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1일 토요일
요순시절(堯舜時節)
맹하린
시어머니는 90세에 돌아가셨다.
몇 년 전의 일이었는데 연락을 받고도 서둘러 찾아뵙지를 못했고, 마지막 작별인사도 못 드리는 크나큰 불효를 저질렀다.
아르헨티나가 멀기도 멀지만, 와병 중인 남편으로 인하여 한동안 집을 비운다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결혼시절 맏동서의 시집살이가 눈에 띄게 심했었다고 한다.
곡간에서 양식이 될 곡식을 내어 줄때마다 턱없이 모자라게 내어줘, 시어머니의 몫은 항상 밥그릇의 3분의 1밖에 안 되었던 모양이다.
젖먹이 아기를 둔 여인네의 식사양으로는 너무나 부족했지만, 밥맛이 없다며 당신의 밥그릇을 살짝 밀어주던 시아버님 덕택에 그런대로 끼니를 채우셨나 보았다.
그게 한(恨)으로 맺히셨던지 시어머니는 막 결혼한 내게 먹을 때마다 지나치게 너그러우셨다.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잡수던 밥이고 국이고 반찬이고를 나의 의사(意思)와는 상관없이 내 그릇에 잽싸게 얹어 주시고는 했다.
그런 면으로 나를 매번 당혹스럽게 하신 것이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잡수던 수저나 저븐으로 그렇게 불쑥 덜어주는 인정(人情)이 왜 그리 이해가 안 되고 참 기분 별로였던지.
차마 내색은 못했지만 거의 죽을 맛이었다.
밥을 안 먹을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없게 되던 시간.
하지만 시어머니는 내가 사양하느라 그러는 줄 알고 더 자주 그러셨다.
어려서부터 한 깔끔하던 내게 그건 참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하지만 농사철이 끝난 초겨울 무럽에 상경하셨고, 일 년이면 두어 달쯤 머무시니까 그다지 못견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가끔 묵상에 잠겨 왔다.
배 고픈 시집살이와 적정량 이상으로 먹어야 하는 시집살이 중 어떤게 더 고초당초일까를.
둘다 만만치는 않은 수준처럼 여겨진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네 자녀의 집을 교대로 돌아다니시면서 시집살이라는 걸 한꺼번에 몰아서 시키셨다.
나는 시어머니가 상경하시면, 앞집 만물상회에 가서 친정과 친구들에게 서둘러 연락을 취했다.
전화도 방문도 당분간 금지라는 선언을 살며시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리도 짧게 줄이는 전화조차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지가.
모든 것 다 참고 견딜 수 있었는데, 신문이나 책은 왜 또 못 보게 하셨는지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뭐든 그래야 하는 걸로 알고 잘 견디고 잘 참아냈다.
남편의 사촌형 아들이, 취직한다는 의도를 지닌 채 상경하여, 장장(長長) 1년을 먹고 자고 텔레비전만 보면서 빈둥대는 모습도 그래야 하는 줄만 알고 참고 견뎠다.
그 사실을 보고 받은 시어머니는 잘 하는 일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도리어 칭찬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일들 모두 뿌리치고 조용히 글이나 쓰면서 살고 싶어 나는 이민을 떠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자식들마다 교대로 찾아다니며 시집살이라는 쓰디쓴 익모초 액을 명약(名藥)처럼 골고루 골고루 마시게 하셨다.
첫 자녀인 나의 시누이를 임신했을 때, 밭에서 일하다 산기(産氣)를 느꼈다는 시어머니.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여 방문을 열자마자 혼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이를 안은 채 시렁에 얹힌 반짇고리를 내려 탯줄을 끊었다는 시어머니.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다시 논밭 일을 계속했다던 시어머니.
그런데 그런 시어머니가 어떻게 내게 가정부까지 여럿이나 교대로 데려다 주실 수가 있었을까.
그점 참으로 의문이다.
때때로 잊지 않고 하시던 말씀
- 너는 지금 요순시절을 살고 있는 거다!
사람들은 인생을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들 한다.
마음먹기.
마음을 먹어 버리기.
조금씩 야금야금 베어 먹을 땐 잘 몰랐는데
그 마음이라는 걸 눈 질끈 감고 꿀꺽 삼켰더니
알게 모르게 나 드디어 행복해졌다.
삶에 있어 좋은 조건은 좋은 게 아니고
나쁜 조건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현자는 일컫는다.
우선 새옹지마(塞翁之馬)가 그럴 것이고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표본적이지 않았나 싶다.
