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4일 토요일

우고 모쟈노 노총위원장의 연임을 지켜보며




    맹하린


세계경제의 암울한 기운이 날로 팽창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아르헨티나라고 질쏘냐,  팔을 걷어 부치며 한 몫 단단히 해내고 있는 판국이다.
우고 모쟈노 노총 위원장이 며칠 전에 있었던 선거에 연임하는 쾌거(快擧)를 이루었다.
선거를 끝낸 모쟈노 위원장은 경호원들을 대동(帶同)하고 곧장 페로 까릴 오에스떼 행사장에 도착했다고 뉴스가 전하고 있다.
모쟈노 위원장은 이날 수많은 지지자들을 향해, 치안부재와 인플레이션을 가장 당면한 과제로 지적했는가 하면,  야당의 입장을 계속 고수하며 정부와의 대결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연설을 중점적으로 펼쳤다.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크리스티나 키르츠네르에게 몰표를 내어준 노동자들의 민심이 모처럼 합심하며 폭발하고 있었다.
영원히 강할 것 같던 노총의  결집력이 얼마 전 두 동강 나는가 싶더니, 최근에 와선 다섯이나 되는 노총으로  분산되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노총이 뿔났다.
하나만 자라던  뿔이 네 개나 더 자라나서 자기들 뿔이 가장 강하다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멈추지 않는다.
다시는 노동자들의 표를 대통령 크리스티나에게 선물(膳物)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노라고 드높은 노도(怒濤)와 같이 철썩이고  있다.
노조원들의 불평과 불만은 점차 가세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의 원성(怨聲)은 일말의 비극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어디로 보나 일리가 함축된 표현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6개월 동안 가족 수당을 받지 못했습니다. 급료가 오르면 뭐합니까? 인플레이션이 모두 가로채 가는 것을."
"며칠 씩 추가근무를 해도 세금이나 공과금이 다 앗아갑니다. "
"열흘을 일해 봤자, 공과금을 빼고 나면 돌아오는 건 4일치의 허무한 몫만 남게 되죠."
가장 흥미를 끈 비판은 빠뜨리시아 불리츠 의원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일갈(一喝)이 아니었을까?
"정부가 특히 성공적으로 이끈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건 '국민 모두를 위한 인플레이션'이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정책적으로 지켜 왔던,  겉으로는  헐뜯고 안으로야 악수를 나누는 관계를 이뤘던 대통령 크리스티나와 모쟈노 위원장이 차후(此後) 어떠한 냉전(冷戰)과 결속을 가장 효과적으로 펼쳐 낼 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시국이다.
두 정치인은 암묵적 상생관계를 유지해온 덕택에 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일에 각자  기여한 바 크다.
문제라고 본다면,  모쟈노 위원장은 물론이려니와 대통령 크리스티나 역시 차기 대선에서의 영광을 거머쥐려는 카드를 이미 알게 모르게  영역의 획을 긋고  제시(提示)까지 했다는 데에 있다.
지금까지는 동반자였지만 지금부터는 경쟁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지난달의 동문회에서 우리 회원들은 매우 뜻밖이라고 볼 수 있는  거대한 플랜의 조감도(鳥瞰圖)와 계약서류를 일목요연하게 접하게 됐었다.
언젠가도 지적했던 선배가 일부러 가져온 서류들이었다.
리아츄엘로 강 근처이기도 하고 훼리아 라살라다와 인접한 곳에 세워지게 될 광범위한 계획들이 우주도시처럼 체계적으로 설계된 서류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 장의 계약서에는 열 명쯤의 Senador( 상원의원)들 서명이 있었고, 맨 위에는 대통령 크리스티나의 서명이 위풍당당 자리 잡고 있었다.
선배가 말을 보탰다.
"이 상원의원들은 순전히 대통령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너도나도 서명을 해낸 거죠."
