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0일 수요일

겸애주의




                   맹하린



친구 수산나가 두 달이나 무소식이었다.
우리 가게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인성당에 오게 되면 한 달에 한 두 번은 찾아오던 그녀였다.
엊그제 일요일에 그녀가 나타났다.
때가 때이니만큼 외숙씨 얘기를 주로 나눴다.
얘기 도중, 그녀는 내손을 잡으며 말했다.
"참 건강하시고 항상 밝으셔서 보기 좋아요."
"노동자가 오매불망 건강이라도 챙겨야 나름 걸맞지 않을까요?"
그녀가 돌아가는 시간에 나도 따라 나섰다.
흑임자로 만든 미숫가루를 사러 D떡집에 가야 하는데 함께 가자고 말하면서.

세 블록을 사이좋게 팔짱끼고 걸었다.
두 몫으로 담아 달래서 그녀에게 한 봉지 건넸다.
내 몫까지 본인이 지불하려고 했지만, 우격다짐으로 내가 다 냈다.
바쁠 때 나를 도와 준 고마움을 나는 그런 식으로 갚아 나간다.
다시 팔짱 끼고 걸어 태극당제과 모퉁이에 닿자,  7번과 50번 버스가 동시에 왔고 나란히 스톱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50번 버스에 수산나는  탔다.
우리 가게에서부터 이미 꺼내어 손에 꼭 쥐고 다니던 교통카드를 그녀가 버스기사 옆의 메모난 기계에 대는 모습까지 지켜 본 후, 산책로를 택해 총총 돌아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혼자서 쿡쿡 웃었을 것이다.
버스 카드를 기계에 대던 수산나가 나보다 훨씬 유식해 보였기 때문이다.
수산나의 집엔 자가용이 세 대 있다. 남편과 아들과 딸이 각각 따로 사용한다.
그런데 수산나는 오로지 버스,  버스만을 이용한다.

사실은 크게 앓고 난 직후(直後)라서 성당의 독서그룹도 구역반장 위임도   모두 반납(返納)하거나 고사하고  왔다던  수산나.
온세 도매상 지역에 큼직한 옷가게도 지녔고, 비록 경제적 기반(基盤)을 확고히 구축(構築)해 놓긴 했어도, 평생을 소모해 왔을 이민자로서의 파근파근한 그녀의 일상(日常)들을 어루만지듯 나의 상념(想念)마다 다듬으며 산책로를 걷는 내게 집중포화(集中砲火)처럼 쏟아져 내리던 여름햇살을 기억(記憶)한다.

덤으로 사는 인생.
크게 근심할 일도 그다지 조심하고 싶은 일도 없이 타박타박 걷기만 하면 도달이 가능할 지점이 되는 과정에 이른 내게 지인들의 떠남이나 와병(臥病)은 일종의 쓸쓸한 아픔이 된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아직껏 사뭇 미려(美麗)하고 섬세(纖細)한 것을...... .
평소에 겸애(兼愛)를 표방해온바 여실했지만, 새삼 겸애주의(兼愛主義)에 관심이 쏠리고 쏠리는 중이다.
때로 이 나라에서의 외로움엔 나를 감싸며 마음을 휘젓는 기류(氣流) 같은 게 분명 있다.
단정하건대 부에노스아이레스 땅, 여기에서야 나는 비로소 진솔한 나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생(生)에서 더좀 강렬한 의미를 찾고 여러 숙고(熟考) 끝에 친구에 대한 아낌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됐다면 이제라도 그리 살아야겠다는 각오다.
나의 친구들에 대한 열정(熱情)은 어떤 면으로는 사랑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구속(拘束)해 왔을 것도  같다.
오늘, 유난히 셍 떽쥐뻬리의 명언이 내게 회오리친다,
"사랑, 나의 안내로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

2013년 2월 19일 화요일

행주강

                

            박철                                 



 
   내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은 외로움 탓이다
  시가 길어지는 일처럼 요즘 그리움이란 지금은 부재하는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누군가 나의 별빛을 본다면 희망에 대해 노래해다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안개 짙은 야적, 강의 하류에선 그들 나름대로 시대를 앓고
  둑으로 쌓아 올리는 바람이 외면을 받으며 갈대 곁에 섰다
  언덕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나련만
  강폭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일 거다
  사랑이든 역사든 배고픔을 달래는 무엇이든 말로서 될 일이 아니건만
  물살이 거듭 손마디를 꺾으며 행주강이 흐른다
  400년 전 임진란의 함성이 되살아나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대는 강
  치마폭에 돌덩이를 주워 담던 아낙도 가끔은 허리를 펴 강 건너 친정아비의
  안부가 그립기도 했을 저녁 바람처럼 날이 진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5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50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오늘은 내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재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운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2013년 2월 16일 토요일

