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28년 동안의 침묵(沈黙)




     맹하린


1985년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방문을 선포하자, 전노렌죠신부님을 위시한 53명의 방문단에 합류한 우리 내외는 모국에 다녀오게 되었다.
에사이사 공항의 2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남편은 성당의 교우이자, 교민브로커로 명성을 날리던 Y씨에게 찰나적으로 팔을 이끌렸었나 보았다.
나는 남편의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이층에 닿은 상황이었다.

Y씨는 남편에게 두툼한 서류봉투와 함께, 보답이랍시고 2Kg용량의 꿀 병까지 불쑥 안기더니 금세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에 도착하면 김포공항에 사람이 나와 있다가 받아갈 거라는 언질을 속삭이듯 은밀하게 곁들이고 나서…….

비행기에 탑승 했을 때,  우리 자리로 다가오신 김마리아 어르신께서는,  남편에게 염려의 말씀을 잔뜩 쏟아냈다.
"내게 부탁하는 걸 겨우 거절 했었는데 결국 형제님이 떠맡으셨네요!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브로커가 맡기는 서류가 신상(身上)에 이로울 리는 절대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남편에게서 서류봉투를 가로채 듯 잡아당겨 우선 손으로 만져 보았다.
촉감만으로도 여권이 확실했다.
여권은,  하나라면 모를까 10개도 더 되는 듯 싶었다.
김마리아 어르신은 애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탁(神託)과 같은 말씀까지  기필코  보탰다.
"갖다 주지 말고 비행기 안의 화장실 쓰레기통에 당장 버리세요!  한국공항에서 무슨 덤터기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나는 남편이 재삼  확인해 보려고 만지작거리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가방 안에 깊숙이 넣으며 비장감 넘치게 말했었다.
"걸려도 내가 걸리는 게 낫겠어요. 당신은 남자라서 여러모로 불리할 확률도 많고."
열 댓 사람에게는 그 여권들이 특별하고  소중했으며 가장 간절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토록 귀중한 물품들을 그런 식으로 폐기처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포공항의 검색대에서 나는 보란 듯이 걸리고 말았다.
걸리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서류봉투라니. 의심을 받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지 않은가.
“이건 뭡니까?”
“아르헨티나 공항에서 남편이 얼떨결에 부탁 받았던, 아는 분의 서류인가 봅니다.”
그는 손으로 서류봉투를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가위부터 집어 들었다.
“우선 뭔가를 보고 나서 얘기합시다.”
가위로 자른 뒤,  손으로 꺼내지 않고 봉투를 위로 쳐들며 내용물 전체를 가차 없이 쏟아 내던 세관원.
인지가 붙은 서류들과 더불어 와르르 쏟아지던 열대여섯 개의 한국여권들.
한국에서 인편을 통하여 일단 아르헨티나로 보내지고, 그리고 비자를 받아 낸 다음 새로 이민을 떠나려던 한국의 신청자들에게 브로커를 통해 안겨진다던 여권들.
큰 짐들은 남편에게 건네도 된다는 혜택이 주어졌지만, 나는 혼자서 김포공항 5층에 있는 수사 실에 들어가 장장 5시간을 머물러야 했다.
공교롭게도 일요일이라, 외무부(외교부) 여권과의  직원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담당자가 여기저기 문의하는 전화를  빗발치듯 해내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나는  군인 몇 사람이 여담(餘談)으로 질문해 오는 아르헨티나의  실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군인 중 하나가 느닷없이 내게 질문했다.
“두렵지 않으세요?”
“죄 지은 일이 없는데 왜 두렵겠어요?”
나는 지금껏 의아심을 품게 된다.
(왜 경찰이 아니고 군인들이었지?)

이쪽에서만 해내던 전화가 저쪽에서도 올 수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전화벨이 지나치게 크고 길게 울렸다.
뒤늦은 여권 과에서의 해답과 결과에 대한 연락이었다.
통화를 끝낸 담당군인은 서류봉투 안에 여권들을 차곡차곡 넣어주며 다짐처럼 충고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만약 이 여권들이 가짜일 경우,  아주머니는 당장 법에 저촉 되며 처벌까지 받습니다. 큰일 날 뻔 하신 겁니다. 차후엔 아무 부탁이나 떠맡으시면 안됩니다. 우린 여태 가짜인지를 조사했던 겁니다.  좁은 땅에서 한 사람이라도 떠나면 애국이  되기도 하겠고...”
나는 그럴 때, 내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다니까요! 그렇게  쓸모 없는 변명 따위를 늘어 놓지 않는, 매우  단순한 성질머리를 지녔다.
동생 같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나는 총총 그곳을 나왔다.

