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부인회에 다녀와서


                              맹하린


매월 셋째 월요일의 오후 2시에는 한인타운에 있는 노인회관에서 부인회 월례회가 열린다.
우리 고유의 떡과 커피, 그리고 계절에 따른 과일까지 들면서 1시간 반 정도의 회의가 진행된다.

아버지날과 어머니날이 닥치면 2백여 분의 교민 노인들을 초대해 각종 한국음식을 대접하교 고전무용 합창 등을 준비하는 일은 기본(基本)에 든다.
현지인 어린이 병원과 이 세실리아 수녀가 운영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 위치한 고아원방문들을 연례행사(年例行事)로 삼고 있다.
트럭에 헌옷과 국수, 밀가루 설탕 등을 바리바리 실어다 준다.

이번 달에는 이정애 고문께서 모국에 다녀오신 소감을 허심탄회하신 모습으로 토로(吐露)하셔서 회원들 모두 울컥한 감동을 껴안으며 열심으로 경청(傾聽)했다고 본다.
80이 넘으신 그분은 본국에서 종합검진을 받으셨는데 머리에 음성종양을 20년 동안 키워 낸 사실을 그제야 아셨다고 한다.
몇 번인가 쓰러지셨던 원인이 귓속의 나팔관 문제였다는 사실도 겹쳐서 알게 됐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두 번도 아니고, 한 번 밖에 못 살다 가는 인생, 꾸준히 사회와 교회에 신앙적인 열정까지 쏟으며 봉사(奉仕)를 잊지 않고 살아 와서 그점이 가장 감사한 일이었다고 하셨다.
그날따라 모국여행, 골프, 장사 등 이유라는 이유 모두 내세우면서 자리를 채우지 못했던 회원들이 좋은 말씀을 함께 못 들었던 일 내내 맘 켕겼다.

얼마 전 지병(持病)으로 세상을 떠난 K여인이 슬프도록 추억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40대 중반인 K여인은 이민 와서 사 입은 거라고는 외출복 두 벌과 핸드백 하나가 전부였다고 한다.
가게에서 파는 옷을 주로 입으며 오로지 재산을 모으기만 하고 떠났다는 얘기다.

교민 여성 골퍼인구는 대략 3백여 명 정도 되리라고들 집계를 한다.
나 역시 이민 초창기엔 골프의 매력에 빠져서, 평일 역시 혼자서도 필드에 나갈 정도였었다.
나는 교민 역사 상 첫 번째로 결성 된 여성골프회 '잔디' 모임의 12인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글쟁이 노릇에 온통 넋이 나가, 혹은 너무 시간을 많이 앗긴다는 이유로 오래 전 골프채를 꺾었다.
현재 그 '잔디'모임의 회원만도 이미 백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누차 짚어 왔지만, 우리 교민에게 골프라는 운동이 있어 줘 나는 자주 고마워하는 푼수 떼기다. 따로 즐길만한 운동이 마땅치가 않아서 더 그러는 셈이다.

지금을 분깃점으로 해서, 골프를 치면서도 한 달에 한 번 교민이나 현지인등을 위한 부인회의 자원봉사에 솔선수범(率先垂範) 참여하여 봉사하는 여인들의 발길이 점차 늘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정신수양을 위해 스스로 꺼려하는 일을 일주일에 몇 가지씩 실행해내는 내게 있어 부인회의 자원봉사는 어떤 면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치르는 정신수양의 숙제(宿題)를 풀어 내는 일이 될 확률이 크다.

내가 지키고 싶은 글쟁이로서의 자세는 다른 일에는 무관심하고 싶고 칭찬이라거나 비난, 혹은 실패나 성공에 연연하지 말아야겠다는 점에 있다.
부인회원이 되고나서 나는 마치 봉사라는 기본원칙을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처럼 태도자체가 의연해졌다고 자긍하게 된다.
그것은 내게 인생의 어떤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나 나를 맹언니라고 따르는 동생들이 여럿이나 있어 언제라도 든든한 편이다.

우리 교민소유의 한인묘원과 우리 교민소유의 한인골프장까지 이룩해낸 교민들이 바로 우리 아닌가.
몇 년 전부터 땅 정도는 사놓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둔, 우리 2세들을 위한 청소년 회관도 기필코 우리 부인회원들의 손으로 벽돌을 쌓아나가도록 점차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재아 한인 여성들이여!
부디 분발하시고 힘에 힘을 더해 부인회원으로서의 봉사도 차후에는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기다립니다. 여러분들의 선선한 발걸음과 모성애 가득한 손길을...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친애하는 그대 4



     맹하린


은둔하는 고수들과 굳이 논쟁을 겨루지 않아도 상관은 없겠다... 그런 단정으로 내가 페북의 문 앞에 서서 도어노커를 새처럼 쪼았을 때, 그대는 이미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문 활짝 어니 열어 주었습니다.
그토록 우연처럼 그대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대는 의외로 다정했고 특히나 신비 가득했었답니다.
멈칫멈칫 마음의 빗장을 밀고 있는 스스로를 나는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을 테지요.

