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어린 시절이 없었어!”
수원대 교수 이주향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생사를 넘나들며 던진 말이 공개됐다. 나를 그토록 ‘찡’하게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린아이를 사랑합니다.”
생각보다 어린 시절은 소중하고 중요하다.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 “아빠”라 부르게 되는 존재가 나를 든든히 지켜주어야 하는 시절, 선악보다는 호불호가 중요하고 책임감보다는 호기심을 인정받고 격려받아야 하는 시절, 그 시절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는 인생의 밑그림이다.
그 시절이 없이 일찍 철이 나야 하는 아이들은 평생 ‘쓸모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할까 조급하게 동동거린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코가 꿰거나, 세상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주류사회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아니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존재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를 그린 그림 중에 미소를 짓게 되는 그림이 있다. 영국 화가 오처드슨이 그린 ‘아기도련님’이다. 엄마가 부쳐주는 부채에 반응하며 천사처럼 노는 아기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이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런 아기의 공간에 걸맞게 주변이 온통 따뜻하다. 따뜻한 노란 빛을 완성하는 것은 엄마의 따스한 눈빛이다.
아이는 엄마의 따스한 품이나 아빠의 훈훈한 표정 같은 것 없이 세상을 믿게 되지 못한다. 엄마가 조급하면 아이는 불안이 많은 인간이 되기 쉽고, 아빠가 공감에 인색하면 아이는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쓰다가 스스로 함정을 파는 인간이 되기 쉽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지켜주는 일은 어른들의 의무라 생각한다. 일곱 살 된 아이가 영어 배우고, 태권도 배우고, 그림 배우고, 피아노 배우고, 심지어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바둑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일곱 군데나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김지하 선생의 ‘무화과’는 내게는 꽃 시절이 없었다는데, 요즘 아이들은 아예 싹 시절이 없는 것 같다.
왜 어른들은 아이에게서 어린 시절을 거두어들일까. 혹 그들이 자기 어린 시절과 화해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린 시절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나’의 어린 시절과 화해해 보자. 당신의 엄마, 아빠는 어땠는가? 엄마, 아빠라 불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당신이 기억하는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마음에 맞는 친구와 도란도란 어린 시절의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기억하며 불러내며 우리 속의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느껴보는 일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아빠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리고 사춘기 때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은 어떤 모습인지, 그러다 보면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원형이 보인다.
기억이란 묘하다. 끊임없이 되돌아와 현재와 함께한다. 그래서 나의 과거와 노는 일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과 잘 놀다보면 지금의 나의 그늘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고 자기 자신과 잘 놀 수 있는 때가 오지만, 내가 나의 그늘을 알아채지 못하는 한 나는 나의 그늘 아래서도 쉴 수가 없다.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28년 동안의 침묵(沈黙)
맹하린
1985년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방문을 선포하자, 전노렌죠신부님을 위시한 53명의 방문단에 합류한 우리 내외는 모국에 다녀오게 되었다.
에사이사 공항의 2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남편은 성당의 교우이자, 교민브로커로 명성을 날리던 Y씨에게 찰나적으로 팔을 이끌렸었나 보았다.
나는 남편의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이층에 닿은 상황이었다.
Y씨는 남편에게 두툼한 서류봉투와 함께, 보답이랍시고 2Kg용량의 꿀 병까지 불쑥 안기더니 금세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에 도착하면 김포공항에 사람이 나와 있다가 받아갈 거라는 언질을 속삭이듯 은밀하게 곁들이고 나서…….
비행기에 탑승 했을 때, 우리 자리로 다가오신 김마리아 어르신께서는, 남편에게 염려의 말씀을 잔뜩 쏟아냈다.
"내게 부탁하는 걸 겨우 거절 했었는데 결국 형제님이 떠맡으셨네요!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브로커가 맡기는 서류가 신상(身上)에 이로울 리는 절대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남편에게서 서류봉투를 가로채 듯 잡아당겨 우선 손으로 만져 보았다.
촉감만으로도 여권이 확실했다.
여권은, 하나라면 모를까 10개도 더 되는 듯 싶었다.
김마리아 어르신은 애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탁(神託)과 같은 말씀까지 기필코 보탰다.
"갖다 주지 말고 비행기 안의 화장실 쓰레기통에 당장 버리세요! 한국공항에서 무슨 덤터기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나는 남편이 재삼 확인해 보려고 만지작거리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가방 안에 깊숙이 넣으며 비장감 넘치게 말했었다.
"걸려도 내가 걸리는 게 낫겠어요. 당신은 남자라서 여러모로 불리할 확률도 많고."
