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3일 월요일
예쁘다!
맹하린
나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다운될 때가 아주 가끔 있다.
그럴 때 나는 그 뚝 내려간 기분을 맘껏 누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걸 누리기 거추장스러워지면 기분을 회복할 만한 건수(件數)를 찾는다.
남편이 내게 했던 매우 짧은 말 또한 나를 혼자서도 잘 웃게 만드는 건수(件數)다.
1987년도였다.
친구 H가 전화를 해왔다.
그 친구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지만, 아르헨티나 교민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온세 지역에 의류도매상을 차렸던 친구다.
유태인들이 판을 치던 상가(商街)지역이었다.
가게의 이름은 신세계였다.
두 번 째가 파고다.
세 번 째가 세 오뚜기.
공교롭게도 셋 다 성당 교우였고 셋 모두 나와는 친구사이였다.
나도 참 대단하다.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놀고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친구들 속에서 물질의 유혹에 초연했으니.
물론 나도 장사라는 걸 하고 싶었었다.
그런데 남편의 반대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고집은 아무도 못 이기는 질김이 강해서 나는 계속 백조 생활을 유지하며 성당에서 친구들과 여러 봉사(奉仕)활동을 했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따로 만나며 재미있게 잘 지내는 일에만 흡족히 여겨야 했다.
그때 남편은 현지인을 상대로 침술치료를 했는데 , 온 가족이 매달려 해내던 웬만한 제픔공장보다 나은 수입이었다.
지금도 그가 남긴 노트를 보면 현지인 환자들의 수가 몇 백 명이 넘는 걸 보게 된다.
남편은 이민지에서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많은 걸 배워 왔었다.
침술 역시 그렇게 시작된 거였다.
그렇지만 나는 환자를 다루는 그의 이민지에서의 직업이 항상 마음에 안 들었다.
장사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었었다.
H는 그때 하루에 들어오는 판매액이 70x100의 검은 봉지에 가득이었다고 한다.
입금할 때마다 지폐의 앞면을 같은 방향으로 정리해야 받아주는 현지 은행의 규칙에 맞추느라 한국 청년을 고용해 그 일을 전담 시켰을 정도였다.
나중엔 Tortuga(거북이)라는 식품도매상도 차리고, 9 de Julio거리에 전자제품대리점도 차렸지만, 그때 당시의 현지사회 정책과 특성은 그랬다.
어느 정도 키운 다음에 더 이상 못 크도록 세금을 왕창 때리는 방식 말이다.
H의 친정 부친 최재학옹과 파고다 L의 시아버지 한석호옹은 우리의 한국학교를 세우는데 물질적 후원을 아낌없이 베푼 입지전적 어르신들이시다.
파고다는 지방도시에 방직공장을 차린 지 20여년도 더 되었지만 골치가 좀 아픈 공장과 다름 아닌 것만 같다.
엊그제 포스팅 했던 P방직회사의 L이 골프는 프로급인데 만날 어디가 잘 아프고 울적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툭하면 고소(告訴)를 밥 먹듯 , 유행처럼 가까이 하는 현지인 기술자나 종업원들이 한두 명이 아닌 것이다.
아예 변호사들이 가방을 들고 찾아 다니며 고소를 부추긴다는 현상에 만연돼 있는나라라고 한다. 이 나라가...
그런 고질적 병폐(病弊)에 허구한 날 고민과 고통을 반복 했으리라 .
세 오뚜기의 J는 세 아들을 모두 미국에 보내고, 미국에 아주 간 것도 아니고 안 간 것도 아니게 자주 왔다 갔다 한다.
살기는 이 나라가 좋다고 이 나라에서 많이 지낸다.
온세 지역에 가게를 여럿이나 소유한지라, 유한(有閑)한 나날들을 보내는 셈이다.
분명한 것은, 큰돈을 만지는 사람들도 작은 돈이 궁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이 말은 가진 사람들에겐 푼돈도 귀하게 다뤄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가끔 그 세 친구들 중 누가 더 성공했고, 누가 더 현명했고, 누가 더 이 나라를 아꼈을까를 묵상해 볼 때도 어쩌다 있다.
답은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이므로.
사실은 나를 그 세 사람과 함께 또 다른 , 나라는 다른 한 사람을 더 추가해서 묵상하게 되는 문제가 문제다.
얘기가 다른 쪽으로 흘렀다.
어느 날 H가 전화를 해왔다.
그녀는 하루에 한번은 기본이고 하루에도 여러 번 내게 전화를 해와 온갖 얘기 모두 털어 놓기를 일과처럼 해냈다.
금방 전화를 끊고 잊어버린 말이 있었다면서 다시 전화를 하는 경우도 참 많았다.
한국교민 중 가장 최초로 의류도매상을 달성하는 일은 거저 하는 일도 아무나 하는 일도 아니었나 보았다.
그녀는 초창기에 재단사도 안 두고 남편과 둘이서만 많은 양의 천을 재단대 위에 깔면서 직접 재단하고 묶고 바느질집에 보내고 하느라 디스크라는 병을 얻었다.
