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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장 훌륭한 의사인가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는 중국 선진 시대의 유명한 의사이다.
그의 두 형도 모두 의사였는데 삼형제 중 유독 막내인 편작만이 명의로 이름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위나라의 임금이 편작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대 삼형제 가운데 누가 의술이 가장 뛰어난가?"
"큰 형님의 의술이 가장 훌륭하고 저의 의술이 가장 비천합니다."
당연히 명의로 이름난 자신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을 들은 임금은 그 이유가 궁금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편작 너의 이름이 백성들 사이에 더 알려져 있느냐?"
"사람들은 병이 깊은 환자들에게 약을 먹이고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저의 행동을 보고 제가 자신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명의로 소문난 이유입니다."
임금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형들은 왜 명의로 소문나지 않는 거냐?"
"둘째형은 환자의 병세가 미미한 상태에서 병을 알고 치료해 주기 때문에 이런 환자는 둘째형이 자신의 큰 병을 낫게 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 형님은 상대방의 얼굴빛을 보고 그에게 장차 병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병의 원인을 미리 없애 주지요. 그러니까 아파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받기 때문에 그들은 큰 형님이 자신의 고통을 없애 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제야 임금은 훌륭한 사람이 모두 유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편작의 형들처럼 남들이 알아주는데 연연해하지 않고 묵묵히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그것을 통해 행복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동행의 기쁨이 있습니다. 동행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동행에 감사하면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갑시다.
우리의 위험한 날들도 서로 손잡고 건너갑시다.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 집니다.
두 눈을 가린 선생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성했다.
학생들은 어떤 교사를 해임시키라고 주장했는데 그 교사는 학생 한 명을 심하게 때려 미움을 받은 것이다.
학교측에선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며 수업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했고 수 십 명의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교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흥분한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선생님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주임교사인 김 선생님은 교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네 이놈들!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와 난동이냐! 어찌 교무실까지 함부로 들어와 행패냐! 어서 썩 나가거라!"
청천벽력 같은 김 선생님의 말에 잠시 움찔한 학생들은 갑자기 김 선생님에게 와락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김 선생님은 얼른 두 손으로 자기의 눈을 가렸다.
학생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는지 김 선생님을 마구 구타했다.
어깨를 흔들어대는 학생들의 손짓에도 김 선생님은 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 뒤 학교는 평온을 되찾았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불경한 죄 때문에 고민했다.
고민 끝에 김 선생님을 구타한 학생들은 교무실로 김 선생님을 찾아가 사죄했다.
"선생님,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됐다, 됐어. 스스로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이 세상엔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김 선생님은 도리어 학생들을 칭찬하는 듯한 말로 아이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그 때 왜 그렇게 한사코 눈을 가리고 계셨습니까?"
"아, 그 때. 나는 수양이 좀 부족한 사람이야. 만일 때리는 너희들의 얼굴을 본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될까봐. 너희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린 게지."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때가 끼기 전에
스페인의 마드리드 시의 어느 작은 백화점 양복 코너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매우 성실하게 일했으며 손님들에게도 친절했다.
어느 날, 양복을 고르던 한 중년 신사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포장해 달라고 했다.
청년은 손님이 고른 양복을 조심스럽게 접어 정성껏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하던 청년은 그 양복에 작은 흠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년은 손님을 속일 수가 없어 옷에 흠이 있으니 다른 것으로 고르라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손님이 사고 싶어 하는 색상은 그 옷 한 벌뿐이었다.
손님은 다음에 들러 사겠다며 그냥 돌아갔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주인이 몹시 화를 내며 청년을 야단쳤다.
"가만히 있었으면 옷을 팔 수 있었는데 …. 너 때문에 손해를 입었잖아. 내일부터는 우리 가게에 나올 필요 없다."
갑자기 해고를 당한 청년을 몹시 상심했다. 아버지의 실망하는 모습이 떠올라 걱정스럽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아버지께 사실을 말씀드렸다.
아들이 직장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러자 사연을 끝까지 들은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그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 가게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곳에 제 자식을 더 둘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이 아이 마음에 때가 끼기 전에 빨리 데려갈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부족함과 행복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던 그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결핍에 있기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도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재산이든 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늘 없는 것,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분들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세상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그대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이면 참 좋겠습니다.
숨기고 덮어야 하는 부끄러움 하나 없는 그런 맑은 세상 사람과 사람사이 닫힌 문 없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마음의 문을 달더라도 넝쿨 장미 송이들이 휘돌아 올라가는 꽃 문을 만들어서 누구나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귀한 사랑 받고 살아야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고 도란거리며 사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가졌다고 교만하지 말고 못 가졌다고 주눅 들지 않는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열면 하늘 열리고 내 마음 열면 그대 마음 닿아 함께 행복해지는 따스한 촛불 같은 사랑하고 싶습니다.
