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어린 시절이 없었어!”
수원대 교수 이주향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생사를 넘나들며 던진 말이 공개됐다. 나를 그토록 ‘찡’하게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린아이를 사랑합니다.”
생각보다 어린 시절은 소중하고 중요하다.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 “아빠”라 부르게 되는 존재가 나를 든든히 지켜주어야 하는 시절, 선악보다는 호불호가 중요하고 책임감보다는 호기심을 인정받고 격려받아야 하는 시절, 그 시절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는 인생의 밑그림이다.
그 시절이 없이 일찍 철이 나야 하는 아이들은 평생 ‘쓸모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할까 조급하게 동동거린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코가 꿰거나, 세상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주류사회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아니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존재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를 그린 그림 중에 미소를 짓게 되는 그림이 있다. 영국 화가 오처드슨이 그린 ‘아기도련님’이다. 엄마가 부쳐주는 부채에 반응하며 천사처럼 노는 아기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이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런 아기의 공간에 걸맞게 주변이 온통 따뜻하다. 따뜻한 노란 빛을 완성하는 것은 엄마의 따스한 눈빛이다.
아이는 엄마의 따스한 품이나 아빠의 훈훈한 표정 같은 것 없이 세상을 믿게 되지 못한다. 엄마가 조급하면 아이는 불안이 많은 인간이 되기 쉽고, 아빠가 공감에 인색하면 아이는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쓰다가 스스로 함정을 파는 인간이 되기 쉽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지켜주는 일은 어른들의 의무라 생각한다. 일곱 살 된 아이가 영어 배우고, 태권도 배우고, 그림 배우고, 피아노 배우고, 심지어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바둑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일곱 군데나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김지하 선생의 ‘무화과’는 내게는 꽃 시절이 없었다는데, 요즘 아이들은 아예 싹 시절이 없는 것 같다.
왜 어른들은 아이에게서 어린 시절을 거두어들일까. 혹 그들이 자기 어린 시절과 화해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린 시절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나’의 어린 시절과 화해해 보자. 당신의 엄마, 아빠는 어땠는가? 엄마, 아빠라 불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당신이 기억하는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마음에 맞는 친구와 도란도란 어린 시절의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기억하며 불러내며 우리 속의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느껴보는 일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아빠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리고 사춘기 때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은 어떤 모습인지, 그러다 보면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원형이 보인다.
기억이란 묘하다. 끊임없이 되돌아와 현재와 함께한다. 그래서 나의 과거와 노는 일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과 잘 놀다보면 지금의 나의 그늘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고 자기 자신과 잘 놀 수 있는 때가 오지만, 내가 나의 그늘을 알아채지 못하는 한 나는 나의 그늘 아래서도 쉴 수가 없다.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28년 동안의 침묵(沈黙)
맹하린
1985년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방문을 선포하자, 전노렌죠신부님을 위시한 53명의 방문단에 합류한 우리 내외는 모국에 다녀오게 되었다.
에사이사 공항의 2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남편은 성당의 교우이자, 교민브로커로 명성을 날리던 Y씨에게 찰나적으로 팔을 이끌렸었나 보았다.
나는 남편의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이층에 닿은 상황이었다.
Y씨는 남편에게 두툼한 서류봉투와 함께, 보답이랍시고 2Kg용량의 꿀 병까지 불쑥 안기더니 금세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에 도착하면 김포공항에 사람이 나와 있다가 받아갈 거라는 언질을 속삭이듯 은밀하게 곁들이고 나서…….
비행기에 탑승 했을 때, 우리 자리로 다가오신 김마리아 어르신께서는, 남편에게 염려의 말씀을 잔뜩 쏟아냈다.
"내게 부탁하는 걸 겨우 거절 했었는데 결국 형제님이 떠맡으셨네요!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브로커가 맡기는 서류가 신상(身上)에 이로울 리는 절대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남편에게서 서류봉투를 가로채 듯 잡아당겨 우선 손으로 만져 보았다.
촉감만으로도 여권이 확실했다.
여권은, 하나라면 모를까 10개도 더 되는 듯 싶었다.
김마리아 어르신은 애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탁(神託)과 같은 말씀까지 기필코 보탰다.
"갖다 주지 말고 비행기 안의 화장실 쓰레기통에 당장 버리세요! 한국공항에서 무슨 덤터기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나는 남편이 재삼 확인해 보려고 만지작거리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가방 안에 깊숙이 넣으며 비장감 넘치게 말했었다.
"걸려도 내가 걸리는 게 낫겠어요. 당신은 남자라서 여러모로 불리할 확률도 많고."
열 댓 사람에게는 그 여권들이 특별하고 소중했으며 가장 간절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토록 귀중한 물품들을 그런 식으로 폐기처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포공항의 검색대에서 나는 보란 듯이 걸리고 말았다.
걸리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서류봉투라니. 의심을 받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지 않은가.
“이건 뭡니까?”
“아르헨티나 공항에서 남편이 얼떨결에 부탁 받았던, 아는 분의 서류인가 봅니다.”
그는 손으로 서류봉투를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가위부터 집어 들었다.
“우선 뭔가를 보고 나서 얘기합시다.”
가위로 자른 뒤, 손으로 꺼내지 않고 봉투를 위로 쳐들며 내용물 전체를 가차 없이 쏟아 내던 세관원.
인지가 붙은 서류들과 더불어 와르르 쏟아지던 열대여섯 개의 한국여권들.
한국에서 인편을 통하여 일단 아르헨티나로 보내지고, 그리고 비자를 받아 낸 다음 새로 이민을 떠나려던 한국의 신청자들에게 브로커를 통해 안겨진다던 여권들.
큰 짐들은 남편에게 건네도 된다는 혜택이 주어졌지만, 나는 혼자서 김포공항 5층에 있는 수사 실에 들어가 장장 5시간을 머물러야 했다.
공교롭게도 일요일이라, 외무부(외교부) 여권과의 직원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담당자가 여기저기 문의하는 전화를 빗발치듯 해내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나는 군인 몇 사람이 여담(餘談)으로 질문해 오는 아르헨티나의 실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군인 중 하나가 느닷없이 내게 질문했다.
“두렵지 않으세요?”
“죄 지은 일이 없는데 왜 두렵겠어요?”
나는 지금껏 의아심을 품게 된다.
(왜 경찰이 아니고 군인들이었지?)
이쪽에서만 해내던 전화가 저쪽에서도 올 수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전화벨이 지나치게 크고 길게 울렸다.
뒤늦은 여권 과에서의 해답과 결과에 대한 연락이었다.
통화를 끝낸 담당군인은 서류봉투 안에 여권들을 차곡차곡 넣어주며 다짐처럼 충고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만약 이 여권들이 가짜일 경우, 아주머니는 당장 법에 저촉 되며 처벌까지 받습니다. 큰일 날 뻔 하신 겁니다. 차후엔 아무 부탁이나 떠맡으시면 안됩니다. 우린 여태 가짜인지를 조사했던 겁니다. 좁은 땅에서 한 사람이라도 떠나면 애국이 되기도 하겠고...”
