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엘로이
맹하린
일 년 중 두 번째로 큰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봄의 날(9월 21일)에 대비(對備)하려고
수요일에 미리 꽃시장에 갔다.
금요일에 구입하는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트라픽으로 한 번에 들여 오면 정리 정돈하는 일에 시간을 다 허비하는 불편이 따른다.
막시는 하필이면 자동차가 고장이라고 며칠 전 통보해 왔었다.
미리 예약했더니 20대 중반의 현지인이 수요일 새벽 5시에 집 앞으로 왔다.
꽃시장은 6시에 열고 20분이면 닿는다.
그런데 대목이 끼면 5시에 출발해도 자동차를 세울 자리는 넓고 거대한 차고마다 겨우 몇 개 밖에 안 남는 형편이다.
비가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내가 막시와 함께 가면 가족은 안 가도 되지만, 다른 기사와 갈 경우 구입하는 꽃마다 나와 가족이 모두 옮겨야 한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은 마르가리따라고 먼저 관등성명(官等姓名)을 알리고 나서였다.
그는 싱긋 웃더니 윈도우 와이퍼가 부지런히 작동(作動)되고 있는 차창(車窓)의 김서린 부분, 그러니까 백미러 바로 옆에 한글로 '엘로이'라고 왼손의 검지를 사용하며 써냈다.
현지인들은 대다수가 왼손잡이들이다.
"한국어를 배웠어요?"
"아뇨. 이름만 쓸 줄 알아요."
"이름만이 아니고 이름도 쓸 줄 아는군요?"
그는 자동차가 꽃시장을 떠나올 때, 꽃이 너무 많다고 내 가족은 택시 타고 따로 가야한다고 주장(主張)하면서 사무실의 밤 당번 관리인인 다미안에게 쪼르르 전화해서 일일이 보고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일러바치기만 좋아했지, 다미안이 항상 내 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틈을 비집고 가족이 차에 탔음을 알자, 그는 지나치게 놀라고 있었다.
"당신에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내 가족은 말라깽이고, 그리고 우리 한국인은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떤 어려움이나 틈새도 비집고 들어가는 선수들이죠."
"하하 하하하하."
그에게서 경쾌한 웃음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 나는 불쑥 물었다.
"애인 있어요?"
그는 이번엔 언제 커다랗게 웃었더냐 싶도록 실실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없어요, 애인."
비는 그치는 일을 잊었다는 듯 연거푸 내렸고, 그는 히터를 아끼려는지 아니면 내가 히터 켜는 걸 싫어하는 정도는 미리 다미안에게 주워들은 사람처럼 유리창을 약간씩 열어 두고 운전했다.
그 열린 창 사이로 빗방울들이 자주 날아들어 내 얼굴을 골고루 적셨다.
"후안 데 가라이로 지나갈래요?
후안 데 가라이 대로(大路)는 일방통행이고 신호가 일사불란(一絲不亂) 잘 연결되어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는 길이다.
4Km 남짓의 거리를 막힘없이 달릴 수 있는 길.
나는 막시에게도 언제나 그 길을 이용하도록 이미 오래 전부터 미리 지시해 두었었다.
논스톱.
계속 파란불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 길을 즐겨 지나다닌다.
후안 데 가라이…….
모임의 S여인이 이민 왔던 맨 처음에 도무지 그 길의 이름이 외워지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후안 대가리라고 기억했었다는 거리.
나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한국어로 이름이라도 쓸 줄 아는 그에게 괜스레 고마웠다.
그 역시 더 이상의 말은 됐다 싶었는지 음악을 틀었다.
한국가요였다.
아마추어 수준의 아주 못 부르는 음색이었다.
나는 한국가요를 잘 안 듣는다.
특히 정오(正午)부터는 더 안 듣는다.
저 혼자 입력되어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흥얼대기 때문이다.
나는 새삼 희망하게 된다.
나도 안 듣는.
나도 못 들어 본.
나도 가까이 하지 않는.
그러한 한국가요를 단지 고객을 위해 준비하고 틀어주는 엘로이의 앞날에 밝고 환한 축복 있으라!!!
그가 어찌하여 레미세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꼭 성공적인 삶을 초대할 것만 같은 예감이 앞선다.
오가는 값.
기다린 값.
나는 그가 부르는 차비보다 훨씬 더 얹어 주면서 잊지 않고 내 특유의 농담을 건넸다.
"택시보다 엘로이의 차를 더 좋아 해서 가족이 끼어 탄 차비까지 더 얹은 값."
비는 여전히 퍼붓고 우리가 탄 엘로이의 자동차는 Chacabuco 공원 앞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옆 차의 조수석에서 현지인 청년이 내리더니 애인이 운전하는 차의 앞 범퍼 위에 하트모양을 역시나 왼손으로 그리고 떠나갔다.
애인은 그제야 우산을 펴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미소 가득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내 나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싱그러운 장면들과 사실들에게 감동되고 매혹을 느낀 탓에 지금껏 남의 나라에서 잘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금요일이던 봄의 날.
그리고 토요일에 있었던 H교회의 결혼식꽃.
인생사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 큰일들은 항상 겹치고 겹친다.
일 년 중 가장 꽃값이 비싼 시기(時期)인데도 어디서 그렇게 나타나는지 많은 우리의 한국인 청년들과 어느 정도의 현지인들을 만나보는 날.
무척 고달프면서도 참으로 감격도 되는 날.
봄의 날.
몹시 힘겨워 그걸 만든 사람을 원망하면서도 그걸 만든 사람과 내 고객들에게 새록새록 감사하게 되는 날.
나어린 친구 수산나에게도 일을 도와줘 감사했다고 따로 짚고 싶은 날.
외갓집에서 출생하여 이름의 앞에 외자가 붙는 다른 친구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어머니 날에나 제대로 돕겠다고 했던 날.
