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6일 금요일
불경기
맹하린
오늘 점심 식사는 치즈와 몇 가지 야채를 뒤섞은 국적불명의 전(煎)을 부쳐, 얇게 썰고 깔끔하게 양념한 아세이뚜나(올리브)장아찌와 시래깃국으로 떼웠다.
정오 뉴스를 보는데 공교롭게도 올리브 가공공장의 판매저하(販賣低下)와 경제활동의 심각성이 집중적으로 조명(照明)되고 있었다.
올해 83세인 돈(남자의 이름 앞에 붙이는 경칭) 호세 누세떼(링크 ~)는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고급 메이커로 알려져 있는 올리브가공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500여명의 직원에게 제때에 월급을 지급해 왔었고 또 다른 500여명이 이 공장과 연관되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18세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나온 호세 누세떼는 60여 년 동안 올리브 공장을 이끌어 왔지만 올해처럼 직원들의 봉급을 미뤘던 일이라고는 공장역사 이래 전무(全無)했었다고 극명(克明)한 예를 들며 그로 인해 울었노라는 사실까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려고 애쓰며 피력(披瀝) 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결정적 요인(要因)은 인플레시온이 주된 타격적 영향이 되었으며 브라질과의 수출이 보복의 대가에 의해 일시적으로 막혔었고, 미국으로의 수출비용 또한 달러상승의 압박으로 타산이 맞지 않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여 일어난 천재지변과 같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밝혔다.
미국 등 외국으로 1천 개의 컨테이너를 보내던 시절이 옛말이 되어버린 현재, 호세 누세떼의 공장은 정부의 보호후원자금이나 브라질과의 재수출로 인하여 약간의 물꼬가 트이는 형편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고도 한다.
크고 원활하게 움직이던 교민들의 생업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비록 예전과 같이 허심탄회하게 힘들다고 털어놓지는 않을지라도 묵묵부답 참고 인내하는 각양각색의 실정(實情)이 알게 모르게 저절로 파악되는 작금(昨今)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제특성이 10년에 한 번씩은 고질병(痼疾病)을 앓아 낸다는 걸 하루 이틀 알아온 게 아닌지라, 속히 이러한 경제난이 무난히 해결의 기운을 회복할 수 있기를 관심을 가지고 주시할 수밖에 이렇다 할 도리란 없는 것 같다.
우리 교민들 역시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소원(所願)하게 된다.
2012년 7월 4일 수요일
나를 당기소서
-천양희-
49세에 <늑대와 함 게 춤을>을 써서
작가가 된 마이클 블레이크와
보길도에 귀양갔다 65세에 <어부사시사>를 쓴 고산윤선도
와
일생 동안 한번도 여자를 못 보고 82세에 죽은 수도승 미하
일 톨로토스와
죽을 때, 가슴을 가시에 찔리면서
일생에 단 한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원시림의 높은 가지 위만 날면서
지상에는 내려오지 않는 모르포나비와
아침 이슬만 먹고 사는 부전나비와
백마강 고란사에서만 사는 고란초와
평지에선 살지 않고
바위 에서만 사는 기린초와
진실로 우리는 그림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동생 태오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고호와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아웃사이더>를 쓴 콜린 윌슨과
눈이 두 개 귀도 두 개인데
입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두 개를 보고 두 개를 듣고
말은 하나만 하라는 것이며
하나를 말하기 위해선
둘을 보고 둘을 들어야 한다는 간디와
어머니와 정의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어머니를 선택할 것이라던 까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네
신이여, 부러지도록 나를 당기소서
다시 부러지도록 힘껏 당기소서
2012년 7월 3일 화요일
과연 수고했는가?
맹하린
내 고객 중의 가장 연장자는 내가 목단꽃 어머니라고 불러 드리는 한국 어르신이다.
92세.
어제 아침나절에 내가 잘 아는 레미세로(대절용승용차기사)뚜르꼬(Turco=터키人)가 그분을 모시고 나타났다. 우리 가게에 오시기 위해 일부러 뚜르꼬를 부르셨다고 했다.
