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일 금요일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박정대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꿈의 호랑이들>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2012년 3월 1일 목요일

반 가마의 쌀




    맹하린


한 면(面)에 하나씩만 허용된 양조장을 운영하던 우리 집은 논과 밭도 적지 않았고, 해가 갈수록 토지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5.16혁명이 터지고 유신시절이 되자,  기존의 법들은 가차 없이 개혁되었다.
쌀로 만들던 막걸리를 잡곡으로 대체하도록 강력한 지시가 내렸고, 면(面) 단위이던 구역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압력이 가해졌다.
쌀로 만들 때는 하루에 쌀이 두세 가마씩 술밥을 찌는데 사용되었다.
우리 논에서 수확되는 쌀로 충분하게 공급이 가능했지만, 농부들이 급히 돈이 필요하다고 품에 안거나 지게나 등에 지고 오는 쌀도 기꺼이 구입하였다.
이웃마을이나 도시까지 들고 나가야 하는 농부들의 수고를 덜어 주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어느 겨울의 초저녁,
쌀 두가마를 그런 식으로 사들였는데, 미처 곡간에 넣지 못하고 양조장 입구에 놔뒀었다.
동네사람 전체를 믿었던 시절이라 미닫이로 된 철문은 있었지만, 따로 자물쇠를 잠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세수하려고 양조장 안에 있는 작두물 근처로 다가가다가 쌀 한 가마가 없어진 걸 알아채게 되었다.
그럴 경우 할머니는 기술자나 일꾼이나 가족들을 깨우고 법석을 일으키는 분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새벽에 일어났고,  할머니와 벗해 드리기를 좋아하던 나만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런데 밤사이에 생쥐가 가마니를 쏠아서 매우 적은 양의 쌀이 바닥에 쏟아져 있는 걸 내가 먼저 발견하게 되었다.
확실히 생쥐의 짓인 게 틀림없는 게, 쏠아도 아주 조금만 쏠아낸 자국이  남아 있던 또 하나의 가마니 밑에도  나있었다.
하지만 쌀은 그 주위에만 흩어져 있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와 나는 양조장의 출입문을 옆으로 밀고 밖으로 나갔다.
밤새 눈이 많이도 아니고 서리처럼 살짝 내렸는데,  쌀은 그 위로 매우 가는 띠처럼 무늬를 만들며 쌀이 떠나 간 곳과 할머니와 내가 가봐야 할  장소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

일교차가 큰 계절이었다.
해가 어느새 밝아오고 있었는 데도 기온은 높아질 기미가 없었다.
어떤 집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나는 그 띠를 다라 300미터쯤 큰 길을  걸었고, 곧 이어 야산 옆으로 난  길의 중간 쯤에  접어들었다.
쌀 알갱이들은 종골이 오빠 네 사립문을 사이에 두고 다시 연결되어  있었다
종골이 오빠는 이십 대의 청년이었고, 나는 동네 청년들 누구나를 오빠라고 부르진 않았다.
마땅한 호칭을 못 찾아 여기서만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홀어머니와 함께 남의 집 삯일이나 하면서 연명하는 가정이었다.
대부분의 시골집이 그러하듯 사립으로 된 대문이 있고 마당도 있고 작은 초가집이 옴팍하게 들어앉은 그런 집이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종골이네라는 호칭보다 옴팍 집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

할머니는 나를 사립문 밖에 서 있도록 했다.
말씀은 따로 안하셨지만, 종골이 오빠나 그 어머니에게서 나에 대한 수치심을 배제하기 위해  그랬었다고 추정된다.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일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면서 할머니의 이렇다 할 설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내 쪽에서 자세히 알려고도 안했고 구태여 묻지도 않았기에 더 모른다.

