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6일 화요일

새틋하게


고객들의 전화는 작업실에서 편안한 자세로 받는다.
하지만 친구나 문우들의 전화면, 나는 무선전화기를 귀에 대고 매장의 출입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간다,
나도 모르는 나만의 행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되어 대기를 순환하듯 절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대형 유리문 앞에서 길 건너에 펼쳐진 중앙분리대의 산책로를 주시하며 한참이나 얘기를 나누고 있는 나를 내가 발견하게도 된다.
내 시야 가득 수령이 백 년도 넘었을 네 그루의 참나무가 꽉 차이게 들어온다.
지금은 가을이라 도토리들이 땅 위에 내려와 편하게 누운 자세로 하늘은 물론이고 그들의 엄마인 참나무를 올려다보는 일이 흔하고 잦다.
새벽에 특히 많지만 하루 내내 한국인들이 도토리를 줍느라 내게 여러 폭의 특별한 그림이 되어 준다.
나는 한 번도 도토리를 주워 본 일은 없다.
자연을 자연이게 놔두기를 즐겨서다.
나의 일상 속에는 도토리를 줍거나, 참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일광욕을 하는 페이지가 없다,
사실성을 거부하는 편이면서도 때로 나는 논리적이고 사실적이다.
지인들이 그렇게 획득한 도토리로 만든 묵이나 전을 가져다 안기는 일이 간혹 있다.
사먹는 것보다 월등한 감칠맛을 지녔다고 여겨진다.
이민자인 내게 그 몇 그루의 참나무는 계절과 날씨와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각양각색으로 제시해 왔으며 언제라도 열정적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나의 그리움조차 나뭇잎들에 얹혀 팔랑였으리.
하루에도 수차례, 참나무와 도토리와 내 동족들을 지켜 볼 수 있어 내 살아감은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하다.
방금, 다섯 살쯤 되는 딸아이를 등에 업은 채 걸어오던 한국인 아빠를 발견했다.
길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도토리 열매들을 요리저리 피하며 우리 가게로 건너오다가, 한국유치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첨 있는 일은 아니나 처음처럼 신선했다.

때때로 광야에 선 것처럼 별빛만으로 더듬더듬 전진을 거듭했던 날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해가 떠도 해가 져도 참나무를 주시하며 서로의 근황을 챙기는 일은 어떤 면으로는 축복,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마흔 무렵일 때의 절망은 긍정과 맞바꾼 일로 가히 충만한 일이 되었을 것 같다.
바람이 불어도 우박이 내려도 겸애를 껴안으며 살아 낼 수가 있어서 그 점이 특히 은혜롭다.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 C다.
나는 무선전화를 귀에 댄 채 매장의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어떻게 지내?"
"여일하지. 물에 흐르듯……."
하마터면 실토할 뻔 했다.
"새뜻하게 지낸다, 왜?"라고...




친애하는 그대 2


                맹하린


나의 그대는 그대가 그대입니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은 내게 커다란 축복으로 다가 옵니다.
나만의 시간처럼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분이 나쁠 필요는 없어서
나는 하루를 최대한의 우호적인 자세로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도 십계명(十誡命)의 핵심(核心)과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하며 지내게 될 것입니다.
최근의 나를 중심 잡도록 붙들어 주는 그대...
친밀한 사람들의 아낌과 함께
당신의 사랑은 내 포켓에 한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관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슬픔의 얼굴을 지닐 때 또한 없잖아 있겠으나
아름다움으로 귀의(歸依)해야 하는
하나의 당위성을 지녔습니다.

어제 오후 2시엔 바쁜 틈을 비집고
가까운 교우의 집에서 모이는 성당의 반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성모마리아상을 보았습니다.
나를 알고 있노라고 그분은 내게
선하신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그럼 우리 저녁과 아침이 공존(共存)하는 세상을
오늘도 시작해 보아요.
부족한. 나의 이 편지가 그대의 앞날을 한층
빛낼 수 있도록 다짐을 드리는 거라면
그 일 역시 기쁨이겠습니다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이런 틈바구니에서의 글쟁이 노릇




