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0일 수요일

겸애주의




                   맹하린



친구 수산나가 두 달이나 무소식이었다.
우리 가게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인성당에 오게 되면 한 달에 한 두 번은 찾아오던 그녀였다.
엊그제 일요일에 그녀가 나타났다.
때가 때이니만큼 외숙씨 얘기를 주로 나눴다.
얘기 도중, 그녀는 내손을 잡으며 말했다.
"참 건강하시고 항상 밝으셔서 보기 좋아요."
"노동자가 오매불망 건강이라도 챙겨야 나름 걸맞지 않을까요?"
그녀가 돌아가는 시간에 나도 따라 나섰다.
흑임자로 만든 미숫가루를 사러 D떡집에 가야 하는데 함께 가자고 말하면서.

세 블록을 사이좋게 팔짱끼고 걸었다.
두 몫으로 담아 달래서 그녀에게 한 봉지 건넸다.
내 몫까지 본인이 지불하려고 했지만, 우격다짐으로 내가 다 냈다.
바쁠 때 나를 도와 준 고마움을 나는 그런 식으로 갚아 나간다.
다시 팔짱 끼고 걸어 태극당제과 모퉁이에 닿자,  7번과 50번 버스가 동시에 왔고 나란히 스톱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50번 버스에 수산나는  탔다.
우리 가게에서부터 이미 꺼내어 손에 꼭 쥐고 다니던 교통카드를 그녀가 버스기사 옆의 메모난 기계에 대는 모습까지 지켜 본 후, 산책로를 택해 총총 돌아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혼자서 쿡쿡 웃었을 것이다.
버스 카드를 기계에 대던 수산나가 나보다 훨씬 유식해 보였기 때문이다.
수산나의 집엔 자가용이 세 대 있다. 남편과 아들과 딸이 각각 따로 사용한다.
그런데 수산나는 오로지 버스,  버스만을 이용한다.

사실은 크게 앓고 난 직후(直後)라서 성당의 독서그룹도 구역반장 위임도   모두 반납(返納)하거나 고사하고  왔다던  수산나.
온세 도매상 지역에 큼직한 옷가게도 지녔고, 비록 경제적 기반(基盤)을 확고히 구축(構築)해 놓긴 했어도, 평생을 소모해 왔을 이민자로서의 파근파근한 그녀의 일상(日常)들을 어루만지듯 나의 상념(想念)마다 다듬으며 산책로를 걷는 내게 집중포화(集中砲火)처럼 쏟아져 내리던 여름햇살을 기억(記憶)한다.

덤으로 사는 인생.
크게 근심할 일도 그다지 조심하고 싶은 일도 없이 타박타박 걷기만 하면 도달이 가능할 지점이 되는 과정에 이른 내게 지인들의 떠남이나 와병(臥病)은 일종의 쓸쓸한 아픔이 된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아직껏 사뭇 미려(美麗)하고 섬세(纖細)한 것을...... .
평소에 겸애(兼愛)를 표방해온바 여실했지만, 새삼 겸애주의(兼愛主義)에 관심이 쏠리고 쏠리는 중이다.
때로 이 나라에서의 외로움엔 나를 감싸며 마음을 휘젓는 기류(氣流) 같은 게 분명 있다.
단정하건대 부에노스아이레스 땅, 여기에서야 나는 비로소 진솔한 나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생(生)에서 더좀 강렬한 의미를 찾고 여러 숙고(熟考) 끝에 친구에 대한 아낌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됐다면 이제라도 그리 살아야겠다는 각오다.
나의 친구들에 대한 열정(熱情)은 어떤 면으로는 사랑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구속(拘束)해 왔을 것도  같다.
오늘, 유난히 셍 떽쥐뻬리의 명언이 내게 회오리친다,
"사랑, 나의 안내로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

2013년 2월 19일 화요일

행주강

                

