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우리 이민자들 아들은 친구가 열 명도 더 되었지만, 그룹처럼 모이는 친구들은 딱 열명이었다. 대학 때 하나 둘 미국으로 유학들을 떠나더니 이곳에서 결혼하면서 남은 친구들은 반으로 줄었다. 전산과를 마치자마자 디스코라는 쇼핑센터에 취직했던 아드리안이 가장 친했던 친구다. 한달에 한 두번 극장에 함께 가고 밤 서너시경 집앞까지 데려다 주던 친구였다. 아드리안이 결혼하여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나자, 아드리안이 하던 일을 알베르또가 이어 받은 거 같았다. 이사했다고, 딸의 백일이라고, 생일이라고, 결혼기념일이라고. 알베르또는 틈만 나면 아들을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었다. 나는 아들편에 큼직한 사방화나 꽃바구니를 매번 챙겨 보냈다. 목욜 아침. 알베르또의 아내 지젤라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도매상 하느라 바쁜 데도 알베르또를 묘지가는 편에 보내 줘 엄청 고마웠어. 지젤라!” “안 그래도 저번에 애들 데리고 알베르또와 어머니 가게에 갔었어요. 차를 세우고 내리기 전에 보니까 어머니가 친구들과 즐겁게 얘기하고 계셔서 살짝 왔어요. 다음에 함께 식사해요. 며칠 전 다니오빠(지젤라는 아들을 항상 오빠라 부름)를 꿈에 봤네요. 막 웃고 있는 거 있죠? 천사가 되었을 겁니다. 다니오빠가 천사가 안 되면 그 누가 천사가 될까요?” 아들이 웃으며 꿈에 나타났다는 데, 그런데 나는 왜 지젤라의 그말에 펑펑펑 울어 버린 것일까. 반가웠는지 안도했는지 나도 나를 잘 모른다. 지젤라도 덩달아 울면서 말을 이었다. “더 자주 만날 걸 그랬어요. 밥도 더 자주 해주고 더 많이 함께 지내지 못해 알베르또와 요즘 후회 많이 하고 있어요.” 나는 어제 한국참외 10킬로를 샀다. 커다란 바구니에 정성스레 포장하여 알베르또의 가게 꾸엔까 500대로 배달 시켰다. 이제 아들의 친구들이 내 자식들이 되었다. 나 드디어 자식부자다. 더좀 살아야 할 계제가 생겼다. 방금 정신을 제대로 차린 것처럼은 안 살겠다. 오직 나답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길이다. 그제 아침, 출근하니 전화기가 깜빡였다. 퇴근 후에 누가 전화하면 그런 식으로 티를 내주는 무선전화. 기봉씨 전화였다. “전격적으로 옴부별장에 가고 싶었어, 언니! 가서 하룻 밤 지내고 오려는데, 남편이 그랬어. 맹선선도 함께 가자고 전화하라고.” 핸폰을 가게에 두고 다니기를 잘 해서 연락이 안된 모양이다. 집전화는 아무에게도 안 가르쳐 준다. 되도록이면 깜짝쇼에 어쩌다 휘말리고 싶은 성격이지만, 옴부별장에 다녀 온 이상으로 고마웠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나 이리도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알베르또에 앞서 지젤라가, 기봉씨보다는 그녀의 남편이 더 많이. 우리 이민자들. 아직껏 소박의 대명사다. 보편적으로 때에 묻어 있거나 죄에 물든 모습들이 전혀 아니다. 매우 시골스럽다. 나는 이런 식의 순수함에 매번 감격한다. 어떻게 하면 경제적 기반을 구축할까를 밤낮으로 노심초사 노력하며 살고 있는 아르헨티나 한인사회. 시나브로 결곡하면서도 정스러운 집합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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