정해진 답은 없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과 교수와 학생이 실랑이를 벌였다.
기압계로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는 방법을 묻는 시험 문제에 학생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기압계에 줄을 매달아 아래로 늘어뜨려 그 길이를 재면 된다.”고 대답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교수의 출제 의도는 기압이 높이에 따라 달라지므로 기압차를 이용해 건물 높이를 계산해 보라는 것이었기에 답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중재를 맡은 다른 교수가 학생에게 6분의 시간을 다시 줄 테니 물리학 지식을 이용한 답을 써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기압계를 아래로 떨어뜨려 낙하시간을 잰 뒤 ‘건물 높이 =1/2(중력가속도 X 낙하시간의 제곱)’의 공식에 따라 높이를 구하는 답안을 작성했다.
교수는 이 답안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학생은 “옥상에서 바닥까지 닿는 긴 줄에 기압계를 매달아 시계추처럼 움직이게 한 뒤 그 진동의 주기를 측정하면 건물 높이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 외에도 다섯 가지 답을 제시해 교수를 놀라게 했다.
그 학생은 바로 1922년 새로운 원자 모델을 만들어 양자역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이다.
획일화된 답을 거부했던 그가 당시 생각해 낸 답 중에서 스스로 가장 만족한 것은 “기압계를 건물 관리인에게 선물로 주고 설계도를 얻는다.”였다. 훗날 그가 과학계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이와 같은 창의적인 사고의 산물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으로
요한과 베티는 큰 농장을 일구기 위해 외딴 산속에 집을 짓고 열심히 일하는 부부였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남편 요한은 한 달에 한 두 번씩 일용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다.
어느 날 요한은 이번엔 밀린 일이 많기 때문에 며칠 더 걸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마을로 내려갔다. 갓난아이와 어린 딸과 함께 집에 남은 아내 베티 역시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농사일을 하느라 미뤄두었던 집안일은 산더미였다.
베티는 우선 빵을 구울 장작을 패기로 했다.
그녀가 뒤뜰로 가 나무를 도끼로 내려찍으려는 순간 다리에 따끔하고 쓰린 통증이 느껴졌다. 나무 속에 숨어있던 독사에 물린 것이었다.
베티는 순간 아찔했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 도와 줄 사람이라곤 남편뿐이 없는데 남편도 이삼 일이 지나야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가 죽고 나면 아이들은 어쩌지. 양식도 다 떨어졌는데..."
베티는 독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뙤약볕 아래서 장작을 팼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빵을 구웠다.
눈앞이 흐려지고 점점 고통이 엄습해 왔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더 바삐 몸을 움직였다.
베티는 어린 딸에게 일렀다.
"엄마는 조금 후에 깊은 잠에 빠질 거란다.
그러면 너는 아빠가 오실 때까지 엄마가 구워놓은 빵과 우유를 네 동생에게 잘 먹이고..."
베티의 이마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옷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놀랍게도 무서운 독이 땀과 함께 씻겨져 나왔다.
그녀는 두 아이를 위해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아픔을 느끼지 못했으나 독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베티는 그때까지도 그 사실을 모른 채 뜨거운 아궁이 옆에서 땀을 흘리며 빵을 굽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기록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사진을 찍는 부부가 있었다.
독일 베를린에 살던 안나 바그너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 주인공.
스물여섯 살의 안나와 스물일곱 살의 리하르트는 1900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마추어 사진가인 리하르트는 그해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로 보냈다. 이는 안나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42년까지 계속되었다.
얼핏 보면 사진 속 풍경은 모두 비슷하다.
크리스마스트리와 그 앞의 바그너 부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식된 식탁, 소박한 실내장식.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의 살림살이와 바그너 부부가 받은 선물 등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한 살씩 나이를 먹어 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신혼부부이던 두 사람은 어느새 중년이 되고,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늘어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바그너 부부는 1차대전 초기에 독일군의 진격 상황을 기록한 지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두꺼운 외투를 입고 찍은 사진 밑에 “석탄이 부족해서.”라는 글을 남겼다.
이 사진들은 반세기가 흐른 뒤 한 집의 다락방에서 발견되었고, 책으로 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바그너 부부가 40년 넘게 사진을 찍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의 기록.
세월 따라 변해 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남겨 두고 싶어서였을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늘 함께하자는 약속이었을까.
감동적인 우정 이야기
미국 인디아나주의 작은 마을에 사는 브라이언이라는 15세의 소년이 뇌종양으로 방사선 치료와 약물 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그는 놀림감이 될까 봐 학교에 나가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반의 급우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 방법이 어른들은 생각도 못한 것으로 반 학생 모두가 삭발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진 친구가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입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누구나 위와 같은 따뜻한 부분(마음)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서로 위해주고 도와주며. 눈높이를 함께 하는 생활을 한다면, 삶이 한층 보람 있고 즐거울 것입니다.
