰 감개(感慨)되어 새록새록 피어났다.
환경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을 얼마나 많이 쥐락펴락 하는가.
얼마나 많이 단련시키는 것일까.
알뜰살뜰한 시어머님의 생활방침에 알게 모르게 물들어 버린 우리 세 며느리들은 누가 더 절약에 절약을 고집하는가를 시합하는 것처럼 각자 열심히 아끼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셋 중 그나마 내가 좀 옷을 즐겨 입는 편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사치(奢侈)와는 담 쌓는 즐김이었다고 자부(自負)한다.
가장 가슴 아렸던 얘기는 그렇게나 사이좋은 그들 내외가 시어머니의 참견 많은 시집살이로 인해 이혼까지 결정됐었다는 대목에 있었다.
이혼수속을 하기 위해, 고향인 전주의 면사무소를 향해 기차를 타고 가다가 기차 안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고 돌아 왔었다는 동서내외.
그 부분에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후르르르 내쉬었던 것도 같다.
그래도 상황은 더 하면 더 했지 전혀 나아지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러다 내가 병들어 죽으면 어쩌나 생각하니 남편도 가족도 다 소용없더라는 단념에 새롭게 교사자격증을 되살리는 관문을 통과해냈고, 급기야 대전의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기도 했었다는 동서.
혼자 자취하면서 시동생이 주말에만 다녀가는 생활을 하다가 그도 편치 않아 다시 부산으로 들어 온지 한 달 밖에 안 되었노라고 울먹이며 실토하던 동서.
나는 그런 처지의 동서를 위해 결국 시어머니도 못 만나 뵙고 돌아오게 되었다.
내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시어머니는 당장 달려오실 테고. 그러면 동서의 시집살이는 다시 시작되리라는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양보하고 참고 또 다른 불효를 저지르는 것.
그게 바로 조국과 혈육을 떠나온 사람의 변증법(辨證法) 아닐까.
멀리 있으나 가까웠고. 가까이 있으나 멀어야 하는 이민자의 혈육에 대한 애로점.
하루도 불편한 날은 아니었으나 하루도 그리움을 밀칠 수도 없었던 날들의 순례(巡禮)…….
바쁜 일에서 틈 내어 나를 전송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려는 시동생과, 못내 섭섭한 표정을 얹어 용돈까지 챙겨주던 동서를 뒤로하고 새마을 기차에 오르는데 그제야 시야가 뽀얗게 흐려오고 있었다.
새로운 각오로 도착한 내 제 2의 조국 아르헨티나는 지독한 인플레가 일종의 권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권위(權威) 가득 점령하고 있었다.
-초여름-
고부(姑夫)간의 갈등이 팽배(澎湃)를 거듭하면서 상실을 가져올 가정의 가치(價値)나 아우라, 혹은 고난은 전통이나 혈연에 대한 존재의 지독한 변화를 요구한다.
내가 자주 내 개인 신상(身上)과 가족사(家族史)를 들추는 근본적 원인은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 부족한 글에서나마 한 줌의 동기부여를 얻어, 현재 처해 있는 고난에서 하루 속히 깨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우려했으며 간과(看過)할 수 없었던 일들이란, 세상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는 큰 봉사나 친절이나 명예나 소유욕을 획득하기에만 급급할 뿐. 가족과 혈육에게 특히 친절하고 가장 나긋하고 최고로 평화로운 산소(酸素)를 공급하지는 못하는 양상이더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나는 철저히 외롭기 위해 이민을 떠나왔겠지만, 어쩌면 나는 몹시도 외롭고, 그 외로움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 여전히 내 나라에 환국(還國)하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시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가 벌써 십여 년도 넘었다.
부산 동서는 시어머님이 돌아 가셨는데, 드디어 해방인데, 그런데도 동서는 뇌졸중으로 바깥출입을 못한 지 이미 십 년이 가까워 온다.
최근에는 서울 땅에 살고 있는 동서.
나는 가끔씩 국제전화를 넣는다.
시동생은 경동시장에 위치한 한의원에 출퇴근을 한다고 하는데 예외없이 버스나 전철을 이용한다는 소식이다.