나는 며칠동안 지독하게 춥고 열이 많고 그리고 음식마다 모두 쓰디쓴 맛의 감기를 앓는 중...
2012년 9월 18일 화요일
봄, 봄이다
맹하린
폴더를 열거나 클릭 할 때마다 바이러스의 침투를 알리는 경고음이 사이렌처럼 잦게 울리고 있다.
바이러스의 침입이 있었지만 해결했다는 알림과는 또 다른 느낌의 경고다.
그런 와중에서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중국의 어선들이 센카쿠 열도로 몰려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5성홍기(五星紅旗)까지 매단 점으로 봐선 심상찮은 결집(結集)이다.
마치 고전을 최신식으로 편집한 현대판 삼국지를 접하는 기분이다.
세상의 모든 정치메니아들은 때로 결집을 시도하고 실행하는 일에 과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폭풍도 대단한데 4개의 폭풍이 겹친 한국의 태풍 역시 대단한 위세였다고 본다.
차분히 바이러스를 몰아내고 흔쾌히 다른 창들을 다시 깔고 지울 것 지우자, 더 빠른 속도로 새로워진 컴퓨터.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일주일 내내 비는 안 내린 찌푸린 날씨다.
이윽고 봄비의 속삭임...
이쯤해서는 까무룩 빠져드는 노동이 유일한 소통이다.
언제나 기다림을 깨우치던 산책로는 풍경이 풍경을 할퀴거나
풍경이 풍경을 토닥이고 있다.
봄날의 출산을 치마폭 가득 감싸 안고 쩔쩔대며 진통 중인 하늘.
등에 영원의 낙엽 한 장씩 키우며 입어냈을 사막거북이 두 마리 사기로 했다.
쇠와 금이 엇갈린 빛의 잎이며 등이고 망토다.
한 마리의 외로움 보다는
두 마리의 외로움이
나와 간격을 두고 지탱해 줄 것만 같다.
때로 나는 하얗고 사소한 상념의 음표를 쉬엄쉬엄 그려낸다.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에 연초록 잎들이 먼저 화답하는 계절이다.
봄은 이미 당도(當到)에 이르렀다.
고요를 품었으나 전진(前進)하는 봄!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사진을 보며

그대는 나를 장한나 닮았다고...

내 양옆에 송태일과 송주은...

문협 여류들과...

문우 S여사와

문협 막내 정은님과 야유회에서...

나는 때로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도 입는...

문협 여류들과, 그리고 내가 아낌없이 꽂은 꽃...

내 문우 S여사와...
맹하린
내가 네 살일 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서울에 가셨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던 평소의 뜻을 그런 식으로 실행하신 셈이다.
나는 안 보이는 주머니 속에 넣어져 아버지를 따라 난생 처음 서울 나들이를 했다.
전주와 이리 사이에 있는 백구면 시골뜨기의 첫 서울 나들이였다.
아버지가 요절(夭折)과 같은 운명(殞命)을 하시자, 고무부가 아버지 이상으로 나를 예뻐 하셨다.
지금은 백석대의 음대학과장으로 있는 고모의 딸 송주은과 함께, 나는 서울 나들이를 고모부와 다시 해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할머니 역시 절에 갈 때나 이리와 전주로 제수(祭需)장을 보러 다니실 때 마다 꼭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오빠는 너무 컸고, 동생들은 너무 작아서였다는 게 첫 번 째 이유였지만, 내가 가장 데리고 다니기에 만만했던 것 같다.
나는 운명론자다.
그런 저런 일들 모두 각각 다른 부피의 에너지가 되어, 나는 어쩔 수없이 글쟁이나마 되었을 것이다.
며칠 전 , 내 고객인 Arquitecto(건축 기사) Kim이 부친의 팔순인 금요일에 필요한 사방화를 꽤 값비싼 가격으로 맞추고 갔었다.
어제 나는 꽃다발 7개까지 나의 선물로 준비하여 동시에 납품을 했다.
Arquitecto Kim이 누이가족은 물론이고 자녀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가서 부모님께 드리라는 의미에서였다.
새삼 고국의 가족들이 생각나 사진을 꺼내 보며 내 지난날들을 그립게 떠올렸다.
고모 내외는 물론이고 가운데 서 있는 오빠도 보고 싶었다.(내 중학교 졸업사진이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사색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에 지금은 거의 밝게 산다,)
오빠는 요즘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에 그토록 즐기는 등산도 접었다는 소식이다.
고모부의 조카인 내 친구 송경수도 그의 엄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모는 그 무렵, 맏동서인 송경수의 엄마에게 두루마기와 숄을 선물했었다.
이리고등학교 교장이던 송경수 아버지의 봉급으로는 네 자녀 뒷바라지가 빠듯하리라는 걸 고모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본다.
얼마 전 나보다는 연상이지만, 문우인 S여사와 까페떼리아 "셀레스테(파랑)"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피부가 뽀얗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그분은 사진을 정리하다 나오셨다고 말했다.
주위사람들이 자꾸만 예고도 없이 떠나므로 뭐든 정리하게 되더라고 했다.
옛 사진들을 그래서 더욱 다시 꺼내 보게 된 나지만, 나는 아직은 뭐든 정리하기가 싫어서 마구 어지럽히며 살고 있는 편이다.
정리 좀 해야지 그렇게 중얼대면 가족이 나를 은연중에 두둔해 준다.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사시면 돼요. 워낙 예외적인 존재시니까요."
그렇다.
아직은 사진을 정리하느니 사진만 바라보게 된다.
나의 나날은 하나하나의 독립된 나들이다.
현재의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와 고모부를 따라 나서지는 못하고 있지만, 내가 나를 데리고 다닌다고 보여진다.