불과 얼마 전,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소도시마다 생기는 훼리아 시장의 신설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으리라 던 뉴스가 메스콤에 중요 기사로 올려진  형편이라 더욱 의심이 가는 동시에  한층 신빙성도 생기는 플랜이 아닐 수 없었다.
대통령 크리스티나의 서명이 기재된  문서가 버젓이 나돌아 다니는 것도 이상했고, 믿지 않아야 될 이유도 없다는 사실도 이상했다.
선배가 다시 설명하는 말 중에 가장 관심이 집중되었던 대목은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었다.
위정자들은 참으로 유능한 언변의 달인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믿어서도 믿지 않아서도 안 되는 계획들이라는 건 마찬가지 느낌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현재의 사태로 봐선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확률이 가능하겠고 비일비재 일어나는  일이라서 특히 그랬다.
무직자(無職者)들의 생활개선.
권리금을 못내는 서민층을 위한 3개년에서 5개년으로 나누어진 할부임대조건 등등.
선배가 계속 쏟아내는 거대한 프로젝트들.
몇 십 헥타르, 몇 백만 달러의 경비소요, 아베쟈네다에는 없는 수백 개의 주차장시설, 편의점, 식당, 은행 등등.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안에서 내가 다른 선배들에게 건넨 말은 이랬다.
"조감도의 정교함과 고급스러움으로 본다면  나쁜 의미로 포장해서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어요.  하지만 원래 대형 사고는  고급스러움과 치밀함을 동반하므로 그점 역시 일단 의심을 두어야 해요.  계획중도하차라는 변수도 있으니까 너무 진실되게 접수하는 일은 생략하는 게 좋을 겁니다.  걱정들이 더  많아질 것 같아요.  우리 교민들의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도 생길  것입니다. 지금도 너무 많은 의류도매상이 존재하고  계속 너무 많은 훼리아들이 우후죽순처럼 불어나는 형세라서 하는 말입니다."
괄목할 만한 일은 그 선배는 여권이나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며칠이면 빼내는 일에 귀재(鬼才)라는 데에 있었다.
 (나는 급행을 껄끄러워 하는 성격이라 그럴 필요를 못 느껴왔었고 그런 신세도 지지 않아왔다.)
또한 대통령 메넴을 초청하여 한인체육대회를 개최했던 친 아계의 실력자라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경제성장모드전환이라고 표현하는 그 거대한 계획이 권력(權力)의 남용(濫用)이라는 당위성을 앞세우며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배제하지 못하겠다.
실제로 선배는 이런 일들을 글로 써야 한다고도 내게 말했지만,  나로선 되도록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던 사안에 불과했었다.
나는 그날 그렇게나 거창한 일에 가담한 선배가 부럽다기 보다 전혀 이해가 안되었었다.
편하게 살아도 큰 일을 모색해도 이미 비우기에 친숙해야 할 연륜이며 시절인  것을...... .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2~3년 뒤에 완공되리라는 그 의류도매시장에 앞서 내가 우려하는 일들은 지극히 평범한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이 불황을 잔병치례 없이 기쁘고 환하게 잘 견뎌낼까라는 매우 소박한 걱정 말이다.
오늘도 세상은 여지없이 날이 환하게 밝고 있다.
세계의 경제가 붕괴(崩壞)를 거듭하는 현상은 어떤 면으로든 위정자(爲政者) 들과 권위주의자들과 기업인들의 문어발식 경영파장(經營波長)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이런 사태(事態)나 위기(危機)를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건 아닐 것이다.
버블 경제라거나 금융자본파산 등 세계경제의 복합적 불황시대라는  굵직굵직한 타이틀이 한 두 해 거론(擧論)되어 온 게 아닌 것이다.
어제 오늘 의외로 바쁘게 일했다.
오늘 있을 음악회는 접고,  나는 제 2차대전시대를 고난으로 견뎌낸 유태인 피아니스트를 소재로 다룬 영화를 함빡 몰입한 채 보아낼 생각이다.
나는 요즘 뒤늦게 영화에 도취해 있다.



