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8일 토요일

지금 나는 여기쯤 흐르고 있다






       맹하린


에바 페론의 사진이 실린 100페소권이 얼마 전  조폐공사를 거쳤으며,  곧 시중에 유통되리라고 매스컴은 전한다.
두 종류의 100페소권이  함께 통용되다가 새로 발행된 ‘에비타’ 100페소로 차츰 대체 될 전망이라는 보도(報道)다.
민주주의 회복을 극복한 이래, 디자인이 다른,  두 종류의 최고액권이 공존하며 통용하게 되리라는   계획은 아르헨티나 역사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고새면 정책이 바뀐다.
새 지폐만 사용하게 될 거라고도 발표하고 있는 것.
암달러환전금지화 문제도 그렇다.
역작용을 일으켜 날이면 날마다 국외로 새어 나가는 달러가 말 그대로 억!이 붙고 맨 나중에 달러가 붙는 자가당착의 현안을 회오리 바람처럼 휘몰고 온 형국이다.

여당(與黨)의 상징인 ‘에비타’의 사진이 인쇄된 지폐로 인해 각계의 논란(論難)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100페소 보다는 200페소나 500페소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어느 여성상원의원의 비난 실린 제언 또한 무시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이다.
위협적인 인플레로 인해 회사나  사업가들의 자금이동문제가 점차 강도들의 집중적 타깃이 될 우려와 확률도  한층 그 수위를 높이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현지 인터넷 신문은 근사치(近似値)에 가까운  몇 가지 루머를 제시했다.
가장 정확한 진단(診斷)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100페소의 화폐가 인플레로 인한 마구잡이 발행으로 그동안 지나친 남발을 유도해 왔다는 발언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의 부호를 찍어 낼 여백(餘白)이  전무(全無)한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내 나름의 관점으로 볼 때도  가장 정확성에  근접한 포착이었지 않나 싶어진다.
예를 들자면 새로 나오게 될 '에비타' 지폐는 숫자 옆에 A라는 부호가 시작되는데,  기존의 100페소 화폐는 이미 U의 부호에 이른 상태라는 사실 말이다.

이미 새로운 지폐가 진군(進軍)을 서두르기 위해 얼 차렷 상태인 마당이다.
아르헨티나에 몸담고 살고 있는 일개 자영업자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나온 100페소권 화폐에 관하여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언급을 삼가야겠다는  각오를 굳히게 된다.
말 그대로, 말로써 말 많으니 말만 많을 뿐...무슨 도움이 되겠으리오!이다.

우리 가족이 이민 온 77년도를 전후한 군정 시대에는 한 달 생활비가 100 달러에서 몇 백 달러 정도면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쓰고도 남았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허리띠를 조이고 모든 분야의 지출을 최소화 시켜도 1~2천 달러는 기본 생활비로 지출해야 하는 시점(時點)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은 영업장의 월세와 공과금들을 제외했는데도 이렇다.
개탄(慨歎)이 절로 터지는 판국이다.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 발군(拔群)의 진보(進步)다.

매사에 긍정적인 내 타고난 성격상 그저 이래저래 웃고나 살아야 제대로 살아질 것 같다.

아르헨티나 양대 전력회사인 에데수르와 에데노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 당국이 전기요금 5천 9백만 페소(1천만 달러 상당)를 미납했다고 7개 공원과 서너 개의 시 건물에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고 한다.
양대 전기 회사는 5개의 동상(銅像)과 여러 개의 공원에도 단전 조치를 취했다.
사태의 커다란 쟁점은 보조금 폐지와 4배나 급등한 전기 요금에 있다고 알려졌다.
길의 넓이가 200미터라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누에베 데 훌리오 거리의 오벨리스코탑이 어둠에 잠겨 있는 뉴스를 접하면서 한순간 암흑을 실감했다.

일신의 영달(榮達)이나 안녕(安寧) 또한 어스레 어두워지려 해서 그 어두움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예전에 보았던 영화 한 편 다시 보면서 울고 웃었다.
1991년 아카데미상 3개 부문을 석권한 노미네이트…….
“어웨이크닝(AWAKENING, S=사랑의 기적)이다.
로버트 드니로와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이고,  특히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가 압권이다.
평론가 한 사람은 드니로의 연기를 "신 들린 연기"라고 극찬 했다.

다행스럽게도 정전 사태는 금세 원상 복귀된 상태다.
참 흥미진진(興味津津)한 나라의 기다란 지표 위, 나는 격동의 시대 한 가운데서 여일하게 잘 흐르고 있는 중이기는 하다.
강인지 호수인지가  바다처럼 커다란 나라여서인지 가까운 길이 훨씬 멀고,  작아야 할 자연 풍광조차도 너무 거대할 뿐이라는 느낌만 새삼 사무치다.
이 겨울은 유난히 춥다고들 말한다.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살기 때문인지 크게 추위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춥다는 사람들을 보면 덩달아 춥다.

도덕적 사회적인 잣대를 제시하기에 앞서 일탈(逸脫)이라도  꿈꾸게 되는 시절(時節)이다.




















2012년 7월 27일 금요일

그리운 사람


 -법정-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사람과는 때때로 만나야 한다.



그리워 하면서도 만날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 이거나

일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의 울림이 없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2012년 7월 25일 수요일

침향沈香




   맹하린


교민들이 운영하는 여러 식당들의  대다수가 그렇지만,  H 회관이 특히 우리 가게에 주문을 많이 한다.
다른 식당들은  돌이나 칠순이나 행사를  어쩌다 치르지만 H 회관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잔치나 행사가 있다.
가장 큰 홀을 갖췄다는 이유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내가 꽃을 납품할 때면 D 정의 아주머니는 그런다.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읍시다.”
H관 아주머니는 가끔 김밥이나 튀김을 종이 상자에 싸준다.
H 회관의 아주머니는 불고기나 굴비나 반찬을 매번 친정 식구처럼 챙겨준다.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싶은 성격은 아니라서 나라는 사람은 누가 뭐든 주고 싶어 하면 일단 고맙게 받는다.
한국의 시골에서 사목하던 어느 외국인 신부님은,  신자들이 가져다주는 밀주나 탁주를 앞에서는 고맙게 받고 뒤에서는 냇가에 다 쏟아 버렸다던가.
마시기 싫어서가 아니라 못 갖다 주는 신자들에게 미안함을 덜어 주려는 처사였다고 한다
H 회관의 불고기는 매우 진한 양념 맛이고 너무 단맛이라서 나는 그걸 받으면 고맙게 잘 먹겠다고 좋아라,  가져와서는 사실은 이웃에게 모두 나눠 주고 만다.
받는 일이 불편하고 거북스러울 땐 4시 이전에 간다.
그 시간엔 종업원들만 일하고 아주머니는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워드 작업을 하는 중에 친구 J가 전화를 해왔다.
여러 가지 불경기의 압박감 때문에 며칠 동안 밥맛을 잃었다고.
마른 백설기 한 쪽을 조금씩 떼어 먹는 일로 점심 식사를 대신 했다고.
진정 말라버린 백설기와 같은  파근파근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명심보감의 한 가지 일을 겪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智慧가 자라지 않는다는 명언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지만 말없이 그녀의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일에만  충실하고 있었다.

장마, 가뭄, 총기 난사, 인명 살상, 불황…….
이보다 더 극한적인 상황이 따로 없어 보일 정도로 세상은 온통 대형 사고의 연속이다.
재난이나 날씨의 변동變動, 그리고 불경기의 여파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의 생활 터전을 홍수로 넘치게 하거나 가뭄까지 겪는 사태처럼 허우적 대게 만들고 있다.

일요일의 퇴근무렵.
문협 회장이 종신 선생을 가게로 보내 줬다.
그의 자동차로 김한식 선생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장소인 장의사에 다시 가야 했다.
아침 나절에 이미 혼자서 다녀왔었다.
단체로 가는 저녁에는 갈까 말까 망설이던 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낸,  일종의 배려라면 배려였을 것이다.
장의사에선 L 선생과 나란히 앉아 한참이나 얘기를 주고받았다.
문협 후배들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불현듯  깨닫는다.
내 주위에 존재하는 내 문우들과 친구들과 그대들의 소중함에 대해서다.
내게 문우들과 친구들과 그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되돌아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은총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기에는 상당한 고통이 동반되기도 한다.
L 선생과 얘기 하는 도중, 나는  여러 번 얘기의 가닥을 다독이듯 추스르고 있었다.

침향沈香…….
오랜 세월 동안 맑은 강물이나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참나무를 바람에 정성껏 말린 뒤에 얻게 되는 향이라고 한다.
내 문우들과 친구들과  그대들이 내 마음에 참나무 여러 토막 묻어 두었나 보다.
나의 행복은 오늘 유난히 사색적思索的인 표정을 하고 있다.




2012년 7월 23일 월요일

나의 생일




    맹하린


토요일.
S 교회의 결혼식 꽃 장식을 맡아 무척 분주하게 지냈다.
그런 와중渦中에 김한식 선생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88세.
5~6년 동안 거동이 불편하셔서 바깥 출입을 못하고 계셨었다.
그분에게는 초대初代라는 직책과 명칭이 여럿이나 따랐다.
초대한국학교 교장.
문협 초대회장.
J교회 원로 장로.
평통 초대 위원.

그분의 가슴에 하트 형 꽃 장식 하나 안겨 드렸다.
내가 지인들의 떠남마다 안겼던 하트 형이나 십자가 형 꽃 장식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우리 가게를 통해 납품 되었던 문협과 H 한의원을 포함한 장례 화환들이 열 개 정도 되었다.
특히 그분이 몸담고 계시던 J 교회와 , 1년 전 분쟁으로 갈라져 나간 교회와 이도 저도 껄끄러워 자녀 분들이 옮겨간 S 교회에서 각각 보내온 세 개의 화환은  내게  많은 격세지감隔世之感 은 물론이고 짧은 묵상黙想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동분서주東奔西走 바빴던 날이 하필 내 생일이었다.
원래 생일을 티 내며 지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점심에 달랑 미역국만 끓여 먹었다.
하필 내 생일에 돌아가신 분까지 계셔서 더욱 내색을 삼간 생일이었다.
덜 바쁜 날...
내가 나를 위해 주고받는 선물 하나 사면 된다.
새 옷 사는 게 너무 아까워 아마 헌 옷 하나 사게 될 것이다.