작은 기쁨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를 갈아타면서 남편의 심부름에 바쁘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책 읽는 사람, 잠자는 사람, 장사꾼 아저씨, 여학생들의 재잘거림 ….
그날은 따뜻한 봄날이었다.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중1쯤 되었을까? 저만치서 좀 작아 보이는 소년이 걸어왔다.
단정한 교복차림이었지만 부자유스러운 손놀림과 걸음걸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할말이 있는 듯했는데 소년을 말도 잘 못하는지 자꾸 교복 윗도리 주머니에 손을 넣는 시늉만 해댔다. 하지만 아무도 소년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두 걸음씩 피하기만 했다.
나는 소년이 버스요금을 구걸하는 줄 알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에서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년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년이 힘들게 손짓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여 보았다.
"아! 이거였구나."
버스승차권이 손에 잡혔다. 이것을 꺼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그렇게 눈짓, 손짓을 한 거로구나.
아침에 소년의 어머니가 주머니에 승차권을 넣어 주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신신당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의 손에 승차권을 쥐어 주자 소년은 말 대신 고맙다는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이 일로 그날 하루 종일 가슴이 뿌듯했다. 소년의 마음을 눈치챈 것이 마냥 기뻤다.
만약 소년에게 돈을 주었다면 이만큼 기뻤을까?
장애인이 가까이 오면 구걸이나 동정을 바라는 것이라고 여겨 왔는데, 진정한 도움이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살피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루였다.
마지막 기회
며칠 전부터 오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로 칠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엄마. 그런 엄마와 싸우는 오빠에게 대들다가 나는 뺨을 맞아 오른쪽 청각을 잃었다. 결국 나는 오빠에게 등을 돌렸고 남편 따라 미국에 온 뒤로는 남이 됐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오빠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가는 동안에도 별 생각이 다 스쳤다.
이내 힘없는 오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서 오빠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어색한 대화가 오간 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오빠가 말했다.
“지금까지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부디 용서해다오.” 순간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나도 잘한 것 없어요. 오빠... 목소리가 안 좋은데 건강 잘 챙기세요.”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허탈했다. 40여 년 만에 듣는 오빠의 사과가 내 마음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었다.
전화한 것을 후회하는 한편 약해진 오빠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며칠 뒤 올케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고마워요. 고모한테 전화 받은 다음 날 오빠 편안하게 가셨어요. 위암으로 고생하셨거든요. 오빠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늘 고모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대화가 지상에서 오빠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니,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얼마든지 한쪽 귀로도 오빠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후회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미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나는 울며 말했다.
“오빠 정말 미안해. 나도 용서해 줘.”
병 속의 편지
1999년 3월에 영국의 템즈강 어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맥주병 하나가 걸려 나왔다.
어부가 병의 뚜껑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빛바랜 종이 두 장이 나왔다.
‘이 병 속의 편지를 발견하시는 분께, 부디 이 편지를 제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전해 주시고 전쟁터로 나가는 이 병사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이어서 다음 장에는 아내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군함 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소. 당신에게 이 편지가 전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병 속에 담아 바다에 띄우오. 만약 이 편지가 당신 품으로 가거든 받은 날짜와 시간을 써서 소중히 간직하며 기다려 주오. 사랑하는 이여, 그만 안녕.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1914년 9월 ×일’
어부는 편지 아래에 쓰인 날짜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려 85년 전에 씌어진 편지였던 것이다.
어부는 영국 정부에 그 편지를 맡기며 주인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편지를 쓴 영국군 토머스 휴즈는 1914년 프랑스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너는 군함 위에서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쓰고 맥주병에 담아 고향 쪽 바다로 던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12일 뒤 첫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전사 통지서를 받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고향을 떠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두 살짜리 딸 크라우허스트와 함께….
영국 정부는 수소문 끝에 엘리자베스가 1979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 딸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남편의 애틋한 사람을 담은 병 속의 편지는 아내가 아닌 딸에게 배달되었다.
편지 사본은 ‘세기의 러브레터’ 수집으로 유명한 웰링턴 알렉산더 턴벌 도서관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뜬 눈 도로 감기
서 화담(徐花潭, 화담은 徐敬德의 호) 선생이 길가에서 우는 사람을 보고 이유를 물었다.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찾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갔다.
-뜬 눈 도로 감기- 연암 박지원의 산문 중 -
-초여름-
4월 9일에 중복된 게시글을 올렸었다는 걸 오늘 확인하고 삭제 했습니다.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