버블경제란?  

-펌-
 네티즌공감
버블경제란 무엇이고 왜 생기는 것인지요?
일촌 및 팬들에게 공감한 내용이 전달됩니다.

sjhnet
 님의 답변 
03.06.18 14:24 


거품경제는 금융업의 몰락을 의미합니다.예를 들어 님이 현금 800만원과 집을 가지고 있는데 가치가 1000만원이라고 치면요.어느 날 사자는 사람이 몰려서 집의 값어치가 2000만원까지 올라간 거예요.집값이 올라가니 님은 집을 팔기보다는 나도 집에 투자하면 돈이 좀 되겠구나 하고집을 담보로 현재 2000만원이니 1200만 원 정도는 대출이 되죠. 거기다가 님의 돈 800만원을 더해서 2000만원 가격의 다른 집을 한 채 더 사둔 거예요.이집 또한 님의 집처럼 가격이 오른 집인 거죠.그런데 오를 줄 알았던 집값이 다시 폭락해서 예전의 1000만원으로 돌아간 거죠.그렇다면 님의 입장에선 1000만 원 시가의  집 두 채에 부채가 1200만원이니 총재산이 800만원으로 줄어든 거구요.가만히 앉아서 재산이 반이하로 줄어든 거죠.은행의 입장에선 1000만원 밖에 안 되는 집을 담보로 1200만원이나 빌려줬으니 문제가 되는 거죠.이건 일례에 불과하지만 거품경제란 이런 식으로 실제의 가치보다 부풀려진 자본을 뜻하는 말로요.그 거품이 꺼지면 국가 경제의 기틀인 금융권의 몰락으로 이어지는데 그 무서움이 있습니다.





2012년 7월 12일 목요일

동행(同行)



       맹하린


어제 새벽 7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산책길을 걸으며  출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청년, 그러니까 30대로 보이는 현지인이 내 옆 켠에 나란히 같은 보조(步調)로 걸으며 미소 띤 표정으로 말을 시킨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엔 초생달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춥지 않아요?"
그는 전혀 우습지도 않은 판국에 하이에나처럼 낄낄대고 있었다.
"아뇨. 겨울이니까 추운 건 당연해요."
"무쵸 구스또!"
"엔깐따다!"
정말 기막힐 일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이 반갑다고 인사하자 , 서반아어를 배울 때 입력된 사실, 건네져 오는 인사에 같은 말로 답하지 않는 게 예의라는 사실을 뜬금없이 기억하며 엔깐따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건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땅에서 계속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그런 말들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매일 이 시간에 출근 해요?"
그는 폴라르 천으로 된 점퍼의 후드로 머리 전체를 덮고 있었다.
(범죄자 타입들이 모자를 선호한다지?)
추위 때문인 것도 같아 보인다.
"아니죠. 이 시간엔 어쩌다... 아마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름이 어떻게 돼요?"
"내 이름이 왜 궁금한데요?"
"친구하고 싶어서요."
심장이 산책길을 흔들 것처럼 두근거릴 줄 알았는데 갈수록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 또래하고 친구하며 지내는 건 나로선 손해겠죠?"
(하기는, 이 나라가 어른이고 아이고 격을 두지 않고 친구하는 관습이 있긴 하지.)
이럴 경우 무서운 인상보다 웃는 인상이 한층 위협적이다.
하지만 내 쪽에선  되도록   무서워 하기보다는 여유만만만이 더욱 투명한 보호벽이 될 것도  같다는 느낌이다.
그와 나는 마치 누가 더 연기(演技)를 잘 할 수 있는지 시합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어? 벌써 다 왔네요. 레미스를 타려고 했거든요. 차우!"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그가 모르게  경계(警戒)하는 일도 전혀 소홀하지 않게 된다.
오래 묵은 지기(知己)와 만났었고, 또한 오래 익힌 친구와 헤어지는 것과 같이 그리도 태연자약 무대를 내려서 듯 산책로를 벗어나게 된다.
뒤늦게 그의 인사를 받는다.
"차우차우! "
천천히 길을 건너 이윽고 레미세리아에 다가간다.
겨울이고 새벽이라 문이 닫혀 있다.
밤당번 기사들을 관리하는 현지인 다미안이 놀라며 반가워 한다.
"마르가리따, 자동차 필요해요? 전화를 하지 그랬어요?"
"아뇨, 어떤 호벤(청년)이  이름을 물어 보며 수상하게 굴어서요. 가게의 위치를 알려 주는 일이 될까봐 일부러 여기로 들어온 거예요."
다미안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더니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갔다는 설명이다.
두 명의 현지인 기사들 중 한 명에게 나를 가게까지 데려다 주라는 지시를 다미안은 잊지 않고 해낸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될 젊은 기사가 나를 데려다 주려고 미리 문밖으로 나서고 있다.
기사는 기사(騎士)다.
나는 다미안에게 정중히 사양한다.
나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해 왔을 다미안은 새롭게 지시한다.
"그럼 이쪽 길에 서서 마르가리따가 꽃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도록..."
나는 시적시적 걸어 반 블록 떨어져 있는 우리 가게에 도착했고 일단 쇠고리로 연결된 두 개의 자물통과 문에 달린 잠금통까지 열고 나서 건너 편 모퉁이에 서 있는 2미터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손을 높이 흔들어 준다.
2미터도 손을 크게 흔들어 답하고 있다.