아침나절에, 마침 겨울방학이라 친구집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반 가마의 쌀을 지고 종골이 오빠가 나타났다.
마침 할머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기술자 아저씨들이 받아서 내리는 걸 도왔다.
종골이 오빠가  주눅 든 사람처럼 웅얼대며 말했다.
"아침 일찍 큰 아주머니한테서 쌀값을 미리 받았어요. 반 가마 값이었습니다."
나는 종골이 오빠네 대문 밖에서 듣지 못했던 할머니의 말이 그제야 귀에 들어오는 느낌 같은 게 안겨왔다.
-쌀은 반가마만 보내게.  내가 미리 돈을 땡겨 준 걸로 하고.  형편이 그러니 이해하겠네. 우리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함구하세나.
남아 있던 쌀가마는 이미 할머니에 의해 곳간에 옮겨졌고,  쌀가마가  있던 자리와 앞마당에 긴 줄을 이루었던 쌀 알갱이들은 종골이 오빠네서 돌아오자마자 할머니가 흔적을 쓸어내어  이미  깨끗한 상태였다. 

한 달이나 지났을까.
종골이 오빠네가 서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그 사실은 할머니와 나만 알고 있었는데
가족이나 기술자들이나 일군들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털어 놓고 있는데.
그때 할머니는 혼자 중얼거리셨다.
-어서  잊으라고 그동안  논밭 일에 두 모자간을 자주 불렀던 것을, 차라리 잘된 일이다. 흘흘 털고 잘들 살아야 할 텐데.
원래 혼잣말을 잘 안 하시는데 나 들으라고 그러셨을 것도 같다.
혹은 종골이 오빠 네를 향한 작은 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반 가마의 쌀을 가끔 묵상한다.
내가 이렇게나마 글쟁이가 된 건 내가 태어난 땅의 아름다운 자연들의 영향이 가장 컸겠지만, 반 가마의 쌀과 같은 사건들이 내가 그냥 세파에 머물지 않도록 작고 큰 묵상을 안겨서도 더 그러하게 됐으리라 여겨진다.
때때로 한국에서 동생이 전화를 해올  때,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꺼내면 동생은 놀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질책까지 해내고 그런다.
"언니는 무슨 별의별 걸 다 기억하고 그러냐? "
나는 내 속을 상하게 했던 일은 쉽게 잊는다.
그러나 반가마의 쌀 같은 일은 결코 못 잊는 편이다.

굵직굵직한 사건을 다루기보다 지난 얘기를 소재로 삼는 일이 더 힘겨운 건 왜일까.
마음 한켠에 아픔이 껴들어 더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할머니가 그립다.

휴가철이라선지 작금의 아르헨티나는  빈 아파트를 터는 도둑들이 극성이라고 한다.
인접국 전문 빈집털이들이 원정을 왔다는 소문이다.
벌써 시작된 지 몇 십 년도 더 끌어온,  한국인 집만,  그것도 새벽에 터는 강도들의 작태는 잠잠한가 하면 다시 고개를 들고  도무지 멈추지를 못한다.
요즘엔 고급 승용차로  앞과  뒤의 간격을  밀착하고 좁힌 뒤,  승용차와 귀중품과 옷까지 털어 가는 현지인  이십 대 젊은이들이 날뛰는 모양이다.
특별히 한국인 현지인 가리지 않고 표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점점 대중화 되고 있는 마약이 주범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신고해 봐야 이렇다 할 성과도 없고,  오가라 성가신 일 투성이니까 어쩔 수없이 인내하고 감수하는 피해자들이 늘어나는 세태(世態)와 형편에 있다.
참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온 첨단문화의 세상이 되었지만,  범죄 역시 그 첨예로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를 않으려는 상황인 모양이다.
그 어떤 떳떳함이라도 지닌 것처럼 매우 완강하고 저돌적인  범죄들이다.
우리가 살아 가는 세상은 갈수록 우후죽순처럼 들쑥날쑥  속출되는 사건의 연속이다.
더 겸허롭고 더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연거푸 들고 있다.