뚜르꼬는 별명이고 그는 카를로스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 모두들 그렇게 부르고 있다.
목단꽃 어머니는 내 또 다른 고객이 되는 A여인의 어머니시다.
꽃을 무척 좋아하시지만 특히 목단꽃을 가장 좋아하셔서 그런 별명을 받게 되셨다고 한다.
1년에 세 번쯤 오신다.
어제는 며느님의 생일이라 꽃바구니를 맞추러 오셨는데 꽃이 다 완성될 때까지 계속 그분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귀가 많이 어두워지셔서 커다랗게 소리를 높여야만 겨우 알아 들으셨다.
오실 때마다 하도 말씀을 편안하게 하셔서 사정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분의 귀가 점차적으로 어스레해지다가 어둠의 골목길처럼 아주 캄캄해지는 중이라는 설명을 듣게 되자 나는 더욱 크게 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일요일마다 J교회에 다니시는데 어느 장로님이 당신의 어머니를 염두(念頭)에 둔 봉사와 기도의 힘으로 엘리베이터를 기증하여, 비록 지팡이를 의지하는 걸음이어도 2층에 있는 교회당에 드나들기가 한결 수월해지셨다는 감격이 잇따랐다.
기억력이 자꾸만 없어지는 중이라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집주소와 따님의 전화번호 등을 달달 외우고 계셨다.
웬만한 반찬과 팥죽이나 식혜 같은 간식 등은 아직도 손수 장만하신다고 하셨다.
특히 목단꽃 같은 곱다란 미모는 평생, 그리고 항상 유지해 오신 분으로 보이신다.
우리 가게에서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는, 따님을 본지도 꽤 오래됐다고 한탄처럼 말씀하셔서 나는 서두름을 감춘 여유로움으로 천천히 전화를 연결해 드렸다.
내가 중재 역할을 해야 했다.
한국말 통역이었다. 그렇게 소리 지르며 얘기한 적이 평소의 내게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A여인은 어머니를 뵌 지가 몇 달이나 흘렀으므로 당장 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현지인 가정부만 있어서 믿고 맡기고 그럴 수가 없는 사정이라고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을 고통처럼 토로(吐露)하고 있었다.
가족은 내가 특별히고객 접대를 해야 할 경우, 알아서 꽃을 꽂아 낸다.
나보다 더 꼼꼼하고 나보다 더 풍성하게 만드는 편이다.
나는 일단 빠르고 적절하게 꽂는 스타일이다.
급한 고객일 경우 둘이 함께 꽂아서 고객들이 빠르다고 감탄할 때도 있다.
꽃바구니가 완성되자, 나는 레미세리아에 전화를 했다.
웬만한 레미세로들은 다 알거라는 말씀이셨으므로 뚜르꼬가 없으면 다른 기사라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금방 오스칼이 왔다.
오스칼은 건축기사인데 불경기의 여파로 직장을 그만 두고 레미스 기사로 새롭게 일을 시작한 나이 지긋한 사람이다.
한인타운에 있는 레미세로들은 우선 내게 친절하다.
팁을 주는 한국인은 나밖에 없다고 퍽도 고마워들 한다.
꽃을 먼저 오스칼의 자동차에 싣고 지팡이를 짚으신 목단꽃 어머니를 조심조심 부축하여 뒷자리에 편히 앉으시도록 나는 일종의 사명감 비슷한 감정을 지닌 채 신중에 신중을 다했다.
자동차의 뒷문을 살며시 닫을 때 목단꽃 어머니는 전혀 상상치 못했던 뜻밖의 인사를 내게 남기고 떠나셨다.
나는 날개를 푸드덕 대는 새처럼 순간적으로 놀라 파닥였다.
1년에 세 번 정도만 뵈었고, 한 번도 내 이름을 알려 드린 일도 없었는데 그분이 남기고 떠난 참으로 아프던 말…….
"맹여사, 수고했어요! "
자동차가 떠나고 발길을 돌리는데 실제로 고국에 살아 계시고 연세 역시 92세이신 엄마를 떠나 보낸 심정이 되고 말았다.
