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엘로이
맹하린
일 년 중 두 번째로 큰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봄의 날(9월 21일)에 대비(對備)하려고
수요일에 미리 꽃시장에 갔다.
금요일에 구입하는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트라픽으로 한 번에 들여 오면 정리 정돈하는 일에 시간을 다 허비하는 불편이 따른다.
막시는 하필이면 자동차가 고장이라고 며칠 전 통보해 왔었다.
미리 예약했더니 20대 중반의 현지인이 수요일 새벽 5시에 집 앞으로 왔다.
꽃시장은 6시에 열고 20분이면 닿는다.
그런데 대목이 끼면 5시에 출발해도 자동차를 세울 자리는 넓고 거대한 차고마다 겨우 몇 개 밖에 안 남는 형편이다.
비가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내가 막시와 함께 가면 가족은 안 가도 되지만, 다른 기사와 갈 경우 구입하는 꽃마다 나와 가족이 모두 옮겨야 한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은 마르가리따라고 먼저 관등성명(官等姓名)을 알리고 나서였다.
그는 싱긋 웃더니 윈도우 와이퍼가 부지런히 작동(作動)되고 있는 차창(車窓)의 김서린 부분, 그러니까 백미러 바로 옆에 한글로 '엘로이'라고 왼손의 검지를 사용하며 써냈다.
현지인들은 대다수가 왼손잡이들이다.
"한국어를 배웠어요?"
"아뇨. 이름만 쓸 줄 알아요."
"이름만이 아니고 이름도 쓸 줄 아는군요?"
그는 자동차가 꽃시장을 떠나올 때, 꽃이 너무 많다고 내 가족은 택시 타고 따로 가야한다고 주장(主張)하면서 사무실의 밤 당번 관리인인 다미안에게 쪼르르 전화해서 일일이 보고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일러바치기만 좋아했지, 다미안이 항상 내 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틈을 비집고 가족이 차에 탔음을 알자, 그는 지나치게 놀라고 있었다.
"당신에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내 가족은 말라깽이고, 그리고 우리 한국인은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떤 어려움이나 틈새도 비집고 들어가는 선수들이죠."
"하하 하하하하."
그에게서 경쾌한 웃음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 나는 불쑥 물었다.
"애인 있어요?"
그는 이번엔 언제 커다랗게 웃었더냐 싶도록 실실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없어요, 애인."
비는 그치는 일을 잊었다는 듯 연거푸 내렸고, 그는 히터를 아끼려는지 아니면 내가 히터 켜는 걸 싫어하는 정도는 미리 다미안에게 주워들은 사람처럼 유리창을 약간씩 열어 두고 운전했다.
그 열린 창 사이로 빗방울들이 자주 날아들어 내 얼굴을 골고루 적셨다.
"후안 데 가라이로 지나갈래요?
후안 데 가라이 대로(大路)는 일방통행이고 신호가 일사불란(一絲不亂) 잘 연결되어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는 길이다.
4Km 남짓의 거리를 막힘없이 달릴 수 있는 길.
나는 막시에게도 언제나 그 길을 이용하도록 이미 오래 전부터 미리 지시해 두었었다.
논스톱.
계속 파란불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 길을 즐겨 지나다닌다.
후안 데 가라이…….
모임의 S여인이 이민 왔던 맨 처음에 도무지 그 길의 이름이 외워지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후안 대가리라고 기억했었다는 거리.
나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한국어로 이름이라도 쓸 줄 아는 그에게 괜스레 고마웠다.
그 역시 더 이상의 말은 됐다 싶었는지 음악을 틀었다.
한국가요였다.
아마추어 수준의 아주 못 부르는 음색이었다.
나는 한국가요를 잘 안 듣는다.
특히 정오(正午)부터는 더 안 듣는다.
저 혼자 입력되어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흥얼대기 때문이다.
나는 새삼 희망하게 된다.
나도 안 듣는.