2012년 2월 29일 수요일

보약의 효과




맹하린


나는 키가 165Cm이고, 거기서 110을 뺀 숫자의 Kg을 지녔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45Kg에서 46Kg을 오갔는데, 결혼하고 체중이 늘어난 건 아니다.
이민 와서 약간 늘었다.
그래봤자 49Kg이어서, 이웃에 살던 한국 꼬멩이들이 나를 보고 젓가락공주라고 놀렸었다.

군정시절, 시우다델라 아파트에 인구조사가 일주일 간격으로 나오자, 우리는 서둘러 운동사범 Y씨의 뒷채에 1만 달러를 내고 전세를 들었다.
시우다델라 아파트는 유럽에서 활약 중인 축구선수 떼베스가 살던 우범지대 아파트다.

생각날 때마다 웃음이 샘솟는 일은, 지금은 Y씨의 후계자가 된 주니어 Y 때문이었다.
그때 주니어 Y는 열 살이었을 것이다.
내가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려 오다가 이민동창에게 들르느라  집에늦게  도착하면 주니어 Y는 내게 마구 야단을 쳤었다.
주니어 Y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는데도 한국말을 제법 했다.
" 얜일이(원일이) 엄마, 집 안보고 왜 천천히 다녀요? 자자꾸(자꾸를 자기 아빠한테 그렇게 배웠음) 그렇게 하려면 집 나가 버려요!"
그럴 때 나는 내가 너희 집 문지기냐? 그러지 않고 하하하 웃어 넘기는 성격이었다.
사실 우스웠으니까 웃었던 거다.
세상은 그렇다. 상대방은 화를 내는데  이쪽에선 웃을 때가 있는 것 같다.
코미디의 유머철학 비율은 6+2+2인데,  6이 재미이고 감동이나 교훈이 각각 2라고 한다.
사람이 한 번 웃을 때마다 1백 82개의 근육이 움직이며 몸에 유익한 호르몬 분비가 많아진다고 한다.

그때 1년 정도 그 집에서 살고 우리는 집을 사서 나왔다.
그집에 살 때, 주니어 Y가 심각하게 내게 물었던 말이 있었다.
"왜 얜일이 엄마는 젓가락 공주가 한 번도 안 아파요? ,  내 엄마는 고르다(뚱뚱이)인데 날마다 아파요."
"왜냐면 나는 보약을 좀 먹었거든."
"보약? 그거 어디서 파는데요? 내 엄마도 사다 줘야 돼요."
"한국에서나 살 수 있어. 이 나라엔 아직 아무도 한의사가 못 와 있잖아."

어느 날.
아베쟈네다 상가에 위치해 있었고, 주름치마를 전문으로 판매하던 유미네 가게에서 그 무렵 재아교민사회에 최초로 결성된 여성골프모임 J클럽 임원들의 임시회의가 있었다.
갈비와  감자를 굵직하게 썰어 넣은 갈비찜에 겉절이 김치를 곁들여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났는데 현지인이 페인트를 배달하러 왔다.
50Kg용량의 두 통이었다.
꼬르따도르(재단사)와 엔시마도르(재단보조)는 주름공장에 일감을 가져다 주러 갔었다.
그런데 고객들이 연신 주름치마를 사러 오니까 두 통의 페인트 통이 문가에 있어 사뭇 걸리적거리는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유미엄마가 그걸 옮기려고 시도를 해봐도 꼼짝도 안 했다.
나는 그럴 때 처음부터 나서는 성격은 아니다.
나약한 친구들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두어 명이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교대로 다가갔지만, 페인트 통은 전혀 꿈쩍도 안 했고, 두 명이 한꺼번에 들어보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걸어 가 페인트 통의 손잡이를 번쩍 들어 한쪽으로 옮겨 놓게 되었다.
기가 막혀서 단체로 뒤집어지던 친구들.
그 사실을 전혀 믿지 못하겠던지, 두어 명은 다시 쫒아가 온갖 힘을 다 쏟으며 애를 썼지만, 약간도 흔들리지 않던 50Kg의 페인트 통.