찰나적으로 눈물을 소나기처럼 후두두둑 떨어뜨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야 했다.
홀연 A여인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목단꽃 어머니의 기억력에 대한 얘기를 한참이나 주고받았다.
수고 했다는 말이 그렇게나 아린 말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일주일 전.
친구 수산나가 단감을 한 상자 사왔다.
그녀는 얼마나 나약하게 생겼는지 50Kg도 못되는 체중의 소유자다.
그래서 나는 몸도 약하면서 어찌 무거운 걸 사들고 다니느냐고 걱정을 얹으며 상자를 들고 있는 그녀보다 내가 더 무거워 하며 지탄처럼 말했었다.
그런데 수산나가 대답을 참 가볍게 해냈다.
"자매님한테 선물할 거라고 생각하니 하나도 안 무거웠어요."
그 말이 내 마음을 한결 거뜬하게 했으며 금세 기분까지 안 무겁게 했다.
그런데 어제는 수고했다는 말이 나를 참으로 수고롭게 한 날이었다.
사실 나는 현실에 그다지 불만이라고는 없는 매우 단순한 사람이다.
눈물을 글썽이지 않으려고 거울을 보는 내 표정은 세상과 운명을 향해
가차 없이 질타를 퍼부었다.
(나여! 과연 수고했는가?)
어제 저녁 나는 꼼짝없이 원탁을 마주하고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바람과 파도에 자꾸만 휩싸이고 있었다.
목단꽃 어머니가 목단꽃 어머니가 아니라 나의 엄마였고, 현인(賢人)으로만 부각되어 보였던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 본 사람처럼 남아 있는 생애 가득 조바심도 번민도 멀리하면서 그저 흐름대로 흐르며 오로지 쓰는 일에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2012년 7월 1일 일요일
좋은 생각 중에서
-펌-
누가 가장 훌륭한 의사인가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는 중국 선진 시대의 유명한 의사이다.
그의 두 형도 모두 의사였는데 삼형제 중 유독 막내인 편작만이 명의로 이름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위나라의 임금이 편작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대 삼형제 가운데 누가 의술이 가장 뛰어난가?"
"큰 형님의 의술이 가장 훌륭하고 저의 의술이 가장 비천합니다."
당연히 명의로 이름난 자신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을 들은 임금은 그 이유가 궁금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편작 너의 이름이 백성들 사이에 더 알려져 있느냐?"
"사람들은 병이 깊은 환자들에게 약을 먹이고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저의 행동을 보고 제가 자신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명의로 소문난 이유입니다."
임금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형들은 왜 명의로 소문나지 않는 거냐?"
"둘째형은 환자의 병세가 미미한 상태에서 병을 알고 치료해 주기 때문에 이런 환자는 둘째형이 자신의 큰 병을 낫게 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 형님은 상대방의 얼굴빛을 보고 그에게 장차 병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병의 원인을 미리 없애 주지요. 그러니까 아파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받기 때문에 그들은 큰 형님이 자신의 고통을 없애 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제야 임금은 훌륭한 사람이 모두 유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편작의 형들처럼 남들이 알아주는데 연연해하지 않고 묵묵히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그것을 통해 행복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동행의 기쁨이 있습니다. 동행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동행에 감사하면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갑시다.
우리의 위험한 날들도 서로 손잡고 건너갑시다.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 집니다.
두 눈을 가린 선생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성했다.
학생들은 어떤 교사를 해임시키라고 주장했는데 그 교사는 학생 한 명을 심하게 때려 미움을 받은 것이다.
학교측에선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며 수업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했고 수 십 명의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교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흥분한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선생님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주임교사인 김 선생님은 교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네 이놈들!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와 난동이냐! 어찌 교무실까지 함부로 들어와 행패냐! 어서 썩 나가거라!"
청천벽력 같은 김 선생님의 말에 잠시 움찔한 학생들은 갑자기 김 선생님에게 와락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김 선생님은 얼른 두 손으로 자기의 눈을 가렸다.