 오후에는 어떤 청년이 전화를 해왔다.
150페소(30달러 상당) 정도의 라운드 형 꽃다발을 일식 집으로 퇴근 시간에 맞춰 배달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럴 경우 나는 꽃의 용도를 꼭 묻는다.
내 딴엔 격에 맞추기 위해 그러는데,  어떤 고객들은 왜 알고 싶어 하느냐고 묘한 과잉 반응을 보내온다. 그러면 나는 으레 친절하게 답한다.
“좋은 날이시면 꽃을 더 예쁘게 해 드리려구요.”
그분은 미리 생일 선물이라고 말했었다.
(나와 생일이 같은 분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우루과이 수입 장미를 소국과 안개로 감싸고 비싼 탓에 잘 사용하지 않는 한국산 마직麻織으로 포장했다.
나와 생일이 같은 이에게 안 보이는 축하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친구 하나가 퇴근 시간 무렵 전화를 해왔다.
“어떻게 지내?”
나는 마치 내가 먼저 전화를 했던 사람처럼 그녀의 안부를 가로채듯 묻게 되었다.
“빠삐용!”
그녀는 골프 치며 주워들은 최신식 용어를 잘도 내게 전달한 것이다.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용기 있게 살자는 뜻이라는 설명이다.
“자기는 어떻게 지내?”
“나? 나라고 하는 자기는 그럭저럭이 매 일반이지.”
“하하하.”
하마터면 사실은 오늘이  내 생일이야, 그렇게 실토할 수도 있었으려나...

일요일.
이웃에 위치한 바다 가게에서 보라색 상의 하나를 건졌다.
흠이라고는 없고 너무 마음에 쏙 드는…….
새 옷 같은 헌 옷이었다.
50페소(10달러 상당)의 매우 착한 가격이었다.
새 옷과 다름없어 옷도 마음에 들었고 가격도 마음에 들었고 나의 생일에 관한 처신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내 자격과 모양새와 위치를 잘 알고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몇 번인가 짚었던 일이지만 나는 양력 생일과 음력 생일을 모두 챙긴다.
음력 생일이 되는 8월에는 작은 케이크도 하나 사고, 미역국은 한번이면 됐으므로 내가 좋아하는 잡채와 겨자채를 준비해야겠다.
가족과 쉬쉬 비밀스레 나눠 먹는 생일 맛이란 참 유별난 기분을 안긴다.
하루하루 사는 게 왜 이리 갈수록 섬세하며 특별한 느낌인지 모르겠다.
내게 생일이 있어 감사하고 두 번이나 챙길 수 있는 내 에너지 낭비이며 일종의 연약한 착상着想 또한 감사하다.
해마다 그랬지만 올해의 생일은 특히나 눈물 뚝뚝 흐르던…….
너무나 감격적인 생일이었다.
문명文明의 이기利己 속에서 권태倦怠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에너지 공급원이 되는 내 두 번의 생일…….
내게 생일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일 년에 두 번 치르는 충전작용充電作俑, 바로 그거다.



2012년 7월 19일 목요일

나를 친구로 대하는 막시(Maximiliano)




맹하린


꽃 시장에 가려면 새벽 4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아침마다 해내는 약간의 기도와 준비 과정이 30분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꽃 시장은 6시에 개장(開場)한다.

나는 자가용이 없다.
예전엔 차가 있었고 운전도 했었는데 내가 하는 일이 워낙 복합적인데도 행동반경
은 뻔해서 그다지 차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입장이다.
차를 소유하는 건 한 가족의 생활비보다 훨씬 웃도는 소비 문화를 유도한다.
꽃 시장에 갈 땐 레미스를 이용한다.
벌써 8년 동안 현지인 레미세로 막시와 다니고 있다.
막시는 내 아들 또래다.
꽃 시장에 가면 내가 손 하나 까딱 안 하도록 본인이 다 들고 다니고 내가 꽃을 구입하면 일단 자동차에 갖다 두고 다음 코스에서 내가 꽃을 사는 동안 그는 금세 나타난다. 내가 찾아다니는 꽃 집의 순서를 이젠 훤히 꿰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고마워서 크리스마스 라던가 여름 휴가를 갈 때면 잊지 않고 막시에게 약간의 촌지(寸志)를 건네 왔다.
지난 여름 휴가에, 그들 내외는 Necochea지방에 다녀오면서 Alfajor(쵸코파이)와 수정으로 된 돌멩이가 달린 열쇠 고리를 사다 주는 연례 행사를 잊지 않고 해냈다.
해마다 작은 정성이지만 꼭 그런 식으로 보답을 할 줄도 안다.
나는 봄의 날이나 연인의 날 등에는 꽃다발을 만들어 주며 부인에게 가져다 주라고 말한다.
차가 고장 나면 자기 아버지 차를 대령 해서라도 꼭 약속 시간을 지켜내는 막시.
8년 동안 그가 약속을 못 지켜낸 건 두 번인가 세 번 밖에 안 될 정도다.
정말 책임감 넘치고 신용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認識)이 저절로 든다.

내가 새벽 차창(車窓)을 보며 상념(想念)에 잠길 때면 말을 아끼고 조심할 줄도 안다.
새벽 하늘에 떠오른 아름다운 무지개에 넋이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하면 그는 차를 천천히 몰 줄도 안다.
그는 나에 앞서 먼저 말을 시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글 쟁이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5년 정도 레미스 기사로만 일했지만 3년 전부터는 그 일의 한계성을 깨닫고 대형 식품공장에 취직하여 물류 담당의 일을 하고 있다.
레미스 기사보다 월급 제때에 받고 보너스와 연금이나 의료보험 수당등의 혜택을 회사 차원에서 지급 받는 형편의 지금이 훨씬 안정된 생활이라고 말한다.
누가 뭐래도 그는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다.
아침 7시가 출근 시간이라 내가 꽃 시장에서 돌아오는 시간과 잘 맞아 떨어져 그 점을 몹시 안도하는 눈치다.
어느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무개차(無蓋車)로 꽃을 잔뜩 싣고 가던 현지인이 거친 바람에 Flor De Seda(비단꽃) 두 단을 휘날린 채 velez Sarsfield 거리의 대로변을 아무 것도 모르고 달려가 버렸다.
막시는 자동차를 스톱하고 막무가내로 달려오는 자동차들 사이로 뛰어가 그걸 주워다 내게 건네 줘 함께 마구 웃었던 일도 있었다.
도저히 주인을 찾아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어쩌면 내게 남편과 같다.
나를 키워 준 내 조국은 절대 아닌 것이다.
말썽 쟁이가 아닌 것처럼 말썽쟁이고 어떤 면으로는 나를 아끼는 것 같은 태도지만 온갖 고생 다 시키고 달러 갖고 장난이나 치고 매사에 편안하지도 않고 집안에서는 희생하기를 강요까지 한다.
하물며 대내외 적으로 태연자약 참고 살아가기만을 강요하는 나라.

그나마 막시가 친구처럼 대해줘 고맙다.
친구라고 말해줘서 고맙다.

7월 20일이 되는 친구의 날.
나를 친구로 여겨 주는 고마운 이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한마음 가득 보낸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이 영화 한 번 보라고 권유하게 된다.
안 보이는 친구의 역할이 잘 표출된 영화다.

제목...DAS 레벤 데르 안데르벤=타인의 삶
(잠시 우분트로 설치한 탓에 부호도 영문도 난해...)

* 1986년 대의 동독 비밀 경찰 슈타지를 다룬 영화다.
비밀 경찰 대위 비슬리의 시선을 통해  비 인간적이고 억압 적이던 동독의 인권 탄압을 조명했다.
독일 영화 11개 부문 수상 후보에 올랐으며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영화의 후미(後尾) 역시 압권이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가 드라이만의 새 소설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의 첫 장에 ‘HGW/XX7'에게 바칩니다 라는 문구를 발견하는 비슬러...
계산대 앞에선 비슬러에게 점원이 묻는다.
“선물로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오. 이 책은 나를 위한 겁니다.”







2012년 7월 16일 월요일

THE PIANIST

맹하린


9시 미사에 갔던 어제.
본당신부님의 강론이 유난히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나는 전신 마취를 하면서  수술을 일곱 번이나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다른 사제보다 더 똑똑하고 잘나거나 젊고 건강해서 이곳에 파견된 건 아닐 것입니다. 신(神)의 뜻에 의해 오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광고 시간에 깍두기가 곁들여진 배추 국이 20페소(4달러 상당)라고 하는데 아침을 일찌거니 들었고, 점심으로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10시쯤 미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서둘러 가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중노동자 티를 내는 것일까.
잘 사 먹지도 않으면서 점심 메뉴를 알리는 성당의 광고 시간마다 내 귀는 솔깃해지고는 해서 그러는 나를 내가 쿡쿡 웃어줄 경우 퍽도 많다.

월례회 광고 때문에 친구에게 들렀다가, 미리 와 있던 친구들과 이미 들었던 점심을 또 들게 되었다. 반찬만 대강 먹는 시늉을 했다.
혼자만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멋적어서였다.
배추 국에 솔깃했더니 점심을 두 번이나 먹는 일이 생기다니…….
며칠 전 친구의 부탁으로 아이디 두 개 만들어 냈고, 몇 번 장난처럼  사용했었는데 간 김에 아예 건네고 왔다.

그리고 한국 학교에서 4시에 개최될 청소년 연주회의 꽃다발 주문이 느닷없이 몰려들었다.
아마 서너 시간 뛰면서 일했을 것이다.
끝날 무렵엔 꽃이 바닥이 났을 정도가 되었다.
유태인 실존 인물이었던  스필만을 다룬 영화를 보느라 퇴근 시간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말았다.

오늘 새벽, 꽃 시장을 다녀 온 후, 남은 부분을 관람했다.
영화가 마지막을 장식하기 약간 전, 호센필드라는 독일인 장교가 피아니스트 스필만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나누던 대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께 감사하게. 모든 게 신의 뜻이고, 우린 그렇게 믿어야지.”
그 대목에서 나는 꺽꺽대며 울었다.
이미 스필만이 호센필드에게 은신처를 들킨 뒤, 피아노를 칠 때 역시 많이 울었었다.