최근의 나는 일주일 후에 떠나게 될 문협의 소풍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 안에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높다랗게 내 앞에 쌓여 있는 형편이다.
사진을 보며
사진이라도 보며
나는 나를 휴식시키고 있다.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Los manteros(좌판 상인들)
맹하린
나의 행동반경(行動半徑)은 내가 생각해도 뻔하고 빈약한 편이다.
한인 타운에 위치한 집과 가게와 이웃과 산책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약간 멀리 떨어진 꽃시장과 어쩌다 안 바빠야 나가는 성당 정도가 내 활동영역의 전부가 아닐까 여겨지게도 된다.
더 있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나가는 세 개의 모임.
내가 만나는 사람 또한 뻔하고 뻔하다.
그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족이다.
그러니 내가 꽃 이야기나 가족이야기를 거의 안 해야겠다는 각오를 강하게 굳히다가도 자주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나의 취약점 중의 취약점일 것이다..
엊그제는 냉장고 속의 꽃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거의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가는 꽃시장을 세 번째로 갔다.
리시안뚜스와 재스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현지인이며 40중반인 마우리시오가 내게 질문도 아니고 불만도 아닌 얘기를 불쑥 토로(吐露)하고 있었다.
"마르가(마르가리타의 애칭), 그저께 퇴근길에 우리 동네 야채가게에 들렀어요. 미 에스뽀사(나의 아내)에게 과일을 좀 사다 줄 생각이었죠. 그런데 무슨 놈의 야채가게라는 게 꽃나무 몇 개와 꽃 몇 묶음까지 갖다 놓고 파는 거 있죠? 내가 미칩니다. 내 얘기는 무슨 볼리비아노(볼리비아인)들이 감자나 제대로 취급하지 않고 꽃까지 파느냐는 겁니다. 내가 듣기로는 아베쟈네다 거리에 가면 수스 바이사노스(당신 동족들)마다 걔들 때문에 아예 골머리를 싸매고 산다죠? 이러다 의류도매상이고 꽃시장이고 모두 볼리비아노들 차지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이 꽃시장만 해도 그래요. 걔네들 좌판(坐板)이 얼마나 날이 갈수록 많이 늘어나는 중입니까? 자고새면 늘어나지 않던가요? 아니죠, 이런 식이라면 아르헨티나, 이 나라가 머잖아 볼리비아노들 세상이 될 것만 같아요."
꽃시장에 가면 느긋하게 수다까지 나눌 만큼의 시간적 여유라고는 없는 나인지라 하하하 웃기부터 해내고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는 걸로 대답을 마친 후 속히 다음 코스인 라파엘의 가게로 성큼성큼 이동하게 되었다.
그냥 나오기 뭣해서 마우리시오의 가게를 나오며 남긴 내 대답은 너무나 간결했다.
"우리가 볼리비아에 가서 좌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참읍시다. 까이꺼! 아셨죠?"
라파엘은 일본인이다.
50초반쯤으로 보인다.
오사카 출신의 2세일 것이다.
매사가 농담 위주인 라파엘인지라 나로선 잽싸고 명쾌하게 잘 받아 넘겨야만 하는 게 관건 중의 관건이다.
꽃값의 거스름을 주려다가도 순식간에 나를 주시(注視)하며 화살을 쏘아대는 그.
"께 린다(예쁘네)!"
그럴 때 나는 멍청하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다음에 당신 부인이 나오면 일러 바쳐도 되죠?"
그의 부인 비비안나는 대목 때나 나와서 거들고는 한다.
글로벌 시대!
꽃시장에도 그런 기류(氣流)가 어딘지 모르게 점차 눈에 띄게 회오리 치고 있는 중이다.
마우리시오의 말처럼 요지(要地)를 벗어난 옆 켠으로 볼리비아노인들 소유의 좌판이 자꾸만 늘어나는 추세이고, 그 진전(進展)역시 상상외의 급격한 속도를 가하고 있다.
공생공존(共生共存)이라는 말이 피부 위에 들러붙는 느낌이고, 실감까지 되어지는 시절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크리스티나는 3선을 겨냥하고 투표연령을 16세부터 가능하도록 바꾸는 법안을 상정(上程) 중에 있다고 한다.
16세...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투표를 하기에는 어쩐지 부족한 나이가 아닐까.
왜냐하면 어른들조차 투표를 군중심리에 치우쳐 해낸 뒤,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이나 목격했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더 많은 인접국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지도 모른다.
느닷없는 사면령을 내려 인접국 사람들 너도나도 영주권을 낼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오나가나 인접국 이민자들이 판을 치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좌판을 깔아대고 있다.
모포를 깐다는 데서 유래(由來)한 좌판쟁이들인 것이다.
한국도 인접국 일꾼들이 몰려들기는 한다지만, 이 정도로 물불 안 가리고 시장경제를 잠식하려고 들지는 않는다고 본다.
언젠가도 짚고 넘어 갔지만, 우리 가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 하던 볼리비아나 그라시엘라는 30도 안 된 나이에 정식고용을 기피하는 술수에 대단한 기지와 능란함을 보이고는 했다.
여러 한국인들 가게나 집의 시간제 청소부로 일하면서 정부가 내어주는 보상금마다 알뜰살뜰 모조리 포식(飽食)하는 과정(過程)을 매우 과학적이다 싶게 탐닉하고 있는, 너무도 영악한 여인이었다.
어느 날은 내게도 신청을 왜 안하는지 이해가 안된다면서 간곡히 권유까지 했었다.
남편의 병환보상비, 아들의 학비보조금, 어쩌고 저쩌고...
나는 그때 난생 처음 사용하는 말을 속으로만 답했었다.
(누굴 뭘로 알고!)