학생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는지 김 선생님을 마구 구타했다.
어깨를 흔들어대는 학생들의 손짓에도 김 선생님은 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 뒤 학교는 평온을 되찾았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불경한 죄 때문에 고민했다.
고민 끝에 김 선생님을 구타한 학생들은 교무실로 김 선생님을 찾아가 사죄했다.
"선생님,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됐다, 됐어. 스스로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이 세상엔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김 선생님은 도리어 학생들을 칭찬하는 듯한 말로 아이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그 때 왜 그렇게 한사코 눈을 가리고 계셨습니까?"
"아, 그 때. 나는 수양이 좀 부족한 사람이야. 만일 때리는 너희들의 얼굴을 본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될까봐. 너희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린 게지."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때가 끼기 전에
스페인의 마드리드 시의 어느 작은 백화점 양복 코너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매우 성실하게 일했으며 손님들에게도 친절했다.
어느 날, 양복을 고르던 한 중년 신사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포장해 달라고 했다.
청년은 손님이 고른 양복을 조심스럽게 접어 정성껏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하던 청년은 그 양복에 작은 흠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년은 손님을 속일 수가 없어 옷에 흠이 있으니 다른 것으로 고르라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손님이 사고 싶어 하는 색상은 그 옷 한 벌뿐이었다.
손님은 다음에 들러 사겠다며 그냥 돌아갔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주인이 몹시 화를 내며 청년을 야단쳤다.
"가만히 있었으면 옷을 팔 수 있었는데 …. 너 때문에 손해를 입었잖아. 내일부터는 우리 가게에 나올 필요 없다."
갑자기 해고를 당한 청년을 몹시 상심했다. 아버지의 실망하는 모습이 떠올라 걱정스럽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아버지께 사실을 말씀드렸다.
아들이 직장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러자 사연을 끝까지 들은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그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 가게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곳에 제 자식을 더 둘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이 아이 마음에 때가 끼기 전에 빨리 데려갈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부족함과 행복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던 그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결핍에 있기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도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재산이든 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늘 없는 것,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분들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세상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그대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이면 참 좋겠습니다.
숨기고 덮어야 하는 부끄러움 하나 없는 그런 맑은 세상 사람과 사람사이 닫힌 문 없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마음의 문을 달더라도 넝쿨 장미 송이들이 휘돌아 올라가는 꽃 문을 만들어서 누구나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귀한 사랑 받고 살아야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고 도란거리며 사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가졌다고 교만하지 말고 못 가졌다고 주눅 들지 않는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열면 하늘 열리고 내 마음 열면 그대 마음 닿아 함께 행복해지는 따스한 촛불 같은 사랑하고 싶습니다.
정해진 답은 없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과 교수와 학생이 실랑이를 벌였다.
기압계로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는 방법을 묻는 시험 문제에 학생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기압계에 줄을 매달아 아래로 늘어뜨려 그 길이를 재면 된다.”고 대답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교수의 출제 의도는 기압이 높이에 따라 달라지므로 기압차를 이용해 건물 높이를 계산해 보라는 것이었기에 답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중재를 맡은 다른 교수가 학생에게 6분의 시간을 다시 줄 테니 물리학 지식을 이용한 답을 써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기압계를 아래로 떨어뜨려 낙하시간을 잰 뒤 ‘건물 높이 =1/2(중력가속도 X 낙하시간의 제곱)’의 공식에 따라 높이를 구하는 답안을 작성했다.
교수는 이 답안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학생은 “옥상에서 바닥까지 닿는 긴 줄에 기압계를 매달아 시계추처럼 움직이게 한 뒤 그 진동의 주기를 측정하면 건물 높이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 외에도 다섯 가지 답을 제시해 교수를 놀라게 했다.
그 학생은 바로 1922년 새로운 원자 모델을 만들어 양자역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이다.