한 때는 영화 볼 시간이 허락되면 책을 읽었다.
한동안 책을 볼 시간이면 영화나 볼 생각이다.
호센필드가 스필만에게 해준 말처럼 신께 감사하면서, 모든 게 신의 뜻이고 우린 그렇게 믿어야지 그러면서.
 예전에  스필만이 음악에게로 회귀했 듯 나 역시  다시 문학에게로 다가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쇼팽의 발라드만 듣게 되어도 눈물을 글썽이게 될 것 같다.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우고 모쟈노 노총위원장의 연임을 지켜보며




    맹하린


세계경제의 암울한 기운이 날로 팽창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아르헨티나라고 질쏘냐,  팔을 걷어 부치며 한 몫 단단히 해내고 있는 판국이다.
우고 모쟈노 노총 위원장이 며칠 전에 있었던 선거에 연임하는 쾌거(快擧)를 이루었다.
선거를 끝낸 모쟈노 위원장은 경호원들을 대동(帶同)하고 곧장 페로 까릴 오에스떼 행사장에 도착했다고 뉴스가 전하고 있다.
모쟈노 위원장은 이날 수많은 지지자들을 향해, 치안부재와 인플레이션을 가장 당면한 과제로 지적했는가 하면,  야당의 입장을 계속 고수하며 정부와의 대결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연설을 중점적으로 펼쳤다.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크리스티나 키르츠네르에게 몰표를 내어준 노동자들의 민심이 모처럼 합심하며 폭발하고 있었다.
영원히 강할 것 같던 노총의  결집력이 얼마 전 두 동강 나는가 싶더니, 최근에 와선 다섯이나 되는 노총으로  분산되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노총이 뿔났다.
하나만 자라던  뿔이 네 개나 더 자라나서 자기들 뿔이 가장 강하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멈추지 않는다.
다시는 노동자들의 표를 대통령 크리스티나에게 선물(膳物)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노라고 드높은 노도(怒濤)와 같이 철썩이고  있다.
노조원들의 불평과 불만은 점차 가세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의 원성(怨聲)은 일말의 비극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어디로 보나 일리가 함축된 표현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6개월 동안 가족 수당을 받지 못했습니다. 급료가 오르면 뭐합니까? 인플레이션이 모두 가로채 가는 것을."
"며칠 씩 추가근무를 해도 세금이나 공과금이 다 앗아갑니다. "
"열흘을 일해 봤자, 공과금을 빼고 나면 돌아오는 건 4일치의 허무한 몫만 남게 되죠."
가장 흥미를 끈 비판은 빠뜨리시아 불리츠 의원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일갈(一喝)이 아니었을까?
"정부가 특히 성공적으로 이끈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건 '국민 모두를 위한 인플레이션'이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정책적으로 지켜 왔던,  겉으로는  헐뜯고 안으로야 악수를 나누는 관계를 이뤘던 대통령 크리스티나와 모쟈노 위원장이 차후(此後) 어떠한 냉전(冷戰)과 결속을 가장 효과적으로 펼쳐 낼 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시국이다.
두 정치인은 암묵적 상생관계를 유지해온 덕택에 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일에 각자  기여한 바 크다.
문제라고 본다면,  모쟈노 위원장은 물론이려니와 대통령 크리스티나 역시 차기 대선에서의 영광을 거머쥐려는 카드를 이미 알게 모르게  영역의 획을 긋고  제시(提示)까지 했다는 데에 있다.
지금까지는 동반자였지만 지금부터는 경쟁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지난달의 동문회에서 우리 회원들은 매우 뜻밖이라고 볼 수 있는  거대한 플랜의 조감도(鳥瞰圖)와 계약서류를 일목요연하게 접하게 됐었다.
언젠가도 지적했던 선배가 일부러 가져온 서류들이었다.
리아츄엘로 강 근처이기도 하고 훼리아 라살라다와 인접한 곳에 세워지게 될 광범위한 계획들이 우주도시처럼 체계적으로 설계된 서류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 장의 계약서에는 열 명쯤의 Senador( 상원의원)들 서명이 있었고, 맨 위에는 대통령 크리스티나의 서명이 위풍당당 자리 잡고 있었다.
선배가 말을 보탰다.
"이 상원의원들은 순전히 대통령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너도나도 서명을 해낸 거죠."
불과 얼마 전,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소도시마다 생기는 훼리아 시장의 신설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으리라 던 뉴스가 메스콤에 중요 기사로 올려진  형편이라 더욱 의심이 가는 동시에  한층 신빙성도 생기는 플랜이 아닐 수 없었다.
대통령 크리스티나의 서명이 기재된  문서가 버젓이 나돌아 다니는 것도 이상했고, 믿지 않아야 될 이유도 없다는 사실도 이상했다.
선배가 다시 설명하는 말 중에 가장 관심이 집중되었던 대목은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었다.
위정자들은 참으로 유능한 언변의 달인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믿어서도 믿지 않아서도 안 되는 계획들이라는 건 마찬가지 느낌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현재의 사태로 봐선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확률이 가능하겠고 비일비재 일어나는  일이라서 특히 그랬다.
무직자(無職者)들의 생활개선.
권리금을 못내는 서민층을 위한 3개년에서 5개년으로 나누어진 할부임대조건 등등.
선배가 계속 쏟아내는 거대한 프로젝트들.
몇 십 헥타르, 몇 백만 달러의 경비소요, 아베쟈네다에는 없는 수백 개의 주차장시설, 편의점, 식당, 은행 등등.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안에서 내가 다른 선배들에게 건넨 말은 이랬다.
"조감도의 정교함과 고급스러움으로 본다면  나쁜 의미로 포장해서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어요.  하지만 원래 대형 사고는  고급스러움과 치밀함을 동반하므로 그점 역시 일단 의심을 두어야 해요.  계획중도하차라는 변수도 있으니까 너무 진실되게 접수하는 일은 생략하는 게 좋을 겁니다.  걱정들이 더  많아질 것 같아요.  우리 교민들의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도 생길  것입니다. 지금도 너무 많은 의류도매상이 존재하고  계속 너무 많은 훼리아들이 우후죽순처럼 불어나는 형세라서 하는 말입니다."
괄목할 만한 일은 그 선배는 여권이나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며칠이면 빼내는 일에 귀재(鬼才)라는 데에 있었다.
 (나는 급행을 껄끄러워 하는 성격이라 그럴 필요를 못 느껴왔었고 그런 신세도 지지 않아왔다.)
또한 대통령 메넴을 초청하여 한인체육대회를 개최했던 친 아계의 실력자라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경제성장모드전환이라고 표현하는 그 거대한 계획이 권력(權力)의 남용(濫用)이라는 당위성을 앞세우며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배제하지 못하겠다.
실제로 선배는 이런 일들을 글로 써야 한다고도 내게 말했지만,  나로선 되도록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던 사안에 불과했었다.
나는 그날 그렇게나 거창한 일에 가담한 선배가 부럽다기 보다 전혀 이해가 안되었었다.
편하게 살아도 큰 일을 모색해도 이미 비우기에 친숙해야 할 연륜이며 시절인  것을...... .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2~3년 뒤에 완공되리라는 그 의류도매시장에 앞서 내가 우려하는 일들은 지극히 평범한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이 불황을 잔병치례 없이 기쁘고 환하게 잘 견뎌낼까라는 매우 소박한 걱정 말이다.
오늘도 세상은 여지없이 날이 환하게 밝고 있다.
세계의 경제가 붕괴(崩壞)를 거듭하는 현상은 어떤 면으로든 위정자(爲政者) 들과 권위주의자들과 기업인들의 문어발식 경영파장(經營波長)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이런 사태(事態)나 위기(危機)를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건 아닐 것이다.
버블 경제라거나 금융자본파산 등 세계경제의 복합적 불황시대라는  굵직굵직한 타이틀이 한 두 해 거론(擧論)되어 온 게 아닌 것이다.
어제 오늘 의외로 바쁘게 일했다.
오늘 있을 음악회는 접고,  나는 제 2차대전시대를 고난으로 견뎌낸 유태인 피아니스트를 소재로 다룬 영화를 함빡 몰입한 채 보아낼 생각이다.
나는 요즘 뒤늦게 영화에 도취해 있다.



버블경제란?  

-펌-
 네티즌공감
버블경제란 무엇이고 왜 생기는 것인지요?
일촌 및 팬들에게 공감한 내용이 전달됩니다.

sjhnet
 님의 답변 
03.06.18 14:24 


거품경제는 금융업의 몰락을 의미합니다.예를 들어 님이 현금 800만원과 집을 가지고 있는데 가치가 1000만원이라고 치면요.어느 날 사자는 사람이 몰려서 집의 값어치가 2000만원까지 올라간 거예요.집값이 올라가니 님은 집을 팔기보다는 나도 집에 투자하면 돈이 좀 되겠구나 하고집을 담보로 현재 2000만원이니 1200만 원 정도는 대출이 되죠. 거기다가 님의 돈 800만원을 더해서 2000만원 가격의 다른 집을 한 채 더 사둔 거예요.이집 또한 님의 집처럼 가격이 오른 집인 거죠.그런데 오를 줄 알았던 집값이 다시 폭락해서 예전의 1000만원으로 돌아간 거죠.그렇다면 님의 입장에선 1000만 원 시가의  집 두 채에 부채가 1200만원이니 총재산이 800만원으로 줄어든 거구요.가만히 앉아서 재산이 반이하로 줄어든 거죠.은행의 입장에선 1000만원 밖에 안 되는 집을 담보로 1200만원이나 빌려줬으니 문제가 되는 거죠.이건 일례에 불과하지만 거품경제란 이런 식으로 실제의 가치보다 부풀려진 자본을 뜻하는 말로요.그 거품이 꺼지면 국가 경제의 기틀인 금융권의 몰락으로 이어지는데 그 무서움이 있습니다.