연인의 날


      

        맹하린



밸런타인데이라기보다 연인의 날인 14일은 물론이고 15일까지 이틀에 걸쳐 퍽으나 바빴다.
매번 느끼는 바로는, 아침나절에 시집(?) 가는 꽃에 따라 그날의 유행과 가격이 평균화 되고는 한다는 점이다.
100페소(15달러 상당)의 라운드형 꽃다발이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전화주문을 하는 고객마다 둥근형으로 된 100페소 가격의 다발에 초콜릿도 주시는 거죠,를 노래 삼고 있었다.
해를 더해 갈수록 현지인 고객이 늘어나는 추세(趨勢)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고객은 현지인 마르셀로 내외였다.
항상 그래왔듯 마르셀로는  당일에 앞당겨, 10일쯤에 미리 주문하러 왔었다.
딸이 결혼하는데 살롱의 메인 식탁에 놓을 사방 화와 부케를 맡아달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흰색을 바탕으로 한 연분홍을  매치하여  장식해 놓기로 했다.
14일 오전 11시에 찾으러 오기로 했었다.
바쁜 날은 뭐가 겹쳐도 겹치게 된다.
바쁘기 마련인 날이라서 그런 것 같다.

정각 11시에 도착한 마르셀로 내외.
초면이 되는 부인은 자기 이름이 제시카라고 이름부터 밝혔다.
탤런트 장미희와 흡사한 분위기에 말투까지 똑 같았다.
부인이 말을 시키기도 전에 마르셀로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내게 살짝 윙크하며 가만히 들어내 달라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생김새와는 달리, 의외로 시름을 섞으며 제시카는 말을 더듬거리듯 이어 나갔다.
"도대체 꽃을 맞추기는 했다는데, 평소에 당신이 만든 꽃을 선물 받은 경험은 많아도 이번엔 아주 특별한 날인데, 딸애가 결혼하는데, 그런데 마르셀로는 잘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는 거 있죠? 플라스틱으로 된 조화(造花)로 맞춘 것 같다고도 그러고,  빨강과 노랑을 주로 꽂아 달라고 부탁했었다고 까지 말하는가 하면, 그리고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서... 우린 매사에 튀는 걸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 생활신조라서   걱정이 참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마르셀로는 재삼  내게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좋은가. 뭔가 나쁜 일을 저지르진  않았는데, 그런데 말썽에 휘말린 듯 한 이 느낌은...)
"당신 남편 마르셀로는 주문을 꽤나 정확하게 했던 걸로 알아요. 오늘은 약간 바쁜 날이라서 주문보다 소홀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빨강과 노랑이 아니라, 비올레타(보라)와 살몬(주황)으로 장식한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디오스 미오(세상에나)!  비올레타... 그 슬픈 색으로도  부족하여,   딸이 가장 배척하는 살몬색을요?"
작으면서 또박또박한 음성을 내지르는 차갑고 지성적인 경악이라니!
아무 말 없이 곧장 작업실에서 내간 하양과 분홍이 고루 배합된 부케와 사방 화를 보는 순간 당장에 마음에 들어 하며 마르셀로의 어께에 쓰러지듯 기대며 웃는 그녀, 제시카.

언제나 그렇듯 자가용의 바울(트렁크)에 꽃들을 실어 주자, 제시카는 내게 뜬금없이 물었다.
"저 건너 편 공장의 간판은 누가 세 놓은 거죠? 어떤 용도에 사용할 수 있는 공장인가요?"
나는 마르셀로에게 전수 받은 대응을 재빠르게 전달하고 있었다.
"난 모르죠. 단지 저 건너 편 공장의 건너편에서 가게를 할 뿐, 사실 저 공장이 뗄라(피륙)를 취급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아마 당신 남편이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실듯요.  제 생각으로는  남편께서 적절한 답을 매우 멋지게 꾸며내 집으로 가는 동안 근사하게 설명해 줄 것만  같습니다만..."
그 내외의 희극적인 웃음만 잽싸게 접수하고 나는 총총 가게로 돌아와야 했다.
분석하건대 마르셀로는 평소, 부인의 자로 잰 듯 한 성격에 질리고 말았던 마음을 그런 식으로 통쾌하게 복수(復讐)하는 지도 모른다.  절대로 미워하거나 버릴 수도 없는 부인에 대한 애정(愛情)을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에게까지 설득시키는 지도 모르겠고.
나는 마르셀로 내외에게서 영원한 연인(戀人)의 표양을 발견하게 됐었다.
제시카에게서는 순간적이랄 수 있게,  배우자의 그 어떤 면모조차 신뢰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여긴다.