나도 못 들어 본.
나도 가까이 하지 않는.
그러한 한국가요를 단지 고객을 위해 준비하고 틀어주는 엘로이의 앞날에 밝고 환한 축복 있으라!!!
그가 어찌하여 레미세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꼭 성공적인 삶을 초대할 것만 같은 예감이 앞선다.
오가는 값.
기다린 값.
나는 그가 부르는 차비보다 훨씬 더 얹어 주면서 잊지 않고 내 특유의 농담을 건넸다.
"택시보다 엘로이의 차를 더 좋아 해서 가족이 끼어 탄 차비까지 더 얹은 값."
비는 여전히 퍼붓고 우리가 탄 엘로이의 자동차는 Chacabuco 공원 앞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옆 차의 조수석에서 현지인 청년이 내리더니 애인이 운전하는 차의 앞 범퍼 위에 하트모양을 역시나 왼손으로 그리고 떠나갔다.
애인은 그제야 우산을 펴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미소 가득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내 나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싱그러운 장면들과 사실들에게 감동되고 매혹을 느낀 탓에 지금껏 남의 나라에서 잘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금요일이던 봄의 날.
그리고 토요일에 있었던 H교회의 결혼식꽃.
인생사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 큰일들은 항상 겹치고 겹친다.
일 년 중 가장 꽃값이 비싼 시기(時期)인데도 어디서 그렇게 나타나는지 많은 우리의 한국인 청년들과 어느 정도의 현지인들을 만나보는 날.
무척 고달프면서도 참으로 감격도 되는 날.
봄의 날.
몹시 힘겨워 그걸 만든 사람을 원망하면서도 그걸 만든 사람과 내 고객들에게 새록새록 감사하게 되는 날.
나어린 친구 수산나에게도 일을 도와줘 감사했다고 따로 짚고 싶은 날.
외갓집에서 출생하여 이름의 앞에 외자가 붙는 다른 친구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어머니 날에나 제대로 돕겠다고 했던 날.
나는 며칠동안 지독하게 춥고 열이 많고 그리고 음식마다 모두 쓰디쓴 맛의 감기를 앓는 중...
2012년 9월 18일 화요일
봄, 봄이다
맹하린
폴더를 열거나 클릭 할 때마다 바이러스의 침투를 알리는 경고음이 사이렌처럼 잦게 울리고 있다.
바이러스의 침입이 있었지만 해결했다는 알림과는 또 다른 느낌의 경고다.
그런 와중에서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중국의 어선들이 센카쿠 열도로 몰려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5성홍기(五星紅旗)까지 매단 점으로 봐선 심상찮은 결집(結集)이다.
마치 고전을 최신식으로 편집한 현대판 삼국지를 접하는 기분이다.
세상의 모든 정치메니아들은 때로 결집을 시도하고 실행하는 일에 과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폭풍도 대단한데 4개의 폭풍이 겹친 한국의 태풍 역시 대단한 위세였다고 본다.
차분히 바이러스를 몰아내고 흔쾌히 다른 창들을 다시 깔고 지울 것 지우자, 더 빠른 속도로 새로워진 컴퓨터.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일주일 내내 비는 안 내린 찌푸린 날씨다.
이윽고 봄비의 속삭임...
이쯤해서는 까무룩 빠져드는 노동이 유일한 소통이다.
언제나 기다림을 깨우치던 산책로는 풍경이 풍경을 할퀴거나
풍경이 풍경을 토닥이고 있다.
봄날의 출산을 치마폭 가득 감싸 안고 쩔쩔대며 진통 중인 하늘.
등에 영원의 낙엽 한 장씩 키우며 입어냈을 사막거북이 두 마리 사기로 했다.
쇠와 금이 엇갈린 빛의 잎이며 등이고 망토다.
한 마리의 외로움 보다는
두 마리의 외로움이
나와 간격을 두고 지탱해 줄 것만 같다.