볼리비아인 들을 제품공장의 일꾼으로 고용하는 친구 수산나가 얘기하던, 그들에 대한 명칭이 새록새록 부각(浮刻)되는 작금(昨今)이다.
"우리끼리 사용하는 걔네들에 대한 호칭을 자주 바꾸게 돼요. 볼씨라고 하면 벌써 알아듣는 눈치라, 지금은 산동네 애들이라고 바꿨어요. 그런데 산동네 애들이 점점 좋은 차들을 소유하며 부자가 되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한국인을 앞서는 면도 많아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일감을 그대로 카피해서 우리보다 싼값에 해치우는 그들이거든요. 우린 결국 유럽이다, 미국이다, 한국이다, 브라질이다를 휘돌고 다니며 최신식 모델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상납한 결과가 된 거죠"
나는 뜬금없다는 듯 불쑥 대답했다.
"머잖아 우리는 산동네 애들을 이 나라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일이 생기겠군요?"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다가오고 다가오던 등불들
맹하린
36개의 벽에 거는 꽃다발.
52개의 식탁 꽃.
8개의 메인식탁에 올리게 될 사방화.
6개의 꽃길기둥.
위와 같은 내용(內容)의 완성된 꽃 장식들을 싣고 J교회 수양 관에 위치한 결혼식 Fiesta(파티)장소에 갔다.
현지인 기사가 운전하는 트래픽을 이용한 길이었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7Km 떨어진 지역이었다.
수도(首都) 9 de Julio 거리에서 0Km로 시작되는 기준이기도 했다.
스승의 날, J교회에서 열리는 36인의 임직식 등의 큰 행사들이 금토일월 4일 동안에 걸쳐 여럿이나 겹쳐 있었다.
보름 간격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있으면 적당하고 고마웠을 행사들이어서 정신적으로 많은 압박감이 있었다.
주말이었는가 하면 주말의 시작이기도 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짐차를 이용하고 싶어서 전화로 장소와 날짜 등을 알리는 메시지도 남겼고, 전화를 여러 번 해도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다른 일이 예약된 상태인가보다, 그런 판단이 생겨 항상 이용하던 현지인 운송회사에 다시 연락을 취했다.
J교회 수양관은 천주교 피정의 집이나 다른 교회들의 수양 관에 비해 매우 현대적이며 가장 첨예로운 데다 특별하고 다양한 시설을 골고루 구비한 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축구장, 수영장, 교회, 각종 강의실과 기도실, 식당 , 정원등이 광활하면서도 깔끔함 그 자체처럼 돋보이고 있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꽃장식에 소비된 시간만 한 시간도 넘게 정신을 쏟은 셈이다.
돌아오는 ruta(고속도로)에서 피로감이 단박에 달아나던 , 나는 시야 가득 등불을 담아내기도 하고 닮게도 되는 광경을 꽤 오랫동안 주시했다.
라플라타(은빛)도시에서 열리는 축구대회를 향해 맞은편에서 1분도 쉬지 않고 멈춤 없이 달려오는 승용차들, 그리고 응원단들을 실은 버스들을 거의 한 시간 이상이나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괄목할 만한 사실은 현지인들은 10년된 차는 기본으로 알고 있고, 20년쯤 된 차까지도 너끈히 몰고 다니며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들과 기사, 두 사람은 초반부터 동시에 합창을 했다.
“우와, 오늘 라플라타 시에서 있는 벨레스와 에스뚜디안테스의 축구시합!”
각종 크고 작은 차들이 모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우리의 왼 켠으로 수없이 다가오고 다가왔고 그리고 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 기둥으로 화할까를 염려하는 사람처럼 뒤를 돌아 본 일은 없어서 그렇게 다가 온 차들이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선 잘 모른다.
응원단의 대표나 주역들은 마피아들의 손아귀와 악력(握力)에 개입되어 쥐락펴락 조정되고 있는 현실을 결코 외면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라선지, 응원단들이 탄 버스들의 선두(先頭)마다 필수적으로 경찰차들이 진두지휘하듯 앞장섰던 행군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지방 도시들은 대낮에도 헤드라이트를 켜야 된다는 교통법규 때문에 자동차들마다 두 눈에 등불을 켜는 의무와 책임을 철저히 실행하는 중이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 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된 법령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방도시들은 그러한 법제정 후, 교통사고를 눈에 띄게 극소화 했다는 칼럼을 언젠가 읽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나 많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자동차들의 행렬과
그처럼 많은 헤드라이트의 다가옴을 뒤늦게나마 접하고 보아낼 수 있어서 나는 내내 감동의 연속상태에 잠겼던 것 같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축구장을 가득 메워 백만이라는 관중의 숫자를 기록하는 거라고 아들과 현지인 기사는 서로 죽이 맞아 신나게 얘기의 꽃을 피워 냈다.
응원단끼리 싸움이 나서 인명피해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도 뒤따랐다.
아르헨티나 유명 사회자인 띠넬리의 별장이 맞은 편이라는 설명도 내게 전해졌다.
별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성채(城砦)였다.
아르헨티나가 진정 불경기의 여파에 시달리는 중인지 전혀 실감이 안 나던, 아르헨티나는 과연축구의 나라인 게 확연한 사실을 눈으로 재확인 하듯 1시간 정도 지켜보면서 나는 내 활동영역의 본거지인 가게에 5시쯤 돌아왔다.
인간은 6백만 정도의 어휘를 구사(驅使)할 수 있으며 그러한 언어구사 능력은 이렇다 할 노력이라거나 의식적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 자연적인 팔다리의 자람과 다름 없이 언어 능력 또한 자연발생한다는 연구를 설파한 언어학자가 있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많은 부분을 그 많은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등불에 쏘이고 돌아왔다고 자인하게 된다.