‘소련군이 진입 했을 때, 아우슈비츠에는 대략 7000여명 정도, 행군(行軍)조차 불가능한 병약자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나치가 다른 수용소로 옮길 수 없는 처지라서, 결과적으로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신체가 튼튼한 이들로만 뽑힌 많은 유태인들이 도보행군 중, 목적지인 독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추위와 굶주림에 죽은 것.
SS는 남아 있는 병약자들을 집단처형 하려는 계획을 긴급히 획책하고 있었으나, 소련군이 이틀이나 앞당겨 진군(進軍)한 덕택에 그들 병약자들은 살아남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절대 주위사람의 꿈을 방해하지 않는 게 철칙과 같이 지켜졌다고 한다.
가족들과 함께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그런 행복한 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악몽일지라도 당장 처해 있는 극단적인 현실과는 비교가 안 되리라는 판단에서 더 그랬다고 한다.'
놓을 거 다 놓고 나니까 나는 이제야 요순시절에 머물고 있는 듯 한 화평(和平)을 맛보게 된다.
다른 건 그저 그런데, 글 쓰는 일을 언제라도 붙잡을 수 있어서 그게 바로 내게는 요순시절이 아닐까 요즘 새삼 그러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있다.
비록 잡문에 불과하지만, 실 자아 내듯 글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고즈넉한 기분까지 안겨준다.
언제나 요순시절이라는 격양가(擊壤歌)를 읊어 대면서.
그런 면에서 보면 시어머니께 새삼 감사롭다.
내게 있어 진정한 요순시절이 어떠하리라는 걸 일찌거니 터득토록 도움을 주셨으므로.
나 드디어 요순시절에 이르렀어라.
2012년 3월 30일 금요일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것을
(펌)
우린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
그 어느 누구도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시대에 태어나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주위 사람들을
너무 소홀히 대하지는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아주 커다란 인연의 끈으로
만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내 못남을 스스로 꾸짖는 것이지요.
빌 오히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특히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마다 많은 에너지를 얻게 된다.
또한 거기서 받은 에너지의 일부를
다른 누군가에게
제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서로 어깨를 기대고
체온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사람의 손이 따스한 체온을 나누며
서로 깍지를 끼고 살아가라고
다섯 손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2012년 3월 29일 목요일
뒤에 있던 그들이 옆과 앞에 있다
맹하린
어제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찾아오는 볼리비아노 고객인 훌로이란의 집까지 꽃배달을 가게 됐었다.
수술하고 퇴원한 그의 부인 까롤리나가 나를 좀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까롤리나는 내가 만든 꽃을 볼 때마다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었나 보았다.
나는 차를 이용해야 하는 배달일 경우엔 항상 레미세로(대절용 자가용기사)에게 보낸다.
가게를 비워서도 안 되지만, 일종의 불편이나 부담을 덜기 위해서도 더 그런다.
언제였던가.
현지인 고객이 자기 집에 처치해야할 꽃나무가 많은데 거저 주겠다고 초대를 했을 때도 나는 정중히 사양했었다.
부담은 부담스럽지 않을 때 더 지켜야 하니까.
부담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세상에서 거저 얻는 건 없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막상 훌로이란의 집을 방문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침 훌로이란은 가게에 출근했기 때문에 (훌로이란은 Feria에도 가게가 더 있다.)까롤리나와 무까마(가정부)가 나를 반겼다.
까롤리나의 지시로 특별히 만들어진 헤이즐넛을 감탄 섞어 마시며 1시간 정도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 부부가 그렇게나 궁궐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게 도대체 용납이 안 되어 나는 온종일 미로(迷路)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난데없는 위압감과 약간의 거부감까지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고 피어났다.
마치 우리 교민을 대표하여 그 집에 찾아간 것처럼 말이다.
우리 교민은 25여년 동안 유태인 상가(商街)를 하나하나 번영시켜 나갔지만 볼리비아노, 그들은 우리의 상권(商圈)에 기하급수적으로 참여해 오기 시작한지 벌써 이십여 년이 되었다.
수적(數的)으로는 단연 수세(守勢)에 몰릴 수도 있는 형세(形勢)였다.
때때로 나는 일요일이면 볼리비아노들의 장터가 열리는 까스따냐레스 거리와 보노리노 거리가 교차되는 장소를 찾아 간다.
산책 겸, 구경 삼아 그렇게 다닌 지 어느 새 15년쯤 되었다.
그곳은 뭐든 싼 게 아니라 무조건 싸다.