            박철                                 



 
   내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은 외로움 탓이다
  시가 길어지는 일처럼 요즘 그리움이란 지금은 부재하는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누군가 나의 별빛을 본다면 희망에 대해 노래해다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안개 짙은 야적, 강의 하류에선 그들 나름대로 시대를 앓고
  둑으로 쌓아 올리는 바람이 외면을 받으며 갈대 곁에 섰다
  언덕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나련만
  강폭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일 거다
  사랑이든 역사든 배고픔을 달래는 무엇이든 말로서 될 일이 아니건만
  물살이 거듭 손마디를 꺾으며 행주강이 흐른다
  400년 전 임진란의 함성이 되살아나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대는 강
  치마폭에 돌덩이를 주워 담던 아낙도 가끔은 허리를 펴 강 건너 친정아비의
  안부가 그립기도 했을 저녁 바람처럼 날이 진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5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50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오늘은 내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재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운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2013년 2월 16일 토요일

연인의 날


      

        맹하린



밸런타인데이라기보다 연인의 날인 14일은 물론이고 15일까지 이틀에 걸쳐 퍽으나 바빴다.
매번 느끼는 바로는, 아침나절에 시집(?) 가는 꽃에 따라 그날의 유행과 가격이 평균화 되고는 한다는 점이다.
100페소(15달러 상당)의 라운드형 꽃다발이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전화주문을 하는 고객마다 둥근형으로 된 100페소 가격의 다발에 초콜릿도 주시는 거죠,를 노래 삼고 있었다.
해를 더해 갈수록 현지인 고객이 늘어나는 추세(趨勢)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고객은 현지인 마르셀로 내외였다.
항상 그래왔듯 마르셀로는  당일에 앞당겨, 10일쯤에 미리 주문하러 왔었다.
딸이 결혼하는데 살롱의 메인 식탁에 놓을 사방 화와 부케를 맡아달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흰색을 바탕으로 한 연분홍을  매치하여  장식해 놓기로 했다.
14일 오전 11시에 찾으러 오기로 했었다.
바쁜 날은 뭐가 겹쳐도 겹치게 된다.
바쁘기 마련인 날이라서 그런 것 같다.

정각 11시에 도착한 마르셀로 내외.
초면이 되는 부인은 자기 이름이 제시카라고 이름부터 밝혔다.
탤런트 장미희와 흡사한 분위기에 말투까지 똑 같았다.
부인이 말을 시키기도 전에 마르셀로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내게 살짝 윙크하며 가만히 들어내 달라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생김새와는 달리, 의외로 시름을 섞으며 제시카는 말을 더듬거리듯 이어 나갔다.
"도대체 꽃을 맞추기는 했다는데, 평소에 당신이 만든 꽃을 선물 받은 경험은 많아도 이번엔 아주 특별한 날인데, 딸애가 결혼하는데, 그런데 마르셀로는 잘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는 거 있죠? 플라스틱으로 된 조화(造花)로 맞춘 것 같다고도 그러고,  빨강과 노랑을 주로 꽂아 달라고 부탁했었다고 까지 말하는가 하면, 그리고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서... 우린 매사에 튀는 걸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 생활신조라서   걱정이 참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마르셀로는 재삼  내게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좋은가. 뭔가 나쁜 일을 저지르진  않았는데, 그런데 말썽에 휘말린 듯 한 이 느낌은...)
"당신 남편 마르셀로는 주문을 꽤나 정확하게 했던 걸로 알아요. 오늘은 약간 바쁜 날이라서 주문보다 소홀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빨강과 노랑이 아니라, 비올레타(보라)와 살몬(주황)으로 장식한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디오스 미오(세상에나)!  비올레타... 그 슬픈 색으로도  부족하여,   딸이 가장 배척하는 살몬색을요?"
작으면서 또박또박한 음성을 내지르는 차갑고 지성적인 경악이라니!
아무 말 없이 곧장 작업실에서 내간 하양과 분홍이 고루 배합된 부케와 사방 화를 보는 순간 당장에 마음에 들어 하며 마르셀로의 어께에 쓰러지듯 기대며 웃는 그녀, 제시카.

