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2일 목요일

동행(同行)



       맹하린


어제 새벽 7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산책길을 걸으며  출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청년, 그러니까 30대로 보이는 현지인이 내 옆 켠에 나란히 같은 보조(步調)로 걸으며 미소 띤 표정으로 말을 시킨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엔 초생달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춥지 않아요?"
그는 전혀 우습지도 않은 판국에 하이에나처럼 낄낄대고 있었다.
"아뇨. 겨울이니까 추운 건 당연해요."
"무쵸 구스또!"
"엔깐따다!"
정말 기막힐 일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이 반갑다고 인사하자 , 서반아어를 배울 때 입력된 사실, 건네져 오는 인사에 같은 말로 답하지 않는 게 예의라는 사실을 뜬금없이 기억하며 엔깐따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건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땅에서 계속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그런 말들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매일 이 시간에 출근 해요?"
그는 폴라르 천으로 된 점퍼의 후드로 머리 전체를 덮고 있었다.
(범죄자 타입들이 모자를 선호한다지?)
추위 때문인 것도 같아 보인다.
"아니죠. 이 시간엔 어쩌다... 아마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름이 어떻게 돼요?"
"내 이름이 왜 궁금한데요?"
"친구하고 싶어서요."
심장이 산책길을 흔들 것처럼 두근거릴 줄 알았는데 갈수록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 또래하고 친구하며 지내는 건 나로선 손해겠죠?"
(하기는, 이 나라가 어른이고 아이고 격을 두지 않고 친구하는 관습이 있긴 하지.)
이럴 경우 무서운 인상보다 웃는 인상이 한층 위협적이다.
하지만 내 쪽에선  되도록   무서워 하기보다는 여유만만만이 더욱 투명한 보호벽이 될 것도  같다는 느낌이다.
그와 나는 마치 누가 더 연기(演技)를 잘 할 수 있는지 시합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어? 벌써 다 왔네요. 레미스를 타려고 했거든요. 차우!"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그가 모르게  경계(警戒)하는 일도 전혀 소홀하지 않게 된다.
오래 묵은 지기(知己)와 만났었고, 또한 오래 익힌 친구와 헤어지는 것과 같이 그리도 태연자약 무대를 내려서 듯 산책로를 벗어나게 된다.
뒤늦게 그의 인사를 받는다.
"차우차우! "
천천히 길을 건너 이윽고 레미세리아에 다가간다.
겨울이고 새벽이라 문이 닫혀 있다.
밤당번 기사들을 관리하는 현지인 다미안이 놀라며 반가워 한다.
"마르가리따, 자동차 필요해요? 전화를 하지 그랬어요?"
"아뇨, 어떤 호벤(청년)이  이름을 물어 보며 수상하게 굴어서요. 가게의 위치를 알려 주는 일이 될까봐 일부러 여기로 들어온 거예요."
다미안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더니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갔다는 설명이다.
두 명의 현지인 기사들 중 한 명에게 나를 가게까지 데려다 주라는 지시를 다미안은 잊지 않고 해낸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될 젊은 기사가 나를 데려다 주려고 미리 문밖으로 나서고 있다.
기사는 기사(騎士)다.
나는 다미안에게 정중히 사양한다.
나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해 왔을 다미안은 새롭게 지시한다.
"그럼 이쪽 길에 서서 마르가리따가 꽃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도록..."
나는 시적시적 걸어 반 블록 떨어져 있는 우리 가게에 도착했고 일단 쇠고리로 연결된 두 개의 자물통과 문에 달린 잠금통까지 열고 나서 건너 편 모퉁이에 서 있는 2미터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손을 높이 흔들어 준다.
2미터도 손을 크게 흔들어 답하고 있다.

오늘부터 출근시간을 한층 늦추리라는  작정을 굳힌다.
무섭거나 두렵기에 앞서 나는 좀더 흘러야 하겠고 더욱 흐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위험에서 내가 나를 보호하는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이라고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알게 모르게 감지해 왔던 빛에게도 해방을 안기고 싶어진다.

동행(同行)...
내가 살아 오면서 뜻하지 않았던 동행이 참 상상 외로 많았을 것이다.
어제처럼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받아 넘겨 왔을 테지만 말이다.
내가 어제 그 시간에 무언가를 생각했었다면...
그건 바로 청년이 설마 나쁜 짓은 안하겠지였다.
가게 안은 곤충의 날개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 속에 있었다.
나는 우선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았었다.
생각보다 얼굴이 창백하진 않았다.
범죄자들이 던지려는 삭막함의 그물을,  우리가 아니라 나 스스로 방어하며 살아야 하는 시절이 도래(到來)해 있다.
나는 아르헨티나를 적시기 시작한 소나기와 같은 치안부재(治安不在)의 한 축(軸)을 함초롬이 맞을 뻔 하였다.

대체 이 나라가 점점 왜 이 모양이 돼 가는가?
길에 종이들이 흩날릴지라도 정겹기만 하던 그 아르헨티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댓글 4개:

lovemate :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하루하루 강력범죄가 끈이질 안고 있어요. 저도 어제저녁 식당에 갔었는데 오토바이를 탄 두 청년이 같은 길을 몇번식 왔다갔다 하더라구요..아마도 범죄건수를 찾고 있었나봅니다.
남여노소를 가리지 않고 갈수록 강력범죄가 늘어나는 추세 입니다.
꼭 앞,뒤,옆 항상 살피시고, 스스로 예방하는수 밖에 없어요.. 20년 전의 아르헨티나가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maeng ha lyn :

그렇죠?
적어도 12년 전부터 우리의 생활권이 여러모로 압박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기 좋다고들 브라질을 위시한 이웃 나라들은 더 하다, 브라질은 7시 이후엔 외출을 삼가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요즘은 점점 이 나라에 대한 의아로움이...
불황도 세계적이지만 치안부재도 셰계화 되는 추세에 있나 봅니다.
겸허히, 그리고 행동반경도 극소화 하고 더욱 절약하며 살아야 할 듯 합니다.

Oldman :

지혜롭게 잘 대처하셨네요. 그래도 그렇게 좋은 이웃이 있어 든든합니다. ^^

maeng ha lyn :

지혜롭게라고 표현해 주셔서 좋네요.
전 무조건 믿는 스타일이라 언제나 크건 작건 위기에서 잘 벗어나면 신의 도움이었다고 여기죠.

살다 보면 참 잘 헤쳐 나왔구나, 다 하늘의 도움이다, 그럴 경우 꽤 많았어요.
님을 보며 나도 종교를 지녔다는 점에 새로운 긍지를 느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