획일화된 답을 거부했던 그가 당시 생각해 낸 답 중에서 스스로 가장 만족한 것은 “기압계를 건물 관리인에게 선물로 주고 설계도를 얻는다.”였다. 훗날 그가 과학계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이와 같은 창의적인 사고의 산물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으로
요한과 베티는 큰 농장을 일구기 위해 외딴 산속에 집을 짓고 열심히 일하는 부부였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남편 요한은 한 달에 한 두 번씩 일용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다.
어느 날 요한은 이번엔 밀린 일이 많기 때문에 며칠 더 걸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마을로 내려갔다. 갓난아이와 어린 딸과 함께 집에 남은 아내 베티 역시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농사일을 하느라 미뤄두었던 집안일은 산더미였다.
베티는 우선 빵을 구울 장작을 패기로 했다.
그녀가 뒤뜰로 가 나무를 도끼로 내려찍으려는 순간 다리에 따끔하고 쓰린 통증이 느껴졌다. 나무 속에 숨어있던 독사에 물린 것이었다.
베티는 순간 아찔했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 도와 줄 사람이라곤 남편뿐이 없는데 남편도 이삼 일이 지나야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가 죽고 나면 아이들은 어쩌지. 양식도 다 떨어졌는데..."
베티는 독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뙤약볕 아래서 장작을 팼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빵을 구웠다.
눈앞이 흐려지고 점점 고통이 엄습해 왔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더 바삐 몸을 움직였다.
베티는 어린 딸에게 일렀다.
"엄마는 조금 후에 깊은 잠에 빠질 거란다.
그러면 너는 아빠가 오실 때까지 엄마가 구워놓은 빵과 우유를 네 동생에게 잘 먹이고..."
베티의 이마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옷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놀랍게도 무서운 독이 땀과 함께 씻겨져 나왔다.
그녀는 두 아이를 위해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아픔을 느끼지 못했으나 독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베티는 그때까지도 그 사실을 모른 채 뜨거운 아궁이 옆에서 땀을 흘리며 빵을 굽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기록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사진을 찍는 부부가 있었다.
독일 베를린에 살던 안나 바그너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 주인공.
스물여섯 살의 안나와 스물일곱 살의 리하르트는 1900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마추어 사진가인 리하르트는 그해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로 보냈다. 이는 안나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42년까지 계속되었다.
얼핏 보면 사진 속 풍경은 모두 비슷하다.
크리스마스트리와 그 앞의 바그너 부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식된 식탁, 소박한 실내장식.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의 살림살이와 바그너 부부가 받은 선물 등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한 살씩 나이를 먹어 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신혼부부이던 두 사람은 어느새 중년이 되고,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늘어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바그너 부부는 1차대전 초기에 독일군의 진격 상황을 기록한 지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두꺼운 외투를 입고 찍은 사진 밑에 “석탄이 부족해서.”라는 글을 남겼다.
이 사진들은 반세기가 흐른 뒤 한 집의 다락방에서 발견되었고, 책으로 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바그너 부부가 40년 넘게 사진을 찍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의 기록.
세월 따라 변해 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남겨 두고 싶어서였을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늘 함께하자는 약속이었을까.
감동적인 우정 이야기
미국 인디아나주의 작은 마을에 사는 브라이언이라는 15세의 소년이 뇌종양으로 방사선 치료와 약물 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그는 놀림감이 될까 봐 학교에 나가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반의 급우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 방법이 어른들은 생각도 못한 것으로 반 학생 모두가 삭발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진 친구가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입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누구나 위와 같은 따뜻한 부분(마음)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서로 위해주고 도와주며. 눈높이를 함께 하는 생활을 한다면, 삶이 한층 보람 있고 즐거울 것입니다.
작은 기쁨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를 갈아타면서 남편의 심부름에 바쁘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책 읽는 사람, 잠자는 사람, 장사꾼 아저씨, 여학생들의 재잘거림 ….
그날은 따뜻한 봄날이었다.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중1쯤 되었을까? 저만치서 좀 작아 보이는 소년이 걸어왔다.
단정한 교복차림이었지만 부자유스러운 손놀림과 걸음걸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할말이 있는 듯했는데 소년을 말도 잘 못하는지 자꾸 교복 윗도리 주머니에 손을 넣는 시늉만 해댔다. 하지만 아무도 소년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두 걸음씩 피하기만 했다.