누가 뭐라 해도 길고 말 많고 가끔은 오타도 생길 수 있는 글들을 영원에 이르기까지 써낼 생각이다.
나는 마치 언어들마다 두 손 가득 받아서 마음 깊숙이 재워둔 사람처럼 새삼 든든해 있다.
2012년 9월 6일 목요일
물 끓이기
-정 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하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2012년 9월 4일 화요일
2012년 9월 3일 월요일
예쁘다!
맹하린
나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다운될 때가 아주 가끔 있다.
그럴 때 나는 그 뚝 내려간 기분을 맘껏 누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걸 누리기 거추장스러워지면 기분을 회복할 만한 건수(件數)를 찾는다.
남편이 내게 했던 매우 짧은 말 또한 나를 혼자서도 잘 웃게 만드는 건수(件數)다.
1987년도였다.
친구 H가 전화를 해왔다.
그 친구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지만, 아르헨티나 교민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온세 지역에 의류도매상을 차렸던 친구다.
유태인들이 판을 치던 상가(商街)지역이었다.
가게의 이름은 신세계였다.
두 번 째가 파고다.
세 번 째가 세 오뚜기.
공교롭게도 셋 다 성당 교우였고 셋 모두 나와는 친구사이였다.
나도 참 대단하다.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놀고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친구들 속에서 물질의 유혹에 초연했으니.
물론 나도 장사라는 걸 하고 싶었었다.
그런데 남편의 반대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고집은 아무도 못 이기는 질김이 강해서 나는 계속 백조 생활을 유지하며 성당에서 친구들과 여러 봉사(奉仕)활동을 했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따로 만나며 재미있게 잘 지내는 일에만 흡족히 여겨야 했다.
그때 남편은 현지인을 상대로 침술치료를 했는데 , 온 가족이 매달려 해내던 웬만한 제픔공장보다 나은 수입이었다.
지금도 그가 남긴 노트를 보면 현지인 환자들의 수가 몇 백 명이 넘는 걸 보게 된다.
남편은 이민지에서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많은 걸 배워 왔었다.
침술 역시 그렇게 시작된 거였다.
그렇지만 나는 환자를 다루는 그의 이민지에서의 직업이 항상 마음에 안 들었다.
장사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었었다.
H는 그때 하루에 들어오는 판매액이 70x100의 검은 봉지에 가득이었다고 한다.
입금할 때마다 지폐의 앞면을 같은 방향으로 정리해야 받아주는 현지 은행의 규칙에 맞추느라 한국 청년을 고용해 그 일을 전담 시켰을 정도였다.
나중엔 Tortuga(거북이)라는 식품도매상도 차리고, 9 de Julio거리에 전자제품대리점도 차렸지만, 그때 당시의 현지사회 정책과 특성은 그랬다.
어느 정도 키운 다음에 더 이상 못 크도록 세금을 왕창 때리는 방식 말이다.
H의 친정 부친 최재학옹과 파고다 L의 시아버지 한석호옹은 우리의 한국학교를 세우는데 물질적 후원을 아낌없이 베푼 입지전적 어르신들이시다.
파고다는 지방도시에 방직공장을 차린 지 20여년도 더 되었지만 골치가 좀 아픈 공장과 다름 아닌 것만 같다.
엊그제 포스팅 했던 P방직회사의 L이 골프는 프로급인데 만날 어디가 잘 아프고 울적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툭하면 고소(告訴)를 밥 먹듯 , 유행처럼 가까이 하는 현지인 기술자나 종업원들이 한두 명이 아닌 것이다.
아예 변호사들이 가방을 들고 찾아 다니며 고소를 부추긴다는 현상에 만연돼 있는나라라고 한다. 이 나라가...
그런 고질적 병폐(病弊)에 허구한 날 고민과 고통을 반복 했으리라 .
세 오뚜기의 J는 세 아들을 모두 미국에 보내고, 미국에 아주 간 것도 아니고 안 간 것도 아니게 자주 왔다 갔다 한다.
살기는 이 나라가 좋다고 이 나라에서 많이 지낸다.
온세 지역에 가게를 여럿이나 소유한지라, 유한(有閑)한 나날들을 보내는 셈이다.
분명한 것은, 큰돈을 만지는 사람들도 작은 돈이 궁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이 말은 가진 사람들에겐 푼돈도 귀하게 다뤄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가끔 그 세 친구들 중 누가 더 성공했고, 누가 더 현명했고, 누가 더 이 나라를 아꼈을까를 묵상해 볼 때도 어쩌다 있다.
답은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이므로.
사실은 나를 그 세 사람과 함께 또 다른 , 나라는 다른 한 사람을 더 추가해서 묵상하게 되는 문제가 문제다.
얘기가 다른 쪽으로 흘렀다.
어느 날 H가 전화를 해왔다.
그녀는 하루에 한번은 기본이고 하루에도 여러 번 내게 전화를 해와 온갖 얘기 모두 털어 놓기를 일과처럼 해냈다.
금방 전화를 끊고 잊어버린 말이 있었다면서 다시 전화를 하는 경우도 참 많았다.
한국교민 중 가장 최초로 의류도매상을 달성하는 일은 거저 하는 일도 아무나 하는 일도 아니었나 보았다.
그녀는 초창기에 재단사도 안 두고 남편과 둘이서만 많은 양의 천을 재단대 위에 깔면서 직접 재단하고 묶고 바느질집에 보내고 하느라 디스크라는 병을 얻었다.
나와 쇼핑 Jumbo에 가면 구입한 식품들을 바울에 싣는 일은 내가 다 도와야 했다.
왜냐면 나는 힘이 좀 센 편이고 나는 누구를 돕는 일을 좋아 했고, 특히 나는 누가 아파서 쩔쩔 매는 모습은 못 보니까.
그녀는 1.5리터의 물병조차 버거워 한 적이 많았다.