때로 나는 하얗고 사소한 상념의 음표를 쉬엄쉬엄 그려낸다.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에 연초록 잎들이 먼저 화답하는 계절이다.
봄은 이미 당도(當到)에 이르렀다.
고요를 품었으나 전진(前進)하는 봄!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사진을 보며
그대는 나를 장한나 닮았다고...
내 양옆에 송태일과 송주은...
문협 여류들과...
문우 S여사와
문협 막내 정은님과 야유회에서...
나는 때로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도 입는...
문협 여류들과, 그리고 내가 아낌없이 꽂은 꽃...
내 문우 S여사와...
맹하린
내가 네 살일 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서울에 가셨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던 평소의 뜻을 그런 식으로 실행하신 셈이다.
나는 안 보이는 주머니 속에 넣어져 아버지를 따라 난생 처음 서울 나들이를 했다.
전주와 이리 사이에 있는 백구면 시골뜨기의 첫 서울 나들이였다.
아버지가 요절(夭折)과 같은 운명(殞命)을 하시자, 고무부가 아버지 이상으로 나를 예뻐 하셨다.
지금은 백석대의 음대학과장으로 있는 고모의 딸 송주은과 함께, 나는 서울 나들이를 고모부와 다시 해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할머니 역시 절에 갈 때나 이리와 전주로 제수(祭需)장을 보러 다니실 때 마다 꼭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오빠는 너무 컸고, 동생들은 너무 작아서였다는 게 첫 번 째 이유였지만, 내가 가장 데리고 다니기에 만만했던 것 같다.
나는 운명론자다.
그런 저런 일들 모두 각각 다른 부피의 에너지가 되어, 나는 어쩔 수없이 글쟁이나마 되었을 것이다.
며칠 전 , 내 고객인 Arquitecto(건축 기사) Kim이 부친의 팔순인 금요일에 필요한 사방화를 꽤 값비싼 가격으로 맞추고 갔었다.
어제 나는 꽃다발 7개까지 나의 선물로 준비하여 동시에 납품을 했다.
Arquitecto Kim이 누이가족은 물론이고 자녀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가서 부모님께 드리라는 의미에서였다.
새삼 고국의 가족들이 생각나 사진을 꺼내 보며 내 지난날들을 그립게 떠올렸다.
고모 내외는 물론이고 가운데 서 있는 오빠도 보고 싶었다.(내 중학교 졸업사진이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사색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에 지금은 거의 밝게 산다,)
오빠는 요즘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에 그토록 즐기는 등산도 접었다는 소식이다.
고모부의 조카인 내 친구 송경수도 그의 엄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모는 그 무렵, 맏동서인 송경수의 엄마에게 두루마기와 숄을 선물했었다.
이리고등학교 교장이던 송경수 아버지의 봉급으로는 네 자녀 뒷바라지가 빠듯하리라는 걸 고모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본다.
얼마 전 나보다는 연상이지만, 문우인 S여사와 까페떼리아 "셀레스테(파랑)"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피부가 뽀얗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그분은 사진을 정리하다 나오셨다고 말했다.
주위사람들이 자꾸만 예고도 없이 떠나므로 뭐든 정리하게 되더라고 했다.
옛 사진들을 그래서 더욱 다시 꺼내 보게 된 나지만, 나는 아직은 뭐든 정리하기가 싫어서 마구 어지럽히며 살고 있는 편이다.
정리 좀 해야지 그렇게 중얼대면 가족이 나를 은연중에 두둔해 준다.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사시면 돼요. 워낙 예외적인 존재시니까요."
그렇다.
아직은 사진을 정리하느니 사진만 바라보게 된다.
나의 나날은 하나하나의 독립된 나들이다.
현재의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와 고모부를 따라 나서지는 못하고 있지만, 내가 나를 데리고 다닌다고 보여진다.
최근의 나는 일주일 후에 떠나게 될 문협의 소풍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 안에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높다랗게 내 앞에 쌓여 있는 형편이다.