언제나 그렇듯 자가용의 바울(트렁크)에 꽃들을 실어 주자, 제시카는 내게 뜬금없이 물었다.
"저 건너 편 공장의 간판은 누가 세 놓은 거죠? 어떤 용도에 사용할 수 있는 공장인가요?"
나는 마르셀로에게 전수 받은 대응을 재빠르게 전달하고 있었다.
"난 모르죠. 단지 저 건너 편 공장의 건너편에서 가게를 할 뿐, 사실 저 공장이 뗄라(피륙)를 취급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아마 당신 남편이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실듯요.  제 생각으로는  남편께서 적절한 답을 매우 멋지게 꾸며내 집으로 가는 동안 근사하게 설명해 줄 것만  같습니다만..."
그 내외의 희극적인 웃음만 잽싸게 접수하고 나는 총총 가게로 돌아와야 했다.
분석하건대 마르셀로는 평소, 부인의 자로 잰 듯 한 성격에 질리고 말았던 마음을 그런 식으로 통쾌하게 복수(復讐)하는 지도 모른다.  절대로 미워하거나 버릴 수도 없는 부인에 대한 애정(愛情)을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에게까지 설득시키는 지도 모르겠고.
나는 마르셀로 내외에게서 영원한 연인(戀人)의 표양을 발견하게 됐었다.
제시카에게서는 순간적이랄 수 있게,  배우자의 그 어떤 면모조차 신뢰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여긴다.

아르헨티나 여인들은 현지인이건 교민이건 남자를 제대로 휘두를 줄 아는 것 같으다.
밸런타이데이를 연인의 날로 뒤바꿀 수 있도록 역전의 실력을 발휘한  것도 그렇고, 그리하여  꽃 사러 온 여성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기에 하는 말.

불경기에는 불경기에 어울리는 상품이 있다.
물론 값진 꽃바구니 주문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착한 가격의 상품이 제대로 먹히는 시절(時節)이었다.

2013년 2월 12일 화요일

폭우...





                     맹하린



월요일엔 카니발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라서 이 대단한 나라는 또다시 연휴였다.
공휴일에 특히 가게를 여는 나는 퇴근시간을 약간 앞당겨야 했다.
통상적으로 7시 30경에 가게 문을 닫는데, 7시부터 엄청난 폭우(暴雨)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
7시 10분쯤 서둘러 셔터를 내렸다.
집까지의 세 블록을 정강이까지 닿는 물살에 맡기고 되도록 찰박이며 기분 좋게 헤쳐 나갔다.
순복음교회 앞 모퉁이에서는 급류에 휘말려 잠시 왼발이 휘청했지만, 깔깔대며 순식간에 극복해 냈다.
모퉁이에서 내가 건너오기를 기다리던 가족이 껄껄 대는 웃음으로 구조(構造)의 손길을 대신하고 있었다.
깔깔과 껄껄이 각자 긴 손을 뻗쳐 서로를 붙잡아 주던 찰나였다.
신비스럽게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뚝, 그쳤다.
나로선 행복하게  받아들인 비의 카니발이었을 것이다.
음력 설날이라 한인묘원에 가는 분들이 있어 약간은 바빴던 날...
이런 우연(偶然)을 보았을까.
설날이어선지 폭우(暴雨)도 축복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나의 생활은 얼마 전부터 전혀 다른 접점(接點)에서 영위(營爲)되는 느낌 유난히 강하다.
나 같은 사람의 상쾌함을 돋우려고 마련된 성싶은 이 도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는 내 생(生)을 툭하면 예술(藝術)에 기대며 거뜬상쾌히 지낼 수 있어 나름 감사로이 여기는 중이다.
예술(藝術)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우선은 이끌어 주다가 싹수가 노랗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치는 묘수(妙手)의 도사다.
최근의 나는 방정식을 풀기 시작했다.
방정식은 언제라도 내게 난해한 장르가 아닐 수 없다.
나와 같은 수다꾼이 단답형의 페이스에 어찌 당할까.
세상이치(世上理致)란 언제나 마찬가지다.
말 많으면 지는 것.
더우면 지치는 사람도 많지만 난 정말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산뜻함의 연속처럼 단순명료하게 잘 흐르는 과정에 이르렀다.
눈앞에 펼쳐졌던 길이 끊어진 듯 한 느낌 가득했는데, 그런데 다른 숲길에 이른 이 기분이란 대체 무슨 의미인 것일까.
오르페우스와 같이 뒤돌아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삶도 글도 운명처럼 극복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뭔가를 위해,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고,  영감(靈感)이 다가와 그리 되는 것.
폭우가 내려서, 자가용을 안 키워서, 택시나 레미스를 타기는 정녕 싫어서가 아니라 폭우(暴雨)가 반가워, 헤쳐 나가는 순간이 극적(劇的)이어서 폭우(暴雨)를 반갑게 맞아낸 날이었다.
우산으로는 미약했던지 옷이고 몸이고 함초롬히 젖었지만 폭우(暴雨)로 인해 즐거웠다.
그것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했던 날들을 치유(治癒)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 글에 침잠한다기 보다 한층 글에게 찰박이겠다.
나는 폭우(暴雨)에게서 거대(巨大)한 고독(孤獨)을 보았다.