아르헨티나 여인들은 현지인이건 교민이건 남자를 제대로 휘두를 줄 아는 것 같으다.
밸런타이데이를 연인의 날로 뒤바꿀 수 있도록 역전의 실력을 발휘한  것도 그렇고, 그리하여  꽃 사러 온 여성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기에 하는 말.

불경기에는 불경기에 어울리는 상품이 있다.
물론 값진 꽃바구니 주문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착한 가격의 상품이 제대로 먹히는 시절(時節)이었다.

2013년 2월 12일 화요일

폭우...





                     맹하린



월요일엔 카니발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라서 이 대단한 나라는 또다시 연휴였다.
공휴일에 특히 가게를 여는 나는 퇴근시간을 약간 앞당겨야 했다.
통상적으로 7시 30경에 가게 문을 닫는데, 7시부터 엄청난 폭우(暴雨)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
7시 10분쯤 서둘러 셔터를 내렸다.
집까지의 세 블록을 정강이까지 닿는 물살에 맡기고 되도록 찰박이며 기분 좋게 헤쳐 나갔다.
순복음교회 앞 모퉁이에서는 급류에 휘말려 잠시 왼발이 휘청했지만, 깔깔대며 순식간에 극복해 냈다.
모퉁이에서 내가 건너오기를 기다리던 가족이 껄껄 대는 웃음으로 구조(構造)의 손길을 대신하고 있었다.
깔깔과 껄껄이 각자 긴 손을 뻗쳐 서로를 붙잡아 주던 찰나였다.
신비스럽게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뚝, 그쳤다.
나로선 행복하게  받아들인 비의 카니발이었을 것이다.
음력 설날이라 한인묘원에 가는 분들이 있어 약간은 바빴던 날...
이런 우연(偶然)을 보았을까.
설날이어선지 폭우(暴雨)도 축복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나의 생활은 얼마 전부터 전혀 다른 접점(接點)에서 영위(營爲)되는 느낌 유난히 강하다.
나 같은 사람의 상쾌함을 돋우려고 마련된 성싶은 이 도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는 내 생(生)을 툭하면 예술(藝術)에 기대며 거뜬상쾌히 지낼 수 있어 나름 감사로이 여기는 중이다.
예술(藝術)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우선은 이끌어 주다가 싹수가 노랗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치는 묘수(妙手)의 도사다.
최근의 나는 방정식을 풀기 시작했다.
방정식은 언제라도 내게 난해한 장르가 아닐 수 없다.
나와 같은 수다꾼이 단답형의 페이스에 어찌 당할까.
세상이치(世上理致)란 언제나 마찬가지다.
말 많으면 지는 것.
더우면 지치는 사람도 많지만 난 정말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산뜻함의 연속처럼 단순명료하게 잘 흐르는 과정에 이르렀다.
눈앞에 펼쳐졌던 길이 끊어진 듯 한 느낌 가득했는데, 그런데 다른 숲길에 이른 이 기분이란 대체 무슨 의미인 것일까.
오르페우스와 같이 뒤돌아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삶도 글도 운명처럼 극복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뭔가를 위해,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고,  영감(靈感)이 다가와 그리 되는 것.
폭우가 내려서, 자가용을 안 키워서, 택시나 레미스를 타기는 정녕 싫어서가 아니라 폭우(暴雨)가 반가워, 헤쳐 나가는 순간이 극적(劇的)이어서 폭우(暴雨)를 반갑게 맞아낸 날이었다.
우산으로는 미약했던지 옷이고 몸이고 함초롬히 젖었지만 폭우(暴雨)로 인해 즐거웠다.
그것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했던 날들을 치유(治癒)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 글에 침잠한다기 보다 한층 글에게 찰박이겠다.
나는 폭우(暴雨)에게서 거대(巨大)한 고독(孤獨)을 보았다.

2013년 2월 10일 일요일

외숙씨



         맹하린


그녀는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외숙 씨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내가 외숙 씨를 알게 된 건 재아부인회에서였다.
그 당시 회장으로 선출된 이웃의 N여인에게서,  회원 가입은 물론이고 부회장이라는 임원까지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외숙 씨는 그때 회계를 담당하게 됐었다.
나는 모임도 줄일만큼 줄였고 임원을 맡지 않는 주의에 철저했었지만, N여인과의 끈끈한 정 때문에 그 일을 순수하게 받아 들였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외숙 씨와 나는 매사에 의기투합(意氣投合)하며  잘도 어울렸다.
절약이 생활화된 면도 그렇고,  외출복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산뜻함을 강조하며 입는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키는 같지만(165cm), 외숙 씨는 47kg이고, 나는 56kg였다.
신비로운 건 56kg이던 외숙 씨는 모델과 같은 몸매로 변화 되었고, 47kg이던 나는 몇 십 년 동안 9kg의 체중이 불어난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숙 씨는 봉사마다  열심이었고,  나는 중노동자니 서로 그 정도는 유지해야 하는 것.
너무도 나약해 보여 봄의 날이나 어머니날 대목 때는 일손이 딸리면서도 차마 연락도 못했었다.
하지만 외숙 씨와  친구 수산나는 앞치마를 싸들고 짠! 하게 나타나고는 했다.
그렇게 그녀들은 마른일 진 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나를 거들고 도왔다.