나는 그럴 때, 내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다니까요! 그렇게 쓸모 없는 변명 따위를 늘어 놓지 않는, 매우 단순한 성질머리를 지녔다.
동생 같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나는 총총 그곳을 나왔다.
어두워진 공항 밖에는 신부님과 남편의 대부이신 C인솔단장과 몇몇 교우와 남편과 내 형제들 이 그때껏 기다리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특별히 Y씨의 한 패거리로 보이는 멀쩡하고 말쑥한 신사가, 남편이 내 손에서 가져간 봉투를 받아 들고 쏜살 같이 사라지는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너무나 면목이 없다는 바보스러운 생각과 표정 같은 걸 했었다.
남편이라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무실 비슷한 곳에서 군인들이 대접해 주는 커피도 마시며 이약이약 이야기까지 주고 받으며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로 기다렸지만, 그들은 의자도 없는 공항의 바깥에서 무려 5시간이나 부족한 소생인 이 나를 기다려 준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런 시시한 일을 가지고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성격은 아니다.
하물며 나와 남편은 말하자면 그런 사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트집 삼으며 뒤늦게 싸우거나 네 탓, 내 탓을 따지지는 않는 사이 말이다.
그러니 우린 이혼 같은 걸 못해봤을 것이다.
그냥 일어 날 일이 일어났다고 여긴다.
저 높으신 분에게 새로운 시험을 당하고 있으므로 되도록 산뜻하게 넘겨야 한다는 의무감만 키우고 키우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다 할 사과를 제대로 받은 적도 없었고, 잔치나 행사 같은 데서 Y씨를 맞닥뜨리기는 했지만 남편과 나는 묵묵부답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Y씨 내외는 현재 아베쟈네다 의류도매상가 지역에 일수를 놓는 일수쟁이가 되어 일약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예쁘장한 부인은 자녀들 결혼 시킬 때마다 꼭 우리여야 한다는 강한 주관을 펼치며 우리 가게에 웨딩 꽃을 오롯이 믿고 맡겨 왔었다.
나는 계속 침묵을 고수(固守)했었다.
28년 동안의 침묵이다.
내가 배달해 준 여권의 주인공들 열댓 분은 시절이 하수상한 지금껏 아르헨티나에서 잘 살고 있을까.
안 보이는 좋은 인연으로 나와 자주 만나기도 하며 지인(知人)으로까지 남은 건 아닐까.
때때로 돌출(突出)되는 크고 작은 일에 대처하는 나의 의연함은 약간이나마 전설적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겠다.
서양 속담이 이미 내게 가르쳐 줬었다.
<부드러움은 뼈를 부순다.>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범죄의 가공할 양면성
한국일보
토ㅣ요ㅣ에ㅣ세ㅣ이
-김승웅 언론인·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아우슈비츠수용소는 2차 대전 당시 650만 유대인을 한줌의 연기로 날린 상징적 건물이다. 폴란드 오스비에침 마을소재의 관광지로 아우슈비츠는 그 마을의 영어식 발음. 집채더미처럼 쌓인 안경테, 곳간마다 그득한 유대여인들의 머리다발, 검디검은 독가스실의 콘크리트 벽은 수용소 '관광'을 마친지 20수년이 넘는 이 시점까지도 악몽으로 되살아나는 장면들이다.
그림에 그토록 소질을 보여, 비엔나 숲 속을 곧잘 스케치하던 눈 큰 소년 아돌프 히틀러를 무엇이 그토록 바꿔 놓았단 말인가. 히틀러의 생모가 남편과 사별 후 유대인 간부(姦夫)를 갖게 됐고, 따라서 매일 밤낮으로 어머니와 뒹구는 유대인 사내한테 히틀러가 독을 품던 시기를 바로 이때부터로 기산(起算)하는 분석도 있다. 히틀러의 생모 클라라가 남편 알로이스 히틀러와 일찍 사별한 것은 틀림없다. 아들 히틀러의 나이 열네 살 때다.
클라라는 남편과 22세나 나이 차가 있는데다, 실은 남편의 사촌여동생이었다. 그녀가 사촌 오빠와 남녀관계를 맺은 것은 오빠의 둘째 처가 병이 들어 죽기 직전으로, 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불륜관계였다. 아돌프는 그런 범죄가운데 잉태한 아이였다. 아돌프의 청소년기는 이런 반유대정서 속에서 자아를 굳혀간다. 히틀러는 나중에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수 천 수만의 순수 독일 피를 이어 받은 소녀들이 이 역겨운 안짱다리 유대사생아들의 배 밑에 깔려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런 표현은 당시 유행하던 반 유대정서와 히틀러 개인의 성적강박관념의 합작으로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를 돌아보고 10여년 지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관람하면서 나는 거듭 봤다. 저벅대던 나치대원들의 군화소리, 군견들의 울부짖음 속에 섬뜩하게 다가서는 미래의 재앙과 그 그림자를 분명히 본 것이다. 신통력이나 영험(靈驗)없이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작품, 그런 의미에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아우슈비츠를 먼저 '관광'후 관람해야 진가를 느낄 영화였다고 영화평을 쓰고 싶다.
그리고 가장 경악했던 일은, 그런 목불인견의 만행이 자행되는 와중에도 수용소 한켠의 별채에서 나치장교들은(영화에서처럼) 관현악을 즐겼다는 점이다. 죄악과 문명의 공존…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것이다.
죄악은 평범이나 정상과도 공존한다. 그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에힐 다이누라는 생존자의 이야기다. 1961년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했던 부총통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다이누도 증인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재판장에서 다이누가 흐느껴 울다가 실신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가 수용소에서 체험한 죽음의 공포 때문이려니 짐작했으나 며칠 후 다이누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유는 너무 놀라운 것이었다.
"저는 아이히만이 악마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그가 너무 평범한 한 남자로 음악 좋아하고, 손자 손녀의 재롱을 즐기고, 저처럼 황혼의 강가 산책을 좋아하고…. 이런 평범한 인간 속에 650만 명의 생명을 죽이는 악마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겁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을 생각할 때 너무 두렵고 절망적인 마음이 들어 쓰러진 것입니다."
범죄는 의술과도 공존한다. "나는 온화하고 자비롭다." 지난 1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유고전범재판정에 선 피고 라도반 카라지치 전 스르프스카 공화국 대통령(67)의 자기변호다. 그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8,000명의 무슬림 주민을 죽인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주범이다.
"전쟁을 피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다"는 이 전직 정신과 의사의 시술(施術)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범죄의 이 가공(可恐)할 양면성이여…. 나는 그게 두려운 것이다.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마음 다스리기
- 한스컨설팅 대표 한근태
지인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한 적이 있다. 한라산도 오르고 올레길도 걷고 맛난 것도 먹었다.
정말 환상적인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분은 여행을 전혀 즐기지 못했다.
며칠 전 큰 비로 물에 잠긴 외제차 걱정 때문이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그 분은 서울에 있는 자식들과 계속 통화를 했다.