2012년 7월 12일 목요일

동행(同行)



       맹하린


어제 새벽 7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산책길을 걸으며  출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청년, 그러니까 30대로 보이는 현지인이 내 옆 켠에 나란히 같은 보조(步調)로 걸으며 미소 띤 표정으로 말을 시킨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엔 초생달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춥지 않아요?"
그는 전혀 우습지도 않은 판국에 하이에나처럼 낄낄대고 있었다.
"아뇨. 겨울이니까 추운 건 당연해요."
"무쵸 구스또!"
"엔깐따다!"
정말 기막힐 일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이 반갑다고 인사하자 , 서반아어를 배울 때 입력된 사실, 건네져 오는 인사에 같은 말로 답하지 않는 게 예의라는 사실을 뜬금없이 기억하며 엔깐따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건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땅에서 계속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그런 말들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매일 이 시간에 출근 해요?"
그는 폴라르 천으로 된 점퍼의 후드로 머리 전체를 덮고 있었다.
(범죄자 타입들이 모자를 선호한다지?)
추위 때문인 것도 같아 보인다.
"아니죠. 이 시간엔 어쩌다... 아마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름이 어떻게 돼요?"
"내 이름이 왜 궁금한데요?"
"친구하고 싶어서요."
심장이 산책길을 흔들 것처럼 두근거릴 줄 알았는데 갈수록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 또래하고 친구하며 지내는 건 나로선 손해겠죠?"
(하기는, 이 나라가 어른이고 아이고 격을 두지 않고 친구하는 관습이 있긴 하지.)
이럴 경우 무서운 인상보다 웃는 인상이 한층 위협적이다.
하지만 내 쪽에선  되도록   무서워 하기보다는 여유만만만이 더욱 투명한 보호벽이 될 것도  같다는 느낌이다.
그와 나는 마치 누가 더 연기(演技)를 잘 할 수 있는지 시합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어? 벌써 다 왔네요. 레미스를 타려고 했거든요. 차우!"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그가 모르게  경계(警戒)하는 일도 전혀 소홀하지 않게 된다.
오래 묵은 지기(知己)와 만났었고, 또한 오래 익힌 친구와 헤어지는 것과 같이 그리도 태연자약 무대를 내려서 듯 산책로를 벗어나게 된다.
뒤늦게 그의 인사를 받는다.
"차우차우! "
천천히 길을 건너 이윽고 레미세리아에 다가간다.
겨울이고 새벽이라 문이 닫혀 있다.
밤당번 기사들을 관리하는 현지인 다미안이 놀라며 반가워 한다.
"마르가리따, 자동차 필요해요? 전화를 하지 그랬어요?"
"아뇨, 어떤 호벤(청년)이  이름을 물어 보며 수상하게 굴어서요. 가게의 위치를 알려 주는 일이 될까봐 일부러 여기로 들어온 거예요."
다미안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더니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갔다는 설명이다.
두 명의 현지인 기사들 중 한 명에게 나를 가게까지 데려다 주라는 지시를 다미안은 잊지 않고 해낸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될 젊은 기사가 나를 데려다 주려고 미리 문밖으로 나서고 있다.
기사는 기사(騎士)다.
나는 다미안에게 정중히 사양한다.
나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해 왔을 다미안은 새롭게 지시한다.
"그럼 이쪽 길에 서서 마르가리따가 꽃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도록..."
나는 시적시적 걸어 반 블록 떨어져 있는 우리 가게에 도착했고 일단 쇠고리로 연결된 두 개의 자물통과 문에 달린 잠금통까지 열고 나서 건너 편 모퉁이에 서 있는 2미터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손을 높이 흔들어 준다.
2미터도 손을 크게 흔들어 답하고 있다.

오늘부터 출근시간을 한층 늦추리라는  작정을 굳힌다.
무섭거나 두렵기에 앞서 나는 좀더 흘러야 하겠고 더욱 흐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위험에서 내가 나를 보호하는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이라고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알게 모르게 감지해 왔던 빛에게도 해방을 안기고 싶어진다.

동행(同行)...
내가 살아 오면서 뜻하지 않았던 동행이 참 상상 외로 많았을 것이다.
어제처럼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받아 넘겨 왔을 테지만 말이다.
내가 어제 그 시간에 무언가를 생각했었다면...
그건 바로 청년이 설마 나쁜 짓은 안하겠지였다.
가게 안은 곤충의 날개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 속에 있었다.
나는 우선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았었다.
생각보다 얼굴이 창백하진 않았다.
범죄자들이 던지려는 삭막함의 그물을,  우리가 아니라 나 스스로 방어하며 살아야 하는 시절이 도래(到來)해 있다.
나는 아르헨티나를 적시기 시작한 소나기와 같은 치안부재(治安不在)의 한 축(軸)을 함초롬이 맞을 뻔 하였다.

대체 이 나라가 점점 왜 이 모양이 돼 가는가?
길에 종이들이 흩날릴지라도 정겹기만 하던 그 아르헨티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2012년 7월 10일 화요일

그 사람



-공광규-
                                        


흰 그릇에 담아도

검은 그릇에 담아도 그대로인

바가지로 뜨면 바가지 가득

항아리로 뜨면 항아리 가득한

작은 도랑에서도 좁음을 탓하지 않고

맑은 노래를 부르는

탁한 강물로 흘러들어도

불평 없이 세상의 복판을 뚫고 가는

그러다 세상이 마음에 안 들거나 화가 나면

온 들판을 엎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내는

어떨 땐 내 마음의 물길로 흘러와

찰랑찰랑 나와 한몸이 되는

마음처럼 고여 있고 감정처럼 움직이는

그러다 흘러넘쳐 나를 적시고

마침내 세상을 적시는

가끔 강하고 딱딱한 것들과 만나면

부딪치고 다투어 허물어버리지만

마음이 허공 같아

달도 산도 꽃도 마침내 하늘도 담는

그러다 햇빛을 담을 때

내 마음 가득 눈부신.



2012년 7월 9일 월요일

노아의 방주(方舟)





              맹하린


본국 꽃동네에서 사목을 담당하고 계신 신상현원장수사님을 위시한 수도자들과 봉사자들
열 두 분이 아르헨티나 당국의 초청으로 오신 길에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행복잔치'를 여섯 시간 정도 마련하셨다.
7월 8일 일요일 오후 내내 일정이 잡힌 것.
범교민적으로 홍보를 했었기 때문에 자리를 못 잡을 수도 있겠다고 염려한 나머지 나는 12시 30분쯤 앞당겨  성당에 도착했다.
광장 쪽의 벽에는 깍두기를 곁들인 소머리국밥이 20페소(4달러 상당)라는 광고문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식당 안은 주문하고 먹고 그러는 일에 열심인 신자들로 질서정연함과  북새통이 한통속처럼 들끓고 있었다.
가게에서 미리 점심을 들고 간 나는 곧장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이 미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가운데 쯤 자리를 잡았다.
끝나면 곧장 내가 선호 하는 앞에서 세 번째 자리로 옮길 생각이었다.
토요일에 있는 청소년 미사는 어쩌다 참례를 했었지만, 어린이 미사는 난생 처음이어선지 흥미 그 자체였다.
어린이들의 크고 작은 키와 옷차림의 자유 만발과 표정이나 앉고 선 자세가 얼마나 역동적(力動的)이면서  활기에 찬 물결 되어 출렁이던지…….
그리고 강론 대신 주일 학교 교사인 두 사람의 청년이 각각 마이크를 잡고 제대 밑을 종횡무진 오가며 어린이들을 온통 사로 잡고 있었다.
그렇게 연극을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서반아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질문하면 너도 나도 손을 들어 기발한 발언을 진솔하게 해내던,  흡사 어린이 법정과도 같던 무대란  참으로 새틋했고 보기에 흐뭇했다.

평화의 인사 시간에는 여기저기 무작위로 몰려들어 동그랗거나 길게 서서 각각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성가를 부르고 불렀다.
전혀 구속이라고는  없고  활기로움만  가득해서 퍽으나  풋풋하던 순간이었다.

더군다나 어른들로 치면 영성체를 받을 시간이 되자, 아직은 자격미달로 보이는 어린이들이 줄서서 앞으로앞으로  나가고 있었으므로 나름 찰나적으로 꽤 의아해 하며 고개까지 갸웃 했었다.
그런데 어린이 미사를 집전하는 전보근(안드레스) 보좌신부님께선 아이들을 하나하나 포옹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믿음의 마음을 씨 뿌리듯 심어주려는…….
아름답다기 보다 빛나는 것도 같았고 비 온 뒤 떠오른 무지개를 아득히 올려다 보는 감격과도 흡사했다. 
키가 작은 세 살이나 너 댓 살의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몸을 숙여 정겹게 안아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내가 새롭게 도달한 별 나라와 다름 아니었다.

예전에 현지인 성당에서…….
내 앞에 서서 영성체를 기다리던  현지인 남자의 품에 안겼던.  아직은 영성체를 영할 나이가 한참이나 미달된 어린이가 입을 새 새끼처럼 벌리자 잠시 찰나처럼 상념에 잠기던 현지인 사제가 축성 되지 않은 밀 떡을 다시 가져와 그 아이의 입에 넣어 주던 광경 이라거나,  미사 시간에 제단 위의 계단에 엎뎌서 놀던 현지인 어린이 라거나 , 정신이 약간 이상한 여인이 현지인 신부의 강론 시간에 바로 2미터 앞에서 신자들을 향해 연신 제스처를 보이던 잔상(殘像)들…….
(그 여인은 아마 수화(手話)를 할 줄 알던 여인 이라기 보다는 스튜어디스 출신이지 싶었다,)
그러 저러한 편린(片鱗) 들 까지  자꾸만 오버랩 되며 아웃 포커스로 내 시야를 흐릿하도록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현지인 성당은 특히 신자들 대부분의 돌출 행동에 전혀 간섭하거나 제재를 가하지 않아서 그런 일들을 발견할 때마다 껴안게 되는 잔잔한 감동을 한동안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최근 들어 아는 사람들 모두를 만나는 순간마다 포옹해 주고 포옹하려는 게 새로 생긴 지향(指向)으로 굳혀졌고 습관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이유로 어린이 미사의 그러저러한 장면들이 더욱 마음에 각인되듯 새겨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꽃동네 수도자 들과 봉사자 들의 '행복 나누기' 시간에는 옆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노아의 방주(方舟) 라는 율동을 함께 해내는 순서가 있었다.
각자의 옆에 앉은 사람과 오른 손이 오른손을 , 그리고 왼손이 왼손을 엇갈리게 잡고  같은 손이 되어 방주(方舟)가 되어줄 나무를 톱 질 하고 망치 질도 하며 간지럼까지 태워보는 무용을 노래에 맞춰 표출했었다.