사진을 보며
사진이라도 보며
나는 나를 휴식시키고 있다.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Los manteros(좌판 상인들)
맹하린
나의 행동반경(行動半徑)은 내가 생각해도 뻔하고 빈약한 편이다.
한인 타운에 위치한 집과 가게와 이웃과 산책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약간 멀리 떨어진 꽃시장과 어쩌다 안 바빠야 나가는 성당 정도가 내 활동영역의 전부가 아닐까 여겨지게도 된다.
더 있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나가는 세 개의 모임.
내가 만나는 사람 또한 뻔하고 뻔하다.
그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족이다.
그러니 내가 꽃 이야기나 가족이야기를 거의 안 해야겠다는 각오를 강하게 굳히다가도 자주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나의 취약점 중의 취약점일 것이다..
엊그제는 냉장고 속의 꽃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거의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가는 꽃시장을 세 번째로 갔다.
리시안뚜스와 재스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현지인이며 40중반인 마우리시오가 내게 질문도 아니고 불만도 아닌 얘기를 불쑥 토로(吐露)하고 있었다.
"마르가(마르가리타의 애칭), 그저께 퇴근길에 우리 동네 야채가게에 들렀어요. 미 에스뽀사(나의 아내)에게 과일을 좀 사다 줄 생각이었죠. 그런데 무슨 놈의 야채가게라는 게 꽃나무 몇 개와 꽃 몇 묶음까지 갖다 놓고 파는 거 있죠? 내가 미칩니다. 내 얘기는 무슨 볼리비아노(볼리비아인)들이 감자나 제대로 취급하지 않고 꽃까지 파느냐는 겁니다. 내가 듣기로는 아베쟈네다 거리에 가면 수스 바이사노스(당신 동족들)마다 걔들 때문에 아예 골머리를 싸매고 산다죠? 이러다 의류도매상이고 꽃시장이고 모두 볼리비아노들 차지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이 꽃시장만 해도 그래요. 걔네들 좌판(坐板)이 얼마나 날이 갈수록 많이 늘어나는 중입니까? 자고새면 늘어나지 않던가요? 아니죠, 이런 식이라면 아르헨티나, 이 나라가 머잖아 볼리비아노들 세상이 될 것만 같아요."
꽃시장에 가면 느긋하게 수다까지 나눌 만큼의 시간적 여유라고는 없는 나인지라 하하하 웃기부터 해내고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는 걸로 대답을 마친 후 속히 다음 코스인 라파엘의 가게로 성큼성큼 이동하게 되었다.
그냥 나오기 뭣해서 마우리시오의 가게를 나오며 남긴 내 대답은 너무나 간결했다.
"우리가 볼리비아에 가서 좌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참읍시다. 까이꺼! 아셨죠?"
라파엘은 일본인이다.
50초반쯤으로 보인다.
오사카 출신의 2세일 것이다.
매사가 농담 위주인 라파엘인지라 나로선 잽싸고 명쾌하게 잘 받아 넘겨야만 하는 게 관건 중의 관건이다.
꽃값의 거스름을 주려다가도 순식간에 나를 주시(注視)하며 화살을 쏘아대는 그.
"께 린다(예쁘네)!"
그럴 때 나는 멍청하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다음에 당신 부인이 나오면 일러 바쳐도 되죠?"
그의 부인 비비안나는 대목 때나 나와서 거들고는 한다.
글로벌 시대!
꽃시장에도 그런 기류(氣流)가 어딘지 모르게 점차 눈에 띄게 회오리 치고 있는 중이다.
마우리시오의 말처럼 요지(要地)를 벗어난 옆 켠으로 볼리비아노인들 소유의 좌판이 자꾸만 늘어나는 추세이고, 그 진전(進展)역시 상상외의 급격한 속도를 가하고 있다.