2013년 2월 10일 일요일

외숙씨



         맹하린


그녀는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외숙 씨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내가 외숙 씨를 알게 된 건 재아부인회에서였다.
그 당시 회장으로 선출된 이웃의 N여인에게서,  회원 가입은 물론이고 부회장이라는 임원까지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외숙 씨는 그때 회계를 담당하게 됐었다.
나는 모임도 줄일만큼 줄였고 임원을 맡지 않는 주의에 철저했었지만, N여인과의 끈끈한 정 때문에 그 일을 순수하게 받아 들였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외숙 씨와 나는 매사에 의기투합(意氣投合)하며  잘도 어울렸다.
절약이 생활화된 면도 그렇고,  외출복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산뜻함을 강조하며 입는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키는 같지만(165cm), 외숙 씨는 47kg이고, 나는 56kg였다.
신비로운 건 56kg이던 외숙 씨는 모델과 같은 몸매로 변화 되었고, 47kg이던 나는 몇 십 년 동안 9kg의 체중이 불어난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숙 씨는 봉사마다  열심이었고,  나는 중노동자니 서로 그 정도는 유지해야 하는 것.
너무도 나약해 보여 봄의 날이나 어머니날 대목 때는 일손이 딸리면서도 차마 연락도 못했었다.
하지만 외숙 씨와  친구 수산나는 앞치마를 싸들고 짠! 하게 나타나고는 했다.
그렇게 그녀들은 마른일 진 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나를 거들고 도왔다.

금요일 오후.
N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외숙 씨 어떻게 해요?"
"외숙 씨가 왜요?
"상조회 게시판에 올라 왔다는데... 못 봤어요?  아직 확실하진 않은 것 같아요.  형님이 글을 올린 이은산씨에게 연락 좀 해봐요. "
"요즘 게시판을 통 못 봐요. 휴가철이라서 철저히 놀고먹느라 내 나름대로  바쁘거든요."
이은산 전 한인타운회장은 전화건 핸드폰이건 모두  불통이었다.
결국은 N여인이 다시 소식을 알려 왔다.

내가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던 외숙 씨.
교회 갔다 오는 길에, 수입상회에 그릇이나 이불 사러 온 길에, 크루즈 여행을 엄마하고 열흘 동안 다녀왔다면서 기념용 티셔츠를 두 장 선물로 건네 주며,  함께 있는 내내, 언니라는 노래를 언니 언니 부르고 또 부른 후에나 돌아가던 외숙 씨.