동서는 어둔한 음성에 비해 내 목소리만은 금세 알아챈다.
그런데 성격이 단순해지기만 했어도 견디겠는데, 어딘지 모르게 교사라는 직업의식이 운명처럼 배어 있고, 그리고 매번 헤매거나 무구(無垢)해 있어 내 맘은 한동안 아프고 아프다.
“아! 이름이 맹……. 그분이세요. 내게는 형님 되세요. 아직도 잘 웃네요? 목소리가 계속 애들 같아요. 벽마다 쇠줄 달았어요. 그걸 붙잡고 날마다 돌고 돌아요. 나는 잘 먹고 잘 살아요.”
지금껏 나는 절약하고 싶을 경우에만 절약해 왔지만
진정 쓰면서도 살아야지 않겠나 싶어진다.
2012년 8월 8일 수요일
푸틴도 참!!!
맹하린
어제 저녁엔 문협의 월례회가 있었다,
17인의 문우들이 담소(談笑)를 나누며 식사를 한 후, P고문의 특강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머잖아 내 차례도 올 테지만, 나는 누구를 가르치는 일을 적성(敵性)에 안 맞아 하므로 부득이 졸작(拙作)이나 한 편 발표하게 될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서너 분만 참석할 정도로 와해(瓦解)될 위기(危機)에도 처했었지만, 문우 한 분 한분 마다 서로 노력하고 각자의 인내심을 발휘한 끝에 오늘의 화기애애함이 조성(造成)되었다고 여겨진다.
30여분의 문우들마다 삼십 종류의 따로국밥인 개성(個性)을 지녔지만, 나는 그분들 모두를 하나하나 다 존중하게 된다.
행여 내게 상처를 안긴 문우가 있을지라도 솔직히 겉으로야 어땠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용서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항상 미움을 품고 살아야 할 테니까.
분명한 것은 그런 분들일수록 언젠가는 다시 같은 레퍼토리로 괴롭힐 확률이 넘쳐, 그러한 여건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 위해 내쪽에서는 항상 무뚝뚝함을 고수해 왔을 것이다.
문협의 월례회에 가기 위해 가게 문을 닫기전, 인터넷 뉴스에서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동영상을 보게 되자, 나는 파안대소를 절로 터뜨렸다.
웃음이란 하나도 해로울 게 없다는 말은 진리(眞理) 같다.
그 순간, 점차적으로 커다랗게 높아지는 웃음을 웃으며 내가 쏟아낸 말은 이랬다.
"아니! 아니! 푸틴이 무슨 꼴통이라도 된다는 얘기야?"
나는 가끔 몇몇 남성문우들이 내 손에 운 베소(뽀뽀)를 하려고 할 경우 잽싸게 손을 떨치며 피할뿐아니라 냉엄하게 경고(警告)의 노란딱지까지 제시(提示)하는 성격이다.
물론 존경 나부랭이를 들먹이거나 좋아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걸 못 듣는 바는 아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일에도 지켜야할 간격은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푸틴은 정치가다.
그리고 상대방은 종교지도자가 아닌가.
푸틴 참 모자라다.
정치가에게 걸맞는 노련함이 턱없이 부족하다.
정치를 무슨 꼴통들이나 하는 걸로 아는 모양인가.
정치가의 액션을 보며 꼴통인 이 사람은 리액션을 익힌 동영상이었다.
2012년 8월 6일 월요일
Pablito
맹하린
빠블리또는 내가 자주 가는 나무시장의 현지인 종업원 빠블로의 애칭(愛稱)이다.
내 아르헨티나 이름 마르가리따도 꽃시장이나 나무시장에서는 마르가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나무시장은 광활(廣闊)한 영역이다.
몇 헥타르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으나 수백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각양각색의 단지(團地)를 이루고 각자들의 개성 넘치는 옷을 울긋불긋 떨쳐입은 채 상쾌하게 잘들 살고 있다.
나무시장의 철칙(鐵則)은 화원(花園)을 하고 있다는 증명을 제시하지 못하면 단박에 출입금지를 당한다. 절대적으로 개인에게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수칙(守則)을 고수한다.