나와 쇼핑 Jumbo에 가면 구입한 식품들을 바울에 싣는 일은 내가 다 도와야 했다.
왜냐면 나는 힘이 좀 센 편이고 나는 누구를 돕는 일을 좋아 했고, 특히 나는 누가 아파서 쩔쩔 매는 모습은 못 보니까.
그녀는 1.5리터의 물병조차 버거워 한 적이 많았다.
얘기가 또 딴 데로 흘렀다.
나는 가끔씩 딴 데로 흐르는 얘기를 잘하는 사람 맞다.
어느 날 H가 전화를 해왔다.
머리 스타일을 좀 바꾸고 싶은데 미장원에 함께 가자는 얘기였다.
한인 타운에 소재한 미장원에 가서 그녀는 파마를 하고 나는 한국에서 공수 해 온 여성동아나 여성중앙들의 잡지를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그 무렵에도 나는 생머리를 선호했고 미장원은 1년에 한번이면 만족이었다.
그녀의 파마가 끝난 후, 호세 마리아 모레노 거리 에스끼나(모퉁이)에 위치한 , 전면이 통유리로 된 대형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또 얘기를 나눈다.
하지만, 아들이 하학하기 전에 집에 돌아온다.
그게 내 나름의 철칙이고 윤리였고 도덕이었다.
그날은 다행히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맘 놓고 다녀왔을 것이다.
저녁 무렵 퇴근한 남편은 대문에서 내 머리를 잠시 지켜보더니 말했다.
슬쩍 스치듯 바라봤다면 말도 안한다.
"예쁘다!"
나는 깔깔 대며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남편 역시 H처럼 하루에 한 번은 기본이고 하루에 두세 번도 내게 전화를 했다.
현지인 환자에게 침을 놓고 잠시 기다리는 중이었을 것이다.
별 뚜렷한 얘기라곤 없었다.
단지 그랬다.
-여기는 지금 비가 내려.
-이곳은 지금 우박이 떨어지고 있어.
-안개가 자욱해. 이 동네는.
전생에 나는 전화국 안내였을까.
그가 습관처럼 집으로 전화를 했을 때, 내가 H와 만나기 위해 외출 했고, 아마 미장원에 간다는 것 같더라는 아들의 대답이 그를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미장원에 다녀왔으니 당연히 머리에 변화를 줬으리라 단정했던 것.
그는 과묵한 편이라 예쁘다는 말을 일 년이 가도 전혀 안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머리도 하지 않고 미장원만 다녀오고도 나는 일 년에 한 번도 못 듣는 느닷없는 칭찬을 들을 수가 있었다니.
여러 번이 아니면 어떤가.
나는 그때 알았다.
머리를 하고 나서 듣는 말보다 머리를 안 하고 듣는 칭찬이 훨씬 값어치 넘치고 재미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고맙다.
아직 못 들어 본 말이 더 있다.
내가 장난이 넘칠 때면 친구나 문우들에게 가끔 하는, 꽤나 짖궂은 말.
"자기야, 사랑해!"
바로 그 말!!!
예쁘다!
나는 오늘도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내게 친구들이 있었기에 고맙다.
생활리듬도 수준도 서로 너무 커다란 격이 생겨 어느 날부터 어쩌다 만나고 있다.
나는 그녀들보다 나은 거라고는 중노동자이고 어느 정도 건강하다는 것 밖에 내세울 거라고는 없다.
특히 그녀들과 잘 왕래를 못하는 건 내가 너무 정의로워서 가끔은 그녀들 앞에서 투덜댄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에서 벌었으면 이 나라에 어느 정도 투자해야지 왜들 재산을 외국으로 옮겨? 그러니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
나의 개성이 바로 그런 면에서 돌출된다.
보통 땐 착한 편이고 수더분한 면이 많고 거의 끝까지 참다가도 대의를 생각하면 꼭 한 마디 던지는 것이다.
내게 예쁘다는 말을 그날 한 번만 했을 정도지만 자주 생각나게 해주고 웃게도 해준 그가 함께 해냈던 날들 역시 고맙다.
예쁘다는 말은 역시나 한 번 들어도 자주 들어도 고맙고 행복한 말인 것 같다.
예쁘다!
좋은 말이다.
참 예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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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그 시절때 님이 욕심이 있었다면 아마도 장사를 시작하셨을 것 입니다.
모든일에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장사를 해야할때, 그만 두어야 할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운때... 그걸 미리 예측하고 과감하게 판단한 사람들이 성공에 더욱 가까워지지만 그걸 예측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가끔은 과감하고 무모한 도전이 행운을 부르는 경우를 봅니다.
참 사람인생이란 알수 없이 묘한것 같습니다.
저도 "이쁘다"는 말이 듣기 좋지만 "아름답습니다" 말도 좋아요. 특히 중년의 나이에 들으면 참 좋을것 같습니다.
사실 전 사업 체질은 아니죠.
언제나 글하고 친했어요.
그러니 이렇게 사는 것 만족해야 합니다.
글을 써왔기에 여러 좋은 친구들을 만났을 듯해요.
아름답다와 예쁘다의 간격은 크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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