나는 소년이 버스요금을 구걸하는 줄 알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에서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년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년이 힘들게 손짓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여 보았다.
"아! 이거였구나."
버스승차권이 손에 잡혔다. 이것을 꺼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그렇게 눈짓, 손짓을 한 거로구나.
아침에 소년의 어머니가 주머니에 승차권을 넣어 주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신신당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의 손에 승차권을 쥐어 주자 소년은 말 대신 고맙다는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이 일로 그날 하루 종일 가슴이 뿌듯했다. 소년의 마음을 눈치챈 것이 마냥 기뻤다.
만약 소년에게 돈을 주었다면 이만큼 기뻤을까?
장애인이 가까이 오면 구걸이나 동정을 바라는 것이라고 여겨 왔는데, 진정한 도움이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살피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루였다.
마지막 기회
며칠 전부터 오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로 칠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엄마. 그런 엄마와 싸우는 오빠에게 대들다가 나는 뺨을 맞아 오른쪽 청각을 잃었다. 결국 나는 오빠에게 등을 돌렸고 남편 따라 미국에 온 뒤로는 남이 됐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오빠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가는 동안에도 별 생각이 다 스쳤다.
이내 힘없는 오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서 오빠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어색한 대화가 오간 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오빠가 말했다.
“지금까지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부디 용서해다오.” 순간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나도 잘한 것 없어요. 오빠... 목소리가 안 좋은데 건강 잘 챙기세요.”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허탈했다. 40여 년 만에 듣는 오빠의 사과가 내 마음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었다.
전화한 것을 후회하는 한편 약해진 오빠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며칠 뒤 올케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고마워요. 고모한테 전화 받은 다음 날 오빠 편안하게 가셨어요. 위암으로 고생하셨거든요. 오빠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늘 고모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대화가 지상에서 오빠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니,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얼마든지 한쪽 귀로도 오빠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후회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미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나는 울며 말했다.
“오빠 정말 미안해. 나도 용서해 줘.”
병 속의 편지
1999년 3월에 영국의 템즈강 어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맥주병 하나가 걸려 나왔다.
어부가 병의 뚜껑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빛바랜 종이 두 장이 나왔다.
‘이 병 속의 편지를 발견하시는 분께, 부디 이 편지를 제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전해 주시고 전쟁터로 나가는 이 병사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이어서 다음 장에는 아내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군함 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소. 당신에게 이 편지가 전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병 속에 담아 바다에 띄우오. 만약 이 편지가 당신 품으로 가거든 받은 날짜와 시간을 써서 소중히 간직하며 기다려 주오. 사랑하는 이여, 그만 안녕.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1914년 9월 ×일’
어부는 편지 아래에 쓰인 날짜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려 85년 전에 씌어진 편지였던 것이다.
어부는 영국 정부에 그 편지를 맡기며 주인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편지를 쓴 영국군 토머스 휴즈는 1914년 프랑스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너는 군함 위에서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쓰고 맥주병에 담아 고향 쪽 바다로 던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12일 뒤 첫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전사 통지서를 받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고향을 떠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두 살짜리 딸 크라우허스트와 함께….
영국 정부는 수소문 끝에 엘리자베스가 1979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 딸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남편의 애틋한 사람을 담은 병 속의 편지는 아내가 아닌 딸에게 배달되었다.
편지 사본은 ‘세기의 러브레터’ 수집으로 유명한 웰링턴 알렉산더 턴벌 도서관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뜬 눈 도로 감기
서 화담(徐花潭, 화담은 徐敬德의 호) 선생이 길가에서 우는 사람을 보고 이유를 물었다.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찾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갔다.
-뜬 눈 도로 감기- 연암 박지원의 산문 중 -
-초여름-
4월 9일에 중복된 게시글을 올렸었다는 걸 오늘 확인하고 삭제 했습니다.