외숙 씨는 그리도 허무하게 떠났다.
교회 수양 관에서 사용할 야채와 과일 등을 구입하러 손수 운전하고 청과시장에 갔다가, 도둑과 핸드백 때문에 실랑이 하는 과정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세상에나!
어떤 나라는 지진이나 전쟁이나 쓰나미로 한꺼번에 많은 사상자를 내는가 하면,  이 잘난 나라는 일부러 도둑을 키우고 먹여 한 알의 총알만을 장전한 러시안 룰렛처럼 국민이건 이민자건 전혀 상관하지 않고 순서 없이  세상을 뜨게 하고, 겨냥까지 하고 있구나.

사실, 토요일인 어제 오후는  S식당에서 외숙 씨  엄마의 팔순잔치를 지내기로 예약된 날이었다.
항상 내 일을 자주 도왔던 터라,  사방 화와 꽃다발 열 개를 부조로 삼아 달라는 언질을 나는 이미 건넨 계제(階梯)였고.
언제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꼭 한 번 들르라고 하자,  엄마의 팔순잔치나 치른 후 보자던 외숙 씨.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외숙 씨.
생일 꽃바구니도 가장 커다랗게 해줄 것을.
밥도 자주 함께 먹을 걸.
자주 포옹해 줬어야 했던 것을,
외숙 씨가 떠나고 나서야 더 좀 잘해 줄 걸 하는 후회막심을 새삼 뒤늦게 꺼내고 또 꺼낸다.
오늘 하루 내내 숲속에서 외숙 씨를 찾아야 하는 역할을 떠맡은 술래처럼,  나는 하루 종일 복잡하게 헤매고 헤맨 심정이다.
그녀도 나도 장애물 경기를 거의 마치고 드디어 평탄한 코스에 도착한 것 같다고   함께 기쁨의 말들을 나누며 자연스레  손까지 잡았었는데…….

피가 흐르지 않아 자나 깨나 돈 버는 일로 수혈(輸血)을 일삼는 이민사회의 기류(氣流)에 편승하여 외숙 씨는 참 알뜰살뜰 냉철할 만큼 치밀한 부(富)를 이룩했다.
항상 나에 대한 배려와 정이 넘치고 넘쳤고.
장의사를 벌써 두 번째 다녀왔다.
월요일 아침나절의  발인예배는 물론이고, 장지까지 다녀올 작정이지만 생각대로 될 지 모르겠다. 예약이 느닷없이 닥치면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 준 하트형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무심하고 무구한 표정으로  눈 감은 채  누워 있던 외숙 씨.
그동안 다복하게 잘 살고 간 게 훤히 보였다. 남편, 그리고 세 아들, 엄마, 남동생과 여동생들, 제부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아웃 포커스로 비친다.
나는 외숙 씨를 잃었다.
나의 슬픔은 이미 너무 절제력이 강하다.
그렇지만 동쪽을 봐도 서쪽을 봐도 외숙 씨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잘 가요, 외숙 씨. 차우차우!!!
진정 사랑했어요.…….


