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여름바지
-문정희
여름 다 지나고 신선한 초가을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보라색 여름바지 하나 사 들고 돌아오며
벌써 차가운 후회가 바람처럼 숭숭
뼛속으로 스미어옴을 느낀다
왜 나는 모든 것을 저지른 후에야 아는가
만져보고 난 후에야 뜨겁다고 깨닫는가
늘 화상을 입는가
사람들이 이미 겨울을 준비할 때
여름의 잔해에 가슴을 태우고
사랑을 떠나 보낸 후에야 사랑에 빠져
한 생애를 가슴 치고 사는가
내 키보다 턱없이 긴 바지 단을 줄이며
내 어리석음을 가위로 잘라내며
애써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어 본다
누구나 정해진 궤도를 가는 건 아니지
돌발과 우연이 인생이기도 해
그러나 어느 가을날 하루가
더운 사랑으로 다시 뒤집힐 수 있을까
이 보라색 바지를 위해
무릎 아래까지 흰 별들이 총총 나 있는
보라색 여름바지를 입고 서서
홀로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다
숭숭 기어드는 차가운 바람 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