그들의 주식인 감자는 물론이고, 보라색 감자도 있고, 청양고추도 많다.
15년 전에는 감자가 3Kg에 1달러였는데, 요즘은 3Kg에 2달러 정도 된다.
볼리비아 고추는 상상 외로 지독하고, 뒷맛까지도 한참동안 맵고 맵다.
우리 한국 고추는 매우면서도 달지만, 볼리비아 고추는 매운 감각으로만 맵다.
말 그대로의 도떼기시장이다.
시끌벅적하면서 없는 게 없어 구경이 더 된다.
고급스러운 구경은 못되고 소박한 구경거리다.
천막을 친 간이 이발소, 간이식당, 간이 옷가게, 가방 가게, 신발 가게, 액세서리 가게.
별의별 게 다 있다.
까세로(집에서 만든 상품)로 만든 께소(치즈), 투박하고 커다란 엠빠나다(파이=만두)등등.
그곳에선 볼리비아노들이 수 백명 정도 북적이는 모습을 짧은 시간에 많이 볼 수가 있다.
나는 단지 산책과 구경으로만 다니기 때문에 별로 사지는않는다.
세상 이치라는 게 참 그렇다.
왠지 싸면 싼 맛이 있고 비싸면 비싼 맛이 있다.
남편이 멀쩡했을 때는 남편이 주로 다녔다.
그런데 여느 볼씨들은 남편에게 협박도 불사(不辭)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영역이니 들어오지 마라!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죽어나갈 수도 있다!
그러저러한 으름장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한국인도 와줘서 괜찮다는 대응(對應)이다.
나는 더좀 안쪽으로는 접근을 삼가한다.
전반적으로 물가의 상승폭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해도 그곳에 가면 대부분 상상외의 저렴한 가격과 수준에 식료품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우리 한국인과 불가불념(不可不念)의 관계지만, 여러 방면으로 꽤 괜찮은 조건을 겸비했다고도 여겨진다.
식료품도 싼 값에 구입하지.
제품일은 가족끼리 혹은 친척끼리 두루 뭉실 합동으로 해내지.
훌로이란처럼 아베쟈네다 뒷길에 작은 가게 덜렁 얻어서 옷 몇 장 걸어 두고, 우선 가격 면에서 승리를 쟁취했으니, 대량주문을 받은 뒤 납품은 공장에서 직접해내는 방식을 취하는 음험하기 이를 데 없는 세금포탈의 명사(名士)들이지.
유럽이나 미국, 또는 한국과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들여온 최신식 모델과 그에 따른 몰데(옷본)를 단시간에 카피하여 전염병처럼 떠돌게 하지.
나는 이 새벽 내 동족들에게 새삼 존경스럽다 못해 흠숭하는 마음까지 솟고 솟는다.
어떻게 이렇고 저렇고 한 북새통과 경쟁체제 속에서, 그들은 벤츠나 BMW나 아우디나 혼다를 상큼하게 몰고 다니며 의류도매상을 끄떡없이 제대로 이끌어 나갈수가 있을까라는 감격이 썰물처럼 몰려와서다.
대통령 크리스티나정부는 지난 1년 동안 달러구입절제령을 미사일 쏘듯 제시했었고, 그로 인한 외화유출방지책은 이렇다할 착오나 과오없이 잘 실행되어 많은 효과를 얻어냈다고 한다.
엉뚱하게도 몇 달 전부터 수입품 금지령이 또 다른 정책으로 발표되었다.
그 또한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사태와 실정에 있다.
당장 피륙이나 실은 물론이고 공업용자재 등이 아두아나(세관)에 묶여 있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나 날벼락과 다름 아닌 사태가 되었다.
심심파적으로 전개되는 이런 식의 흐름은 과연 어디에서 근거한 노림수라는 얘긴가.
그런 포석(布石)들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어떤 미래를 제시하고 , 무엇을 위한 변화와 손익을 가져다주게 될지 나로선 예측불허의 형국(形局)으로만 비춰진다.
의류도매상인도 아니면서 현재의 경기순환에 유달리 민감해짐은 물론이고, 우선 걱정부터 앞섬을 전혀 어쩌지 못하겠다.
물론 나라 안의 산업을 육성화 하려는 경기정책(景氣政策)인지라. 민초인 나 정도야 정부당국의 그럴듯한 계획까지 반대하는 입장은 결코 못된다
올해는 윤달이 껴있다고들 하지만, 엘니뇨현상 때문에도 세계적으로 날씨가 비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기후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얼마전까지 늦더위가 기승이더니 며칠 전부터 갑자기 추워졌다.
