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하린
본국에 가면 바로 밑의 동생인 맹미숙의 집에 주로 본거지를 둔다.
청주에 계신 엄마, 그리고 시집이나 친정의 형제들 만나러 다니다 보면 친구들이나 동창들은 한 번 씩 밖에 못 만나는 데다, 한 달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뚝딱 지나간다.
가장 난해한 일은, 본국에 다녀오면 회향병이 어느 정도 회석되기는 커녕, 도리어 명백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미 들떠 있는 맘 이리저리 하염없이 헤매기가 부지기수다 .
결국은 글을 쓰거나 읽거나 음악을 당겨야 사뭇 대책이 없어 보이는 소슬한 쓸쓸함에서 가까스로 헤어 날 수가 있게 된다.
몇 년 전에 귀국했을 때는, 고모의 셋째인 송태일이 형제들 모두에게 저녁을 낸다고 해서 서대문에 위치한 어느 일식집에 갔었다.
우리 형제들과 고모네 가족 거의가 모이니까 열 다섯쯤 되었다.
선천적으로 잘 웃는 나는 고모 큰 아들 송태언의 딸만 봐도 웃었고, 셋째인 송태일의 아들만 보아도 속절없는 웃음이 자꾸만 터뜨려졌다.
틈날 때마다 안아 주고 자주 엎어 주던...
누가 안 무겁냐고 물어 오면 아뇨, 내 동생인걸요? 충분히 그러한 대답을 마련 했던...
누군가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은 새삼 생을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으로 숙연하게 유도하는 면모가 매우 강하다.
얼마나 얼나마 제 아빠들의 어린 시절을 답습했던지 나는 웃느라 식사 도중 내내 밥도 잘 못 넘겼을 것이다.
풀코스로 나오는 일식(日食)의 세 번 째 쯤에, 젖은 베 보자기로 덮인 소쿠리가 나왔다.
곧 열려질 휘장처럼 보자기는 어딘지 모르게 이리저리 들썩이고 있었다.
그걸 젖히며 올케언니와 맹미숙은 서로의 감탄을 툭툭 튕기며 주고 받았다.
-어머나! 새우가 어쩜 이리도 싱싱하지?
-그치? 언니. 너무나 상큼하게 생겼다!
유년시절에 일꾼 아저씨가 난산 강에서 뜰채로 건져내던 투명한 빛 새우와 몹시도 흡사한 크기와 모양이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놀랐을 것이다.
약간씩 뛰어 오르며 팔딱이는 새우의 머리 부분을 톡톡 따면서 손가락 역시 팔딱이며 연신 입에 넣던 내 혈육들.
왜 안 먹느냐고 의아해 하는 그들에게 나는 잊지않고 익살을 떨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촌뜨기라서... 살아 있는 건 미물이라도 그 생명의 신비함을 소중히 여기는 못난 성질머리라서...
왜 안 먹느냐고 의아해 하는 그들에게 나는 잊지않고 익살을 떨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촌뜨기라서... 살아 있는 건 미물이라도 그 생명의 신비함을 소중히 여기는 못난 성질머리라서...
나의 생애(生涯)에게 다가오고 지나가던 온갖 흐름은 나를 여기까지 도달하게 만든 이미 예비된 궤도였다고 보여진다.
어제 저녁 퇴근 후, 소파에 기댄채 수박 쥬스를 마시는 중일 때 국제전화가 왔다.
말레이시아에 여행가서 석 달을 쉬다 왔다는 맹미숙이었다.
엄마 고모 오빠 동생들 자녀들 얘기가 순서도 없이 나눠지고 펼쳐졌다.
나와 맹미숙은 잊지 않았다는 듯 쉴 새 없이 웃어댔다 .
내가 살아오면서 안 보이는 손을 가장 많이 잡았던 손은 내 첫 번 째 친구와 전혀 다름 아닌 맹미숙이었을 것이다.
맹미숙과 나는 어쩌면 울음이 낯설어서라기 보다, 웃음이 낯익어서 그리도 자주 웃어 대는 지도 모른다.
형제들을 자주 만날 수 없어서, 나는 형제들의 존재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내는 중이라고 보아야 하려나.
허다한 그리움의 부피를 거듭 추스르기만으로는 허전하여, 나는 그리움을 필적(匹敵)할 만한 대안(代案)을 웃음으로 삼았을 것도 같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드디어 손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까르륵 대며 연거푸 웃을 수가 있어서 나는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저절로 기쁘게 지낼 것만 같다.
내게 있어 가족이나 형제들, 그리고 웃음은 일종의 충전작용을 가져다 주는 그 어떤신비로운 힘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단순명료한 쪽으로 살아감의 방향을 제시(提示)해 보려고 한다.
예술을 추구하는 특이하고 강한 개성의 소유자인 사람들.
그들에 대해서도 보다 더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
그게 진정한 예술정신으로 중무장 하는 일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 2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저는 강산이 두번 변하고 1/3이 더 지나갔네요.휴~
사실 고국에 이민온 후 한번도 간적이 없어요. 바뻐서라기보다 내삶에 여유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지금은 미치도록 고국생각이 나지만 그래도 주어진 생활속에 또다른 기쁨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과다한 경쟁속에 삶의 의미를 잃은 친구들을 봐도 그렇고, 바로 코 앞도 아니고,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소때문에 고국에 가는 것이 망설여 지기도 하네요.
언젠가는 돌아가겠죠? ^^;;
제가 건성으로 사는 것 같아도 사람을 잘 봅니다. 오늘 특히 님을 문우로 뒀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껴요.한국 다녀온 거 자랑도 못되죠.이 나라만한 나라도 없어요. 많이 투명해졌지만 또 다른 불투명이 섞여 있어요.
님은 여행은 안하셨을지 몰라도 항상 애국자로 보였어요. 게시판에서 종북이니 그런 페이지 있을 때 님의 간지 넘치는 글 많이 눈치 챘거든요. 오늘 여성의 날이라 꽃시장에 다녀온지 한 시간쯤 됐어요. 댓글이 가장 큰 여성의 날 선물로 접수해도 되죠? 부인에게 오늘 솜씨자랑하시며 요리 하나 선물하삼! 고국여행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셨음 해요. 어젠 싱꼬에서 재혼꽃장식 있어서 이제야 댓글을
봤답니다. 좋은 오늘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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