"얼마나 돈이 든다니, 보험에서 얼마까지 커버가 된다니,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니, 다른 수리소도 알아봐라, 사기칠 지 모르니 일일이 지켜봐라…"
자식 셋과 돌아가면서 전화를 하고 때론 보험회사 직원과도 전화를 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그 분은 멋진 제주 바다를 하나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몸은 천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옥에 있는 것 같았다.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있어야 한다.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을까?
첫째,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
바둑에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말이 있다. 승리를 탐하면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태국 출신 고승 아잔 차 스님은 이런 말을 한다.
“조금 내려놓으면 조금 평화로워질 것이다. 많이 내려놓으면 많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완전히 내려놓으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세상과의 싸움은 끝난다.”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욕심 때문이다. 욕심 부린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 세상에 우리 것은 없다. 모두 잠시 빌린 것뿐이다.
내 육체도 돈도 자식도 권력도 내 것이 아니다. 가능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 고정관념과 망상이다.
남들은 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데 혼자 미워하고 끌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강의 중 동양 남자로 인해 몹시 불쾌했다.
자기 강의를 듣지 않고 옆에 있는 젊은 여자와 계속 수다를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이 쓰여 강의도 제대로 못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동시통역사였고 그는 통역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 사건에 대한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느냐 때문에 괴롭다.
우리가 보고 해석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일 때문에 신경이 쓰여 행복하지 않다면 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아침부터 인상을 쓰고 있는 상사는 당신 때문이 아니라 집안 일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셋째, 천천히 살아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급하다. 정신 없이 빨리 달린다. 늘 마감시간에 쫓긴다.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제한속도 100킬로로 달려야 할 구간을 140킬로로 달리면 연료 소모도 많고 정서도 불안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들뜨게 되고 피로가 가중된다. 본의 아니게 사고 날 확률도 높아진다.
꽉 찬 스케줄을 가진 사람은 유능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이다.
바쁘다는 의미의 한자는 망(忙)이다. 마음 심(心)자에 망할 망(亡)이다. 마음이 망했다는 의미다.
정신 줄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급한 일에 쫓겨 정말 소중한 일에 시간을 쓸 수 없다.
좋은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 천천히 가는 것이 빨리 가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달리다가 주기적으로 쉰다.
그들의 영혼이 쫓아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넷째,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번잡하고 정신 없이 살고 있다. 복잡한 관계 때문이다.
그 관계 확인을 위해 12월은 저녁마다 몇 탕씩 송년회를 하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홀로 있어 봐야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다.
늘 얽혀 있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도 안 되고,
이웃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게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명상의 문이 열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권력을 가질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머리가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행복해질 수는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깨달음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잔뜩 때가 낀 거울과 같다.
사물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하지만 물로 씻어내고 수건으로 닦아내면 거울은 다시 사물을 비춘다.
마음의 먼지도 이같이 털어낼 일이다.
표면이 흐려지면 거울은 사물 비추기를 거부하고 제 자신을 고집하게 된다.
제 자신을 고집할 때 거울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거울은 금세 더러워진다.
마음 밭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차분히 가라앉혀 침묵을 깃들여야 한다.
생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 끝에 깨달음이 있다.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행주강
- 박철
내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은 외로움 탓이다
시가 길어지는 일처럼 요즘 그리움이란 지금은 부재하는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누군가 나의 별빛을 본다면 희망에 대해 노래해다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안개 짙은 야적, 강의 하류에선 그들 나름대로 시대를 앓고
둑으로 쌓아 올리는 바람이 외면을 받으며 갈대 곁에 섰다
언덕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나련만
강폭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일 거다
사랑이든 역사든 배고픔을 달래는 무엇이든 말로서 될 일이 아니건만
물살이 거듭 손마디를 꺾으며 행주강이 흐른다
400년 전 임진란의 함성이 되살아나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대는 강
치마폭에 돌덩이를 주워 담던 아낙도 가끔은 허리를 펴 강 건너 친정아비의
안부가 그립기도 했을 저녁 바람처럼 날이 진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5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50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오늘은 내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재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운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인중을 긁적이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연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
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
라는
사실을 ,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이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
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이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
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2012년 10월 15일 월요일
작은 화재(火災) 앞에서
맹하린
일요일이 닥치면 오늘은 성당에 좀 가야지, 그러면서 9시 미사에 닿으려고 준비를 하지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꼭 무슨 일이 생기고 만다.
성묘(省墓)용 꽃다발이라거나 여럿이나 겹치는 주문일 경우 이미 갈아입은 외출복을 미련없이 평상복으로 바꾸게 된다.
어제도 유리문에 붙이려고 "일요일은 10시 15분에 엽니다" 라는 안내문을 쓰는데, 이웃가게에서 한국수입상품을 취급하는 C사장께서 초인종을 누른다.
“아드님, 있어요?”
“일요일엔 바쁠 때나 나오지만, 무슨 일이시죠?”
“건너편에 불이 났어요. 거지 놈들이 뭘 어떻게 잘못 한 건지, 내 원 참!”
우리 가게 이웃에서 한인 타운을 조성하고 있는 자영업자들은 대다수가 아니고, 거의도 아니고 모두 한인 1세대들이 점령하고 있다.
2세들은 중심상가인 온세나 아베쟈네다에 입성(入城)하여 한국으로 치면 중소기업 정도 되는 의류도매상들을 경영하기 때문이다.
C사장이나 나 역시 신고(申告)정도는 해낼 수 있으나 주소록 찾고 그러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신속한 대응(對應)을 아들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주지(周知)하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집으로 전화를 하자, 아들이 부탁하기를 정확한 주소와 화재의 크고 작음을 설명하라고 해서 나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사고현장으로 갔다.
무선인 가게 전화는 150M까지는 수신이 가능하다.
서너 명의 젊은 노숙인(老宿人)들이 둥지를 틀고 살던 한인철공소 옆의 빈 가게 앞이었다.
불길은 점차 번지는 과정에 있었고, 매우 위협적인 속도로 타고 있었다.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도 그렇지만, 작은 폭파 음까지 파생되고 있었다.
매사에 상상력이 지나친 나는 바로 옆가게인 철공소의 가스통이 터지는 연상(聯想)을 나도 모르게 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5분도 안 되어 세 대의 경찰차가 요란하게 도착했다.
화재상황의 크고 작음을 경찰이 먼저 파악한 후에 소방차를 부르는 법이라는 아들의 설명이 나중에 있었다.
신고할 때도 장난 전화를 방지(防止)하기 위해 일단 확인전화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집으로 전화를 해서 불길이 어느 정도인지를 캐물었다는 얘기다.
“난 모르죠. 모친(母親)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아들이 웃으며 말하자 경찰도 웃더라고 했다.
이윽고 5분도 안되어 다시 소방차 한 대가 왔다.
한 대로도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금세 옆 가게로 번질 것만 같았고, 한인 타운 전체를 폭파시킬 듯 했던 화재는 싱거울 정도로 단박에 잠재워졌다.
번질 불은 번지게 되어 있고, 꺼져야 할 불은 꺼지게 되어 있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인 모양이다.
일 년에 가장 큰 대목이 되는 어머니날이 일주일 뒤로 임박(臨迫)하여 정신적으로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교회에 나온 김에 주문하고 가는 고객도 이미 여럿이나 있었다.