휴식 시간이 되자 나는 살짝 빠져나와 가게로 돌아 왔다.
만약을 위해서 그러겠노라는 언질(言質)을 남기고 나섰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약도 없이 닥친 약혼식 꽃등 주문이 여럿이나 밀려 있었다.
내가 부재(不在)중이면 주문이 밀리는 현상(現狀)은 하루 이틀 이루어져 온 일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더욱 자리에 없어야 할 때를 만들어야 할 것도 같다.
약혼식 꽃은,  중앙에 놓일 사방화를 내 판단에 의해 하나 더 만들어 냈다.
사방화가 안 보이는 약혼식은 어딘지 모르게 썰렁할 듯 여겨져서다.
물론 넉넉하게 책정해 놓고 간  값이어서 더욱 그러고 싶었고…….
그 고객들은 사방화로 할까 바구니로 할까를 한참이나 망설였다는 얘기 때문에 더 그랬었다.
6시 30분쯤 찾으러 온 젊은 커플이 너무나 고맙다고 예쁘다고 환호 할 때, 나는 사방화를 차안에 실어주는 센스 또한 잊지 않았다.
어떤 고객들은 그럴 때 지나친 과민 반응을 나타낸다.
(아이고, 참.)
본인들이 더 어리고 젊다는 얘기다.
나는 단지 짧게나마 꽃을 제대로 보호하려는 심리 상태인 것을…….

어제의 '행복 나누기' 시간은 주위 사람 20여명을 포옹 하라던 순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포옹하면서 보았다.
누구나의 눈 가득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의 눈은 강이 범람하고 있음을...... .
특히 어린이 미사에서 어린이들마다 껴안아 주던 보좌 신부님의 자애로운 모습 역시 오래토록 기억에서 지우지 못할  것 같다.
사는 일 팍팍할 양이면 일부러 틈 내어 어린이 미사에 참례할 작정 같은 걸 굳히게 된다.

우리 인류는 너무 뜬금없는 지역에까지 어느 듯 흘러 와 있다.
우리 서로가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너도 나도 솔선수범해야 할 시절(時節)이다.
현대(現代)는…….

사랑은 정드는 것이라고들 한다.
사랑을 잃을 수는 있겠지만 정(情)은 못 잊는다는 인식(認識)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싸울 수 있는 것도 은총이지 싶다.
안보이게 마주 잡은 손으로 우리 모두 안 보이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만들어 나갔으면 하고  뒤늦게 바라게 된다.
어찌 됐건 인생은 오늘도 새로 시작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이제 세상을 떠 먹기만 해서는 안 될 시간이다.



2012년 7월 7일 토요일

아사도(Asado=숯불 갈비)



          맹하린


1991년


이민 온지 두 달이 가까운 어느 토요일.
C중령(공군중령 출신이라고 모두들 그렇게 호칭했다.)댁에서 저녁초대를 해왔다.
그댁을 방문한 우리 가족은 많은 한국교민들도 반가웠지만, 식탁에 놓여진 금방 버무려 내놓은 듯한 겉절이가 더욱 반갑게 여겨졌다.
(지금은 무나 배추가 사시사철 흔하지만 이민 초창기에는 고작 양배추나 홍당무로만 김치를 담아야 했다.)
배추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쉽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식사가 시작될 때 보니까, 밥은 기본이었지만 반찬이라고는 날김치와 야채사라다가 전부였다.
곧 이어 두툼하고 기다란 고깃살의 중간중간에 손가락 길이의 직사각형 뼈들이 울타리처럼 뺑 둘러 있는 아사도라고 불린다는 숯불갈비가 나오긴 했지만...... .
그렇게 기다란 장난감 기차 모양의 갈비를 작으만치 50Kg이나 구웠다고 했다.
넉넉하게 준비했으니까 많이들 드시라는 C중령내외의 인사말에 우리처럼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환호에 가까운 탄성을 너도 나도 터뜨렸다.
숯불에 구웠다고는 하지만 굵기가 어른의 팔뚝만큼 두툼한 데다 시간을 넉넉히 두지 않고 익힌 탓인지 겉은 꺼멓게 탔는데 속은 설익어 있어 그야말로 불에 그을린 냄새까지 골고루 스며 있었다.
더 잘 익은 줄갈비로 바꾸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까 정원에 차려진 식탁 주위는 매우 산만하고 소란스럽기까지 하였다.
줄갈비.
그랬다. 팔뚝처럼 길었고 줄토막이었으니까 그렇게 불릴만도 하지 싶었다.
이민 온지 몇 달이 안 됐다는 사람들이 주로 많아서 모두들 별식을 만난 듯 열심한 모습으로 식사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워낙 채식을 즐기기도 하지만 낯설고 정성이 담기지 않은 음식이라는 느낌을 못버려 도통 서먹서먹할 뿐 아니라 말 그대로 낯설고 물설어 엉거주춤한 기분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생김치와 야채사라다 맛이 매우 그럴 듯해서 그런대로 저녁 한끼를 거뜬하게 해결한 셈이긴 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조화(造化)속인 것일까.
그렇게 질색하며 우습게 생각되던 아사도 맛이 가끔은 그립게 생각되는 기분이라니.
하물며 현지인들은 주말만 닥치면 곳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숯불을 피워대는 것이었는데 숯을 피우는 연기가 퍼진 얼마 후에는 갈비 익는 냄새가 여기저기 진동하고는 했다.
희한하게도 C중령 댁에서 그렇게도 경원(敬遠)시 했으며 윈시인들이나 즐기는 야만스러운 음식으로 치부했던 아사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후각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 숯불냄새만 맡아도 반사적으로  미각(味覺)전체를 흔들어 놓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내게 변명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아사도 맛은 어떤 건지 직접 겪어 봐야 해.)

시장에 나가 아사도 판을 가장 작은 것으로 구입하고 5Kg들이 숯도 두 봉지 사고 푸줏간에 가서 갈비도 서너 줄 샀다.
갈비의 길이가 7센티 간격으로 기다란 토막이 이어지는 줄갈비가 되도록, 푸줏간에서는 전기톱에 알맞게 잘라 주었다.
값은 좀 비쌌지만 뼈가 동그라면 송아지갈비라고 해서 일부러 뼈가 둥근 송아지 갈비로 달라고 주문을 했었다.
줄갈비 네 줄이 5Kg이 조금 못되었는데 한국과 비교하면 무진장 저렴한 가격이었다.
5Kg에 3달러도 못 됐으므로.
그런 이유로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손이 많이 가는 나물이나 밑반찬보다는 고기 반찬을 준비하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손쉽고 저렴한 가격의 음식으로 손꼽히게 되는 모양이었다.

숯불의 화력이 왕성할 때에 갈비를 얹으면 겉쪽은 태우고 안쪽은 설익는 불균형을 가져오기 때문에 불의 왕성한 기운이 적당히 가라앉을 무렵에야 비로소 아사도 판의 널따란 석쇠에 갈비의 살 부분이 불쪽에 닿도록 얹는데, 천일염이 아니고 소금산에서 생산되는 왕소금을 살코기 쪽에 술술 부려주거나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서 굽기 전에 미리 뿌려두는 경우도 있다.
그 다음에 레몬을 반으로 잘라 갈비위에 레몬의 생즙을 적당하게 뿌려 주면 고기의 맛을 상큼하게 해줄 뿐아니라 고기의 결을 찰지게 익히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이윽고 아사도 판에 얹힌 갈비위에 깨끗한 신문지를 몇장 쯤 포개어 올려 놓는데,  신기하게도 종이나 신문은 타지도 않고 화기(火氣)의 분산(分散)을 막아 주면서 고기를 부드럽다 못해 감칠 맛 있게 구워내는 효과까지 가져다 주는 것이다.
거친 불결도 이미 가라 앉은 데다가 아사도 판 자체가 높낮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반 자동의 편리함을 갖추고 있어서 구태여 뒤집을 필요 없이 그런 식으로 한 두시간 정도의 끈기를 갖고 기다리면 골고루 잘 익혀진 기막힌 맛의 불갈비를 맛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아사도를 굽는 일은 어떤 면으로는 끈기와의 한 판 대결이 아닐 수 없다.
여유와 침착과 은근함을 내포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국민성과 결코 다름이 없는...... .
옵티미즘(Optimism=낙천주의)에 젖어 살기를 생의 첫 번 째 목적으로 삼아내는 남미인들의 정서적 기질은  가장  현명하고 참을성 있게 불황이라는 불황마다 매우  잘 견뎌내는 실정이다.
불경기를 그러한 여유를 가지고 극복해 내는 반면(反面), 아르헨티노들은 잘난 척 있는 척을 못견뎌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한 들 "아사도 꼬챙이를 삼킨 사람처럼 몸이 뒤로 젖혀져 있다"고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나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늠름하고 대담무쌍한 야성적 기질을 전통처럼 갖추고 라플라타강 유역을 옮겨 다니며 방랑생활을 해내던 Gaucho(라플라타 유역에 살던 원주민).
그들 가우초들이 굵은 통나무에 불을 지펴 사냥으로 얻은 짐승을 불 옆에 세워 둔 장대에 걸쳐 놓고 오랜 시간 구어낸 데서 아사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우초시대에는 병균을 몰아내고 소독을 겸하는 방편과 원리가 맞물려 모든 조리과정이 불에 굽는 것으로 대체했다지만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굳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아사도를 선호(選好)하는 아르헨티노들과 한국교민들을 지켜보노라면 모든 인간들의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는 어떤 면으로는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생활을 그리워하고 가깝게 당기어 음미해 보려는 보상심리 같은 게 작용(作用)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까지 생각이 닿게 된다.
가우초들이 지펴내던 화톳불의 열기(熱氣)가 지금껏 아스랗게 그 맥락(脈絡)을 이어 온 것은 아닐까?
어디선가 숯불 피우는 냄새가 전해져 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불현듯 아사도가 그립다.





2012년 7월 6일 금요일

불경기



     맹하린


오늘 점심 식사는 치즈와 몇 가지 야채를 뒤섞은 국적불명의 전(煎)을 부쳐, 얇게 썰고 깔끔하게 양념한 아세이뚜나(올리브)장아찌와 시래깃국으로 떼웠다.
정오 뉴스를 보는데 공교롭게도 올리브 가공공장의 판매저하(販賣低下)와 경제활동의 심각성이 집중적으로 조명(照明)되고 있었다.