2013년 2월 7일 목요일

우리는 한국인




      맹하린


 며칠 전의 오후 4시 경.
금요일이었다.
바다가게에 갔다.
그냥 저냥 옷들을 들추거나 다시 제 자리에 걸고 그랬다.
뚜렷하게 건질 생각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산책이나 하려고 산뜻하게  다시 그곳을 나왔다.
우리 가게를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물 한 모금 입에 넣듯 물끄러미 본 후, 스쳐 가는데 편의점 앞에 경찰차가 경보 등을 켠 채 반짝반짝 깜박이고 있었고, 앰뷸런스도 깜박이로 맞장구 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경찰이나 경찰차가 보이면 가까이 가지 않는 성격인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내 발이 저절로 그쪽으로 다가 가고 있었다,
바다가게로  갈 때,  이미 경찰차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이 찰나와 같이 떠올랐다.
편의점으로 다가가는 나를 경찰들이 교양 있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약간 흔들며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에나스 따르데스(좋은 오후입니다)."
편의점에는 육중한 체격으로 입구를 가로 막은 것처럼 경찰 하나가 서 있었다,
나는 사람 문인지 사립문인지의 그 경찰에게 부탁처럼 물었다.
"뿌에도 빠사르 아덴뜨로(안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안쪽에서는 근심스런 표정을 공동으로 띤 수입상여인과 냉동김밥여인이 보였다.
냉동 김밥.
외식을 잘 안하는 내가 어느 바쁜 날.
근처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식당에 김밥 2인분을 시켰었다.
냉동됐다 풀린 기미가 여실한, 몹시도 차갑고 딱딱하기까지 한 김밥이 배달돼서 나와 가족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입맛 버렸다고 가족은 그날의  점심을 과자로만  때웠다.
나는 그럴 때, 냉동 김밥에 대해서 나중에라도 따지는 성격은 아니다.
길에서 만나면 나를 선생님이라고 따르는 여인이라서가 아니라, 내 성격이 워낙 그 모양으로 생겨 먹었다.
그러려니 한다.
나 아니래도 세상을 바로 잡을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편의점 강 여인은 머리쪽에서 피를 흘리며 냉장고 옆에  눕혀져 있었다,
의사로 보이는 푸른 제복의 현지인 여인이 강 여인을 지혈 시킨 후 일어섰다.
누구의 연락을 받았는지, 편의점 강 여인의 딸과 사위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의사가 차트를 펴더니 강 여인의 이름을 물었다,
딸과 사위는 충격 때문인지 꽤나 더듬거렸다.
벌써부터 이름을 익혔던 내가 대답하기 시작했다.
또박또박 읊었다고 본다.
"아뻬시도(성씨), 강! 까 아 애네 헤. 놈부레(이름), 영자! 이그리에가 오 우 애네 헤. 세빠라도(칸을 떼고), 자! 호따 아."
여의사는 다 적었다는 듯 펜을 멜로디라도 파생시킬 것처럼 힘껏 떼며, 나를 향해 상큼하고 탄성과 같은 음성으로 초등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베풀듯  말했다.
"무이 비엔(참 잘했어요)."
(원래 위급상황일 때 난 그렇거든요? 뭘...)
골판지로 만들어 자유자재로 팔다리를 접었다 펼 줄 아는 장난감 병정처럼 작동하는 만능휠체어에 누운 채 강 여인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앰뷸런스의 웨앵웨앵 소리에 실려 갔다.
지금껏 그 처음 본 휠체어침대의 최첨단 기능성에 놀라 있다. 구태여 사람의 손이 접고 펼 필요도 없이 어디에 닿기만 하면 펴지고 접어지고  세워지던...

엊그제부터 강 여인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편의점 문에 쇠줄을 건채 열쇠까지 잠그고  쉬엄쉬엄 일하고 있다.
낯을 알고 있는 노숙자였다고 한다.
손바닥만 한 돌멩이를 허리춤에 감추고 들어왔고,  협박하고 실갱이 하는 과정에서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가격(加擊)당했다고 한다,
돈 통과 포켓에 넣었던 돈들을 모두 털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뒤통수를 맞았다는 강 여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앞 통수가 튀어나오고 눈두덩은 빠샤쇼(어릿광대)와 흡사한 붉고 푸른색으로 굵고 둥글게 선이 그어져 있다.
나는 철학처럼 깨닫는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라도 말 한마디조차 장난스레 말아야 해. 아무리 옆통수에 대고 웃어도 상대방은 앞 통수가 붓고 울긋불긋 멍들지 않던가.)