큰 대목이 닥칠 때마다 어떻게 하면 대박이 날까를 염두에 두기보다, 어찌해야 고객들에게 친절히 대하면서 소담스럽고 깔끔한 꽃장식을 안길까를 고심(苦心)하게 된다.
내 지표가 그렇기 때문에, 상인연합회의 벼룩시장이 무료인 줄 잘 알면서도 애초부터 이용을 삼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내 나름의 긍지란 게 그렇다.
너무 수입이나 이익만 따지며 살기는 싫은 편이다.
작다면 작은 화재(火災)사건을 지켜보면서 내 안에 내재(內在)된 세상에 대한 몰이해(沒理解)의 불씨를 내 스스로 투덕거리며 끄기 시작한다.
하여간에 해내야 할 숙제 몇 개가 성큼 다가오는 아침이다.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그래, 이 맛이야!
맹하린
내가 라면을 가장 처음 맛본 건 중학교 때였다.
한국은 그때 인스턴트식품은 물론이고 라면이라는 품목이 전혀 생산되지 않을 때였다.
중학교 음악교사로 있던 형님을 만나려고 일본에 다녀온 고모부가 짐 속에 라면을 두 박스나 가져 오셨다. 순전히 우리 형제에게 그 희한한 맛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러셨을 것이다.
그때 나는 뚜껑을 열면 발레리나가 춤을 추면서 소녀의 기도라는 음악이 나오는 분홍색 뮤직 박스 오르골까지 내 몫의 선물로 받았다.
고모내외는 일제시대(日帝時代)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끔은 우리 형제들 앞에서 일본 말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가 알면 안 되는 비밀이거나 우리형제들을 칭찬, 또는 웃어주는 말들을 주로 주고받았었다고 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 백단은 못되고, 99단은 되었던 탓에, 가끔씩 장난기가 발동 되면 두 분이 주고받는 얘기를 콕 집어내고는 했다.
두 분은 그리도 커다랗게, 통쾌히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렸었다.
(그 웃음이 새삼 그립다.)
그리고 1963년도쯤 삼양식품에서 라면이 나왔다.
그럭저럭 즐기던 라면을 결혼하고 뚝 끊어야 했다.
시어머니께선 수제비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 종류를 무척이나 좋아하셨지만, 라면은 비싼 음식으로 단정하셨기 때문이다.
습관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시어머니 덕택에 라면을 멀리 하자,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음식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날마다 듣던 말도 아니었다.
단지 일 년이면 한 달 정도 함께 했던 날들 속에서 들었던 지적이었던 것을…….
현재의 나는 라면을 바쁠 때나 먹는다.
가장 간단하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식사로 부각되는 이유에서다.
얼마 전, 절약이 생활화 되어 있는 가족이 Coto라는 현지인 마켓에서 미국 산(産)라면을 사왔다. 한국라면보다 부피는 작았지만 절반 정도 낮은 가격이었고, 우선 유통기한을 믿을 만 할 정도로 신선함을 전달 받았다.
특히 그 맛에서 예전에 고모부가 일본에서 가져오신 라면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아마 미국에 있는 라면공장을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모양이지 싶다.
나는 찌개나 국 종류를 먹을 때, 국물을 전혀 먹지 않는 습성을 지녔다.
왜 그러는지 나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어려운 이상한 성격이다.
그런 이유로 물김치 등을 담그지 않을 뿐 아니라, 외식에서도 건더기만 약간 정도 섭취한다.
그러는 나를 가끔씩 놀리는 친구들 앞에서 나는 내 특유의 유머를 날리기 마련이다.
"맞아, 나는 국물을 전혀 안 좋아하는 게 확실해. 아! 그래서 내 인생 국물도 없나 보네?"
살아오면서 더 이상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연이 하나 있었다.
나를 동등하게 존중해 주지 않고, 어떻게든 일을 돕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경청해 주는 역할만을 요구하던 여친 이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이렇다 할 다툼도 없이 내 쪽에서 절교(絶交)를 실행(實行)했다.
더 이상 친구하기가 숨막혔었다.
이 얘기 정말 죽기 전엔 건드리기가 괴로운 부분이지만, 나는 그 무렵 교통사고로 열 네 살의 큰 애를 잃었었다.
그런데, 세상이 온통 슬픈 보라색으로 흐릿할 뿐인데, 그리고 누군가 나를 약간만 밀쳐도 세차게 넘어질 것만 같은 심정인데, 그런데 참척(慘傶)이 어느 정도의 슬픔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아 하는 그 친구는 내 입장은 손톱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고 있었다.
나를, 내 고통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친구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지나치게 치부하고 축재한 사람들과는 친구 안 하기!!!
그러니 그 누구도 나의 그 인연을 들먹이면 곤란한 일을 내게 떠안기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악플러이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내 인생에 중심을 잡도록 해주는 존재,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어제와 오늘, 몇 분의 절친께서 띄어준 메시지가 함초롬히 대신해 주었다.
때로는 미국 산(産) 라면이 그걸 대신해 줄 것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 미국 산(産) 라면을 때때로 먹게 될 것이기에 말이다.
이상하게도 먹을 때마다 그 라면은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다.
그리고 가족에게 소리치도록 유도한다.
"그래, 딱 이 맛이야!"
2012년 10월 13일 토요일
오오까의 밀감
오오까의 밀감
-펌-
옛날 日本의 에도에 오오까라는 판관이 있었다.
이른바 쇼군(將軍)이 할거하던 時代였다. 내란이 빈번했고 민중들의 삶은 어려웠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게 일상사였다. 재판관의 판결은 뇌물을 얼마나 바치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罪가 없어도 가난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갔고 심지어는 처형되기도 했던 反面에 돈만 있으면 아무리 몰염치하고 뻔뻔스런 罪를 짓고도 풀려났던 그런 時代였다.
오오까는 판관이 되어 에도에 부임하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큰 만찬을 베풀었다. 에도의 귀족 명사들과 관리와 그리고 다른 판관들을 합쳐 모두 3백 명을 초대하였다. 食事가 끝난 뒤 그들은 정종을 마시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 중에 판관들은 재판을 심리할 때 그 진실을 알기 위한 제일 빠른 길이 고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판관들은 아무리 거짓말을 잘하고 뻔뻔스러운 자들도 고문만 하면 다 불게 되어 있다는 意見에 입을 모았다. 오오까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表情은 침울했다. 그들이 술 마시기를 거의 끝마쳤을 즈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모든 食事의 마지막에 과일이 빠질 수 없고 또 지금은 밀감이 아주 잘 익는 계절인데 내가 그것을 소홀히 했으니 제빈들은 이 나의 불찰을 용서하시기 바라오. 즉시 조처하겠소."
그리곤 그의 충복인 나오수까에게 3백 개의 밀감을 급히 가져오라고 지시하였고 나오수까가 급히 달려가 밀감이 든 부대를 오오까에게 갖다 대령하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나오수까에게 그 밀감을 헤아려 보라고 指示하였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 밀감의 숫자를 헤아린 나오수까의 表情이 어두워졌다.