올해 83세인 돈(남자의 이름 앞에 붙이는 경칭) 호세 누세떼(링크 ~)는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고급 메이커로 알려져 있는 올리브가공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500여명의 직원에게 제때에 월급을 지급해 왔었고 또 다른 500여명이 이 공장과 연관되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18세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나온 호세 누세떼는 60여 년 동안 올리브 공장을 이끌어 왔지만 올해처럼 직원들의 봉급을 미뤘던 일이라고는 공장역사 이래 전무(全無)했었다고 극명(克明)한 예를 들며 그로 인해 울었노라는 사실까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려고 애쓰며 피력(披瀝) 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결정적 요인(要因)은 인플레시온이 주된 타격적 영향이 되었으며 브라질과의 수출이 보복의 대가에 의해 일시적으로 막혔었고,  미국으로의 수출비용 또한  달러상승의 압박으로 타산이 맞지 않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여 일어난 천재지변과 같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밝혔다.

미국 등 외국으로 1천 개의 컨테이너를 보내던 시절이 옛말이 되어버린 현재, 호세 누세떼의 공장은 정부의 보호후원자금이나 브라질과의 재수출로 인하여 약간의 물꼬가 트이는 형편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고도  한다.

크고 원활하게 움직이던 교민들의 생업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비록 예전과 같이 허심탄회하게 힘들다고 털어놓지는 않을지라도 묵묵부답 참고 인내하는 각양각색의 실정(實情)이 알게 모르게 저절로 파악되는 작금(昨今)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제특성이 10년에 한 번씩은 고질병(痼疾病)을 앓아 낸다는 걸 하루 이틀 알아온 게 아닌지라,  속히  이러한 경제난이 무난히 해결의 기운을 회복할 수 있기를 관심을 가지고 주시할  수밖에 이렇다 할 도리란 없는 것 같다.
우리 교민들 역시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소원(所願)하게 된다.




2012년 7월 4일 수요일

나를 당기소서




-천양희-

49세에 <늑대와 함 게 춤을>을 써서
작가가 된 마이클 블레이크와
보길도에 귀양갔다 65세에 <어부사시사>를 쓴 고산윤선도

일생 동안 한번도 여자를 못 보고 82세에 죽은 수도승 미하
일 톨로토스와
죽을 때, 가슴을 가시에 찔리면서
일생에 단 한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원시림의 높은 가지 위만 날면서
지상에는 내려오지 않는 모르포나비와
아침 이슬만 먹고 사는 부전나비와
백마강 고란사에서만 사는 고란초와
평지에선 살지 않고
바위 에서만 사는 기린초와
진실로 우리는 그림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동생 태오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고호와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아웃사이더>를 쓴 콜린 윌슨과
눈이 두 개 귀도 두 개인데
입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두 개를 보고 두 개를 듣고
말은 하나만 하라는 것이며
하나를 말하기 위해선
둘을 보고 둘을 들어야 한다는 간디와
어머니와 정의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어머니를 선택할 것이라던 까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네
신이여, 부러지도록 나를 당기소서
다시 부러지도록 힘껏 당기소서





2012년 7월 3일 화요일

과연 수고했는가?




      맹하린


내 고객 중의 가장 연장자는 내가 목단꽃 어머니라고 불러 드리는 한국 어르신이다.
92세.
어제 아침나절에 내가 잘 아는 레미세로(대절용승용차기사)뚜르꼬(Turco=터키人)가 그분을 모시고 나타났다. 우리 가게에 오시기 위해  일부러 뚜르꼬를 부르셨다고 했다.
뚜르꼬는 별명이고 그는 카를로스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 모두들 그렇게 부르고 있다.
목단꽃 어머니는 내 또 다른 고객이 되는  A여인의 어머니시다.
꽃을 무척 좋아하시지만 특히 목단꽃을 가장 좋아하셔서 그런 별명을 받게 되셨다고 한다.
1년에 세 번쯤 오신다.
어제는 며느님의 생일이라 꽃바구니를 맞추러 오셨는데 꽃이 다 완성될 때까지 계속 그분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귀가 많이 어두워지셔서 커다랗게 소리를 높여야만 겨우 알아 들으셨다.
오실 때마다 하도 말씀을 편안하게 하셔서 사정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분의 귀가 점차적으로 어스레해지다가 어둠의 골목길처럼 아주 캄캄해지는 중이라는 설명을 듣게 되자 나는 더욱 크게 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일요일마다 J교회에 다니시는데 어느 장로님이 당신의 어머니를 염두(念頭)에 둔 봉사와 기도의 힘으로 엘리베이터를 기증하여, 비록 지팡이를 의지하는 걸음이어도 2층에 있는 교회당에 드나들기가 한결 수월해지셨다는 감격이 잇따랐다.
기억력이 자꾸만 없어지는 중이라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집주소와 따님의 전화번호 등을 달달 외우고  계셨다.
웬만한 반찬과 팥죽이나 식혜 같은 간식 등은 아직도 손수 장만하신다고 하셨다.
특히 목단꽃 같은 곱다란 미모는 평생, 그리고 항상 유지해 오신 분으로 보이신다.

우리 가게에서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는,  따님을 본지도 꽤 오래됐다고 한탄처럼 말씀하셔서 나는 서두름을 감춘 여유로움으로 천천히  전화를 연결해 드렸다.
내가 중재 역할을 해야 했다.
한국말 통역이었다. 그렇게 소리 지르며 얘기한 적이 평소의 내게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A여인은 어머니를 뵌 지가 몇 달이나 흘렀으므로 당장 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현지인 가정부만 있어서 믿고 맡기고  그럴 수가 없는 사정이라고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을 고통처럼  토로(吐露)하고 있었다.
 
가족은 내가 특별히고객 접대를 해야 할 경우, 알아서 꽃을 꽂아 낸다.
나보다 더 꼼꼼하고 나보다 더 풍성하게 만드는 편이다.
나는 일단  빠르고 적절하게 꽂는 스타일이다.
급한 고객일 경우 둘이 함께 꽂아서 고객들이 빠르다고 감탄할 때도 있다.
꽃바구니가 완성되자, 나는 레미세리아에 전화를 했다.
웬만한 레미세로들은 다 알거라는 말씀이셨으므로 뚜르꼬가 없으면 다른 기사라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금방 오스칼이 왔다.
오스칼은 건축기사인데 불경기의 여파로 직장을 그만 두고 레미스 기사로 새롭게 일을 시작한 나이 지긋한 사람이다.
한인타운에 있는 레미세로들은 우선 내게 친절하다.
팁을 주는 한국인은 나밖에 없다고 퍽도 고마워들 한다.
꽃을 먼저 오스칼의 자동차에 싣고 지팡이를 짚으신 목단꽃 어머니를 조심조심 부축하여 뒷자리에 편히 앉으시도록  나는 일종의 사명감 비슷한 감정을 지닌 채  신중에 신중을 다했다.
자동차의 뒷문을 살며시 닫을 때 목단꽃 어머니는 전혀 상상치 못했던 뜻밖의 인사를 내게 남기고 떠나셨다.
나는 날개를 푸드덕 대는 새처럼 순간적으로 놀라 파닥였다.
1년에 세 번 정도만 뵈었고, 한 번도 내 이름을 알려 드린 일도 없었는데 그분이 남기고 떠난 참으로 아프던 말…….
"맹여사, 수고했어요! "
자동차가 떠나고 발길을 돌리는데 실제로 고국에 살아 계시고 연세 역시  92세이신  엄마를 떠나 보낸 심정이 되고 말았다.
 찰나적으로  눈물을 소나기처럼 후두두둑 떨어뜨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야 했다.

홀연 A여인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목단꽃 어머니의 기억력에 대한 얘기를 한참이나 주고받았다.
수고 했다는 말이 그렇게나 아린 말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일주일 전.
친구 수산나가 단감을 한 상자 사왔다.
그녀는 얼마나 나약하게 생겼는지 50Kg도 못되는 체중의 소유자다.
그래서 나는 몸도 약하면서 어찌 무거운 걸 사들고 다니느냐고 걱정을 얹으며 상자를 들고 있는 그녀보다 내가 더 무거워 하며  지탄처럼 말했었다.
그런데 수산나가 대답을 참 가볍게 해냈다.
"자매님한테 선물할 거라고 생각하니 하나도 안 무거웠어요."
그 말이 내 마음을 한결 거뜬하게 했으며 금세 기분까지 안 무겁게 했다.
그런데 어제는 수고했다는 말이 나를 참으로 수고롭게 한 날이었다.

사실 나는 현실에 그다지 불만이라고는 없는 매우 단순한 사람이다.
눈물을 글썽이지 않으려고 거울을 보는 내 표정은 세상과 운명을 향해
가차 없이 질타를 퍼부었다.
(나여! 과연 수고했는가?)
어제 저녁 나는 꼼짝없이 원탁을 마주하고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바람과 파도에 자꾸만 휩싸이고 있었다.
목단꽃  어머니가 목단꽃 어머니가 아니라 나의 엄마였고, 현인(賢人)으로만 부각되어  보였던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 본 사람처럼 남아 있는 생애 가득 조바심도 번민도 멀리하면서  그저 흐름대로 흐르며 오로지 쓰는 일에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2012년 7월 1일 일요일

좋은 생각 중에서



-펌-

누가 가장 훌륭한 의사인가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는 중국 선진 시대의 유명한 의사이다.

그의 두 형도 모두 의사였는데 삼형제 중 유독 막내인 편작만이 명의로 이름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위나라의 임금이 편작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대 삼형제 가운데 누가 의술이 가장 뛰어난가?"

"큰 형님의 의술이 가장 훌륭하고 저의 의술이 가장 비천합니다."


당연히 명의로 이름난 자신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을 들은 임금은 그 이유가 궁금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편작 너의 이름이 백성들 사이에 더 알려져 있느냐?"

"사람들은 병이 깊은 환자들에게 약을 먹이고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저의 행동을 보고 제가 자신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명의로 소문난 이유입니다."


임금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형들은 왜 명의로 소문나지 않는 거냐?"

"둘째형은 환자의 병세가 미미한 상태에서 병을 알고 치료해 주기 때문에  이런 환자는 둘째형이 자신의 큰 병을 낫게 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 형님은 상대방의 얼굴빛을 보고 그에게 장차 병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병의 원인을  미리 없애 주지요. 그러니까 아파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받기 때문에 그들은 큰 형님이 자신의 고통을  없애 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제야 임금은 훌륭한 사람이 모두 유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편작의 형들처럼 남들이 알아주는데 연연해하지 않고 묵묵히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그것을  통해 행복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동행의 기쁨이 있습니다. 동행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동행에 감사하면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갑시다.