죄송~~~
이해의 선물
폴 빌라드
유영(柳玲) 옮김
내가 위그든 씨의 사탕 가게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마 네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많은 싸구려 사탕들이 풍기던 향기로운 냄새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내 머릿속에 생생히 되살아난다.
가게 문에 달린 조그만 방울이 울릴 때마다 위그든 씨는 언제나 조용히 나타나서, 진열대 뒤에 와 섰다.
그는 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머리는 구름처럼 희고 고운 백발로 덮여 있었다.
나에게는, 그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맛있는 물건들이 한꺼번에 펼쳐진 적은 없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른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어느 한 가지를 머릿속으로 충분히 맛보지 않고는 다음 것을 고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내가 고른 사탕이 하얀 종이 봉지에 담겨질 때에는 언제나 잠시 괴로운 아쉬움이 뒤따랐다.
다른 것이 더 맛있지 않을까? 더 오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위그든 씨는 골라 놓은 사탕을 봉지에 넣은 다음, 잠시 기다리는 버릇이 있었다.
한 마디도 말은 없었다. 그러나 하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서 있는 그 자세에서, 다른 사탕과 바꿔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계산대 위에 사탕 값을 올려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탕 봉지는 비틀려 돌이킬 수 없이 봉해지고, 잠깐 동안 주저하던 시간은 끝이 나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전찻길에서 두 구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차를 타러 나갈 때에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그 가게 앞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무슨 볼일이 있어 시내까지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가, 전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위그든 씨의 가게에 들르신 일이 있었다.
"뭐, 좀 맛있는 게 있나 보자."
어머니는 기다란 유리 진열장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 때, 커튼 뒤에서 노인이 나타났다. 어머니가 노인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동안, 나는 눈앞에 진열된 사탕들만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어머니는 내게 줄 사탕을 몇 가지 고른 다음, 값을 치르셨다. 어머니는 매주 한두 번씩은 시내를 나가셨는데, 그 시절에는 아이 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늘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그 사탕 가게에 들르시는 것이 규칙처럼 되어 버렸고, 처음 들르셨던 날 이후부터는 먹고 싶은 것을 언제나 내가 고르게 하셨다.
그 무렵, 나는 돈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면, 그 사람은 또 으레 무슨 꾸러미나 봉지를 내주는 것을 보고는 '아하, 물건을 팔고 사는 건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위그든 씨 가게까지 두 구간이나 되는 먼 거리를 나 혼자 한번 가 보기로 한 것이다.
상당히 애를 쓴 끝에 간신히 그 가게를 찾아 커다란 문을 열었을 때 귀에 들려오던 그 방울 소리를 지금도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천천히 진열대 앞으로 걸어갔다.
이쪽엔 박하 향기가 나는 납작한 박하사탕이 있었다. 그리고 저 쪽엔 말갛게 설탕을 입힌 말랑말랑하고 커다란 검드롭스, 쟁반에는 조그만 초콜릿 알사탕, 그 뒤에 있는 상자에는 입에 넣으면 흐뭇하게 뺨이 불룩해지는 굵직굵직한 눈깔사탕이 있었다.
단단하고 반들반들하게 짙은 암갈색 설탕 옷을 입힌 땅콩을 위그든 씨는 조그마한 주걱으로 떠서 팔았는데, 두 주걱에 1센트였다. 물론 감초 과자도 있었다. 그것은, 베어 문 채로 입안에서 녹여 먹으면, 꽤 오래 우물거리며 먹을 수 있었다.
이만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내가 이것저것 골라 내놓자, 위그든 씨는 나에게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너, 이만큼 살 돈은 가지고 왔니?"
"네."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먹을 내밀어, 위그든 씨의 손바닥에 반짝이는 은박지에 정성스럽게 싼 여섯 개의 버찌씨를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위그든 씨는 잠시 자기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더니, 다시 한동안 내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것이었다.
"모자라나요?"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나서 대답했다.
"돈이 좀 남는 것 같아. 거슬러 주어야겠는데……."