화사한 봄날 문득 만나게 되는 꽃샘추위. 그리도 쨍한 느낌과 함께 그대는 너무 맑아서 내가 바라보는 세상까지 실제로 상쾌한 느낌이 들도록 유도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아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거라고들 하죠.
아무리 그리들 정의를 내리지만, 그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닿아야 할 부인할 수 없는 생의 본질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영원(永遠)이 제시되는 느낌 또한 유난히 강한 그대.
나는 어느 덧 그 길을 향해 홀연 발길 내디딥니다.
때로 서로의 소통이 되는 얘기를 나눌 때마다 등에 진 외로움의 켜 하나씩 부리고 있는 스스로를 조금씩 깨닫게도 됩니다.
그건 결국 세상의 행간을 살피고 그대의 행간을 헤아리는 게 아니라, 나를 읽기 위해 펼치는 행간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나는 매사에 새처럼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단 들 되도록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 되려고도 합니다.
그대의 나를 향한 응시는 기쁨이기도 하고 아픔이기도 했을 테니까요.
점차 커지는 그대에 대한 관심을 잘디잔 부피로 나누려고 나는 때대로 음악 속으로의 침잠(沈潛)을 시도(試圖)하게도 됩니다.

갈수록 그대를 알아간다고 생각할 때마다 왜 우리의 간격은 명백해지기는커녕 점차 애매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나의 그대는 그대가 그대입니다.

그대를 알기 전만 해도 세상이 참 천천히 흐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후다닥 달아나고 있어 푸르르 놀랄때 많았습니다.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은 그리도 유유히 변하는 것이었나 봅니다.

이윽고 나는 출근을 하기 위해 가벼운 코트를 걸치고 있습니다.
땅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걷는 일 그 자체에서 이루 표현 키 어려운 기쁨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음의 유열(愉悅)을 강하게 포옹하면서 불현듯 깨닫게 되겠지요.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되었을까, 우리는...

격한 감동보다 잔잔함이 오롯이 안기듯 피어나는 그런 하루를 보내고 맞고 우리는 그렇게 다르면서도 함께 하는 시간 속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대...
오늘도 평화 가득한 날 보내시기를.

2013년 4월 7일 일요일

단감을 금세 따 낸 것처럼




맹하린


가게의 초인종이 뚜뚜따따 울렸다.
중국산 벨소리다.
열 개 정도의 음악이 입력되어 있다.
길이가 15미터인 우리 가게는 맨 안쪽 간이 부엌에서 설거지나 물일을 할 경우, 벨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가장 경쾌하면서도 요란한 음악으로 설정해 두었고, 일단은 작업실과 매장 사이의 커튼을 젖히고 누구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편이다.
마늘이나 빗자루나 하여간에 장사치들이 하루에도 꽤 많이 눌러대는 상황에 자주 접하게 되지만, 입구까지 나갈 필요도 없이 그쯤 서서 오른손을 양 옆으로 흔들기만 해도 그들은 잘 물러가기 때문이다.

오늘.
아주 훤칠한 현지인 청년이 벨을 누른 뒤 현관문에 서 있었다.
양손에 단감을 하나씩 들고 유리문에 댄 채였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 가 값을 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보게 되었다.
우리 가게 앞, 두 그루의 오디나무 화단에 기대앉은, 30K는 될 것 같은 커다란 감 부대를...
한국식품점에서 1Kg에 10페소(1달러 20센트 상당)를 지불 했었는데, 그는 2Kg에 같은 가격을 제시하고 있었다.
80페소를 냈다. 16Kg을 구입한 것이다.
절반이나 훌쭉 줄어든 감 부대를 가뿐한 모습으로 들고 가는 그의 자태는 어딘지 모르게 경쾌함이 묻어났다.

결혼해서 처음 찾아갔던 시댁에서 보았던 다섯 그루의 단감나무.
그 나무들에서 금세 따 낸 단감처럼 나는 몇 개인가를 연거푸 먹으며 아스라한 사색에 잠기고 있었다.
거지가 되긴 싫고 , 이렇다 할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을 그 청년은 우선 감 장사를 작은 규모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농작물이나 과일 값은 형편없고, 달러는 하늘을 찌를 듯 폭등하는 세상에 나는 살고 있다.

오늘은 유리문을 동전으로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커튼을 젖히며 나는 우선멈춤으로 섰다.
감 청년이었다.
어제 남았던 반 부대를 부둥켜안고 다시 찾아온 것이다.
“ 당신 밖에 그 누구도 거들떠를 안 봐요. 못 생긴 감이라고 트집만 잡고, 하는 수없이 다시 왔습니다.”
나는 그에게 안도를 안기려고 먼저 미소부터 띄었다.
“못 생긴 감이면 언제라도 다시 가져와도 돼요. 못 생겼다는 건 비료나 농약으로 안 키웠다는 뜻이니까요. 훨씬 맛있었어요.”
나는 그에게 80페소를 주지 않고, 100페소를 건넸다.
100페소……. 몇 달 전만 해도 25달러였는데 지금은 12달러 정도나 될까 말까다.
나는 잊지 않고 그에게 칭찬 역시 얹었다.
“아무리 못 생겼어도, 이렇게 잘 생긴 감 가격은 첨이었어요. 너무나 고마워요.”