윗선에 계신 높으신 현지인 사주(社主)가 직접 개입하지를 않는 시스템이라선지 종업원이나 사무원들이 마냥 여유롭게 일해서 나처럼 고객의 급 주문을 받은 사람은 초반부터 조바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럴 때 짜증을 내봐야 이래저래 본인만 손해다.
도대체 바쁜 사람을 반나절씩이나 낭비하게 만드는 상업태도가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생각의 끝자락을 부여잡은 나는 어느 날 부터 팁을 주기 시작했다.
역시 달라졌다.
30종반인데도 너무나 느릿느릿 일을 하던 빠블리또의 행동이 신비로울 정도로 잽싸졌다.
일본인을 부인으로 맞은 지 5년이 됐다는 일상사(日常事)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털어 놓는다.
그와 나는 자연스레 서로 뺨을 대는 인사까지 나누게 되었다.
토요일에 급 주문을 받은 여러 개의 축하화분들을 다듬고 포장하고 리본 달고 글씨 쓰고 납품하느라 주말을 몹시도 분주하게 보냈다.
얼마 전 두 나무에서 세 줄기의 꽃들을 탐스럽고 향기롭게 피워 냈던 행운 목 두 그루까지 모두 시집보낸 날이었다.
J교회의 창립40 주년 기념및 취임예배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행운 목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Palo de Agua라고 부르지만 나무시장에서는 라틴말에서 유래된 Massangena de Tronco라고 불린다.
가게의 면적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관리하기가 불편해서 그때그때 필요할 때만 사들인다.
며칠 안으로 다시 나무시장에 가야할 것 같다.
빠블리또에게 적정선의 팁도 건네고 화분을 고르면서 그의 일본부인의 안부도 묻고 그럴 것이다. 맘 같아서는 작고 앙증맞은 부케형 꽃다발이라도 만들어다주고 싶지만, 보는 눈들을 샘나게 할 계기를 만들 것도 같고 해서 그런 내 맘을 살며시 접는다.
바쁜 와중이어서도 그랬지만 시사성이 있는 글이라서 급히 올리느라 어제는 제목과 본글에서 실수를 여럿이나 일으켰다. 오늘 새벽에야 깨달았기 때문에 출근하자마자 고쳤다.
올림픽을 월드컵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나는 이럴 때 창피하지는 않아 한다.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성격이어서다.
실수도 안하고 사는 사람은 소름이 돋는다는 주의(主義)다.
어제는 너무 지쳐서 저녁식사를 몇 가지 과일로 대신했다.
마르가리따인 나를 마르가로 불러 주는 현지인들이 있어 나 그나마 사는 일 팍팍하지가 않다는 느낌이다.
한국인들…….
내가 아는 한국인들은 겉으로는 친구라고 피력하면서도 언제라도 꼭 나이에 대한 예절과 의리를 지키려 해서 그점 꽤나 거북하고 불편하다.
때로는 잊고 싶은 게 나이인 것을.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당연하고 분명한 일이기는 하다.
내가 악마와 맺은 계약 중의 일부가 글에 대한 열정(熱情)과 나이를 잊고 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그렇단 들 이제 더 이상 악마와의 계약은 맺지 않을 작정이다.
악마와의 계약은 철두철미한 구석이 너무 많다.
깨뜨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하지만 계약은 이미 끝났다.
지금은 천사와의 계약을 지켜야 한다.
천사와의 계약 역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살면서 조금씩 선(善)한 흐름으로 흐르면 되는 일이라 다행이다.
내가 소원(所願)하고 있는, 소박하다면 소박한 꿈 몇 가지만 이룩하면 내겐 특별히 소원할 일도 없다.
무얼 더 바랄 것인가.
뒤늦게 중노동자로 고생을 하고 있지만, 내게 일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가 살아가는 여정(旅程)에 빠블리또와 같은 현지인들이 있어 나는 반갑게 안녕을 주고받고 손 흔들어 감사할 따름인 것을.
사는 일은 어떤 면으로는 감사(感謝)를 익히는 일이다.