얘기가 또 딴 데로 흘렀다.
나는 가끔씩 딴 데로 흐르는 얘기를 잘하는 사람 맞다.
어느 날 H가 전화를 해왔다.
머리 스타일을 좀 바꾸고 싶은데 미장원에 함께 가자는 얘기였다.
한인 타운에 소재한 미장원에 가서 그녀는 파마를 하고 나는 한국에서 공수 해 온 여성동아나 여성중앙들의 잡지를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그 무렵에도 나는 생머리를 선호했고 미장원은 1년에 한번이면 만족이었다.
그녀의 파마가 끝난 후, 호세 마리아 모레노 거리 에스끼나(모퉁이)에 위치한 , 전면이 통유리로 된 대형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또 얘기를 나눈다.
하지만, 아들이 하학하기 전에 집에 돌아온다.
그게 내 나름의 철칙이고 윤리였고 도덕이었다.
그날은 다행히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맘 놓고 다녀왔을 것이다.
저녁 무렵 퇴근한 남편은 대문에서 내 머리를 잠시 지켜보더니 말했다.
슬쩍 스치듯 바라봤다면 말도 안한다.
"예쁘다!"
나는 깔깔 대며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남편 역시 H처럼 하루에 한 번은 기본이고 하루에 두세 번도 내게 전화를 했다.
현지인 환자에게 침을 놓고 잠시 기다리는 중이었을 것이다.
별 뚜렷한 얘기라곤 없었다.
단지 그랬다.
-여기는 지금 비가 내려.
-이곳은 지금 우박이 떨어지고 있어.
-안개가 자욱해. 이 동네는.
전생에 나는 전화국 안내였을까.
그가 습관처럼 집으로 전화를 했을 때, 내가 H와 만나기 위해 외출 했고, 아마 미장원에 간다는 것 같더라는 아들의 대답이 그를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미장원에 다녀왔으니 당연히 머리에 변화를 줬으리라 단정했던 것.
그는 과묵한 편이라 예쁘다는 말을 일 년이 가도 전혀 안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머리도 하지 않고 미장원만 다녀오고도 나는 일 년에 한 번도 못 듣는 느닷없는 칭찬을 들을 수가 있었다니.
여러 번이 아니면 어떤가.
나는 그때 알았다.
머리를 하고 나서 듣는 말보다 머리를 안 하고 듣는 칭찬이 훨씬 값어치 넘치고 재미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고맙다.
아직 못 들어 본 말이 더 있다.
내가 장난이 넘칠 때면 친구나 문우들에게 가끔 하는, 꽤나 짖궂은 말.
"자기야, 사랑해!"
바로 그 말!!!
예쁘다!
나는 오늘도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내게 친구들이 있었기에 고맙다.
생활리듬도 수준도 서로 너무 커다란 격이 생겨 어느 날부터 어쩌다 만나고 있다.
나는 그녀들보다 나은 거라고는 중노동자이고 어느 정도 건강하다는 것 밖에 내세울 거라고는 없다.
특히 그녀들과 잘 왕래를 못하는 건 내가 너무 정의로워서 가끔은 그녀들 앞에서 투덜댄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에서 벌었으면 이 나라에 어느 정도 투자해야지 왜들 재산을 외국으로 옮겨? 그러니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
나의 개성이 바로 그런 면에서 돌출된다.
보통 땐 착한 편이고 수더분한 면이 많고 거의 끝까지 참다가도 대의를 생각하면 꼭 한 마디 던지는 것이다.
내게 예쁘다는 말을 그날 한 번만 했을 정도지만 자주 생각나게 해주고 웃게도 해준 그가 함께 해냈던 날들 역시 고맙다.
예쁘다는 말은 역시나 한 번 들어도 자주 들어도 고맙고 행복한 말인 것 같다.
예쁘다!
좋은 말이다.
참 예쁜 말이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표준형 우울
맹하린
아침은 물론이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인터넷 신문을 펼친다.
Google을 통한 본국 소식이다.
메인 뉴스의 제목이 큼직하게 가장 먼저 부각(浮刻)된다.
좋은 뉴스의 제목들을 단박에 손과 발로 제압(制壓)하고 나쁜 뉴스가 자주 윗자리를 점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며칠 동안 어린아이 성폭행한 뉴스가 커다란 사회적 초점으로 들끓고 있다.
한국이 왜 이러냐.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지탄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다랗다 못해 목쉰 음성으로 변해가고 있을 지경이다.
너무 잦지만 이렇다 할 진전이나 명쾌한 대책이 안 보여 언제나 울분만 터지는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이 그만큼 퇴폐나 죄악에 물들거나 멍들었다는 얘기이고, 사회통념이 많이 일그러졌다는 의미이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표준형 우울을 앓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런 뉴스들이 나오면 애써 외면하고 일부러 작은 뉴스들을 훑는 경향이 많다.
그것들조차 제목만 읽을 때가 대부분이다.
서양(西洋)또한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라고 특별히 비켜 가는 사안은 아닌 것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고 본다.
범법(犯法)행위의 25퍼센트를 성폭행이 차지하고 있는 시점(時點)이다.
주로 가족에게서 많이 당하는 실태(實態)다.
여성으로 태어난 죄(?) 때문에 아빠에게, 삼촌에게, 오빠에게 당하고 당하는 현실이다.
여성이 무슨 죄인가!
사실이 그렇다.
남성이 성폭행을 당하는 예는 전대미문(前代未聞) 아니던가.
몇 년 전 유럽에서 일어났던 스톡홀름 신드롬을 떠올리게 만들던 성폭행범사건을 비웃기라도 할 것처럼 아르헨티나의 지방도시에서도 아버지가 딸을 20여 년 동안 지하에 감금하고 자녀까지 여럿이나 낳았던 사건이 대대적으로 터졌었다.