금요일 오후.
N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외숙 씨 어떻게 해요?"
"외숙 씨가 왜요?
"상조회 게시판에 올라 왔다는데... 못 봤어요?  아직 확실하진 않은 것 같아요.  형님이 글을 올린 이은산씨에게 연락 좀 해봐요. "
"요즘 게시판을 통 못 봐요. 휴가철이라서 철저히 놀고먹느라 내 나름대로  바쁘거든요."
이은산 전 한인타운회장은 전화건 핸드폰이건 모두  불통이었다.
결국은 N여인이 다시 소식을 알려 왔다.

내가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던 외숙 씨.
교회 갔다 오는 길에, 수입상회에 그릇이나 이불 사러 온 길에, 크루즈 여행을 엄마하고 열흘 동안 다녀왔다면서 기념용 티셔츠를 두 장 선물로 건네 주며,  함께 있는 내내, 언니라는 노래를 언니 언니 부르고 또 부른 후에나 돌아가던 외숙 씨.

외숙 씨는 그리도 허무하게 떠났다.
교회 수양 관에서 사용할 야채와 과일 등을 구입하러 손수 운전하고 청과시장에 갔다가, 도둑과 핸드백 때문에 실랑이 하는 과정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세상에나!
어떤 나라는 지진이나 전쟁이나 쓰나미로 한꺼번에 많은 사상자를 내는가 하면,  이 잘난 나라는 일부러 도둑을 키우고 먹여 한 알의 총알만을 장전한 러시안 룰렛처럼 국민이건 이민자건 전혀 상관하지 않고 순서 없이  세상을 뜨게 하고, 겨냥까지 하고 있구나.

사실, 토요일인 어제 오후는  S식당에서 외숙 씨  엄마의 팔순잔치를 지내기로 예약된 날이었다.
항상 내 일을 자주 도왔던 터라,  사방 화와 꽃다발 열 개를 부조로 삼아 달라는 언질을 나는 이미 건넨 계제(階梯)였고.
언제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꼭 한 번 들르라고 하자,  엄마의 팔순잔치나 치른 후 보자던 외숙 씨.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외숙 씨.
생일 꽃바구니도 가장 커다랗게 해줄 것을.
밥도 자주 함께 먹을 걸.
자주 포옹해 줬어야 했던 것을,
외숙 씨가 떠나고 나서야 더 좀 잘해 줄 걸 하는 후회막심을 새삼 뒤늦게 꺼내고 또 꺼낸다.
오늘 하루 내내 숲속에서 외숙 씨를 찾아야 하는 역할을 떠맡은 술래처럼,  나는 하루 종일 복잡하게 헤매고 헤맨 심정이다.
그녀도 나도 장애물 경기를 거의 마치고 드디어 평탄한 코스에 도착한 것 같다고   함께 기쁨의 말들을 나누며 자연스레  손까지 잡았었는데…….

피가 흐르지 않아 자나 깨나 돈 버는 일로 수혈(輸血)을 일삼는 이민사회의 기류(氣流)에 편승하여 외숙 씨는 참 알뜰살뜰 냉철할 만큼 치밀한 부(富)를 이룩했다.
항상 나에 대한 배려와 정이 넘치고 넘쳤고.
장의사를 벌써 두 번째 다녀왔다.
월요일 아침나절의  발인예배는 물론이고, 장지까지 다녀올 작정이지만 생각대로 될 지 모르겠다. 예약이 느닷없이 닥치면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 준 하트형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무심하고 무구한 표정으로  눈 감은 채  누워 있던 외숙 씨.
그동안 다복하게 잘 살고 간 게 훤히 보였다. 남편, 그리고 세 아들, 엄마, 남동생과 여동생들, 제부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아웃 포커스로 비친다.
나는 외숙 씨를 잃었다.
나의 슬픔은 이미 너무 절제력이 강하다.
그렇지만 동쪽을 봐도 서쪽을 봐도 외숙 씨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잘 가요, 외숙 씨. 차우차우!!!
진정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