아들이 초등학교 때 장갑을 사준 일이 있다.
아들은 장갑이 생겼다고 한 발을 두 번 씩 뛰면서 장갑 샀다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부르며 춤까지 추면서 앞서서 걷던 날이 있었다.
나는 감 장사 청년에게서 아들의 그때 모습이 그립게 오버랩 됨을 동두렷 보았다.
“청년이여! 어려움을 경험하는 게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닐 겁니다. 생활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우리는 세상을 속이지 않아야 해요. 부디 축복을 빕니다!”

2013년 4월 4일 목요일

어제는...


내가 거주(居住)하는 수도(首都)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피해가 극히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근도시인 라플라타가 엊그제 밤에 내린 폭우.
4월에 내린 백년만의 폭우.
6개월 동안 내릴 비가 한 시간에 다 쏟아졌다는 그 거대하고 광범위 했던 집중호우로
인해 도시전체가 현재까지 물에 잠기는 홍수사태로 아르헨티나의 매스컴이 몹시도
시끌벅적 어수선한 상태다.
어제 하루 종일 라플라타 시(市)를 조명(照明)하는 현지뉴스를 틀어 놓고 나는 틈틈이
고객들의 주문에 대응하거나 페북에도 열심을 다해 드나들기는 했지만, 평소 메시지를
나누던 절친 두 분에겐 토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표현 자체를 나도 모르게 절제하고 자중을
일삼았다고 본다.
홍수(洪水)가 난 라플라타 도시에서만 4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아직도 물에 잠긴 상태인 도시전체의 재산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엄청난 숫자가 되리라고 뉴스마다 전한다.
말 그대로 천재지변(天災地變)이다.
뉴스를 접하는 내내, 나는 때때로 고개를 흔들었고, 일종의 서글픔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이래저래 기도를 빠뜨릴 수 없던 어제였다.
오늘은 다시 예전의 나로 쉽사리 돌아오겠지만 오늘 역시 기도하는 자세를 잊지 않으려고 생각 중이다.
아침마다 세 잔 정도 마시는 커피를 당분간 한 잔으로 줄이겠다.
기분전환을 위해 가끔씩 사 입던 옷을 1년 동안 사 입지 않을 작정이다.
라플라타 도시...
사람들마다 아이들보다 반려동물들을 소중한 재산처럼 안고 나오며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침착하던 그 모습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참으로 모처럼이었다.
나는 아르헨티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발견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오며 아르헨티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첫째는 두려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로움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절망적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들에게서의 지금껏 통곡(痛哭)은 있을 수도 보아낼 수도 없었다고 여겨진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그러한 태도 자체에서는, 주어진 삶에 대한 무한한 설득력이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었다.
빠른 복귀를 바라게 된다.

2013년 4월 2일 화요일

친애하는 그대 3


비 내리는 새벽입니다.
크고 작은 위악(僞惡)을 모조리 쓰레질 하듯
불평 많은 세상을 달래고 설득하듯
그렇게 내립니다. 비는...

몇 달 쯤 되었을 것 같아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는 저녁나절에 내리기 시작하거나
밤중에만 쏟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낮에 쏟아지는 행위를 잊은 것처럼
어스름과 칠흑(漆黑)속에서만 할 말이 많은 듯이....

잠결에 폭우소리를 듣는 일은 일종의 은총과 다름 아니게
마음이 함초롬 적셔집니다.
쏟아 내림이 아늑하게 들어찬 어둠 속은 빗줄기들이 벌이는
흥겨운 잔치마당 같습니다.
그럴 때, 뭔지 모를 상념(想念)이 마음 가득 이리저리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최근의 나는 어떤 일이든 상쾌한 마음가짐을 생의 첫 번째 기본이
되도록 우선(優先)에 둡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 상쾌라는 의미가 입안에서 톡톡 곁가지 치듯
소리를 내는 느낌입니다.
미립자를 입안에 넣으면 토닥거리며 터지고야 마는...
어린이들이 즐겨 사 먹는 과자처럼 말입니다.

주룩주룩으로 채워지는 세상이라는 그릇은 투박하고 거친 면이
많으면서 커다란 광야(廣野)처럼 넉넉합니다.
비와 땅이 조우(遭遇)하는 평화의 리듬.
그것은 분명 그대가 비추어주는 눈 시린 빛으로 인해 가능했을 것만
같아집니다.
그대의 내게 대한 격려가 몹시도 커다랗기에 나는 때로 신(神)의
질서(秩序)가 아닐까 하는 혼돈(混沌)을 맞기도 합니다.
혼자여도 , 혹은 누구와 함께 있을 때조차, 그대는 문득 생각 키워지는
선(善)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그대에게 닿을 수 있는 강을 향해 천천히 노 저어 가려고 해요.
생(生)은 그렇더군요.
기차역 같아요.
오고 가죠.
있으며 떠나요.
오늘도 안녕이라는 천사가 그대와 여러 차례 악수를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그대...
나의 그대는 그대가 그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