열 댓 사람에게는 그 여권들이 특별하고 소중했으며 가장 간절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토록 귀중한 물품들을 그런 식으로 폐기처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포공항의 검색대에서 나는 보란 듯이 걸리고 말았다.
걸리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서류봉투라니. 의심을 받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지 않은가.
“이건 뭡니까?”
“아르헨티나 공항에서 남편이 얼떨결에 부탁 받았던, 아는 분의 서류인가 봅니다.”
그는 손으로 서류봉투를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가위부터 집어 들었다.
“우선 뭔가를 보고 나서 얘기합시다.”
가위로 자른 뒤, 손으로 꺼내지 않고 봉투를 위로 쳐들며 내용물 전체를 가차 없이 쏟아 내던 세관원.
인지가 붙은 서류들과 더불어 와르르 쏟아지던 열대여섯 개의 한국여권들.
한국에서 인편을 통하여 일단 아르헨티나로 보내지고, 그리고 비자를 받아 낸 다음 새로 이민을 떠나려던 한국의 신청자들에게 브로커를 통해 안겨진다던 여권들.
큰 짐들은 남편에게 건네도 된다는 혜택이 주어졌지만, 나는 혼자서 김포공항 5층에 있는 수사 실에 들어가 장장 5시간을 머물러야 했다.
공교롭게도 일요일이라, 외무부(외교부) 여권과의 직원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담당자가 여기저기 문의하는 전화를 빗발치듯 해내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나는 군인 몇 사람이 여담(餘談)으로 질문해 오는 아르헨티나의 실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군인 중 하나가 느닷없이 내게 질문했다.
“두렵지 않으세요?”
“죄 지은 일이 없는데 왜 두렵겠어요?”
나는 지금껏 의아심을 품게 된다.
(왜 경찰이 아니고 군인들이었지?)
이쪽에서만 해내던 전화가 저쪽에서도 올 수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전화벨이 지나치게 크고 길게 울렸다.
뒤늦은 여권 과에서의 해답과 결과에 대한 연락이었다.
통화를 끝낸 담당군인은 서류봉투 안에 여권들을 차곡차곡 넣어주며 다짐처럼 충고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만약 이 여권들이 가짜일 경우, 아주머니는 당장 법에 저촉 되며 처벌까지 받습니다. 큰일 날 뻔 하신 겁니다. 차후엔 아무 부탁이나 떠맡으시면 안됩니다. 우린 여태 가짜인지를 조사했던 겁니다. 좁은 땅에서 한 사람이라도 떠나면 애국이 되기도 하겠고...”
나는 그럴 때, 내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다니까요! 그렇게 쓸모 없는 변명 따위를 늘어 놓지 않는, 매우 단순한 성질머리를 지녔다.
동생 같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나는 총총 그곳을 나왔다.
어두워진 공항 밖에는 신부님과 남편의 대부이신 C인솔단장과 몇몇 교우와 남편과 내 형제들 이 그때껏 기다리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특별히 Y씨의 한 패거리로 보이는 멀쩡하고 말쑥한 신사가, 남편이 내 손에서 가져간 봉투를 받아 들고 쏜살 같이 사라지는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너무나 면목이 없다는 바보스러운 생각과 표정 같은 걸 했었다.
남편이라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무실 비슷한 곳에서 군인들이 대접해 주는 커피도 마시며 이약이약 이야기까지 주고 받으며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로 기다렸지만, 그들은 의자도 없는 공항의 바깥에서 무려 5시간이나 부족한 소생인 이 나를 기다려 준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런 시시한 일을 가지고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성격은 아니다.
하물며 나와 남편은 말하자면 그런 사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트집 삼으며 뒤늦게 싸우거나 네 탓, 내 탓을 따지지는 않는 사이 말이다.
그러니 우린 이혼 같은 걸 못해봤을 것이다.
그냥 일어 날 일이 일어났다고 여긴다.
저 높으신 분에게 새로운 시험을 당하고 있으므로 되도록 산뜻하게 넘겨야 한다는 의무감만 키우고 키우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다 할 사과를 제대로 받은 적도 없었고, 잔치나 행사 같은 데서 Y씨를 맞닥뜨리기는 했지만 남편과 나는 묵묵부답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Y씨 내외는 현재 아베쟈네다 의류도매상가 지역에 일수를 놓는 일수쟁이가 되어 일약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예쁘장한 부인은 자녀들 결혼 시킬 때마다 꼭 우리여야 한다는 강한 주관을 펼치며 우리 가게에 웨딩 꽃을 오롯이 믿고 맡겨 왔었다.