우리의 위험한 날들도 서로 손잡고 건너갑시다.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 집니다.



두 눈을 가린 선생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성했다.

학생들은 어떤 교사를 해임시키라고 주장했는데 그 교사는 학생 한 명을 심하게 때려 미움을 받은 것이다.

학교측에선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며 수업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했고 수 십 명의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교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흥분한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선생님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주임교사인 김 선생님은 교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네 이놈들!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와 난동이냐! 어찌 교무실까지 함부로 들어와 행패냐! 어서 썩 나가거라!"

청천벽력 같은 김 선생님의 말에 잠시 움찔한 학생들은 갑자기 김 선생님에게 와락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김 선생님은 얼른 두 손으로 자기의 눈을 가렸다.

학생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는지 김 선생님을 마구 구타했다.

어깨를 흔들어대는 학생들의 손짓에도 김 선생님은 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 뒤 학교는 평온을 되찾았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불경한 죄 때문에 고민했다.

고민 끝에 김 선생님을 구타한 학생들은 교무실로 김 선생님을 찾아가 사죄했다.

"선생님,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됐다, 됐어. 스스로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이 세상엔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김 선생님은 도리어 학생들을 칭찬하는 듯한 말로 아이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그 때 왜 그렇게 한사코 눈을 가리고 계셨습니까?"

"아, 그 때. 나는 수양이 좀 부족한 사람이야. 만일 때리는 너희들의 얼굴을 본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될까봐. 너희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린 게지."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때가 끼기 전에



스페인의 마드리드 시의 어느 작은 백화점 양복 코너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매우 성실하게 일했으며 손님들에게도 친절했다.

어느 날, 양복을 고르던 한 중년 신사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포장해 달라고 했다.

청년은 손님이 고른 양복을 조심스럽게 접어 정성껏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하던 청년은 그 양복에 작은 흠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년은 손님을 속일 수가 없어 옷에 흠이 있으니 다른 것으로 고르라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손님이 사고 싶어 하는 색상은 그 옷 한 벌뿐이었다.

손님은 다음에 들러 사겠다며 그냥 돌아갔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주인이 몹시 화를 내며 청년을 야단쳤다.

"가만히 있었으면 옷을 팔 수 있었는데 …. 너 때문에 손해를 입었잖아. 내일부터는 우리 가게에 나올 필요 없다."

갑자기 해고를 당한 청년을 몹시 상심했다. 아버지의 실망하는 모습이 떠올라 걱정스럽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아버지께 사실을 말씀드렸다.

아들이 직장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러자 사연을 끝까지 들은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그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 가게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곳에 제 자식을 더 둘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이 아이 마음에 때가 끼기 전에 빨리 데려갈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부족함과 행복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던 그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결핍에 있기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도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재산이든 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늘 없는 것,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분들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세상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그대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이면 참 좋겠습니다.

숨기고 덮어야 하는 부끄러움 하나 없는 그런 맑은 세상 사람과 사람사이 닫힌 문 없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마음의 문을 달더라도 넝쿨 장미 송이들이  휘돌아 올라가는 꽃 문을 만들어서 누구나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귀한 사랑 받고 살아야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고 도란거리며 사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가졌다고 교만하지 말고 못 가졌다고 주눅 들지 않는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열면 하늘 열리고 내 마음 열면 그대 마음 닿아 함께 행복해지는 따스한 촛불 같은 사랑하고 싶습니다.



정해진 답은 없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과 교수와 학생이 실랑이를 벌였다.

기압계로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는 방법을 묻는 시험 문제에 학생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기압계에 줄을 매달아 아래로 늘어뜨려 그 길이를 재면 된다.”고 대답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교수의 출제 의도는 기압이 높이에 따라 달라지므로 기압차를 이용해 건물 높이를 계산해 보라는 것이었기에 답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중재를 맡은 다른 교수가 학생에게 6분의 시간을 다시 줄 테니 물리학 지식을 이용한 답을 써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기압계를 아래로 떨어뜨려 낙하시간을 잰 뒤  ‘건물 높이 =1/2(중력가속도 X 낙하시간의 제곱)’의 공식에 따라 높이를 구하는 답안을 작성했다.


교수는 이 답안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학생은 “옥상에서 바닥까지 닿는 긴 줄에 기압계를 매달아 시계추처럼 움직이게 한 뒤 그 진동의 주기를 측정하면 건물 높이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 외에도 다섯 가지 답을 제시해 교수를 놀라게 했다.


그 학생은 바로 1922년 새로운 원자 모델을 만들어 양자역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이다.

획일화된 답을 거부했던 그가 당시 생각해 낸 답 중에서 스스로 가장 만족한 것은 “기압계를 건물 관리인에게 선물로 주고 설계도를 얻는다.”였다. 훗날 그가 과학계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이와 같은 창의적인 사고의 산물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으로

     

요한과 베티는 큰 농장을 일구기 위해 외딴 산속에 집을 짓고 열심히 일하는 부부였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남편 요한은 한 달에 한 두 번씩 일용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다.

어느 날 요한은 이번엔 밀린 일이 많기 때문에 며칠 더 걸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마을로 내려갔다. 갓난아이와 어린 딸과 함께 집에 남은 아내 베티 역시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농사일을 하느라 미뤄두었던 집안일은 산더미였다.

베티는 우선 빵을 구울 장작을 패기로 했다.

그녀가 뒤뜰로 가 나무를 도끼로 내려찍으려는 순간 다리에 따끔하고 쓰린 통증이 느껴졌다. 나무 속에 숨어있던 독사에 물린 것이었다.

     

베티는 순간 아찔했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 도와 줄 사람이라곤 남편뿐이 없는데 남편도 이삼 일이 지나야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가 죽고 나면 아이들은 어쩌지. 양식도 다 떨어졌는데..."

     

베티는 독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뙤약볕 아래서 장작을 팼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빵을 구웠다.

눈앞이 흐려지고 점점 고통이 엄습해 왔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더 바삐 몸을 움직였다.

베티는 어린 딸에게 일렀다.

"엄마는 조금 후에 깊은 잠에 빠질 거란다.

그러면 너는 아빠가 오실 때까지 엄마가 구워놓은 빵과 우유를 네 동생에게 잘 먹이고..."

     

베티의 이마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옷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놀랍게도 무서운 독이 땀과 함께 씻겨져 나왔다.

그녀는 두 아이를 위해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아픔을 느끼지 못했으나 독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베티는 그때까지도 그 사실을 모른 채 뜨거운 아궁이 옆에서 땀을 흘리며 빵을 굽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기록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사진을 찍는 부부가 있었다.

독일 베를린에 살던 안나 바그너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 주인공.

스물여섯 살의 안나와 스물일곱 살의 리하르트는 1900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마추어 사진가인 리하르트는 그해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로 보냈다. 이는 안나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42년까지 계속되었다.


얼핏 보면 사진 속 풍경은 모두 비슷하다.

크리스마스트리와 그 앞의 바그너 부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식된 식탁, 소박한 실내장식.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의 살림살이와 바그너 부부가 받은 선물 등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한 살씩 나이를 먹어 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신혼부부이던 두 사람은 어느새 중년이 되고,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늘어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바그너 부부는 1차대전 초기에 독일군의 진격 상황을 기록한 지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두꺼운 외투를 입고 찍은 사진 밑에 “석탄이 부족해서.”라는 글을 남겼다.

이 사진들은 반세기가 흐른 뒤 한 집의 다락방에서 발견되었고, 책으로 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바그너 부부가 40년 넘게 사진을 찍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의 기록.

세월 따라 변해 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남겨 두고 싶어서였을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늘 함께하자는 약속이었을까.





감동적인 우정 이야기


미국 인디아나주의 작은 마을에 사는 브라이언이라는 15세의 소년이 뇌종양으로 방사선 치료와 약물 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그는 놀림감이 될까 봐 학교에 나가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반의 급우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 방법이 어른들은 생각도 못한 것으로 반 학생 모두가 삭발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진 친구가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입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누구나 위와 같은 따뜻한 부분(마음)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서로 위해주고 도와주며. 눈높이를 함께 하는 생활을 한다면, 삶이 한층 보람 있고 즐거울 것입니다.





작은 기쁨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를 갈아타면서 남편의 심부름에 바쁘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책 읽는 사람, 잠자는 사람, 장사꾼 아저씨, 여학생들의 재잘거림 ….


그날은 따뜻한 봄날이었다.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중1쯤 되었을까? 저만치서 좀 작아 보이는 소년이 걸어왔다.

단정한 교복차림이었지만 부자유스러운 손놀림과 걸음걸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할말이 있는 듯했는데 소년을 말도 잘 못하는지 자꾸 교복 윗도리 주머니에 손을 넣는 시늉만 해댔다. 하지만 아무도 소년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두 걸음씩 피하기만 했다.


나는 소년이 버스요금을 구걸하는 줄 알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에서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년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년이 힘들게 손짓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여 보았다.

"아! 이거였구나."


버스승차권이 손에 잡혔다. 이것을 꺼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그렇게 눈짓, 손짓을 한 거로구나.

아침에 소년의 어머니가 주머니에 승차권을 넣어 주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신신당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의 손에 승차권을 쥐어 주자 소년은 말 대신 고맙다는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이 일로 그날 하루 종일 가슴이 뿌듯했다. 소년의 마음을 눈치챈 것이 마냥 기뻤다.

만약 소년에게 돈을 주었다면 이만큼 기뻤을까?

장애인이 가까이 오면 구걸이나 동정을 바라는 것이라고 여겨 왔는데, 진정한 도움이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살피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루였다.





마지막 기회


며칠 전부터 오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로 칠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엄마. 그런 엄마와 싸우는 오빠에게 대들다가 나는 뺨을 맞아 오른쪽 청각을 잃었다. 결국 나는 오빠에게 등을 돌렸고 남편 따라 미국에 온 뒤로는 남이 됐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오빠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가는 동안에도 별 생각이 다 스쳤다.

이내 힘없는 오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서 오빠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어색한 대화가 오간 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오빠가 말했다.

“지금까지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부디 용서해다오.” 순간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나도 잘한 것 없어요. 오빠... 목소리가 안 좋은데 건강 잘 챙기세요.”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허탈했다. 40여 년 만에 듣는 오빠의 사과가 내 마음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었다.