오늘부터 출근시간을 한층 늦추리라는  작정을 굳힌다.
무섭거나 두렵기에 앞서 나는 좀더 흘러야 하겠고 더욱 흐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위험에서 내가 나를 보호하는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이라고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알게 모르게 감지해 왔던 빛에게도 해방을 안기고 싶어진다.

동행(同行)...
내가 살아 오면서 뜻하지 않았던 동행이 참 상상 외로 많았을 것이다.
어제처럼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받아 넘겨 왔을 테지만 말이다.
내가 어제 그 시간에 무언가를 생각했었다면...
그건 바로 청년이 설마 나쁜 짓은 안하겠지였다.
가게 안은 곤충의 날개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 속에 있었다.
나는 우선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았었다.
생각보다 얼굴이 창백하진 않았다.
범죄자들이 던지려는 삭막함의 그물을,  우리가 아니라 나 스스로 방어하며 살아야 하는 시절이 도래(到來)해 있다.
나는 아르헨티나를 적시기 시작한 소나기와 같은 치안부재(治安不在)의 한 축(軸)을 함초롬이 맞을 뻔 하였다.

대체 이 나라가 점점 왜 이 모양이 돼 가는가?
길에 종이들이 흩날릴지라도 정겹기만 하던 그 아르헨티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2012년 7월 10일 화요일

그 사람



-공광규-
                                        


흰 그릇에 담아도

검은 그릇에 담아도 그대로인

바가지로 뜨면 바가지 가득

항아리로 뜨면 항아리 가득한

작은 도랑에서도 좁음을 탓하지 않고

맑은 노래를 부르는

탁한 강물로 흘러들어도

불평 없이 세상의 복판을 뚫고 가는

그러다 세상이 마음에 안 들거나 화가 나면

온 들판을 엎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내는

어떨 땐 내 마음의 물길로 흘러와

찰랑찰랑 나와 한몸이 되는

마음처럼 고여 있고 감정처럼 움직이는

그러다 흘러넘쳐 나를 적시고

마침내 세상을 적시는

가끔 강하고 딱딱한 것들과 만나면

부딪치고 다투어 허물어버리지만

마음이 허공 같아

달도 산도 꽃도 마침내 하늘도 담는

그러다 햇빛을 담을 때

내 마음 가득 눈부신.



2012년 7월 9일 월요일

노아의 방주(方舟)





              맹하린


본국 꽃동네에서 사목을 담당하고 계신 신상현원장수사님을 위시한 수도자들과 봉사자들
열 두 분이 아르헨티나 당국의 초청으로 오신 길에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행복잔치'를 여섯 시간 정도 마련하셨다.
7월 8일 일요일 오후 내내 일정이 잡힌 것.
범교민적으로 홍보를 했었기 때문에 자리를 못 잡을 수도 있겠다고 염려한 나머지 나는 12시 30분쯤 앞당겨  성당에 도착했다.
광장 쪽의 벽에는 깍두기를 곁들인 소머리국밥이 20페소(4달러 상당)라는 광고문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식당 안은 주문하고 먹고 그러는 일에 열심인 신자들로 질서정연함과  북새통이 한통속처럼 들끓고 있었다.
가게에서 미리 점심을 들고 간 나는 곧장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이 미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가운데 쯤 자리를 잡았다.
끝나면 곧장 내가 선호 하는 앞에서 세 번째 자리로 옮길 생각이었다.
토요일에 있는 청소년 미사는 어쩌다 참례를 했었지만, 어린이 미사는 난생 처음이어선지 흥미 그 자체였다.
어린이들의 크고 작은 키와 옷차림의 자유 만발과 표정이나 앉고 선 자세가 얼마나 역동적(力動的)이면서  활기에 찬 물결 되어 출렁이던지…….
그리고 강론 대신 주일 학교 교사인 두 사람의 청년이 각각 마이크를 잡고 제대 밑을 종횡무진 오가며 어린이들을 온통 사로 잡고 있었다.
그렇게 연극을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서반아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질문하면 너도 나도 손을 들어 기발한 발언을 진솔하게 해내던,  흡사 어린이 법정과도 같던 무대란  참으로 새틋했고 보기에 흐뭇했다.