분명한 것은 추위 때문에 활기가 몰려올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추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추위도 고맙게 여겨야겠다는 결심이 새롭다.
모두들 활기로운 경기 호황을 맞이했으면 하고 희망하게 된다.
한국인들의 하청을 받아 제품을 하던 볼리비아노들을 위시한 인접국 이민자들이 'Feria La Salada'에 사업성 내지 자본을 투입한지는 거의 25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수영장위에 세워졌다고 해서 '라 살라다'라는 명칭이붙여짐.)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규모가 큰 Feria라고 널리 알려진 이 시장의 성공사례로 인하여 현재 작은 Feria가 조금씩 근교나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일주일에 9백만달러의 전체판매가 이루어지고, 하루 유동인구는 10만여명이며 그 안에서 일하는 인원만 해도 자그만치 2만 5천에서 3만명이라고 한다.
유명 메이커의 짝퉁이 주종을 이루며 80퍼센트는 도둑물건이라고도 회자되고 있다.
Sebastian Hacher라는 작가가 '상그레 라 살라다(짠 피)'라는 책을 2년에 걸쳐 연구한 뒤 써냈고. 또 다른 작가의 책도 발간되었다고 한다.
'상그레 라 살라다'[의 작가가 나오는 동영상은 주로 볼리비아노들을 두둔하고 있어 당장 여기에 올리지 못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심층적인 얘기를 올릴까 한다.
우리 교민경제의 90퍼센트가 의류도매상가에 집중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소재를 곁들이는 일이 좀 망설여졌다.
알고도 모르는 척 신경 끄고 지내는 일도 산뜻하리라 여겨져서다.
맹하린
어제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찾아오는 볼리비아노 고객인 훌로이란의 집까지 꽃배달을 가게 됐었다.
수술하고 퇴원한 그의 부인 까롤리나가 나를 좀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까롤리나는 내가 만든 꽃을 볼 때마다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었나 보았다.
나는 차를 이용해야 하는 배달일 경우엔 항상 레미세로(대절용 자가용기사)에게 보낸다.
가게를 비워서도 안 되지만, 일종의 불편이나 부담을 덜기 위해서도 더 그런다.
언제였던가.
현지인 고객이 자기 집에 처치해야할 꽃나무가 많은데 거저 주겠다고 초대를 했을 때도 나는 정중히 사양했었다.
부담은 부담스럽지 않을 때 더 지켜야 하니까.
부담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세상에서 거저 얻는 건 없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막상 훌로이란의 집을 방문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침 훌로이란은 가게에 출근했기 때문에 (훌로이란은 Feria에도 가게가 더 있다.)까롤리나와 무까마(가정부)가 나를 반겼다.
까롤리나의 지시로 특별히 만들어진 헤이즐넛을 감탄 섞어 마시며 1시간 정도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 부부가 그렇게나 궁궐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게 도대체 용납이 안 되어 나는 온종일 미로(迷路)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난데없는 위압감과 약간의 거부감까지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고 피어났다.
마치 우리 교민을 대표하여 그 집에 찾아간 것처럼 말이다.
우리 교민은 25여년 동안 유태인 상가(商街)를 하나하나 번영시켜 나갔지만 볼리비아노, 그들은 우리의 상권(商圈)에 기하급수적으로 참여해 오기 시작한지 벌써 이십여 년이 되었다.
수적(數的)으로는 단연 수세(守勢)에 몰릴 수도 있는 형세(形勢)였다.
때때로 나는 일요일이면 볼리비아노들의 장터가 열리는 까스따냐레스 거리와 보노리노 거리가 교차되는 장소를 찾아 간다.
산책 겸, 구경 삼아 그렇게 다닌 지 어느 새 15년쯤 되었다.
그곳은 뭐든 싼 게 아니라 무조건 싸다.
그들의 주식인 감자는 물론이고, 보라색 감자도 있고, 청양고추도 많다.
15년 전에는 감자가 3Kg에 1달러였는데, 요즘은 3Kg에 2달러 정도 된다.
볼리비아 고추는 상상 외로 지독하고, 뒷맛까지도 한참동안 맵고 맵다.
우리 한국 고추는 매우면서도 달지만, 볼리비아 고추는 매운 감각으로만 맵다.
말 그대로의 도떼기시장이다.
시끌벅적하면서 없는 게 없어 구경이 더 된다.