추위 속에서도 봄이 포르르르 날아온 모양이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소르살 꼴로라도(유색의 개똥지빠귀)의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들었다.
2012년 8월 5일 일요일
런던올림픽 경기를 보며
맹하린
한국과 영국이 대결을 벌인 런던올림픽 축구의 8강 전, 특히 연장전에서의 승부차기골 장면들을 지켜보면서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웠다.
어려서는 아르헨티나와 스포츠강대국들만을 편들던 가족이 한국 아나운서, 그리고 축구 해설가의 사투리와 억양을 골고루 흉내 내면서 절대적으로 한국 편을 들고 있어서였다.
“아~ 골입니다! 자, 이제~ 한국이 이겼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입니다!”
그렇게 소리 높여 흉내 내고 외칠 때마다 내게서는 웃음이 폭탄처럼 터졌었다.
(가족이여! 우리의 장난스러움은 언제나 우리한테만 사용하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남미축구를 관전할 때처럼 아슬아슬한 장면은 많지 않았지만, 내 조국의 선수들이 열심을 다해 뛰는 모습은 참으로 듬직하고 흐뭇했다.
모든 운동경기에도 운(運)이 따른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경기였다.
런던올림픽의 축구경기가 시작될 무렵.
영국을 대표하는 가수 폴 메카트니는 인터뷰를 통해 강하면서도 예리한 지적을 마치 영국 벌의 대표나 되는 것처럼 웽웽웽, 쏘아 댔었다.
“영국의 축구대표 감독은 축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위인이다. 영국은 베컴을 기용했어야 한다. 나이는 들었지만, 페널티킥을 베컴처럼 자신만만하게 소화해낼 선수는 드물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영국 벌 폴 메카트니의 말이 매우 적절했다는 결과가 생기고 말았다.
이번 월드컵에 아르헨티나 축구팀이 출전하지 못해서인지 거리마다 너무나 조용했고, 어딘지 모르게 아늑하기까지 했다.
청소년 대표 팀으로 선수를 집약하느라 그런 일이 생긴 모양이다.
아르헨티나 축구는 20세로 제한된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남미 4개국 안에는 들었지만,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한 브라질과 다른 나라 팀이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기로 암묵적 선을 그어서 부득이 참여하지 못하는 황당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
기발하게 급조한 협정이었다고 보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경비를 줄이자는 의도가 가장 강했지 않았나 싶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절로 실감되는 사태다.
참으로 현실적이기도 했고, 비현실적이게도 보였던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중계방송을 통해 수영, 펜싱, 축구, 테니스, 그리고 로마시대의 골리앗처럼 생긴 선수들이 던지는 원반던지기까지 흥미진진 관전하면서, 4년에 한번 씩 열리는 월드컵이 있어 사는 맛 그런대로 쏠쏠하다는 느낌이 연신 들었다.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 총연출가인 세계적 영화감독 대니 보일은 ‘ 경이로운 영국’을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이고 아름답게 연출했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엔 롤링이 <피터 팬>의 첫 구절을 낭송하는 장면도 감동이었으며, 피날레로 비틀스의 폴 메카트니가 ‘헤이 쥬드’를 합창하는 장면 역시 장엄한 마무리로 장식 되었다.
어떤 매체에서든 내게 세계최고의 명작소설 다섯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두 번이나 세 번째에 넣고 싶은 소설이 영국의 ‘트레인스포팅’이다.
그 작품을 영화화 했던 감독 대니 보일은 이번 올림픽 개막식이 정치적 관점을 특별히 배제했다는 면을 유난히 강조했었다.
영국의 축구감독은 한국과의 경기 내내 석고처럼 굳어 보였으며 속이 타들어 가는 듯 한 표정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정황을 지켜보면서, ‘영국이 산업사회의 시작이었고 세계 산업화에 일익을 가져 왔다는 점을 알리려 했다’고 개막식의 진정한 모티브와 초점에 대해 강조에 강조를 했던 대니 보일…….
그가 공식 인터뷰에서 간접적이면서 패권주의적으로 표현했던, 영국을 우월주의의 권좌에 오르게 하고 돋보이도록 이끌려던 발언들이 미묘하게 오버랩 됨은 내 개인의 편향된 시선에 불과한 것일까, 잠시 유추해 보게도 된다.