 나는 체중 면으로는 내 인생을 제대로 컨트롤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50Kg을 들어낼 수 있는 55Kg이니까.
개미는 자기 몸무게의 600배를 나를 수 있다는데 나는 나보다 적은 양을 들어냈을  뿐인 것이다.
운동을 따로 한 일도 없고,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는 지하수 물통 30Kg도 거뜬하게 정수기 위에 올리는 편이다.

아마도 어려서 먹어낸 보약 덕택이 아닌가 한다.
우리 집에서는 장손인 오빠에게 1년에 두 세 번 보약을 해줬다.
여름엔 땀으로 약효가 나간다고 해서 여름만 빼고, 계절마다 그랬다.
그런데 오빠는 쓰다고 탓하며 보약마다 병적으로 기피했다.
결국 보약은 내 차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 오빠는 손질 잘된 손톱을 바라보며 뜻모를 미소를 짓고는 했다.
(오빠, 고마워요. 나를 보약 먹여 키워줘서.)
안 될 건 없었다.
오빠에게는 싫은 것이 내게는 괜찮은 것이었으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쓰디쓴 그 보약이 참 맛있었고 매력적이라고 여겼었다.
감칠맛까지 느껴졌었다.
실제로 나는 요즘도 고들빼기김치나 씀바귀 같은 나물을 자주 장만한다.
"살면서 맘고생 좀 있을 테니 미리 쓴 맛 좀 들이거라!"
아마 신(神)은 내게 그런 메시지를 보내셨었나 보다.

결혼해서도 추석이나 설 즈음에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칭찬을 퍽도 많이 들었다.
동서들이 다 듣는 데서였다.
" 말랐어도 강단이 있는 맏 며느리, 살은 적어도 뼈가 튼튼한 며늘아이."

인생에 공짜는 없다더니 나는 보약을 먹은 대가로 지금 열심히 힘내어 일을 해내고 있다.
가끔은 휴식을 취하며.
휴식!
얼마나 듣기 좋고 부드러운 말인가.

그제는 밤새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밤은 언제나 신비롭다.
어떤 밤은 빗소리가 자장가인데, 어떤 밤은 빗소리가
자꾸만 함께 퍼붓자고, 같이 쏟아지자고, 더불어 내리자고 그런다.
빗소리에 여러 번 잠에서 깨었던 밤.
오늘 아침, 내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말끔히 씻겨진 것처럼 몹시도 상쾌하다.
나는 비가 내리고 난 이틀 간의 새벽을 참 사랑한다.
머리 속에서 갈등 같은 게 일단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 비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리피트 버튼을 누르고 나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신다.
디아나 워싱톤의 'Time After Time'이다.
때로는 길을 잃고 싶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하면 불가능하게도 여겨진다.
일단 헤매지만, 나의 내부에서 조급함이 물결치기도 한다.
길을 찾아낸 나를 발견할 때도 간혹 있다.

이미 가을이다.
아침저녁으로 춥지만 난 추위 속을 걷는 일도 기쁨으로 여긴다.
그러면 없던 힘도 생기는 것처럼 긴장되는 느낌이라서다.
오늘도 산뜻하게  하루를 잘 살아낼 것이다.




2012년 2월 28일 화요일

인디언 기도


-펌-




인디언 기우제’란 말은, 인디언들이 가뭄이 들어 기도할 때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한다는 것을 빗댄 말입니다. 이 말에는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하니 당연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있습니다. 물론 좋게 보는 시각에서는 용기를 잃지 않고 부단히 기도를 하니 그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해석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디언 기우제’란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북미 원주민들로부터도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계속 지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작가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바호족의 기우제를 수년동안 관찰한 게리 위더스푼에 의하면, 모두 네 번의 기우제를 관찰했는데, 모두 12시간 이내에 비가 왔다고 합니다. 그중의 세 번은 몇시간 동안만 왔고, 한번은 몇일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기우제에서는 잠시동안만 비가 왔다고 합니다.