엄마는 딸이 가출했다고 믿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딸이 몰래 보냈다고 수긍하며 키워낸 사람은 예전에 딸이었지만 엄마가 됐고 아빠의 부인도 되었던 엄마의 엄마였다.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때의 심정이라는 것은 소름 돋는다는 말밖에 더 이상의 표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런 혈통으로 태어난 자녀들은 일생을 어찌 살아갈 것인지…….
심리학자들은 대부분의 성폭행 범들의 범죄동기가, 어려서 유사한 경험에 노출되었던 피해자에게서 생겨난다는 이론을 펴고 있다.
흔적(痕迹)이란 그토록 무서운 자국인 것이다.
원래 나쁜 일에는 시선(視線)을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주의(主義)의 나지만, 사고를 당한 어린이의 이번 일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게임광인 엄마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쨌거나 엄마도 그 어린아이의 가족이며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범인은 본인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아마 그 어린이의 엄마를 빈정거리느라 해낸 역설(?)은 아니려는지?
자녀들에게 일류학교와 최고급 수준의 환경을 제공하는 일만이 최선(最善)은 아닐 것이다.
좋은 표양을 보이는 일에 부모가 먼저 솔선수범(率先垂範)해야 한다.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빠도 하루에 한번 이상 자녀를 포옹해 주기 바란다.
성인(成人)이 되고 나면 그 포옹이라는 게 일 년에 생일이나 축하할 일로만 좁혀지게 된다.
어려서 해냈던 아주 간단하면서 시간이나 재물도 안 드는 포옹이, 때로 내 자녀에게 눈에 안 보이는 세상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는 것을.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도 지침(指針)이 되어 주는 것을.
내 자식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풍토가 하루 속히 싹트기를 바라게 되는 간절한 염원을요즘 들어 특히 더 많이 하게 된다.
이러다 인간성이 멸종되는 세상이 도래하지나 않을까 겁나는 문화과도기적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전생이 아니라 이생에 매달린 거푸집들이 점차 푸석해지고 있지나 않은지 엄마들마다 새로이 각성해야 한다.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인류는 세속적인 억압과 범죄의 잔혹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견디어 나가는 양상이다.
물질문명은 발달했으나 몰지각한 범죄자들이 만드는 여러 위협적인 경계(境界)로 인해 세상은 자주 야만(野蠻)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소실점(消失點)들이 소실(消失)로만 흐르는 세상임을 모르지는 않으면서도 우리는 너도 나도 외면을 밥 먹듯 하며 살고 있다.
인권보호라는 말은 정치를 향한 정치를 위해서만 주창(主唱)되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외면이 부끄러워진다.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
우리의 2세나 3세들에게.
*스톡홀름 신드롬
-워키백과에서 펌-
용어의 기원
이 용어는 1973년 8월 23일 부터 8월 28일까지 스톡홀름 노르말름스토리(Norrmalmstorg)의 크레디트반켄(Kreditbanken) 은행을 점거하고 은행 직원을 인질로 잡았던 노르말름스토리 사건에서 이름을 따왔다. 인질들은 범인들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워졌고, 6일 동안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났을 때에는 인질범들을 옹호하는 발언도 했다. 범죄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닐스 베예로트(Nils Bejerot)가 뉴스 방송 중에 이 현상을 설명하면서 최초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유명한 사례
• 미국의 언론 재벌 허스트 가문의 큰 딸 패티 허스트는 19세이던 1974년 2월 급진적 좌파 도시 게릴라 공생해방군(共生解放軍, Symbionese Liberation Army)에 납치되었으나, 납치범에게 감화되어 2개월 뒤 공생해방군의 샌프란시스코 은행 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패티 허스트가 1975년 9월에 체포되었을 때, 변호사들은 패티 허스트가 스톡홀름 증후군 때문에 범죄에 가담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9년 2월에 지미 카터 대통령이 형량을 줄여주었고, 2001년 1월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면을 받았다.
• 엘리자베스 스마트라는 소녀는 정신이상자에게 납치되어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성적 학대를 당하고 부인 행세를 하도록 강요당했다. 스마트는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에서 여러 달 동안 범인과 노숙을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신체적 구속이 전혀 없는 상태였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계속 범인과 같이 생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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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축구선수 메시가 이 가수의 노래를 엄청 좋아했다고 합니다.
맨 처음 축구협회에 선수 이름을 등록할 때, 원래는 레오넬이던 이름을 리오넬로 등록헸기 때문에 엄마를 깜짝 놀라게 했다네요.
메시 선수 너무 멋집니다!!!
예술을 알아요. 메시 당신은!!!
2012년 9월 1일 토요일
평범 속에서의 진리(眞理) 껴안기
맹하린
왼손의 검지(집게손가락)에 장미가시가 콕 소리가 날 듯 박히더니 끝이 부러지면서 급격한 염증을 위협적으로 몰고 왔다.
족집게로 꺼내려 해도 계속 아프기만 했고, 어디로 숨었는지 도저히 흔적도 안 보인다.
어느 드라마에 나오던 대사가 불현듯 떠오르던 순간이었다.
-릴케인지 부케인지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다는데…….
릴케도 부케도 못되는 내가 장미가시에 찔려 보름 이상 죽을 고생이다.
성질머리가 괴팍스러워 병원조차 가기를 꺼리고, 혼자서 의사와 환자와 간호사를 모두 도맡아 하는 모습, 내가 보기에도 자만이 지나치다.
그렇지만 이러는 나를 내가 싫어하면 누가 좋아 하겠는가.
이런 줏대가 있어서 그나마 글에 대한 열정을 못 버리는지도 모른다.