지금껏 문을 훤하게 열고 지내다가 문을 꼭꼭 닫은 채 일하기 시작한 강 여인.
우리는 한국인이다.
언제 어디서나 외국에 살지라도 어느 날 어느 시간에도 한국인이다.
강 여인은 요즘 지인들이 날라다 주는 김밥과 야채쥬스와 반찬과 찌개가 넘치고 넘쳐,  때 아닌 비명이다.
선글라스를 안 끼고 자랑스레 말할 때, 강 여인의 표정은 가히 희극적이랄 수가 있겠다.
하지만 몇 대 얻어맞은 사람 확실하게 맞다.
원래 잘 웃지를 않았었지만 너무나 안 웃고  있다.
한국학교 학생들로 북적대던 편의점이지만 여름방학으로 학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편의점 한편에서 화투도 치고 카톡도 하고 양푼비빔밥도 나눠 먹던 우리의 한국 여인들은 휴가에서 돌아와 뭔가를 가져다주기에  바쁘다.
다시 문 활짝 열고 장사하는 날이 오도록 바라게 된다.
화투장으로 일진을 알아보는 패도 떼볼 것이며, 신 김치 넣은 비빔국수도 나눠 먹고 시끌벅적 카톡도 해낼 수 있는 날들이...... .
나는 오며가며 내 동족인 그들의 유한(有閑)을 늘 안도(安堵)하겠고.

2013년 2월 6일 수요일

경고(警告)





                    맹하린


하루 온종일 창을 열어 놓지는 않아도 즐겨 찾기를 클릭하면 방문이 가능한 사이트.
내가 하루에 열 번도 더 들락거리는  재아 상연회 자유게시판.
그곳의 관리자가 이틀에 걸쳐 내게 간헐적인 제한조치 경고를 띄우고 있다.
서반아어로 표시한 Limite(제한) 어쩌고의 경고다.
어제 정오쯤 오른 부고는 어땠는가.
46세의 젊은 한국여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알림이었다. 아마 지병(持病)탓이었나 보았다.
나는 일단 내 아이디 중의 하나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댓글을 슬픔까지 얹은 후, 올리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경고가 떴기 때문에 금세 댓글을 접어야 했다.
"다른 사람과 똑 같은 댓글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무슨 얘기인가. 내 댓글 바로 위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었지만 그 위와 또 그 위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 위아래로 씌어져 있었는데 말이다.
몇 년에 걸쳐 몇몇의 악플러에게 여러 번 시달림을 받아온 지라 최근 들어 열흘에 한 번 정도만 댓글을 써냈을 것이다. 쓰고 싶어서 썼지만 쓰기 싫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후 내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댓글은 사다리의 칸들처럼 여럿이나 올려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부고가 올려 져 있는 경우  조의를 표하는 댓글을 거의 올렸었지만, 일단 포기하게 됐다.
세상 그 누구라도 권좌의 위치에 오르면 절대 권력은 점차 약시(弱視)가 된다는 말은 정녕 진리라는 입증(立證)이 아닐 수 없었다.
경고라는 것은 지켜보는 나를 매번 밀치는 느낌으로만 특히 밀쳤다.
어찌 됐던 경고는 과연 경고다웠다.
얼마 전 페북의 유명인사에게서 개인적인 강퇴를 맞은 것과 겹치게 된 일은 강퇴의 상호우연으로 보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댓글이 겹치면 안 된다는데,  강퇴가 겹치면 안 된다는 법이 따로 마련되지는 못했을 터.
누군가는 이랬을 것이다.
"권리의 위임이란 권리행사의 유보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나는 미사참례를 잘 못 지키고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카토릭정신이다.
이런 일 가지고 내 손으로 죽지는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인 것.

상연회 자유게시판의 위대하신 관리자분!
그동안 심심찮게 드나들 수 있어서 꽤나 고마웠다고 인정을 하게 됩니다.
자유게시판과 절친들이 내 졸작(拙作)들을 엮던 도중의 산소 노릇을 톡톡히 해줬을 테고요.
이점만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희망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희망이 다가오는 법입니다.
새로운 희망이란 그래요. 차라리 홀가분하고 편하고 자유롭다는 입장을 갖추게 하죠.
부탁하건대 다시는 실명이라거나 직업과 나이 등등을 공개하는 일 더 이상 없기를 간구하는 바입니다.
멀쩡한 사람 정신과 치료 꼭 받으라는 지적질도 들을 만큼 들었으니 그만 삼가시구요.
그럴 때마다 같은 대꾸 안하려고 얼마나 참고 참아야 했던지요.