나는 계속 침묵을 고수(固守)했었다.
28년 동안의 침묵이다.
내가 배달해 준 여권의 주인공들 열댓 분은 시절이 하수상한 지금껏 아르헨티나에서 잘 살고 있을까.
안 보이는 좋은 인연으로 나와 자주 만나기도 하며 지인(知人)으로까지 남은 건 아닐까.
때때로 돌출(突出)되는 크고 작은 일에 대처하는 나의 의연함은 약간이나마 전설적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겠다.
서양 속담이 이미 내게 가르쳐 줬었다.
<부드러움은 뼈를 부순다.>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범죄의 가공할 양면성
한국일보
토ㅣ요ㅣ에ㅣ세ㅣ이
-김승웅 언론인·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아우슈비츠수용소는 2차 대전 당시 650만 유대인을 한줌의 연기로 날린 상징적 건물이다. 폴란드 오스비에침 마을소재의 관광지로 아우슈비츠는 그 마을의 영어식 발음. 집채더미처럼 쌓인 안경테, 곳간마다 그득한 유대여인들의 머리다발, 검디검은 독가스실의 콘크리트 벽은 수용소 '관광'을 마친지 20수년이 넘는 이 시점까지도 악몽으로 되살아나는 장면들이다.
그림에 그토록 소질을 보여, 비엔나 숲 속을 곧잘 스케치하던 눈 큰 소년 아돌프 히틀러를 무엇이 그토록 바꿔 놓았단 말인가. 히틀러의 생모가 남편과 사별 후 유대인 간부(姦夫)를 갖게 됐고, 따라서 매일 밤낮으로 어머니와 뒹구는 유대인 사내한테 히틀러가 독을 품던 시기를 바로 이때부터로 기산(起算)하는 분석도 있다. 히틀러의 생모 클라라가 남편 알로이스 히틀러와 일찍 사별한 것은 틀림없다. 아들 히틀러의 나이 열네 살 때다.
클라라는 남편과 22세나 나이 차가 있는데다, 실은 남편의 사촌여동생이었다. 그녀가 사촌 오빠와 남녀관계를 맺은 것은 오빠의 둘째 처가 병이 들어 죽기 직전으로, 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불륜관계였다. 아돌프는 그런 범죄가운데 잉태한 아이였다. 아돌프의 청소년기는 이런 반유대정서 속에서 자아를 굳혀간다. 히틀러는 나중에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수 천 수만의 순수 독일 피를 이어 받은 소녀들이 이 역겨운 안짱다리 유대사생아들의 배 밑에 깔려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런 표현은 당시 유행하던 반 유대정서와 히틀러 개인의 성적강박관념의 합작으로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를 돌아보고 10여년 지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관람하면서 나는 거듭 봤다. 저벅대던 나치대원들의 군화소리, 군견들의 울부짖음 속에 섬뜩하게 다가서는 미래의 재앙과 그 그림자를 분명히 본 것이다. 신통력이나 영험(靈驗)없이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작품, 그런 의미에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아우슈비츠를 먼저 '관광'후 관람해야 진가를 느낄 영화였다고 영화평을 쓰고 싶다.
그리고 가장 경악했던 일은, 그런 목불인견의 만행이 자행되는 와중에도 수용소 한켠의 별채에서 나치장교들은(영화에서처럼) 관현악을 즐겼다는 점이다. 죄악과 문명의 공존…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것이다.
죄악은 평범이나 정상과도 공존한다. 그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에힐 다이누라는 생존자의 이야기다. 1961년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했던 부총통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다이누도 증인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재판장에서 다이누가 흐느껴 울다가 실신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가 수용소에서 체험한 죽음의 공포 때문이려니 짐작했으나 며칠 후 다이누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유는 너무 놀라운 것이었다.
"저는 아이히만이 악마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그가 너무 평범한 한 남자로 음악 좋아하고, 손자 손녀의 재롱을 즐기고, 저처럼 황혼의 강가 산책을 좋아하고…. 이런 평범한 인간 속에 650만 명의 생명을 죽이는 악마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겁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을 생각할 때 너무 두렵고 절망적인 마음이 들어 쓰러진 것입니다."
범죄는 의술과도 공존한다. "나는 온화하고 자비롭다." 지난 1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유고전범재판정에 선 피고 라도반 카라지치 전 스르프스카 공화국 대통령(67)의 자기변호다. 그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8,000명의 무슬림 주민을 죽인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주범이다.