내 생업이라는 게 주로 물을 많이 만지는 분야라선지 나을 만 하면 상처가 덧나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
적절하다는 약마다 바르고 먹고 뿌리고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데 상처 부위는 결코 만만치가 않은 태도 일색(一色)으로만 나간다.
자연을 좋아하는 취향이라선지 그동안 내 피부는 다쳐도 회복이 매우 자연스러웠고 빠른 편에 속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득도(得道)같은 걸 서넛이나 껴안게 되었다.
상처는 더 많이 부딪치고 더 자주 덧나고 더 특별하게 아픔이 겹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의 손은 수도 없이 사물이나 사람과 부딪친다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상처가 없을 경우 그러한 상황에 맞닥뜨릴지라도 전혀 안 아프거나 아픈 것 같지도 않게 아프거나 그렇게 잘 견디며 지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또 있다.
돌팔이가 사람 잡는다는 것.
어서 곪아 버리고 어서 아물어야 하는데 곪기도 전에 아물리는 일부터 생기도록 일을 어렵게 만든 나라는 돌팔이.
쿡쿡 쑤시거나 빨갛게 붓고, 볼펜모양의 사혈(瀉血)침으로 여기저기 피를 빼주면 색깔이 과연 가관(可觀)도 넘었다.
그제부터 과감하게 일일밴드조차 다 팽개치고 저 혼자 이겨내라고 방치하기 시작했다.
(까이꺼, 죽으라면 죽지 뭐.)
손가락 하나의 문제가 보름동안이나 그토록 온 정신을 헤집는 경우는 보다보다 첨이다.
아니, 가시 하나.
아니지 , 가시 반 토막이....... .
그런 와중(渦中)에도 내 장난스러움은 변화를 몰랐다.
어제 아침 가게를 열기도 전에 P방직회사의 H회장이 전화를 해왔다.
"꽃집이죠?"
그렇게 묻고는 계속 망설이고 미안해하며 바다가게의 전화번호가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가게의 전화번호를 내게 묻는 일이 매우 허다하다.
찾다 못 찾아서 그렇겠기에 나는 매번 친절하게 답해 준다.
나는 그분이 덜 미안하시라고 마침 외우고 있는 번호라서 굳이 찾을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편하고 쉽게 알려 드렸다.
그분의 아내인 이안나는 내 또래이고 한 때 같은 골프동아리였고 해서 당연히 그녀의 근황(近況)을 물었다.
"예쁘고 사랑스런 나의 안나는 잘 지내나요?"
"하하하. 안나가 있잖습니까? 운동하고 귀가하다가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넘어졌어요. 며칠 됐네요. 무릎이 금갔다고 합니다. 몸이 약하니까 깁스가 무거울 거라면서 독일병원 의사가 무릎에만 대는 단단한 깁스를 해줬어요. 두어 달 고생할 거랍니다."
"저런요! 빨리 회복하기를 바란다고 전해 주세요."
H회장은 전화를 끊으면서 다시금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있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이웃에 있는 가게일 것 같아서."
"왜 그런 걱정을 하세요? 이렇게 문의하실 날이 있을 것만 같아 미리 외워 둔 번호였는데요?"
"하하하."
"전화번호 정도야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이 기억하고 있어요. 언제든 다시 물어 보세요."
"하하하."
나 역시 안 웃을 수는 없어 함께 웃으며 무선전화의 붉은 칸을 가볍게 눌렀다.
그런 과정에서도 나는 글을 써냈다.
어찌됐건 내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였다.
죽음 얘기만 나오면, 눈 버렸군! 어쩌고 질색하는 내 그대들이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한편으로는 통쾌하다.
가끔은 골탕을 먹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새삼, 왼손의 검지가 저를 지켜보는 나를 올려다보는데 어째 날씬해 보이고 더할 나위 없이 씩씩해져 있다.
우디 알렌이 감독한 영화 "파리의 새벽"을 보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주인공이 과거를 넘나들며 헤밍웨이와 위대한 게츠비를 써낸 작가 피츠제럴드와 피카소 등을 만나는 장면을 접하며 어리둥절했던 것처럼, 나는 황당한 표정의 나를 내 왼손 검지에게 들키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 영화 보면서 영화광팬이며 내 사부(師父)도 되는 아들에게 펀치를 먹듯 당하던 퉁박이 떠오른다.
"대체적으로 좀 어렵다 싶으면 이해를 못한다는 점, 아세요? 문제는 문제네요. 스릴러나 좋아하시고."
"스릴러 좋아 한다는 얘기는 네 부친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거든? 다른 평 해주면 고맙겠다. 그리고 그 대체라는 게 그렇더라. 명화라는 것들이 가끔은 적응불가(適應不可)! 그리고 집중난감(集中難堪). 너, 그거 알아?"
결과적으로 물의 표면에 부상(浮上)하듯 정확한 원인이 떠올랐다.
9월에 치러야 할 두 군데의 결혼식, 봄의 날, 임직식, 등 겹치고 몰린 일들 때문에 정신적 압박감을 꽤나 받고 있는 터수였다.
어서 빨리 나아야 한다는 궁리에만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리만큼 약을 자주 그리고 많이 발라 주다 보니 생긴 후유증이었다.
시한부 질병으로 진전됐나 했었다.
그동안 싼값에 구입했어도,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완전히 무시했던, 나름대로 아껴 입던 옷들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당의 이웃돕기 모임인 빈첸시오 봉사위원에게 전화를 하리라는 작정까지 굳히며.
(오! 나의 이 끝 모를 상상력.)
약간의 통증을 동반(同伴)하고 있지만, 내 손가락은 다시 살아난 모양이다.
나 또한 살아났나 보다.
분명한 것은 나라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옆에 끼고 산다는 것.
내가 나를 지나치게 혹사(酷使)하지는 말아야겠다.
애착(愛着)이라는 이름의 아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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