공생공존(共生共存)이라는 말이 피부 위에 들러붙는 느낌이고, 실감까지 되어지는 시절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크리스티나는 3선을 겨냥하고 투표연령을 16세부터 가능하도록 바꾸는 법안을 상정(上程) 중에 있다고 한다.
16세...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투표를 하기에는 어쩐지 부족한 나이가 아닐까.
왜냐하면 어른들조차 투표를 군중심리에 치우쳐 해낸 뒤,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이나 목격했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더 많은 인접국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지도 모른다.
느닷없는 사면령을 내려 인접국 사람들 너도나도 영주권을 낼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오나가나 인접국 이민자들이 판을 치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좌판을 깔아대고 있다.
모포를 깐다는 데서 유래(由來)한 좌판쟁이들인 것이다.
한국도 인접국 일꾼들이 몰려들기는 한다지만, 이 정도로 물불 안 가리고 시장경제를 잠식하려고 들지는 않는다고 본다.
언젠가도 짚고 넘어 갔지만, 우리 가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 하던 볼리비아나 그라시엘라는 30도 안 된 나이에 정식고용을 기피하는 술수에 대단한 기지와 능란함을 보이고는 했다.
여러 한국인들 가게나 집의 시간제 청소부로 일하면서 정부가 내어주는 보상금마다 알뜰살뜰 모조리 포식(飽食)하는 과정(過程)을 매우 과학적이다 싶게 탐닉하고 있는, 너무도 영악한 여인이었다.
어느 날은 내게도 신청을 왜 안하는지 이해가 안된다면서 간곡히 권유까지 했었다.
남편의 병환보상비, 아들의 학비보조금, 어쩌고 저쩌고...
나는 그때 난생 처음 사용하는 말을 속으로만 답했었다.
(누굴 뭘로 알고!)
볼리비아인 들을 제품공장의 일꾼으로 고용하는 친구 수산나가 얘기하던, 그들에 대한 명칭이 새록새록 부각(浮刻)되는 작금(昨今)이다.
"우리끼리 사용하는 걔네들에 대한 호칭을 자주 바꾸게 돼요. 볼씨라고 하면 벌써 알아듣는 눈치라, 지금은 산동네 애들이라고 바꿨어요. 그런데 산동네 애들이 점점 좋은 차들을 소유하며 부자가 되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한국인을 앞서는 면도 많아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일감을 그대로 카피해서 우리보다 싼값에 해치우는 그들이거든요. 우린 결국 유럽이다, 미국이다, 한국이다, 브라질이다를 휘돌고 다니며 최신식 모델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상납한 결과가 된 거죠"
나는 뜬금없다는 듯 불쑥 대답했다.
"머잖아 우리는 산동네 애들을 이 나라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일이 생기겠군요?"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다가오고 다가오던 등불들
맹하린
36개의 벽에 거는 꽃다발.
52개의 식탁 꽃.
8개의 메인식탁에 올리게 될 사방화.
6개의 꽃길기둥.
위와 같은 내용(內容)의 완성된 꽃 장식들을 싣고 J교회 수양 관에 위치한 결혼식 Fiesta(파티)장소에 갔다.
현지인 기사가 운전하는 트래픽을 이용한 길이었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7Km 떨어진 지역이었다.
수도(首都) 9 de Julio 거리에서 0Km로 시작되는 기준이기도 했다.
스승의 날, J교회에서 열리는 36인의 임직식 등의 큰 행사들이 금토일월 4일 동안에 걸쳐 여럿이나 겹쳐 있었다.
보름 간격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있으면 적당하고 고마웠을 행사들이어서 정신적으로 많은 압박감이 있었다.
주말이었는가 하면 주말의 시작이기도 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짐차를 이용하고 싶어서 전화로 장소와 날짜 등을 알리는 메시지도 남겼고, 전화를 여러 번 해도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다른 일이 예약된 상태인가보다, 그런 판단이 생겨 항상 이용하던 현지인 운송회사에 다시 연락을 취했다.