"나으리, 3백 개에서 한 개가 不足하옵니다."
"너에게 3백 개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빈객 중에 한 분이 못 잡숫게 되었단 말이냐!"
"나으리, 틀림없이 3백 개였사옵니다. 小人이 직접 세면서 집어넣었사옵니다. 정말이옵니………"
울상이 된 나오수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오까의 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네놈이 한 개를 먹었구나 그렇지 않느냐?"
"아니옵니다. 아니에요. 감히 어찌 小人이 그런 일을………"
"그렇지 않다면 네놈은 지금 밀감한테 날개가 있어 날아갔다는 말을 하려느냐, 아니면 발이 있어서 도망쳤다고 말하려는 게냐, 이 발칙한 놈!"
"아니옵니다. 감히 小人이 어찌……… 하오나 小人이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은 事實이옵니다."
나오수까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목을 조아렸으나 主人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眞實은 밝혀지게 마련인즉……… 게다가 名色이 판관인 내가 바로 家內에서 벌어진 일의 眞實을 밝혀내지 못한다고 해서야 어디 판관 자격이 있겠느냐!"
오오까는 형리에게 화로와 끓는 물 등 고문할 채비를 차리라고 명령하였다. 형리가 곧 화로와 끓는 물 그리고 인두 등을 준비하여 대령하자 오오까가 형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以實直告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저 못된 놈에게 하나하나 說明해주렷다!"
오오까의 지시를 받은 형리가 말을 붙일 사이도 없이 새파랗게 질린 나오수까는 오오까를 향해 꿇어 엎드려 목을 조아리고 이렇게 울부짖었다.
"제발, 나으리! 小人이, 小人이 自白하겠나이다. 그러하오니 제발, 제발………"
"좋다. 그럼 어서 以實直告하여라. 네놈이 어떻게 밀감 한 개를 훔쳤는지 자세히 自白하렷다!"
"小人이 처음에는 그 밀감에 손댈 생각이 秋毫도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밀감이 하도 잘 익었고 때깔도 좋고 먹음직스럽고 또 향내도 그윽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사와 한 개를, 딱 한 개를 꺼내 먹었사옵니다. 어떻게 맛이 있었사옵던지 지금까지도 입안에 군침이 돌고 있나이다. 이렇게 自白하오니 제발 나으리! 제발, 나으리!"
自白을 마친 나오수까는 계속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초대객들은 眞實이 곧 밝혀진 것에 입을 모아 탄복했다. 그 중에는 "역시 고문이야말로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첩경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고 또 충복에 의해 도둑질 당한 오오까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이 말들을 조용히 다 듣고 난 오오까가 다시 나오수까에게 이렇게 다짐하듯이 하였다.
"그러니까 네놈이 眞情 이 모든 빈객들 앞에서 밀감 한 개를 훔쳐먹었다는 것을 自白한다는 것이렷다!"
"예, 예. 自白하옵니다. 小人이 도둑질을 했사오니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하오나 나으리, 처음 저지른 일이었사오니 나으리의 넓은 아량으로……… 한번만 그저 단 한번만………"
나오수까는 울면서 대답했고 또 그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오오까는 침울한 표정으로 나오수까를 그리고 빈객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오까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수까에게 다가가 그 앞에 함께 엎드려 그를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부디 나를 용서하라. 너에게 참으로 못된 짓을 했구나. 이 모든 빈객들 앞에서 이렇게 謝罪하오니. 그리고 이 불행한 일을 잊을 수 있도록 내 眞情 갑절로 너를 돌볼 것을 약속하겠노라."
그리고 그는 그의 넓은 소맷자락에서 밀감 한 개를 꺼내 빈객들을 향해 던지고 이렇게 외쳤다.
“밀감을 훔친 자는 바로 나였소. 내 下人은 훔치지도 않았으면서도 훔쳤다고 自白했소. 그것도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이오. 먹지도 않은 밀감의 맛으로 입안에 아직도 군침이 돌고 있다고 한 말을 잊지 마시라! 고문이 있기도 전에 고문의 공포가 그렇게 했던 것이었소! 그리하여 제빈들은 돌이켜보시라. 당신들의 감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억울하게 썩어가고 있는가를! 그리고 제발 이 밀감을 잊지 마시라. 眞實을 밝힌다는 美名 아래 고문을 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 이 밀감을 생각하시라!”
- 홍세화『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친구와 개새끼
-펌-
[삶과 문화]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한 전문계고교에 근무하던 교사의 일이다. 어느 날 수업을 하러 교실에 들어갔더니 교실에 먼지가 자욱했다. 평소에 둘이 친하게 지내던 학생 둘이 싸움이 난 거였다. 평소에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싸움이 아니었다. 학생 하나는 코피를 흘리고 있고 다른 한 학생은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피를 보고 난 다음이라 학생들은 보건실 가서 응급처치를 받고 교실로 돌아온 터였다. 학생들에게 이런 일이 있는데 수업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오늘 이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가 같이 알아보고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싸운 학생들에게 누가 먼저 때렸는지, 그리고 왜 때렸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소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저 새끼가 나보고 개새끼라고 하잖아요."평소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학생들이었다. 조사를 빼고는 다 쌍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 그 중에서 '개새끼'는 욕 같지도 않은 그런 일상용어였다. 그러자 맞은 학생이 항변하듯이 말했다. "쌤, 그거 평소에 늘 하던 말이잖아요!" 그래서 교사가 그 학생의 말에 수긍하면서 때린 학생에게 그건 늘 쓰던 말인데 왜 오늘은 다르게 반응했냐고 물었더니 학생은 아침에 엄마와 크게 '한판'했다면서, 그래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았는데 친구라는 녀석이 옆에서 자꾸 "개새끼, 개새끼"하니까 그만 열 받아서 주먹이 나갔다고 말했다.
교사는 "아, 평소에는 괜찮았는데 오늘따라 화가 많이 났겠네. 그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번 말해보지 그랬냐?"고 했더니 그 학생은 울컥하며 "쌤, 쌤이 시키는 대로 말로 했는데도 자꾸만 계속하잖아요."라며 말했다. 그러자 맞은 학생이 "쌤, 전 하지마라는데 그게 그냥 장난인 줄 알았어요!"라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말이란 그런 것'이라고 운을 뗐다. 평소대로 늘 쓰던 뜻 없는 말이라도 상대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 말이다. 하던 대로 하다가 주먹을 맞은 친구도 억울한 면이 있지만 때린 학생도 동무라는 녀석이 자기 기분을 헤아리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개새끼"라는 말보다 기분 더 나빴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들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말'에 대한 최고의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진지하게 듣고 뭔가를 깨달은 것은 이 이야기에 그들이 듣고 배울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실제적 삶의 재료로 짜여진 조언', 삶에 대한 살아있는 조언, 즉 지혜가 담긴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조언인가. 친구의 의미다. 철학자 김영민은 친구를 '듣지 않는 관계'라고 말한다. 친구란 '구태여 공들여 듣지 않아도 아는' 관계이다. '개새끼'가 보여주는 게 바로 이런 친구의 말이다. 평소에 늘 쓰던 말이었고 서로의 친분을 과시하는 말이었다. 바로 그런 언어였기 때문에 상대방을 헤아리고 듣는 것을 놓쳤다. 다 아는데 뭘 듣고 말고 할 것이 있는가. 프랑스 속담대로 한다면 우리는 아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듣지 않고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에 졸지에 친구는 '개새끼'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듣지 않았으면서도 다 아는, 그래서 관계를 망치는 대화를 종종 본다. 당장 부모와 자식의 말다툼을 보라. 부모가 자식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면 자식은 곧 "엄마가 무슨 말 하는지를 잘 알거든. 그러니 내 말 들어봐"라며 자기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그러면 곧 엄마도 자식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나도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거든. 그러니 엄마 말을 들어봐." 아무도 듣지 않고 서로 다 안다고 주장한다. 신기하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우린 어떻게 다 알고 있을까?