평화의 인사 시간에는 여기저기 무작위로 몰려들어 동그랗거나 길게 서서 각각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성가를 부르고 불렀다.
전혀 구속이라고는  없고  활기로움만  가득해서 퍽으나  풋풋하던 순간이었다.

더군다나 어른들로 치면 영성체를 받을 시간이 되자, 아직은 자격미달로 보이는 어린이들이 줄서서 앞으로앞으로  나가고 있었으므로 나름 찰나적으로 꽤 의아해 하며 고개까지 갸웃 했었다.
그런데 어린이 미사를 집전하는 전보근(안드레스) 보좌신부님께선 아이들을 하나하나 포옹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믿음의 마음을 씨 뿌리듯 심어주려는…….
아름답다기 보다 빛나는 것도 같았고 비 온 뒤 떠오른 무지개를 아득히 올려다 보는 감격과도 흡사했다. 
키가 작은 세 살이나 너 댓 살의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몸을 숙여 정겹게 안아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내가 새롭게 도달한 별 나라와 다름 아니었다.

예전에 현지인 성당에서…….
내 앞에 서서 영성체를 기다리던  현지인 남자의 품에 안겼던.  아직은 영성체를 영할 나이가 한참이나 미달된 어린이가 입을 새 새끼처럼 벌리자 잠시 찰나처럼 상념에 잠기던 현지인 사제가 축성 되지 않은 밀 떡을 다시 가져와 그 아이의 입에 넣어 주던 광경 이라거나,  미사 시간에 제단 위의 계단에 엎뎌서 놀던 현지인 어린이 라거나 , 정신이 약간 이상한 여인이 현지인 신부의 강론 시간에 바로 2미터 앞에서 신자들을 향해 연신 제스처를 보이던 잔상(殘像)들…….
(그 여인은 아마 수화(手話)를 할 줄 알던 여인 이라기 보다는 스튜어디스 출신이지 싶었다,)
그러 저러한 편린(片鱗) 들 까지  자꾸만 오버랩 되며 아웃 포커스로 내 시야를 흐릿하도록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현지인 성당은 특히 신자들 대부분의 돌출 행동에 전혀 간섭하거나 제재를 가하지 않아서 그런 일들을 발견할 때마다 껴안게 되는 잔잔한 감동을 한동안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최근 들어 아는 사람들 모두를 만나는 순간마다 포옹해 주고 포옹하려는 게 새로 생긴 지향(指向)으로 굳혀졌고 습관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이유로 어린이 미사의 그러저러한 장면들이 더욱 마음에 각인되듯 새겨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꽃동네 수도자 들과 봉사자 들의 '행복 나누기' 시간에는 옆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노아의 방주(方舟) 라는 율동을 함께 해내는 순서가 있었다.
각자의 옆에 앉은 사람과 오른 손이 오른손을 , 그리고 왼손이 왼손을 엇갈리게 잡고  같은 손이 되어 방주(方舟)가 되어줄 나무를 톱 질 하고 망치 질도 하며 간지럼까지 태워보는 무용을 노래에 맞춰 표출했었다.

휴식 시간이 되자 나는 살짝 빠져나와 가게로 돌아 왔다.
만약을 위해서 그러겠노라는 언질(言質)을 남기고 나섰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약도 없이 닥친 약혼식 꽃등 주문이 여럿이나 밀려 있었다.
내가 부재(不在)중이면 주문이 밀리는 현상(現狀)은 하루 이틀 이루어져 온 일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더욱 자리에 없어야 할 때를 만들어야 할 것도 같다.
약혼식 꽃은,  중앙에 놓일 사방화를 내 판단에 의해 하나 더 만들어 냈다.
사방화가 안 보이는 약혼식은 어딘지 모르게 썰렁할 듯 여겨져서다.
물론 넉넉하게 책정해 놓고 간  값이어서 더욱 그러고 싶었고…….
그 고객들은 사방화로 할까 바구니로 할까를 한참이나 망설였다는 얘기 때문에 더 그랬었다.
6시 30분쯤 찾으러 온 젊은 커플이 너무나 고맙다고 예쁘다고 환호 할 때, 나는 사방화를 차안에 실어주는 센스 또한 잊지 않았다.
어떤 고객들은 그럴 때 지나친 과민 반응을 나타낸다.
(아이고, 참.)
본인들이 더 어리고 젊다는 얘기다.
나는 단지 짧게나마 꽃을 제대로 보호하려는 심리 상태인 것을…….