                         맹하린


정치?
일간지와 TV방송국 등의 문어발식 대형 체인을 여럿이나 소유한 CLARIN.
아르헨티나 언론계를 거의 완벽하게 장악(掌握)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CLARIN은 몇 년 전, 현(現)대통령 크리스티나의 남편이던 고(故)키르츠네르 대통령 내각과 매우 불편한 관계의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질적 양적으로 너무 거대한 성곽이 되려는 끌라린이라는 재벌회사를 음으로 양으로 압박하려는 정부와, 시도 때도 없이 간섭을 일삼는 정부를 자체 언론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파헤친 데서 일의 발단(發端)이 일파만파(一波萬波) 이슈화 된 것.
결국 고(故)키르츠네르 대통령 내각은 끌라린 신문사에 몇 십 명의 국세청 직원들을 풀어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요소요소에 유능한 인재들, 특히 유태인 직원들을 골고루 기용한 끌라린은 곧장 정부를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대응다운 대응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난다 긴다 하는 끌라린의 변호인단이 노린 시일 지연작전의 구축 망에 키르츠네르 정부가 자연스레 걸려든 모양새가 되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일은 미해결 사태로 남아 있다.
그러한 와중에도 아르헨티나 국민 대다수는 달러투기라는 개인주의적 내 주머니 채우기에 너도나도 혈안이 돼 있었다고 보면 지나친 수식어가 되려나.
경제??
유태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몇몇 한인들은 의류도매시장의 메카인 아베쟈네다 지역에 시가 50만 달러에서 1백만 달러를 웃도는 가게를 몇 개 내지 몇 십 개까지 소우했다는 얘기가 심심파적으로 떠돈다.
전세제도가 전무(全無)한 아르헨티나의 경제 구도상, 그들은 3년에 한 번식 사용자가 되돌려 받지 못하는 쟈베(Llave)라는 명칭을 갖춘 권리금을 몇 만 달러에서 몇 십만 달러까지 가게 주인에게 지불해 왔다.
월세는 월세대로 적잖이 내면서 말이다.
사회주의의 표방과 자본주의적 행태가 복잡하게 뒤섞여 창궐하는 매우 머리 아픈 양상(樣相)이다.
문학???
어느 정도 파악은 되어 있지만, 아르헨티나와 한국 문단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현존하는 문인의 숫자도 숫자지만, 관념이나 주관이나 사명감 자체가 판이하고 특이하게 다른 것.
여기는 남미다. 그러니 교민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 남미 식으로 살기도 하지만, 한국인임이 확실한 정체성으로 인하여 가장 한국인처럼 살아갈 때가 더 많다고 본다.
나 때때로 제 2의 나라라는 망토를 벗어 던지고, 모국애라는 겉옷으로만 생을 유지해 오기를 즐겨 샐행해 왔으리.
나는 도덕적 사회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일보다는 일탈을 통해서나 가능한 행복을 추구해 온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다.
아르헨티나의 중견작가인 마르셀로 비르마헤르가 자전적 단편소설에 총알로 쏘았던 직언(直言)으로 이글을 마칠까 한다.
<솔직히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온 돼먹지 못한 시인들, 다시 말해 시장(市長)의 생리(生理)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말을 쏟아내면서 나 같은 사람은 상업적 작가라고 매도(賣渡)해 버리는 문화계 인사(人士)라는 작자들이 알고 보면 하나같이 정부(政府)의 녹(錄)을 먹는, 즉 노동자와 힘없는 연금 생활자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먹고 사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직(公職)을 꿰차고 앉든가 시에서 주는 상이나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 등을 싹쓸이하는 인간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장장 이십 년 동안 스스로를 소비계층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은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나 같은 사람에게 전화해 원고료 한 푼 안주고 글이나 써오라고 하는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었다, -마르셀로 비르마헤르-