다 안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가 듣지 않고 생각하기를 멈출 때 우리는 친구에서 '개새끼'가 된다. 친구와 개새끼는 한 끗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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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어제 교민판 한국일보를 보다가 이 칼럼에 필이 꽂혔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을 뒤져 포스팅을 했다.
내 그대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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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한 전문계고교에 근무하던 교사의 일이다. 어느 날 수업을 하러 교실에 들어갔더니 교실에 먼지가 자욱했다. 평소에 둘이 친하게 지내던 학생 둘이 싸움이 난 거였다. 평소에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싸움이 아니었다. 학생 하나는 코피를 흘리고 있고 다른 한 학생은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피를 보고 난 다음이라 학생들은 보건실 가서 응급처치를 받고 교실로 돌아온 터였다. 학생들에게 이런 일이 있는데 수업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오늘 이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가 같이 알아보고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싸운 학생들에게 누가 먼저 때렸는지, 그리고 왜 때렸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소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저 새끼가 나보고 개새끼라고 하잖아요."평소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학생들이었다. 조사를 빼고는 다 쌍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 그 중에서 '개새끼'는 욕 같지도 않은 그런 일상용어였다. 그러자 맞은 학생이 항변하듯이 말했다. "쌤, 그거 평소에 늘 하던 말이잖아요!" 그래서 교사가 그 학생의 말에 수긍하면서 때린 학생에게 그건 늘 쓰던 말인데 왜 오늘은 다르게 반응했냐고 물었더니 학생은 아침에 엄마와 크게 '한판'했다면서, 그래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았는데 친구라는 녀석이 옆에서 자꾸 "개새끼, 개새끼"하니까 그만 열 받아서 주먹이 나갔다고 말했다.
교사는 "아, 평소에는 괜찮았는데 오늘따라 화가 많이 났겠네. 그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번 말해보지 그랬냐?"고 했더니 그 학생은 울컥하며 "쌤, 쌤이 시키는 대로 말로 했는데도 자꾸만 계속하잖아요."라며 말했다. 그러자 맞은 학생이 "쌤, 전 하지마라는데 그게 그냥 장난인 줄 알았어요!"라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말이란 그런 것'이라고 운을 뗐다. 평소대로 늘 쓰던 뜻 없는 말이라도 상대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 말이다. 하던 대로 하다가 주먹을 맞은 친구도 억울한 면이 있지만 때린 학생도 동무라는 녀석이 자기 기분을 헤아리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개새끼"라는 말보다 기분 더 나빴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들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말'에 대한 최고의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진지하게 듣고 뭔가를 깨달은 것은 이 이야기에 그들이 듣고 배울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실제적 삶의 재료로 짜여진 조언', 삶에 대한 살아있는 조언, 즉 지혜가 담긴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조언인가. 친구의 의미다. 철학자 김영민은 친구를 '듣지 않는 관계'라고 말한다. 친구란 '구태여 공들여 듣지 않아도 아는' 관계이다. '개새끼'가 보여주는 게 바로 이런 친구의 말이다. 평소에 늘 쓰던 말이었고 서로의 친분을 과시하는 말이었다. 바로 그런 언어였기 때문에 상대방을 헤아리고 듣는 것을 놓쳤다. 다 아는데 뭘 듣고 말고 할 것이 있는가. 프랑스 속담대로 한다면 우리는 아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듣지 않고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에 졸지에 친구는 '개새끼'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듣지 않았으면서도 다 아는, 그래서 관계를 망치는 대화를 종종 본다. 당장 부모와 자식의 말다툼을 보라. 부모가 자식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면 자식은 곧 "엄마가 무슨 말 하는지를 잘 알거든. 그러니 내 말 들어봐"라며 자기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그러면 곧 엄마도 자식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나도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거든. 그러니 엄마 말을 들어봐." 아무도 듣지 않고 서로 다 안다고 주장한다. 신기하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우린 어떻게 다 알고 있을까?
다 안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가 듣지 않고 생각하기를 멈출 때 우리는 친구에서 '개새끼'가 된다. 친구와 개새끼는 한 끗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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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어제 교민판 한국일보를 보다가 이 칼럼에 필이 꽂혔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을 뒤져 포스팅을 했다.
내 그대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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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9일 화요일
오빠
맹하린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오빠는 이리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어대학 일본어과를 마쳤다.
중학교 때부터 사진에 심취한 오빠는 오로지 사진 때문에 일본어과를 선택했다고 본다.
그 당시의 사진이나 인쇄기술은 일본을 따라잡을만한 국가(國家)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월간지의 사진기자로 취직했고, 선배와 종로 2가에 DP&E점을 차렸다.
컬러사진이 막 시작된 즈음이라 오빠의 가게는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
나는 생일선물로 오빠에게서 일제 자동카메라를 선물로 받아 친구들과 사진을 엄청 많이 찍었다.
산악회(山岳會)에 가입하여 주말마다 등산을 즐겼기 때문에.
그리고 사진현상은 오빠 덕에 항상 공짜였기 때문에.
오빠는 머리도 나쁘지 않은 데다, 특히 음악을 좋아해서 남성중학교 때부터 밴드부의 작은 북 담당이었다.
국경일이 되면 이리에 있는 모든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역전광장에 운집(雲集)하여 단체행사를 치렀는데 오빠가 소속된 남성고등학교의 밴드부원들이 개선가(凱旋歌)를 울리며 중앙에 짜잔, 나타나곤 했다.
작은 북의 오빠는 항상 중심부에 있었다.
나는 얼마나 비밀스런 애였는지 친구들에게 오빠를 말하지 않았고, 동네 애들한테도 입막음을 단단히 해뒀기 때문에 그 사실은 동네 친구들 외엔 아무도 몰랐다.
오빠는 장래희망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내가 대학 다니며 팝송을 즐기게 되자, 귀 버린다고 클래식만을 권유하며 오빠는 자면서도 클래식을 들으며 잤고 깨면서도 클래식을 들으며 깨어났다.
하학 후면 동생들 다 제쳐 두고 오빠는 내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캐묻거나 영어 책을 소리 내어 읽히기도 했다.
자상한 성격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서려 있어 매사에 조심스럽던 오빠.