전화한 것을 후회하는 한편 약해진 오빠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며칠 뒤 올케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고마워요. 고모한테 전화 받은 다음 날 오빠 편안하게 가셨어요. 위암으로 고생하셨거든요. 오빠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늘 고모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대화가 지상에서 오빠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니,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얼마든지 한쪽 귀로도 오빠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후회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미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나는 울며 말했다.

“오빠 정말 미안해. 나도 용서해 줘.”



병 속의 편지


1999년 3월에 영국의 템즈강 어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맥주병 하나가 걸려 나왔다.

어부가 병의 뚜껑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빛바랜 종이 두 장이 나왔다.

‘이 병 속의 편지를 발견하시는 분께, 부디 이 편지를 제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전해 주시고 전쟁터로 나가는 이 병사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이어서 다음 장에는 아내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군함 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소. 당신에게 이 편지가 전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병 속에 담아 바다에 띄우오. 만약 이 편지가 당신 품으로 가거든 받은 날짜와 시간을 써서 소중히 간직하며 기다려 주오. 사랑하는 이여, 그만 안녕.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1914년 9월 ×일’

어부는 편지 아래에 쓰인 날짜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려 85년 전에 씌어진 편지였던 것이다.

어부는 영국 정부에 그 편지를 맡기며 주인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편지를 쓴 영국군 토머스 휴즈는 1914년 프랑스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너는 군함 위에서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쓰고 맥주병에 담아 고향 쪽 바다로 던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12일 뒤 첫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전사 통지서를 받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고향을 떠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두 살짜리 딸 크라우허스트와 함께….

영국 정부는 수소문 끝에 엘리자베스가 1979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 딸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남편의 애틋한 사람을 담은 병 속의 편지는 아내가 아닌 딸에게 배달되었다.

편지 사본은 ‘세기의 러브레터’ 수집으로 유명한 웰링턴 알렉산더 턴벌 도서관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뜬 눈 도로 감기


서 화담(徐花潭, 화담은 徐敬德의 호) 선생이 길가에서 우는 사람을 보고 이유를 물었다.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찾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갔다.

-뜬 눈 도로 감기- 연암 박지원의 산문 중 -


-초여름-

4월 9일에 중복된 게시글을 올렸었다는 걸 오늘 확인하고 삭제 했습니다.
죄송~~~

이해의 선물




폴 빌라드
유영(柳玲) 옮김

내가 위그든 씨의 사탕 가게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마 네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많은 싸구려 사탕들이 풍기던 향기로운 냄새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내 머릿속에 생생히 되살아난다.
가게 문에 달린 조그만 방울이 울릴 때마다 위그든 씨는 언제나 조용히 나타나서, 진열대 뒤에 와 섰다.
그는 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머리는 구름처럼 희고 고운 백발로 덮여 있었다.
나에게는, 그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맛있는 물건들이 한꺼번에 펼쳐진 적은 없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른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어느 한 가지를 머릿속으로 충분히 맛보지 않고는 다음 것을 고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내가 고른 사탕이 하얀 종이 봉지에 담겨질 때에는 언제나 잠시 괴로운 아쉬움이 뒤따랐다.
다른 것이 더 맛있지 않을까? 더 오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위그든 씨는 골라 놓은 사탕을 봉지에 넣은 다음, 잠시 기다리는 버릇이 있었다.
한 마디도 말은 없었다. 그러나 하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서 있는 그 자세에서, 다른 사탕과 바꿔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계산대 위에 사탕 값을 올려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탕 봉지는 비틀려 돌이킬 수 없이 봉해지고, 잠깐 동안 주저하던 시간은 끝이 나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전찻길에서 두 구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차를 타러 나갈 때에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그 가게 앞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무슨 볼일이 있어 시내까지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가, 전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위그든 씨의 가게에 들르신 일이 있었다.
"뭐, 좀 맛있는 게 있나 보자."
어머니는 기다란 유리 진열장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 때, 커튼 뒤에서 노인이 나타났다. 어머니가 노인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동안, 나는 눈앞에 진열된 사탕들만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어머니는 내게 줄 사탕을 몇 가지 고른 다음, 값을 치르셨다. 어머니는 매주 한두 번씩은 시내를 나가셨는데, 그 시절에는 아이 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늘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그 사탕 가게에 들르시는 것이 규칙처럼 되어 버렸고, 처음 들르셨던 날 이후부터는 먹고 싶은 것을 언제나 내가 고르게 하셨다.
그 무렵, 나는 돈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면, 그 사람은 또 으레 무슨 꾸러미나 봉지를 내주는 것을 보고는 '아하, 물건을 팔고 사는 건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위그든 씨 가게까지 두 구간이나 되는 먼 거리를 나 혼자 한번 가 보기로 한 것이다.
상당히 애를 쓴 끝에 간신히 그 가게를 찾아 커다란 문을 열었을 때 귀에 들려오던 그 방울 소리를 지금도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천천히 진열대 앞으로 걸어갔다.
이쪽엔 박하 향기가 나는 납작한 박하사탕이 있었다. 그리고 저 쪽엔 말갛게 설탕을 입힌 말랑말랑하고 커다란 검드롭스, 쟁반에는 조그만 초콜릿 알사탕, 그 뒤에 있는 상자에는 입에 넣으면 흐뭇하게 뺨이 불룩해지는 굵직굵직한 눈깔사탕이 있었다.
단단하고 반들반들하게 짙은 암갈색 설탕 옷을 입힌 땅콩을 위그든 씨는 조그마한 주걱으로 떠서 팔았는데, 두 주걱에 1센트였다. 물론 감초 과자도 있었다. 그것은, 베어 문 채로 입안에서 녹여 먹으면, 꽤 오래 우물거리며 먹을 수 있었다.
이만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내가 이것저것 골라 내놓자, 위그든 씨는 나에게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너, 이만큼 살 돈은 가지고 왔니?"
 "네."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먹을 내밀어, 위그든 씨의 손바닥에 반짝이는 은박지에 정성스럽게 싼 여섯 개의 버찌씨를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위그든 씨는 잠시 자기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더니, 다시 한동안 내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것이었다.
"모자라나요?"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나서 대답했다.
 "돈이 좀 남는 것 같아. 거슬러 주어야겠는데……."
그는 구식 금고 쪽으로 걸어가더니, '철컹' 소리가 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는 계산대로 돌아와서 몸을 굽혀, 앞으로 내민 내 손바닥에 2센트를 떨어뜨려 주었다.
내가 혼자 거기까지 갔다는 사실을 아신 어머니는 나를 꾸중하셨다. 그러나 돈의 출처는 물어 보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다만, 어머니의 허락 없이 다시는 거기에 가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을 뿐이었다.
나는 확실히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버찌씨를 쓴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허락이 있었을 때에는 분명히 1, 2센트씩 어머니가 돈을 주셨던 것 같다.

그 당시로서는 그 모든 사건이 내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바쁜 성장(成長) 과정을 지나는 동안,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예닐곱 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동부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나는 성장하여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외국산 열대어를 길러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는 양어장이 아직 초창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물고기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직접 수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쌍에 5달러 이하짜리는 없을 정도였다.
 어느 화창한 오후, 남자 아이 하나가 제 누이동생과 함께 가게에 들어 왔다. 남자 아이는 예닐곱 살 정도밖에는 안 되어 보였다.
나는 바쁘게 어항을 닦고 있었다. 두 아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수정처럼 맑은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아름다운 열대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남자 아이가 소리쳤다.
"야아! 우리도 저거 살 수 있죠?"
"그럼."
나는 대답했다.
"돈만 있다면야."
"네, 돈은 많아요." 하고 남자 아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하는 품이 어딘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얼마 동안 물고기들을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몇 가지 종류를 가리키며 한 쌍씩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이 고른 것을 그물로 건져 휴대 용기에 담은 후, 들고 가기 좋도록 비닐봉지에 넣어 남자 아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조심해서 들고 가야 한다."
"네."
남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누이동생을 돌아보고 말했다.
"네가 돈을 내."
나는 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꼭 쥐어진 여자 아이의 주먹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태를 금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올 말까지도. 소녀는 쥐었던 주먹을 펴고, 내 손바닥에 5센트짜리 백동화 두 개와 10센트짜리 은화 한 개를 쏟아 놓았다.
그 순간, 나는 먼 옛날, 위그든 씨가 내게 물려준 유산(遺産)이 내 마음 속에서 작용하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비로소, 지난날 내가 그 노인에게 안겨 준 어려움이 어떤 것이었나를 알 수 있었고, 그가 얼마나 멋지게 그것을 해결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손에 들어온 그 동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 조그만 사탕 가게에 다시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옛날, 위그든 씨가 그랬던 것처럼, 두 어린이의 순진함과, 그 순진함을 보전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날의 추억이 너무나도 가슴에 넘쳐, 나는 목이 메었다. 소녀는 기대에 찬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모자라나요?"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돈이 좀 남는 걸."
나는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말했다.
"거슬러 줄 게 있다."
나는 금고 서랍을 뒤져, 소녀가 내민 손바닥 위에 2센트를 떨어뜨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들의 보물을 소중하게 들고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두 어린이의 모습을 문간에서 지켜보고 서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아내는 어항 속의 물풀들을 다시 가다듬어 놓느라고, 걸상 위에 올라서서 두 팔을 팔꿈치까지 물속에 담그고 있었다.
"대관절 무슨 까닭인지 말씀 좀 해 보세요."
아내가 나를 보고 말했다.
"물고기를 몇 마리나 주었는지 아시기나 해요?"
"한 삼십 달러어치는 주었지."
나는 아직도 목이 멘 채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내가 위그든 씨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아내의 두 눈은 젖어 있었다. 아내는 걸상에서 내려와 나의 뺨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아직도 그 검드롭스의 냄새가 생각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어항을 닦으면서,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위그든 씨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초여름-

일요일이라서 오늘은 글을 올리거나 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예전에 동서가 미국으로 재이민 가면서 살림살이와 책들, 그리고 조카들의 책까지 남겨 주고 갔었다.
새벽에, 이미 익혀진 습관 때문에  읽을 만한 걸 찾다가
본국 중학 국어 1-1에 실린 위의  글을
새롭고 감동적인 느낌으로   읽게 되어 올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