어제의 '행복 나누기' 시간은 주위 사람 20여명을 포옹 하라던 순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포옹하면서 보았다.
누구나의 눈 가득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의 눈은 강이 범람하고 있음을...... .
특히 어린이 미사에서 어린이들마다 껴안아 주던 보좌 신부님의 자애로운 모습 역시 오래토록 기억에서 지우지 못할  것 같다.
사는 일 팍팍할 양이면 일부러 틈 내어 어린이 미사에 참례할 작정 같은 걸 굳히게 된다.

우리 인류는 너무 뜬금없는 지역에까지 어느 듯 흘러 와 있다.
우리 서로가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너도 나도 솔선수범해야 할 시절(時節)이다.
현대(現代)는…….

사랑은 정드는 것이라고들 한다.
사랑을 잃을 수는 있겠지만 정(情)은 못 잊는다는 인식(認識)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싸울 수 있는 것도 은총이지 싶다.
안보이게 마주 잡은 손으로 우리 모두 안 보이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만들어 나갔으면 하고  뒤늦게 바라게 된다.
어찌 됐건 인생은 오늘도 새로 시작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이제 세상을 떠 먹기만 해서는 안 될 시간이다.



2012년 7월 7일 토요일

아사도(Asado=숯불 갈비)



          맹하린


1991년


이민 온지 두 달이 가까운 어느 토요일.
C중령(공군중령 출신이라고 모두들 그렇게 호칭했다.)댁에서 저녁초대를 해왔다.
그댁을 방문한 우리 가족은 많은 한국교민들도 반가웠지만, 식탁에 놓여진 금방 버무려 내놓은 듯한 겉절이가 더욱 반갑게 여겨졌다.
(지금은 무나 배추가 사시사철 흔하지만 이민 초창기에는 고작 양배추나 홍당무로만 김치를 담아야 했다.)
배추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쉽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식사가 시작될 때 보니까, 밥은 기본이었지만 반찬이라고는 날김치와 야채사라다가 전부였다.
곧 이어 두툼하고 기다란 고깃살의 중간중간에 손가락 길이의 직사각형 뼈들이 울타리처럼 뺑 둘러 있는 아사도라고 불린다는 숯불갈비가 나오긴 했지만...... .
그렇게 기다란 장난감 기차 모양의 갈비를 작으만치 50Kg이나 구웠다고 했다.
넉넉하게 준비했으니까 많이들 드시라는 C중령내외의 인사말에 우리처럼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환호에 가까운 탄성을 너도 나도 터뜨렸다.
숯불에 구웠다고는 하지만 굵기가 어른의 팔뚝만큼 두툼한 데다 시간을 넉넉히 두지 않고 익힌 탓인지 겉은 꺼멓게 탔는데 속은 설익어 있어 그야말로 불에 그을린 냄새까지 골고루 스며 있었다.
더 잘 익은 줄갈비로 바꾸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까 정원에 차려진 식탁 주위는 매우 산만하고 소란스럽기까지 하였다.
줄갈비.
그랬다. 팔뚝처럼 길었고 줄토막이었으니까 그렇게 불릴만도 하지 싶었다.
이민 온지 몇 달이 안 됐다는 사람들이 주로 많아서 모두들 별식을 만난 듯 열심한 모습으로 식사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워낙 채식을 즐기기도 하지만 낯설고 정성이 담기지 않은 음식이라는 느낌을 못버려 도통 서먹서먹할 뿐 아니라 말 그대로 낯설고 물설어 엉거주춤한 기분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생김치와 야채사라다 맛이 매우 그럴 듯해서 그런대로 저녁 한끼를 거뜬하게 해결한 셈이긴 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조화(造化)속인 것일까.
그렇게 질색하며 우습게 생각되던 아사도 맛이 가끔은 그립게 생각되는 기분이라니.
하물며 현지인들은 주말만 닥치면 곳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숯불을 피워대는 것이었는데 숯을 피우는 연기가 퍼진 얼마 후에는 갈비 익는 냄새가 여기저기 진동하고는 했다.
희한하게도 C중령 댁에서 그렇게도 경원(敬遠)시 했으며 윈시인들이나 즐기는 야만스러운 음식으로 치부했던 아사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후각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 숯불냄새만 맡아도 반사적으로  미각(味覺)전체를 흔들어 놓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내게 변명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아사도 맛은 어떤 건지 직접 겪어 봐야 해.)