오빠는 친구가 열 명도 더 되었고, 특히 동수오빠하고는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그런데 집으로 친구들이 찾아 오면 내 방의 방문부터 닫았다.
오빠친구들은 나를 참 예뻐 했지만 오로지 친구의 동생으로만 그래야 한다는 철칙을 잘 고수했고, 나 역시 오빠 친구 중 그 누구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이 나마의 글쟁이가 된 건 호남평야의 자연도 자연이었고, 할머니나 맹고모의 영향이 컸겠지만 오빠의 보살핌 역시 지대했으리라 여겨진다.
여름방학이면 옆 마당에 작고 앙증맞은 천막을 치고 내 숙제를 돕거나 음악공부까지 시켰었고 실기연습까지 시키던 오빠.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서글퍼진 어둔 때
.....................................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니
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로
..........................................
오빠는 현재, IT계통에 종사하는 아들 맹한경 덕택에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지금껏 술을 끊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도 안 끊겠다고 큰 소리 탕탕치는 오빠지만 몇 개인가의 병을 끼고 사는 눈치다.
고혈압, 골다공증 등등.
오라버니!
당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이 못난이 멀리서나마 경례(敬禮)를 바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핵심을 언제나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클래식 열심히 잘 듣고 있어요.
하루하루 사는 게 심심치는 않다는 지극히 단순한 당위성에 만족하면서요.
오빠가 등장하는 지난 세월에게 때때로 다가갈 수 있어 행복해요.
고마워요,
내게 오빠 노릇 제대로 해줬던 날들...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진정 커다란 격려(激勵)였다고 자주 감사하게 되어요.

오마니와 오빠와 남동생 덕재, 그리고 아들.

가운데가 오빠. 내 오른 쪽이 제부.

내 동생 맹미숙.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내 문우(文友)들
맹하린
보름 전의 월요일은 국경일이라서 문협의 야유회에 다녀왔다.
해마다 한 번은 기본으로 가는 뿐따라라 강으로였다.
지독한 감기를 앓는 깜냥으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고, 안 가고 싶었는데 사람 노릇이라는 게 그리 단순한 일만은 아니어서 옷을 여러 겹씩 단단히 껴입고, 봄인데도 털옷까지 걸친 중무장 차림이었다.
몇몇 여류들이 내 털옷을 가장 부러워했을 정도로 날씨는 매섭게 추웠다.
P전 회장은 돌아오는 자동차에서 안 오려다 맹선생님 때문에 왔노라고 표현했다.
아사도를 잘 굽는 대가(大家)라서 안 올 수가 없었겠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싫진 않았다.
그리고 내 김치가 단연 인기였다.
김치를 잘 안 먹던 회원들도 김치를 맛 있게 먹었다고 칭찬했다.
나는 여러 문우들이 출발 전에 모인 바다가게의 책상 위에 김치 통을 약간 소리 나게 놓으며 투정처럼 말했었다.
"원래 왕따는 이런 것도 준비해와야 돼서 너무나 성가셔요."
문우들은 합창처럼 웃었다.
바리톤, 베이스, 소프라노, 알토 등이 적당히 뒤섞인 웃음이었다.
작가정신(作家精神)이 부족한 문우들에게서 잊을 만 하면 항명(抗命)도 받는다.
사실 작가정신(作家精神)이 모자라는 짓을 못마땅해 하는 자체가 작가정신(作家精神)에 위배(違背)되는 일이긴 하다.
가장 견딜 수 없는 농담은 나를 자꾸만 경로석으로 가라고 놀리는 일이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나 듣는 말이다.
한 번만 더 듣게 되면 문협을 안 나갈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 있는 중이다.
안 웃자니 그렇고 웃자니 그렇고 그런 농담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우를 다잡았나 하면 저 문우가 또 시작을 한다.
관심인지 비난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힐 때가 많다.
이래 저래 나는 점차 은둔자가 되어 가는 판국이다.
하지만 나는 대체적으로 대접을 받는 위치에 있는 편이기는 하다.
문협 뿐 아니라, 자유게시판의 은둔문인들 역시 나는 아끼고 사랑한다.
페북이나 트위터도 즐겨 들르지만, 자유게시판은 하루에 열 번도 더 찾아간다.
동생이나 조카 같은 은둔문인들을 음으로 양으로 두둔하고 싶기 때문이다.
페북이나 트위터는 항상 이웃 동네 같은데, 자유게시판은 내가 사는 동네인 게 분명하고 확실하다.
감기를 앓느라 강가에 몇 번쯤 혼자서 다녀왔을 뿐, 내내 잔디 위에 깔린 카펫 위에 엎뎌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통 사진도 못 찍었다.
강은 잔잔히 용솟음치는 밀물처럼 내 시야 가득 자꾸만 밀려 왔다.
찬바람을 쏘여 감기가 더 심해졌지만 잘 다녀온 소풍이었다.
이제 은둔하는 내 문우들을 만나러 쪼르르 자유게시판에 다녀와야겠다.
가끔은 그들을 우리 가게의 고객으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여긴다.
느낌이 그럴 경우엔 나는 시치미 뚝 떼는 선수 중의 선수다.
그들의 마음은 그 아름다운, 아름답다기 보다 빛나는 것 같은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고는 했다.
만일 자유게시판이 없었다면 그들은, 또는 우리는 아마도 돈에 치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매상을 많이 올리려고 매장을 상품으로 꽉 채우며 살기는 싫다.
수더분, 흐르며 우연히, 혹은 필연처럼 만나게 되는 문우들이 있어 그런 대로의 살맛이 난다.
그들이 있어 잡문이라도 끼적이게 되는 것이다.
내 뇌(腦)속에는 가족이 걸어둔 가훈(家訓)이 무사튼튼 언제나 걸려 있다.
"글 가지고 돈 벌 생각은 마세요.
오로지 글도 돈도 쓰고 싶어서 쓰는 분이 되세요.
돈 버는 일은 작은 꽃가게로 대만족이셔야 합니다."
안다. 재물을 모으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되지는 말라는 뜻이라는 거.
재바른 근심과 걱정을 지닌 과정 속에서도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진정한 행복이라는 정도는…….
때로 내가 만나는 문우들이 위트 넘치는 전사들일 때가 없잖아 있지만, 대부분 예민한 존재일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문우라는 설정은, 편하면서도 껄끄러운 존재가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새싹을 자라게 할 뿐 아니라, 온갖 아픔을 치료하는 의로움의 터전도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꾸만 비끌어 매고 걸어 잠그는 정서(情緖)를 우리가, 또는 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풀어내느냐가 우리 능력의 관건(關鍵)이랄 수 있다.
우리는 갈수록 첨예로워지는 게 아니라 차츰 너그러워져야 한다.
2012년 10월 6일 토요일
괜찮았어요!
맹하린
잃어버린 밥맛을 찾으려고 요즘 부쩍 부식비를 과용(過用)하고 있는 실정이다.
며칠 전엔 갈비를 사다 토막 내어 차가운 물에 담가서 붉은 물을 일단 뺐다.