오늘 정오쯤, 세계랭킹 9위인 아르헨티나의 대표 테니스 선수 델 뽀뜨로와 세계랭킹 2위인 노바크 조코비치 ******(링크) 선수가 동메달 쟁탈전을 벌이는 시합이 있었다.
일하는 틈틈이 그 경기를 보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광경에 한동안 사로 잡히게 되었다.
델 뽀뜨로의 적수인 세르비아의 프로 테니스 선수 노바크 조코비치 때문이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관중석의 아기 울음소리에 신경이 쓰여 오롯이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 했던 것.
그는 관중석의 아기 아빠에게 아기를 내가 봐 줄까요? 아니면 아기를 내게 줄래요?
정도의 제스처를 과감하게 보냈고, 아기아빠는 곧장 아기를 안고 퇴장했다.
곧장 퇴장하는 아기를 안은 아기아빠의 주위에 앉거나 서 있던 관중들은 대체적으로 웃는 분위기였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결국 승리는 델 뽀뜨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내 제2의 나라 아르헨티나의 선수 델 뽀뜨로의 고군분투에 가깝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렇지만 아기의 울음을 결코 무시할 수 없어 하던, 어느 프로 선수의 예민했고 아픔으로까지 느껴지던 , 한 편의 예술작품과 같던 장면을 한동안 잊지는 못할 것만 같은 예감이다.
동질감은 아니더라도 동감에 젖는 나를 아스라히 깨닫는다.
스포츠의 거장이 되는 길은 그다지 평범한 길이 아니며, 너무 인간적인 면에 연연해서도 곤란하리라는 점 또한 아릿하게 안기던 순간이었다.
2012년 8월 3일 금요일
‘내일이면 집 지으리 새’에 대하여
이순원의
길 위의 이야기
더운 여름, 추운 곳 얘기 하나 해야겠다.
인도 설산에 가면 아주 게으르기 짝이 없는 새 한 마리가 있다.
얼마나 게으른지 그 추운 설산에 살면서도 절대 추위를 피할 둥지를 짓는 법이 없다.
밤이면 설산의 눈보라와 찬바람에 오돌오돌 떨면서 ‘내일이면 집 지으리, 내일이면 집 지으리’ 하면서도 막상 날이 밝아 햇빛이 고루 퍼지면, 지난밤의 고통 같은 것은 까마득하게 잊고 종일 놀기에 바쁘다.
그러다 다시 밤이 되면 추위와 눈보라에 오돌오돌 떨며 ‘내일이면 집 지으리’를 밤새 되뇌게 되는데 , 이 새의 이름이 바로 한고조(寒苦鳥)다.
도를 닦겠다고 ‘불문에 들었어도 게을러서 제대로 도를 닦지 못하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게으름뱅이 새야말로 참으로 인간적이다.
꼭 추위를 피할 집이 아니더라도 우리야말로 어제의 다짐을 오늘에 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일엔 무얼 해야지, 다짐하면서도 막상 내일이 되었을 때 그 다짐을 잊고 그냥 넘어간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그 가운데 중요한 일도 많았던 것 같은데, 돌아보면 그 다짐 안 지켰다고 우리 삶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소설가
-초여름-
오디 나무를 포스팅 할 때...
Eagles의 Hotel California를 올렸었는데 어제 보니까 없어졌다.
그래서 다시 올린 셈~
Hotel California는 내가 좋아 하는 음악 중의 하나라서...
2012년 8월 1일 수요일
서반아어
맹하린
1987년
이민 온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서반아어를 배우기 위해 꼬리엔테스 거리에 있는 학원에 다닌 일이 있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학원이었고, 현지인 여성이 강사였다.
여러 가지 동사변화와 인칭변화에 대해서 하나씩 깨우쳐 가면서, 그동안 서반아어를 얼마나 무지(無知)하게 사용해 왔는지, 지금껏 사용해 왔던 짧으면서 긴요했던 말들이 모두 항의하면서 나를 향해 와르르르 달려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디로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기까지 했다.