각각의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어쨌든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많든 적든 비가 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웃의 호피족이나 다른 인디언 부족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기도를 하기에 이처럼 비가 오는 것일까? 뛰어난 인디언 주술사들은 우주의 기운을 마음대로 부리는 신비한 재주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인디언 공부하면서 늘 궁금해 하던 것이 바로 인디언들의 기도였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기도를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명한 주술사들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도 비를 오게 할 수가 있었으며, 반대로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사례가 여럿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얼마전 그 인디언 기도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래그 브래든이 전하는 그의 인디언 친구 데이비드의 ‘비기도(rain prayer)’ 내용입니다.

미국 서남부에 100년만에 최악의 가뭄이 왔을 때 일입니다. 나는 인디언 친구인 데이비드를 따라 그의 부족의 ‘신성한 원(medicine wheel, 둥글게 돌을 놓아 만든 원)’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비 기도를 할 참이었습니다. 마침내 높은 산정의 능선에 있는 신성한 원에 도착하자, 그는 신발을 벗었습니다. 얼마나 엄숙하게 신성한 태도로 신발을 벗는지 그 자체가 기도였습니다.

그는 맨발로 대지 위에 섰습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신성한 원의 돌 가로 걸어갔습니다. 아무 소리없이 그는 신성한 원을 돌았습니다. 하나하나의 돌과 그의 조상들에게 존경을 표현하면서. 그의 발은 신성한 원의 돌들로부터 3센티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성한 원의 돌에 발이 닿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신성한 원의 가장 바깥쪽 돌을 돌았을 때, 그의 얼굴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눈은 굳게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시종 눈을 감고 돌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정확히 각각의 돌 옆에 발을 디뎠습니다.

신성한 원을 다 돌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똑바로 섰습니다. 그리고 양손을 얼굴 앞으로 모은 뒤 기도했습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도 그의 숨결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잠시 기도를 하던 그는 마침내 깊은 숨을 내쉬며 그의 자세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이제 다 끝났네.”

내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벌써?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하러 온 것 아냐?”

그가 신발을 신고 앉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비가 내리는’ 기도를 하러 온 거야. 만일 내가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하러 왔다면 결코 비는 오지 않을 것이네.”

놀랍게도 얼마후 구름 한 점 없던 날씨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는 순식간에 굵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먹구름이 우리가 내려오는 골짜기를 뒤덮었습니다. 비는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홍수가 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그 골짜기를 빠져나올 즈음 멀리 동쪽 산들과 내가 서있는 골짜기 입구 사이에 펼쳐진 너비 18킬로미터의 거대한 들판이 호수로 변했습니다. 그날 저녁 지역방송국의 날씨특보는 콜로라도주 남부와 뉴멕시코주 북서지역 전체에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홥니다. 그리고 그래그 브래든이 그의 <이사야 효과>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기도’라고 명명한 그 유명한 인디언 기돕니다.

다음날 아침 브래든은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온통 물난리잖아.”

한동안 침묵하던 데이비드가 말했습니다. “나는 비기도를 했을 뿐,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것까지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렇다면 이렇게 오랜 가뭄을 끝내고 비를 오게 한 데이비드 기도, 아니 인디언 기도의 요체는 무엇일까? 데이비드의 말을 들어봅시다.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내게 기도의 비밀을 알려줬네. 비밀의 요체는 이런 거야. 우리와 이 세계의 힘을 이어주는 다리는 바로 우리의 가슴이네.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생각이 결혼하는 것은 바로 여기, 우리의 가슴이란 말이지.

기도하면서 나는 현재의 모든 것에,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에 감사를 드렸네. 나는 황무지의 바람에게도, 대지의 뜨거운 열기에게도, 심지어 가뭄에게도. 그런 다음 나는 새로운 메디슨, 비가 내리는 메디슨을 선택했지.