나이 들추는 거 지긋지긋해서 페북에 갔더니, 그곳에선 나이를 제대로 먹는 일이 화두라고 하네요.
페북도 그렇군요.
예술 하는 사람들이 예술 하는 사람을 나이로 저울질 하는 일.
그거 올바른 화두 맞습니까?
제대로……. 그 말의 진정한  뜻은 별다른  의미가 따로 감춰져 있다는 얘기 아닐까요?
귀 게시판에서, 혹은 아르헨20년님의 블로그에서 배워둔 가락으로 표현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나 잠수합니다.  찾지 마세요."

2013년 2월 5일 화요일

나의 복음(福音)


          맹하린


 감자칩 민주주의(Couch Poteto=소파에 앉아 감자 칩을 먹으며 정치에 참여할 때가 많은 주의)도 못되고, 인터넷 민주주의(컴퓨터를 통해 정치참여가 가능한 주의)는 더더욱 아닌, 건강 체크 족 정도 되는,  나 그런 주의(主義)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갈수록 퇴보(退步)에서 한층 멀어지려는 계층이며 인스턴트 음식보다 직접 만든 웰빙 음식을 선호하는데, 한 번도 건강진단을 받아 본 적은 없고 아직은 어디가 고장 난 일도 없다.
하고많은 날 놀고먹는 것 같아도 하는 일 넘치도록 과중(過重)할 경우 부지기수.
그런 연유로 누군가의 집에 초대 받거나 야외에 소풍 나가면 손끝 하나 꼼짝 하기 싫다는 주의(主義) 역시 한 몫 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도우미가 있으면서도 일손이 부족한 모습 자꾸만 눈길 성가시게 할 경우, 나도 모르는 사이 팔 걷어 부치고 음식접시를 나르거나 과일을 깎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잔소리를 안 듣고 컸고, 공부든 뭐든 내가 다 알아서 해왔다고 표현해도 큰 무리수는 아닐 테지만, 그 무엇보다 자긍을 삼는 건 긍정의 생존을 부침(浮沈)에 얹고 시적시적 잘도 지나왔다는 사실.
아직은 내가 나에게 물주며 가르치는 중.
나 언제라도 인생을 납득하려고 스스로에겐  납득을 베풀지 못할 때 비일비재(非一非再)였으리.
그게 결국은  나를 위한 납득(納得)이며 설득(說得)이지 않았으려나.
그리하여 한 여름에도 한기(寒氣) 감지하며 오롯이 움츠린 어깨를 한 팔, 그리고 또 다른 팔로 안는다. 부여안는다.
 바라보는 순간,  파문 되어 팔랑이는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슷비슷한 사계절은 오래 전
이미 복음, 내 유예의 복음이었어라.
지친 팔 늘어뜨리며  관목  비를 받아들이듯
나 홀연 기지개를 켠다.
한동안 침묵이었고 표류라고도 여겨왔던 내 시심의 뜨락에서
시는 내게 고백과 감성과 메타포의 씨앗을 빗방울 되어  흩뿌려 주고 있다.


무심(無心)한 이의 흔적처럼 걸어가는
그대의 파란(波瀾)한 뒷모습
어찌하여 내게 열 가지도 넘는 깃발이 되어주네
세상이 새삼 혼자 같지는 않아져
사람을 강으로 바라보는 과정은
시가 강(江)되어 흐르는 목 메이는 서정(抒情)
거칠거나 섬세할 수도 있는 격정의 물결이기도 해
더 이상 시를 마셔버리지도 삼키지도 않을 거야
시에게 들키고 기척(棄擲)하며
시에게만  흔쾌히 손 내밀고 싶어
가는 것 같지만 다가 오네
떠나게 하면서도
매번 붙들어 앉히고 있네
내 몸에 복음(福音)이 잠복(潛伏)해 있어
복음(福音)은 그래
그게 복음(福音)이야

 -초여름-
당분간 음악을 폄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느 날 문득 펌하고 싶을 때에만 그리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