어두워진 공항 밖에는 신부님과 남편의 대부이신 C인솔단장과 몇몇 교우와 남편과 내 형제들 이 그때껏 기다리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특별히 Y씨의 한 패거리로 보이는 멀쩡하고 말쑥한 신사가, 남편이 내 손에서 가져간 봉투를 받아 들고 쏜살 같이 사라지는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너무나  면목이 없다는 바보스러운 생각과 표정 같은 걸  했었다.
남편이라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무실 비슷한 곳에서 군인들이 대접해 주는 커피도 마시며  이약이약 이야기까지 주고 받으며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로 기다렸지만, 그들은 의자도 없는 공항의 바깥에서 무려 5시간이나 부족한 소생인 이 나를 기다려 준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런 시시한 일을 가지고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성격은 아니다.
하물며 나와 남편은 말하자면 그런 사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트집 삼으며  뒤늦게 싸우거나 네 탓, 내 탓을 따지지는 않는 사이 말이다.
그러니 우린 이혼 같은 걸  못해봤을 것이다.
그냥 일어 날 일이 일어났다고 여긴다.
저 높으신 분에게 새로운 시험을 당하고 있으므로 되도록 산뜻하게 넘겨야 한다는 의무감만 키우고 키우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다 할 사과를 제대로 받은 적도  없었고, 잔치나 행사 같은 데서 Y씨를 맞닥뜨리기는 했지만 남편과 나는 묵묵부답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Y씨 내외는 현재 아베쟈네다 의류도매상가 지역에 일수를 놓는 일수쟁이가 되어 일약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예쁘장한 부인은 자녀들 결혼 시킬 때마다 꼭 우리여야 한다는 강한 주관을 펼치며 우리 가게에 웨딩 꽃을 오롯이 믿고 맡겨 왔었다.
나는 계속 침묵을 고수(固守)했었다.
28년 동안의 침묵이다.
내가 배달해 준 여권의 주인공들 열댓 분은 시절이 하수상한 지금껏 아르헨티나에서 잘 살고 있을까.
안 보이는 좋은 인연으로 나와 자주 만나기도 하며 지인(知人)으로까지 남은 건 아닐까.
때때로 돌출(突出)되는 크고 작은 일에 대처하는 나의 의연함은 약간이나마 전설적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겠다.
서양 속담이 이미 내게 가르쳐 줬었다.
<부드러움은 뼈를 부순다.>







댓글 4개:

lovemate :

큰일 날뻔 하셨습니다.
모르는 사람 아니 아는 사람이라도 부탁하면 거절 하실줄 아셔야 합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수수료를 받고 가방 전달하다 마약 사범으로 감방까지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민 초창기에 서로 동변상련이라 도와주고 싶고 남의일도 내일 같지 하지만 그것도 서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됩니다. 특히 이민 사회에서는 더욱더요..
제 얘기입니다.
2001년 IMF 닥쳤을때 정말 고생많이 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남들이 무책임하게 쓴 돈과 관련된 문제로 남들에게 욕지거리와 쓴소리 들어가시면 무려 10년넘게 힘들게 버텨왔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절대 사람들과 돈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민 사회에서는요.그때 가족모두 고생하는걸 보고 느끼며 제 가슴에 응어리가 졌는지 몰라요.그러고 보니 어려움을 겪고나니 인생을 더 배우게 됬네요.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네요.ㅡ.,ㅡ;;
그냥 제가 하고 싶은말은 사람 마음이 내 마음같지 않다는겁니다.

maeng ha lyn :

토닥님 어디 가쩌, 어디 가쩌?
아르님 응어리 어쩌라꼬!ㅋㅋ

저 가끔 기승전결을 즐기지만 맺고 끊음이 확실해요.
선한 남편 때문에 설겆이는 좀 했지만요.

반전의 제왕님~
주말에 가족과 잘 지내시와요~
니꼬에게 안부요~~~~~~

Oldman :

"저 높으신 분"에게서 온 시험을 두분이 산뜻하게 넘기셨군요. 선함으로 하늘에 상을 쌓아 놓으셨으니 부럽습니다. ^^

maeng ha lyn :

선함이라고 표현해 주셔서 감사 해요.
님께서 쌓으신 선함을 언제 따라 가죠?
이제 좀더 신앙인으로 살 생각을 순간적으로 굳힐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감사!
저는 님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