“나는 눈을 감고 신성한 돌 둘레를 돌며 비가 온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네. 그리고 곧 비가 내 몸을 촉촉이 적시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지. 단순히 그렇게 상상한 것이 아니라 깊은 몰입과 집중 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느낀 것이네. 그때 나는 비를 맞으며 마을의 큰 광장에 맨발로 서있었던 것 같네. 비에 젖은 땅이 내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그리고 태풍 속에서 우리 마을 집의 흙벽과 지붕을 덮은 이엉에서 나는 그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네. 나는 마을에서 나와 비를 맞으며 가슴께까지 자란 옥수수밭 사이를 걸어갔네. 그 황홀하고 짜릿한 느낌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지....

“눈을 감고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이라네. 뭔가를 원한다면 먼저 그것을 오감(五感)으로 느껴야 하네. 그래서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처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고, 피부로 느껴야 하는 것일세. 그때 기도는 비로소 힘을 발휘하지.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방식이네.”

데이비드 기도는 말합니다. 기도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기도하고자 하는 내용을 먼저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고. 그런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것은 단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먼저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고. 그리고 창조에 동참할 수 있게 허락해주신 신들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디언 주술사 구르는 천둥이 지적했던 것처럼, 기도할 때 결코 비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이익을 얻기 위한 사사로운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012년 2월 27일 월요일

나의 생일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7월 26일


나는 친구가 많다.
친구가 많다는 건 한 명도 없다는 얘기라고 누군가 단정 지어 말한다 해도 나는 친구들의 장점만을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 하나하나를 다 소중하게 아낀다.
친구 W와는 동갑이고 생일까지 같은 날이고, 남편들의 성은 박 씨이며  직업도 같아서 각자의 공통점까지 여럿이다 보니까 한층 가깝게 지내는 중이다.

몇 년 전부터 W는 잊지 않고 나와 생일을 함께 보내주고 있다.
양력 7월 하순이면 W는 내게 전화를 해오는데,  우리가 식사를 나누게 될 식당과  시간을 정하고 그러느라 한참이나 실갱이를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날 둘이서만 참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남편들 흉도 좀 들썩이면서  세상 사는 얘기들을 곁들이다가  선물도 주고받고 그러는 것이다.

올해도 며칠 전이 생일이었는데,  W가 먼저 전화를 해와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서로 절충하다보니까 점심으로 정하게 되었다.
W는 전화를 끝낼 때 부탁하나를 선전포고 하듯 쏟아냈다.
"있잖아, 난 꽃다발을 별로 안 좋아 하니까 일부러 그런 걸 맞추고 그러지 마. 꽃다발은 물론이고 다른 선물도 사양이야. 우리 그냥 올해는 조촐하게 식사를  하면서 수다나 실컷 떨자."
"저런! 그랬었구나. 그런데 난 해마다 꽃다발을 했었네?"
나는 꽃다발 선물을 퍽도 선호하는 편이었다.
사실,  형편에 맞지 않게 격에 안 닿는 선물을 하거나 낭비하는 일도 일종의 사치나 허영으로 간주하며, 그런 태도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난이라고까지 단정 짓는 나였으므로 꽃다발 이외의 다른 선물을 골라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마당에서 전화를 받다가,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는 가족이 있는 거실로 돌아온 나는 고개까지 갸웃하면서  중얼대고 있었다.
"너무 이상하네. 왜 꽃다발을 싫어하는 사람이 다 있지? 그것도 여자가. 더군다나 생일까지 같은 친구가."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명쾌하고  그럴 듯한 대답을 해냈다.
"싫다면 싫은 거죠. 난 알 것 같아요. 등 따습지 않은 어떤 불편함 같군요."
"꽃다발을 기피하는 무슨 이유가 따로 있을 거야. 어쩌면 실용적인 선물을 바라는 지도 모르겠고."
나는 서둘러 쇼핑센터 '까르푸'에 가서 머그잔   여섯 개를  고른다.  값도 착했고, 운치도 있는 수입품이었다.