J교회 수양관은 천주교 피정의 집이나 다른 교회들의 수양 관에 비해 매우 현대적이며 가장 첨예로운 데다 특별하고 다양한 시설을 골고루 구비한 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축구장, 수영장, 교회, 각종 강의실과 기도실, 식당 , 정원등이 광활하면서도 깔끔함 그 자체처럼 돋보이고 있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꽃장식에 소비된 시간만 한 시간도 넘게 정신을 쏟은 셈이다.
돌아오는 ruta(고속도로)에서 피로감이 단박에 달아나던 , 나는 시야 가득 등불을 담아내기도 하고 닮게도 되는 광경을 꽤 오랫동안 주시했다.
라플라타(은빛)도시에서 열리는 축구대회를 향해 맞은편에서 1분도 쉬지 않고 멈춤 없이 달려오는 승용차들, 그리고 응원단들을 실은 버스들을 거의 한 시간 이상이나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괄목할 만한 사실은 현지인들은 10년된 차는 기본으로 알고 있고, 20년쯤 된 차까지도 너끈히 몰고 다니며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들과 기사, 두 사람은 초반부터 동시에 합창을 했다.
“우와, 오늘 라플라타 시에서 있는 벨레스와 에스뚜디안테스의 축구시합!”
각종 크고 작은 차들이 모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우리의 왼 켠으로 수없이 다가오고 다가왔고 그리고 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 기둥으로 화할까를 염려하는 사람처럼 뒤를 돌아 본 일은 없어서 그렇게 다가 온 차들이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선 잘 모른다.
응원단의 대표나 주역들은 마피아들의 손아귀와 악력(握力)에 개입되어 쥐락펴락 조정되고 있는 현실을 결코 외면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라선지, 응원단들이 탄 버스들의 선두(先頭)마다 필수적으로 경찰차들이 진두지휘하듯 앞장섰던 행군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지방 도시들은 대낮에도 헤드라이트를 켜야 된다는 교통법규 때문에 자동차들마다 두 눈에 등불을 켜는 의무와 책임을 철저히 실행하는 중이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 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된 법령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방도시들은 그러한 법제정 후, 교통사고를 눈에 띄게 극소화 했다는 칼럼을 언젠가 읽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나 많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자동차들의 행렬과
그처럼 많은 헤드라이트의 다가옴을 뒤늦게나마 접하고 보아낼 수 있어서 나는 내내 감동의 연속상태에 잠겼던 것 같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축구장을 가득 메워 백만이라는 관중의 숫자를 기록하는 거라고 아들과 현지인 기사는 서로 죽이 맞아 신나게 얘기의 꽃을 피워 냈다.
응원단끼리 싸움이 나서 인명피해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도 뒤따랐다.
아르헨티나 유명 사회자인 띠넬리의 별장이 맞은 편이라는 설명도 내게 전해졌다.
별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성채(城砦)였다.
아르헨티나가 진정 불경기의 여파에 시달리는 중인지 전혀 실감이 안 나던, 아르헨티나는 과연축구의 나라인 게 확연한 사실을 눈으로 재확인 하듯 1시간 정도 지켜보면서 나는 내 활동영역의 본거지인 가게에 5시쯤 돌아왔다.
인간은 6백만 정도의 어휘를 구사(驅使)할 수 있으며 그러한 언어구사 능력은 이렇다 할 노력이라거나 의식적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 자연적인 팔다리의 자람과 다름 없이 언어 능력 또한 자연발생한다는 연구를 설파한 언어학자가 있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많은 부분을 그 많은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등불에 쏘이고 돌아왔다고 자인하게 된다.
누가 뭐라 해도 길고 말 많고 가끔은 오타도 생길 수 있는 글들을 영원에 이르기까지 써낼 생각이다.
나는 마치 언어들마다 두 손 가득 받아서 마음 깊숙이 재워둔 사람처럼 새삼 든든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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