"전쟁을 피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다"는 이 전직 정신과 의사의 시술(施術)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범죄의 이 가공(可恐)할 양면성이여…. 나는 그게 두려운 것이다.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마음 다스리기
- 한스컨설팅 대표 한근태
지인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한 적이 있다. 한라산도 오르고 올레길도 걷고 맛난 것도 먹었다.
정말 환상적인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분은 여행을 전혀 즐기지 못했다.
며칠 전 큰 비로 물에 잠긴 외제차 걱정 때문이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그 분은 서울에 있는 자식들과 계속 통화를 했다.
"얼마나 돈이 든다니, 보험에서 얼마까지 커버가 된다니,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니, 다른 수리소도 알아봐라, 사기칠 지 모르니 일일이 지켜봐라…"
자식 셋과 돌아가면서 전화를 하고 때론 보험회사 직원과도 전화를 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그 분은 멋진 제주 바다를 하나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몸은 천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옥에 있는 것 같았다.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있어야 한다.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을까?
첫째,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
바둑에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말이 있다. 승리를 탐하면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태국 출신 고승 아잔 차 스님은 이런 말을 한다.
“조금 내려놓으면 조금 평화로워질 것이다. 많이 내려놓으면 많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완전히 내려놓으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세상과의 싸움은 끝난다.”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욕심 때문이다. 욕심 부린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 세상에 우리 것은 없다. 모두 잠시 빌린 것뿐이다.
내 육체도 돈도 자식도 권력도 내 것이 아니다. 가능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 고정관념과 망상이다.
남들은 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데 혼자 미워하고 끌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강의 중 동양 남자로 인해 몹시 불쾌했다.
자기 강의를 듣지 않고 옆에 있는 젊은 여자와 계속 수다를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이 쓰여 강의도 제대로 못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동시통역사였고 그는 통역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 사건에 대한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느냐 때문에 괴롭다.
우리가 보고 해석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일 때문에 신경이 쓰여 행복하지 않다면 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아침부터 인상을 쓰고 있는 상사는 당신 때문이 아니라 집안 일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셋째, 천천히 살아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급하다. 정신 없이 빨리 달린다. 늘 마감시간에 쫓긴다.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제한속도 100킬로로 달려야 할 구간을 140킬로로 달리면 연료 소모도 많고 정서도 불안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들뜨게 되고 피로가 가중된다. 본의 아니게 사고 날 확률도 높아진다.
꽉 찬 스케줄을 가진 사람은 유능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이다.
바쁘다는 의미의 한자는 망(忙)이다. 마음 심(心)자에 망할 망(亡)이다. 마음이 망했다는 의미다.
정신 줄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급한 일에 쫓겨 정말 소중한 일에 시간을 쓸 수 없다.
좋은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 천천히 가는 것이 빨리 가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달리다가 주기적으로 쉰다.
그들의 영혼이 쫓아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넷째,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번잡하고 정신 없이 살고 있다. 복잡한 관계 때문이다.
그 관계 확인을 위해 12월은 저녁마다 몇 탕씩 송년회를 하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홀로 있어 봐야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다.
늘 얽혀 있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도 안 되고,
이웃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게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명상의 문이 열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권력을 가질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머리가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행복해질 수는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깨달음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잔뜩 때가 낀 거울과 같다.
사물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하지만 물로 씻어내고 수건으로 닦아내면 거울은 다시 사물을 비춘다.
마음의 먼지도 이같이 털어낼 일이다.
표면이 흐려지면 거울은 사물 비추기를 거부하고 제 자신을 고집하게 된다.
제 자신을 고집할 때 거울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거울은 금세 더러워진다.
마음 밭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차분히 가라앉혀 침묵을 깃들여야 한다.
생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 끝에 깨달음이 있다.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행주강
- 박철
내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은 외로움 탓이다
시가 길어지는 일처럼 요즘 그리움이란 지금은 부재하는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누군가 나의 별빛을 본다면 희망에 대해 노래해다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안개 짙은 야적, 강의 하류에선 그들 나름대로 시대를 앓고
둑으로 쌓아 올리는 바람이 외면을 받으며 갈대 곁에 섰다
언덕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나련만
강폭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일 거다
사랑이든 역사든 배고픔을 달래는 무엇이든 말로서 될 일이 아니건만
물살이 거듭 손마디를 꺾으며 행주강이 흐른다
400년 전 임진란의 함성이 되살아나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대는 강
치마폭에 돌덩이를 주워 담던 아낙도 가끔은 허리를 펴 강 건너 친정아비의
안부가 그립기도 했을 저녁 바람처럼 날이 진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5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50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오늘은 내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재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운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