시장에 나가 아사도 판을 가장 작은 것으로 구입하고 5Kg들이 숯도 두 봉지 사고 푸줏간에 가서 갈비도 서너 줄 샀다.
갈비의 길이가 7센티 간격으로 기다란 토막이 이어지는 줄갈비가 되도록, 푸줏간에서는 전기톱에 알맞게 잘라 주었다.
값은 좀 비쌌지만 뼈가 동그라면 송아지갈비라고 해서 일부러 뼈가 둥근 송아지 갈비로 달라고 주문을 했었다.
줄갈비 네 줄이 5Kg이 조금 못되었는데 한국과 비교하면 무진장 저렴한 가격이었다.
5Kg에 3달러도 못 됐으므로.
그런 이유로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손이 많이 가는 나물이나 밑반찬보다는 고기 반찬을 준비하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손쉽고 저렴한 가격의 음식으로 손꼽히게 되는 모양이었다.

숯불의 화력이 왕성할 때에 갈비를 얹으면 겉쪽은 태우고 안쪽은 설익는 불균형을 가져오기 때문에 불의 왕성한 기운이 적당히 가라앉을 무렵에야 비로소 아사도 판의 널따란 석쇠에 갈비의 살 부분이 불쪽에 닿도록 얹는데, 천일염이 아니고 소금산에서 생산되는 왕소금을 살코기 쪽에 술술 부려주거나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서 굽기 전에 미리 뿌려두는 경우도 있다.
그 다음에 레몬을 반으로 잘라 갈비위에 레몬의 생즙을 적당하게 뿌려 주면 고기의 맛을 상큼하게 해줄 뿐아니라 고기의 결을 찰지게 익히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이윽고 아사도 판에 얹힌 갈비위에 깨끗한 신문지를 몇장 쯤 포개어 올려 놓는데,  신기하게도 종이나 신문은 타지도 않고 화기(火氣)의 분산(分散)을 막아 주면서 고기를 부드럽다 못해 감칠 맛 있게 구워내는 효과까지 가져다 주는 것이다.
거친 불결도 이미 가라 앉은 데다가 아사도 판 자체가 높낮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반 자동의 편리함을 갖추고 있어서 구태여 뒤집을 필요 없이 그런 식으로 한 두시간 정도의 끈기를 갖고 기다리면 골고루 잘 익혀진 기막힌 맛의 불갈비를 맛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아사도를 굽는 일은 어떤 면으로는 끈기와의 한 판 대결이 아닐 수 없다.
여유와 침착과 은근함을 내포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국민성과 결코 다름이 없는...... .
옵티미즘(Optimism=낙천주의)에 젖어 살기를 생의 첫 번 째 목적으로 삼아내는 남미인들의 정서적 기질은  가장  현명하고 참을성 있게 불황이라는 불황마다 매우  잘 견뎌내는 실정이다.
불경기를 그러한 여유를 가지고 극복해 내는 반면(反面), 아르헨티노들은 잘난 척 있는 척을 못견뎌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한 들 "아사도 꼬챙이를 삼킨 사람처럼 몸이 뒤로 젖혀져 있다"고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나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늠름하고 대담무쌍한 야성적 기질을 전통처럼 갖추고 라플라타강 유역을 옮겨 다니며 방랑생활을 해내던 Gaucho(라플라타 유역에 살던 원주민).
그들 가우초들이 굵은 통나무에 불을 지펴 사냥으로 얻은 짐승을 불 옆에 세워 둔 장대에 걸쳐 놓고 오랜 시간 구어낸 데서 아사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우초시대에는 병균을 몰아내고 소독을 겸하는 방편과 원리가 맞물려 모든 조리과정이 불에 굽는 것으로 대체했다지만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굳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아사도를 선호(選好)하는 아르헨티노들과 한국교민들을 지켜보노라면 모든 인간들의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는 어떤 면으로는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생활을 그리워하고 가깝게 당기어 음미해 보려는 보상심리 같은 게 작용(作用)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까지 생각이 닿게 된다.
가우초들이 지펴내던 화톳불의 열기(熱氣)가 지금껏 아스랗게 그 맥락(脈絡)을 이어 온 것은 아닐까?
어디선가 숯불 피우는 냄새가 전해져 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불현듯 아사도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