고급스러운 구경은 못되고 소박한 구경거리다.
천막을 친 간이 이발소, 간이식당, 간이 옷가게, 가방 가게, 신발 가게, 액세서리 가게.
별의별 게 다 있다.
까세로(집에서 만든 상품)로 만든 께소(치즈), 투박하고 커다란 엠빠나다(파이=만두)등등.
그곳에선 볼리비아노들이 수 백명 정도 북적이는 모습을 짧은 시간에 많이 볼 수가 있다.
나는 단지 산책과 구경으로만 다니기 때문에 별로 사지는않는다.
세상 이치라는 게 참 그렇다.
왠지 싸면 싼 맛이 있고 비싸면 비싼 맛이 있다.
남편이 멀쩡했을 때는 남편이 주로 다녔다.
그런데 여느 볼씨들은 남편에게 협박도 불사(不辭)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영역이니 들어오지 마라!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죽어나갈 수도 있다!
그러저러한 으름장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한국인도 와줘서 괜찮다는 대응(對應)이다.
나는 더좀 안쪽으로는 접근을 삼가한다.
전반적으로 물가의 상승폭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해도 그곳에 가면 대부분 상상외의 저렴한 가격과 수준에 식료품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우리 한국인과 불가불념(不可不念)의 관계지만, 여러 방면으로 꽤 괜찮은 조건을 겸비했다고도 여겨진다.
식료품도 싼 값에 구입하지.
제품일은 가족끼리 혹은 친척끼리 두루 뭉실 합동으로 해내지.
훌로이란처럼 아베쟈네다 뒷길에 작은 가게 덜렁 얻어서 옷 몇 장 걸어 두고, 우선 가격 면에서 승리를 쟁취했으니, 대량주문을 받은 뒤 납품은 공장에서 직접해내는 방식을 취하는 음험하기 이를 데 없는 세금포탈의 명사(名士)들이지.
유럽이나 미국, 또는 한국과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들여온 최신식 모델과 그에 따른 몰데(옷본)를 단시간에 카피하여 전염병처럼 떠돌게 하지.
나는 이 새벽 내 동족들에게 새삼 존경스럽다 못해 흠숭하는 마음까지 솟고 솟는다.
어떻게 이렇고 저렇고 한 북새통과 경쟁체제 속에서, 그들은 벤츠나 BMW나 아우디나 혼다를 상큼하게 몰고 다니며 의류도매상을 끄떡없이 제대로 이끌어 나갈수가 있을까라는 감격이 썰물처럼 몰려와서다.
대통령 크리스티나정부는 지난 1년 동안 달러구입절제령을 미사일 쏘듯 제시했었고, 그로 인한 외화유출방지책은 이렇다할 착오나 과오없이 잘 실행되어 많은 효과를 얻어냈다고 한다.
엉뚱하게도 몇 달 전부터 수입품 금지령이 또 다른 정책으로 발표되었다.
그 또한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사태와 실정에 있다.
당장 피륙이나 실은 물론이고 공업용자재 등이 아두아나(세관)에 묶여 있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나 날벼락과 다름 아닌 사태가 되었다.
심심파적으로 전개되는 이런 식의 흐름은 과연 어디에서 근거한 노림수라는 얘긴가.
그런 포석(布石)들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어떤 미래를 제시하고 , 무엇을 위한 변화와 손익을 가져다주게 될지 나로선 예측불허의 형국(形局)으로만 비춰진다.
의류도매상인도 아니면서 현재의 경기순환에 유달리 민감해짐은 물론이고, 우선 걱정부터 앞섬을 전혀 어쩌지 못하겠다.
물론 나라 안의 산업을 육성화 하려는 경기정책(景氣政策)인지라. 민초인 나 정도야 정부당국의 그럴듯한 계획까지 반대하는 입장은 결코 못된다
올해는 윤달이 껴있다고들 하지만, 엘니뇨현상 때문에도 세계적으로 날씨가 비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기후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얼마전까지 늦더위가 기승이더니 며칠 전부터 갑자기 추워졌다.
분명한 것은 추위 때문에 활기가 몰려올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추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추위도 고맙게 여겨야겠다는 결심이 새롭다.
모두들 활기로운 경기 호황을 맞이했으면 하고 희망하게 된다.