그는 구식 금고 쪽으로 걸어가더니, '철컹' 소리가 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는 계산대로 돌아와서 몸을 굽혀, 앞으로 내민 내 손바닥에 2센트를 떨어뜨려 주었다.
내가 혼자 거기까지 갔다는 사실을 아신 어머니는 나를 꾸중하셨다. 그러나 돈의 출처는 물어 보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다만, 어머니의 허락 없이 다시는 거기에 가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을 뿐이었다.
나는 확실히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버찌씨를 쓴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허락이 있었을 때에는 분명히 1, 2센트씩 어머니가 돈을 주셨던 것 같다.
그 당시로서는 그 모든 사건이 내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바쁜 성장(成長) 과정을 지나는 동안,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예닐곱 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동부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나는 성장하여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외국산 열대어를 길러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는 양어장이 아직 초창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물고기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직접 수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쌍에 5달러 이하짜리는 없을 정도였다.
어느 화창한 오후, 남자 아이 하나가 제 누이동생과 함께 가게에 들어 왔다. 남자 아이는 예닐곱 살 정도밖에는 안 되어 보였다.
나는 바쁘게 어항을 닦고 있었다. 두 아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수정처럼 맑은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아름다운 열대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남자 아이가 소리쳤다.
"야아! 우리도 저거 살 수 있죠?"
"그럼."
나는 대답했다.
"돈만 있다면야."
"네, 돈은 많아요." 하고 남자 아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하는 품이 어딘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얼마 동안 물고기들을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몇 가지 종류를 가리키며 한 쌍씩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이 고른 것을 그물로 건져 휴대 용기에 담은 후, 들고 가기 좋도록 비닐봉지에 넣어 남자 아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조심해서 들고 가야 한다."
"네."
남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누이동생을 돌아보고 말했다.
"네가 돈을 내."
나는 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꼭 쥐어진 여자 아이의 주먹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태를 금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올 말까지도. 소녀는 쥐었던 주먹을 펴고, 내 손바닥에 5센트짜리 백동화 두 개와 10센트짜리 은화 한 개를 쏟아 놓았다.
그 순간, 나는 먼 옛날, 위그든 씨가 내게 물려준 유산(遺産)이 내 마음 속에서 작용하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비로소, 지난날 내가 그 노인에게 안겨 준 어려움이 어떤 것이었나를 알 수 있었고, 그가 얼마나 멋지게 그것을 해결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손에 들어온 그 동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 조그만 사탕 가게에 다시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옛날, 위그든 씨가 그랬던 것처럼, 두 어린이의 순진함과, 그 순진함을 보전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날의 추억이 너무나도 가슴에 넘쳐, 나는 목이 메었다. 소녀는 기대에 찬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모자라나요?"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돈이 좀 남는 걸."
나는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말했다.
"거슬러 줄 게 있다."
나는 금고 서랍을 뒤져, 소녀가 내민 손바닥 위에 2센트를 떨어뜨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들의 보물을 소중하게 들고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두 어린이의 모습을 문간에서 지켜보고 서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아내는 어항 속의 물풀들을 다시 가다듬어 놓느라고, 걸상 위에 올라서서 두 팔을 팔꿈치까지 물속에 담그고 있었다.
"대관절 무슨 까닭인지 말씀 좀 해 보세요."
아내가 나를 보고 말했다.
"물고기를 몇 마리나 주었는지 아시기나 해요?"
"한 삼십 달러어치는 주었지."
나는 아직도 목이 멘 채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내가 위그든 씨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아내의 두 눈은 젖어 있었다. 아내는 걸상에서 내려와 나의 뺨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아직도 그 검드롭스의 냄새가 생각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어항을 닦으면서,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위그든 씨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초여름-
일요일이라서 오늘은 글을 올리거나 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예전에 동서가 미국으로 재이민 가면서 살림살이와 책들, 그리고 조카들의 책까지 남겨 주고 갔었다.
새벽에, 이미 익혀진 습관 때문에 읽을 만한 걸 찾다가
본국 중학 국어 1-1에 실린 위의 글을
새롭고 감동적인 느낌으로 읽게 되어 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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