2013년 3월 5일 화요일

단순명료한 방향으로





                   맹하린


본국에 가면 바로 밑의 동생인 맹미숙의 집에 주로 본거지를 둔다.
청주에 계신 엄마, 그리고 시집이나 친정의 형제들 만나러 다니다 보면 친구들이나 동창들은 한 번 씩 밖에 못 만나는 데다, 한 달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뚝딱 지나간다.
가장 난해한 일은, 본국에 다녀오면 회향병이 어느 정도 회석되기는 커녕, 도리어 명백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미 들떠 있는 맘 이리저리 하염없이 헤매기가 부지기수다 .
결국은 글을 쓰거나 읽거나 음악을 당겨야 사뭇 대책이 없어 보이는 소슬한 쓸쓸함에서 가까스로 헤어 날 수가 있게 된다.
몇 년 전에 귀국했을 때는, 고모의 셋째인 송태일이 형제들 모두에게 저녁을 낸다고 해서 서대문에 위치한 어느 일식집에 갔었다.
우리 형제들과 고모네 가족 거의가 모이니까 열 다섯쯤 되었다.
선천적으로 잘 웃는 나는 고모 큰 아들 송태언의 딸만 봐도 웃었고, 셋째인 송태일의 아들만 보아도 속절없는 웃음이 자꾸만 터뜨려졌다.
틈날 때마다 안아 주고 자주 엎어 주던...
누가 안 무겁냐고 물어 오면 아뇨, 내 동생인걸요?  충분히 그러한 대답을 마련 했던...
누군가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은 새삼 생을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으로 숙연하게 유도하는 면모가 매우 강하다.
얼마나 얼나마 제 아빠들의 어린 시절을 답습했던지 나는 웃느라 식사 도중 내내 밥도 잘 못 넘겼을 것이다.
풀코스로 나오는 일식(日食)의 세 번 째 쯤에, 젖은 베 보자기로 덮인 소쿠리가 나왔다.
곧 열려질 휘장처럼 보자기는 어딘지 모르게 이리저리 들썩이고 있었다.
그걸 젖히며 올케언니와 맹미숙은 서로의 감탄을 툭툭 튕기며 주고 받았다.
-어머나! 새우가 어쩜 이리도 싱싱하지?
-그치? 언니. 너무나 상큼하게 생겼다!
유년시절에 일꾼 아저씨가 난산 강에서 뜰채로 건져내던 투명한 빛 새우와 몹시도 흡사한 크기와 모양이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놀랐을 것이다.
약간씩 뛰어 오르며 팔딱이는 새우의 머리 부분을 톡톡 따면서 손가락 역시 팔딱이며 연신 입에 넣던 내 혈육들.
왜 안 먹느냐고 의아해 하는 그들에게 나는 잊지않고 익살을 떨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촌뜨기라서... 살아 있는 건 미물이라도  그 생명의 신비함을 소중히 여기는 못난 성질머리라서...

나의 생애(生涯)에게 다가오고 지나가던 온갖 흐름은 나를 여기까지 도달하게 만든 이미 예비된 궤도였다고 보여진다.
어제 저녁 퇴근 후, 소파에 기댄채 수박 쥬스를 마시는 중일 때 국제전화가 왔다.
말레이시아에 여행가서 석 달을 쉬다 왔다는 맹미숙이었다.
엄마 고모 오빠 동생들 자녀들 얘기가 순서도 없이 나눠지고 펼쳐졌다.
나와 맹미숙은 잊지 않았다는 듯 쉴 새 없이 웃어댔다 .
내가 살아오면서 안 보이는 손을 가장 많이 잡았던 손은 내 첫 번 째 친구와 전혀 다름 아닌 맹미숙이었을 것이다.
맹미숙과 나는 어쩌면 울음이 낯설어서라기 보다, 웃음이 낯익어서 그리도 자주 웃어 대는 지도 모른다.
형제들을 자주 만날 수 없어서, 나는 형제들의 존재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내는 중이라고 보아야 하려나.
허다한 그리움의 부피를 거듭 추스르기만으로는 허전하여, 나는 그리움을 필적(匹敵)할 만한 대안(代案)을 웃음으로 삼았을 것도 같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드디어 손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까르륵 대며 연거푸 웃을 수가 있어서 나는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저절로 기쁘게 지낼 것만 같다.
내게 있어 가족이나 형제들, 그리고  웃음은 일종의 충전작용을 가져다 주는 그 어떤신비로운 힘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단순명료한 쪽으로 살아감의 방향을 제시(提示)해 보려고 한다.
예술을 추구하는 특이하고 강한 개성의 소유자인 사람들.
그들에 대해서도 보다 더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
그게 진정한 예술정신으로 중무장 하는 일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