한국인들의 하청을 받아 제품을 하던 볼리비아노들을 위시한 인접국 이민자들이 'Feria La Salada'에 사업성 내지 자본을 투입한지는 거의 25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수영장위에 세워졌다고 해서 '라 살라다'라는 명칭이붙여짐.)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규모가 큰 Feria라고 널리 알려진 이 시장의 성공사례로 인하여 현재 작은 Feria가 조금씩 근교나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일주일에 9백만달러의 전체판매가 이루어지고, 하루 유동인구는 10만여명이며 그 안에서 일하는 인원만 해도 자그만치 2만 5천에서 3만명이라고 한다.
유명 메이커의 짝퉁이 주종을 이루며 80퍼센트는 도둑물건이라고도 회자되고 있다.
Sebastian Hacher라는 작가가 '상그레 라 살라다(짠 피)'라는 책을 2년에 걸쳐 연구한 뒤 써냈고. 또 다른 작가의 책도 발간되었다고 한다.
'상그레 라 살라다'[의 작가가 나오는 동영상은 주로 볼리비아노들을 두둔하고 있어 당장 여기에 올리지 못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심층적인 얘기를 올릴까 한다.
우리 교민경제의 90퍼센트가 의류도매상가에 집중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소재를 곁들이는 일이 좀 망설여졌다.
알고도 모르는 척 신경 끄고 지내는 일도 산뜻하리라 여겨져서다.
2012년 3월 28일 수요일
백야(白夜), 우수아이아!!!
맹하린
아르헨티나는 지표의 면적이 넓기도 넓지만 기다란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인지 한 여름일지라도 지방에만 가면 눈 덮인 산과 영하로 내려가는 밤 기온을 만나게 된다.
한 겨울에 지방도시를 여행할 경우,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춥지만, 어떤 지방도시는 푹푹 찌는 더위 탓으로 반바지와 반소매 차림으로 나다녀야 하는 건 예상사(例常事)가 된다.
그래서 한 계절에 봄가을 닮은 날씨와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계절들을 언제라도 만나볼 수가 있는 편이다.
우수아이아라는 지방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신비롭게도 저녁에 해가 지지 않고, 달처럼 흐린 빛깔로 떠 있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저녁에 지기는 하는데 완전히 떨어지지를 않고 밤중에도 어스레 떠 있어서 신비롭기 이를 데 없다는 느낌에 한참이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현상(現象)은 해가 지평선 저쪽으로 완벽하게 사라질 만큼 지구가 기울지 않는 원리에서 생기고, 해를 중심으로 운행하는 지구의 기울기에 의해서라고 한다.
남극의 여름은 정반대로 낮이 저녁나절처럼 어둑어둑하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그점이 신기하게 여겨져 밤늦도록 거리를 쏘다녔다.
그 어둑어둑 어스레하던 도시의, 특색 있는 안온함은 지금껏 시야 가득 잔존해 있다.
밤이, 석양이, 꽃이, 새벽이, 바다가.
밤 11시에 해가 지고
새벽 두시에 벌써 해오름이 시작되는 도시.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도시.
아르헨티나의 여러 지방도시를 때때로 찾게 되면, 아르헨티나가 참으로 넓고 크다는 인식(認識)의 한 귀퉁이를 고작 손톱만금만 붙잡아 본 느낌같은 게 서리서리 마음에 깃든다고나 할까.
천혜(天惠)의 땅, 그리고 끝을 모르게 매장되어 있다는 지하자원.
방대한 보고(寶庫)의 해산물은 차치(且置)하고라도 시야에 직접 들어오는 천연경관만 바라보아도 한숨이 저절로 터뜨려지게 된다.
그럴 때마다 좁은 땅. 고갈된 자원의 내 나라 내 조국을 운명처럼 떠올리게 됨은 뒤늦게 싹튼 애국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지방도시나 바다 한 귀퉁이를 뭉텅 떼어내어 가져갈 수는 없는 일일 테고 해서 그저 부러운 마음만 새록새록 식물의 싹처럼 자라고 자란다.
말비나스(포클랜드)전쟁 때, 나라의 한 쪽에서는 전쟁이 났는데도 생필품 사재기하는 민족은 오로지 한국 교민들 밖에 없었을 정도로 태평하게 축구시합에만 열을 올리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지켜보면서 깨닫고 또 깨달았었다.
우선 나라의 면적이 크면서 넓으면서 기다랗고 볼 일이라는 것을.
혹자는 말한다.
신(神)은 때로 맘이 약해서 게으른 아르헨티노들에게 놀면서 지내도 먹고 살만한 넓은 땅을 축복처럼 내렸다고.
그럴까?
그럴 것이다.