W는 올리보스 (Olivos)지역에서 별장과 같은 주택에 살고 있고
W는 애들이 셋이나 되므로 한 달 생활비와 학비가 몇 천 달러가 든다고 그러고
불경기의 여파로 해마다 다녀오던 고국여행을 3년이나 못 갔다고 투덜거리길 잘 한다.
하지만 나처럼 꼭 필요한 소비가 될는지 생각하면서, 안쓰는 일에 관록이 붙은 생활환경은 아닌 게 확실하다.

M식당에는 W보다 내가 먼저 도착되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된 W를 반기던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가 순간적으로 고정되는,  그 비슷한 느낌이  스멀거렸기 때문에 자리에서 사뿐 일어났다.
W는 핸드백과 선물 보따리 등은 왼손에, 오른 손엔 아주 예쁘고 정성스럽고 반짝이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꽃다발이라는 게 우아하게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껴안고 뺨을 대며 축하한다는 말을 나누고 난 후에도 나는 꽃다발을 유심히와 무심히가 엇갈리는 심정으로 번갈아 가며 보았다.
"있잖아. 꽃다발을 받을 때의 기분이 너무나  근사했어. 그래서  나도  자기를 좀 그렇게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왜!  불만이구나?"

W와 헤어지면서, 30Kg의 쌀부대조차 거뜬하게 들어 올리는 평소의 내 팔 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친구 W가 들려준 선물 보따리는 어딘지 모르게 골똘한 표정을 짓게 하는 무엇인가의 무거움같은 게  분명하게 끼어 들고 있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W가 걷는 쪽을 돌아보니, 우연처럼 W도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보따리를 잠시 땅에 내려 두고, 꽃다발과 함께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마치 꽃다발을 건네던 내 지난 몇 년 간의 생일들에게 손을 흔드는 기분이었다.

내 음력 생일에 내가 나를 축하해 주는 의미에서 계절에 맞게 옷을 한 벌 사 입고, 양력 생일이면 가족에게서 꽃나무와 클래식 음악이 수록된 음반과 함께 짧은 편지를 받던 촌스럽게 오붓했던 지난날들에까지도 손을 흔들어 주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생일.
이 언어는 현재의 내게 여러모로 격세지감을  안긴다.
손에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작게 보이지만, 놓치고 나면 곧 그것이 얼마나 크고 귀중한지를 알게 된다는 추억 가득 실린 지난날들 또한 마찬가지다.
손에 잡고 있을 때 작게 여긴 적도 없었지만, 나는 분명 상실한 것 이상으로 많은 걸 획득한 느낌으로 가득해 있기는 하다.
내 생일은 어쩌면 1년에 한 번 씩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도 돌아오고 일주일에 한 번일 때 역시 많았을 것이다.
W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나를 항상 배려하고 언제나 챙기면서 고맙게, 나로 하여금 문학에 더욱 치열하면서  몰두까지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던 날들이 대부분 이었다고 보여진다.

생일이 있어 나 반짝 밝아지기도 하고
생일이 있어 나 애틋한 격정이 치밀기도 한다.

다음 해의 생일엔 W에게 내가 만든 꽃다발을 건넬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우연히도 꽃집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내가 항상 이용하던 바로 그 M 꽃집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심을 굳히게 된다.
언제나와 같이 다시 양력 생일을 가족과만 보내고 싶어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음력 생일은 내가 나를 축하 하는 날로만 지내고 싶어진 것이다.
이제 W와 같이 보내는 생일은 접으려 한다.
왜냐면 아무리 친구라 해도 나는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선물을 받고 축하를 받고 그러기가 더할나위없이 버거워진 탓이다.
꽃다발만은 여전히 보내게 될 것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리고 고요히 살아갈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해 왔고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사에 감사하리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