그리고 펄펄 끓는 물에 다이빙을 시켰다가 적당히 익혀 당면 좀 넣었고, 마늘과 파 송송을 얹어 소금과 후추로 간맞춰 들었다.
괜찮았다.
엊그제는 명태를 사다가 맨 밑에 양파와 무를 켜켜로 깔고, 맨 위엔 풋고추를 얹어 매콤한 양념 찜을 했다.
콩나물은 한 켠에 깐 뒤 익었을 때 수저나 주걱으로 숨을 좀 가라앉혀야 부드럽다.
괜찮았다.
어제는 만두였다.
그냥 만두가 아니라 감자를 찐 뒤 으깬 위에 삶은 계란도 몇 개 6등분으로 썰고 작고 네모나게 썬 양파와 갈아낸 고기를 볶아서 치즈와 살살 버무린 만두소를 현지인슈퍼에서 파는 오븐용 만두피에 넣고,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약간만 둘러 구워내는 우리집식 만두다.
경우에 따라 월계수 잎이나 현지인들이 쓰는 피망가루도 넣는다.
때로는 소고기 대신, 삶아 익힌 닭가슴살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서 며칠동안 간식시간마다 차게 먹는 맛 또한 근사하다.
옥수수 알갱이도 감자와 같이 삶아서 한 땀 한 땀 떼어 함께 넣었더니 더 고소한 만두가 되었다.
뜨거운 상태일 때 치즈의 녹아 있는 맛은 떠나던 감기도 다시 돌아와 욕심을 낼 지경으로 감동적인 맛이다.
괜찮았다.
밤새 비가 내렸고, 지금 새벽 5시쯤인데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은 각자 싸먹는 김밥이 될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야채를 볶고, 계란지단도 부치고, 생선맛살과 어묵까지 준비하여 커다란 접시에 예쁘게 담은 후, 각자가 취향대로 싸먹는 김밥이다.
와사비를 곁들인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환상이다.
괜찮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비 오는 날은 김치볶음밥이 낫지 않을까.
괜찮을 것 같다.
내 안에서 보름을 머물던 감기는 그동안의 극진한 대접(?)에 감사하다면서 어제부터 떠날 행장(行裝)을 꾸리는 모습이다.
1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감기.
올해는 오기는 왔는데 갈 생각을 안 하는 눈치여서 거의 날마다 칙사(勅使)대접을 했다.
드디어 가겠다고 가방을 꾸리고 있다.
지독했지만 덕택에 나 역시 대접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부디 안녕히 가시라고
자주 뵙고 싶지만
너무 자주는 권태를 몰고 올 게 확실하다고
제발 다음 해에나 뵙자고…….
나는 위대하신 감기님에게 작별인사를 올리고 있다.
가다가 다시 올까봐 우선 꿀 섞은 생강차를 한 잔 대접하고 있다.
내년에나 뵈어요.
괜찮았어요!
2012년 10월 1일 월요일
추석을 바쁘게 보내고
맹하린
추석이 되면, 아르헨티나에 몸담고 사는 일부 교민들은 교회의 예배와 점심식사를 끝내고 우리 가게에 미리 맞춰둔 꽃다발을 찾은 후, 한인묘원에 가느라 바쁘다.
더러는 Memorial이나 Jardin de paz로 불리는 공원묘지에 가는 분들도 있다.
일요일에 문을 여는 한국인 꽃가게는 우리 뿐이므로, 아침 일찍부터 오후 네댓 시까지 빈틈없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필이면 마약에 절은 젊은 노숙인 들까지 나를 작전에 넣었나 보았다.
맨 처음 빈 생수병을 들고 얼굴을 잔뜩 찡그려 뜨려 울상을 한 20초반의 여자 노숙인이 나타났다.
물 좀 달라는 요청이었다.
물을 담아 주며 불쌍하다는 생각에 약간의 적선을 한 게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契機)로 삼은 노숙인 들은 바쁜 와중에 있는 내게 교대로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유리창을 닦아 주고 용돈을 얻으려는데 퐁퐁 비누 좀 나눠줘요.”
거기까지도 참았고, 물비누도 덜어줬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적선은 건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습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음 차례는 Balde(양동이)를 든 또 다른 노숙인 이었다.
나는 빗장으로 고정해 놓은 틈새로 야단 좀 제대로 쳤다.
너그러울 때는 너그럽지만, 볼상 사나운 일에는 가차 없는 나.
"너희의 연극에 오늘 내가 바보로 등장하니? 중앙분리대에 공동수도가 멀쩡하게 잘 나오고 있잖아! 그런데 왜 아파서 쩔쩔매며 일하는 중인 나까지 지나가는 자동차의 유리창 취급을 하는 거야?"
그래도 마지막처럼 찾아든 여자노숙자는 어디서 훔쳤는지 팬지꽃을 한 박스나 가져 왔다.
"나는 내가 골라서 사 오는 꽃나무만을 판매하거든?"
거지는 달리 거지가 되지는 않는다. 일하기 싫어하고 뭘 바라기 때문에 거지 신세를 못 면한다고 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거지근성이 살아있는 것이다.
내 생전 감기를 열흘이나 앓아 본 일은 처음이다.
입맛을 잃어 밥 굶기를 여러 날이나 밥 먹듯 했던 날들도 첨이다.
거지들이 교대로 찾아오던 날 역시 처음이었다.
어머니날이나 봄의 날이면 인터넷 신문이나 인터넷 게시판에 잊지 않고 광고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봄의 날엔 결혼식 꽃이 겹쳐, 남의 중요한 일생일대의 행사를 불성실하게 해낼까가 염려되어 일부러 광고도 사양했었다.
매상은 예년보다 줄지가 않았다고 본다.
일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당연히 건강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열흘 동안 되도록 글도 멀리하며 지냈다.
10월 세 번 째 주일인 어머니날 준비를 위해 나는 거의 포스팅도 덜하며 바쁨과 휴식 사이를 오갈 것이다.
한 계단씩이 아니고 큰일만을 도모(圖謀)하는 대통령 크리스티나의 정책다운 정책은 어찌 된 일인지 한인 타운 거리를 거지와 마약쟁이들의 천국이 되도록 만들었다.
일요일이나 수요일에 나타나는 한국인들에게서 생기는 적선이 수월찮기 때문이다.
아베쟈네다도 좌판쟁이들과 대낮까지 설치는 강도들의 활동무대가 되는 일에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만 안 당하고 나만 잘 살고 있으면 된다는 인식에 젖은 사람들이 따로 없어진 시점이다.
본래의 의도(意圖)가 어찌 되었던 간에 거지와 마약쟁이와 절도범이나 강도들까지 육성(育成)하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주 떠오르는 현실이다.
정부는 어디서 정책개발이 삐거덕대고 있는지 정치쇄신을 중점적으로 되짚어 볼 필요가 있어야겠다.
분명한 것은 복지국가건설은 거지나 강도 등의 활동영역에 보탬이 되고 더불어 사는 행태는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이라도 정치적 혁신과 개선에 포커스를 제대로 맞추는 나라가 되었으면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
세금만 걷어 들이는 게 능사(能事)는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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