'1만 고랑의 밭을 지녔어도 5척의 침상에서 잔다'는 중국의 속담을 음미하자면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도,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될 것 같다는 상념이 최근 부쩍 든다.
세상은 공평하다.
무엇인가 주어진 국가(國家)나 사람은 무엇인가 결여된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인생을 미리 알아낸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한 생(生)은 바로 내 자신이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진 게 적다고 해서 체념이나 유보(留保)를 선택해서도 아니 될 듯하다.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일은 쉽게 생각하면 쉬워지고
어렵게 단정하면 더욱 어려워진다.
행복도 필연도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져야 가능한 행복이고 만남이 되는 것.
왜냐하면 행복이란 소박함에 대한 응답(應答)이기에 더 그러하다.
더군다나 생(生)이란 가꿈이고 다스림이고, 그에 대한 보상(補償)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밤낮이 뚜렷한 대지 위에서 살아가지만 백야(白夜)의 땅에도 산다.
이제라도 삶이 우리의 것, 나의 소유가 되도록 혜안(慧眼)의 눈뜸을 뜨고 뜨자.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열 개의 반지(斑指)
맹하린
어제 오후 7시, 나는 H회관에 갔다.
동문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동문회에 가면 글 소재가 될 얘기들을 참 많이 듣는다.
장사 얘기, 교회 얘기, 자녀들 얘기.
특히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강도사건은 매달 부상(浮上)하듯 떠오른다.
아베쟈네다에 가게를 몇 개나 소유한 모(某)여인은, 집을 소개하러 온 한국인 부동산 중개인이 바쁜 이유로 떠난 순간, 같이 왔던 현지인 커플에게 매까지 맞으며 가게 하나의 쟈베(3년에 한 번씩 지불받는 권리금이지만 다시 반환하지 않음 )로 받아둔 15만 달러를 고스란히 강탈당했다는 얘기다.
매우 걱정스러운 문제다.
한국 사람은 털 때마다 거금이 나온다는 인식을 강도들에게 매번 심어주게 되는, 역사처럼 한결같은 맥을 이어오는 우리 한국인들의 지독한 허술함.
아무리 그래도 그런 얘기들을 듣는 족족 글로 모두 풀어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운 면도 많아, 취할 건 취하고 흘려보내야 할 건 흘려듣는다.
언젠가는 두드리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되도록 건드리고 싶지 않은 소재가 하나 있었다.
동문회에 다녀올 때마다 필히 묵상하게 되는 일종의 숙제나 메시지와 흡사한 소재다.
잘못 건드리게 되면 일종의 비난으로 비칠 수도 있는 사안(私案)이라서 밀쳐 뒀었으나 오늘은 부득불 적게 된다.
화교(華僑)지만,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대학도 한국에서 마쳤기 때문에 동문이 된 쳉씨는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 상대의 중화요리점을 가장 최초로 열었던 덕택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몇 년 전 환갑도 안 된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동창회원의 수가 적다보니까 오래 전부터 부부동반을 허용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왕여인은 쳉씨가 세상을 떠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근상을 타야할 정도로 참석에 열성을 보여 왔다.
그녀는 시내 곳곳에 여러 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일 년에 대만을 두어 번 정도 왕래하는가 하면, 가끔씩 캐나다의 아들한테 다녀오기도 한다.
비록 아끼느라 동창회에 오고 갈 때는 버스를 자가용처럼 이용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열 개나 되는 반지가 모양과 색깔과 종류를 달리 한 채 주르르르르르르르르륵 껴 있다.
환타시아(모조품)가 아니라 모두 진짜로된 보석반지들이다.
어젯밤 따라 유난히들 그녀의 반지에 대한 질문이 집중적으로 많이 쏟아졌다.
아마 나만 잠잠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한 마디 할 수는 있었지만, 청문회 성격이 엿보여 굳이 인내한 셈이다.
"불편하지 않아요?"
"아니, 편해요."
"길이나 버스에서 위험할 것 같아요."
"안 위험해요. 가짜라고 알아. 그래서 더 버스를 타요."
"밤에는 빼 놓아요?"
"한 번도 안 뺐어요. 7년 동안이나 안 뺐어요."
"7년을 밤낮으로요?"
"그럼요. 이제 내 피부 같이 됐어요. 이제 내 살이나 마찬가지야."
"왜 안 빼놓는 건데요? 중국식으로 하면 복을 받는, 무슨 그런 거예요?"
"그런 건 없어. 빼놓으면 허전 해. 많이 불편해. 잠이 안 와."