노력없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극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몇 달 가지고 해결될 일도 아니어서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지만, 행여 말하는 중간에라도 제대로 표현하려는 의식만은 갖추고 있는 셈이니 그점이 하나의 수확(收穫) 이라면 수확이라고 할까
분명한 것은 한걸음 한 걸음 배워나가다 보니까 새로운 언어와의 만남에서 오는 희열 비슷한 느낌 같은 걸 획득하게도 되었다는 사실이다.
서반아어에 제대로 접근해 봐야겠다고 결정적인 결심을 굳히게 된 건 초등학생인 아들 덕택이었다.
어느 주말, 티뷔이에서는 초등학생들이 학예회 비슷한 걸 공연하고 있었다.
물론 현지인 어린이들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소원이라도 된다는 듯 간절한 음성으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엄마가 언제 저 애들처럼 이 나라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하하하."
나는 기가 막혀서 그렇게 허심탄회 웃어댔지만 마음속으로는 쇳덩이가 심장을 툭 밀치는 기분이었다.
결국 내가 그 초등학생들 보다 서반아어를 훨씬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고국에 있을 때 명절이 되면 외국인 장기자랑대회가 열렸었다.
외국인들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필수적으로 한복을 입고 나와서는 주재국 언어인 한국말로 장기자랑을 해내는 프로였다.
그런데 사실 너무 반지르르하게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이 나오게 되면 어딘지 모르게 얄밉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특상을 받은 미국인의 이런 얘기가 인상 깊었다.
-가게에 치약을 사러 갔습니다.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까 발음이 매우 안 좋았지요. 내가 쥐약 주십시오, 그러니까 가게 주인이 놀라면서 쥐약은 약국에서나 판다고 대답했습니다. 쥐약이 아니고 쥐약 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 가게 주인은 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고 계속 답답해 죽겠다고 그래요. 할 수 없이 내가 다시 설명했습니다. 내 이를 닦으려고 그러니까 쥐약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때서야 내 말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쥐약 아닌 치약을 내 주었습니다.
그런 정도의 실수는 적당히 재미있었고 위트 또한 넘쳐 보였다.
작심(作心) 3일이라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른 시작이 된다는 속담을 떠올리고 하루에 한 마디라도 외우고자 노력을 시도해 보게 되었다.
적어도 가족에게서 놀림을 받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싹튼 결과였다.
굳건한 의도를 안고 아침이 되면 단어나 숙어를 하나하나 찾아서 외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평소의 나는 한다면 해내고 안 한다면 안하는 철저한 주관을 간직한 편인데, 어인 일인지 서반아어만은 한다면서 안 하는 분야로 자주 탈바꿈을 한다.
굳이 변명하자면 서반아어를 너무 잘 하면 내 나라 말을 조금씩 앗길까를 염려한 의중(意中)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한국가요를 잘 안 듣는다.
듣자마자 가사가 머릿속에 입력되어 하루 종일 머리나 입가에서 맴도는, 여러모로 성가신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계산은 잘 못하는 머리지만 외우는 건 수월한 머리라고 자인한다.
그런데 왜 서반아어는 그리 쉽게 입력이 안 되는 것인지 도대체 내가 나를 이해(理解)하지 못하겠다는 심정이다.
이제라도 다시 시작하겠다.
무조건 외울 것이다.
오늘의 숙어는 이렇다.
방해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No Quiero interrumpir. Pero...)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반전인가요?
그러나, 그러나...
반전(反轉)이 서반아어로 뭐였더라?
나는 현재 한서사전에서 반전을 찾는 중!!!
-초여름-
지난 주말의 분주함으로 인하여 나는 며칠을 녹초되어 지냈다.
글을 쓰는 건 물론이고 워드작업조차 불가능했던 날들이었다.
일요일 밤의 꿈엔 내가 모르는 나라에 도착되었다.
너무나 낯선 나라여서 나는 평소의 나답게 웃었고 손까지 흔들며
그 낯설고 물선 나라를 빠져 나왔다.
"내가 사는 나라에 다시 가렵니다. 아직은 그 나라를 사랑해요."
나는 다시 살아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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