그녀는 말을 많이 할 때나 다급한 표현을 해야 할 때면 존댓말이 증발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반말 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중화요리점을 할 때, 문협여인들 몇 명이 그 식당에서 모인 적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정오 무렵이었다.
문협의 S여사는 하여간에. 웃음소리가 끝내준다.
성당의 미사시간 중 강론을 듣노라면 S여사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신부님의 강론에 아멘!하고 장단을 맞추는 역할을 떠맡은 것 같은 웃음이다.
그녀가 왼쪽에 앉아 있는지, 오른쪽에 앉아 있는지 , 또는 바로 뒤인지 또는 한참 뒤인지의 감을 일부러 안 돌아 보고도 쉽사리 알아 챌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앞에서 세번 째의 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람들은 참 이상한 구석이 많다.
항상 같은 자리를 선호한다.
S여사처럼 여기저기 앉는 타입은 미사시간에 허둥지둥 나타나는 형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날, 그 식당에서 우리 다섯 사람은 마냥 재미있었고 특히 S여사의 탕탕한 웃음이 가장 요란뻑적지근했다.
다행인지 식당 안엔 우리 일행만 있었다.
그런데 왕여인이 그만 성깔이 나버렸다.
그녀 특유의 반말 투성이가 시작된 것이다.
열 개의 반지가 껴있는 두 손을 휘저으며 우리 일행이 앉아 있는 식탁을 향해 언성을 한껏 높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
-시끄럽다 해! 조용 해. 귀 아파, 그만 가라고 한다 해?
왕여인의 그러한 말투가 너무 재미 있었지만 이내 조심스러워우리는 키득키득 웃었고, S여사는 도리어 더 크게 웃어댔다.
동문회가 끝날 무렵, 왕여인은 이미 준비해온 멜라닌 도시락 서너 개를 가방에서 꺼내어 식탁에 남은 음식들을 담기 시작했다.
고기는 고기끼리.
나물은 나물끼리.
밑반찬은 밑반찬끼리.
어차피 식당에서 재탕시켜 재생하는 음식은 아닐 터였다.
식당들이 음식을 재탕한다는 걸 못마땅 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그러는 왕여인의 그런 행동은 한 몫 단단히 거드는 셈이기도 하다.
왕여인은 자주 다른 사람이 옆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끼고 방어(防禦)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으로는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방치(放置)하는 것처럼도 비치게 된다.
이미 참을 대로 참다가 한마디씩 질문을 보내는 회원들도 몇달에 한 번씩은 돌출한다.
바로 어제와 같은 날이다.
"집으로 가져가면 변하지 않아요?"
"아니, 냉동실에 넣어. 조금씩 얼음이 풀리면 먹어 해. 한국음식 최고야."
그 대답이 필요했다는 듯 너도나도 이윽고 시치미를 떼기에 이르른다.
그녀와 가까이 앉게 되면 나는 항상 그녀의 반찬수거를 도와 준다.
어젯밤 나는 약간 늦게 도착되어 왕여인과 좀 떨어져 앉았었다.
그녀를 도울 때, 나는 자신이 약간 겸허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건 누군가를 다독이고 있다는 따사로운 감정 같은 것과 닮았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못 배울 지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적해서는 안 되지 싶은데 지적하게 되는 일과
지적해야 하는데 지적하지 못하는 일이다.
왕여인의 저렇기도 하고 이렇기도 한 유별난 모습은
지적하고 싶지도 지적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왕여인에게 있어 그러저러한 행동은 일종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그건 아픔 맞다.
재산은 있는 아픔.
인간이 행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를 들라면 그렇다던가.
다른 사람이 내게 고통을 안겼을 때 망각(忘却)하는 일과
나의 재산을 남을 위해 쓰는 일이라고들 일컽는다.
둘 다 쉬운 일이라고 보기에는 지난(至難)한 과제다.
왕여인은 여전히 그리 살아갈 것이다.
현실이란 사람에 따라서는 환상적(幻想的)인 덫이기도 하다.
탈무드의 <은칠한 거울>이라는 예화가 절절 안겨오는 오후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물었다
"랍비님.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남을 돕는데
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습니까?"
랍비가 말했다.
"창밖을 보게. 무엇이 보이는가?"
"예.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사람과 자동차가 보입니다."
"다음엔 벽에 걸린 거울을 보게."
"예. 제 얼굴 밖에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렇지? 창이나 거울이나 모두 유리로 만들었다네.
하지만 유리에 은칠을 얇게라도 발라 주면 자기 얼굴 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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